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고 민주 공화국/역사

콩고 민주 공화국의 역사를 다루는 항목.

1 콩고 왕국

15세기 경 콩고강 유역에 므위시 콩고(Mwissikongo)족이 음반자 콩고(Mbanza Kongo)라는 도시를 건설하면서 콩고 왕국이 역사 속에 등장하게 된다. 콩고 왕국은 그러나 왕위 계승의 기준이 불분명하고 중앙 지역 외의 인구가 희박한, 전형적인 아프리카 소왕국의 형태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들은 서부 아프리카로부터 포로를 잡아들이거나 노예를 사들여 인근의 농지를 개척하면서 세를 불려나갔다. 해안가로부터 떨어진 내륙 지방에서는 쿠바족, 루바족, 룬다족, 카젬베족 등 다양한 토착 부족들이 부족 국가를 구성하고 있었다.

콩고 왕국이 본격적으로 성장한 것은 15세기 후반부터 콩고강을 거슬러온 유럽 세력과 교역을 트면서부터였다. 콩고 왕국은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15세기 후반 유럽인 선교사들로부터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여 흑아프리카 최초의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16세기 초에 국왕 아폰소 1세와 왕자 엔리케는 교회를 설립하고 포르투갈에 학생들을 유학 보내는 등 신문물의 수입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크리스트교의 수입은 곧 문자의 도입과 행정의 안정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교역이 성행하면서 노예 무역이 필요 이상으로 확산되는 폐해가 나타났다. 노예 무역이 흔히 알려진 이미지와는 달리, 그 시기도 유럽의 진출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서아프리카에서는 상당히 성행하고 있었음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본래 노예 무역의 목적은 서아프리카의 소국 혹은 부족들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유럽과의 교역에서는 그것이 서서히 노동력 유출의 형태로 변화했던 것. 특히 국체를 형성하면서 노동력이 매우 절실했던 콩고에서 노예 무역은 갈 수록 용인하기 힘들었던 일이었다. 노예무역이 지나치게 확산되자 1526년 아폰소 1세는 자신의 통제를 넘어서 지나치게 성행하는 노예 무역에 위기감을 느끼고 포르투갈에 항의했으며, 노예 수출을 이방인과 죄인에 한정시켰다. 콩고의 이 사례는 아프리카에서 노예 무역의 위험성을 드러낸 가장 빠른 사례라고 할 만하다.

왕국은 16세기 후반과 17세기로 들어서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콩고의 노예 무역 제한으로 포르투갈과 네덜란드가 교역의 폭을 넓히면서, 인근 소국들도 총기를 얻을 수 있게 되어 반란이 빈발했다. 서양 세력도 서서히 콩고 그 자체를 노리고 접근하기 시작했고, 귀족들은 토착 신앙을 억누르는 교회의 시도에 반발했다. 결국 1568년 수도를 뒤흔든 반란,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개입, 주변국 야카(Yaka)와 소요(Soyo)와의 충돌로 한 세기 동안 콩고는 몰락하여, 가르시아 2세의 분전을 마지막 불꽃으로 분열의 구덩이에 빠진다. 이후 한동안 내전이 지속되다가 1706년에 베아트릭 킴파 비타(Beatriz Kimpa Vita)의 콩고 재통합 운동이 있었으나 실패한다.

2 콩고왕국 이후

이후 콩고는 재건의 노력을 계속하나, 이미 상당히 커져버린 주변국들로부터 압박받아 그 성과를 이루지 못했고 무역의 중심도 타지로 이동한 상태였다. 19세기 중엽에 들어서면 포르투갈에서 노예 무역을 폐지하고 이후 남은 거주민을 후퇴시켰으며, 공통 조상을 중심으로 단결하는 마칸다(makanda)가 나타나 콩고의 독립성도 강화되었지만 주변 민족 또한 마칸다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세력의 확대는 힘들었다.

1884년의 베를린 회의 이후 콩고강 유역에 대해 포르투갈이 식민지 영유권을 주장했으나, 힘이 죽을 대로 죽은 포르투갈의 의견은 무시당하고 대신 상아 등의 사치품을 원하던 벨기에의 국왕이자 식민제국주의 역사상 최악의 인물인 레오폴드 2세가 이곳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본래는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사유지였지만 이 작자가 워낙 잔인한 짓을 저질렀다. 상아, 고무 등을 할당량을 정해서 바치라고 주민들에게 명령하고 그에 못 미치면 손목을 자르는 등의 가혹한 형벌을 가했다. 그래서 인구가 천만명이 죽어나가 엄청나게 많이 줄어들었고 이 때문에 국제적 비난을 받자 벨기에 정부가 이를 몰수해 식민지로 편입했던 비극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다만 콩고의 당시 인구가 천만 남짓인데 단숨에 천만명이 사망했다기 보다는 수십년간 벨기에의 폭정으로 수 백만명이 사망했다고 봐야할듯. 하지만 벨기에의 폭정은 사실이었다. 콩고 식민지인 피바다의 대가로 벨기에는 부를 누렸고 1차대전 중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 2세가 눈독을 들여 독일령 콩고로 삼으려 하였으나 독일의 패전으로 콩고는 1,2차 대전 이후까지 벨기에의 식민지로 남게 된다.

3 현대사

1950년대 즈음부터 미국소련은 콩고를 독립시키라고 벨기에 측에 압력을 넣었다. 어차피 벨기에는 미국에게 렌드리스 등 빚을 지고 있었다. 결국 벨기에 측은 1955년부터 단계적인 독립안을 마련했다. 그들은 현지 세력의 정당 설립을 허가했으며, 의회도 허락했다. 그러나 정당 설립으로 독립 요구가 더욱 거세졌다. 현지의 노동 조합과 학생 운동가들은 현지 경찰 병력과 대칩하며 독립시위가 많이 벌어졌다. 벨기에 식민정부는 점점 유화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식민정부는 '본국에게 동등한 시민권, 선거 참여, 교육, 정치를 보장한다'라는 사안을 보고했다. 벨기에 본국은 이 제안에 대해 현지에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라는 이유로 거부했다. 이에 불구하고 현지의 불만과 외교적인 압력은 거세어져 갔다.

미국은 렌드리스 등 물자 대여에 대한 보상을 이유로 콩고의 독립을 요구했다. 지친 벨기에 정부는 1958년에 이르러서 2년 내로 콩고를 독립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즉시 현지 내각이 구성되었다. 현지인들은 파트리스 루뭄바(브라자빌을 대표)가 구성한 정당에 대부분 지지를 보탰다. 이제 현지인은 좀 더 많은 자유와 권리를 누리게 되었다. 벨기에 측도 알제리 전쟁같은 식민지 전쟁을 두려워 하였기 때문이다. 벨기에는 전후 사정으로 인해 콩고에 보낼 병력도 부족했고, 미국에 갚을 렌드리스 물자 등이 부담이 되었다.

끊임없는 투쟁 끝에 1960년 3월에 킨샤샤 콩고라는 이름으로 독립했지만 루뭄바 총리와 카사부부 대통령 간의 갈등이 심했고, 또한 자원이 풍부한 동남부 카탕가 주 총리 촘베가 벨기에의 지원 하에서 독립을 선언하였다. 벨기에군은 국제연합에 의해 곧바로 철수되었으나 내전은 끝나지 않았고, 소련 등의 지원을 받던 루뭄바와 벨기에와 남아프리카공화국 인종차별 정권의 지원을 받던 촘베, 그리고 미국의 지원을 받던 카사부부간의 삼파전으로 번졌다. 참고로 체 게바라 평전에도 이때 당시 콩고민주공화국이 등장하는데, 그 이유는 쿠바 혁명 후 체 게바라가 콩고 내전에 참전해 게릴라 훈련 및 전투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체게바라는 콩고 인민군의 무능과 사치에 학을 떼고(...) 쿠바로 돌아가버린다.


모부투 세세 세코

이런 상황에서 모부투 세세 세코가 잠정정권을 수립해 루뭄바를 죽이고 1963년 카탕가의 촘베를 진압했다. 그러나 1964년 촘베가 콩고민주공화국 전체의 실권을 쥐게 되자 1965년 모부투는 쿠데타를 일으키고, 일단 내전은 최대 20만 명의 희생자를 내고 일단락된다. 정권을 잡은 독재자 모부투 세세 세코는 국명을 자이르(혹은 자이레, Zaire)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그렇게 30여년간 모부투의 부패 독재 통치 아래에 있던 자이르에 다시 위기가 닥치는데, 바로 옆 나라 르완다에서 벌어진 르완다 내전이었다. 이로 인해 촉발된 1차 콩고 전쟁은 결국 1997년에 모부투 정권이 무너져 새로 마르크스 주의로랑 데지레 카빌라가 정권을 잡았고, 국명이 다시 '콩고 민주 공화국'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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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랑 데지레 카빌라

그러나 1998~2002년에 아프리카판 제1차 세계대전이라고 불린 2차 콩고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콩고 전쟁에는 8개 아프리카 국가가 관여하고 25개의 무장세력이 관여했는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피해를 낸 전쟁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아프리카에 약 50여개 국가가 있으니 거의 5분의 1이 개입한 셈.

이 전쟁에서 나미비아, 짐바브웨, 앙골라, 차드는 민주콩고 정부의 편에 섰고, 우간다르완다, 부룬디는 카빌라에 반대하는 반군들을 지원하면서 반대편에 섰다. 이 과정에서 르완다와 부룬디는 동부 지역의 광물에 눈독을 들이고 서로 충돌하는 사태까지 발생했었고, 반군들도 자원 때문에 분열되는 양상을 보였으나, 친 카빌라 세력은 이미 전투 능력이 심각하게 떨어진 상태라 이를 이용할 수 없었다.


조제프 카빌라 현 콩고민주공화국의 독재자

로랑 데지레 카빌라가 2001년 경호원(...)에게 암살.[1] 정확히는 세력 내부 합의로 숙청[2] 부친 로랑 데지레 카빌라의 뒤를 이었다. 2002년에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비호와 중재로 평화협정이 체결, 2006년 대선에서 조제프가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여담으로 조제프 카빌라가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나이는 겨우 30세(1971년생)였다. 그의 기록은 김정은이 깼는데 2012년 김정은이 독재자의 길을 걷기 시작할 당시의 나이가 만으로 28세. 만약 장수한다면 감비아의 야히아 자메와 함께 독재기록 갱신도 무리는 아니다. 벌써 독재자/장기집권(10년 이상 독재)에 이름을 올렸으니;; 빨리 갱신이 이뤄지지 않길 바랄 뿐이다.
  1. 그를 죽인 경호원 라시디 카세레카는 현장에서 경호원들한테 사살된다.
  2. 카빌라 정권은 모부투 정권 때와는 달리 독재에 염증이 난 콩고 국민들의 분위기를 고려하여 그래도 집단지도체제에 가까운 형식을 취했고, 카빌라 본인도 그리 권력이 강하지 않은 편이었기에 실질적인 의사결정은 사회 각계각층의 연합으로 구성된 엘리트 집단에서 합의하에 결정했다. 그리고 이들이 파악한 콩고 내부 분위기는 일단 르완다-우간다의 공세를 막고 전선을 양키부주로 고착화시키긴 했지만 그 뒤 지루한 전쟁이 수년째 이어지면서 경제 파탄을 초래했기에 전쟁을 끝내고 재건에 몰두해야 한다는 쪽이 대세였고 국제적 압력까지 가해졌기에 이미 르완다-우간다군의 철수를 조건으로 전쟁을 끝내는 쪽으로 방향을 정한 상태였다. 단지 넌씨눈 로랑 카빌라 본인만 전쟁 지속을 외쳤던 것. 따라서 대외적으로는 육참총장의 암살이지만 실제로는 그 아들까지 동의한 내부 숙청이고, 육참총장은 희생양으로 나중에 꼬리 자리기를 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 숙청은 특별군사법정 주도로 진행되어 135명이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2003년 카빌라의 사촌 형제 가운데 한 명이자 암살의 주모자로 지목된 에디 카펜드 (Eddy Kapend) 대령과 다른 25명에게 사형 판결이 내려졌다. 그 외 64명이 6개월에서 종신형 판결을 선고 받고 투옥되었으며, 45명은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