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슨 챈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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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닉스 선즈 NO. 4
타이슨 챈들러(Tyson Cleotis Chandler)
생년월일1982년 10월 2일
신장216cm (7' 1") [1]
체중109kg (240 lbs)
포지션센터
드래프트2001년 드래프트 1라운드 2순위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에 지명
역대 소속팀시카고 불스(2001~2006)
뉴올리언스 호네츠 (2006~2009)
샬럿 밥캣츠 (2009~2010)
댈러스 매버릭스 (2010~2011)
뉴욕 닉스 (2011~2014)
댈러스 매버릭스 (2014~2015)
피닉스 선즈 (2015~)
등번호3번(시카고)
6번(댈러스)
4번
수상내역NBA Defensive Player of the Year (2012)
NBA All-Star (2013)
All-NBA Third Team (2012)
NBA All-Defensive First Team (2013)
NBA All-Defensive Second Team 2회(2011,2012)
2012년 NBA 올해의 수비수상
드와이트 하워드타이슨 챈들러마크 가솔

1 개요

NBA의 농구선수. 커리어 처음에는 미숙한 점이 많았고 롤러코스터같은 선수생활을 보냈지만 경험이 쌓이면서 리그에서 손꼽히는 수비형 센터로 성장한 선수다.

2 성장과정

챈들러는 두 형제와 어머니와 함께 그들 가족의 개인농장에서 살았다. 챈들러의 조부는 챈들러가 세 살되던 해에, 나무에다 바구니를 달아놓고 농구를 할수있게 해주었다고한다. 9년동안의 농장생활을 마감하고 어머니와 함께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산 베르나디노로 옮겨갔다. 이때 이미 챈들러는 키가 6피트까지 자라있었다. 그것도 초등학생이 말이다.(...) 이것 때문에 학교친구들이 많이 놀려대서 챈들러는 몇번이고 학교를 그만두고 싶었다고 한다.

같은 캘리포니아의 컴튼으로 이주한 챈들러는 그곳에 유명한 농구명문 도밍게즈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같은 학년에 같이 다니던 친구로는 훗날 역시 NBA선수로 오게되는 테이션 프린스가 있다. 도밍게즈 고등학교를 주 최고 팀으로 이끄는 과정에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현 토론토 랩터스의 가드인 더마 드로잔은 그의 고등학교 시절 경기를 보고, "그는 마치 샤크같았다" 라고 회고했고 2009년 밀워키 벅스에 드래프트된 가드 브랜든 제닝스는 당시 도밍게즈 고등학교 농구부의 시합때 볼보이를 했는데 "여학생들에게 둘러싸여서 경기장에 오는 그를 보고 나도 꼭 저렇게 돼야지라고 생각했다." 라고 회고했다.

고학년때 팀을 주 챔피언으로 이끌었고, 성적은 31승 4패였다. 그 주 챔피언 결정전에서 챈들어는 26득점 15리바운드 8블록슛을 기록했다. 많은 대학팀들이 그를 노렸다. UCLA, 캔터키, 맴피스 대학교, 애리조나 대학교와 미시건 대학교가 챈들러에게 구애를 보냈지만, 챈들러는 대학진학을 하지 않고 2001년 NBA 드래프트에 참가신청을 하게 된다.

3 프로경력

3.1 시카고 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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챈들러와 커리.

당시 2001년 드래프트는 고졸선수들에 대한 거품이 거의 절정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챈들러는 이 열풍을 등에 업고 1라운드 2순위로 LA 클리퍼스에 지명되었다. 하지만 당시 시카고 불스의 단장이었던 제리 크라우스는 큰키에 기동력이 출중한 챈들러를 눈여겨 보고 있었고, 팀에 즉시 전력감으로 있던 엘튼 브랜드를 내주고 그를 대려왔다. 크라우스는 챈들러 말고도 같은해 드래프트에서 4순위로 지명한 에디 커리와 함께 챈들러를 팀의 미래로 낙점했다. 일례로 커리와 챈들러에게 각각 2번과 3번의 배번을 준 것은 두 사람이 불스의 미래임을 처음부터 공표한 셈. (둘의 번호를 일렬로 놓으면 23... 두 말이 필요없는 그 분의 번호...)

그러나 불행이도 이 둘의 성장은 더뎠다. 신인 때부터 싹수를 보여준 케빈 가넷과 달리, 커리는 수비는 폭망에 장기인 공격력조차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챈들러는 뛰어난 기동력과 블록슛 능력을 보여줬지만, 정말 안습하기 짝이 없는 공격능력과 부실한 파울관리 능력으로 시카고 팬들의 속을 썩였다. 2년차 시즌에는 그래도 기록이 어느정도 상승하는 모습과 함께 본인도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03-04시즌에 부상을 당해 더 성장할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시즌중에 브랜든 헤이우드나 아마레 스타더마이어와 언쟁을 벌이기도 했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저 둘과 훗날 팀 동료로 재회한다.

04-05시즌. 벤 고든과 함께 팀의 주축 식스맨으로써 맹활약. 80경기중에 10경기만 선발 출전했지만 평균 8득점 9.7 리바운드를 잡아냈다. 플레이오프에서도 11.7점 9.7 리바운드로 대활약한다. 그리고 05-06시즌이 시작되기 전, 에디 커리의 이적으로 센터가 급하게 된 불스는 챈들러와 6년간 6천3백만 달러에 계약한다. 당시 팬들의 반응은 열에 여덟명은 "저건 누가봐도 오버페이임 ㅇㅇ", "또한명의 먹튀 탄생인가효?" 등의 절망적인 반응이 많았다. 아니나다를까, 79경기중 50경기에 선발로 출전했지만 전 시즌보다 기록치는 많이 하락했다. 파울관리는 전혀 개선이 되지 못했고, 플레이오프에서도 거의 잉여짓을 하고 있었다. 결국 시카고도 챈들러에게 한계를 느끼고 그를 뉴올리언스 호네츠로 트레이드 하게 된다.

3.2 뉴올리언스 호네츠

파일:Attachment/타이슨 챈들러/TysonChanderHornets.jpg
왼쪽부터 데이비드 웨스트, 크리스 폴, 타이슨 챈들러.

타이슨 챈들러의 짧았던 제 1 전성기. 당시 그의 합류에 팬들은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반응이 많았지만 챈들러는 호네츠에서의 첫 시즌 평균 9.5점 12.4 리바운드를 기록했다. 특히 뉴올리언스 드래프티인 슈퍼 포인트가드 크리스 폴과 펼치는 픽 앤 롤은 픽 앤 롤이 아닌 픽 앤 덩크로 불리웠고, 이건 호네츠의 주 공격루트가 되었다.

07-08시즌에 처음으로 평균 더블더블을 기록했고, 뉴올리언스를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는데 1등 공신이 되었으며 뉴올리언스는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댈러스 매버릭스를 4-1로 격파하고 샌안토니오 스퍼스와 만난다. 2라운드에서 뉴올리언스는 샌안토니오에게 패배했어도 챈들러는 이때 팀 던컨을 꽁꽁 묶는데 성공했다. 7차전때 던컨의 야투는 5-17이었으니.

08-09시즌에 부상을 당해서 이전 두 시즌보다 못한 활약을 펼쳤다. 뉴올리언스는 그의 과거 부상전력과 남은 계약기간에 부담을 느끼고 그를 오클라호마시티 썬더로 트레이드 시키려고 했다. 이 트레이드는 거의 성사직전까지 가다가 파토가 나버렸는데, 이유는 챈들러가 메디컬 테스트 통과를 못해서. 이 때문에 챈들러는 상당히 분노했다고.

3.3 수렁과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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챈들러는 2009년 7월 신인상을 수상한 뒤로는 주춤하던 언더사이즈 센터인 에메카 오카포와 트레이드되어 꼴럿샬럿 밥캣츠로 트레이드된다. 샬럿은 09-10 시즌에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룩하지만 챈들러는 시즌 내내 부상에 시달리면서 12밀 가까이 먹는 주제에 6.5득점 6.3 리바운드라는 참담한 성적을 거뒀고, 플레이오프에서는 올랜도 매직드와이트 하워드를 나름대로 잘 막았지만 0-4로 스윕당하며 광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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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럿에서 1년동안 삽질만 한 챈들러는 다시 댈러스 매버릭스로 트레이드되는데, 댈러스에서 완전히 기량을 되찾는다. 챈들러는 에이스인 더크 노비츠키의 든든한 보디가드가 되어 댈러스 수비의 중심으로 활약했고, 처음으로 NBA 디펜스 팀 자리를 차지하면서 플레이오프에 진출한다. 플레이오프에서도 노비츠키나 다른 양궁부대가 득점에 힘쓰는 동안 골밑 단속을 단단히 하면서 댈러스 우승의 주역이 되며 챔피언반지를 득템하는 기쁨을 누렸다.

3.4 뉴욕 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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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스가 재계약에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자 챈들러는 사인 앤 트레이드 방식으로 뉴욕 닉스로 발을 옮긴다.[2] 챈들러 영입을 위해 천시 빌럽스가 쫓겨나면서 백코트가 개판이 됐기 때문인지 닉스는 시즌 중반까지 고전을 면치 못하다 제레미 린이 갑툭튀하면서 되살아났고, 챈들러는 시즌 내내 고군분투하며 닉스의 골밑을 수호했다. 뉴욕 닉스의 수비를 이전 시즌보다 한층 업그레이드시키는데 공헌한걸 인정받아 닉스 선수중 역대 최초로 올해의 수비수상을 수상한다.

이때 챈들러는 필드골 성공률이 무려 67.9%로 리그에서 가장 높은 선수이기도 했는데, 이보다 높았던 선수는 레전설 윌트 체임벌린 뿐이었다. 흠좀무. 프론트코트 파트너인 아마레 스타더마이어가 맛탱이가 간 12-13 시즌에도 시즌 평균 더블-더블을 기록하며 12년 커리어중에서 처음으로 올스타 선발, 조아킴 노아와 공동으로 디펜시브 퍼스트 팀 센터부문에 뽑혔다. 후반기에 부상을 당하며 한동안 전열에서 이탈하고, 플레이오프에서는 컨디션 저하로 인해 로이 히버트에게 별 힘을 못쓰고 털리긴 했지만.

3.5 30대 이후

13-14 시즌 초반인 11월 5일 오른쪽 종아리뼈 골절로 4주에서 6주 정도 결장하게 됐고, 그 동안 닉스는 수렁에 빠졌다. 20경기 결장 후 12월에 복귀했으며 카멜로 앤서니를 제외한 닉스 선수중에서는 그나마 제몫을 해 주고는 있으나 침체된 팀 상황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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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드래프트 하루 전날에 레이몬드 펠튼과 묶여 댈러스로 트레이드 되었다. 댈러스에서는 75경기에 출장하면서 시즌 평균 더블더블을 기록, 비교적 건강한 시즌을 보냈지만 댈러스는 시즌 전 기대하고는 달리 그다지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라운드에서 광탈, 챈들러는 이후 피닉스 선즈와 4년 $52M의 계약을 맺는다. 나이를 감안하면 마지막 거액 계약이 될 듯.

4 플레이스타일

7피트 1인치의 장신에 긴 윙스팬을 보유한 빅맨이라 그냥 서있기만 해도 코트에서의 존재감이 대단하며, 블록 슛에만 집중하지 않으면서도 페인트존 장악과 리바운드 적립에 능숙하다. 또한 사이즈에 비해 민첩하고 운동량도 많아 헬핑 수비도 뛰어나다. 수비력만을 놓고 봤을때는 드와이트 하워드를 제외하면 비벼볼 센터가 없을 정도. 공격시에는 드리블러를 위해 서주는 스크린이 일품이고 앨리웁같은 받아먹기를 매우 잘한다.

2:2 플레이는 뛰어나지만 포스트에서 자기 스스로 공격을 성공시키는 능력은 전무하다고 봐도 되며, 중거리슛같은 무기도 보유하고 있지 않은게 단점. 이 때문에 불스 시절 "에디 커리의 공격력과 타이슨 챈들러의 수비력이 합쳐지면 리그 최고 센터" 라는 반 농담도 있었을 정도. 이건 챈들러의 빈약한 공격력을 비꼬는 말임과 동시에 에디 커리의 민망한 수비력과 보드 장악능력을 비꼬는 말이기도 하다. 커리어 내내 잔부상을 달고 살아온 유리몸이기도 하다.
  1. 2001년 드래프트 측정 결과 맨발 신장 6' 11.5" = 212cm, 착화 신장 7' 1" = 216cm
  2. 챈들러가 뉴욕으로 이적했을 당시 댈러스 팬들은 별로 걱정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당시 팀에 브랜든 헤이우드라는 센터가 있었고 오프시즌동안 라마 오돔까지 영입하면서 골밑을 강화했기 때문. 그러나 시즌이 흐르면서 챈들러는 포인트가드들의 지원을 받을수 없는 상태에서도 잘 버티며 닉스의 수호신이 되었지만 댈러스에서 브랜든 헤이우드는 어설픈 플레이로 일관했고 라마 오돔은 맨탈붕괴급의 기량을 선보여 댈러스 팬들을 속터지게 했다. 댈러스 팬들 : 챈들러만 있었어도!!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