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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현대 모터스 감독 | |
최강희 (崔康熙 / Choi Kang-Hee) | |
생년월일 | 1959년 4월 12일[1] |
국적 | 대한민국 |
출신지 | 경기도 양평군 |
포지션 | 수비수 |
신체 조건 | 176cm |
등번호 | 3번 |
프로입단 | 1983년 포항제철 |
소속팀 | 한일은행 (1979) 육군 축구단 (1980~1982) 포항제철 (1983) 현대 호랑이 (1984~1992) |
지도자 | 수원 삼성 블루윙즈 코치 (1998~2001)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U-23 코치 (2002)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코치 (2003 ~ 2004) 전북 현대 모터스 감독 (2005~2011)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2011~2013) 전북 현대 모터스 감독 (2013~) |
국가대표 | 30경기 / 0골 |
1986년 K리그 MVP | |||||
한문배(럭키금성 황소) | → | 이흥실(포항제철 아톰즈) 최강희(현대 호랑이) | → | 정해원(대우 로얄즈) | |
2009년 K리그 감독상 | |||||
차범근(수원 삼성 블루윙즈) | → | 최강희(전북 현대 모터스) | → | 박경훈(제주 유나이티드) | |
2011년 K리그 감독상 | |||||
박경훈(제주 유나이티드) | → | 최강희(전북 현대 모터스) | → | 최용수(FC 서울) | |
2014~2015년 K리그 클래식 감독상 | |||||
황선홍(포항 스틸러스) | → | 최강희(전북 현대 모터스) | → | 2016년 수상자 | |
300px | |||||
역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
조광래호 (2010 ~ 2011) | → | 최강희호 (2011 ~ 2013) | → | 홍명보호 (2013 ~ 2014) | |
역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
조광래 (2010 ~ 2011) | → | 최강희 (2011 ~ 2013) | → | 홍명보 (2013 ~ 2014) |
전북 현대 모터스 역대 감독 | ||||
김형렬 (대행) (2005) | → | 최강희 (2005~2011) | → | 이흥실 (대행) (2012) |
신홍기 (대행) (2013) | → | 최강희 (2013~) | → | - |
1985 K리그 베스트 일레븐 | |||||||||||
FW 김용세 | FW 피아퐁 | FW 강득수 | |||||||||
MF 박상인 | MF 이흥실 | MF 박항서 | |||||||||
DF 장외룡 | DF 한문배 | DF 최강희 | DF 김철수 | ||||||||
GK 김현태 | |||||||||||
1986 K리그 베스트 일레븐 | |||||||||||
FW 김용세 | FW 정해원 | FW 함현기 | |||||||||
MF 조민국 | MF 이흥실 | MF 윤성효 | |||||||||
DF 조영증 | DF 김평석 | DF 최강희 | DF 박노봉 | ||||||||
GK 김풍주 | |||||||||||
1988 K리그 베스트 일레븐 | |||||||||||
FW 이기근 | FW 함현기 | FW 신동철 | |||||||||
MF 최진한 | MF 김상호 | MF 황보관 | |||||||||
DF 최강희 | DF 최태진 | DF 손형선 | DF 강태식 | ||||||||
GK 오연교 | |||||||||||
1991 K리그 베스트 일레븐 | |||||||||||
FW 이기근 | FW 고정운 | ||||||||||
MF 김현석 | MF 이영진 | MF 김주성 | MF 최강희 | MF 이상윤 | |||||||
DF 정용환 | DF 박현용 | DF 테드 | |||||||||
GK 김풍주 |
K리그 30주년 레전드 베스트 XI | |||||||||||
FW 황선홍 | FW 최순호 | ||||||||||
MF 김주성 | MF 신태용 | MF 유상철 | MF 서정원 | ||||||||
DF 최강희 | DF 김태영 | DF 홍명보 | DF 박경훈 | ||||||||
GK 신의손 |
우리 구단의 비전은 K리그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이제는 더 먼 곳으로 눈을 돌려 아시아, 나아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클럽으로 발전해 나갈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최강희 감독이 있기 때문이다. - 이철근 전북 현대 모터스 단장
봉동이장.
현 시점 K리그 최고의 감독
중하위권 팀 전북 현대를 K리그 최강 클럽으로 도약시키고 명문으로 나아가는 명장[2]
하지만 일각에서는 언론 플레이에 능숙하며 인격적이지 못한 태도로 일관한다는 평가도 있다
목차
1 소개
10년의 순간 |
前 축구선수. 現 전북 현대 모터스의 감독. 현역시절 선수들 사이에서 별명이 개구리였다고 한다. 만화에 소질이 있다고 한다. 축구를 안했으면 만화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3]
경기도 양평군에서 태어나 서울 용두초등학교 시절부터 축구를 시작했으며 이영진 현 대구 FC 감독과는 용두초등학교 선후배 사이라고 한다. 우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9년 실업리그 데뷔 이후, 1983년 프로에 입단하고 K리그 MVP 1번, 베스트 일레븐 4번을 수상했다. 28살에 국가대표가 되어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3경기 풀타임 출전, A매치는 30회 출장하였다. 2013년 K리그 30주년 레전드 베스트 일레븐으로도 선정 되었다. 이른바 대기만성형 선수라고 볼 수 있다.
현역시절 언론에서는 강인한 체력으로 필드를 누비고 다니는 최강희 선수를 스태미나의 화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 700경기 출전의 대기록을 세운 김병지 선수가 선정한 소속팀 베스트일레븐에서는 우측풀백으로 선정되었다. 김병지 선수는 최강희의 선수시절을 '지칠줄 모르는 체력의 화신' 영리한 경기 운영이 돋보인다. 라고 설명했다.
2005년 전북 현대 모터스에 감독으로서 부임을 하여 그 해 FA컵 우승, 2006년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 2009년, 2011년, 2014년, 2015년 K리그 클래식을 4회 우승하며 전북이라는 팀을 중위권에서 K리그 클래식 신흥명문의 반열에 올려놓은 K리그의 히트상품 닥공축구의 창시자 이다.
감독으로서의 별명은 2006년 AFC 챔피언스리그 토너먼트에서 중국팀들을 격파하고 올라가 우승하는 모습을 보고 중국언론에서 붙여준 청나라의 황제인 강희제에서 따온 강희대제와 K리그에서 친근한 이미지로 다가온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4]에서 따온 봉동이장이 있다. '왕년의 스타'들을 재활시키는 데에 뛰어난 능력으로 재활공장장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K리그 감독으로서 언론미디어를 즐겨 이용하는 편이다. 대체로 K리그를 담당하는 미디어와 기자들은 최강희 감독의 위크있는 유머를 좋아하는 편이다. 한국의 무리뉴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한시적으로 2014 브라질 월드컵 최종예선을 맡아 8회 연속 본선 진출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하였다. 2013년 6월 18일 지역예선 경기를 모두 마치고 이전부터 공언한 것처럼 최강희 감독은 사의를 밝히고 전북현대로 복귀하였다. 최강희호의 최종 전적은 7승 2무 5패(공식전 5승 2무 2패)
한 팀에서 감독으로서 10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며 모든 대회 우승을 달성하며 3관왕 트리플 크라운[5]을 달성했고, K리그 클래식 감독상을 3번 수상하는 등, 2015년에는 마침내 단일팀 최다승 154승[6]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하며 K리그 최고의 감독 자리에 올라섰다.
전북에서 대단한 역사를 남긴 최강희 감독에 대한 전북팬의 사랑은 엄청나다. 리그제패는 물론이거니와 아시아 무대의 챔피언이 된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고, 대전에게조차 승점자판기라 불리었던 보잘 것 없던 지방의 작은 중위권 팀을 맡아 한 팀의 역사와 운명을 변화시킨 감독이기 때문이다.
명장들 중에는 팬들에게 인기가 높아도 보드진에게는 백안시되는 감독들이 존재 하는데 업적이 업적인지라 전북 현대 보드진에게도 무한 신뢰를 받고 있다. 최강희 감독이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잠시 떠나있던 2012 시즌과 2013 시즌, 전북이 내외 안팎으로 많이 흔들리는 홍역을 겪으면서도 감독 대행들을 계속 신임 한 것은 '이순신 최강희 감독이 돌아오신다' 라는 희망으로 전북팬들과 서포터, 그리고 구단 프런트들이 믿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 선수 시절
2.1 클럽
84년 현대 호랑이 창단멤버 |
대학으로 곧바로 진학하기 않고, 곧바로 실업리그 한일은행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병역의 의무로 지금의 상무역할의 육군 축구단을 거쳐 1983년 포항제철에 임대로 입단하며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포항에서는 부상으로 3경기 출장으로 그치고 만다. 포항에서 1시즌을 보낸 후 이듬해 1984년 현대자동차에서 태동한 현대 호랑이로 이적하며 창단멤버가 되었다. 최강희는 현대 호랑이의 주장을 역임하기도 하였으며 1991년 은퇴 할때까지 현대 호랑이에서 뛰었다.
대우로얄즈 선수와 경합을 하고 있다. |
선수 시절에 강인한 체력으로 필드를 누비며 '스태미나의 화신' 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 예를 들어 지금의 전북현대 최철순 선수와 비슷한 플레이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뛰어난 활약으로 1985년 아디다스컵을 우승하였다.
개인수상으로는 1986년 수비수로서는 최초로 리그 MVP를 받았고, 1985년, 1986년 1988년 수비수로서 3차례 베스트일레븐, 1991년에 미드필더로서 1차례 베스트일레븐을 지내며 총 4차례 베스트일레븐을 수상했다.
91년 현대 선수시절 |
1991년 현대 호랑이의 감독으로 취임한 차범근과 갈등을 빚은 끝에 1992년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7]
2.2 국가대표
88년 서울올림픽 대표팀 |
88년 카타르아시안컵 대표팀 |
89년 한일정기전 |
신문에서 90년 월드컵 대표로 소개되는 최강희 선수 |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멤버들이 이회택 감독에게 전술지시를 받고 있다. |
대표팀에서 훈련중인 모습 |
월드컵 아시아예선에서 황선홍 선수의 골을 기뻐하고 있다. |
김포공항에서 이탈리아로 출국하는 선수들 |
이탈리아 월드컵 벨기에전 |
벨기에전, 헤딩 클리어를 하고 있다. |
이탈리아 월드컵 스페인전 |
홍명보 선수와 수비벽을 쌓고 있다. |
황보관 선수의 골에 기뻐하고 있다. |
그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27세이던 1986년에 포항제철의 이흥실과 공동 MVP로 선정되고, 28세이던 1987년에 1988 서울 올림픽 대표 선수로 선발되면서부터였다. 이후 1989년 한일정기전등 꾸준히 대표팀에 선발되며, 1990 이탈리아 월드컵 국가대표팀에도 선발되어 월드컵 조별예선 3경기에 모두 풀타임 출장했다.
3 코치
현대 호랑이 시절의 은사이던 김호 감독을 따라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서 트레이너와 코치 생활을 하며 지도자 경험을 쌓았다. 하지만 2002년에는 동계 훈련 도중 김호 감독과의 불화로 해고 되었다. 이후 절친한 사이인 박항서 감독 밑에서 부산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팀 코치로 합류했다.
2003년 움베르투 코엘류 감독이 대표팀을 지휘봉을 잡았을때 박성화와 함께 성인 국가대표팀 코치로 선발되며 감독을 보좌했다. 대한민국 축구에 익숙하지 않은 코엘류 감독에게 조언을 자주 했다고 한다. 유명한 을룡타 사건 당시 이을용의 퇴장 이후에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코엘류 감독에게 조언을 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박성화와 함께 국내 코치진을 맡아 보좌했는데 조셉 아우구스토 피지컬 트레이너가 한국을 떠나며 한국 코치들을 비판한 바 있다. 감독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하극상을 일으켰다는 것이 그 요지인데 코엘류 쪽 사람의 주장인 만큼 어느정도 걸러들을 필요는 있다. 축구협회에서 제대로 된 지원도 받지 못하고 감독과 코치간의 반목으로 훈련과 전술운용이 될 리가 없던 코엘류호는 오만 쇼크와 몰디브 쇼크를 연달아 맞고 좌초하게된다.
2004년 쿠엘류 감독이 오만 쇼크 및 몰디브와 비기는 등 부진한 성적으로 인해 사퇴하면서 감독대행이 된 박성화 코치와 함께 잠시 더 머물다가 조 본프레레 감독이 부임, 코치진이 새로 짜여지자 국가대표팀 코치에서 사임했다. 그 전에 그가 코치로 몸담았었던 수원에서는 김호 감독의 후임으로 하필이면 현역 시절 크게 마찰을 빚었던 차범근 감독이 새로 부임하자 수원으로 돌아가기도 껄끄러워진다. 결국 이흥실과 함께 브라질로 건너가 연수를 받게되었다.
4 감독
4.1 2005 시즌
이 한번 FA컵 우승으로 감독과 구단, 그리고 K리그의 역사가 변하기 시작한다. |
2005년 시즌 중 전북 현대 모터스의 조윤환 감독이 성적 부진을 책임지고 사임하자, 구단 프런트는 현대자동차가 운영하던 현대 호랑이 시절의 프랜차이즈 선수인 최강희를 감독으로 임명했다. 7월 3일 전북 현대 모터스의 감독으로 부임하자마자 2005년 FA컵을 우승시켰다. 부임 후 본격적으로 준비해서 시작한 2006년은 여러모로 전북과 최강희 감독에게 힘든 해였다. 내적으로는 국내 선수들은 부천파와 비부천파[8]의 갈등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국가대표 출신 골키퍼 서동명을 울산으로 내보내는 대신에 들어온 이용발이 대표적 부천파였는데, 부천 시절부터 타고난 패션 센스는 그대로였지만 지나치게 공격적인 플레이와 잦은 실수를 일으켜 특히 2004 시즌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알 이티하드와의 1차전 2차전 모두 어이없는 실수를 저질러 탈락에 크게 일조하고 알 이티하드를 아시아 깡패로 만들어 주었다. 결국 팀에게 큰 치명타를 안겨 줬다.(...)
4.2 2006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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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 최초의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9] |
부천파와 비부천파 파벌이 나뉘어져 이들간에 갈등이 있었고 외국인 선수들은 기량이 영 아니올씨다였으며 외부적으로는 구단주이자 모기업의 수장인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구속되는 등 악재가 겹쳐 시즌 초반에는 참가 중이던 AFC 챔피언스 리그를 포기하려고까지 했으나 대회 중도 포기를 하면 벌금을 내야되고 또 챔피언스리그에서 예상 외로 선전을 하게 되자 오히려 챔피언스리그에 주력하였다. 결국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며 역전의 명수라 불리우며 챔피언스리그를 우승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부임 2년차에 우승컵이 2개.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으로 강희대제란 별명을 얻었는데 이는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 중국 팀들에게 연달아 이기자 중국 언론들이 그의 이름인 강희가 청나라의 왕 강희제와 한자가 똑같다고 지은 별명이다. 헌데 본인은 그보다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에서 유래된 별명인 '봉동이장'이라고 불리고 싶어하고 있다. 그 이유인즉슨 강희대제라는 강한 이미지보단 선수/팬들이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이미지를 선호한다고. 특유의 가발같은 2:8 가르마도 이장이라는 별명과 잘 어울린다. 봉동읍에서 실제로 명예이장직을 제의하기도 했다.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비바 K리그 전북현대 AFC 챔피언스리그 06우승 엔딩 |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은 5억이라는 우승상금 뿐 아니라 우승 자격으로 참가한 FIFA 클럽 월드컵에서 모기업 현대자동차를 전세계에 홍보하는 효과를 거두게 했다.[10]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 장면이 아시아 대륙 전역에 방송되고 아시아 챔피언 자격으로 출전한 FIFA 클럽 월드컵의 모든 경기가 전세계에 생중계 되면서 일본의 도요타 자동차가 메인 스폰서 하는 FIFA 클럽 월드컵에서 뜻하지 않게 도요타를 제치고 홍보를 누리는 효과를 얻게 된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게된 모기업은 축구단에 대한 인식이 전환하게 된다.
전북현대 구단이 AFC 챔피언스 리그나 FIFA 클럽 월드컵등 국제 무대에 나가기만 해도 모기업인 현대자동차의 이름을 홍보하게 되는 격이니 세계시장 홍보에 힘을 쓰고 있는 모기업 현대자동차로서는 전북의 국제무대에서의 호성적이 반가울 수 밖에 없었고 축구팀에 의한 모기업 홍보 효과가 상당히 괜찮다는 것을 알게 된 모기업 현대자동차는 이철근 단장을 필두로 구단에 대한 전폭 지원을 약속하며 2010프로젝트를 세우고 2010년까지 K리그 첫 우승이라는 목표를 세웠다.
4.3 2007 시즌
AFC 챔피언스리그를 우승하였지만 그것이 곧바로 투자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축구계를 이해하지 못한 모기업이 AFC 챔피언스리그 상금을 귀속시키려는 일도 있었다. 공격수로 마케도니아 리그에서 3시즌 연속 득점왕을 한 스테보를 영입했다. 시즌 중반에는 염기훈이 팀내 분위기를 흐리며 울산으로 강제 2대1 트레이드 되면서 울산으로 떠났던 임유환이 다시 리턴, 정경호와 함께 오게 되었다.
AFC 챔피언스리그에서 전년도 우승 팀 자격으로 자동으로 8강에 진출하여 우라와 레즈와 맞붙게 되었다. 사이타마 원정에서 1-2로 패하고, 전주 홈에서 열린 2차전에서 역전을 이루고자 했지만 사우디아라비아 칼리 알 감디 주심의 노골적인 편파판정으로 4강 진출에 실패하였다. 리그는 8위로 마감하며 6강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였다.
4.4 2008 시즌
J리그에서 자유계약으로 풀린 조재진[11]과 루이스 그리고 포항에서 최태욱과 스테보와 신광훈을 맞임대하는 대규모 리빌딩 작업을 실시하며 K리그의 다크 호스로 주목을 받았으나 기대와 다르게 시즌 초반부터 부진한 성적을 이어가자 성급한 팬들의 비판으로 최강희 감독의 경질론까지 나오게 되었지만 최강희 감독은 직접 전북 홈페이지 게시판에 글을 올려 "아직 시즌은 끝나지 않았다" 읍소하며 팬들의 비난을 잠재웠다.#
저는 전북을 지키면 안되는겁니까? 저는 영원히 전북감독을 하면 안되는거지요? 저도 가끔 꿈을 꿉니다 가슴에 별을 달고 축구판을 호령하는 모습 우리팬들의 영원한 숙제 리그우승도 꿈꾸고 다시한번 아챔 도전을해서 역사를 다시한번 써보자 2006년을 재현해보자 그런 꿈을 꿉니다 |
시즌 후반기에 들어서 7승 1무 3패, 승률 1위라는 놀라운 상승세를 보이며 8위까지 오르게 된다. 정규리그 최종전에서 만난 경남은 무승부만 거두어도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 할 수 있는 유리한 7위의 자리에 올라있었다. 전반에 경남의 김동찬에게 먼저 선제골을 허용했으나 후반 17분 김형범의 크로스를 정경호가 헤딩으로 동점골을 넣었고 후반 31분 김형범의 프리킥으로 역전에 성공한다. 이후 다이치가 추가골을 넣으며 3-1 역전승을 거두고 시즌 첫 리그 6위로 상승하며 극적으로 6강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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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강 플레이오프에서는 리그 3위 성남을 만났다. 전반 중반 전북이 페널티킥을 허용하며 성남이 먼저 앞서나갔다. 후반에 포기하지 않고 두들기던 전북에게도 기회가 왔다. 바로 교체로 나온 김형범이 얼마 뛰지 못하고 부상으로 교체되었지만 코너킥 후 혼전 상황에서 최태욱이 밀어넣으면서 동점골을 성공시켰고 경기는 원점으로 돌아가며 연장으로 이어졌다. 연장전에 들어서자 전북이 또 다시 투지를 발휘하면서 다이치의 패스를 받은 루이스가 역전에 성공하며 성남을 상대로 2-1 역전승을 거두었다.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하며 울산과 대진하게 되었지만 1-0으로 패배하며 최종 순위 4위로 마감하였다.
4.5 2009 시즌
성남에서 트레이드되어 건너왔지만 전북에서 극적으로 부활, 득점왕과 MVP를 차지하며 몬스터 시즌을 보낸 이동국과 에닝요, 루이스, 최태욱, 브라질리아, 김상식 등이 포진한 막강 미드필더진을 앞세워 시즌 내내 순항을 거듭했으며 11월 1일 경남 FC와의 최종전에서 4-2로 승리하고 정규리그 1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챔피언 결정전에서 성남 일화를 상대로 1차전 성남 원정에서 0-0, 2차전 전주 홈경기에서 3:1 승리로 창단 후 15년만에 첫 K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목표로 했던 2010년보다 1년 앞서 우승을 차지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지은 순간 셔츠안에 부상당한 김형범 선수가 마킹된 유니폼을 입고 있어 팬들의 눈시울을 적시기도.
4.6 2010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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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수비라인은 아직 정비되지 않아 흔들리는 모습을 자주 연출하였다. 중국 국가대표 펑샤오팅을 영입하면서 수비 안정화에 기대를 걸었지만 공격력이 그리 좋다고 할수 없는 제주에게 2골을 내주며 2-2로 비겼고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수비에 실수를 보이며 가시마에게 2-1로 역전패 당했다. 제주 유나이티드에 덜미를 잡혀 리그 3위로 마쳤으나
한편 AFC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중국의 창춘 야타이에게 2연승을 거두며 16강 진출을 확정 지었다. 이후 16강 단판에서는 호주 원정을 뛰는 악조건 속에 이동국의 헤딩 결승골에 힘입어 아들레이드 유나이티드에 3:2로 승리하고 8강에 진출했다. 그러나 8강전에서 사우디의 알 샤밥에게 1,2차전 합계 2:1로 패하면서 결국 탈락의 고배를 들었다.
4.7 2011 시즌
자타공인 2011 시즌 K리그 끝판대장
FA컵과 컵대회에서는 16강 8강에서 탈락했으나 정규리그인 K리그에선 16라운드까지 11승 2무 3패에 무려 38득점(!!) 19점으로 2위 포항 스틸러스와는 승점 5점차로 1위를 독주하고 있으며 이후 포항 스틸러스와 승점차를 3점에서 9점까지 늘였다 줄였다 희망고문만 하다가(...) 29라운드에서 정규리그 1위를 확정짓고 챔피언 결정전으로 직행했다. AFC 챔피언스 리그 역시 결승에 순조롭게 선착하여 리그 더블을 노리고 있는 중.
무엇보다 무서운 게 약팀 강팀 안 가리고 매경기 평균 2골 씩 퍼부으며 닥공(닥치고 공격) 축구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6강 PO부터 차례로 서울 수원 포항을 깨부수고 올라온 울산의 철퇴축구 기세에 맞서 닥공으로 맞불을 놓았고, 원정 1차전에서 2:1로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앞선 팀 잎장에서 으레 취하기 마련인 수비적인 전술 대신 공격적인 전술을 들고 나와 결국 2:1역전승을 이루어 2011년 우승을 차지한다. 이에 대해 본인은 '어차피 축제의 장을 마련하자고 했기 때문에 비기고 우승하는 것보다는 이기자고 했다. 홈팬들에게 이기는 기쁨을 나눠주고 싶었다. 큰 경기 부담감으로 미흡한 점도 있었지만 이기려는 의지가 강했다'라고 직접 밝혔다.
2011 한시즌동안 최강희 감독의 전북은 정규리그, FA컵, AFC 챔피언스 리그, 컵대회 포함 47경기에서 108골을 기록, 경기당 2.29골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작성하며 닥공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2011년 9월 18일 K리그 25라운드 경남전에서 3:1 승리를 거두며 감독 개인 통산 100승 감독의 대열에 올라섰다. 이는 역대 11번째 100승 기록이자 역대 최단 기록이다.[12]
2011년 12월 4일 챔피언 결정식 시상 이후 신의 한수준비한 밀짚모자와 장화(!!)를 쓰고 나타나 '봉동이장'이라는 별명을 직접 인증했다. 흠좀무.
본인이 준비한게 아니라 봉동주민들이 챙겨온거라고....
K리그 올스타팀 감독으로 바르셀로나와 상대하였다. 하지만 AFC 챔피언스리그에서 동아시아를 휩쓸고 있는 K리그가 일개 유럽 클럽팀과의 경기에 올스타를 출전시킨다는 것은 스스로 리그 격을 떨어뜨리는 행동이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되었다. 게다가 이러한 친선경기를 이기건 지건, K리그 입장에서는 손해면 손해지 득이 될일이 거의 없다는 점도 문제였다. 팀으로서도 전술적으로도 완성되지 않았던 K리그 올스타는 바르셀로나에게 2-5로 참패하게 된다. 최강희 감독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라며 인터뷰를 하였다.
5 국가대표팀 사령탑 취임
5.1 취임 과정
2011년 12월 7일 조광래 국가대표팀 감독이 전격 경질되고 후임 감독으로 국내파중에선 가장 유력한 후보로 검토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본인이 그럴 일 없다고 했다. 하지만 12월 20일 쿠웨이트전만을 맡는 원 포인트 릴리프 감독으로 내정될 것이다'라는 축구계 관계자의 발언을 소스로 한 기사가 터졌고 감독 선임에 대해선 축협은 21일 발표하기로 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인 12월 21일,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국가대표 감독으로 확정되었다. #
최감독의 선임은 축구협회가 비난의 도마에 오른 가운데 당초 김호곤 울산 감독을 내정하려던 축협이 여론의 뭇매에 항복한 것이라 볼수 있겠지만... 축구팬은 당장 지명도가 높은 최감독 카드를 내밀어 시간을 끌며 면피한다고 여전히 축협을 비난중이다. 하기야 조광래 감독 해임 직후 선임했다면 또 모르겠으나 2주일이나 흐른 뒤에, 그것도 온갖 외국인 감독 이름을 흘리며 언플을 해대다가 뜬금없이 선임했으니 누가 봐도 축협의 정치적 쇼에 불과했으니.
애당초 쿠웨이트 전은 원 포인트 릴리프 형식으로 한 경기만 임시 감독이 맡은 뒤, 최종예선에선 정식으로 후임 감독을 선임하지 않을까 예상이 우세했으나... 최강희 감독을 선임했지만 계약기간은 정하지 않았다는 괴랄한 결과물을 들이대며 무능력 행정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언론은 여전히 거수기 불투명한 선임 과정과 절차를 놓고 공세를 퍼부었으나, 축협은 '백의종군'이라는 개드립을 치면서 생깠다. 백의종군은 그런 뜻이 아닐 텐데
결국 축구협회는 '22일부터 구체적인 협상을 진행하겠지만 브라질 월드컵에 나가면 그때까지 임기를 보장하겠다'며 뒤늦게 진화에 나섰다. 한마디로 국내파 감독은 일단 질러놓고 보는거냐 급한 김에 최강희 감독 선임부터 해놓고 구체적인 협상은 이후 분위기 봐가며 진행한다는 소리다. 즉 조광래 감독 해임 시점부터 뒷일은 아무런 고민도 준비도 없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인증했다.
해외 유수의 명장들을 기대하던 축구팬은 실망스럽다는 반응이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적으로 외국인 감독이 단기간 팀을 파악하고 추스리는 일은 불가능한 만큼 국내파 감독 가운데 그래도 믿을 만한 감독이라는 긍정적 반응도 있다. 어쨌든 조광래보단 낫다는 건가 무엇보다 최강희 감독의 국가대표 감독 선임의 최대 피해자는 최강희 본인과 전북팬들. 최강희 감독은 2011년에 아쉽게 놓친 아시아 최강의 자리를 되찾겠다며 열성적으로 준비하던 2012시즌을 포기해야 했고, 전북팬들은 팀을 K리그의 강팀까지 키워놓은 감독을 하루아침에 잃고 말았다.
오히려 축구팬은 대표팀 운영보다 최강희 감독의 장래 커리어를 걱정하는 상황까지 닥쳤다. 전임 조광래 감독 역시 경남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지만 대표팀에선 끝내 낙마하고 말았는데, 프로팀과 대표팀은 운영 방식이 차이가 나는만큼 최강희 감독의 화려한 프로팀 커리어가 결코 대표팀에서 성공을 담보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5년 전 박성화 감독의 실패도 있다. 데자뷔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현 사태와 똑같은 과정을 거쳐-부산 감독을 그만두고 올림픽 대표팀을 맡았다가- 끝내 결과를 내는 데 실패, 국내에서 감독 커리어가 절단나버린 과거가 있다. 결과적으로 그때 한 감독의 커리어를 말아먹은 높으신 분들이 아직도 변함없이 그 자리에 계시다는 점은 굳이 설명이 필요할까? [13]
조광래 전임 감독과는 달리 이동국 같은 베테랑들이 투입될 가능성이 높으며 해외파라도 K리그 선수들과 동급에서 주전경쟁을 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모든 건 다가오는 쿠웨이트전을 이기고 난 뒤에야 무슨 이야기든 나올 상황이라... 아무리 최감독이 11년 시즌 3패밖에 하지않은 위기관리능력이 뛰어난 감독이라지만 단판에 모든 승부를 걸만큼 베짱이 있을지는 두고봐야 할듯.
최강희 감독이 감독 후보 물망에 올랐을 때 축구팬 사이에서는 전북이니까 놓아준다/놓아줄 리가 없다 의견이 분분히 나뉘면서 현대가 파워가 어떻게 작용할지가 관심사였는데, 본인이 구단 홈페이지에 남긴 글로 미루어보아 본인의 의지보다는 외압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전북 구단측이 감독을 지키는 데 너무나도 무력했던 점을 보아 사실상 현대가 높으신 분들 사이에서 합의가 있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런데 누구도 예상 못한 돌발 변수가 나타났다! 최강희 감독은 취임 기자회견에서 '계약 받아들이지 않으면 대표팀 거부하겠다'며 2013년 6월, 즉 최종예선까지만 대표팀을 맡고 그 후에는 전북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최강희 감독은 대표팀 감독직을 맡게 되었고, 대표팀 감독으로서는 2012년 2월 25일 우즈베키스탄과의 친선평가전으로 첫 A매치를 치뤘다. 결과는 4:2 대한민국팀의 승리였다. 그리고 2012년 2월29일 쿠웨이트와의 월드컵 3차예선에서 2:0으로 승리, 최종예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덤으로 일본이 우즈베키스탄에게 져서 톱시드까지 획득하게 되었다. 이후 행적은 최강희호항목 참조.
그리고 임기 만료를 앞둔 2013년 5월에도 예선 이후에는 전북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사는 명확했으며, 기자들에게 '나에 대해서 부정적인 기사를 써달라, 그래야 내가 아니라 다른 감독을 앉히지 않겠느냐'라고 까지 말했을 정도.
이젠 축협으로선 언플이 아니라 진짜로 월드컵 본선을 맡을 외국인 명장을 물색하지 못하면 거짓말쟁이 사기꾼으로 몰릴 상황. 고것 참 쌤통이다
그런데 외국인 명장은 꿈 홍명보가 후임 국가대표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홍명보호의 월드컵이 처참한 실패로 끝난 현재, 명백하게 감독의 책임이 절대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조광래, 홍명보 감독과는 달리 최강희 감독은 최소한 자신이 공언한 약속[14]은 지켰고 부임 과정에서 축협의 외압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나마 나은 평가를 받고 있다. 물론 경기력 면에서는 앞선 두 감독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기에 할 말이 없기는 하지만. 다만 본인도 애초에 자신은 대표팀 감독은 체질적으로 안 맞는다고 했었고 퇴임 이후에도 대표팀 감독으로서는 좋은 감독이 아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해당 기사
5.2 퇴임 이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2014 브라질 월드컵 8회 연속 진출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하였다. 당초 이란전이 끝난 후에 6월 23일 전주시와 전북 현대 모터스 구단이 복귀 환영식을 열고 6월 26일 수원과의 원정경기에서 복귀전을 치를 예정이었으나, 이란전 패배 후 복귀 환영식은 취소되었다.
최강희 감독의 원칙은 경기감각을 유지하는 국내파들을 중용하며, 경기를 제대로 뛰지 못하는 해외파들을 경쟁체제로 돌리고 파벌로 갈라진 대표팀을 봉합하려고 시도했다. 이에 불만을 가진 해외파 기성용과 윤석영 등 일부 젊은 선수들이 최강희 감독을 무시하고 디스하는 어조의 글을 SNS에 올린 것이 알려지면서 SNS 항명파동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했다.
기성용은 지난해 2차 예선 최종전 쿠웨이트전을 앞두고 최강희 감독이 "스코틀랜드 리그는 팀 간 격차가 크다. 셀틱 빼면 내셔널리그와 같다"고 말한 데 대해 자신의 비밀 페이스북에 "고맙다. 내셔널리그 같은 곳에서 뛰는데 대표팀 뽑아줘서"라고 글을 게재했다. 쿠웨이트전 직전에는 "소집 전부터 갈구더니 이제는 못하기만을 바라겠네, 님아. 재밌겠네" 등의 글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이보다 앞선 6월 1일 자신의 트위터에 "리더는 묵직해야 한다. 안아줄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사람을 적으로 만드는 건 리더 자격이 없다"는 글을 올렸다.
이에 대한 기성용의 비밀 페이스북이 공개됨에 따라 그 동안 최강희 감독에 대한 조롱등 심각한 하극상의 발언들이 알려지며 국내파와 해외파벌 대표팀내 갈등이 심각했음을 알게 되었다. 현재 이에 대하여 국대 감독 시절이 재조명을 받고 있으며 저런 "건드리지마, 오만한 모습 보이지 않길 바란다. 다친다." 라고 조롱발언을 재미삼아했던 해외파벌 선수들과의 갈등중에서도 턱걸이로나마 월드컵 본선행을 이룬 게 대단한 것이라는 여론 반전이 일어나고 있다. 또 한 팀내 불화에 대해 최강희의 지도력 부재를 논하기엔 해외파벌 선수들의 멘탈이 너무 쓰레기란 의견이 압도적이다. 국가대표 감독으로 부임하여 데뷔경기였던 쿠웨이트전을 치르기전부터 페이스북에 조롱글이 올라왔을 정도니.....
더군다나 MBC의 한기자가 공중파에서 말하길 기자들은 대표팀의 분위기에 대해 어느정도 알고 있었다며 최강희 감독 이전의 대표팀이 해외파벌 갈등이 더 심했다 라는 발언을 꺼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조광래호 시절에 조광래 감독은 해외파를 무조건적으로 신뢰하였고 심지어는 1군과 2군을 분리하여 훈련장도 따로 이용해왔다는 것, 이에 국내파 선수들은 해외파 선수들이 소속팀에서 경기에 제대로 나오지 않아도 대표팀에서는 무조건 선발로 세우는 것에 대하여 불만이 팽배하여 있었다고 한다. 이에 조광래 감독이 경질되고 최강희 감독이 부임하며 국내파와 해외파를 다시 경쟁체제를 돌리자 해외파 우대체제에 젖어있던 해외파 선수들이 불만을 가지고 이에따라 더욱더 팀내 불화가 양극화되어 심화, 결론은 조광래호로부터 해외파벌과의 갈등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걸 가지고 기자들이 뒷북친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생각해보자. 기자들이 뒷생각 안하고 이런 불화를 빵빵 터트리면 어떻게 될까? 10bird로 유명한 우충원 기자도 '기자들도 나름대로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인지라 이런 취재거리를 쥐어도 쉽게 못 터트린다'라고 말했다. 참고로 저 양반은 좋은 평판을 받지 못하는 기자인데 저 말에 대부분의 기자들이 수긍할 정도였으니 말이 더 필요한가? 라지만 그래봤자 저 말은 기자들의 동료의식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얘기에 수긍한다는 것은 자신들이 알지만 터트리지 않았다는 의미고, 이 얘기에 반발한다는 의미는 아예 몰랐거나 혹은 축구계가 곪는 걸 방치했다는 뜻이므로.
결국 기성용측 소속사에서 비밀 페이스북을 사칭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다가 그게 안되니 기성용 본인이 마지못해 하루가 지나 직접도 아니고 기사로 사과를 발표했고, 이에 대해 "그 얘기는 들었지만 지금까지의 인터뷰에서 누누이 밝혔듯이 어떤 선수도 미워하지 않았다. 기성용도 마찬가지다""내게 사과할 필요는 없다. 축구인은 축구로 진정성을 갖는다. 새롭게 대표팀을 이끌 홍명보 감독을 위해 열심히 축구에 매진하고, 팬들에게 보답하면 된다" 며 다시한번 대인배 인증 하였다.하지만 그 사이 기성용은 비밀 페북의 업뎃을 시도했다 기성용은 큰 일할 선수고, 미워한 적 없다고.[15]리더는 묵직해야한다. 그리고 안아줄 수 있어야한다.
하지만 2014년 12월 9일 이청용 선수가 인터뷰 기사를 통해 최종예선당시 팀에 아무런 전술적 약속도 없었고 심지어 셋트플레이 준비도 턱없이 부족해 선수들이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경기에 임했으며 당시 최종예선 통과는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고 밝히며 최강희 감독에 대한 새로운 시선이 생겨나게 되었다.
거기에 덧붙여 2014년 12월 26일 기성용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해당내용의 재확인과 함께 당시 상황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새롭게 출발하는 슈틸리케호에서 그간 최강희 감독에게 배척받았던 손흥민, 기성용이 팀의 주축으로 활약하게 되면서 해당 논란은 수면아래로 사라지는 분위기이다.[16]
6 전북 현대 모터스 복귀
6.1 2013 시즌
이 편지를 썼던 소녀는 최강희 감독의 홈 복귀전에 초청되어 직접 최강희 감독을 만났다. |
6월 27일, 전북 현대는 최강희 감독과 3년 6개월의 계약을 맺었다고 공식 발표했다. 계약기간은 2016년까지. 복귀가 약간 지연되어 새롭게 수석코치로 내정된 신홍기가 1게임을 감독 대행을 맡아 치렀다. 6월 28일부터 구단에 복귀하였다. 일각에선 당분간 휴식을 취하고 가을 즈음 복귀하지 않을까 예상했고, 구단측에서도 내심 복귀를 바라면서도 그동안 최강희 감독의 내적, 외적고생이 극심했음을 아는 터라 쉬고 오라는 분위기였으나 수원전에서의 5:4 패배를 본 최강희 감독 본인이 이대로는 안되겠다며 빠른 복귀를 선언했다. 지난 시즌은 이흥실 수석코치가 감독 업무를 대신했으나, 이번 시즌은 그마저도 놓치고 파비오 피지컬 코치(...)가 감독 업무를 보는 파행이 반년이나 이어졌으니......
편지를 쓴 소녀와 홈 복귀전에서 만나는 모습 |
사실 K리그 팬들 사이에선 최강희 감독이 부재 중이던 1년 6개월 사이 전북이 완전히 망가졌다는 평가가 공공연히 흘러나오는 판국이었다. 일부 비관론자들은 전북이 과거 끝판대장 포지션을 되찾으려면 처음 최강희 감독이 취임했던 때처럼 5~6년 세월은 걸릴 것이라 할 예측하기도 했다. 하지만 구단 측에서 감독 부재중인 상황에서도 지난 이적 시장에서 미친듯이 돈을 퍼부어 케빈 오리스, 이승기, 박희도, 송제헌, 정인환, 이규로, 정혁, 이재명 등 좋은 자원들을 꾸역꾸역 끌어모았고 이재성을 자유영입하며 발굴했다. 기존 1, 2군 선수들의 기량 역시 리그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인지라 이런 막강한 스쿼드를 보유한만큼 이번 시즌에서도 얼마든지 반등을 꾀할 동력 자체는 충분하다.
그리고 6월 30일, 일리야 페트코비치 감독 체제로 바뀐 뒤 대전을 6:0으로 대파하며 호조를 보이던 경남 FC를 전주 홈에서 맞이하여 복귀전을 치렀다. 결과는 케빈과 이동국이 각각 2골씩 기록하며 4:0 명량해전대승을 거뒀다. 이를 두고 찌라시들은 닥공부왘부활을 외쳤으나, 사실 경기 내용을 봤을 땐 닥공과 거리가 멀었다. 전후반 내내 주도권을 쥔 쪽은 경남이었는데, 최강희 감독은 상승세의 경남에 맞불을 놓는대신 점유율을 포기하고 대신 공격을 끊었을 때 빠른 역습으로 털어버리는 전북식 철퇴축구를 들고나왔다. 경남으로선 좋은 경기를 했지만 화룡점정-골을 넣을 공격수가 부족했다는 점에서 분루를 삼켜야했다. 반면 전북이야 이동국 케빈 에닝요 레오나르도 이승기 누구 발이든 찬스가 걸리면 높은 확률로 골을 넣어줄 테니.....이건 미친 짓이야 나는 여기서 나가겠어!
거기에 대표팀 감독 과정에서 심란한 사건들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호주 출신으로 전북에 입단했으나,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2군에 처박혀 있던 용병인 윌킨슨을 마개조해 최고의 수비수로 만들어 놓지를 않나,칼럼참조 역시 최강희 감독은 전북에 있어야 한다. 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덤으로 해당 선수인 윌킨슨은 호주 국대로 뽑혀 나가 조별 예선 칠레전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K리그 30주년 레전드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된 최강희 감독 |
15라운드를 마친 6월 30일 현재 전북은 승점 24점으로 리그 5위. 4위 제주와 승점은 같지만 득실차로 밀렸다. 한편 1위 포항은 29점, 2위 울산은 27점. 올라갈 팀은 올라간다 결국 승점 63점으로 3위로 시즌을 끝마쳐 K리그 최초 AFC 챔피언스리그 5연속 진출 기록을 세웠다.
6.2 2014 시즌
K리그 세번째 우승을 하였다. 후반기 들어 닥공보다는 수비 밸런스에 더 중점을 두는 모습을 보였다. 8월과 9월을 기점으로 상대의 극단적인 수비텐백에 여러모로 고전하는 모습이 보이자, 승리를 놓치지 않는 실리적인 축구로의 변화를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전북은 그 동안 과정이 좋으면 결과가 따라온다는 철학을 뒤집고, 결과를 내는 실리를 추구했으며 결과가 좋아지자 점차 경기력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결과 10월부터 K리그 최초 8경기 무실점 연승을 기록했고, 리그 종료시에는 실점률은 22점, 득실차로는 39점을 기록했다. 시즌 초부터 대다수 축구인과 팬들에게 1강으로 꼽힌 전북이었고, 예상대로 무난하게 24승 9무 5패 승점 81점을 획득하며 일찌감치 리그 우승을 확정했다. 2위 수원이 승점 67점 3위 서울이 승점 58점임을 감안한다면 압도적인 페이스다.
팬들에게는 수비 밸런스적인 축구지만 공격적인 본능을 잃지 않고 방패로 상대팀을 후두려팬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가지 이채를 띈 기록이라면 리그 최다 득점 최소 실점을 동시에 기록했다는 점이다. 시즌 내내 최강희 감독은 전북은 1강이 아니고 올해 전력도 역대급이 아니라고 거듭 밝혔는데[17] 실제로 닥공을 트레이드 마크로 내건 전북이 수비에 역점을 두고 팀을 운영했을 만큼 고민이 깊었던 시기였다.
최강희 감독은 휴식기간 동안 유럽으로 건너가 스페인의 AT마드리드의 시메오네 감독과 만나 수비에서 공격으로 넘어가는 밸런스 전술에 대해 상의하고 완성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생각이 들면 다시 2011년과 같은 파괴적인 닥공을 선보이겠다고 예고했다.
다만, 8월 서울과의 전주 홈경기에서 내팀내의 업그레이드 버전에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 유일한 티. 시구자 누가 골랐냐?[18] ??? : 씨익 박촉새 ㅅㅂㄹㅁ
6.3 2015 시즌
에두 영입과 에닝요를 재영입하며 그 동안 이동국을 중심으로 했던 4-2-3-1 전술에서, 에두와 이동국의 투톱을 중심으로 한 4-4-2 전술로 변화를 시도했다. 최강희 감독은 전반기 내내 지속적으로 투톱의 가능성을 시험했다. 투톱을 가동한 닥공은 미드필더 숫자가 줄어들어 수비에 약점이 생겼지만 최전방에서는 엄청난 파괴력을 발휘하였다. K리그 최강의 공격력을 자랑한 투톱의 닥공으로 에두는 11골로 득점 선두를 달렸고, 이동국은 8골로 2위에 올랐다. 리그에서는 1위 선두를 달리며 2위 수원과 승점 10점차로 벌리며 전반기를 마감하였다. 에두와 에닝요가 이적과 계약해지를 하였지만 후반기를 앞둔 여름이적시장에서 루이스와 베라, 이근호를 영입하였다.
단일팀 최다승 154승 대기록을 달성한 최강희 감독 |
수원전에서 수원의 김호 감독과 단일팀 최다승 153승이라는 타이기록을 함께 가진 수원을 상대로 승리하며 전북에서 단일팀 최다승 154승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하였다. 역전승으로 인한 열광적인 분위기에 취하여 루이스와 함께 승리의 춤을 추었다, 그리고 이 날이 오기까지 전현직 선수들과 팬여러분의 도움으로 이 자리에까지 왔다고 감사하다면서 팬들에게 큰 절을 올렸다.
K리그 올스타 팀최강희 VS 팀슈틸리케 |
K리그 올스타전에서 팀최강희의 감독이 되어서 팀슈틸리케와 대결을 벌였다. 양팀은 각 포지션별로 드래프트로 선수들을 추첨했다. 그 동안의 이벤트식 경기와는 달리 진검승부를 펼쳤고, 뜨거운 공방전속에서 3-3으로 무승부를 거뒀다.
7 기타
- 피파온라인3 전설의 선수 최강희는 한국의 람으로 평가받으며 한국 우측풀백으로서 밸런스가 있고 수비안정감이 있어 쓸만한 선수라고 한다.
- 2014년을 기점으로 이재성, 이주용이라는 걸출한 라이징 스타를 과감히 키워 냄으로서[19] 재활공장장이라는 이미지는 어느정도 씻어내는 데 성공. 하지만 여전히 베스트 일레븐에서는 꽤 보수적인 선택을 하는 편으로서, 기용되는 평균 나잇대가 다소 높은 편이다. 2014년 현재, 아직 데뷔하지 못한 신인들도 꽤 된다! 2015년에는 김형일, 이호, 에닝요, 에두 등을 영입하며 다시 재활 공장장 이미지가 나오나 했으나 이호와 에닝요의 활약이 좋지 않은 와중에 최보경[20]을 주전급으로 키워내며 유망주에 대한 관심을 잊지는 않았다. 그리고 에닝요가 결국 자신의 활약에 실망하여 팀을 떠나게 되자 그의 공백을 루이스를 다시 데려오며 해결하려 한다.
- K리그 최고의 윙 전술 감독으로 꼽힌다. 최강희 감독 자신이 선수시절에 윙백이어서 그런듯. 이 부분은 전북 현대 모터스 항목을 참조바람. 하지만 2011년 챔피언 결정전 이후 인터뷰에서 '미드필드에서 경기 운영을 잘 하는 선수를 영입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언급한 것처럼
설마 뼈정우?측면을 이용한 전술을 선호하지만[21] 무조건 닥치고 윙 수집 정도까지는 아니다.
- 인터넷 사용에도 능숙해서 미니홈피나 팬클럽 카페에서 활발히 활동해서 소녀팬들이 많은데 봉동에 있는 훈련장에는 선수 팬보다 감독 팬들이 더 많이 찾아온다고. 그런데 2008년 시즌 전에 조재진, 강민수 등 대어를 영입하며 나름 알차게 보강을 했으면서도 수비조직력이 막장을 치달으면서 하위권을 달려 욕을 많이 먹던 중, 9월 8일에 구단 홈페이지에 '성적에 대한 책임은 무조건 내가 지겠다. 믿고 기다려 달라' 는 내용의 장문의 글을 올리고 이후로 축구에 집중하겠다며 그때부터 미니홈피와 팬클럽 활동을 줄였다.
그 와중에 선수들이 지금까지도 싸이 카톡 하데질에 빠져있는 모 야구단을 디스하셨다.[22] 참고로 이때부터 연승을 거두며 부진에서 탈출하여 6위로 정규리그를 마치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해서 4위로 시즌을 마쳤다.[23] 2009년에는 팀 운영에 주력하기 위해 미니홈피와 팬클럽까지 폐쇄하더니 결국 우승. 그런데 2010년부터 축구계에 하도 트위터바람이 불다보니 그 유혹에 끌리시다가 결국 카카오톡을 하고 계신다는 듯.
- 한준희 축구 해설위원은 전북 프런트에서 선물로 준 녹-검 사선 줄무늬 넥타이를 자주 매고 다니고, 최강희 감독이 맸던 넥타이를 하사(?)받을 정도로 공인된 전북빠다. 최강희 감독이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될 당시에 "최강희 감독 선임 K리그와 전북에 피해줬다" 라며 인터뷰로 심정을 밝히기도 하였다.
- 2005년 이전 중위권에서 상위권으로 탈바꿈시킨
알렉스 퍼거슨최강희 감독과맨체스터 유나이티드전북의 스토리텔링, 그리고 현재 리그 내에서의 위상으로 K리그 클래식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라고 보는 시선이 있다.퍼거슨경 시절의 맨유, 만약 이장님이 물러나시면 모예스 판할이 온단 말?? 상상하기 싫다조금만 더 노력해서 바이에른 뮌헨으로
- 최강희 감독이 7년동안 전북을 어떻게 이끌었는가에 대해서는 이 기사를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 창단 20주년 전북에서 고속성장의 10년을 같이 한 이철근 단장과 최강희 감독 체제는 5년 내에 구단재정의 절반을 직접 벌어 해결하고 10년 후에는 자생하는 구단으로 끌어간다는 플랜을 세웠다. 이철근 단장과 최강희 감독의 10년 특별 대담기사1편2편
-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전북은 브라질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이 끝나는 2013년 6월까지 수석코치였던 이흥실 감독대행 체제로 가게 된다. 그러나 2012 AFC 챔피언스리그에서 전북이 초반 2경기 모두 1:5로 대패하고 결국 전북 팀 역사상 최초로 AFC 챔피언스리그 조별예선에서 탈락하는 수난을 당하자 최강희 감독을 그리워 하는 전북 팬들의 그리움이 짙어지고 있다.
그런데 챔스 탈락 이후 최강희 감독 시절에도 달성하지 못한 구단내 최다 연승 기록인 8연승을 달성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했다
- 전북 현대는 최강희 감독 부임 후, 강팀으로 도약하며 아시아에서도 대륙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아시아의 축구팬이라면 전북을 모르는 축구팬이 없으므로 전라북도와 전주시의 홍보에 도움이 되고 있다. 전주시에서 문화협력 교류차 프랑스 파리와 베르사유 등을 방문했는데 전주시에서 왔다고 하니, 베르사유에서 전북을 알고 있어 깜짝 놀랐다고 한다. 전북현대는 리옹과 자매결연을 맺고있다.
- 2015시즌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에서 진행한 전지훈련에서 마라도나와 만나 친구를 하기로 했다.
- 결혼 이후부터 지금의 헤어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SPOTV의 <UHD 스포츠 스토리>의 인터뷰 코너에서 '리그 경기에서 전주 월드컵 경기장에서의 리그 홈 경기에서 만원 관중을 기록하면 헤어스타일을 바꿀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24]
8 비판
8.1 인격적인 부분
선수시절 울산 구단에 독일식 선수 관리시스템을 적용하려는 차범근 감독과 불화가 생겨 대판 싸우게 되자, 차범근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한 캐리커쳐를 그려 선수단에 배포했고, 동료 선수들이 그 그림을 향해 다트를 던지며 차감독을 모욕했다는 일화를 십수년이 지난 시점의 인터뷰에서 공개했다. 해묵은 과거를 들춰내며 선배이자 자신의 은사였던 레전드를 다트판 커리커쳐로 전락시키며 조롱하듯 인터뷰를 한 태도가 비인격적이라는 비판이 거셌다. 최강희는 이뿐만 아니라 비바 K리그와 포포투를 포함한 여러 언론에서 차범근을 독선적인 사람으로 비하하며 내가 그때 차범근님 때문에 담배를 너무 많이 피웠어! 라는 식으로 비아냥거리기를 서슴치 않았다.
애당초 그와 차범근이 불화를 겪으며 은퇴까지 향하게 된 원인에는 그의 잘못이 크다는게 축구계의 중론이다. 선수시절 최강희는 매번 만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며 틈만 나면 줄담배를 피워댔고, 철저한 자기관리로 유명했던 차 감독은 당연히 이에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은사인 조중연이 현대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 겨우 술과 담배를 끊고 선수 생활의 전성기를 누렸으나, 조중연이 물러나고 차범근이 현대 감독으로 부임한 뒤, 몇 차례 의견 충돌 이후 다시 술과 담배에 빠져들었고 이런 자제력 없는 태도는 그가 조기 은퇴하게 된 주요 원인이 되었다. 몇몇 팬들은 계약문제로 차범근이 독선행위를 저질렀고 차범근 때문에 최강희가 담배를 피우게 된 양 사실을 날조하고 있는데 이는 최강희의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하며 차범근이 선수의 계약문제에 직접적으로 개입되었다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25] 즉 양비론을 위한 물타기에 불과하다는 것. 또한 그는 차범근에 의해 자신이 강제로 억울하게 은퇴당했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전북의 레전드인 최진철을 강제로 은퇴시키는 짓을 저지르기도 했다.
자가당착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이 뿐만이 아니다. 움베르투 코엘류 감독이 대표팀을 지휘봉을 잡았을때 박성화와 함께 코치진을 맡아 그를 보좌하는 역할을 맡았음에도, 보좌내내 그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항명으로 일관하였으며, 그가 성적부진으로 경질된 이후 코엘류를 향해 인신공격성 비난을 가하길 서슴치 않았다. 그는 수차례 방송과 언론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모시던 코엘류 감독을 물러터진 인간, 감독으로서 기본적 자질이 없었던 인간이라며 인신공격하였고 모욕하였다. 기사
코치시절 그는 트러블 메이커로 유명했고 자기주관과 마인드가 너무 뚜렷해 윗사람들의 지시를 어기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경향이 잦았다. 특히 언론 플레이에 능숙해 자신과 대척점에 선 상대를 나쁜사람으로 몰아세우는 경향이 심했다. 수원 트레이너, 코치 시절에도 불성실한 태도와 감독의 지시를 어기고 멋대로 행동하다 경질되었음에도, 이를 참고 자신을 고용해준 은사 김호 감독을 지금까지 비난하고 다니고 있으며 자신이 부당하게 해고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호는 최강희가 은퇴를 결정했을때 그를 94 월드컵에 데려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축구유학비를 마련해준 사람이며, 수원 구단이 창단되자마자 자신의 팀으로 곧장 데려온 은사였다. 어떻게보면 은인과도 같은 인물인 셈. 하지만 최강희는 자신의 그릇된 태도로 인해 발생된 균열을 모두 그 사람의 탓으로 떠넘기고 지금까지 김호 감독을 비방하고 다니고 있다.
참고로 차범근은 지도자 생활중 안정환, 고종수, 이천수등 여러 선수들과 갈등이 있었으나 단 한번도 선수에게 나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차범근이 유일하게 참지 못하고 한마디를 던진 대상이 바로 최강희인데, 참다 못한 차범근은 "너는 정말로 나쁜 놈이구나."라는 말을 남겼다고.
8.2 지도력에 대한 의구심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맡으며 졸전에 졸전에 거듭된 졸전을 거듭하며 대표팀을 월드컵 예선탈락의 위기에 몰아갔다. 카타르전 손흥민의 버저비터 결승골, 레바논전 김치우의 버저비터 프리킥 동점골이 없었거나, 당장 우즈벡이 최종예선에서 단 2골만 더 넣었다면 조예선 3위로 플레이오프로 밀려나 이기더라도 남미와 진출권을 놓고 싸워야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있었다. 쿠웨이트를 상대로 비기기만하거나 UAE가 레바논과 비기기만해도 출전이 확정되는[26] 조광래의 상황보다 몇배는 더 위험한 상황을 야기했다고 볼 수 있다. 58~82년까지 한국의 월드컵 실패사를 살펴보면 기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최종 예선이나 플레이오프까지 진출했다. 위험도는 낮았을 지 몰라도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면 한국의 월드컵 실패사 중에서도 최악의 흑역사가 될 일이었다. 위에서 말한것처럼 애당초 맡고 싶지 않았던 팀을 은사인 조중연의 강요로 떠맡은 측면이 있고[27], 몇몇 선수들이 보이지 않는 항명을 하는 등 개판 오분전인 대표팀이라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적어도 확실한 봉합 정도는 해줘야 했는데 감독 말기엔 거의 자포자기하는 듯한 모습이 보이면서 확실히 대표팀이 몰락하는데 책임을 피해갈 수 없다.
또한 대표팀을 지휘하는 내내 편협한 선수선발을 거듭했다는 주장이 있다. 홍명보가 자기가 잘알고 파악 가능한 런던파 위주로 팀을 맞춰가는 모습을 드러냈다면, 최강희 또한 K리그에서 몇경기 실적이 좋았던 선수를 뽑고 버리고 뽑고 버리는 행태로 국가대표팀을 마치 K리그 올스타팀처럼 사용했다는 것. 가장 중요한 월드컵 최종예선을 통해 대표로서 A매치 데뷔전을 치르게 하고, 뽑은 선수를 몇경기 지나지 않아 다시 내치고 부르지 않는 등 선수선발에 대한 단기적인 계획도 장기적인 계획도 모두 전무했다. 그런 와중에도 공격수 선발은 이동국, 김신욱, 박주영에게만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고, 감독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이 셋을 제외한 공격수는 한국에 없다고 선을 긋는 편협함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기까지 했다. 기사 그는 홍명보가 그러지 않은 척하며 주구장창 박주영만 원했듯, 그러지 않은 척만하며 소속팀 전북에서 인연이 깊은 애제자 이동국을 주구장창 거의 대부분 경기에 주전 붙박이로 기용하였고, 그 결과는 최종예선 7경기 출전 1골과 지역예선 탈락 위기였다. 그는 이동국이 답이 없는 모습으로 일관하였음에도 집착하며 엄청난 기회를 부여하였으나, 분데스리가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치던 손흥민은 상대 밀집수비를 벗겨내지 못하고 기복이 심하다고 디스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2014년 이후부터는 전북에서도 전술, 전략 능력과 관련한 논란이 일고 있다. 4-2-3-1 시스템에 원톱을 중심으로 윙어를 이용한 특유의 축구전술에 전혀 전술적인 발전이 없다는 지적이다. 실제 최강희는 전술과 지략이 뛰어난 지도자는 아니다. 대신 선수단 장악과 관리 및 저조한 컨디션으로 바닥을 치거나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정체된 선수의 포텐을 끌어내는데 탁월한 역량을 보이는 전형적인 매니저 유형의 지도자다. 이에 그의 지지자들조차 과거 감독대행 및 팀 수석코치를 역임한 이흥실[28]처럼 전술적으로 유능한 코치가 팀에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기도 하다.[29]
9 비판에 대한 반론
최강희가 마지막에 결국 국대를 제대로 만들지 못 하긴 했으나 애초에 전임 감독인 조광래가 조금만 더 잘했으면 애초에 축협이 최강희를 원하는 일도 없었다. 최강희 본인의 문제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임 감독인 조광래에게 책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K리그 선수 기용 문제 역시 해외파의 숫자 자체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보완할 로테이션 멤버들을 갖추는 것 역시 중요하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또한 실제로 출전 시간을 살펴보면 해외파들 역시 조광래 감독 시절보다 줄었을 뿐[* 이 부분은 조광래가 지나칠 정도로 해외파를 너무 신뢰했다. 아약스에서 유망할 거라고 인정만 받았던 석현준을 바로 A매치에 투입시켰던 사례가 가장 대표적. 그 경기 이후 석현준은 매우 오랜 기간 동안 국대에 뽑히지 못 했다. 다만 석현준의 경우는 조광래 감독도 애초에 큰 기대를 걸지 않는 모습을 보였고, 실제로 그가 뽑힌 데에는 아약스에 이제 막 프로 경기에 나선 석현준을 국가대표급으로 포장한 해축빠들의 언플이 컸다. 이 무렵 국가대표팀에만 오면 삽질했던 박주호도 기용되지 않는 등 조광래 감독이 해외파라고 100%신뢰한 것은 아니다.
진짜 문제는 큰 그림을 보지 못하고 월드컵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선수들의 어린 나이만 믿고 경쟁 대신 주전 확보를 우선시한 점이었다. 이 시절 부진했던 박주영이나 지동원을 제외하면 상당한 출전 시간을 보장받았다. 따지고 보면 박주영도 클럽에서의 모습에 비해 정말 많이 뛴 거다. 그리고 이동국은 최강희 체제에서 오랜만에 국대에 자주 뛰게 되었지만 위 항목처럼 항상 주전은 아니었고, 이동국과 박주영이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자 김신욱 선발에 이동국 후보로 놓기도 하는 등 전북 선수라고 이동국을 항상 주전으로 쓴 것은 아니다. 애초에 이동국같은 전북 선수 위주로 국대를 돌렸으면 권순태, 최철순같은 그가 클럽에서 애지중지하는 이런 선수들은 왜 당시 국대 한 경기도 못 뛰었겠나??
오른쪽 풀백 경우에는 실제로 K리그 선수들 위주로 기용했는데[30] 애초에 해외에서 뛰고 있는 선수도 드물었고 그나마 해외파이던 차두리는 당시 가족 문제로 인해 새 팀인 뒤셀부르크에서 적응도 못 하고 주전 경쟁도 제대로 못 해 FC 서울로 이적해 처음으로 뛴 K리그에 적응해야 했던 시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차두리를 기용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사실상 박주영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물론 박주영 때와 달리 차두리는 클럽에서 제대로 뛰고 있었지만 게다가 다른 포지션을 보면 당시 QPR로 이적한 윤석영은 최강희호에서도 성인 국대에서 꾸준히 뛰었다. 그러면서 혈액형 드립을 쳤다 이용과 윤석영의 예로 보듯이 무조건 K리그 선수라고 기용하지는 않았고 무조건 해외파라고 무시하지 않았다.
또한 당시 최강희에 대한 비판의 가장 큰 원인이었던 기성용의 경우에는 잘 생각해보면 최강희에게 매우 억울한 문제일 수도 있는데 최강희는 기성용을 거의 매 경기마다 선발하고 기용했다. 그나마 마지막 조별 예선에서만 선발하지 않았는데[31] 그것 하나로 기성용에게 디스받고 해외파를 지지하는 팬들에게도 마구 까이는 계기가 되었던 것.
손흥민의 경우에는 당시 함부르크 입단 후기나 레버쿠젠 입단 초기인데 이 때 손흥민이 분데스리가 최고 활약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바이에른 뮌헨 선수들이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선수들을 싸그리 무시하는 것과 다름없다. 당시의 손흥민은 미래가 매우 기대되는 특급 유망주였지, 분데스리가 최고 선수까지는 아니었다. 그리고 전 버전에서 손흥민이 기복이 있다고 무시하고 있다 했는데 손흥민은 토트넘에 온 지금도 기복이 심하다. 이게 무시한 건가??[32]
지금으로 따지면 황희찬이 오스트리아 리그에서 잘 뛰고 있다고 해서 왜 황희찬을 안 쓰고 황의조, 이정협같은 선수들을 선발로 쓰냐며 슈틸리케에게 따지는 셈인 것. 아직 유망주이거나 막 유망주 티를 벗어난 선수를 성인 국대에서 기용 안 한다고 감독을 비난 하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니다. 그런 선수들에게 당장 국대 선발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감독이 욕 먹어야 할 이유도 없고, 그런 선수들이 그 기량을 꾸준히 유지하란 법도 없다. 당장 손흥민만 봐도 최강희호 시절 그에 대한 반응과 슈틸리케호에서 그의 반응이 어떠한지 살펴보자
- ↑ 그러나, 절친한 사이인 최덕주 전 17세 이하 여자월드컵 대표팀 감독(백종철의 후임으로 대구 FC 감독으로 선임됐다.)의 말에 따르면 실제로는 1957년 생이라고 한다.
- ↑ 가끔 K리그 역대 최고의 감독이란 수식이가 붙이기도 하는데 현 시점에서 제일 잘 나가는 감독인건 맞지만 역대로 따지면 발레리 니폼니시와 김호가 들어가야 한다. 성적 이전에 K리그의 패러다임을 바꾼 지도자들이기 때문. 특히 니폼니시는 그의 제자들 다수가 프로팀 감독과 코치로 활동중이라(최윤겸, 윤정환, 남기일, 조성환, 송선호, 강철, 이임생, 김한윤) 지금도 K리그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들을 제치고 최강희를 넣는건 우승컵 많이 들었다고 펩 과르디올라를 리누스 미헬스나 아리고 사키 위에 놓는것과 똑같다.
- ↑ 1991.7.18. 경향신문. 2011년 우승이후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만화들을 공개했는데 재미있게도 현재의 닥공과는 달리 어린 시절에는 공격보다는 수비를 강조했었다.
- ↑ 전북 현대 모터스의 전용 연습구장과 클럽하우스가 있는 지역. 인근 완주산업단지에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이 있다.
- ↑ K리그 클래식, FA컵, AFC 챔피언스리그
- ↑ 2015년 7월 26일 수원전
- ↑ 독일식 선수단 관리시스템을 적용하려는 차범근 감독과 갈등이 생겨 일찍 현역생활을 마감했다고 한다. 최근까지 서로 감정이 담긴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2015년 K리그 올스타전에서 차두리 선수가 강력하게 의지를 피력하며 팀최강희의 선수가 되고, 최강희 감독의 어깨를 주무르며 팀최강희 주장이 되는 화기애애한 장면을 연출하면서 아버지 세대의 앙금을 어느정도 봉합하는 모양새다.
- ↑ 부천 감독 출신인 조윤환 감독은 전북으로 오면서 부천에 있던 선수들을 영입해서 이들을 주전으로 썼다.
- ↑ 아시안 클럽토너먼트와 아시안컵 위너스컵 통폐합으로 개편된 AFC 챔피언스리그에서의 K리그 첫 우승
- ↑ 게다가 이 클럽 월드컵은 일본 도쿄에서 현대자동차의 경쟁사인 토요타가 메인 스폰서를 하는 대회다.
- ↑ 조재진 선수의 영입은 시사하는 바가 많은데 지방구단의 전북에도 대형 스타선수가 올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며 이 후의 다른 선수 영입에서 전북에 긍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 ↑ 100승 달성시점 : 224경기 – 차경복(2003년 9월 3일), 최강희(2011년 9월 18일), 261경기 – 박성화(2000년 3월 22일), 269경기 – 차범근(2007년 3월 4일), 271경기 – 고재욱(1997년 5월 4일), 272경기 – 허정무(2006년 8월 30일), 275경기 – 이회택(2000년 8월 30일), 276경기 – 조광래(2004년 5월 15일), 292경기 – 김정남(2002년 11월 17일), 294경기 – 김호(1999년 7월 7일), 329경기 – 박종환(2004년 10월 9일)
- ↑ 다만 박성화 감독의 경우는 클럽을 맡은지 보름 만에 떠나가 버린 것이 치명적이었고, 이전부터 안티가 많은 인물이었던 원인도 컸다.
- ↑ 월드컵 예선만 맡겠다는 것과 월드컵 예선이 끝나면 미련 없이 전북으로 돌아가겠다는 것.
- ↑ 그런데 이런 말을 했음에도 여전히 기성용 팬들에게는 좋은 소리 못 듣고 있다.
그 팬들은 아이돌 팬클럽 수준이라 - ↑ 애초에 말이 안 되는 것이 기성용은 최강희호에서도 꾸준히 뛰었다. 단지, 지금같이 전술의 핵심까지 된 것은 아닌데 그럴 만도 한 것이 이 때의 기성용은 수비와 헤딩 면에서 큰 단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흥민 경우에는 확실히 주전 멤버가 아니었지만 이것도 나름 할 말이 있는 것이 당시 손흥민은 막 포텐을 터뜨린 시점이었기 때문에 아직 한참 어린 선수를 무작정 주전으로 쓰기도 애매한 상황이었고 게다가 최강희가 쓰는 원톱 체제에는 어울리지 않는 데다 현재 포지션인 윙 포워드 위치에도 막 자리잡고 있는 시점이었다.
- ↑ 전북이 순수하게 힘으로 압도한 게 아니라, 경쟁 팀들이 전력 보강에 실패해서 상대적으로 결과가 좋게 나왔다는 뜻
- ↑ 이 경기 전 2014 안산 우리카드배 KOVO컵 우승으로 MVP를 수상했다는
것과 양효진은 국대 나갔다는 이유로점으로 선정되었다. 다른 시구자는 당시 주장이어서 뽑힌거고. - ↑ 특히 단순한 윙이었던 이주용은 아예 레프트 백으로 크게 내려갔는데 공격형 풀백으로서 주전으로 자리잡았다.
- ↑ 2014 시즌에 영입했으나 그 당시에는 로테이션급에 불과했다.
- ↑ 최강희 감독의 연령대를 고려하면 당연한 현상이다. 거스 히딩크가 등장하기 전 대한민국 축구는 독일식 축구를 롤 모델로 삼았다. 다만 당시 여러 여건상 독일 축구를 직접 전수받지는 못했기 때문에 본류와는 다른 자기류로 발전했다. 최강희나 조광래 세대 감독들이 이런 자기류 독일 축구의 마지막 계승자인 셈이다. 본 프레레 감독 시절 독일을 대파한 것은 이 자기류 독일 축구로 종가 독일 축구를 꺾어버린 일대 사건이었다.
- ↑ 본문 중 'LG야구가 현재 꼴지인데, 리그 36게임 남은거 다 이기면 플레이오프 갈 수 있다는 팬들이 있는데 내가 이런 걸 바란다면 나의 사치겠죠?'가 그 구절이다.
그리고 LG의 추격쥐 전설이 계속되며 이 말은 주목을 받고 있다. LG 선수들은 좀 보고 배워라, 쫌! - ↑ 전반기 3승 2무 8패, 후반기 9승 1무 3패. 글 초반부의 LG 트윈스 디스처럼 DTD를 시원하게 비웃었다.
김재박, 보고있나? - ↑ 전주시는 서울특별시나 수원시 같은 K리그 빅 마켓 지역이 아님에도 축구 열기가 상당하다. 이들 도시를 물리치고 홈경기 평균 관중수 1위도 찍었을 정도. 그러나 메인 연고지인 전주시 도심에서 외곽지역인 월드컵경기장으로 오는 대중교통편이 극악 수준으로 개망인지라 웬만해서는 만원 관중 채우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 실제로 A매치 경기에서는 만원사례를 이룬 적이 있지만 K리그 경기에서는 단 한 번도 만원 관중을 기록한 적이 없다. 전북 현대의 홈경기로는 2011년 AFC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2차전 당시 찾아온 4만1805명의 관중이 전북 현대의 전주성 단일 홈경기 최다 관중 동원 기록. 다만 워낙에 전주를 비롯한 전북지역의 축구 열기가 뜨거운 만큼 교통 문제만 해결된다면 만원 관중도 어렵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 ↑ 구단이나 모그룹의 입김이 강한 한국프로스포츠판에서 감독이 선수의 연봉협상을 주도하고 결정하는 경우는 없다. 당연히 2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현대 구단에서는 그것을 인정한바 없다. 만약 최강희의 주장대로 차범근이 마음대로 연봉을 결정하고 선수에게 통보만하는 독재를 저질렀다면 당시 사제지간을 맺은 선수의 입이나 한창 차범근 죽이기로 여론이 하나로 뭉쳤던 98년도에 이미 그것이 밝혀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즉 차범근이 마음대로 연봉을 결정하고 선수에게 통보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최강희 본인의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한데다 증거조차 없는만큼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자기도 감독이니 날조라는 걸 잘 알텐데? - ↑ 실제 UAE가 4:2로 레바논을 꺾었다
- ↑ 조중연 뿐만 아니라 현대가에서도 은근한 강요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정몽준 명예회장과의 식사회동등. 한마디로 전방위적인 압박에 등떠밀려 국대감독을 수락한 것
- ↑ 실상 전북 특유의 닥공전술의 핵심에 있었던 전략가이며 현장 축구인들에게도 전술적으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능한 코치라는 평가를 받는 지도자다. 경기마다 상대팀에 맞선 전술과 전략을 가장 많이 연구하고 공부하는 유형의 지도자이며, 학구파이기도 하다. 다만 전북 감독대행 시절 과르디올라가 구사하는 쓰리백 전방압박 축구의 도입과 공격수 정성훈의 중앙수비수 기용 등 파격적인 전술을 너무 많이 추구했고 이에 팀이 흔들리며 다소 불명예스럽게 팀을 떠나야만 했고 감독으로 취임한 안산에서도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하는 중이다. 최근 K리그에서도 전술가형 감독은 김학범, 남기일 등을 제외하고는 이렇다할 성과를 찾기 힘든 편이고, 매니저 형에 가까운 최용수나 의견이 엇갈리거나 양 스타일을 모두 겸비한 것으로 평가받는 서정원, 김도훈 등이 주목받고 있는 실정이다.
- ↑ 더블 스쿼드 관리 실패는 특별히 전술적인 실패라기보다는 안정적인 운영을 선호하는 최강희 감독의 스타일 때문인지 노장들 위주로 팀을 꾸려온 것이 문제가 되었다. 기껏 다시 데려온 전북의 두 전설적인 외국인 선수인 에닝요와 루이스가 나이를 못 이기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동국, 윌킨슨, 김형일 등 노장 선수들도 시즌이 진행될수록 체력이 잘 회복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이 때문인지 2016 시즌을 앞두고
에두를 이적시켜 나온 자금으로즉시 전력감의 선수들을 거의 쓸어오다시피 영입하고 있다. - ↑ 이마저도 홍명보호의 주전 풀백인 이용은 기용하지 않았다. K리그의 실력파 선수라고 모두 기용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 당시에 기용한 선수로 최효진, 신광훈, 오범석, 고요한 등이 있는데 문제는 이 중에 만족스러운 활약을 보인 선수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
- ↑ 당시 스완지에서 부상을 당해 클럽에서도 시즌 아웃 판정을 받아 후반기 경기를 뛰지 못 했다.
- ↑ 손흥민에 대한 평가는 그가 EPL로 이적한 후 재평가되고 있다. 물론, 국내 축구팬들이 비판한 오프더볼의 움직임과 수비가담능력 등등은 그 당시에도 말이 많았지만 일명 해외파빠들에게 무시당하기 일수였다. 또한 손흥민 원톱은 본인조차 그것은 아니다라고 말할 정도였음에도 손흥민만능론에 입각한 팬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