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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칭 | 철인왕후(哲仁王后) | |
시호 | 명순휘성정원수령경헌장목철인왕후 (明純徽聖正元粹寧敬獻莊穆哲仁王后) | |
출생지 | 순화방 사저 | |
사망지 | 창경궁 양화당 | |
본관 | 안동(安東) | |
배우자 | 철종(哲宗) | |
아버지 | 영은부원군 김문근 | |
어머니 | 흥양부부인 민씨 | |
생몰 기간 | 음력 | 1837년 3월 23일 ~ 1878년 5월 12일 |
양력 | 1837년 4월 27일 ~ 1878년 6월 12일(향년 42세, 만 41세) | |
재위 기간 | 1851년 ~ 1863년(왕비) 1863년 ~ 1878년(대비) |
1 소개
조선 철종의 정비. 철인왕후(哲仁王后) 김씨 혹은 명순대비(明純大妃).
안동 김씨 세도정권의 핵심 인물이었던 영은부원군 김문근의 딸로 순조의 비였던 순원왕후 김씨와 근친인 철인왕후는, 1851년 15살의 나이로 간택되어 철종과 가례를 올렸다. 순원왕후의 뒤를 이어 다시 한 번 안동 김씨에서 배출한 왕비로 안동 김씨의 세도가 이어지게 하는데 조선이 망국으로 가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
하지만 단지 가문의 이해를 위해 간택되었을 뿐, 정작 철인왕후 본인은 단 한번도 정사에 나서거나 가문을 두둔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말수가 적고 기분의 좋고 나쁨을 얼굴에 잘 드러내지 않았다고 하며 대왕대비 신정왕후와 왕대비 효정왕후를 극진히 모셔 시월드 입성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철종과의 사이에서 왕자를 하나 낳았지만 어릴 때 사망했다고 하며, 1878년 42세로 창경궁 양화당에서 사망했다.
조선 왕실의 마지막 '대비'이다. 철인왕후 다음의 왕비들은 국왕보다 일찍 승하하거나(명성황후, 순명효황후), 마지막 국왕의 왕비(순정효황후)였기에 대비가 될 수 없었다.
2 왕대비 아닌 '대비'?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원칙적으로 선왕의 정실부인인 대비(大妃)의 정식 명칭은 왕대비(王大妃)다. 하지만 보통 줄여서 대비라고 부르는 것. 따라서 인수대비, 소성대비(인목왕후)[1] 등의 정식 존호는 인수왕대비, 소성왕대비인 것이다.
그런데 조선 말기로 오면서 순조, 헌종이 젊은 나이에 승하하고, 헌종이 아버지인 효명세자를 왕으로 추존하면서 왕실에 여성 웃어른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그래서 철종 대에는 선선선대 왕비(순조비 순원왕후), 선선대 왕비(추존 문조비 신정왕후), 선대 왕비(헌종비 효정왕후)가 모두 생존해 있는 상황이 발생하였는데, 이렇게 되자 대왕대비 위 혹은 대비(왕대비) 아래에 새로운 단계를 만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대비(왕대비) 아래에 '대비'라는 단계를 새로 만들었고, 선대 왕비들의 서열이 '대왕대비'-'왕대비'의 2단계에서 '대왕대비'-'왕대비'-'대비'의 3단계로 재편된 것이다. 그래서 효정왕후는 정희왕후, 소혜왕후, 문정왕후, 인원왕후, 정순왕후 등 이전 왕비들이 대비(왕대비)로 존봉된 것과는 다르게 '대비'로 존봉되었다.
그런데 철종 또한 젊은 나이에 승하하면서 철인왕후도 왕대비가 아닌 '대비'의 칭호를 받게 되었다. 고종이 즉위할 당시 불행하게도 선선선대 왕비 효명세자비 신정왕후 조씨와 선선대 왕비인 헌종비 효정왕후 홍씨가 모두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종보다 일찍 사망해 왕대비, 대왕대비가 되지 못하고 사망하여 최종적으로 대비로 남게 되었다.[2]
조선 초 성종 연간에 세조비 자성대왕대비 윤씨와 성종의 모후인 인수왕대비, 예종비 인혜왕대비 이렇게 3명의 대비가 함께 생존해 있었던 시기도 있었지만 인수대비와 인혜대비는 동서지간이고 게다가 인수대비의 남편이자 성종의 생부인 도원군은 세자시절 요절했으므로 공식적으로 즉위한 적이 없어 특별히 명칭이 문제가 되진 않았다. 다만 성종이 즉위할 때 정희왕후가 성종의 정통성과 왕실의 서열을 고려하여 인수대비를 인혜대비보다 위에 두는 것으로 결정하여 자성대왕대비-인수왕대비-인혜왕대비 의 서열이 확정되었다.
3 대중매체에서
남편인 철종이 사극에 잘 나오지 않으며, 사극에 나와도 주연급이 아닌 세도정치 시기 고통받는 민초들이 주인공일 때 잠깐 존재가 비춰지거나, 흥선대원군과 고종을 주인공으로 한 사극에서 극 초반에 주지육림에 빠지다 골골대며 사망하는 역할로 나온다. 때문에 철인왕후도 사극에서 그닥 많이 나오는 편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만한 작품은 KBS에서 방영한 유명한 사극인 명성황후에서 탤런트 유혜영[3]이 철인왕후를 연기했으며 항상 시할머니, 시어머니와 쪼르륵 앉아 맞장구 치는 정도의 비중으로 나왔으며 역사의 비중대로 조용하고 유순한 성격으로 다른 등장인물들과 마찰을 빚지는 않는 것으로 그려졌다.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던 중 병수발을 들던 명성황후에게 '선왕(철종)은 여색을 가까이 해 몸을 버리고 정사를 그르쳤다'며 '주상(고종)이 그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경계하라'고 조언한다.- ↑ 흔히들 인목대비로 알고있는데 정식 존호는 소성왕대비이고 인목의 존호는 왕후에 붙은 것이다. 그러니까 인목왕후, 소성왕대비가 맞는 호칭
- ↑ 신정왕후 조씨는 83세까지 생존해 불과 명성황후보다 불과 5년 전에 사망하여 조선 역사상 제일 장수한 왕비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효정왕후도 73세의 나이로 1903년에 사망하여 조선의 망국테크를 거의 다 보고 사망하였다. 철인왕후가 일찍 사망한 탓도 있지만 시할머니와 시어머니가 유독 장수하여 최소한 12년은 더 살아야 시할머니의 죽음(...)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 ↑ 사기 혐의로 고통받고 있는 탤런트 나한일이 남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