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레 해전

Naval Battle of Cala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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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마다의 패배. 루터버그 作

1 전투 원인

해양패권을 장악하고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부를 축적하던 스페인과 새로이 해양패권 자리에 도전하려는 영국은 1585년 결국 충돌하게 되었다. 당시 스페인군의 전략은 다음과 같았다. '적의 주력을 피해 네덜란드 쪽에 집결해둔 스페인 병사들을 단숨에 런던으로 폭탄드랍하여 영국을 조지자'. 이것은 상당히 강력한 전술이었는데, 일단 영국은 섬나라여서 육군은 대단히 약했고, 런던 브릿지 외엔 제대로 된 방어 시설이 없었다. 이에 비하여 스페인 육군은 당시 유럽 최강으로 이름 높았으며 당시 네덜란드 방면 스페인 육군 지휘관은 16세기 유럽 최고의 명장 중 한명인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당시 찰스 하워드가 이끄는 영국 해군의 방해를 물리치고, 칼레에서 지상군을 탑승시킨 뒤 런던 앞마당에 상륙할 계획이었다. 어차피 스페인 무적함대의 전략적 목표는 영국 해군의 괴멸이 아니고 지상군을 상륙시키는 것이었다.

2 스페인의 허술한 작전

그러나 이 작전 자체가 너무 위험했다.

  • 첫째로 펠리페 2세는 너무 승리를 과신한 나머지 이 작전 계획서를 출판해서 팔았다…[1] 물론, 심리전의 일종이라는 주장도 있긴 하다. 어쨌든 그 덕에 영국은 스페인군의 작전과 물자, 장비, 병력 현황을 미리 알 수 있었다. 작전 계획서는 기밀인데 출판해서 팔았다는 것이 최고의 병크가 아닐수 없다.
  • 둘째로, 당시 칼레 항구는 수심이 낮아 흘수가 깊은 대형선박이 안심하고 정박할 만한 시설이 없었다. 게다가 네덜란드독립군, 일명 '바다의 거지단(Geuzen)'이 소형 선박으로 분탕질을 하고 다녔기 때문에 대형선박은 더더욱 얕은 수심에서의 게릴라 공격에 취약했다. 따라서 파르마 공작이 네덜란드에서 홀수가 얕은 소형 수송선박을 준비하도록 되었지만, 독립군이 활개치고 다니는 지역에서 다수의 선박을 징발하는 것은 계획보다 무척 어려웠다.
  • 셋째로, 작전은 지상군과 해군이 정확한 타이밍에 작전지역에 도착해야 효과를 볼 수 있는데 지상군은 여러 사보타지게릴라들의 방해 때문에 해군의 타이밍에 맞출 수가 없었고, 해군은 기동을 포기하고 지상군을 기다려야만 했다.
  • 넷째로, 이 작전이 성공해서 지상군이 영국 상륙에 성공한다 해도, 영국 정복이 가능할 지 확신할 수 없었다. 물론 위에 언급했듯이 스페인 육군의 질은 대단한 반면 영국의 지상군 병력은 형편없었다. 하지만 상륙할 예정인 스페인 육군의 총 병력은 고작 16,000여명. 이 병력만으로 영국이란 한 나라를 정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몇 년전에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영국에서 싸우기 보다는 적의 영역에서 싸우자는 선공파의 주장으로 스페인을 공격했었지만, 당시에도 스페인 함대와 싸우지는 않았다. 아마 제대로 된 지휘관이라면 도저히 상대할 엄두를 못낼 정도의 전력차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 저기 다니며 스페인의 항구들을 털고 나녔으며 상륙까지 감행해 해안포 요새를 파괴하기도 했으며 금화를 실은 갈레온도 나포했다. 이 때의 활약으로 1년이상 말려야 사용이 가능한 배럴용 널판지가 모두 파괴되었고 이는 이후 무적함대 수병들의 질병과 설사의 원인이 되어 간접적으로 무적함대 패배의 원인이 된다. 물론 칼레 해전은 무적함대 원정 초기에 발생했으며, 이때까지는 아직 물이나 식량부족에 크게 시달리지 않았기 때문에 패배의 '원인'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다만 패전 후 귀환과정에서 발생한 손실(본문에도 언급되지만 해전 자체보다는 이 때 발생한 손실이 압도적으로 크다)에는 큰 영향을 미쳤다. 결국 영국이 입힌 피해보다 스페인이 입은 피해가 막대하기 때문에 무승부가 아닌 무적함대의 패배이며 이런 관점에서 패배의 간접적 원인이라는 것이다.

3 전투 경과

1588년 8월 8일, 어쨌든 우에상섬을 돌파한 무적함대와 실리섬에서 발진한 영국 초계함대의 조우를 시작으로 전쟁이 개시되었다. 곧이어 양측 주력함대의 전투이 벌어지자 격렬한 함포전을 벌였지만, 서로 피해를 주는데는 실패하고 이 때 입은 유일한 무적함대의 손실인 갤리온 1척과 카락 1척도 신호 오인과 돌풍으로 인한 충돌사고였지 교전중 피해가 아니었다.

당시 영국 해군의 함선 대포들이 긴 사정거리를 갖고 있어서 스페인 함대를 원거리에서 농락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설은 해외 다큐멘터리 필름들에서도 확인 되는 것으로, 인양된 스페인 함선의 포들은 포 규격이 제각각이고 근접전투용 소형 포들도 다수 실려있어서 원거리 전투용 함포의 숫자에서 밀렸다는 것. 다만, 영국의 '신형포'가 스페인 보다 사정거리가 길어서 전투에서 이겼다는 이야기는 이원복만화먼나라 이웃나라》가 퍼뜨린 대표적 오해이다. 사실, 양측이 사용한 대포는 모두 독일이나 이탈리아산이였다. 당시에 기술적인 면에서는 스페인이나 영국이나 후진국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선박 건조 능력도 상대적으로 미흡하여 대구경의 대포를 생산해도 사용하기 힘들었고, 그에 따라 작은 구경 대포를 쓰다보니 그만큼 탄환의 크기가 줄어들어 같은량의 화약을 넣었을 시에 '상대적으로' 사정거리가 길긴하다. 영국 해군이 원거리에서 알짱거리며 포격을 실시한 것은 영국해군의 대포가 사정거리가 긴 하이테크 비밀무기라서 그런게 아니고 당시 파르네제가 외곽에 강력한 갤리온 포격함을 배치했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지상군 드랍이 목적이었지 영국해군을 조지는게 목적이 아니었다. 따라서 파르네제는 포격함을 외곽에 배치하여 수송선단을 보호하는 진형으로 진군했고, 영국해군은 그 사정거리 근방에서 알짱거리면서 포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파르네제도 무조건 전투를 회피한 것은 아니었다. 영국해군이 대담한 돌격을 해왔다면 맹렬한 전투가 별어졌겠지만, 시종일관 영국해군은 추격격파하기에는 성가신 거리에서 기동했다.

이 4일간의 전투에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드레이크는 야간 기동에서 선두를 맡아 자신의 함대를 이끌고 있었다. 선두에서 미등으로 함대를 유도하며 전진하던 중 금화가 많아 보이는 화려한 배를 발견, 이를 나포하고 싶은 욕심에 미등을 끄고 기함 혼자서 그 배를 추격. 결국 나포했고 드레이크의 금냄새 맡는 능력은 틀리지 않아 많은 을 노획한다. 그러나 결국 나머지 함대는 제독을 잃고 방황하게 되고 드레이크 자신은 자기 함대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 기간 동안 해당 전력은 전열에서 제외되게 되니 하워드 제독은 꽤나 속이 뒤집어 졌을 것이다.

칼레 화공 이후 일이지만 하워드 제독은 자신의 명령을 어기고 백병전을 감행하거나 좌초한 배들 약탈에 열중하는 드레이크를 더이상 참지 못하고 해임시키게 된다. 그러나 그 덕에 다른 제독들보다 먼저 런던에 도착한 드레이크는 여왕 엘리자베스 1세와 시민들에게 말빨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라 더욱 인기가 상승하게 된다. 당시 영국왕실은 헨리 8세가 너무나 돈을 많이 쓴 돈지랄이 있었기에 해군에 대한 비용이나 징집 인원에 대한 보수는 고사하고 징발한 상선에 보상해줄 만한 재정도 부족했다. 그런데 드레이크가 앞서 말한 상당량의 금을 약탈해서 여왕에게 바친 덕에 여왕은 근심을 날려버리게 되었다. 이 때문에 신임을 얻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결국은 돈인가?

결국 무적함대는 4일간 4번의 싸움을 모두 물리치고 사소한 흠집만 입은 채 칼레항으로 입항한다. 지상군의 준비가 늦어지는 바람에 스페인 함대는 칼레 앞바다에 정박했다. 본래 이 시기는 남풍이 부는 시기라 스페인측은 화공은 예상했지만 소형 선박들을 외곽에 분산 배치하는 정도로 화공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하지만 갑자기 바람은 북풍으로 바뀌었던 것이다.(그래서 이 우연한 바람을 프로테스탄트의 바람이라고도 한다.) 하워드 제독은 이 기회를 놓치면 안된다고 판단, 상선값을 후하게 물어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대형 상선을 동원해 화공을 펼친다.

4 격파된 무적 함대. 그리고...

영국군이 화공을 펼치자 무적함대는 급히 닻을 끊고 진형을 풀어서 넓은 북해로 분산 회피한다. 시도니아 제독의 이 대응으로 함대는 괴멸적인 피해를 모면하고 전장에서의 회피에 성공한다. 그리고 시도니아 제독은 다시 함대를 모아 진형을 재건하려고 하였다...그런데 하필이면 이때 바람이 제 정신을 차려 남풍으로 바뀌었고 바로 곧이어 태풍이 덮쳤다. 닻이 없는 함선들은 속절없이 난파 크리를 먹었다. 더 큰 문제는 더 이상 영국과 근접한 대륙의 네덜란드지역의 항구는 안전하지가 않고 하룻밤도 편히 정박할 사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무적함대에는 네덜란드의 스페인 육군으로부터 무기, 화약, 군수품을 지원받기로 되어있었으나 이것이 기약없는 일이 된 상태에서 맨몸으로 대양으로부터의 공격에 노출된 상태라는 것이다. 중립국이었던 프랑스는 물과 식량의 거래는 허용했으나 포탄이나 화약은 거래물품이 아니었고, 네덜란드에 주둔하던 스페인 원정군은 네덜란드 해군에 의해 봉쇄된 상태였다.

그 후 영국 해군화약부족[2]으로 회항하지만 이미 계절풍이 바뀌고 전력이 약화된 무적함대는 스코틀랜드를 우회!!해서 귀환하기로 결정했다...그리고 스페인에 도착할 때까지 함대는 2번의 태풍을 더 맞게 된다. 실제로 영불해협에서 인양된 무적함대 선박은 대포가 단단히 묶여진 상태였다. 전투중에 침몰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스페인 해군은 이 전투로 81척의 함대를 잃었으나 그중 전투 중에 침몰한 배는 단 3척에 불과했다.


스페인 무적함대의 위엄찬 귀함루트와 좌초/침몰지.. 아일랜드에서 대거 말아먹은게 특징적이다.

이 도중에 많은 스페인 군함들이 좌초, 난파, 또는 선원들의 탈진으로 아일랜드 해안에 표착하였고, 잉글랜드인들은 아일랜드인들이 스페인인들과 결탁하거나 스페인인을 숨겨주지 않나 의심하였기 때문에[3] 스페인 병사의 목을 가져오면 상금을 주었다. 그리하여 아일랜드 농민들은 아침마다 해머를 들고 바다로 나가서 표류한 스페인인들의 머리를 박살내고는 상금을 타러가는 일이 일상사였다고 한다. 스페인인들은 탈진상태였기 때문에 두 눈을 멀쩡히 뜨고 대항도 못하고 죽어갔다고 전한다.

그러나 잉글랜드인들의 의심증은 가시지 않았다. 즉 아일랜드인들이 스페인인들을 도피시키려고 시도하고, 갈 곳없는 스페인인들을 아일랜드인들이 그들 사이에서 숨어서 살게 했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들의 아일랜드 봉쇄가 치밀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아일랜드 해안에서 인양된 무적함대 소속의 갤리스 지로나호[4]의 경우에서 보듯 영국은 제 앞가림도 힘들었던 때였던 고로 원하는 만큼 치밀하게 통제할 수는 없었다. 지로나호는 아일랜드 지도자의 지원으로 킬리베그스항에서 수리를 마치고, 1300명이 승선한 채 출항하였지만, 포일석호 인군에서 강풍에 휩쓸려 결국 안트림 던루스 해안에 좌초 후 침몰하여 6인을 제외한 탑승원 전원이 사망했다. 결과적으로 아일랜드에서 도움을 받아 귀환한 스페인 함선이나 상금에 눈이 먼 아일랜드 농민, 어부들에게 살해된 스페인 수병은 많았지만, 아일랜드에 고립돼서 뿌리박고 살게 된 스페인인들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의심증 때문에 이후 잉글랜드인들에게는 "아일랜드인들은 스페인의 종자가 많아서 게으르고 열등하다"라는 속설이 진실인양 퍼져서 오랜기간 널리 믿어지게 된다.

참고로 "엘리자베스 1세가 암살되어 무적함대의 상륙작전이 성공했다면 개신교는 박멸되었을 것이다"란 발상에서 출발하는 것이 키스 로버츠의 대체역사소설 파반(Pavane)이다.

5 칼레 해전 그 후

무적함대 괴멸을 계기로 영국이 대서양의 제해권을 쥐었다고 아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펠리페는 무적함대의 괴멸 소식을 듣고 "그럼 하나 더 만들지 뭐..."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 더 만들어서 영국을 공격했다!!

영국은 이후에 드레이크가 스페인에 대한 보복전을 감행하지만 개털리고 도망온다. 신기한건 그 와중에도 드레이크는 보물을 약탈해 왔다. 영국은 이후 내전에 휩싸이는 바람에 대서양 제해권을 네덜란드에 넘겨주게 되고 한동안 암흑기에 돌입하게 된다. 무엇보다 영국은 무적함대를 격파한 다음 해 스페인 갈리시아의 라 꼬루냐 항에 후대 역사가들이 '잉글랜드 함대(Invencible Inglesa)'라 부르는 대규모 원정군을 보냈다가 1만 2천의 병력을 까먹고 개발살났다. 당시 스페인과 잉글랜드의 국력 차이를 생각하면 스페인이 무적함대를 잃은 거보다 배가 되는 피해이다. 이후로 잉글랜드는 스페인과 전면적인 해상 교전을 벌일 능력을 상실했다. 결국 1604년, 엘리자베스와 펠리페 2세 둘 다 죽은 후 재정고갈로 인하여 영국 해협 개방, 사략질 전면 중단, 네덜란드 독립군에 대한 지원 전면 중단이라는 굴욕적인 조건으로 패배했다.

아무튼 무적함대 자체가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영국 해군의 공격보다는 태풍 때문이었지만, 무적함대가 패배한 사실은 세계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도 지중해식 해군이 대서양에서 얼마나 무력한지를 입증한 전투이기 때문이다.

위글을 모두 짧게 요약하면 무적함대는 영국해군 때문에 진 것이 아니라 적벽대전 당시의 군처럼 갑자기 바뀐 날씨에 화공으로 1타, 마지막으로 몽골 제국처럼 가미가제에 의해 결정타를 맞고 뻗었다고 보면 된다.
  1. 비슷한 사례로 병사들이 작전목표를 노래까지 만들어서 떠벌리고 다닌 이 전투가 있다.
  2. 이게 얼마나 심각한 수준이었냐하면, 함포전 한 번 간단하게 벌이고 나서 화약과 탄환이 바닥이 날 정도였다.
  3.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아일랜드는 스페인과 같은 가톨릭이였다.
  4. 1968년 인양 결과 엄청난 보물이 나온 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