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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영원할 줄로만 알았던 대전 시티즌의 레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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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경기에서 사용된 기념 입장권. 등번호의 532는 최은성의 통산 경기 수를 의미한다.
그리고 드디어 꿈에 그리던 우승컵을 들었다!!!
전북현대 모터스 골키퍼 코치 | |
최은성(崔殷誠 / Choi Eun-Sung) | |
생년월일 | 1971년 4월 5일 |
국적 | 대한민국 |
출신지 | 경기도 광주군 [1] |
출신학교 | 성내초 - 포철중 - 강동고 - 인천대 |
소속팀 | 국민은행(1994) 상무(군복무)(1995~1997) 대전 시티즌(1997~2011) 전북 현대 모터스(2012~2014) |
스태프 | 대전 시티즌 플레잉 코치(2010~2011) 전북 현대 모터스 플레잉 코치(2014) 전북 현대 모터스 골키퍼 코치(2014~ ) |
포지션 | 골키퍼 |
등번호 | 21번(대전 시티즌) 22번[2] , 23번[3] (전북 현대 모터스) |
A매치 기록 | 1경기 |
대전 시티즌 기간결번[4] |
No.21 최은성 |
크리스티아누 은성
1 개요
대전 시티즌의 전설이자 전북의 영원한 체흐
대한민국의 전 축구선수이자 현 전북 현대의 골키퍼 코치, 그리고 대전 시티즌의 레전드 오브 레전드.[5]
상대적으로 국대만 보는 팬들에게 가장 저평가 받는 선수로 손꼽힌다. 심지어 최은성이 2002년 국가 대표팀 멤버라는 사실도 모르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그 이유는 딱히 주목받지 못하는 실업팀 출신이었다는 점, 덕분에 프로 입단 시기가 꽤 늦었다는 점, 과거 소속팀인 대전 시티즌이 K리그 안에서도 그다지 강팀이라 부를 수 없는 팀이기 때문에 최은성의 활약이 제대로 주목받았던 적이 손꼽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K리그 팬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한국축구의 레전드 골키퍼 중 한명이다. 사실상 대전 시티즌이 재정 지원도 변변찮은 상태에서 그나마 중위권 정도의 성적을 냈었던 이유는 최은성이 골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 덕분에 대전 시티즌이 최은성을 방출시키기로 결정 내렸을때 모든 K리그 팬들이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동 세대의 국대 골리인 이운재나 김병지에 비하면 특별이 월등한 부분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의 최대 장점은 말 그대로 안정감. 다시 말하지만 대전 시티즌은 만년 하위팀이며 시민구단의 한계로 제대로 된 전력보강은 꿈도 못 꾸는 팀이다. 당연히 수비진 또한 좋다고 말하기 힘든데, 그런 팀에서 안정적으로 수비진을 조율하며 수문장을 본다는 것은 그의 절대적 강점이라 할 것이다. 이 절대적인 안정감을 장기 삼아 대전 최대의 리즈시절이었던 2001년~2003년을 이끌었으며 2012~2013 시즌에는 닥공으로 단련되어 매우 강력한 공격력을 지닌 것에 비해 수비가 아쉬웠던 전북의 수비진을 조율하면서 전북을 최다 득점 및 최소 실점 팀으로 만드는 저력을 보여주었다.[6]하지만 당시 서울과 포항의 활약으로 인해 우승은 없었다.
이게 어디 40대의 몸이란 말인가. 심지어 이게 대전도 아닌, 전북 시절 겨우 은퇴 반 년 전에 찍힌 사진이다 ㄷㄷㄷ
게다가 자기 관리 면에서도 김병지 못지않게 상당히 뛰어난데 위의 사진을 봐도 알다시피 40이 넘어선 나이에 신체 나이 20대를 유지하는 것은 기본이고, 18시즌 중에서 마지막 시즌을 제외한 나머지 17시즌을 한 시즌 제외하고 모두 25경기 이상을 소화했다. 30경기 이상을 뛴 시즌은 13시즌. 한 시즌 평균 출장으로는 오히려 김병지보다 더 많은데 김병지는 시즌 당 28.6경기, 최은성은 29.5경기를 소화했다.
특히 2001년 FA컵에서 결승에 이르기 까지 보여준 명품 수비를 통해 거스 히딩크의 눈에 띄게 되어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국가 대표팀에 발탁된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최은성과 함께 뛰었던 골키퍼는 그 이운재와 김병지였다.[7] 결국 서드 골리의 위치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고, 출전 경기 역시 친선전의 단 1경기 뿐이었다.
2 커리어
2.1 대전 시티즌 시절
"최은성이 대전이고 대전이 최은성이다.[8]"
보기 드문 최은성이 머리카락이 있던 시절. 1998년부터 삭발 머리를 유지하게 된다.
대학 졸업 후 실업팀 국민은행에서 1년 동안 뛰다가 상무에서 군 복무를 마친 뒤 합류했다.[9] 1997년 대전 시티즌이 창단할 때부터 참여하여 15년 동안 대전의 수문장을 맡았다. 축구팬들, 특히 대전 시티즌 팬들에게 수호천황이라는 별명도 받았다.
2005년에는 5월 29일 FC 서울 원정 경기에서, 서울이 0-1로 끌려가던 전반 10분 공격수 김은중[10]이 최은성과의 일대일 찬스에서 골키퍼를 제치고자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최은성이 김은중을 몸으로 걸어 넘어뜨리며 PK을 얻어냈는데.....
문제는 김은중이 최은성을 제치는 과정에서 손으로 공을 툭 쳤고, 최은성과의 접촉은 그 이후에 일어났던 것. 명백한 핸드볼 상황이 페널티킥으로 둔갑된 것이다.손 써서 페널티 얻어 놓고 포효하는 김은중의 세레머니가 압권 대전 선수들과 코칭스탭들은 강력히 항의했으나 가장 억울해야 할 최은성은 오히려 껄껄 웃으면서 항의하는 동료들을 말리더니, 곧이어 히칼도의 페널티킥을 멋지게 선방해냈다!!! 경기는 2-2 무승부로 끝났지만 이 장면을 통해 대전의 수호천황 최은성의 멘탈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고, 김은중은 그와 대비되는 행동을 보임으로써 한동안 까임과 비아냥의 대상이 되었다.
대전 시티즌에서 있는 동안 K리그 464경기에 출장했는데, 이는 K리그에서 단일팀에서 최장경기 출장 기록이다.[11] 604골을 실점, 경기당 경기당 평균 1.3실점밖에 하지 않았는데, 대전이 강팀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대단한 기록임에 틀림없다.
어쨌든 1997년부터 2011년까지 K리그의 대표적 약팀 대전 시티즌의 철벽 수문장으로서 늘 최선을 다했고, 수많은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2011년 K리그 승부조작 사건으로 대전 전현직 선수가 8명이 검찰조사를 받고, 4명이 구속된 뒤에 가진 경기[12] 후, 기자회견에서 선수들을 대신해 사과했다. 특히 눈물을 흘리면서 오늘 경기는 이기려고 뛴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뛰었다고 말하며 진정성 있는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런데 2012년 리그 개막 직전, 대전 시티즌은 최은성과 재계약을 거부하며 사단이 터졌다. 최은성 말로는 구단 사장이 자신에게 모멸감을 주며 문전박대했다고.[13] 마산아재급 포스를 원정가서 보여준다는 대전 시티즌 서포터즈 퍼플크루는 물론이요, 수많은 대전 팬들, 나아가 전국 모든 축구팬들의 뒷목을 부여잡게 만들었다.
구단의 레전드에 대한 예우도 아니었을 뿐더러, 후술된 전북 현대 시절을 봐도 알겠지만 최은성의 기량 자체도 전혀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14] 누가 봐도 축구의 'ㅊ'자도 모르는 인간이 구조조정을 구실삼아 명단 한번 죽 훓어보고는 '얘 늙고 고연봉이네? 해고!' 식으로 결정한 정황이 뚜렷했기 때문.정말 적게 받고 계셨던 겁니다. 그리고 축구팬들 사이에서 여론이 급속도로 악화되자 대전은 최은성의 협상 자세를 걸고 넘어지는 치졸한 언플까지 시도한다.
상황이 해결되지 않은 채 시즌이 시작되자 결국 축구팬들은 뚜껑이 열렸다. 퍼플크루는 홈경기 응원중단을 선언했고, 항의내용 - 최은성이 대전이고 대전이 최은성이다!-들을 제외한 응원 현수막을 모조리 거꾸로 내걸고 침묵을 지키는 실력행사로 나섰다. 이런 엄청난 파국에 당황한 대전시는 사장을 해임하는 등 수습에 나섰으나 이미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은 최은성은 은퇴를 선언했다. 그야말로 샤다라빠의 망상인 김응땅의 현실 버전이 될 거 같았는데……
2.2 전북 현대 시절
최흐의 부활
경험있는 베테랑 GK가 급히 필요했던 전북 현대 모터스가 거의 삼고초려에 가까운 설득으로 최은성을 영입하여 3월 하순부터 뛰게 되었다.
전북은 닥공으로 유명한 팀 컬러에 비해 수비력은 우승권 경쟁팀들에 비해 떨어지는 편이었다. 여기에 2010 시즌이 끝나고 주전 골리인 권순태가 상무로 입대한데다,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비싼 돈 주고 영입한 염동균이 2011년 K리그 승부조작 사건에 가담한 사실이 드러나 영구제명되어 이후로 대체멤버를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결과가 2012 AFC 챔피언스 리그 1, 2차전 1-5 참패.[15]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시장에 나온 국가대표급 베테랑 GK의 존재는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었다. 반대로 이 상황에서 베테랑 GK 스스로 내쫓은 대전은 이뭐병…. 그러나 대전 팬들은 아무도 최은성을 배신자라 까지 않고 오히려 최은성 선수가 은퇴하기 전에 우승 한번 해보겠네하고 눈물을 흘리며 응원하고 있다. 그리고 정말로 그것이 이뤄지자 다시 한 번 눈물을 머금고 축하해 주었다.
여담으로 최은성은 기존에 대전으로부터 은퇴 후, 자신의 등번호인 21번을 21년동안 영구결번으로 지정 받기로 약속받았었는데, 이 약속이 지켜질지는 아무도 모르게 되었다.(…) 역시 대전 시티즌 프론트 천하의 개쌍놈.
결국 전북 현대는 최은성을 영입하면서 닥공에 비해 떨어지는 수비 문제를 상당 부분 해결했다. 최은성 영입 이전까지 전북은 골을 많이 넣는 만큼 어이없는 실점도 잦아서 본의 아니게 드라마를 찍었는데(...) 최흐 옹의 은퇴와 함께 2014년 늦여름에 잠깐 다시 부활했던 그 드라마 최은성의 선방과 안정적인 수비조율 능력에 힘입어 리그 최소 실점 팀으로 변신했다.(...) 여담으로 2012년 28라운드 기준 27실점. 이 기록은 철퇴축구 울산과 동률이다. 득실차는 전북 31, 울산 11..... ㅎㄷㄷ
전북에서 엄청난 선방과 안정감 때문에 페트르 체흐에서 따온 최흐라는 별명을 획득했다. 그리고 선수생활 전혀 없었던 팀 우승 경험도 노릴 수 있는 좋은 기회는 덤.
결국 전북에 성공적으로 정착하여 2012 시즌을 잘 마무리했다. 시즌 기록은 34경기 36실점. 특기할 사항으로 시즌 종료 후 최은성의 출장 기록은 498 경기로, 500경기 출장을 코앞에 두게 되었다. 팬들은 과연 선수생활을 연장해서 대기록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인지 궁금히 여겼는데, 전북은 당연히 재계약했다. 그리고 2012 시즌 말미에 권순태가 제대하면서 2013 시즌에 두 사람의 주전 경쟁이 이어지게 됐다. 그래도 경험은 무시할 수 없는 지라 K리그 상위권 골키퍼인 권순태를 아무렇지도 않게 벤치에 앉히고 주전이 되었다. 권순태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는 권순태의 선수 생활에 여러 가지로 큰 의미가 있다.
2013년 3월 9일 전주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홈 개막전에서 통산 500경기 출장 대기록을 달성했다. 이를 기념해 등번호 500번을 새긴 유니폼을 입었다. 이날 전북은 강적 울산을 맞아 최은성의 안정적인 방어에 힘입어 2:1로 기분 좋은 승리를 거뒀다. 공교롭게도 패배한 울산의 김영광과, FC서울의 김용대가 명성에 걸맞지 않은 아쉬운 수비를 보이며[16] 팀 패배의 단초를 제공한 것에 비한다면 '수수하지만 안정감 있는' 최은성의 장점이 돋보였다.
2013년 7월 3일 전주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리는 성남 일화와의 홈경기에서 골을 기록했다.
상황은 성남이 2―1로 앞서던 후반 32분에 발생했다. 성남에 부상 선수가 발생하자 성남 골키퍼 전상욱은 사이드라인 밖으로 공을 걷어냈다. 이 상황에서는 전북이 다시 성남에게 볼을 건네주는 것이 축구계의 불문율이자, 예의. 이후 경기가 재개된 뒤 전북의 이동국이 전상욱 골키퍼에게 공을 패스하려고 길게 찼는데 이 공이 그대로 골문을 통과하며 득점으로 인정됐다. 스코어 2-2. 이동국의 찜찜한 시즌 10골이자 페드로(제주)와 득점 공동 선두로 올라서는 골. 이동국은 바로 손을 들어 실수임을 인정했지만 성남 선수들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성남 김태환은 항의하는 과정에서 전북 선수를 넘어뜨리는 바람에 퇴장까지 당했다. 재개된 경기에서 이동국이 다시 볼을 잡았고 골키퍼 최은성에게 롱패스를 연결했다. 최은성은 패스를 받아 자신의 팀 골문으로 차 넣었고, 자책골로 사태가 일단락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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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시즌, 플레잉 코치로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시즌이 들어서면서 권순태가 더 기량이 나아진 모습을 보이면서 그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었다. 그리고 2014 시즌 후반기가 막 시작될 즈음 선수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경기는 7월 20일 상주 상무 피닉스와의 경기로 전반전까지만 뛴 후 하프타임에 은퇴식을 가진 뒤 후반전에는 권순태가 교체해 들어가 경기를 진행할 예정.# 김병지: 아직 한창인 애가 왜 벌써 은퇴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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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20일 상주 상무와의 전주성 홈경기에서 본인이 출전한 532경기 등번호를 달고 전반전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팀 후배들은 6:0 대승을 이끌면서 레전드 골키퍼의 마지막 길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은퇴식 영상
은퇴식 중 월급도 제대로 안받고 팀을 경영면에서 리빌딩 해낸 신이 대전구단에 보내신 선물 대전 시티즌 사장인 김세환은 '구단을 대신해서 감사하고 죄송하다'라는 뜻을 전했다. 또한 전북 서포터 대표와 함께 행사에 참석한 대전 서포터 대표는 최은성에게 대전 유니폼과 머플러를 전해주고 큰 절 올린 뒤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최은성의 옆에서 계속 눈물 흘렸으며 이를 관중석에서 지켜보던 전북/대전 서포터들과 중계로 지켜보던 전국의 케이리그 팬들에게도 짙은 여운을 남겼다. 고마워요 스포티비
대전 팬들에게 있어서는 자신들의 레전드로 남을 수도 있었던 선수가 김광희 前 사장과 유상철 前 감독의 삽질로 내쳐진 뒤 다른 구단에서 은퇴식을 치르는 슬픈 광경을 바라봐야 하는 참담함과 함께, 성대하게 은퇴식을 치뤄주면서 자신들을 배려해준 전북에 대한 고마움이 교차한 시간이었다. 전북 MGB들은 자신들의 서포팅석을 이 날 대전 퍼플크루에도 개방하기로 했고, 퍼플크루는 감사를 표하면서 서포팅석을 피해 주기로 최종 결정하였다. 진정한 위아더월드
한편, 샤다라빠는 최은성 은퇴 헌정 웹툰을 그렸다. 전북 현대와 대전 시티즌이 각각 케클 1위와 케챌 1위를 달리고 있는 상황을 언급하며 최은성이 현역으로 우승을 경험 못하고 은퇴하는데 아쉬움을 표했다. 다만 플레잉 코치 등록은 올시즌 내내 유효하므로, 기록상으로는 여전히 선수로도 리그우승을 경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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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생활을 은퇴했지만 애초에 플레잉 코치에서 선수 생활만 은퇴한 것이기에 여전히 전북 현대에 남아있으며 당연히 골키퍼 코치를 맡고 있다. 사진에 성질 부리고 있는 어느 아저씨는 신경쓰지 말자
결국 전북 현대가 2014년 11월 8일 2014 시즌 우승을 거두면서 최은성은 선수생활 마지막해에 리그우승을 맛봤다. 그의 선수 생활 18년 만에 드디어 든 리그우승컵이었다. 특히, 구단의 배려로 15일 전주성에서 열린 우승 시상식에서 선수 유니폼을 입고 시상대에 서서 영광을 만끽하였다. 선수 자격으로 우승을 만끽하라는 구단의 배려였다고 한다. 끝까지 훈훈함 폭발하는 전북 갓런트 찬양해
3 여담
- 최은성이 대전에 대한 헌신을 대략적으로 소개한 기사 #
- 2012년 8월 대전 팬들이 헌정한 영상. 시기가 시기인지라 대전 팬이 아니라도 비장미의 끝을 맛볼 수 있다. [1]
- 2002년 월드컵 멤버로 선발되고 서드 골키퍼 자리에 대한 말들이 많아지자, 히딩크는 최은성의 성실한 자세와 팀을 위해 헌신하는 자세가 좋아 발탁했다고 한다. #
- 그라운드에 있는 선수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축에 속하기는 하지만, 그런 점을 빼고 보아도 노안이다. 김병지보다 한 살 어린데 액면가로는 10살은 많아 보인다. 대전에서 마지막 감독이던 유상철은 아예 동갑이다.(...)
- 팬서비스가 좋기로도 유명한 선수 #
- 2013 시즌부터 주전 경쟁을 펼친 권순태와의 사이는 매우 좋다. 특히 권순태가 그를 매우 잘 따르는 편. 최은성이 대전에서 뛸 때부터 존경했다고 하며, 최은성이 전북에 올 적에는 전북에 얼마 없는 권순태보다 나이 많은 선수여서 더욱 잘 따랐다고. 2014 시즌 내내 권순태는 최은성을 위해 우승시켜주고 싶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둘의 나이 차이는 13살 차이로 이미 띠동갑도 넘어섰지만, 권순태는 그를 코치님이 아닌 형님이라 부른다고.
얘네들 타종목으로가면 얘네와는 많이 다르다.
- 위에 샤다라빠 웹툰에서도 언급되어 있지만, 우승과 매우 인연이 멀었다. 대전 팬들이 전북에 가는 최은성에게 은퇴하기 전에 트로피 들고 가시는구나 하고 환영했지만, 결국 전북에서도 은퇴식을 치르고 연맹 등록상태로만 선수인 플레잉 코치로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게 되었다. 이것이 안타까웠는지 권순태는 우승이 99% 확정된 상황에서 트로피를 가장 먼저 최은성에게 주고 싶다고 말했다.
- 2012년 초반 대전 시티즌과 안 좋은 과정으로 계약을 해지하고 은퇴 직전까지 몰린터라 대전에서 결번시킨 21번도 결번을 취소하란 말이 나올만큼 감정이 한때 최악까지 치달았지만, 선수생활 막판에 대전이 재영입을 시도할 정도로 대전과의 관계는 많이 나아진 걸로 알려져 있다.
승격시킨 경영진 복귀시켜라 이놈들아
- ↑ 하남시는 1989년 광주군에서 분리되었다.
- ↑
처음에 22번을 단 것은 기존의 21번을 서상민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며21번을 다는 것은 대전 시티즌의 팬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한다.(은퇴 인터뷰에서 직접 언급함) - ↑ 2013 시즌부터 23번으로 변경.다시 등번호를 23번으로 바꾼 것은 알고보니 22번이 당시 대전으로 임대를 갔던 김형범의 등번호라 그가 다시 복귀할 때 돌려줄 생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김형범은 전북에 돌아오지 않았다.그래서 새 번호를 생각하는 와중에 2002 월드컵 때 달았던 23번이 비어 그 번호를 달게 된 것. 1번은 상무에서 돌아온 권순태가 다는 게 맞다고 생각하여 받지 않았다고 한다.오오 대인배 - ↑ 21년간 결번한다.
- ↑ 2011 시즌 후, 대전 사장의 병크로 어이없는 계약 해지를 당하면서 대전과의 관계가 깨지며 레전드 대우도 안해주는 듯 했으나 새로운 사장이 그 때의 일을 대신 사과하면서 구단과의 관계도 회복했다. 결정적으로 그 때도 팬들은 항상 최은성을 지지했다.
- ↑ 이 때문에 선수로 몸 담은 시즌이 두 시즌 반 밖에 되지 않음에도 전북 팬들에게도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다. 비록 최진철, 최강희같은 레전드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 역시 준레전드로서 가치는 충분하다.
- ↑ 이 두 선수의 존재는 최은성뿐만 아니라 세 사람의 직속 후배 키퍼들에게도 끊임 없는 압박감으로 존재하게 된다. 현재 정성룡이 욕을 많이도 먹는 이유 중의 하나는
본인의 집중력도 있지만그의 선임 키퍼가 하필이면 저 엄청난 세 명의 키퍼들이기 때문. - ↑ 최은성의 방출에 반대하며 시티즌 서포터들이 내놓은 문구이다
- ↑ 사실 여기에는 에피소드가 있다. 이 칼럼을 보면 알겠지만, 최은성은 대학을 모두 끝마치고 드래프트를 신청하려고 했지만, 실수로 드래프트 신청을 하지 못했다. 덕분에 실업팀에서 뛰다가 상무로 입단했고, 상무를 마친 뒤 드래프트를 통해서 다시 프로에 입단하려 했었던 것이다. 드래프트 신청 당시 유공에서 최은성을 뽑을 계획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당시 막 창단하던 대전 시티즌이 우선 지명으로 가져 간것. 만약 역사가 바뀌었다면 제주 유나이티드에서 뛰고 있는 최은성을 보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
- ↑ 최은성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역시 대전의 레전드 선수 중 하나였다. 그 뒤, 여러 팀을 떠돌아 다니다 2014 시즌 플레잉 코치로 다시 돌아왔다.
- ↑ 김병지가 최은성보다 더 많은 경기를 뛰었으나 이는 여러 팀에서의 기록을 합친 경우다.
- ↑ 공교롭게도 상대가 전북 현대였다. 3-2로 역전패.
- ↑ 사장실에 들어가니 사장이 그를 벌레 쳐다보듯 보는 것도 모자라 "저 새끼 때문에 잠도 못 잔다."며 대놓고 모욕을 주었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기사 참조
- ↑ 게다가 다른 동네에서 뛰고 있던 최은성보다 1살 형으로 그 당시 만 42세였던 김병지도 이 시절 전혀 기량이 녹슬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는데 김병지 못지 않게 자기 관리가 투철한 골키퍼 최은성이 나이가 들었다고 기량이 떨어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 ↑
염동균의 영구제명으로 인해 전북은 어쩔 수 없이 백업 키퍼였던 김민식을 주전 키퍼로 써야 했다. 참고로 이전까지 김민식은 3시즌 동안 단 9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다. 이런 선수가 얼떨결에 주전을 맡게 되었으니 잘할 리가...... 그래도 2011 시즌,아챔준우승리그 우승을 안겨주는 등 기대 이상으로 해줄 만큼 해주고는 최은성에게 바통 터치하고 2013 시즌, 상주 상무에 입대했다. 상주에 입대하고는 주전으로서 상당한 기량 상승하고 전역했다. 최은성이 은퇴하고 여전히 권순태가 주전이지만 김민식도 백업으로선 매우 믿음직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주전 출장을 위해 2015 시즌 전남 드래곤즈로 이적했다. - ↑ 김영광은 옆구리로 공이 빠져나갔고, 김용대는 잡았다 놓친 공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