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柳生宗矩
검술 고금 독보 - 에도 막부의 공식 역사 기록서인 德川實紀검술무쌍 -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추도서
현대 전일본 검도연맹의 특별 현창자
야규 타지마노카미 무네노리. 일본 전국시대 말기와 에도 시대 초기의 다이묘이자 검술가로 야규 무네요시의 5남.
일본 역사상 검호로서 가장 출세한 인물이며. 검호 출신으로 1만 2500석의 영지를 보유하여 에도 시대 당시 일본 전토에서 단 260여 명 뿐이었던 다이묘가 된 유일한 검호 다이묘[1].
에도 막부를 연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검술 지도역이었으며 야마토 야규 번의 초대 번주이자, 쇼군 가의 어유파로서의 야규 신카게류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관위는 생전에는 종 5위 타지마노카미, 사후 종 4위로 서임되며. 관위를 포함한 정식 이름은 야규 타지마노카미 무네노리.
2 출신 및 스승
1571년 야마토 야규쇼에서 출생. 야마토의 호족이었던 야규 무네요시의 5남. 아버지는 검성 카미이즈미 노부츠나의 수제자 중 한 사람[2]으로 신카게류의 영향을 받아 야규 신카게류를 창시한 창시자.
스승은 당연히 아버지인 야규 세키슈사이 무네요시이고, 유파적으로는 카게 류의 아이스 잇코사이를 스승으로 두었던, 카미이즈미 노부츠나의 신 카게류를 계승한, 야규 신 카게류의 창시자인 야규 무네요시의 계승자 중 한 사람으로. 이후 야규 토시요시[3]가 후술할 사노 슈메 관련 문제로 가문을 뛰쳐나가 오와리 야규류라는 분파를 세웠기 때문에, 무네노리는 에도 야규류의 창시자가 되었다.
이 두 유파 중 어느 쪽이 진정한 야규 류로 인정받았는지에 대해서는 굉장히 많은 문제들이 있는데. 이는 유파에서 후술.
3 생애
젊을 때의 기록은 알려진 것이 없다. 형들인 야규 요시카츠, 야규 무네아키 등과 함께 아버지에게 검술을 배우고 아버지 밑에서 있었다는 것 정도만 추정된다. 아버지 야규 세키슈사이 = 야규 뮤네요시는 야마토 2000석의 호족으로서 어느 정도의 독립성을 가지고서 그 지역을 집권한 권력자들인 미요시 나가요시, 마쓰나가 히사히데, 츠츠이 준케이 등을 따르기도 하고 다른 호족들과 연합하여 대립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오다 노부나가와 츠츠이 준케이를 따랐다고 하며. 그러다가 무네요시 대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검지때 전답을 숨겨 규모를 축소했다는 혐의로 영지를 몰수당하여 낭인이 된다.[4]
이 당시 형들인 장남 야규 요시카츠는 전쟁터에 나가서 불구가 된 것으로 추정되며, 둘 째형과 셋 째 형은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야규 세키슈사이가 일찌감치 절에 보내어 승려로 출가시켰었었고, 4남 야규 무네아키는 무사수행을 떠나 이후 나카무라 카즈우지의 요코다 무라아키 밑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다. 이로서 영지를 빼았겨 은거한 야규 세키슈사이와 5남 무네노리, 요시카츠의 아들들인 야규 스미요시와 토시요시들이 백수로지내는 상황이었는데.
이 때 교토에서 은거하고 있던 야규 세키슈사이와 야규 무네노리의 재능을 아쉬워했던 인물이 검술에 관심이 많았던 다이묘 중 한 사람이자, 임진왜란의 주적 중 한 사람인 쿠로다 나가마사로 1594년, 즉 임진왜란 도중 본인의 이름으로 중개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야규 세키슈사이를 소개하였고[5], 야규 세키슈사이는 야규 무네노리를 데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방문. 도쿠가와 이에야스 앞에서 야규 세키슈사이는 오의인 무도토리 = 맨손 칼날잡기를 시전. 이에야스는 무도토리를 보고 감탄하여 아규 세키슈사이를 그자리에서 바로 자신의 검술지도역으로 삼으려하였으나 당시 야규 세키슈사이는 66살의 고령이라 이를 사양하고, 함께 방문한 무네노리를 소개하여 이로서 야규 무네노리가 20대의 나이로 200석의 하타모토로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직속 가신이 된다. 물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아규 세키슈사이에게는 입을 싹씻은건 아니고, 따로 500석의 영지를 수여한다.
그렇게 도쿠가와의 하타모토가 되면서 장남이던 야규 신지로 요시카츠가 장남의 자리에서 폐적당하고, 야규 무네노리가 장남 격으로서 가독을 이어받게 된다. 이 부분이 살짝 좀 미스테리로 보일 수 도 있는데. 야규번기록에 의하면 일단 장남인 야규 신지로 요시카츠는 1552년 생으로 무네노리와 20년 정도의 나이차가 나고[6], 1572년[7]에 20대 초반이었던 야규 요시카츠가 츠츠이 준케이를 따라서 마츠나가 히사히데와 싸우다가 총탄을 맞고 젊은 나이로 불구가 되었고근데 불구가 된 이후에도 자식들을 꾸준히 생산한걸 보면 대단하다, 심지어 요시카츠의 장남인 야규 구사부로 스미요시는 검술에도 재능이 있었고 20살도 안된 젊은 나이에 아사노 요시나가에 임관하여 500석의 봉록을 받으나, 임진왜란에 참전했다가 1597년에 조선 군이 울산성에서 전사시킨다.혹시 여여문이 됬을지도 넷째 무네아키는 뛰어난 검술가로 대를 이을만 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동생 무네노리와 함께 초빙했을때 이를 거절하고 무사수행에 나섰으며 훗날 나카무라가의 가로인 요코다 무라아키의 간청으로 객장신분으로 신세를 지다가, 이후 요코다 무라아키가 모살당하자 이를 복수하기 위해 가세했다가 중과부적으로 전사하고 만다.
즉 큰형이 폐인이 되고, 둘째 셋째형은 재능이 없어서 아버지가 일찌감치 승려로 만들었고, 넷째형은 사관해서 출세할 욕심이 없었던 데다가 요절하였으며, 조카는 임진왜란에서 죽는바람에. 최종적으로 야규 요시카츠는 자식들을 무네노리에게 부탁하고서 장자 자리를 양보하고, 야규 요시카츠 가문의 당주 자리는 둘째 아들인 야규 효고노스케 토시요시에게 양보하고 물러나서 1616년 사망할때까지 은거한다.뭐 어부지리로 가문을 잇게 된것처럼 보일 수 있는데.... 야규 무네노리가 워낙 가문 내에서도 압도적으로 정치적 역량이 있고 야심도 큰 사람이었으니 결국 어찌되든 그가 가문을 잇게될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여담으로 야규 요시카츠는 이후 야규 무네노리와 토시요시의 대립 때에도 의견 하나 개진하지 않으며, 기록 자체가 야규가문의 기록 외에는 기록이 거의 없는 수준 + 야규 가문의 기록 조차도 상당히 부실한데다다가, 행적 자체가 없이 아예 역사에서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일본 쪽이나 창작물 계에서도 야규 신지로 요시카츠는 대체 뭐 하고 있었는지? 가 상당한 미스테리로 남아있으며. 오와리에서 야규 신카게류를 개척하고 있었다는 말도 있고, 창작물에서 야규 요시카츠의 딸이 등장한다던가, Oh great의 천상천하에서 악역으로 등장한다던가. 하면서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중.
어쨌든 그렇게 야규 가문의 당주 직을 잇고서 도쿠가와 가문의 하타모토로서 봉사하다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고향인 야규쇼로 돌아가 과거 친분이 있던 야마토의 호족들을 외교로 포섭하여 이시다 미츠나리의 서군의 배후를 위협하는 등 활약을 펼쳤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도 활약하여 아버지 대에 빼았견던 야규 영지 2000석을 포상으로 받았으며. 다음 해에는 2대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검술지도역이 되면서 1000석이 가증되어 3000석이 된다.
1603년에는 이후 오와리 야규류를 세우는 야규 토시요시가 가토 기요마사의 가신이 되며 무네노리 밑에서 독립하였다. 일단 500석, 오와리 야규류를 계승한 현대의 야규 가에서는 실질 3000석이라고는 하는데.. 뭐...
1606년에는 아버지 야규 무네요시가 사망.
1615년에 오사카의 진에서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곁에서 모리 카츠나가, 사나다 유키무라의 결사 돌격으로 진중에 난입한 7명의 무사들을 베어 히데타다를 지켰다고 한다. 몇몇 창작물에서는 이에야스의 곁에서 할복해야겠다!라는 자신의 명대사를 외치는 이에야스를 뭔 이런거 가지고 할복입니까! 하고 난입해온 7명의 무사들을 베면서 이에야스를 진정시켰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히데타다의 스승으로서 히데타다의 곁에서 벌어진 일. 여담으로 무네노리 자신이 직접 검술을 시전한 공식적인 역사 기록은 이 일 뿐이다. 이 기록마저 없었으면 게임에서 완벽하게 정치가 능력치로 등장했을듯
1616년에는 4만석 3468석의 다이묘이자, 야규 무네노리의 친구였던 사키자키 나오모리가 센히메 관련으로 도쿠가와 막부에 반역한다. 사키자키 나오모리는 우키타 히데이에의 사촌 형제로 인물이 집요하고 복수심이 강하며 성격에 좀 장애가 있었다고 여겨지는 인물이었는데, 우키타 가문에 있을때는 당주인 우키타 히데이에와 다툼을 벌여 문제가 생겼다가 이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직접 중재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으로 들어온 인물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밑에서도 몇몇 문제를 벌이다가 오사카의 진 이후 이에야스에게 패해서 사망한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본처이자, 현재 과부가 된 센히메관련하여 큰 문제가 생기는데.. 이를 센히메 사건이라고 부른다.
일단 구전되는 이야기 = 드라마에서 방영해서 유명해진 썰에 따르면 오사카 성이 함락당할때, 이에야스가 손녀 딸의 목숨을 걱정하여 누가 센히메를 구해올 것인가!라고 하자사키자키 나오모리가 자신이 센히메를 구해올테니 자신과 결혼시켜 달라며 나섰고, 이에야스가 이를 승낙하여 사키자키 나오모리가 목숨을 걸고 센히메를 구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불타는 오사카 성이 무너지며 얼굴에 화상을 입었고. 이로서 용모가 추해지자 센히메가 용모가 추한 나오모리와 결혼하는걸 거부하고 미남으로 유명했던, 도쿠가와 사천왕 혼다 타다카츠의 손자인 혼다 타다토키와 결혼하게 되어 사키자키 나오모리가 격분하여 혼다 타다토키의 영지로 향하는 센히메가 탄 가마를 납치하려다가 부하의 밀고로 들켜 처벌당했다고 전해지나.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고.
실제로는 오사카 성이 함락당할때,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센히메는 금슬도 굉장히 좋았으며 도쿠가와 측의 외교적 노력도 있었기 때문에 성이 함락당하기 전 이미 히데요리가 센히메를 도쿠가와 측으로 인도하였다고 하며. 이후 과부가 된 센히메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공가와 결혼시키라고 유언을 내려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사키자키 나오모리에게 명령을 내려 결혼시킬 공가를 알아보게 된다. 거의 결혼 성사직전까지 갔던걸로 보이나 센히메가 이를 거절하고 결국 미남으로 유명했던 혼다 타다토키와 결혼하게 된다. 사키자키 나오모리는 자신의 명예에 손상이 갔다며 격분. 센히메가 탄 가마를 탈취하려 하였으나 이를 사전에 들켰고, 반역혐의를 쓴 나오모리는 자신의에도 저택을 걸어잠그고 막부측에 항거한다.[8]
도쿠가와 막부를 막 성립시키고 다이묘들을 복종시켰는데, 막부의 중심인 에도 한가운데서 이러한 일이 일어나자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막부측에서도 무력진압보다는 어떻게든 일을 조용하고 신속하게 처리하고 싶어했고, 이에 부하들을 배신시킨다 등등 몇몇 계략이 나왔으나 타치바나 무네시게가 나오모리의 친구였던 야규 무네노리를 시켜 "사키자키 나오모리가 책임을 지고 할복하면 사키자키 가문과 영지는 그대로 자식에게 이어질 것"이라고 말하게 하는 것을 책략으로 입안하였다. 이것이 받아들여져 야규 무네노리가 직접 사키자키 나오모리를 방문하여 결국 나오모리는 책임을 지고 할복하였는데. 문제는 막부에서 이 사건의 처분으로 사키자키가의 영지를 빼았아 사키자키 가문을 개역시킨다. 개역당할 것이라는 결과까지 야규 무네노리가 알았는지 몰랐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일단 야규 무네노리는 이 사건에 대한 공로로서 후시미의 저택과 사키자키 가의 무구들을 포상으로 받았고, 반면 또 사키자키 나오모리의 장남과 가신 중 두 사람을 등용하여 각각 200석 씩을 주어 사키자키 가문을 이어가게 하였다고 한다.
이 사건에 대하여 현대의 일부 드라마 등, 야규 무네노리가 음흉한 계략가였다고 묘사하는 측에서는 이를 친구팔아 출세한 놈이라는 악명까지 덧붙여졌다고 하나. 에도 시대의 야규 무네노리의 묘사에 대하여 이런 묘사는 없고, 최근에 덧붙여진 평가인듯 하다. 이 최근에 덧붙여진 이유에 대해서는 유파에서 후술.
1621년에는 훗날의 3대 쇼군인 이에미츠의 검술 사범이 되어 이에미츠에게 신카게류를 전수하였으며. 이에미츠가 쇼군으로 취임하고서 1629년 관위로 종 5위하 단마수, 즉 무네노리의 별칭인 타지마노카미 직을 서임받게 하였다.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는 야규 무네노리를 문무 양면에서 매우 신임하였으며, 대부분의 중대사를 무네노리에게 물어서 처리했다고 한다. 무네노리 역시 시마바라의 난 등 대소사를 예측한 것이 정확히 맞아 떨어진 것이 도쿠가와 막부의 공식 기록인 덕천실기에 남아있다.
1632년에는 3000석이 가증되고 막부의 감찰 역을 맡았으며, 1636년에는 다시 4000석이 가증되어 1만석의 다이묘가 된다. 만년에 500석을 다시 가증받고 차남이 2000석을 받았다가 사망하면서 최종적으로 12500석의 다이묘가 되었고. 이 때 그의 검술은 고령임에도 실력이 그다지 쇠퇴하지 않았으며 단순한 기술보다는 하나의 도(道)에 달해 있었다.
1646년 병에 걸려 형년 75세로 사망한다. 죽기 전 이에미츠가 병문안을 왔을때, 야규 무네노리는 자신의 영지와 가산을 모두 이에미츠에게 반환하였고, 이에 이에미츠는 무네노리의 장남인 야규 쥬베에에게 8천 300석, 차남은 무네노리보다 먼저 죽었고, 삼남에게는 4천석. 막내에게는 200석을 배분했다. 사망 후 이에미츠가 크게 비통하였으며, 이후에도 무네노리가 살아있었다면 무네노리에게 이 일을 어찌해야할지 물어봤을텐데. 라고 아쉬워했다는 말들이 덕천실기에 남아있다.
사후 이에미츠의 영에 따라 종 4위로 추종된다. 1만석의 소 다이묘로서 종 4위에 봉해지는건 이례적인 일이었다고 한다.
검호로서도 무장으로서도 정치가로서도 다이묘로서도 모두 유명하며, 내정면으로도 몇번 부교 역을 맡아 성공하였고, 검술과 지모 양쪽에 통달했기에 에도 시대 문무양도를 겸비한 무장으로 항상 야규 무네노리를 최고로 뽑았으며, 영지에 욕심이 없었으며 막부에는 충성하여 에도 시대 가신의 모범으로서도 상찬받았다. 카츠 카이슈도 야규 무네노리를 신하의 모범으로 극찬하였다.
심지어 오륜서와 함께 일본사 100대 명저 중 하나로 뽑히는 병법가전서를 저술하여 활인검등의 개념을 주창, 이론적으로 검술(劍術)을 검도( 劍道)로서 승화시켰고 이 공로로서 현대 전일본검도연맹에 특별히 현창되었다.
무네노리의 자식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바로 야규 미츠요시인데 이 사람이 바로 8천석을 받은 하타모토인 '애꾸눈 야규 쥬베이' 다. 이 인물에 대해서도 수 많은 일화가 있는데, 정작 야규 무네노리는 야규 쥬베이의 성격 등을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서 자식 교육을 어떻게 해야하나 하고 많이 고민했던 일화들이 다수 남아있다.
최종적으로 당대에 이미 천하제일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었고, 에도 시대에 가장 유행하였고, 현재에도 일본 내에 가장 많은 회원이 가입한 야규 신카게류를 부흥시켰으며, 실력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심지어 문학적으로도 부정할 수 없는 진짜 검성.
4 제자
제자들의 사는 지역들을 죽 늘어놓으면 에도의 쇼군가가 일단 중심에 있고, 위로는 동북의 츠가루 + 다테 령의 센다이 번 부터, 서남쪽의 구마모토 번 호소카와, 사가의 나베시마, 사츠마까지 일본 전체 지도가 완성된다. 심지어 와타나베 코안이나 아라키 마다우에몽 등 야규 무네노리의 제자를 자칭했던 인물들도 있을 정도.
제자의 숫자가 너무 숫자가 많기 떄문에 대 다이묘 이상 급의 제자만 서술하면
쇼군이던 도쿠가와 히데타다, 도쿠가와 이에미츠.
호소카와 타다모토 - 미야모토 무사시가 호소카와 가의 검술 사범이었다고 주장하는 측이 있는데, 실제로는 무사시는 그냥 손님이었고 스승은 야규 무네노리였다. 호소카와 미츠나오
나베시마 번의 당주였던. 나베시마 카츠시게, 나베시마 모토시게 등.. 나베시마 가에는 특히 병법 가전서까지 전수한다.
타카하시 나오츠구
시마즈 번의 시마즈 타다츠네의 아들이자 시마즈 가문의 당주였던 시마즈 미츠히사(島津光久).
홋타 가의 당주인 홋타 마사모리.
쿠츠키 타네츠나 등.
이하 이름있는 무사. 즉 다이묘들의 가신,배신급 제자들 또한 수 십 여명으로. 그야말로 부정할 수 없는 당대의 천하제일다운, 제자들의 명단을 자랑한다. 이름난 제자하나 없었던 자칭 천하제일 이랑은 클래스가 다르다
5 유파
야규 세키슈사이 무네요시에 의해 창시된 야규신카케류는 야규 무네노리에 의해서 천하의 야규류로 불리는 등 에도에서 크게 융성하게 된다. 그러나 야규 무네노리와 야규 토시요시의 사이가 절연할 정도로 크게 나빠지는 일이 일어난다. 일단 현재의 야규 류에서는 야규 무네노리가 야규 토시요시의 재능을 질투하여 무네노리가 토시요시를 내쳤다! 라는 말이 대세나. 역사적 근거가 없고.
야규 가의 기록인 옥영습유(玉栄拾遺)나 야규번기록에 의하면 사노 슈메(佐野主馬)라는 자와 관련하여 두 사람 사이에 큰 문제가 생기는데. 일단 야규 신지로 요시카츠. 즉 야규 무네노리의 형이 불구가 되면서 3남 3녀의 미래를 장남 역할을 하게 된 야규 무네노리에게 맡겼고 이에 야규 무네노리는 야규 토시요시에게 금전적 지원을 해주고, 야규 요시카츠의 딸을 맡아서 결혼시킨다. 그 중, 즉 야규 토시요시의 여동생 중 이가의 야마자키 가에 시집갔다가 파혼당하고 돌아온 여자가 있었는데. 이를 무네노리가 사노 슈메라는 자신의 가신과 결혼시킨것.
일단 오빠이며, 야규 신지로 요시카츠 가문의 장남 역이던 토시요시에게 알리지도 않고 여동생을 멋대로 결혼시켰던것도 문제지만, 가장 큰 문제는 사노 슈메가 야규 번 기록에 의하면 사노 슈메는 타국에서 온 자로 본래 성씨는 알 수 없다던 외국인이며(然る所、主馬は他国人で氏も知られていない). 옥영습유에 의하면 슈메는 조선에서 온 자였다.(伝に曰く、主馬者朝鮮国の種也) 출처
일본의 소설가인 아라야마 토오루는 자신의 작품에서 사노 슈메의 본명은 박주말로 임진왜란 때 나베시마 군에 투항하였고, 재능을 간파한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카츠시게가 자신들의 스승인 야규 무네노리에게 박주말을 소개하였고, 이에 박주말이 이름을 사노 슈메로 바꾸고 야규 무네요시에게서 검술을 배운 후, 후에 재능을 감탄한 야규 무네노리가 결혼시키고 일족으로 삼은 후 야규 슈메로 이름을 바꿨다! 고 되어 있지만. 소설이니까 믿을 수는 없고 어떻게 야규 가문까지 가게되었는지, 야규 일족에서 어떤 일을 해서 무네노리의 눈에 들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검술에 능했을 수 도 있고, 무네노리의 병법 가전서에 에도시대 관학이 된 유학의 영향을 받은 구절들이 상당히 등장하니 강항과 후지와라 세이카의 관계처럼 유학자였을 수 도 있고.. 다만 뭐 임진왜란에서 조선에서 끌려간 포로의 추산치가 10만을 웃도는 수치니. 그 중에서 이 정도로 재능있던 인물들 몇 명 정도는 당연히 있었겠지..
어쨌든 사노 슈메는 야규 가문의 딸과 결혼하며 야규 성씨를 받았고, 야규 가의 데릴 사위로 들어가면서 야규 성씨를 받았으니 본인도 신분 미상에서 무사의 신분이 되었고, 자식도 순탄하게 낳아서 후에 자식도 무사로 임관하였으며. 본인은 야규 가문의 일족 묘에도 안장되어 묘가 현재까지 남아있는 등 일족으로 대우받으며 포로 신분치고 정말 굉장히 출세하였지만..
당시 야규 토시요시는 오와리 번에서 검술 사범을 지내고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야규 토시요시가 격분하여 야규 무네노리와 절연하고 따로 오와리 야규류를 세운 것. 그리하여 무네노리는 에도 야규 류, 토시요시는 오와리 야규 류의 창시자가 된다.
뭐 이렇게 유파가 갈라진 것은 좋은데, 문제는 과연 누가 정파(正派)로 인정받았냐는 것.. 상식선에서 놓고보면 1만 2500석의 다이묘이자 막부의 어유파 vs집안을 뛰쳐나갔던 500석의 신하, 오와리의 어유파.라면 당연히 12500석 쪽이 분파라도 정파가 되겠지만.. 문제는 현대에 벌어지는데.
에도 야규 류는 야규 무네노리가 사망한 이후, 야규 쥬베에 -> 사망 후 3남인 무네후유 의 자식들이 에도 야규류를 계승하나 실력이 점점 쇠퇴하다가 16대의 무네히사를 당주로 대가 끊긴다. 반면에 오와리 번에서도 야규 류가 사범의 지위에서 잘리는 등 약해지긴 했으나 대는 이어가고 있었고, 일제 시대의 19대 당주인 柳生厳周과 20,21대 당주 들까지 순탄하게 이어진다. 그리고 아예 도쿄로 본거지를 옮겨 일제시대의 황궁경찰이나 장교들, 궁내성에도 오와리 야규류를 전파. 일제 멸망 이후에는 아예 도쿄에서 동경야규회(東京柳生会)를 발족 활동을 시작하여 현대의 야규 신카게류를 잇고, 활발하게 야규 신카게류를 전파한다. 그리하여 심지어 한국에도 야규 신카게류 가입자가 있을 정도. 어쩄든 요약하자면, 현대에는 에도의 야규류는 이미 멸망했고, 오와리 야규류만이 남아서 융성했다는 것.
그러다보니 에도 시대 문무양도, 신하의 모범으로 상찬받았던 야규 무네노리는 야비한 인간. 흉계로 야규 토시요시를 쫓아냈음. 인가장도 못받았는데 정치꾼이라 에도 야규 류를 세운거. 하는 식으로 왜곡이 되어버리고.
반면에 야규 토시요시는 야규 세키슈사이가 매우 귀여워하였으며, 인가장에 일국일인이라는 단어가 들어있으며, 야규 세키슈사이가 자신의 영지인 500석을 토시요시에게 따로 슈여해줬으니, 야규류의 후계자는 무네요시가 직접 임명한 야규 토시요시다! 즉 오와리 야규류가 야규류의 정파(正派)이다! 라는 말이 현대의 야규 류의 입장, 정설에 가까운 설이 되어버렸다.
실제로는 에도 시대 도쿠가와 막부의 공식 기록인 덕천실기나 에도 시대 편찬된 격검총담, 혼쵸부게이쇼덴 등에서는 야규 무네노리를 정파로 놓고 있으며. 세키슈사이가 야규 요시카츠를 폐적하고 야규 무네노리를 장남 격으로 만들었던 것. 야규 토시요시 측의 주장인 야규 토시요시가 따로 세키슈사이의 영지를 받았다. 무네노리는 인가장을 안받았다! 등의 주장이 실제로는 거짓이라 반박되는거 보면 실제의 후계자는 야규 무네노리가 맞았을 듯 하다.. 상식선에서만 놓고 봐도 후계자가 후보가 둘 있는데 하나는 7급 공무원이고, 하나는 장관이라면야 실제로 역사적 기록을 가지고서 그렇지 않다, 야규 무네노리가 진정한 후계자라며 반박하는 학자들도 많지만, 어쨌든 자손 격인 현대의 야규 류에서 주장하는 입장이 우리 측 사료를 검토해보니 무네노리가 나쁜놈, 아니 우리 조상이기도 한데 우리가 괜히 무네노리를 까겠음? 그리고 야규번에서 구전되는 자료를 검토해본결과 토시요시 500석은 실제로는 3000석입니다. 뭐 이런 소리들을 하니 학자들 입장에서도 부정하기 쉽지 않을 수 밖에 없을듯... 자손을 잘못둔게 무네노리의 죄라고나 할까.
6 일화
검호로서 가장 출세한 인물이라는 말이 있으나, 영지 자체는 마에다 가신이던 츄조 류의 토다 시게마사가 1만 3240석으로 좀 더 많았다. 물론 권력의 크기야 쇼군의 총애를 받았던 종 4위 + 타지마노카미 무네노리와는 비교가 안되지만.
당대 최고의 검호 + 입신 양명이 목표이던 당대의 모든 검호들에게 질시를 받았던 가장 출세한 인물이기에 각 유파마다 무네노리가 관련된 전승들이 굉장히 많다. 대충 정리하면 공통적으로 사실 우리 유파의 개조가 당대 천하제일이던 무네노리를 이겼음ㅇㅇ. 그러니 우리 유파가 최고.라는 출처 미상 + 역사적 근거라곤 전무한 자화자찬들.
예를들어 미야모토 무사시의 니텐기=이천기에서는 무사시가 쇼군가의 사범이 될 거였는데 무네노리가 방해했다는 말이 쓰여져 있으나, 실제로 무사시는 에도 자체를 방문하지 못했고. 클래스 차이가 낭인과 다이묘로 현저했기 때문에 면식 자체가 없었었다. 니텐기 이외의 다른 기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니텐기의 원사료인 무공전에서조차 존재하지 않는 일화. 뭐 니텐기 자체가 다 이런식이지만..
그 외의 츄조 류의 토다 시게마사와의 승부를 무네노리가 회피했다던가, 시현류의 토고 시게타다의 제자가 무네노리의 제자를 상대로 이겼다던가, 혹은 무네노리가 보고서 님 검술을 보니까 자기 실력이 부족하다며 승부도 하지 않고 패배를 인정했다던가 등등...
같은 막부의 검술사범이었던 오노 파 일도류의 오노 타다아키와의 일화들도 좀 많은데, 오노 타다아키가 야규 무네노리 도장에 쳐들어가 수제자들을 박살내고, 무네노리는 이에 자식인 야규 쥬베에에게 상대할 것을 명령하였으나 쥬베에가 상대가 안된다며 버로우했다.라는 일화도 있고. 하나는 무네노리가 자기 자식 교육을 걱정하자 이에 오노 타다아키가 검술 실력을 늘리려면 진짜 사람을 베는게 최고라며 죄인들을 벨 것을 조언하였으나, 무네노리가 음.. 그거 좋군. 한 마디만 하고서 막상 실행은 안했다던가 등등[9]. 사실 에도에서 도쿠가와 가문에서 함께 벼슬을 살았으며 여러모로 자주 만났던 만큼, 이쪽들은 상당히 있을법한 일화일지도 모르겠지만. 역시 다른 기록들은 전무하기에 오노파 일도류 쪽에서의 미화가 좀 들어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 외에 야규 무네노리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일화들로는 엄청나게 이성적이고 침착하며, 검호치고는 놀랍게도.. 매우 선한 성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단 당대의 검호들 중 진검 승부를 했다던가, 혹은 검술을 사사로이 이용한 기록이 전무한 몇 안되는 검호이다. 실제 야규 무네노리가 저술한 병법 가전서의 구절에 의하면, 검 두개가 맞부딛치는 건 작은 병법으로 이기든 지든 득실이 적다고 평했을 정도.
또한 활인검 개념을 정리[10]하여 사람을 베는건 나쁜 일이지만 한 사람의 악을 베어 만인을 구할 수 있다면 그건 선이다. 난세를 평정하기 위해서는 살인검이 필요하고 그 이후에 살인검이 활인검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하기도 하였고. 실제로도 사람을 베는 일 역시 좋아하지 않았던지 오노 타다아키의 말을 듣고도 자식들에게 죄인을 베도록 시키지 않았으며, 심지어 오노 타다아키의 검술 실력을 늘리려면 사람을 베는게 제일이라는 조언을 듣고 타다아키(...)츠치기리를 하려던 도쿠가와 이에미츠를 무도토리로 목숨걸고 막았다던가. 나오모리의 적자를 등용하여 가문을 잇게 만들고, 사망한 친구의 소식을 듣고 슬퍼했다던가 등등의 품성을 알 수 있게 하는 일화들이 존재한다.
특히나 승려인 타쿠앙 소호와의 우정이 유명하며, 타쿠앙에게 불교,유교적인 가르침을 많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병법 가전서 역시 신토와 불교,유교의 가르침이 혼합되어 있는 내용.
엄청난 골초라서 타쿠앙이 심지어, 담배를 피면 연기때문에 가슴의 병에 걸린다고 조언을 한 서찰이 남아있으며. 이에 무네노리는 곰방대의 길이를 늘린 후에 이러면 연기가 몸에 안닿을테니 괜찮다! 라고 주장하며 길이를 늘린 담배를 계속 폈다고 한다.
자식들의 교육에도 열성적이었는데 저 놈의 자식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 하고 고민하며 타쿠앙에게 보낸 서찰이 현재도 남아 있으며. 위의 오노 타다아키의 일화 중 하나도 자식들의 검술 지도에 관한 일화. 특히 야규 쥬베에의 성격이 건방지고 침착하지 못했던 편이라 이를 좀 마음에 안들어 했다고 한다. 뭐 사실 야규 쥬베에도 전설적인 검호긴 하나 실제로 역사적으로는 한 일이 전무하고, 그저 수 많은 전설들만 남긴채로 44살의 나이로 요절한걸 생각하면 무네노리의 혜안이 맞아떨어진것.
추가로 야규 쥬베에에 관하여는 무네노리가 짱돌을 던져서 쥬베에가 맞고 애꾸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쥬베에도 창작물 등에서 외눈의 검사로 등장하나 실제로 척안이었다는 기록은 없다.
7 대중매체에서
현대 무네노리에 관하여 현대의 야규 류 등에서 주장하는 왜곡된 인상들 + 정보 감찰 역을 했으니 닌좌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일본 애들의 망상 덕분에 대체적으로 악역이나 모사꾼 정도의 이미지로 등장한다. 실제로 병법 가전서에서 그가 했던 고찰이나 역사적인 이미지와는 다른 모습.
악당 무네노리라는 현대의 이미지와 과거의 문무양도, 가신의 모범 등의 과거의 이미지를 가장 잘 버무린 현대의 작품이 KOEI사의 게임인 전국무쌍 시리즈. 이 시리즈에서 무네노리는 현대에 묘사되는 것처럼 음흉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인을 구하기 위해서 악당을 쓰러트리려고 하는 활인검의 신념사실 불살은 왜곡이지만 이건 바람의 검심의 영향을 받았을듯을 관철한다.
7.1 드라마
시대극에서는 풀네이밍보다 그의 관직인 타지마노카미(但馬守), 줄여서 타지마라 부른다. 자기 자식이 죽는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정도로 가족에 대한 정이 거의 없으며 막부를 위한 일이라면 어떤 더러운 짓도 서슴지 않는 냉혹한 정치가의 모습을 보인다. 어쩐지 도쿠가와 막부의 국정원장 같은 포지션. 모든 작품에서 아들인 쥬베와 사이가 매우 안 좋은 것으로 묘사되며 주로 막부의 반대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도구로서 쥬베를 이용하는 등[11] 흑막이자 만악의 근원으로서 사사건건 대립하는 것이 특징.
특히 무라카미 히로아키 판 드라마인 야규 쥬베 7번 승부 1-2시즌에서는 이 점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아무 죄도 없고, 막부에 해가 되지 않을 인물들이라도 만약을 대비해서 죽이라고 하는 점도 그렇지만 쥬베가 이건 아니다 싶어서 절대로 손을 대지 않으려고 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인물을 제거하게 만든다.
1-2시즌에 등장하는 반 막부파의 인물들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를 과거의 사건으로 묘사하는데, 여기에는 하나같이 무네노리가 주모자로 관여했기 때문에 쥬베 개인에 호의를 품은 자들조차도 결국 쥬베와 싸우게 되는 등, 진정한 만악의 근원이다. 특히 시즌 2에서는 막부에 대한 충심이 지나친 나머지 시마바라의 난에 막부에 반하는 낭인이나 다이묘, 백성들이 결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 배후에는 대납언이었던 공경 엔조지 나리히라(円造寺業平)[12]를 위시한 조정이 있다는 점을 알아차렸으면서도, "어디 한번 동참해볼까?"라며 대놓고 분쟁을 조장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 장면에서 아들 마타쥬로가 아버지의 광기에 식겁했을 정도.
그러나 종국에는 정치적 동반자로 여겼던 로주(老中) 마츠다이라 이즈노카미 노부츠나(松平伊豆守信綱)의 토사구팽으로 실각하는 것이 이 인물의 최후로 묘사된다.
타지마를 연기한 배우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치바 신이치 판 야규 쥬베 시리즈의 나카무라 킨노스케[13]로 자식의 죽음에도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막부에 대한 충성에만 몰두하며 가문과 막부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친구는 물론 충성을 바친 부하조차도 거리낌 없이 배신해 버리는 냉혹한 정치인의 이미지를 확립했다. 창작물에 등장하는 타지마의 음험한 이미지는 모두 이 사람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5-2007년의 무라카미 히로아키 시리즈는 나츠야기 이사오(1939-2013)가 연기했는데 나카무라 판과 캐릭터성은 변함 없지만 여기서는 상술한 것처럼 온갖 사건의 만악의 근원이란 설정이 붙은데다 자기 가족과 부하를 희생시키면서까지 권력에 대한 무시무시한 집착을 보이는 등 막부에 대한 충성심을 광기에 가깝게 표현하여 인간으로서는 역대 최악의 타지마를 연기해냈다. 그래서인지 2시즌 마지막회에서 실각했을 때는 그간의 이미지와는 맞지 않게 오히려 불쌍해 보일 정도.[14]
7.2 슈팅 게임 바사라
내 검에 베이는 걸 영광이라 생각해라!(첫 등장시)
네놈의 검은 거슬린다! 사라져 없어져라!(제2형태)
성우는 하야미 쇼. 5번째 스테이지 단독 보스.
제1형태에서는 레이저 도를 휘두르면서 공격해 온다. 그리고 기관총으로 공격.
1형태를 반파시키거나(반파시키면 폭탄과 잔기를 준다) 시간이 경과하면 제2형태로 합체, 퍼펙트 무네노리(가칭)가 된다.
오른손(좁은 대형탄)->왼손(넓은 소형탄)->5웨이 산탄공격->오른손->왼손->추적공격.
어느 정도 데미지를 입으면 등 뒤에 장착한 비트로 공격. 비트->대형 전방위 산탄 구체의 패턴이다.
비트의 탄환은 플레이어를 향해 날아오기 때문에 미리 읽고 피하면 수월하다.
이후에는 비트+대형산탄의 파상공격 패턴.
7.3 노부나가의 야망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
검호면서도 지력과 정치력이 높다. 검호들 중에서는 지력, 정치력 1위. 천도 기준으로 통솔 41 무력 92 지력 81 정치 66.
7.4 전국무쌍 시리즈
야규 무네노리(전국무쌍) 문서 참고.
7.5 그 외
- 바질리스크 코우가인법첩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옆에 앉아 있다.
- ↑ 석고 자체는 1만 3240석의 마에다 가의 토다 시게마사가 더 많았으나 마에다 가문의 바이신의 신분이라 다이묘로 치지 않았다.
- ↑ 야규 가문의 기록으로는 최고 수제자
- ↑ 야규 무네노리의 장남인 야규 요시카츠의 차남
- ↑ 시기는 1594년이다, 타이코검지 때다, 이전이다 라는 이설이 있다.
- ↑ 영지를 빼았긴 연도도 1594년설을 따른다면 거의 영지를 몰수당하자마자 소식듣고 바로 중개해줬다는 소리가 된다.
- ↑ 사실 요시카츠의 장남이던 야규 구사부로 스미요시의 나이가 무네노리와 겨우 6살차이고, 차남인 토시토시와는 8살 차이다.
- ↑ 무네노리가 갓난아기일때
- ↑ 산킨고 타이제 = 아직 제도로 명확하게 시행되기 이전이나 다이묘들이 눈치껏 에도에서 저택을 마련해서 기거 중이었던 덕분에 에도에 있었다.
- ↑ 야규 류에서 오노 파 일도류들을 까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 같은 기록이나, 오노 측에서 내려오는 기록이다. 오노 타다아키도 참..
- ↑ 실제로 활인검 개념 자체는 신 카게 류의 노부츠나부터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사실 검술 중흥의 시조 이이자사 이에나오부터도 나름의 평화주의를 주창하기도 하였고.
- ↑ 쥬베가 아버지인 무네노리를 호칭할 때, 아버님(親父殿)이라고 호칭은 하는데 이건 제3자의 입장에서 다른 사람의 아버지를 높이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무네노리도 사이가 안 좋다는 점을 반영해서인지 쥬베를 자네(お主)로 호칭하는데, 보통의 부자지간이라고 볼 수 있는 사이는 아니다. 단적인 예로 쥬베의 동생인 야규 마타쥬로한테는 너라고 호칭하는 등 무네노리와 쥬베의 사이는 그냥 혈통상 부자라는 점 외에는 거의 남남으로 묘사된다.
- ↑ 대납언이란 관직은 율령제 하의 영내관 서열 3위인 관직이지만, 엔조지 나리히라 자체는 가공의 인물이다.
- ↑ 원피스의 킨에몬의 모티브가 된 배우이다.
- ↑ 그런데 이 시리즈에서 타지마를 연기한 나츠야기는 나카무라 킨노스케 판에서는 도쿠가와 타다나가의 가신 벳키 쇼자에몬을 연기했었다. 타다나가는 익히 알려져 있듯이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라이벌이었으므로 가히 최고의 배우개그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