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즈가타케의 칠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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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가타케의 칠본창
후쿠시마 마사노리가토 기요마사가토 요시아키히라노 나가야스카타기리 카츠모토와키자카 야스하루카스야 타케노리

1 소개

시즈가타케 전투[1]당시 하시바 히데요시는 자신의 시종이자 경호를 담당하기 위해 가까이 있던 근위시동들에게 공을 세우라고 다 출격 시키는데 이들 히데요시의 부하 7명을 말한다.

그런데 이 칠본창 자체가 히데요시가 자기 시동을 띄워주려고 만든게 아니냐는 설이 현재 대세를 이루고 있다. 당시 일본에서는 다케다 24장, 도쿠가와 4천왕다분히 소년만화스럽다 등과 같이 몇 명의 장수나 무사를 묶어서 대외적으로 선전하는 호칭을 만드는 캐릭터(?) 어필이 아주 흔한 일이었다. 무사의 가문 출신이 아니었던 히데요시는 다른 다이묘와는 달리 자신을 섬겨오던 가신(후다이 가신)이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대외적 이미지가 더욱 필요했음은 자명하다.[2]

이전 버전에서는 이들 중 와키자카 야스하루나 가토 요시아키를 제외한 나머지가 배은망덕의 대가로 몰락했다고 하고 있는데, 이는 속설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물론 상당수가 몰락했던 것은 사실이나 이는 유력 다이묘 숙청의 대상이 된 것이지, 배은망덕 때문이 아니다. 도쿠카와 막부는 통치체제를 확고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반역 가능성이 있거나 그럴 만한 세력을 보유한 다이묘를 꾸준히 숙청했는데, 이러한 숙청은 심지어 최측근 다이묘들조차 예외가 아니었고, 칠본창들 역시 유력 다이묘였기에 온갖 구실을 붙여 개역[3]을 당했던 것이다. 다만 세력을 약화시키거나 쳐내는 게 목적이었기에 대개 무사신분은 그냥 유지하거나 박탈당하더라도 평민으로 대를 이어갈 수 있게 배려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가토 기요마사의 아들인 다다히로의 후손들이며, 또한 대가 끊겨 그대로 몰락한 가문도 있었다.

임진왜란 때는 가토 기요마사[4]를 제외한 이들 칠본창들이 큰 활약은 하지 못했다.어차피 프로파간다용에 불과해서 끽해야 용인 전투, 칠천량 해전 정도. 특히 와키자카 야스하루가토 요시아키는 이렇다 할 전과를 올리지 못하다가 이순신에게는 전투력 측정기 신세가 되었고(.....)하긴 이 사람은 질 싸움조차 이겨버렸고, 진짜 특급 무장인 도도 다카토라, 시마즈 요시히로도 거의 피해없이 개박살을 내버렸는데 뭐(.....). 칠본창의 우두머리격인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임진왜란 초기 제5군을 이끌고 가토의 2군이 함경도 쪽으로 진출할 때 후방을 맡아 2군을 지원하는가 하면, 전쟁 와중에 경상도와 충청도등을 돌아다니며 (전국시대 국내전 관행대로) 약탈, 학살등 온갗 횡포들을 부리다가 경상북도 영천에서 권응수 장군과의 전투에서 패해 영천성을 빼앗겼고 이후 별 다른 큰 소득을 얻지 못하다가, 명나라와 왜와의 강화가 맺어지자 일본으로 돌아가버렸고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다시 조선에 출병했던 가토 기요마사와 가토 요시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달리 조선에 다시 출병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충청도 공격에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오와리국의 영주 지위를 받게 되었다.

2 칠본창 명단

근위시동의 우두머리이자 연장자로 히데요시의 조카뻘인 후쿠시마 마사노리에게는 석고 5천석이 주어지고, 나머지는 각각 3천석이 주어졌다. 참고로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칠본창으로 묶인 멤버들 이야기를 듣고는 "와키자카 따위랑 동급 취급이라니!"이라고 불쾌해 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필요 이상으로 유명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당대 일본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잘 보여주는 부분. 안습. 사실 한국에서 와키자카가 유명해진 건 한산도 대첩의 영향이 매우 크다.

2.1 후쿠시마 마사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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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가토 기요마사

파일:Attachment/시즈가타케의 칠본창/Example2.jpg

2.3 가토 요시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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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가 오징어 대가리처럼 생겼지만 그냥 넘어가길 바란다.[5] 뭐 어차피 신경쓸것도 없지만

2.4 히라노 나가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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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카타기리 카츠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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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와키자카 야스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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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카스야 타케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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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전국무쌍에서는 가토,후쿠시마는 정식무장이지만 나머지는 클론 무장(...)

태합입지전5에선 카스야 사네오를 제외한 7명이 모두 등장한다. 무력쪽에 모두 특화되어있으나 마사노리, 기요마사, 요시아키 정도만 전장에서 쓸 만 하고 야스하루는 미묘, 나머지는 그냥 쿠소 수준이다.

한국 사극에서는 불멸의 이순신에서 가토 기요마사, 와키자카 야스하루가토 요시아키가 등장한다. 하지만 작중 취급이 현실은 사람이 이순신 전용야라레메카신세솔직히 현실적으로 사실이잖아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성 전투 이후 공기화(....)

그나마 징비록에서 가토 기요마사가 주역 인물 중 하나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조연급으로,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요시아키가 지나가는 말로 언급됨으로써 등장하였다. 물론 가토 기요마사는 잔혹한 개그캐릭터가 되었고,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역시나 야라레메카신세다(.....)

드라마 사나다마루에서는 가타키리 가츠모토와 히라노 나가야스가 비중은 높지 않지만 쭉 등장한다. 히라노 나가야스는 히데요시의 경호와 오사카의 치안을 맡는 역할로, 가타키리 가츠모토는 외교관의 역할로 등장한다. 히라노야 그냥 가볍게 출연하는 느낌이지만 가타키리는 오사카 전투 전에 양측을 중재하는 역할을 맡았으니 쭉 등장할 듯 하다. 물론 무게감은 가토, 후쿠시마와 비교할 수 없다.출연 분량은 더 많지만
  1. 1582년 오다 노부나가 사망후의 후계자 다툼에서, 하시바 히데요시시바타 가츠이에간에 벌어진 전투. 이 싸움은 히데요시의 승리로 끝나, 그가 명실공히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올라서는 계기가 된다.
  2. 그러나 이런 이미지들의 다수는 에도시대 이후에 창작된 경우가 적지 않기에 이것이 당대의 창작이라 확신할 수는 없다.
  3. 영지를 빼앗거나 축소하는 것.
  4. 그나마도 의병장인 정문부곽재우에게 크게 패했고,임진왜란 육군 마지막 전투인 울산성 전투에서는 울산성을 방어하는데는 성공했으나 조명연합군의 울산성 고립 전략에 걸려 큰 피해를 입었다.
  5. 사실 후지산을 형상화한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