純貞孝皇后 尹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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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 | 헌의자인순정효황후(獻儀慈仁純貞孝皇后)[1] | |
생몰년도 | 1894년 9월 19일 ~ 1966년 2월 3일(73세) | |
출생지 | 조선 한성 |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 창덕궁 | |
재위기간 | 대한제국 황후 | 1907년 7월 20일 ~ 1910년 8월 29일(3년 40일) |
식민지 조선 이왕비 | 1910년 8월 29일 ~ 1926년 4월 25일(15년 244일) | |
식민지 조선 이왕대비 | 1926년 4월 25일 ~ 1945년 8월 15일(19년 117일) | |
장례식 | 1966년 2월 13일 | |
종교 | 무종교 → 불교(법명 : 대지월) |
1 소개
입궁 초의 모습 |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965년의 모습 |
조선 순종의 계후(繼后)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 그리고 한국 역사의 마지막 왕비. 진짜 The Last Empress다. 그것도 생존한 상태에서 황후가 된, 조선왕실로서는 처음이자 유일한 인물. 생일인 9월 19일은 대한제국 때 곤원절(坤元節)이라는 이름의 국가경축일이었다. 1908년(융희 2) 7월 15일 궁내부대신 민병석이 황후탄신경절을 곤원절(坤元節)로 개칭하자고 상소해 이를 윤허하였으며, 음력 8월 20일을 양력으로 환산해 9월 19일로 정했다.
2 호칭 관련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올린 사시(私諡)이지만 종묘에 부묘된 정식 시호는 헌의자인순정효황후(獻儀慈仁純貞孝皇后)로, 뒷부분의 다섯 글자와 성씨를 붙인 '순정효황후 윤씨'가 그녀의 공식 명칭이다. 해평 윤씨. 윤황후, 윤대비로도 불리는데 현대에 들어선 윤비(尹妃)라고만 통칭되기도 했다. 그러나 1983년에 정부가 조선의 왕비를 호칭할 때 '성+비'로 된 명칭을 공식석상이나 역사 교과서와 같은 공식문서에 적지 않도록 규정한 이후로 그녀를 윤비라고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명성황후를 명성태황후로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비해, 순정황후(純貞皇后)보다는 순정효황후로 불리고 있다.
참고로 '성+비'가 일본이 만든 통칭인지 아닌지에 대해 논란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명성황후 민씨 항목을 참고로 할 것.
3 순종과의 혼인
순종의 첫 번째 아내였던 황태자비 민씨가 1904년에 세상을 떠나자,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 윤택영(尹澤榮)과 경흥부부인(慶興府夫人) 기계 유씨(杞溪 兪氏)[2]의 장녀인 순정효황후가 다음 황태자비로 간택되었다. 그래서 1906년 12월에 황태자였던 순종과 가례를 올린다[3] [4]. 윤택영은 사위보다 겨우 2살 위였고, 세간에서는 아버지 욕심에 어린 생과부를 만든다며 황태자비를 동정했다고 한다. 이때 순종은 33세, 순정효황후는 남편보다 20살이나 어린 13세. 그나마 시동생 부부나 시누이가 시아버지 고종황제의 늦둥이다 보니 그들보단 나이가 많았다. 영친왕은 순종보다 23살, 덕혜옹주는 무려 38살이나 아래였다. 따라서 이들은 순종보다 20살 어린 순정효황후를 손윗사람으로 대하기 쉬웠을 것이다. 다만 또 다른 시동생인 의친왕보다는 나이가 한참 어렸다. 이쪽은 남편보다 겨우 3살 아래일 뿐이었다. 그러니 순정효황후보다 17살 위. 이렇게 나이 차이가 많이 졌지만 부부 사이는 원만한 편이었다. (그러나 부부 사이에 아이는 태어나지 않았다)
고종이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한 것으로 인해 일제의 강압으로 1907년 순종에게 양위하자[5] 순정효황후도 황태자비에서 황후로 책봉되었다. 시어머니인 명성황후 민씨와 순헌황귀비 엄씨가 무속을 깊이 신봉해 궁궐에서 굿판이 자주 벌어졌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순정효황후는 불경을 독송하며 무속을 멀리했다. 이 때문에 어린 황후의 현숙함과 부덕이 높게 평가되었다.
하지만 황후가 되고 4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1910년에 경술국치가 일어났다. 어전회의에서 친일파 대신들이 한일합방조약에 옥새를 찍으라고 순종황제에게 강요하자, 병풍 뒤에서 회의를 엿듣던 순정효황후가 옥새를 가져다가 치맛자락 속에 감추고 내주지 않았다. 친일파 대신들도 차마 황후의 치마를 들출 수는 없는지라 주저했는데 그러자 윤택영의 형이자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인 친일파 윤덕영[6][7]에게 결국 옥새를 뺏기고 말았다고 한다.
4 순종 사후
이후 순종이 황제에서 이왕(李王)으로 격하되자 순정효황후도 이왕비(李王妃)로 격하되었다. 순정효황후는 순종과 함께 창덕궁 대조전에서 지내다가 1926년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상을 당한 여인은 단청 입힌 집에 머무를 수 없다'며 낙선재로 거처를 옮겼다.
순종 사후 이복동생인 영친왕이 명목상 이왕 자리를 잇게 되어 순정효황후는 이왕대비(李王大妃) 또는 창덕궁 대비 전하로 불리지만 크게 주목할 만한 일은 아니다. 애초에 이왕이라는 작위가 허울뿐인 자리였으니까...
낙선재로 옮겨간 순정효황후와 상궁 나인들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한글 소설들을 쌓아두고 읽곤 했다. 순정효황후 사후에 이 책들은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이관되어 '낙선재본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소장된다. 하나둘씩 모아서 보기 시작했다는데 분량이 89종 2,000여책에 달한다.
5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난 후 순정효황후는 정부 수립 기념으로 수립 기념식에 참석하고자 도쿄에서 날아온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게 청옥으로 된 화병 하나를 선물해 주었다.[8]
한편 새로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낙선재에서 살고 있던 순정효황후를 비롯, 구황실[9] 사람들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순정효황후는 한강철교, 한강인도교, 광진교 폭파로 미처 피난 가지 못한 서울 시민들과 함께 인민군 치하의 서울에 남겨지게 된다.
인터넷에 순정효황후의 이야기 중 하나로 떠도는 이야기 중 창덕궁 낙선재에 군홧발로 난입한 인민군들이 "윤비가 누구야!"라고 행패를 부리자 상궁들은 와들와들 떨었지만 순정효황후는 "이곳은 나라의 어머니가 사는 곳이다! 썩 물러가거라!"라고 호통을 쳐 그 기세에 주눅든 인민군들이 물러났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실제로는 1966년 2월 4일, 12일에 발간된 경향신문의 기사에 나온 순정효황후와 함께 하셨던 김명길 상궁의 증언과 1966년 2월 3일자 한국일보 <윤비의 생애> 기사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6.25 개전 3일 뒤에 최후의 서울 방어 전투인 미아리 전투에서 국군이 패배하여 서울이 함락되던 날, 미아리를 거쳐 내려온 인민군이 다발총을 앞세우고 창덕궁 낙선재 뜰 앞까지 와서 내전으로 들이닥쳤을 때 창덕궁 뒷문으로 빠진 후 걸어서 운현궁으로 피신(이어)하였고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한 동안에는 그 당시 관리인이었던 김택수 씨가 인민군에 가담하여 부역까지 해가면서 보호한 덕택에 극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1950년 9월 28일에 서울이 수복되어 다시 창덕궁 낙선재로 돌아왔으나 결국 1951년 1.4 후퇴 때 비행기편으로[10] 부산에 위치한 경상남도지사의 사택으로 피난갔으나[11] 그곳에 오래 누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동래포교당[12]이란 사찰로 거처를 옮겼다. 그 후 그곳의 승려와 불교도들의 도움을 받으며 지내다가1953년 7월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정부가 서울로 환도할 때까지 한 시민의 추천으로 구포의 한 집에서 서민과 같은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휴전협정이 체결되어 정부가 서울로 환도하면서 순정효황후는 다시 창덕궁 낙선재로 돌아가려 했으나 이승만은 '창덕궁은 국유재산' 이라는 이유로 거부하면서 정릉에 위치한 인수재(仁修齋)[13]에서 지내게 되었다.
정릉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닉슨 당시 미국 부통령이 직접 정릉의 사찰(경국사)도 볼 겸 인수재로 찾아와서 20분 동안 순정효황후와 회견(안부를 묻는 정도[14])한 일도 있었고[15] 1955년에는 좀도둑이 들어 현금 4천환과 금반지 3개와 전화기를 절도해간 사건이 있었다.[16]
1956년 12월 22일자 경향신문 1면에 나온 기사에 의하면 1945년 11월부터 구황실의 재산을 관리하던 구황실재산사무총국[17]에서 국회 예결위에 심의를 받으려고 가지고 나온 자료를 보면 부족한 돈이 있어도 국고를 지원받지 않고[18] 창경원, 덕수궁 등에서 걷은 관람료(약 3억환)를 황족의 후예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데 이때 순정효황후에게는 생활비로 매월 34만환을 지급하였다고 한다.[19]
참고로 나중에 1958년 7월 31일자 경향신문 1면에 나온 30일 오전에 열린 국회 예결위에서 나온 구황실재산특별회계에 대해 정낙훈(자유당), 서범석(민주당), 민관식(민주당), 문종두(무소속) 의원이 구황실재산사무총국의 윤우경 사무국장에게 '순정효황후가 낙선재로 되돌아가겠다고 요구하였는데 어떻게 하였는가' 하고 질문한 것에 대한 답변을 따르자면 생활비로 매월 46만환을 지급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하지만 1959년 11월 24일자 동아일보 1면에 나온 기사에 따르자면 지금까지 구황실재산사무총국의 윤우경 사무국장이 순정효황후의 말들을 날조하는 등의 온갖 비리를 저지른 사실이 적발되어 23일에 열렸던 국회 재정경제위원회에선 구황실재산관리국의 예산안 심의가 보류되고 국회의원들은 사무국장을 고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등 큰 소동이 있었다. 이후 1959년 12월 7일자 동아일보 1면의 기사에 따르면 보류된 심의가 12월 6일에 국회 재정경제위원회에서 계속되었고 여기에선 윤우경 사무국장이 법대로 재산관리위원회를 구성하지 않고 대통령의 분부에 따라 독단적으로 처리했고 순정효황후를 정릉에 모신 것이 순정효황후의 뜻도 아닌데 순정효황후가 한 것이라고 말한 것은 위증이 아니냐는 주장이 나왔다. 또 여기에서 나온 이야기로는 닉슨 부통령 방문 당시 구황실재산사무총국에서 순정효황후가 계시던 인수재에 고급 물건들을 잠시 들여놨다가 방문이 끝나고 다시 가져갔다는 말도 나왔다.
낙선재로 환궁하는 황후. 왼쪽부터 오재경 국장, 순정효황후, 유경운 상궁, 박창복 상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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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재로 들어오는 윤비, 순정효황후와 상궁들[20]
이후 순정효황후는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에서야 구황실재산사무총국의 사무국장으로 새로 취임한 오재경 국장[21]에 의해 낙선재를 전면 수리한 끝에 1960년 5월 15일에 내외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 세례와 함께 겨우 낙선재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원래 자신의 사진을 절대로 찍지 못하게 한 순정효황후는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는 때만큼은 할 수 없이 포즈를 취하였다고 한다.[22] 이후 인수재에서의 생활과 별반 다를 것 없이 새벽 5시에 일어나 불경을 읽으며 때때로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보며 생활할 것이라고 하였다.[23]
나중에 박정희 정권의 도움으로 일본에서 수십 년 만에 귀국한 동서 이방자 여사(1962년 6월 14일~), 시누이 덕혜옹주(1962년 1월 27일~)와 함께 낙선재에서 생활했다.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한 탓에 항상 영친왕(1963년 11월 22일~)을 아끼며 하루 빨리 환국하기만을 바랐지만 정작 영친왕은 귀국하자마자 곧바로 병원에 입원해 만날 수 없었고, 결국 황후는 영친왕이 입원한 병원과 지척인 창덕궁에 머물면서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상면하지 못했다.
이석의 말에 따르면 가수가 되었던 이석을 보고 "나라가 망하니 네가 광대로 전락했구나"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대한제국의 전통적인 신분제와 예법에 젖은, 그것도 황실의 큰어른이었으니 연예인이 된 조카의 모습을 좋게 보았을 리가 없다. 당장 상기된 말년의 사진만 봐도 격식과 예법으로 노년에도 꼿꼿한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막상 이석이 TV에 나오는 것을 보았을 땐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 부른다"며 좋아했다고 한다.
또한 TV쇼 프로그램에서 트위스트 김씨가 무용수와 함께 춤을 추는 모습이 나오자 상궁들이 어찌 저리 망측할 수 있냐며 눈을 가렸는데 그 모습을 본 순정효황후가 ""시대가 변하면 사람이 시대에 맞춰가야 하는 것"" 이라며 시대 변화에 대한 열린 마음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6 말년
조선시대에 태어나자마자 동학농민운동을 겪고 황후가 되기 직전에 을사조약이 맺어져 외교권이 박탈당한 대한제국의 순종의 황후로 지내다가 경술국치로 인해 거의 모든 것을 잃은 채로 3.1운동과 순종의 장례식 때 일어난 6.10 만세운동을 겪으며 일제강점기를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이하고 미군정기를 거쳐 1948년 한반도 최초의 보통선거인 5.10 제헌국회 총선 후 한반도 최초의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인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이어 6.25 전쟁을 거쳐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으로 인한 제3공화국 수립에 이르러 한일기본조약 체결, 베트남 전쟁에 따른 월남 파병 등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겪었어도 대한제국 마지막 황후로서의 기품을 조금도 잃지 않았으며 공부에도 적극적이어서 일본어와 영어, 불경 공부에도 매진했다. 만년에는 불교에 귀의해 대지월(大智月)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1966년 2월 13일, 창덕궁을 떠나는 황후의 장례 행렬 | 유릉 전경 |
1966년 2월 3일, 창덕궁 낙선재의 석복헌에서 향년 73세를 일기로 황후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위해 소집된 윤황후장의준비위원회는 2월 6일 종묘와 유릉에 윤황후 승하 고유제를 지냈고, 2월 7일 시호를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로 정했다. 2월 8일에는 성복제와 입관이, 2월 9일에는 조제와 고묘가 있었다. 2월 13일 오전 10시에 창덕궁에서 발인한 뒤 금곡에 도착한 황후의 재궁은 오후 1시에 하관되어 남편이 잠든 유릉(裕陵)에 합장되었다.[24] 신위는 1968년 10월 23일 부태묘제를 거행한 후 종묘 정전 제19실에 배향되었다. 기사
7 기타
노년의 순정효황후가 황원삼을 입고 찍은 사진이 있는데, 사진 속 황원삼은 현재 세종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전(傳) 황후 황원삼이라는 이름으로 중요민속자료 제49호에 지정되었다. 이외에도 세종대학교 박물관에는 중요민속자료 제54호인 황후 적의가 소장되어 있다.
TV 쇼 진품명품 324회(2001년 7월 15일 방송)에 순정효황후가 조선왕조 마지막 주방상궁 한희순에게 물려준 삼단 화초장이 나왔다. 2001년 당시 감정가는 3,500만원이었으나 800회 특집(2011년 3월 20일 방송)을 맞아 다시 감정한 결과 예술성과 희소성을 더 높게 인정받아 1억 5,000만원으로 평가받았다.
견부호자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순정효황후의 아버지인 윤택영은 일본으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은 친일파이고,[25] 순정효황후의 오라버니인 윤홍섭은 독립운동가이다. 순정효황후로부터 자금을 받아 신익희에게 전달해 임시정부 설립에 자금을 보태거나 3.1 운동 준비 중 윤용구[26]를 설득하려다 일본에 발각되어 형을 살기도 했다. 이후 참의원 의원직으로 일본이 윤홍섭을 회유하였으나 거절하였다.
순정효황후가 승하한 직후인 1966년 마지막 황후 윤비라는 제목의 영화가 개봉했다. 김지미가 순정효황후 역을 맡아 10대 소녀부터 70대 노인까지를 모두 커버했다. 영화 후반부에 순정효황후의 실제 장례 행렬 영상이 있다.- ↑ 국가에서 올린 시호가 아니고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올린 시호다.
- ↑ 16세에 윤택영과 혼인해 2남(윤홍섭, 윤의섭) 2녀(순정효황후, 윤희섭)를 두었다. 1936년 9월 18일 61세를 일기로 사망.
- ↑ 윤택영이 황실과 사돈이 되려고 빚까지 내서 엄청난 뇌물을 뿌렸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리고 부원군이 되고나서도 딸을 황태자비로 만들기 위해 진 빚은 안 갚고, 오히려 부원군이란 지위를 이용해 더 막대한 빚을 지면서까지 사치와 유흥을 즐겼다. 이로 인해 '채무왕'이라 불리며 채권자들에게 들볶였다. 황실의 체면도 있고 해서 1907년 기준 윤택영이 진 채무의 절반에 해당하는 돈을 사돈 고종이 특별 지급했으나 이걸로도 부족해 여러 차례 사위 순종을 찾아가 자기 빚 좀 대신 갚아달라고 했고 심지어 일본 정부에게까지 빚을 대신 갚아달라고 요구했을 정도다. 그러다가 빚을 못 갚아 이자가 눈덩이처럼 커져서 도저히 감당 못 할 수준이 되자 중국 상하이로 야반도주했다. 그러나 빚을 잔뜩 지면서까지 호화롭게 살았던 몸이라 외국에서의 낯설고 초라한 생활에 적응 못 하고, 툭하면 딸과 사위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귀국할 수 있도록 빚문제를 빨리 해결해달라고 졸라댔다. 그러다가 순종이 승하하자 그래도 장인 겸 신하로서 문상은 해야 한다고 몰래 귀국했다. 그러나 윤택영이 문상을 위해 귀국할 걸 예상하고 궁궐 주위를 감시하던 빚쟁이들이 몰려들었고, 빚독촉을 견디지 못한 윤택영은 상이 끝나자마자 다시 중국으로 도망쳤다가 베이징에서 1935년 10월 23일에 객사했다.
- ↑ 참고로 윤택영은 일본 제국으로부터 1910년에 후작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앞에 서술된 채무관계로 인한 파산으로 인해 1928년 불명예 실작한다.
- ↑ 양위식에는 일제에 대한 무언의 항의표시로 양위하는 사람도 양위받는 사람도 모두 불참했다. 결국 일제는 내관 둘을 데려다 놓고 양위식을 진행하는 희대의 병크를 저지른다.
- ↑ 친일파이기도 했고 재물욕도 대단했다. 채무왕이라 불릴 정도로 빚을 많이 진 동생 윤택영이 자기 빚 대신 갚아달라고 했다가 형제가 몸싸움을 벌인 게 당시 신문과 잡지에 나기도 했고, 일제강점기 때에는 고종의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조선총독부 명의의 분참봉 첩지를 대량 위조해서 팔아먹어 한몫 단단히 챙긴 일로 큰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 ↑ 여담으로 당시의 잡지 "개벽"에 난 기사를 보면 윤덕영의 별명이 대갈장군이었다. 몸에 비해 머리가 지나치게 큰 편이라 그런 별명이 붙었다고.
- ↑ 출처 : 1948년 8월 16일자 동아일보 2면.
- ↑ 당시엔 구왕궁으로 불렀다.
- ↑ 참고로 미군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은 출처를 알 수 없는 정보이다.
- ↑ 당시 경상남도 도청이 부산시에 있었다. 당시의 도청은 현재 동아대학교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며 구 경남지사 사택은 현재의 임시수도기념관 자리에 있었다.
- ↑ 동래 범어사 소속의 불교 선원. 지금은 법륜사가 그 자리에 있다.
- ↑ 1966년 2월 12일자 경향신문에 의하면 백낙승 씨 댁으로 기재되어 있다.
- ↑ 출처 : 1953년 11월 15일자 동아일보 2면.
- ↑ 출처 : 1953년 11월 15일자 경향신문 2면.
- ↑ 출처 : 1955년 10월 31일자 동아일보 3면.
- ↑ 이 기관은 1961년 문화재관리국으로 개편된 뒤 1999년에 문화재청으로 개편된다. 즉, 문화재청의 전신 기관이다. #, ##
- ↑ 물론 남은 돈을 국고에 채워넣는 일도 없었다고 한다.
- ↑ 이는 당시 국회의원의 세비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 ↑ 맨 앞줄 여인의 윤비, 그 뒤로 성옥염 상궁.
- ↑ 이 사람은 전임자들과 달리 비리투성이 구황실재산사무총국을 개혁하려 애썼고(비록 조직적인 증거인멸 등에 부딪쳐 실패했지만), 인수재에서 귀양살이 아닌 귀양살이를 하던 순정효황후에 대해서도 여러가지로 신경을 많이 썼다. 그래서 순정효황후도 무척 고마워하며 신임했다고 한다.
- ↑ 이때 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다고 하였다.
- ↑ 출처 : 1960년 5월 4일자 동아일보 3면, 1960년 5월 15일 경향신문 3면.
- ↑ 출처 : 1966년 2월 7일자 경향신문 7면.
- ↑ 심지어서 한일합방조약 체결 당시에 옥새를 내놓지 않으려고 순정효황후가 숨겼는데 그걸 기어이 찾아내 뺏었다는 얘기도 있다.
- ↑ 조선 후기 문신. 판서까지 오른 고위 관료로, 을미사변 이후 관직을 내려 놓고 은거. 스스로를 장위산인이라 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