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n "The World's Most Dangerous Man" Shamrock
1 개요
국적 | 미국 |
종합격투기 전적 | 47전 28승 17패 2무 |
승 | 2KO, 23서브미션, 3판정 |
패 | 11KO, 4서브미션, 2판정 |
생년월일 | 1964년 2월 11일 |
신장 / 체중 | 186cm / 97kg |
링네임 |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사나이" |
주요 타이틀 | 무차별급 초대 킹 오브 판크라시스트 |
UFC 초대 슈퍼파이트 챔피언 | |
기타 | WWF 인터콘티넨탈 챔피언 |
WWF 태그 팀 챔피언 | |
WWF 1998 킹 오브 더 링 우승 | |
TNA 월드 헤비급 챔피언 |
관련항목 : UFC 역대 챔피언 |
풀 네임은 케네스 웨인 샴락. Pancrase의 제왕이자 무규칙 UFC에서 호이스 그레이시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던 전설적인 파이터이다. 라이온스덴의 수장으로 MMA형 슛파이터들의 정점에 오른 사나이.
부모를 여의고 고아로 자란 켄 샴락은 손도 대기 힘들 정도의 문제아였다고 한다. 고아원의 골칫덩이였던 켄을 선뜻 입양한 것은 양부인 밥 샴락이었다. 켄은 프랭크 샴락과 함께 밥의 양자로 자라났다. 장성한 켄은 일본의 프로레슬러였던 후나기 마사카즈와 스즈키 미노루에게 격투기를 배웠다.
2 전적
- 주요 승 : 후나기 마사카즈(2), 후케 타카쿠, 패트릭 스미스, 야나기사와 류지, 바스 루튼(2), 모리스 스미스, 댄 세번, 브라이언 존스톤, 알렉산더 오츠카, 키모 레오폴도, 로스 클리프턴, 조나단 이베이
- 주요 패 : 호이스 그레이시(2), 스즈키 미노루(2), 후나기 마사카즈, 댄 세번, 후지타 카즈유키, 돈 프라이, 티토 오티즈(3), 리치 프랭클린, 사쿠라바 카즈시, 페드로 히조, 마이크 브루크, 킴보 슬라이스
2.1 UFC 토너먼트
1993년 후나기 마사카즈는 기존의 프로레슬링에서 벗어나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실전을 지향하는 Pancrase를 설립했고, 켄 샴락은 용병격으로 참가했다. 1993년 9월 Pancrase 초대 대회에서 후나기 마사카즈를 리어네이키드초크로 꺾으며 자신의 이름을 격투기계에 널리 알렸다. 이후 타카하시 카즈오와 후케 타카쿠 등 이름난 슛파이터들을 모조리 꺾으며 판크라스의 제왕으로 군림했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온 샴락은 자신의 체육관인 라이온스덴(Lion's Den)을 설립한다.
1993년 11월 12일 역시 MMA 역사에 있어 기념비적인 날이였다. 초대 UFC 토너먼트가 열린 것이다. 미국 콜로라도에서 열린 대회는 전 세계의 강자들이 모인 자리였고 샴락 역시 슛파이팅의 에이스로 호리온 그레이시로부터 오퍼를 받았다. 1회전에서 킥복서 출신의 패트릭 스미스를 힐훅으로 간단히 제압한 샴락은 2회전에서 호이스 그레이시와 격돌한다.
호이스가 먼저 태클을 시도했지만 샴락이 잘 막아냈다. 이후 언더훅을 파서 상위를 잡고 하체관절기를 시도했으나 불발, 오히려 상위를 호이스에게 빼앗긴다. 호이스는 하프에서 백마운트로 갈아탄 후 리어 네이키드 초크를 시도했다. 샴락은 그립이 깊지 않다고 판단했으나 호이스는 도복의 소매깃으로 그립을 채우며 초크를 완성시켜 샴락의 탭을 받아냈다. 57초만의 통한의 패배였다.
판크라스로 돌아온 샴락은 연승행진을 이어간다. 1994년 1월 스즈키 미노루에게 패했으나 야나기사와 류지, 바스 루튼, 후케 타카쿠를 쓰러뜨리며 여전히 강력한 선수임을 입증했다.
1994년 9월에는 호이스에게 리벤지하기 위해 UFC 3에 참가하여 1차전과 2차전에서 승리하며 준결승에 진출한다. 하지만 호이스가 키모 레오폴도와의 경기에서 체력을 소진하여 기권하자 맥이 빠진 샴락도 이탈을 선언해버리고 말았다.
2.2 킹 오브 판크라시스트
1994년 12월 초대 무차별급 킹 오브 판크라시스트 토너먼트에 참가한 샴락은 모리스 스미스, 후나기 마사카즈 등 4번의 대결을 모두 승리로 장식하며 초대 킹 오브 판크라시스트의 왕좌에 올랐다. 판크라스의 제왕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슛파이팅의 정점에 오른 샴락은 다시 1995년 4월 UFC 5에서 다시 호이스에게 도전한다. 샴락은 호이스를 상대하기 위해 장기전을 들고 나왔고 그다지 격렬하지 않은 공방 속에 36분의 경기시간을 모두 소모하고 말았다. 결과는 무승부. 하지만 지루한 경기로 인해 관중들은 야유를 보냈고 승리를 위한 전략을 들고나온 샴락은 '팬들의 기대를 저버렸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UFC 5를 끝으로 그레이시 가문이 UFC를 이탈하자, 더 이상 샴락의 상대는 없었다. 1995년 7월 UFC 6에서 댄 세번과 호대 슈퍼파이트 타이틀을 두고 맞붙어 1라운드만에 길로틴 초크로 승리하며 UFC의 새로운 제왕으로 등극한다. 이후 올렉 탁타로프와 키모 레오폴도가 타이틀에 도전하지만 샴락은 이들을 모두 물리치고 수성에 성공한다. 동시에 판크라스에서도 연승을 이어가며 종합격투기무대의 절대강자로 군림했다.
그러나 1996년 5월 UFC 9에서 다시 만난 세번에게 패하면서 타이틀을 내주게 된다. 하지만 1996년 12월 Ultimate Ultimate에서 브라이언 존스톤에게 승리하며 여전히 강자임을 증명했다.
2.3 WWF
해가 바뀌고 1997년이 되자 UFC의 운영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폭력성과 잔인함으로 인해 도덕적인 비난이 거세졌고 공화당과 복싱협회의 십자포화에 의해 방송금지 처분을 받자 경영은 초토화 상태가 되었다. 파이트머니는 점점 깎여나갔고, 많은 선수들이 PRIDE로 둥지를 옮겼다.
라이온스덴 역시 재정상태가 악화되었고 이에 대한 샴락의 선택은 WWF (현재 WWE)였다. WWF에서도 슛파이터임을 어필하며 앵클락, 토홀드 등의 하체관절기를 주로 피니시로 쓰며 활동했다. 이래봬도 초창기 더 락과 대립하며 인기몰이를 제법 했다. 게다가 1998년 열린 킹 오브 더 링에서 우승하며 WWF로부터 전폭적인 푸쉬를 받게 된다. 이때 활동덕에 WWF올드팬들에게는 뜨아맨이라는 별명으로 익숙하다.
트레이드 마크인 뜨아~! 1분 30초부터 보자.
하지만 WWF의 빠듯한 스케쥴은 MMA 이상의 중노동이었고[1], 샴락 본인도 각본에 의한 파이팅에는 한계를 느끼게 된다. 결국 일본의 PRIDE를 통해 종합격투기 무대로 복귀한다.
2.4 MMA 복귀
하지만 4년 만에 돌아온 2000년 8월 PRIDE 10에서 일본 헤비급의 에이스였던 후지타 카즈유키와 경기를 가졌는데 타격전에서 유리하게 경기를 이끌며 때리던 중 갑자기 경기를 포기했다. 카즈유키도 경기 후 의아했는데, 뭐가 원인이었는지 심장에 무리가 왔다고 한다. 2002년 2월에는 돈 프라이에게 판정패했다. 그리고 다음달, 프로레슬링 ROH에서 깜짝등장해 브라이언 다니엘슨과 경기를 가졌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켄 샴락은 TNA의 초대 월드 헤비웨잇 챔피언이다. 2002년 5월 TNA가 NWA-TNA로 개양했을때 제프 제럿의 권유로 TNA와 계약해 초창기 메인이벤터로 활동했었다.
2002년 11월에는 UFC 라이트헤비급에서 티토 오티즈에게 도전하지만 결과는 완패였다.
2005년 4월 TUF 피날레에서는 리치 프랭클린에게 KO패했고, 2005년 10월에는 사쿠라바 카즈시에게 KO로 졌다. 사쿠라바와의 대결은 레프리의 스톱선언에 논란이 있었으나 샴락이 압도적으로 불리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이후 티토와 2006년 7월과 10월에 2차례 더 대결하지만 모두 샴락의 초살 완봉패로 끝났고, 결국 2007년 UFC에서 방출당하게 된다. 반면 티토는 라이온스덴과의 대립으로 UFC에서의 입지를 다졌고, 켄에게 거둔 승리로 프랭크에게 당한 패배도 다소나마 설욕하게 된다. 티토를 죽입시다 티토는 나의 원쑤.
이렇게 연패를 차곡히 쌓아나가며 실신 KO패를 당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그의 별명을 살짝 비튼 (진짜로)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나이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저렇게 자꾸 KO패 당하다간 본인이 위험하다고(...)
2007년 이후에도 UFC에 끊임없이 러브콜을 던졌으나 모두 거부당하고 마이너단체를 전전하게 된다.
2008년 3월에는 CR에서 경기를 가져 로버트 베리에게 무기력한 경기 끝에 KO패를 당했다. 그리고 그 후 Elite XC 해산의 여파로 CR까지 해산하게 되어 다시 무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2009년 2월 Wargod에서 가진 경기에서는 로스 클리프턴을 1분만에 암바로 초살시켰으나 약물 복용이 적발되어 1년간 경기를 갖지 못하는 흑역사가 있기도 했고, 2010년 7월 Impact FC에서 페드로 히조와 맞붙었으나 타격에서 완벽히 제압당하며 로우킥 난사에 TKO패하고 말았다.
2010년 10월에 USA MMA에서 1승을 추가했으나 얼마 후 마이크 보크와의 경기에서 다리 부상으로 TKO패를 당했다.
2013년 프로레슬링으로 복귀했다.
2015년 6월 19일 51세(...)라는 나이로 벨라토르에서 킴보 슬라이스와 붙었다. 킴보의 약한 다리를 공략하여 테이크 다운을 성공시키며 백을 잡아 선방하는 듯 보였으나, 나이가 나이인지라 킴보가 힘으로 그립을 풀어냈고, 일어나는 과정에서 안면에 펀치세례를 맞아 그대로 고꾸라지며 1라운드 TKO패배. 이쯤되면 노인학대 수준이 아닌지.. 돈이 궁해서 그런건지 늙어서까지 링을 떠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매우 안타깝다.
2016년 2월 19일(한국시간 20일) 아직도 은퇴하지 않고 같은 노인정 친구호이스 그레이시와 벨라토르 149에서 경기를 했다. 결과는 1라운드 2분 22초 TKO패배... 늙은이 두명이서 팔다리 허우적 거리다 클린치에서 끝나버린 별 볼일 없는 경기였다. 그것도 고간(...)[2]과 안면 니킥에 이은 테이크 다운, 파운딩 TKO로... 참고로 전 경기가 51세 였으니 이번엔 52세(...)
3 파이팅 스타일
강인한 육체와 정교한 테크닉을 겸비한 실력자로 슛파이터들의 정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초기 NHB에서는 웰라운더라고 해도 될만한 기량을 갖추고 있었으며 특히 서브미션에 대한 이해도가 전무하던 시절에 수준높은 하체관절기를 선보이며 그래플러들의 전성기에 한 획을 그었다.
선수들은 점점 대형화되면서 그의 피지컬도 경쟁력을 잃었고 타격과 그래플링 능력을 갖춘 컴플릿 파이터들이 대두하면서 그의 입지도 점점 좁아져 갔다. 슛파이팅이라는 종목 자체가 현대 MMA에서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그의 부진과도 무관하지 않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MMA 상향평준화의 기폭제가 된 것이 그의 동생이자 같은 슛파이팅 베이스인 프랭크 샴락이라는 것이다. 프랭크 샴락은 컴플릿파이터 시대를 열었으나 이는 얼마 후 슛파이팅의 몰락으로 이어진다.
4 기타
동생인 프랭크 샴락과는 피가 섞이지 않은 형제이다.
자신의 양부인 밥 샴락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다. 켄 샴락과 프랭크 샴락이라는 불세출의 형제 파이터를 키워낸 밥 샴락은 2010년 1월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설립한 라이온스덴은 종합격투기의 명문 체육관으로 프랭크 샴락, 가이 메츠거 등 수많은 파이터들의 양성기관이 되었다. 켄 샴락 본인도 선수 겸 트레이너로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
프랭크 샴락과는 Pancrase 시절 프랭크가 라이온스덴을 나서면서 틀어져 버렸다.
2000년대 이후에는 안습일로의 전적을 보이고 있으나 몸값만은 여전히 비싸다. 최소 30만 달러 이상인데, 전성기가 한참 지난 2010년에도 현역으로 경기를 뛰는 것을 보면 라이온스덴의 재정상태가 안좋다는 얘기는 사실인 듯 하다.
UFC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 있다. 2004년 UFC 45에서 라이벌이었던 호이스와 함께 헌액되었다.
아들인 라이언 샴락[3]도 격투기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