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산 사건

이 문서는 종교에 관한 내용을 다룹니다.

이 문서가 다루는 종교, 종교인에 대한 내용은 읽는 이에 따라 민감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잘못된 요소가 있을 수 있으므로 이 문서에 쓰여진 내용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마십시오. 편집할 시에는 문화상대주의를 기반으로 객관적으로 작성하고, 논란이 될 수 있는 내용은 신중히 검토한 뒤 작성하십시오. 또한 문서의 사실에 관한 내용을 수정할 때에는 신뢰가 가능한 출처를 기입하시거나, 토론 과정을 거치신 뒤 하시고, 다른 종교를 비방하거나 비하하는 내용을 넣지 마십시오.

이 틀을 적용할 경우, 문서 최하단에 혹은 분류:종교의 하위 분류를 함께 달아 주시기 바랍니다.


%EC%9C%A4%EC%A7%80%EC%B6%A9%EB%B0%94%EC%98%A4%EB%A1%9C_2.jpg

1 개요

1791년(정조 15년)에 윤지충(尹持忠) 바오로와 권상연(權尙然) 야고보 등이 제사를 거부하고 부모의 신주를 불태운 사건.

진산 사건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만화는 다음과 같다.[1]
1편 : [1]
2편 : [2]
3편 : [3]
4편 : [4]
5편 : [5]
6편 : [6]

2 진산 사건의 배경

16~17세기 동양에 대한 예수회의 적응주의 선교 방식은 가톨릭의 교세 확장에는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으나, 일각에선 이들의 선교 방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프란치스코회도미니코회 등은 조상의 제사를 용인하는 예수회의 방식을 우상숭배라고 비난했고, 예수회는 동양의 제사란 우상숭배가 아닌 하나의 문화적 관습이라고 옹호했다.

교황청은 당초 예수회의 입장을 지지하다가 도미니코회의 주장을 용인하는 등 오락가락하다 클레멘스 11세 때 조상 제사를 금지하였다.[2] 그 결과 가톨릭은 중국에서는 박해를 받는 등 고난을 겪게 된다. 이는 성리학적 질서가 지배하던 조선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제사가 금지되었음을 안 초기 천주교 신자들 중 양반 계층이 빠르게 이탈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3 진산 사건의 전개

현재의 충청남도 금산 지방은 과거 전라도의 진산(珍山)이라 불리었다. 1791년 진산에 살던 윤지충(尹持忠), 권상연(權尙然)은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웠다[3]. 당시 조선은 성리학적 질서가 다스리던 나라였고 따라서 둘의 행동은 조선의 이념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었다. 이를 고발당한 윤지충은 도망쳤으나 자수하였고, 진산 군수 신사원(申史源)은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해 공주감영으로 압송했다. 전라감사 정민시(鄭民始)의 심문 끝에 위패를 불태웠음을 자백한 둘은 정조의 명에 따라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전주풍남문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는데, 현재 그 자리엔 천주교 전주교구 전동성당이 들어서 있다.

이를 조선 최초의 박해인 신해박해(辛亥迫害)라고 일컫는다.[4]

4 진산 사건의 결과 & 후폭풍

요약하자면 조선 사회에 대한 충격과 공포다 그지 깽깽이들아
천주교에 대한 조선의 박해의 시작.

조선은 성리학적 질서가 오랫동안 지배했던 국가였다. 당장 송시열의 의도야 어땠는지는 몰라도 그의 주장으로 사문난적이란 색안경이 씌워져 여러 유학자들이 사실상 이후의 조선 사회에서 매장된 것을 떠올려본다면 성리학적 질서를 어긴 이들의 행동은 조선 사회에 엄청난 반향을 몰고 왔음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진산 사건을 계기로 조선 사회는 천주교인들을 무군무부(無君無父), 즉 군주도 부모도 섬기지 않는 도리를 모르는 이들로 치부했다.[5] 정하상 바오로는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집필해 무군무부에 대한 해명 등을 시도하며 천주교가 도리를 모르는 종교가 아니라는 인유론적 관점을 보여준다.[6]

5 현대의 평가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참고. 진산 사건에 대한 연구는 대체로 천주교에서 진행되었다. 그 결과 진산 사건은 대체로 조선 사회에 대항하여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자 한 두 천주교인의 의거로 평가받고 있다. 그 결과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광화문 광장에서 이 둘을 포함한 순교자들이 복자의 반열에 올랐다.
  1. 단, 천주교의 입장에서 서술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며 읽자.
  2. 정작 비오 12세가톨릭은 다시 조상 제사를 용인한다. 다만 '효'의 실천이라는 점에서 용인한 것이지 조상의 혼이 음식을 먹는다 등의 전통적인 관점은 당연히 배제되었다.
  3. 이를 폐제분주(廢祭焚主)라고 한다.
  4. 조선 최초의 희생자는 명례방 공동체의 김범우 토마스이다. 다만 그는 국가 권력에 의해 순교당한 것이 아닌 귀양을 가서 사망한 것이기에 박해나 순교라고 보기 애매한 측면이 있다. 순교라면 순교라고 할 수 있겠지만, 병사한 것을 순교로 볼 수 있는지는 불확실하다는 평. 순교는 자의든 타의든 종교를 지키고자 죽는 경우를 일컫는데 김범우는 신앙을 지키고자 고문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병사하였다. 물론 병사의 인과관계를 따져보면 신앙을 지키려하다 고문을 당한 것이 이유지만, 여하튼 순교라고 확정내리기엔 애매하다. 그에 비해 진산 사건과 윤지충, 권상연에 대한 처형으로 요약되는 신해박해는 국가 권력에 대한 개입이 비교적 뚜렷해 조선 최초의 박해라고 부를 수 있다.
  5. 그리고 황사영 백서 사건을 계기로 또 한번 정당성을 갖게 된다.
  6. 천주교의 도입 이후 천주교의 입장은 보유론(補儒論)과 인유론이라는 측면으로 설명할 수 있다. 보유론이란 유학을 중심으로 그 미흡한 점을 천주교로 보충하는 것이다. 반면 인유론이란 천주교를 유학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측면이다. 즉 중심을 무엇으로 두고 있느냐의 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