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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유상철 (柳相鐵 / Yoo Sang-Chul) |
생년월일 | 1971년 10월 18일 |
국적 | 대한민국 |
출신지 | 서울특별시 |
신체 조건 | 184cm, 78kg[2] |
선수시절 소속팀 | 울산 현대 (1994~1998) 요코하마 F. 마리노스 (1999~2000) 가시와 레이솔 (2001~2002) 울산 현대 (2002~2003) 요코하마 F. 마리노스 (2003~2004) 울산 현대 (2005~2006) |
스태프 커리어 | 춘천기계공업고등학교 (2009~2011/감독) 대전 시티즌 (2011~2012/감독) 울산대학교 (2014~ /감독) |
선수시절 포지션 | 수비수, 미드필더, 공격수[3] |
국가대표 | 124경기 18골 |
1998년 K리그 득점왕 | |||||
김현석(울산 현대 호랑이) | → | 유상철(울산 현대 호랑이) | → | 김도훈(전북 현대 모터스) |
1994 K리그 베스트 일레븐 | |||||||||||
FW 윤상철 | FW 라데 | FW 김경래 | |||||||||
MF 신태용 | MF 고정운 | MF 황보관 | |||||||||
DF 안익수 | DF 유상철 | DF 홍명보 | DF 허기태 | ||||||||
GK 사리체프 | |||||||||||
1998 K리그 베스트 일레븐 | |||||||||||
FW 김현석 | FW 샤샤 | ||||||||||
MF 고종수 | MF 유상철 | MF 백승철 | MF 안정환 | MF 정정수 | |||||||
DF 안익수 | DF 마시엘 | DF 이임생 | |||||||||
GK 김병지 | |||||||||||
2002 K리그 베스트 일레븐 | |||||||||||
FW 김대의 | FW 유상철 | ||||||||||
MF 신태용 | MF 이천수 | MF 안드레 | MF 서정원 | ||||||||
DF 김현수 | DF 김태영 | DF 최진철 | DF 홍명보 | ||||||||
GK 이운재 |
K리그 30주년 레전드 베스트 XI | |||||||||||
FW 황선홍 | FW 최순호 | ||||||||||
MF 김주성 | MF 신태용 | MF 유상철 | MF 서정원 | ||||||||
DF 최강희 | DF 김태영 | DF 홍명보 | DF 박경훈 | ||||||||
GK 신의손 |
1 소개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멀티플레이어.[4][5] K리그 울산 현대의 레전드.
춘천기계공고 창단 감독. 전(前) 대전 시티즌 감독. 현 울산대학교 축구부 감독.
1971년 10월 18일생. 184cm. 건국대학교 출신. A매치 124경기 출전 18골. 별명은 유비.[6] 그런데 플레이 스타일을 보면 관우에 가까운 듯...그 유비가 아니라 슛할 때마다 공을 골대 위로 날려버려서 유비...
1990년 청소년 대표에 발탁[7], 1994년 3월 미국전에서 첫 A매치 데뷔 이후 2000년대 초반까지 국가대표 단골로 활약했다.
본격적으로 A대표팀 생활을 시작한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8강전인 일본전에서 0:1로 뒤지는 상황에서 동점골을 넣은 후 '한일전의 사나이'란 별명이 따라다니기 시작했다.[8]
2 클럽
건국대학교를 졸업하고 1994년 울산 현대에 입단했다. 당시 울산 현대 감독은 다름아닌 차범근. 유상철을 눈여겨 보고 있던 차범근은 잘 다듬어서 분데스리가로 진출시킬 계획을 갖고 있었으나, 하필 입단 첫 해였던 1994년 시즌 후 차범근 감독이 경질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하지만 이 때부터 A대표팀을 이끌 차세대 주자로 각광받게 되면서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부터 국가대표로 출전하게 됐다.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8강전인 한일전 당시, 전반전에 미우라 카즈요시에게 실점하며 끌려가던 대한민국에 동점 골을 안겼다. 이후 2골을 넣은 황선홍과 함께 대한민국의 승리를 합작, 대한민국은 전년도에 도하에서 일본에 당한 패배를 설욕했다.
타고난 파이터 기질과 뛰어난 제공권 장악능력을 가졌으며, 거기다 내구성도 좋아 꾸준히 국가대표의 한 자리를 도맡았다. 당시 국대급 미드필더로 항상 거론되던 윤정환, 고종수 등은 부상이나 전술상의 문제 탓에 국대에서 실제 활약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 외에도 갑작스런 부상으로 국대 라인업에 문제가 생기면 어김없이 최우선으로 땜빵이 가능한 고마운 자원이었다. 1998년 월드컵에서는 네덜란드전 5-0 대패로 차범근 감독이 잘리고 김평석 감독대행이 지휘하던 마지막 벨기에전에서 (홍명보 또한 선발 명단에 있었음에도) 주장 완장을 차고 왼쪽 윙백으로 선발 출전, 악으로 깡으로 뛰다가 기어이 하석주의 크로스를 받아 1-1 동점을 만드는 골을 넣기도 했다.
위키백과에 등재되어 있는 그의 포지션은 최전방 공격수, 공격형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 윙백, 중앙 수비수(...). 한마디로 골키퍼 빼고는 안 뛰어본 포지션이 없다.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위치를 국가대표팀에서 소화한 경험이 있다는 게 더 흠좀무.[9]
탁월한 하드웨어와 거기에 덧붙여 뛰어난 임기응변, 경기의 맥을 짚는 능력과 위치선정 등이 모두 국내 최고 수준이었다. 이러한 능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포지션에서 언제나 자기 몫을 해 내는,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멀티플레이어가 되었다. K리그 역사를 통틀어 베스트 11에 수비수, 미드필더, 공격수 부문에 모두 선정된 경험이 있는 두명중에 한명이다. 다른 한 명은 삼손 김주성. 1998년에는 스트라이커로 전향해 공격형 미드필더로 1998 시즌 울산 현대에서 23경기 15골이라는 경이적인 득점력을 과시했으며, 이해 득점왕을 차지했다. (본인 인터뷰에 따르면 공격형 미드필더 포지션에서 완전히 프리롤로 뛰었다고. 실제로 1998년에 "미드필더"로 K리그 베스트 11에 선정)
파일:Attachment/Yoo Sang-Chul Yokohama F Marinos.jpg
1999년부터는 J리그 팀 요코하마 F. 마리노스로 이적, 팀 형편에 따라서 포지션 안 가리고 뛰었다. 2000년에는 김현석과 함께 J리그 득점왕 레이스를 벌였을 정도(...). 2001년에는 가시와 레이솔로 이적해 황선홍, 홍명보와 함께 코리안 삼총사로 불리며 대활약했다.
2002년에 울산 현대에 돌아왔다가 2003년에 다시 요코하마로 재이적, 2005년에 다시 울산행 등으로 J리그와 유독 인연이 많았다. 1999년에는 FC 바르셀로나에서 이적 제의가 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K리그 한정으로 울산 현대에서만 활동한 원 클럽 맨으로 남았다.
3 국가대표
K리그 시절 이장관, 김대수 등과 폭력 사태, 그리고 대표팀에서 득점력이 있는 선수에게 으레 따라붙는 별명 홈런왕(...)[10] 등 그다지 이미지가 좋지 않았으나,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을 계기로 일약 재조명받게 되었다.
거스 히딩크 감독 부임 이전 한국 축구인들과 팬은 큰 착각(?)을 하고 있었는데, '한국축구는 체력과 정신력은 좋지만 기술이 별로'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때문에 브라질 유학이나 게임 메이커[11] 같은 단어에 목을 맸다. 반면 히딩크는 부임 이후 '한국 선수들은 기술은 수준급인데, 체력과 정신력이 엉망이다'라는 정반대의 평가를 했다.[12][13]
사실 유상철은 요즘 대표팀 선수들에 비하자면 낯이 뜨거울 정도로 볼 터치[14] 및 드리블 능력이 떨어졌다. 그러나 그런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한 장점들- 앞서 언급했던 탁월한 하드웨어[15]와 시야, 위치선정 능력으로 중원을 장악했다. 2002년 월드컵 당시의 대표선수들 중에서는 김남일, 박지성, 송종국 등과 함께 히딩크 축구에 가장 최적화된 선수 중 하나였다. 결국 '유럽의 힘에 대항하기 위해 기술을 연마하자'는 고정관념을 깨고 '대등한 힘으로 맞서싸운다'는 히딩크 축구의 핵심 멤버로 맹활약했다.
끝내 2002 월드컵에서는 중앙 미드필더로 출전하여 대회 BEST 11에 선발되기도 했다. 당시 영국의 축구 평론가 앤드류 워쇼는 유럽축구연맹 홈페이지에 기고한 글에서 "유상철은 이번 월드컵에 참여한 수비형 미드필더 중 최고다. 그의 침착성과 탁월한 볼 배급 능력은 경이로운 수준"이라 평가했다. 그것도 모자라 "세계 축구팬들은 그의 등 번호(6)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는 최고의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2006년 현역 은퇴를 선언하면서 왼쪽 눈이 거의 보이지 않고 사실상 오른눈으로만 뛰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뒤이어 2010년 6월 8일자 토크쇼 강심장에서 사실 왼쪽 눈이 시력저하가 아닌 실명 상태라고 밝혔다. 아무에게도 얘기한 적 없고(감독, 심지어 가족까지) 여태 혼자서만 알고 그만큼 몇백배 노력을 쏟아부었다고.
참고로 2002 국가대표팀 중에 가장 많이 인터넷 패러디로 망가진 인물. 홈런왕 유상철이라는 별명부터 수직상승 로켓슛까지.... 특히 수직상승 로켓슛은 모 플래시 게임에서 필살기로까지 등장한다. 유상철 본인도 직접 해봤다고. 흠좀무. 그래서 이 플래시 게임 제작자가 사과하는 마음으로 히딩크를 구하는 게임[16][17][18]을 만들었다. 그런데 게임을 깨면 나오는 엔딩 때 유상철 Forver라고 썼다(...). 홈런왕 유상철 플래쉬 게임, 홈런왕 유상철 히딩크를 구해줘 플래쉬 게임.
'이순신 장군 게임'으로 알려진 너구리알 제작의 독도 지키기 플래시게임에도 유상철의 분노, 유상철의 가호란 이름의 아이템에 등장한다.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전에서 크리스티안 비에리에게 펀치를 맞은 김태영 선수에게 타이거 마스크를 가져다 준 장본인. 일본 쪽 마스크 제작업자들과 인맥이 있어 다리를 놓아 줬다고.
4 지도자
2011년 7월 17일, 지난 7월 3일 사임한 대전 시티즌 왕선재 감독의 후임으로 사령탑이 되었다. 승부조작 파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팀을 어떻게 추스릴지가 관건이다. 그리고 막장 상태의 팀을 어떻게든 추스려 가며 2012 시즌에도 간신히 강등위기를 벗어나며 잔류를 시키긴 했지만...
2012년 11월 30일, 대전 시티즌이 언론을 통해 다음 시즌 재계약 불가를 천명하면서 사실상 해임되었다. 문제는 지금껏 대전을 거쳐간 많인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역시나 유상철 역시 온갖 더러운 꼴 다보고 나가야 했다는 거다.
앞서 적은 바와 같이 대전은 언플을 통해 유상철 재계약 건을 흘렸는데, 덕분에 유상철 본인은 재계약 불발 사실을 사전에 정식으로 통보받은 적이 없고 인터넷을 보고 처음 알았다고 한다. 더구나 12월 1일은 시즌 마지막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즉 프런트는 시즌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후임 감독 선임 언플부터 해댄 것. 한술 더 떠서 끝까지 전화연락 한통 받지 못했고 프런트 직원이 통지서 한장 달랑 들고온 것으로 끝냈단다. 유상철은 이 때 열받은 나머지 최종전은 불참할까 생각도 했는데 그나마 서포터의 위로전화를 받고서 마음을 돌렸다고. 전미가 울었다. 대전 프런트가 개념없이 선수와 코칭 스텝 내친 것이 어제 오늘 일은 아니지만 이쯤 되면 그냥 종특인듯?
다만 최은성과 대전의 계약 결렬과 관련해, 감독으로써 최은성을 붙잡아달라 어필하기는커녕 최은성이 떠난 뒤 연봉 문제였다고 언급하는 모습은 팬들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동갑내기 감독과 선수로써 서로 대하기 껄끄러웠을 것이라는 추측도.
비슷한 연배인 신태용 윤정환 홍명보 황선홍 등이 성공적인 지도자 경력을 쌓아올리는 동안, 유상철은 아예 지도자의 길에서 멀어진 것이 아니냐고 우려와 아쉬움을 표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다행히 2013년 12월 31일, 울산 현대를 운영하는 현대중공업이 재단인 울산대학교의 축구부 감독을 맡는다는 보도가 나왔다.
5 기타
- 2008 베이징 올림픽 당시 SBS에서 해설을 맡았으며, 2013년 EAFF 동아시안컵 당시 JTBC에서 해설을 맡았다.
- 차구차구에서는 유상춘이라는 가명으로 뜬다. 그리고 감독 유상철 카드와 선수 유상춘 카드를 동시에 쓰는게 가능하다.
플레잉 감독 - 2005년 무렵 유행한 '불멸의 이순신'이란 게임에서도 나오는데 원숭이(?)를 사냥하고 얻는 아이템 중에서 상자에서 랜덤으로 '유상철의 가호','유상철의 분노'가 있는데 전자는 죽었을때 나와서 여기서 쓰러지지 말라고 하고는 체력을 모두 회복시켜 주고 후자는 최종보스의 체력을 좀 꺾고 난 다음에 나오는데 나와서 자기한테 맡겨달라고 하고는 "이자식들이 감히 독도를 넘봐? 내 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구나! 싹 다 대기권 밖으로 날려버려주마!" 하고는 필살기 수직상승 로켓슛으로 잡몹과 최종보스까지 다 날려버린다![19][20]
- 2002년 10월 국내 무대에 복귀했다. 복귀 후 인터뷰에서 남은 경기 전승과 경기당 1골을 공언, 8경기 9골 기록하였으며, 경기당 1골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인지 마지막 경기에서 스트라이커로 나와 헤딩으로만 해트트릭을 기록해 괴물같은 활약을 보인적 있다.
- ↑ 위 사진은 강심장에 출연했던 사진, 당시에 했던 이야기는 8~9년쯤에 했던 '이경규가 간다' 특집편에서 했던 얘기를 또 재탕(...). 거의 예능나오면 항상 쓰이는 단골소재.
- ↑ 대한축구협회 공식 프로필
- ↑ 선수시절 골키퍼를 제외한 포지션에 고루 뛴 경험이 있으며, 특히 K리그에서는 수비수, 미드필더, 공격수로 올스타에 뽑힌 적 있으며, 공격수로는 득점왕을 한 경험이 있다.
- ↑ 위의 경력을 보면 알겠지만 94년에는 수비수로, 98년에는 미드필더로, 02년에는 공격수로 올스타에 들어간 경험도 있다. 그만큼 어디에서나 리그 탑의 실력을 보여줬다는 이야기.
- ↑ 사실 한국 한정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봐도 이 정도로 많은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선수는 그리 많지 않다. 그나마 멀티플레이어의 대표주자로 알려진 루드 굴리트, 필립 코쿠가 유상철만큼 많은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다. 굴리트 경우에는 진짜로 GK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에서 뛰어본 적이 있다.
- ↑ 하지만 유비의 유는 劉이고 유상철의 유는 柳이다.
- ↑ 그러나 1991년 20세 이하 세계 청소년대회에 남북 단일팀이 결성됐을 때는 탈락
- ↑ 당시 골 장면이 인상적인 게 엔드 라인으로 나가려고 하는 공을 황선홍이 절묘한 힐 킥으로 살려 어시스트 했고 그 공을 유상철이 침착하게 트래핑한 후 마무리했다. 이후 황선홍이 필드 골을 성공시키고 이하라 마사미가 동점골을 넣어 2:2로 후반 막판으로 넘어갔지만 종료 5분을 남겨두고 황선홍이 페널티킥을 유도한 후 다시 한 번 성공시켜 3:2로 역전승했다.
- ↑ 2002년 한일 월드컵 16강 이탈리아전을 복기해 보며 실시간으로 포지션을 바꾸며 종횡무진 뛰어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후반 막판 거스 히딩크는
에라 이렇게 지나 저렇게 지나공격수를 5명을 세우는 극단적 포진을 내세웠는데 홍명보, 김태영을 빼고 이영표-최진철-유상철-송종국으로 포백을 세워도 수비력은 버틸만 하다는 판단을 했던 듯하다. 실제로 유상철은 센터백으로도 훌륭한 선수였으니. 이게 말이 쉽지 아무리 멀티플레이어라도 경기별로 다른 포지션을 뛰는 게 아니라 한 경기 내에서 포지션 한 번만 바꿔도 헷갈려서 경기력 떨어지는 일이 드문 것도 아닌데, 월드컵에서 이탈리아에 맞서서 이렇게 뛰었다는 건 축구지능이 비범하다는 소리다. - ↑ 최용수, 황선홍의 경우는 월드컵에서의 치명적인 소수의 실수로 인해 이런 별명이 붙었지만, 유상철의 경우는 조금 케이스가 다르다. 1998 월드컵이 끝나고 허정무 감독이 부임한 초기 각종 평가전에 스트라이커로 뛰면서 상당히 자주 득점 기회를 날려먹었다. 그거도 수비진을 돌파해놓고 1:1찬스에서....(덕에 뚜껑이 제대로 열리기 딱 좋았다.) 이 때문인지 2000년 이후에는 국가대표에서는 스트라이커 자리로 기용되는 횟수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 ↑ 올바른 용어는 플레이 메이커. 당시 센터링, 사이드 어태커와 함께 널리 쓰이던 일본 출신 영어 용어(...) 가운데 하나.
- ↑ 히딩크는 특히 한국선수들이 양발을 모두 사용하는 것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국대나 K리그에 부임한 여타 외국인 감독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대체로 유럽선수들은 한쪽 발만 집중적으로 쓰기 때문이다.
- ↑ 사실 이건 체력/정신력에 비해서 그나마 기술이 세계정상급에 상대적으로 비벼볼만하다는거지, 진짜로 수준급이란 평가는 아니다. 히딩크는 자서전 '마이 웨이'에서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의 세계 정상급 팀을 100%로 쳤을 때 힘과 지구력 50%, 기술 85%, 전술 60%, 스피드 80%, 자신감 60%, 경험과 불안 억제력 30%, 경기 중 의사소통과 책임감 20%, 성취 동기 100%, 국가와 축구에 대한 사명감 99% 등으로 평가하였다.
- ↑ 이는 홍명보도 사실 비슷하다. 어린이축구교실과 프로 산하 유스팀부터 체계적으로 기술 교육을 받고 자라난 요즘 세대에 비해서 당시 세대들은 대체로 볼키핑, 퍼스트터치가 수준 이하이다.
- ↑ 2002년에 출시됐던 축구게임 위닝일레븐6에서 아시아 선수들 중 유일하게 슛파워 수치가 90이었다.
- ↑ 아폴로 안톤 오노가 히딩크를 납치해서 오노 떼거지를 날려버리고 부시랑 대결하는 내용(...).
- ↑ 처음 100마리의(...) 오노 구간은 누구나 깰만한 레벨인데, 부시와의 보스전이 꽤 어렵다. 축구공으로 전투기를 타고있는 부시의 얼굴을 맞춰야 데미지가 들어간다(...) 근데 그것 뿐이면 어렵다고 말을 안 했다. 양쪽에서는 오노들이 튀어나오며 부시도 폭탄을 투척한다! 거기다 부시를 맞추려다 실수로 전투기에 매달린 히딩크를 맞추면 자신이 데미지를 입는(...) 참으로 괴랄한 난이도를 자랑한다.
안 그래도 어려운데 치사하게 인질방패라니 - ↑ 하지만 제작자의 숨겨진 의도인지 버그인지는 모르겠지만, 부시와의 보스전에서 마우스 오른클릭 후에 나오는 간이 메뉴창에서 '재생'을 누르면 곧바로 수직상승 로켓슛이 시전된다! 그리하여 수직상승 로켓슛을 맞은 부시는 전투기와 함께 작살나고 엔딩이 나온다(...).
- ↑ 참고로 콤보가 쌓이는데 만약 잡몹들을 꽤 살려둔 상태라면, 이때 나오는 콤보는 무려 500 콤보가 거뜬히 나온다!
- ↑ 여담으로 콤보도 콤보지만 절로 가슴이 끓어오르는 웅장한 음악이 깔리면서 나오는 수직상승 로켓슛 사용장면은 그야말로 간지폭풍되시겠다. 이 게임의 명장면이므로 한번 플레이하면서 봐보는 것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