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上泉信綱
上泉伊勢守信綱 (かみいずみ いせのかみ のぶつな, 1508? ~ 1577?[1])
천하 제일 - 검성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고금 제일의 달인 - 전일본검도연맹
공식적으로 일본 검술 역사의 최고 실력자이자. 검성(剣聖)으로 추앙받는 검술가, 병법가.
현재 여러 유파로 나뉘어진 신카게류(新陰流)의 창시자이다.
코우이즈미 노부츠나라고 읽기도 한다.[2]
야규 가문의 기록과 아시카가 요시테루로부터 받은 표창장의 기록 등에서 사용했던 관직을 포함한 정식 이름은 카미이즈미 이세노카미 후지와라 노부츠나.
2 출신 및 스승
코즈케 국 출신으로 후지와라 씨 일족인 카미이즈미 씨 출신. 오오고쇼 주변의 작은 성인 카미이즈미 성의 성주의 자식으로 태어나. 카게류, 신토류, 넨류 등의 유파를 배워 신카게류를 세웠다.
스승이 누구인지 어떤 태생인지는 크게 야규 신카게 류의 신카게류에 관한 전승, 노부츠나의 제자인 히키타 유카타 고로, 야마다 지로키치 등의 연구에 따라 크게 3가지의 설이 존재한다.
일단 후대의 야규 신카게류 의 전설에 따르면, 카게류의 아이스 잇코사이 히사타다가 카미이즈미 노부츠나를 만나 딱 하룻밤을 가르치자 노부츠나가 카게류의 오의를 깨달았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아이스 이코사이 히사타다도 일본 검도 역사의 전설적인 인물 중 하나로 원숭이가 뛰어노는 것을 보고 카게류 비전의 엔비를 창시했다고 하고, 어떤 전설로는 피비린내 나는 인간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신이 아이스 이코사이에게 카게류를 전수했다고도 하는 반 신화적인 인물... 뭐 진실은 이세의 왜구로 젊었을 때는 조선과 명나라까지 왔었다고 한다. 심지어 척계광의 저서에도 왜구&왜군 검술의 시조들 중 하나로서 이름이 등장한다.
2설로서 아이스 히사타다의 자손이 아이스 히사타다의 검술 계보를 정리했었는데 그때 카미이즈미 노부츠나의 이름이 없었으며, 무엇보다 당대의 노부츠나의 제자였던. 히키타 유키타 고로가 자신의 검술의 계보를 아이스 히사타다 -> 아이스 무네미츠 -> 카미이즈미 노부츠나 -> 히키타 유카타 고로로 적은 기록들이 있는 걸로 보아. 아이스 히사타다의 아들인 아이스 무네미츠가 스승이었다는 설이 존재한다. 사실 당대의 인물 히키타 유키타 고로의 기록이 존재하는 만큼 아이스 무네미츠 스승 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어보이고, 아이스 무네미츠도 사타케 요시시게의 검술사범으로 벼슬을 살았던 만큼 대단한 검호였으니 충분히 설득력이 있어보이나, 문제는 아이스 무네미츠는 카미이즈미 노부츠나보다 10살 이상 연하이며. 검성급 인물들이 스승-제자 관계라는 잇코사이-노부츠나 설에 비해서 모양이 빠진다는 것 정도.
3설로서 일본 3대 검술 원류 중 하나인 가토리신토류의 창시자이자, 일본 검술 중흥의 시조라고 불린 이이자사 이에나오의 제자인 마츠모토 마사노부에게 검술을 사사받았다는 말이 있다. 이 설에 따르면 노부츠나의 조부 역시 검술에 조예가 깊어 당대의 검성이던 아이스 히사타다와 이이자사 이에나오 둘에게 검술을 사사받았으며, 노부츠나의 아버지와 노부츠나는 이이자사 이에나오의 제자인 마츠모토 마사노부를 직접 불러다가 자기 가문의 검술사범으로 삼고 계속해서 검술을 사사받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노부츠나는 젊은 나이로 가토리신토류의 오의를 깨닫고, 그러던 중 노부츠나의 조부가 사망하면서. 아이스 이코사이 본인이 조문을 위해 방문. 23살의 젊은 노부츠나를 직접 만나게 되는데, 이코사이는 노부츠나를 보고서 카게류를 전수받을 만한 대단한 재목이다! 라며 감탄. 노부츠나에게 직접 비전서를 전수하였고, 1년 후에 카게류의 정통 후계자가 되었다고 한다.
사실 세 가지 설 자체가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긴 하나 다들 약점들이 좀 있기 때문에... 가토리 신토류 => 마츠모노 마사노부 설만해도 결국 아이스 잇코사이에게 카게류를 직접 배워서 이어받은 셈인데 왜 가토리 신토류 설인지도 모르겠고... 어떤 설이 100% 정확하다고 하긴 힘들고 여러가지 검술을 배웠다는 말도 많은 만큼, 종합하면 기승전은 어쨌든 최종적으로 카게류를 계승한 신 카게류를 창시했으며, 또 히키타 유카타 고로의 기록에도 아이스 잇코사이를 계보의 시작으로 놓는 만큼, 카게류의 아이스 잇코사이를 유파의 조사이면서 멘토로 생각했다. 정도면 정확 할 듯 하다.
3 생애
본래 카미이즈미 노부츠나는 야마노우치(山内) 우에스기(上杉) 가문의 밑에 있는 독립 영주였으나, 호조 우지야스의 오오고쇼 공격에 의해 성을 빼았기고 나가노 나리마사(長野業正)를 섬겼다는 설이 있으나, 이야기의 출처가 군기물인지라 다소 신빙성이 낮아보이고.
그보다는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 밑에 있다가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이 전국시대 3대 기습전 중 하나인 호조 우지야스의 카와고에 전투로 몰락하고 나서, 몰락한 야마노우치(山内) 우에스기(上杉) 가문에 충성하던 가신 나가노 나리마사(長野業正)를 섬긴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나가노 나리마사 휘하에서는 용맹을 떨쳐 나가노 16창의 한 사람으로 뽑힌다.
나가노 나리마사는 아리와라노 나리히라(在原業平)의 후예라고 하는 명장이었는데 그는 카와고에 전투 이후에도 몰락한 관동관령 우에스기 노리마사를 섬기며 호조에 항전하였다. 카미이즈미 노부츠나는 나가노 나리마사를 따르면서도 무사 수행 명목으로 오다와라 성을 방문, 호조 우지야스와 지황팔번의 맹장 호조 쓰나시게를 만나 그들을 제자로 들이며, 이에 호조 우지야스는 호조 쓰나시게의 딸을 카미이즈미 노부츠나의 후처로 삼게하여 일족으로 만든다. 이에 카미이즈미 노부츠나는 전처와의 아들이었던 카미이즈미 히데타네에게는 호조를 섬기게 하고, 자신은 계속해서 나가노 씨를 따른다.[3] 여담으로 당시 50 근방의 나이였던 카미이즈미 노부츠나는 후처인 호죠 츠나시게와의 딸 사이에서 두 명의 아들을 얻는다.
이후 우에스기 가문이 완전히 몰락하고 관동의 패권은 호조 가문이 장악하게 되고, 호조+그리고 다케다의 연합군은 나가노 가문의 본거지인 코즈케 성까지 압박하게 된다. 사나다 유키타카, 오바타 노부마사 등 몰락해가는 가문을 떠나는 이들이 속출하는 상황에서 나가노 나리마사는 호죠, 그리고 코즈케를 노리고 있는 다케다 군과의 결사 항전을 계속한다. 나가노 나리마사는 다케다군을 여섯번이나 물리치면서, 오죽하면 신겐도 나리마사가 있는 한 코즈케를 차지할 수 없다고 한탄하였을 정도였으며, 노부츠나는 이 당시 이름을 카미이즈미 히데츠나(上泉秀綱)라고 칭하였는데, 나가노 나리마사의 휘하에서 시나노(信濃) 다케다(武田)군의 공격을 막아내며 코즈케국 일본창이라는 감사장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명장이었던 나리마사가 병으로 죽었고, 18살의 어린 3남 나가노 나리모리(長野業盛)가 계승하자 이에 다케다 신겐은 이를 크게 기뻐하며 코즈케 출정을 결심했다.
나가노 나리모리(長野業盛)는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다케다군을 한 번 꺾기도 하는 선전을 하였으나 마침내 패하여 자결[4]하고,히데츠나 역시 패장으로서 처분을 기다리게 된다. 나가노 나리마사 휘하 열여섯명의 맹장인 나가노 십육창 중에서도 나리마사가 으뜸으로 친 히데츠나에게 신겐이 관심을 보인 것은 당연했는데, 히데츠나는 사관(仕官)을 거절한다. 신겐은 아쉬워하면서도 히데츠나를 풀어줬고 대신 그 조건으로 다른 다이묘를 섬기지 않을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 중에서 신자를 내려서 히데츠나의 이름이 익히 알려진 노부츠나가 된다. 단,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시선이고 실제로는 신겐이 죽여서 악명을 얻는 것보다는 살려서 도량을 보일 목적으로 해방했다고 보는 편이 적합하다. 자신의 이름을 내린 것도 말하자면 노부츠나가 자신의 관심대상이니 함부로 등용할 생각은 하지 말라는 뜻을 내보임과 동시에 노부츠나 자신이 경거망동하지 못할 빌미를 만들었다고 보아야 될 것이다.
어쨌거나 해방된 노부츠나는 이후 조카인 히키타 분고로(疋田文五郎)등 을 데리고 각지를 떠돌며 검술 수행에 전념했다. 관동의 오다와라 성을 방문했을 때는 호조 우지야스로부터 사관할 것을 요청받았으나, 노부츠나는 다케다 신겐과의 일도 있고 하여 거절했고.[5] 이후 해상을 통하여 일본의 중심이던 키나이를 방문, 이세에 도착하여 검호 국사 키타바타케 토모노리를 만난 후, 야마토 국으로 가서 호죠인 인에이와 야규 무네요시(柳生宗厳)[6]와 만남을 가져 이 들을 제자로 들인다. 당시 제자인 히키타 분고로가 야규 무네요시를 쓰러뜨렸다고 하며. 이후에도 분고로는 무네요시와의 수차례의 대련에서 모두 이겼다고 전한다.
이렇게 야마토에서 야규 무네노리와 호죠인 인이에를 만나서 그들을 가르치고 후에 신카게류의 인가장까지 준다. 그러나 이 때 호죠를 섬기던 맏아들 카미이즈미 히데타네가 코노다이 합전에서 전사. 이 소식을 들은 노부츠나는 큰 충격을 받고 야마토를 떠났다고 하며, 야마토의 야규 마을에는 노부츠나가 자식을 위해 세운 공양탑이 현대까지도 남아있다고 하며, 히데타네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승려들을 불러다가 최소 13회 이상의 법요를 개최했다고 한다.
어쨌든 야마토를 떠나 간 곳은 일본의 중심이던 교토, 이곳에서 마루메 쿠란도노스케 나가요시(丸目蔵人佐長恵)[7]를 만나 최종적으로 인가장까지 주었으며, 마루메 나가요시와 함께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만나 검술을 시연하고 감사장 까지 받으며, 천하제일이라는 공식적인 칭호를 수여받는다. 다만 감사장을 받고 칭호를 수여받은건 사실이라는 설이 통설이나,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현재 전해지는 것 처럼 카미이즈미 노부츠나의 제자였는지, 아니었는지는 사실 정확히는 알 수 없으며. 양자가 만났을 때가 에이로쿠 7년이었는데, 요시테루는 에이로쿠 8년에 전사하였으므로 제자였더라도 비전을 받지는 못했을 듯 하다.
그 후 당대의 일왕이었던 오기마치(正親町)일왕 앞에서도 마루메 나가요시와 검술을 시연한다. 일설에 따르면 여기서 종 4위 이세노카미를 받았다고 한다... 문제는 마루메 가문에 현존하는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노부츠나에게 준 감사장에 카미이즈미 이세노카미라고 적혀있는걸 보면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만나서 -> 일왕을 만나고 -> 요시테루를 또 만나서 감사장을 받던가 했을듯.
어쨌든 이후에는 교토를 떠나 고향으로 내려간 후 1577년 혹은 1582년 사망한다.
4 사망
사망에 대해서도 다수의 설이 존재한다.. 자료가 없어서 다수의 설이 존재한다기보다는 사실 검성급 인물이다보니자료가 너무 많아서(-,-:) 다수의 설 들이 존재.
야규 가문의 공양탑을 근거로 야규 가문에서 죽었다는 말도 있고[8], 고향에서 죽었다는 말도 있으며. 사망 연도도 1577년에 공양탑이 세워진거 보니 사망한거다. 혹은 그건 전사한 맏아들인 히데타네의 공양탑이다. 등등. 일단 KOEI사의 게임에서도 1577년 설을 취하고 있으나.
다만 카미이즈미 가문 기록과 우에스기 가문의 기록에 의하면 1582년에 오다와라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호죠 가문에 젊은 후처와 자식들까지 있었으니 아무래도 야마토 사망 설보다는 이 쪽의 설의 신뢰성이 높은 듯 하다.
5 제자 및 유파
늙어 죽을 때까지 천하를 주유하며 신카게류를 전파했으며, 문하에서 많은 명인을 배출하였다.
야규 세키슈사이 무네요시(柳生石舟斎宗厳)는 노부츠나의 비전을 이어받아 야규신카게류(柳生新陰流)를 창시했다. 야규 신카게류는 이후 도쿠가와 막부 개막 후 야규 무네노리 및 야규 토시요시들 덕분에 더욱 융성하여 심지어 현재에도 신카게류가 일본 내 검도 유파 중 최다 회원 수를 자랑한다. 야규 가문은 세키슈사이의 인가장의 글귀인 일국일인 이라는 말을 근거로 세키슈사이가 카미이즈미 노부츠나의 진정한 수제자이자 후계자라고 주장한다.
히키타 분고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카이자 한때 후계자 후보였던 관백 히데츠구의 검술사범을 맡았으며, 이후에는 호소카와 가문에서 가짜 검술사범이랑은 다르게 진짜 검술 사범을 지낸다. 심지어 나이 때문에 한 번 그만뒀는데도 불구하고 호소카와 가문에서 요청하여 다시 불려갔다고 한다. 히키타 분고로를 시조로 하는 신카게류 일파를 히키타카게류(疋田陰流)라고 부르기도하며 물론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마루메 쿠란도노스케 나가요시(丸目蔵人佐長恵)도 노부츠나에게 사사하여 타이샤류(タイ捨流)를 창시했다. 사가라 가문의 무사 출신으로 앞서도 말했듯이 25살의 젊은 나이로 노부츠나와 함께 쇼군과 일왕 앞에서 검술을 시연하는 등 빠르게 출세한 인물이나, 이후 시마즈 이에히사의 사가라 공격 때 기습 공격을 주장하다가 대패하여 성을 빼았기고 주군 가문이 사실상 껍데기만 남고 시마즈에게 멸망. 사가라 가문으로부터 처분으로 폐문 = 유폐당하여 무사로서의 출세길이 막힌다. 20년 후 도요토미가 일본을 정복하자 그 때서야 다시 사가라 가문에게 등용되었다. 그래도 검호로서는 규슈 지역 내 최고의 검호로서 타이샤류를 전파하였고, 제자로는 타치바나 무네시게등 을 두었다. 요새 2CH에서는 마루메 나가요시가 닌자 집단을 키웠다는 이상한 얘기가 도는듯.
또한, 호조인 인에이(宝蔵院胤栄)도 지도하여 인가장을 받았기에 보장원류(宝蔵院流) 창술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사실 당대의 검호들은 검술만이 아닌 창술 등의 종합 무술을 가르쳤기에 인가장을 받을 정도라면 영향을 적게 미치진 않았을 것이다. 보장원 류 역시 전국시대 가장 흥한 창술 유파로서, 현대까지 전해지는 창술.
훗날 일본 전역에 세를 떨친 유파인 지키신카게류(直心影流)도 따지고 보면 노부츠나 계열.
이외에도 여러 제자들이 있으며 노부츠나의 손자이자 직계인 카미이즈미 마고시로 및 그의 아버지인 이름 미상의 아들에게도 인가장을 전했다고 하며. 카미이즈미 집안의 신카게류도 따로 전해져 내려온다고 한다.
또한 손자인 카미이즈미 야스츠나[9]도 인가장은 없어도무용에 밝아 아이즈일도류라는 검술의 개조이기도 했으며 우에스기 카게카츠의 밑에서벼슬을 살았으나, 하세도우 전투에서 모가미 요시아키의 군과 싸울 때 전사하였는데. 야스츠나가 단기로 적진에 돌격하자 모가미군의 기세가 일순 주춤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부하들은 겁을 먹어서 야스츠나의 뒤를 르지 않았고 결국 중과부적으로 죽고 만다. 이 때 다른 한 기만이 그를 구하기 위하여 적진에 달려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마에다 케이지라고 한다. 그러나 마에다 케이지도 아쉽게도 야스츠나의 시신을 되찾는 것에는 실패했고 간신히 몸을 빼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마에다 케이지는 적병의 피를 뒤집어쓴 채 장수를 버린 그의 부하를 크게 꾸짖었다고 한다. 야스츠나에게 아들은 없었기 때문에 이후 데릴사위를 들여서 우에스기 = 아이즈 -> 요네자와 번 카미이즈미의 피를 이어가게 되며, 이후 요네자와 번에서 카미이즈미의 이름을 잇는다.
6 트리비아
노부츠나는 검을 빼지 않는 것이 궁극의 검술이라 믿었기 때문에 맨손으로 상대의 검격을 붙잡는 무토도리(無刀取り)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10] 유랑 도중 어느 마을에서 강도가 아이를 인질로 잡고 틀어박히자, 노부츠나는 머리를 밀고 승려로 변장해 먹을 것을 들고 들어가 강도에게 권한 뒤, 강도가 긴장을 푸는 순간 맨손으로 칼을 빼앗고 강도를 제압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 일화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7인의 사무라이에도 등장한다.
수련용 무구인 죽도[11]를 고안했다고 하며, 제자인 히키타 분고로도 독특한 보조무구를 개발하여 사용했다고 한다. 오늘날 검도에서 쓰는 죽도와 호구의 원형을 제시한 셈.
일본 검술 역사상 갖는 의의는 정말 대단하다. 그냥 그가 남긴 기록 하나하나가 당연히 부정할 수 없는 절대적인 진실로 여겨지는 수준. 예를 들어 일본 검술 3대 원류 = 즉 일본 검술의 시조격의 유파를 텐신쇼덴 카토리신토류(天真正伝香取神道流), 카게류(陰流), 넨류(念流) 3개를 치는데. 이것도 카미이즈미 노부츠나가 야규 가문에 남긴 기록 중 하나에 이 3가지 유파에서 모든 검술이 시작되었다고 기록을 남겼기 때문에 이 3개를 일본 검술 3대 원류로 치는 것. 사실 저 중에서는 넨류가 이득을 크게 봤다.
동시대 츠카하라 보쿠덴과의 검성 대결에서는 대체 누가 최강인가?! 라는 라이벌 전이 당대로서도, 지금으로서도 상당한 관심을 끄는 주제이나, 일단 신카게류가 검도 사의 계보로서 야규 신카게류를 비롯한 수 많은 계파를 가지고 있으며, 현재에도 신 카게류가 일본 내 검도 최다 회원수를 자랑할만큼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야규 세키슈사이를 비롯하여 노부츠나 쪽의 제자들의 출세율이 좀 더 높으며, 또 당대에 두 사람 모두를 스승으로 두었던 검성 장군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노부츠나에게 직접 천하제일이라는 칭호를 내려주었기 때문에. 카미이즈미 노부츠나를 보쿠텐보다 한 수 높이는 편. 보쿠텐이 노부츠나보다 나이만 젋었어도 Koei사의 게임에도 보통 노부츠나가 무력 115라면 보쿠텐은 114정도로 노부츠나가 한 수 위에 있는 식으로 등장하며 현대 일본 검도사의 평가로도 츠카하라 보쿠텐에게는 500년래 무쌍의 남자, 노부츠나에게는 고금 제일의 달인. 으로 일본 역사상 가장 강한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다.
6.1 창작물에서
태합입지전5 검호 시나리오에선 최종보스이며, 검술대회에서 결승전 상대. 특히 최종오의인 전(転, 일본어론 마로바시라고 읽는다.)은 태합입지전 검술 기술 중 최흉의 필살기이기도 하다. 범위는 화면 전체에 존재하는 모든 적을 공격하며 기술 기본 위력자체도 절륜한데 모든 공격에 후방 공격 보정[12]이 들어가기 때문에 한방 한방의 실질데미지도 최강. 기합 8개를 전부 소모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반대로 기합 8개만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발동할 수 있기 때문에 큰 단점은 아니다. 무토도리(無刀取り)와 카스미(靈)를 배우기 전까지는 거의 못 이긴다고 보면 된다. 무력 100(+15). 츠카하라 보쿠덴 할배와 더불어 유이한 검성칭호자이기도 한데 이게 CPU 한정으로 보정이 있어서 공/방 업이 되어있는지라 본인들로 직접 플레이하거나 아예 무력 100에 무가 무력 20짜리 무기를 들고 덤벼도 도저히 같은 성능이 안나온다.
팁이라면 기합 8개가 꽉차있다면 거의 십중구의 확률로 마로바시를 써오니 항상 기합을 체크하다 기합이 꽉찼을때 무토도리나 카스미로 회피, 없다면 아쉬운대로 방어로 버티는 수밖에 없다. 물론 무력이 낮거나 방어구가 허접하다면 방어를 하나마나 한방에 끔살이겠지만. 근접전을 하더라도 한방 잘못맞으면 죽기 때문에 항상 거리를 유지하며 이가 닌자에서 신분에 관계없이 배울 수 있는 분신술을 활용하여 분신들로 말려 죽이는 방법이 제일 유효하다. 다케다 가문과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걸 반영하였는지 검호치고는 통솔도 상당하기 때문에 부하로 만들 수만 있다면 그럭저럭 유용하게 쓸 수 있다. 단 지력, 정무는 매우 낮고 일단 낭인이 되었을때는 사관할 일은 거의 없으니[13]나가노가 소속으로 있을때 나가노가를 멸망시키고 등용하는 것이 답.
노부나가의 야망에서는 무용 하나만큼은 전국 톱을 달린다. 출신 성분은 검호. 09년 작 천도에서 등장할 때는 아무것도 장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용이 무려 116! 아시가루 적성 S인데다 특기인 연비(燕飛)의 데미지가 병력을 깎든 내구도를 깎든 무시무시한 데미지가 들어간다. 대신 다른 병종 적성이 D인데다 통솔이 낮은 편이므로 잘 써먹고 싶다면 가보와 관위를 적절히 조합해서 통솔을 끌어올리자.[14]
기생수로 유명한 이와아키 히토시가 카미이즈미 노부츠나와 히키타 분고로를 중심으로 한 중편 검의 춤을 그리기도 했다.
베가본드에서는 이미 별세했으나 세계관 최강자로 회상된다. 얼핏 보기에는 인자한 노인네에 불과하지만, 젊은 시절의 호죠인 인에이와 야규 세키슈사이를 단숨에 제압할 정도로 엄청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15].
종말소녀환상 앨리스매틱에서도 등장해 태연하게 1의 이름을 대고 있어 다들 별명으로 생각하지만, 실은 1의 인물 본인이다. 단 회춘한 버전...
주인공과 함께 멤버중 두명뿐인 남성으로, 유쾌한 성격에 깊은 마음씨를 가졌다. 루트에 따라 최종 보스, 혹은 아군으로 등장한다.그 실력은 1에 명기된 대로 굉장하여, 그의 검술을 이어받은 유파인 신카게류(新陰流)와 타이샤류(タイ捨流)의 검사 두명을 상대로 맨손으로 대등하게 겨루었다.
게임 내에선 2명의 여성을 잡아먹는(혹은 3명일지도) 다른 의미에서도 절륜한 인물.
- ↑ 1582년에 죽었다고도 한다.
- ↑ 이쯔음의 일본의 성들은 아자이&아사이같이 읽는 법이 확실치 않은 게 많다.
- ↑ 적국의 수장과 혼인동맹을 맺고 자식까지 인질로 바친셈이니 어찌보면 좀 치사해 보일 수 도 있지만, 일본 같은 경우에도 대를 이어가는걸 굉장히 중시했기 때문에, 사나다 마사유키와 사나다 노부유키같은 경우에도 그렇듯이 약소 가문의 경우 줄을 잘못서서 아예 가문의 대가 끊어지는걸 막기 위해 이런 식으로 머리를 쓰는 일이 종종 있었다.
- ↑ 유언은 봄바람에 매화도 벚꽃도 흩날리누나. 이 내 고향 미노와(箕輪)의 이름만이 남으리.
- ↑ 이런 일들 때문에 비슷한 일을 한 사나다 마사유키와는 다르게 KOEI사의 게임에서의 의리 수치가 굉장히 높은 편이다.
- ↑ 훗날의 세키슈사이(石舟斎)
- ↑ 황궁 수호 무사 출신이라고도 한다
- ↑ 야규 가문의 경우 자신들이 카미이즈미 노부츠나의 최고 수제자임을 자처했으니 노부츠나가 고향이 아닌 야규 가문에서 죽었다면 어느 정도 최고 수제자라는 근거가 되니까
- ↑ 히데타네의 아들로 전해지나 이는 통설이며, 앞서 말했던 노부츠나의 후처인 호죠 츠나시게의 딸과의 자식이라는 말도 있다.
- ↑ 극에 이르면 서로 통한다랄까 또다른 검성의 사상과 서로 일치하는 면이있다.
- ↑ 단, 노부츠나가 고안한 죽도는 후쿠로시나이라고해서 현재의 죽도와는 다르며 이것이 발전하여 와리지나이, 즉 현재의 죽도가 되었다.
- ↑ 큰 차이까진 아니더라도 정면보단 측면, 후방을 잡고 공격했을 때의 데미지가 더 크다.
- ↑ 이벤트가 일어나는 경우가 절대 다수일텐데, 신겐이 나가노가를 멸망시키는 이벤트가 발생할 경우, 자동적으로 노부츠나는 낭인이 되고 그 즉시 신카게류 도장을 열어버리고 사범이 된다. 이벤트 없이 호죠가나 다른 가문에게 멸망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노부츠나의 사관성향은 낭인유지기 때문에 등용은 거의 불가능.
- ↑ 혁신에선 부장으로 출전시키나 주장으로 출전시키나 별차이 없기때문에 상관없다.
- ↑ 전력을 다한 세키슈사이의 일검을 가볍게 톡 치는 것으로 떨궈버렸으며, 인에이의 창은 심지어 맨손으로 빼앗아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