진산 파동

珍山波動

1 개요

제8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신민당 당수 유진산의 행동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사건이다.

2 전개

2.1 시작

신민당 당수 유진산제8대 국회의원 선거 후보 등록 마감일인 1971년 5월 6일 갑자기 자신의 지역구인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갑구 출마를 포기하고 전국구 1번 후보를 등록함으로써 벌어진 일이다. 이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밖에 있던 일부 신민당 청년 당원들은 극도로 흥분하여 거센 항의를 계속하였다.

일부 청년당원들은 계속해서 유진산에게 정계은퇴, 당 총재직 사퇴, 전국구 후보 사퇴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했으며, 유진산의 자택 앞에서 유진산계열 신민당 청년당원들과 패싸움을 벌였다. 급기야는 1971년 5월 7일 관훈동 신민당 중앙당사에서 벽에 걸려 있던 유진산의 사진을 떼고 불태우는 난동으로까지 이어졌다.

이는 영등포 갑구에 박정희 대통령의 조카사위 장덕진이 후보로 출마하는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해당 선거구에 신민당 후보로 출마한 박정훈은 낙선하였다.

2.2 수습안

당시 신민당 비주류인 김대중은 6인 수권위원회의 구성원 중 고흥문, 홍익표, 정일형 등 3인과 협의해 유진산을 당에서 제명하고 총선 기간 동안 자신이 당수 권한대행을 맡는 수습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운영위원회 소집에 앞서 친 진산 계열인 김영삼, 이철승, 이중재, 김재광, 김형일 등은 비공식적인 의견교환을 통해 김대중의 당수권한대행직 장악을 저지키로 하고 당헌에 따라 운영위원회 부의장에게 당수 권한대행을 맡기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결국 신민당은 김영삼, 이철승 등을 중심으로 한 주류와 김대중 중심의 비주류로 갈려 유진산의 은퇴여부와 당수권한대행 문제 등을 놓고 정면으로 맞서게 되었다. 일시 행방을 감추었던 유진산은 1971년 5월 8일 성명을 통해 "나는 이미 당수직 사퇴 뿐만 아니라 정계은퇴도 각오가 되어 있지만, 당수에게 선거구를 팔아 먹었다는 누명을 씌워 당권을 가로채겠다는 행위를 먼저 규명하고 제재를 가해야 한다."라고 선엄하면서 김대중의 당수권한대행 취임 기도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에 김대중은 책임을 지겠다고 한 당수가 이제와서 태도를 바꾸어 당의 혼란이 마치 당권투쟁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당을 사지에 몰아넣는 것으로서 이는 국민을 우롱하는 것"이라고 비난하면서 "당 운영위원회의 권한을 위임받고 있는 6인위의 결정은 합법적인 결정"이라고 맞섰다.

결국 사태는 제3자에 의한 중재를 통한 수습을 하게 되었다. 이에 김영삼, 이철승, 김재광, 김형일, 이중재, 박영록 등 당 중진들은 다음과 같은 중재안을 제시했다.

  • 유진산의 당수직 사퇴
  • 당수직에 대한 다음 승계권자인 운영위원회 부의장 양일동, 고흥문, 홍익표의 사퇴
  • 총선기간 중 김홍일 전당대회의장을 당수권한대행으로 한다.

김대중은 이 중재안에 대해 처음에는 거부의사를 나타냈으나, 더 이상의 별다른 수습안이 없는 상태에서 결국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신민당은 5월 10일 운영위원회를 열고 유진산과 양일동 등 운영위원회 부의장들의 사퇴서를 수리하고 김홍일을 신민당 당수 권한대행으로 임명한다. 당수 권한대행을 맡은 김홍일은 5월 11일 총선기간 동안 모든 당무와 선거대책을 수립할 선거대책소위원으로 자신과 김대중, 윤제술, 김형일, 김재광, 이충환, 윤길중 등 7명을 위촉하고 선거대책본부 차장에 김의택, 정헌주를 임명해 본격적인 선거체제를 갖춤으로서 4일간에 걸친 '진산파동'을 수습한다.

2.3 결과

그러나 진산파동으로 인해 신민당의 기능이 한때 마비상태에 이르러 신민당 중앙당은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유세 계획 조차 세우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5월 11일부터 김홍일이 전국 지원유세에 나섰다. 그리고 김대중, 김영삼, 이철승 등 당 수뇌부를 각 지역에 파견해 바람을 일으키려 하였다.

한편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진산 파동, 제8대 국회의원 선거 등을 거치면서 신민당의 파벌은 또다시 변화하였다. 유진산을 중심으로 뭉쳤던 범주류는 다시 김영삼계, 고흥문계로 갈라졌다. 또한 이철승과 정해영이 독자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비주류는 대통령 후보를 차지함으로써 당내 영향력이 커진 김대중 중심의 단일세력으로 파벌이 재편되었다. 이들 비주류는 1974년 정일형에 의해 화요회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