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르크 노비츠키

(더크 노비츠키에서 넘어옴)
이 문서는 덕 노비츠키, 더크 노비츠키 등으로도 모두 들어올 수 있다.

dirk_nowitzki_mavericks_wallpaper_by_angelmaker666-d4jetvr.jpg
dirk_nowitzki_wallpaper_by_angelmaker666-d40ileg.jpg

"ALL DREAMS ARE CRAZY. UNTIL THEY COME TRUE."

- 덕 노비츠키

댈러스 매버릭스 No. 41
디르크 베르너 노비츠키(Dirk Werner Nowitzki)
생년월일1978년 6월 19일
신장213cm (7 ft 0 in)[1]
체중111kg
포지션파워포워드, 센터[2]
드래프트1998년 드래프트 1라운드 9순위
밀워키 벅스에 지명[3]
역대 소속팀(1994-1998) DJK Würzburg(독일 분데스리가)
(1998~현재) 댈러스 매버릭스
국가대표독일 U-22(1998)
독일(1999-)
등번호41번
수상내역2007년 정규시즌 MVP
2011년 파이널 MVP
NBA All-Star 13회 (2002-2012,2014-2015)
All-NBA First Team 4회 (2005-2007,2009)
All-NBA Second Team 5회 (2002,2003,2008,2010,2011)
All-NBA Third Team 3회 (2001,2004,2012)
NBA Three-Point Shootout champion (2006)
NBA Shooting Stars champion (2010)
FIBA World Cup MVP (2002)
FIBA EuroBasket MVP (2005)
FIBA Europe Player of the Year 2회 (2005,2011)
2007년 NBA 정규시즌 MVP
스티브 내쉬디르크 노비츠키코비 브라이언트
2011년 NBA 파이널 MVP
코비 브라이언트디르크 노비츠키르브론 제임스

1 개요

USATSI_7896714.jpg

올타임 파워포워드 3위
스트레치형 빅맨의 정점이자 NBA 역대 최고의 非미국인 선수[4]

독일 출신의 현 NBA선수. 댈러스 매버릭스파워포워드이자, 매버릭스 최고의 프랜차이즈 선수. 별명은 란츠크네히트. 국내언론에선 간간히 란츠크네히트를 독일 병정으로 옮겨서 적곤 하는데, 한국내 NBA 팬들은 '사기츠키', '노기꾼' 등으로 종종 부른다.[5]

2011년 댈러스의 우승을 주도하고 파이널 MVP로 선정됨으로서 역대 PF 랭킹에서도 팀 던컨, 칼 말론 바로 다음의 3위로 거론된다.[6] 그리고 흑인 선수가 많은 NBA에서 최고의 활약을 하고 있기 때문에 래리 버드 이후 최고의 백인 선수로 평가받고 있다.

2 독일에서

디르크 노비츠키는 독일의 뷔르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헬가는 독일 국가대표 농구선수였고, 그의 아버지는 독일 최고의 핸드볼선수였던 베르너 노비츠키, 그의 누나인 실케는 육상선수출신으로 농구선수[7]인 운동선수 집안. 노비츠키는 어렸을때 주로 테니스핸드볼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키가 부쩍 크기 시작하자 그는 농구로 종목을 바꾸게 된다.

스포츠 집안의 아들이라서 그런지 일찌감치 재능이 보였던 노비츠키는 지역농구팀이었던 DJK 뷔르츠부르크에 참여한 후 전직 독일 농구선수였던 홀거 게슈빈드너(Holger Geschwindner)[8]의 눈에 들게되고, 그는 노비츠키의 개인코치가 된다. 게슈빈드너는 노비츠키를 엄격하게 가르쳤고[9] 농구뿐만 아니라 노비츠키를 한 사람의 인격체로 만들기 위해서 악기를 연주하고, 문학책을 읽을 것을 권장하기도 했다.[10] 몇 년 후 일취월장해가는 모습을보고 감탄한 게슈빈드너는 노비츠키에게 이런말을 하게 되는데...

"너는 지금 세계무대에서 최고를 상대로 뛰는 것을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독일의 슈퍼스타로 남을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만일 네가 후자를 원한다면 우리는 곧 훈련을 멈출거다. 왜냐하면 아무도 너를 막지 못할테니까. 하지만 네가 전자를 원한다면 우리는 다시 매일 훈련해야한다."

이틀간의 심사숙고끝에 노비츠키는 더 높은 곳을 향해 도전하기로했고 DJK성인팀에 16살의 나이로 입단한다.

3 DJK 뷔르츠부르크(1994-1998)

1995-96시즌에는 팀의 주전 포워드 매티 쿠시마와 함께 주전 포워드로서 매 경기 두자릿수 득점을 하면서 활약한다. 독일국가대표 코치인 더크 바우만은 "노비츠키는 훗날 10년 혹은 15년 안에 독일을 대표할 선수가 될 것."이라고 극찬했다. DJK는 2부리그 2위로 시즌을 마쳤지만, 마지막 1부리그 승격결정전에서 패하는 바람에 1부리그 진입에는 실패했다. 1996-97시즌에는 쿠시마가 팀을 떠나면서 확고한 팀의 주전에이스가 되었다. 평균 19.4점을 기록하며 활약했고, 팀은 다시 정규리그 2위에 올랐지만, 또 승격결정전에서 패해 승격에 또 실패했다. 1997-98시즌에는 독일의 수능시험으로 불리는 아비투어를 마쳤지만 이번에는 군복무 크리가 겹쳐져서 노비츠키는 97년 9월1일부터 98년 6월30일까지 군복무를 마쳐야했다.

그후 다시 팀에 복귀한 노비츠키는 2부리그 득점왕에 올랐고 드디어 팀을 1부리그로 승격 시키는데 성공한다. 그 해에 노비츠키는 올해의 독일 농구선수로 선정되었다. 그의 뛰어난 기량은 독일 밖으로도 알려져서, 유럽농구 명문인 FC 바르셀로나가 그에게 영입을 제안했을 정도. 그러나 노비츠키는 이를 거절했다.

1년 후에 그는 나이키가 주최하는 'Hoop Heros Tour'에 참가하게 되는데, 여기서 찰스 바클리스코티 피펜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서 바클리가 극찬을 할 정도였다. 당시를 회고하는 바클리의 증언[11][12] 그리고 다시 나이키가 각 지역 유망주들을 불러모아 재능을 발휘하게 하는 Nike Hoop Summit에도 참가, 알 헤링턴과 라샤드 루이스등 미국의 농구유망주들을 압도했다. 당시 기록은 33득점 14리바운드 3스틸. 그의 순발력과 볼 핸들링, 그리고 뛰어난 슈팅능력은 NBA 스카우터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4 NBA 커리어

독일에서 웬만큼 이룰것은 이뤘고, 군복무까지 마친 노비츠키는 이제 걸림돌이 없었다. 그는 1998년 NBA 드래프트에 참가신청을 하게되고, 1라운드 9순위로 밀워키 벅스에 지명되었다가, 댈러스가 지명한 로버트 트레일러와 트레이드되어 댈러스로 이적하게된다. [13]

근데 하필이면 98-99 시즌이 NBA가 파업크리를 맞는바람에 시즌개최가 불투명했다. 노비츠키는 NBA시즌이 개막되기를 바라면서 독일로 돌아가 원 소속팀에서 다시 뛰었다. 그 후 NBA와 선수노조가 극적으로 타협을 해, 단축시즌으로 시즌을 치르기로 합의하면서 노비츠키도 NBA에 데뷔하게 된다. 47경기에 출전한 노비츠키는 평균 8.2득점. 3.4리바운드를 기록했다. 그러나 장기였던 슛 성공률은 최악이었다. 독일리그와는 다른 NBA리그에서 노비츠키는 분전했지만, 그는 아직 부족했다. 무엇보다 수비력이 약점으로 지적받으면서 그는 자신의 이름에 D가 빠진 irk가 불리며 조롱당했다. [14]

그러나 2년차 시즌에는 자신의 장기를 마음껏 발휘하면서, 기량을 향상시켜나갔다. 평균득점도 9점 가까이 상승했고, 대부분의 기록이 루키시즌과 달리 수직상승했다.[15] 팀도 인터넷 재벌이었던 마크 큐반이 새로운 구단주가 되고, 큐반이 댈러스 매버릭스를 위해 아낌없이 돈을 투자하면서, 더욱더 농구에 집중할수 있게 되었다.[16] 그리고 마이클 핀리와 미래의 백투백MVP 스티브 내쉬[17]와 함께, 빅3로서 팀을 이끌었다.[18][19]

3년차 시즌에는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는 데 일등공신이 되었다. 그리고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서부강호 샌안토니오 스퍼스에게 1승4패로 탈락할 때까지 노비츠키는 팀의 플레이오프 득점1위를 달리는 등, 자신의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 후 계속해서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으나, 언제나 2%가 모자라는 모습을 보였다. 03-04시즌에는 팀이 앤트완 워커와 앤트완 재이미슨등을 데려오면서 사기라인업을 구축했으나, 1라운드에서 광속탈락하는 불운을 맛봤다. 그 와중에서도 노비츠키는 플레이오프에서 더블더블 활약을 펼치며, 이때부터 사기츠키의 모습을 보여준다.

04-05시즌, 스티브 내쉬피닉스 선즈로 이적하고, 시즌 중에는 마이클 핀리가 부상으로 인해 기량이 하락되면서, 자연스럽게 팀의 리더자리도 그에게 넘어오게 되었다. 노비츠키는 혼신의 힘을 다해 경기에 임했다. 팀도 제이슨 테리, 제리 스택하우스, 키스 밴 혼등 벤치멤버를 영입하면서 노비츠키의 부담을 덜어주려 애썼다. 시즌 중에 감독 돈 넬슨이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하고 코치였던 에이버리 존슨이 감독으로 승격되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도 있었지만, 빠른속도로 팀이 수습되었다.

플레이오프에서는 트레이시 맥그레디야오밍이 버티는 휴스턴 로케츠에게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펼치며 승리. 2라운드에 올라갔지만, 당시 돌풍의 핵이었던 피닉스 선즈에게 패하면서 탈락하고 말았다. 이때 노비츠키는 팀을 이끌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심했던지, 실수를 한 제이슨 테리를 험악한 인상으로 노려보거나[20] 에릭 뎀피어에게 화를 내는등의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이런 모습에 팬들은 노비츠키의 성숙하지 못한 모습을 비판했다.

05-06시즌. 노비츠키는 다시 절치부심하고 시즌에 임했다. 마이클 핀리도 우승을 위해서, 샌안토니오 스퍼스로 이적한 상황. 이제 명실상부한 팀의 리더였다. 60승 22패를 기록한 매버릭스는 플레이오프에서 멤피스 그리즐리스, 샌안토니오 스퍼스, 피닉스 선즈 등을 차례대로 격파하고 팀 역사상 처음으로 파이널에 오르게 된다. 특히 플레이오프 2라운드 샌안토니오 스퍼스와의 시리즈는 NBA 역사에 손꼽힐만한 명시리즈로, 팀 던컨과 노비츠키의 쇼다운이 매우 대단했다. 당시 매버릭스는 스퍼스를 상대로 아직 플레이오프에서 이겨본적이 없어서 이를 갈고 있었고, 시리즈를 3:1로 앞서가며 드디어 스퍼스를 잡나했지만 내리 5,6차전을 내주며 7차전 원정 경기를 떠나는 암담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댈러스는 계속 리드를 잡아나갔지만 스퍼스의 끈질긴 추격끝에 결국 경기종료 33초전 스코어는 동점인 가운데 마누 지노빌리의 클러치 3점 샷에 역전당하며 이번에도 안되나 했다. 그러나 남은 경기시간이 20여초밖에 안남았고 3점차인 암울한 상황에서도 노비츠키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고, 클러치 3점샷을 성공시킨 지노빌리에게 바로 골밑에서 바스켓 카운트 앤드원을 얻어내는데 성공하며 승부를 연장전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연장전에서 댈러스가 끝끝내 승리를 거두며 드디어 샌안토니오를 플레이오프에서 넘었다. 그렇게 극적인 과정을 거쳐 올라온 파이널에서 만난 상대는 드웨인 웨이드샤킬 오닐이 버티는 마이애미 히트. 출발은 좋았다. 첫 2승을 따내면서 우승에 거의 근접하나 싶었지만...바로 광속으로 4연패를 당하면서 우승을 내주고 말았다.[21]

06-07시즌에 댈러스는 팀 창단 이래 최고성적을 거뒀다. 서부전체 1위. 1번시드를 거머쥐고 플레이오프에 올랐다. 노비츠키 본인역시 정규시즌 MVP에 선정되는 등 개인적인 기쁨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전에 같이 한솥밥을 먹은 돈 넬슨과 '배산적' 배런 데이비스가 이끄는 8번시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게 2승4패, 황건적의 난이라고 회자되는 업셋의 희생양이 되어 탈락하고 노비츠키에게 택배 MVP라는 별명이 따라붙게 된다. 사실 진짜로 MVP 트로피를 택배로 보내준 건 아니고(…) MVP 수여는 플레이오프 경기를 치루며 경기장에서 이뤄지는게 관례였는데, 이게 마브스의 광탈로 MVP가 플옵에서 이미 탈락한 상황에서 상을 받는 굉장히 희귀한 상황이 나와버린 것이다.[22] 하여 팬들 사이에서 '광탈했으니 집에 돌아가 택배로 MVP 수여받겠네?' 라는 농담이 설득력있게 퍼진 것이다. 물론 실제로는 이때 기자회견과 사진촬영을 곁들인 조촐한 수여식을 가졌다. 당연히 nba 총재 데이빗 스턴과 감독 에이버리 존슨, 구단주 마크 큐반이 참가했다. 상식적으로 nba와 같은 거대한 규모의 인기 리그가 그 시즌 최고의 스타인 mvp에게 트로피를 집으로 배송한다는게 말이나 되는가... 구글에 Dirk nowitzki mvp david stern을 치면 관련 사진을 확인할수 있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mvp 시상식은 플옵 경기에서 홈팬들 앞에서 하고 시기상(2라운드 도중 시상)우승의 가능성이 있을때 하기 때문에 분위기가 굉장히 좋은데 이때 노비츠키는 광탈당한 이후, 게다가 홈팬들 앞에서 한것도 아니니 분위기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07-08시즌. 전 시즌의 업셋 후유증이었는지 매버릭스는 전 시즌보다 16승이나 하락한 저조한 성적을 내는데 그쳤다. 이 기간동안 팀은 유망주였던 데빈 해리스를 내주고 뉴저지에서 제이슨 키드를 받아오는 등 우승을 위해 발버둥을 쳤으나, 이번에도 07-08시즌 돌풍의 주역인 뉴올리언스 호네츠에게 관광당하면서 또 1라운드에 탈락하고 말았다. 발이 느려진 키드는 크리스 폴을 전혀 막지 못했고, 팀의 2옵션인 조쉬 하워드는 플레이오프에서 최악의 부진에 빠졌고, 팀이 지건 말건 성대한 생일파티를 열면서 비난을 받았다. 시즌 종료후에는 에이브리 존슨 감독이 마크 큐반 구단주와 설전을 벌이며, 해임되는 등 팀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오프시즌 새로운 감독으로 릭 칼라일을 영입했다. 그리고 알찬 선수보강을 바탕으로 댈러스는 강호의 모습을 어김없이 보여줬다. 노비츠키 역시 변함없은 활약으로 에이스 노릇을 톡톡히 했다. 1라운드에서 샌안토니오 스퍼스를 의외로 가볍게 물리치고 2라운드에 올랐으나 이번에도' 돌풍의 주역인 덴버 너겟츠에게 1승4패로 무기력하게 탈락했다.

09-10시즌에도 플레이오프에 오르긴 했으나, 샌안토니오 스퍼스에게 1라운드에서 광속탈락했다. 허나 이번 시리즈에서는 감독인 릭 칼라일의 용병술이 비난의 대상이었다. 숀 메리언을 중용하지 않았고, 중요한 6차전때 캐런 버틀러의 출전시간도 납득할수 없을만큼 짧았고, 고집스럽게도 3가드 시스템을 사용했기 때문.

10-11시즌. 오프시즌동안 팀은 그동안 거의 잉여자원이나 다름없던 에릭 댐피어를 버리고, 트레이드를 통해 타이슨 챈들러를 영입해 골밑을 강화한다. 시즌 중에도 팀내 2옵션인 캐런 버틀러가 시즌 아웃당하면서 생긴 3번 라인업의 공백을 페쟈 스토야코비치와 코리 브루어를 영입해 해결했다. 정규시즌 막판까지 레이커스와 서부지구 2위자리를 놓고 접전을 펼쳤지만 서부전체 3위로 플레이오프에 오른다. 1라운드에서 제럴드 월러스의 가세로 상승세를타고 브랜든 로이가 마지막으로 불타오른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를 상대해 약간 고전했지만 2라운드에서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디펜딩 챔피언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를 4전 전승으로 개발살 내버리며 5년만에 서부 컨퍼런스 결승에 올랐다!!![23]

이어지는 컨퍼런스 결승 1차전에서는 가공할만한 필드골과 자유투 성공률을 바탕으로 오클라호마시티를 무력화시켰다. 1차전에서 40분간 무려 48득점 6리바운드 4블락 4어시스트를 기록했는데 15개의 슈팅시도에 12개를 성공시켰고 특히 24개의 자유투를 얻어 모두 성공시키며 플레이오프 최다 자유투 성공이라는 신기록까지 새겼다. [24] 4차전에선 연장전끝에 40득점 5리바운드를 기록하며 112대105로 역전승을 거두고 3대1이라는 전적으로 앞서며 사실상 시리즈를 접수했다. 그리고 댈러스는 5차전까지 잡아내며 결국 오클라호마 시티를 4승 1패로 누르며 파이널에 진출했으며, 노비츠키는 다시 한번 NBA 제패에 도전하게 되었다. 파이널상대는 2006년 노비츠키에게 좌절을 맛보여준 드웨인 웨이드의 마이애미 히트. 노비츠키의 실력 자체는 그때보다 물 올랐고 댈러스도 그때보다 좋은 멤버를 꾸리고 있지만 역시 더 강해진 웨이드, 그리고 그의 동료 르브론 제임스크리스 보쉬의 마이애미 히트보다 강하다고 말하기엔 뭔가 부족해보였다. 당시 마이애미가 우승할거란 여론이 90%가까이 육박할 정도.

1차전에서 노비츠키는 27득점으로 양팀내 최다득점을 기록했지만 접전 끝에 패배,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손가락 부상까지 당했다.[25] 상황은 좋지 않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상황에서 시작된 2차전은 정말 모든게 안좋게 흘러갔다. 마이애미는 댈러스보다 더 좋은 경기력을 보였으며 4쿼터가 7분 남았을때 웨이드의 3점포로 점수차를 15점차로 벌렸다. 모두가 오늘 경기는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할만 했다.

그리고 기적은 시작되었다.

테리로 시작된 불꽃은 댈러스 팀 전체를 불타게 했으며 그 기세에 마이애미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막판의 무려 22-5 run으로 95:93으로 승리. 종료 26초전 노비츠키는 기습3점으로 93-90으로 역전에 성공했지만 마이애미 소속이 찰머스가 3점을 성공시키며 다시 승부는 원점. 그리고 경기종료 3초전 노비츠키는 리그에서 손꼽히는 강심장답게[26] 그림같은 돌파를 성공시켜 클러치타임을 접수했고 댈러스는 소중한 홈어드밴티지를 뺏어왔다. 허나 댈러스 홈에서 펼쳐진 3연전중 첫번째 경기를 아쉽게 패배[27], 다시 홈 어드밴티지를 뺏기면서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생기기 시작한다. 여기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독감까지 걸린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듯한...[28] 그 여파로 4차전에서 노비츠키는 한눈에 봐도 컨디션이 정상이 아니었기에[29] 확실히 부진했지만 21득점 11리바운드로 팀내 최다득점을 기록, 4쿼터에만 10득점을 몰아치는 투혼을 보였다.[30] 그외 팀원들의 활약, 마이애미의 자멸로 승부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5차전은 양팀에게 가장 중요한 경기였다. 댈러스에게는 리드를 가져갈수 있는 기회이자 마지막 홈경기. 여기서 지면 남은 마이애미 원정에서 남은 2경기를 모두 가져가야한다는 엄청난 부담감에 억눌릴 것이 확실했고 마이애미에게도 리드를 가지고 홈으로 돌아갈수 있는 기회였다. 그 때문에 경기는 역전의 역전을 반복했고 스코어는 100-100상황[31] 노비츠키의 덩크로 역전에 성공!, 결국 노비츠키,테리,키드의 연속적인 클러치샷으로 5차전을 따냈다. 당시 개인기록은 29점 6리바운드로 역시 양팀내 최다득점이었다. 이때 웨이드와 제임스의 Mocking Dirk사건이 논란이 되면서 원래 안티가 많던 마이애미는 더 많은 욕을 먹게 되고 모두가 댈러스의 우승을 바라는 상황이 되었다. 흐름과 분위기는 댈러스의 압도적 우세, 하지만 분위기가 우승을 시켜주는 것은 아니다. 조롱의 주제였던 노비츠키는 사건에 대해 침착히 대응하며 남은 경기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결국...

경기종료 14.9초전 결정적인 레이업으로 승부를 완전히 갈라버리며 꿈에 그리던 NBA 우승을 하게 되었다! 만장일치로 파이널 MVP에 선정되어 기쁨은 두배. 10여년간의 NBA커리어 동안 미국땅에서의 성공과 NBA우승을 목표로 했던 이 독일인 청년은 드디어 꿈을 이루었다. 파이널 6경기의 평균기록은 26점 9.7리바운드. 자유투성공률은 무려 97.8%였다.[32]

dm_110612_nba_dirk_interview.jpg

참고로 노비츠키의 고향은 뷔르츠부르크 현지에서도 더크 아버지와 고향사람들이 NBA파이널을 시청했다. 우승이 결정되자 고향땅은 그야말로 축제분위기에 휩싸였다.

파업 때문에 단축시즌으로 진행됐던 11-12 시즌, 댈러스는 우승멤버들이 해체되면서 대격변을 겪으며 지난해 우승팀이라고 믿어지지 않을정도로 전력이 약화됐다. 노비츠키는 애써 팀을 7위로 플레이오프 진출은 시켰으나 신흥 강팀인 오클라호마시티 썬더에게 스윕당했다. 이듬해에는 아예 무릎부상으로 전반기 경기 상당수를 날려먹었으며 댈러스는 2000년 이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다. 팀 상황이 워낙 안습해서 승률 5할 전까지는 면도를 하지 않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는데, 다같이 털보가 됐다가 시즌이 다끝나갈때야 면도에 성공했다.



간만에 면도하는 노비츠키.

2014년 4월 9일 유타 재즈전 이후 NBA 역대 통산득점 10위에 등극했다(이후 하킴 올라주원을 제치고 외국인 출신 NBA 선수 통산 최다 득점을 달성했다 통산 득점 9위). 2천점 가량 차이가 나는 6위 샤킬 오닐의 통산 득점 정도는 갱신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그리고 현재 누적이 누적인만큼 2~3시즌 커리어를 더 이어간다면 윌트 체임벌린, 칼 말론, 카림 압둘자바 세 전설적인 빅맨이 기록했던 30000득점 10000리바운드 이상을 해낼수있을지에 관해 주목받고있다. 현재는 2015년 12월 25일 기준 현재 샤킬 오닐의 통산득점 기록을 뛰어 넘었다!

2014년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샌안토니오와 만나 7차전까지 가는 접전끝에 무릎을 꿇었다. 이후 2014년 오프시즌에 팀의 선수층을 두텁게 하기위해 댈러스와 3년 $25M이라는 싼값에 재계약을 한다.

2014-2015시즌 3월 25일 샌안토니오와의 경기에서 통산 25,000득점, 10,000리바운드, 1,000블록슛, 3점슛 1,000개이상을 달성한 역대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명예로운 훈장을 얻은 셈.

2015년 11월 12일 클리퍼스와의 경기에서 31득점 11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승리를 이끌었다 어느덧 노장이지만 클래스가 살아있다는것을 입증한경기.

2015년 12월 통산출전시간 14위에 등극했고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2015-2016시즌에는 클러치마다 놀라운 활약을 보이고 있지만, 웨슬리 매튜스나 챈들러 파슨스같은 고액연봉자들이 골골대면서 말년에 고생하고 있다. 2~3월들어선 두선수의 컨디션이 궤도에 올라 한숨 돌리는중.

2016년 필라델피아와의 경기에서 통산 29000점을 넘겼다.

절친한 사이로 알려진 코비와의 맞대결은 아깝게도 코비의 건강탓에 불발되었는데 이날 노비츠키는 레이커스에게 클러치샷을 넣으며 승리했다. 그뒤에 바로 우정인증

노장의 나이에 3월평균 23.6득점을 기록하며 팀을 이끌고 있다. 아쉬운 것은 다른 팀원들이 기복을 보이며 영 부진한 가운데 홀로 선전중이며 팀 성적이 좋지 않다는 것. 21일 포틀랜드와의 경기에선 연장접전끝에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날 무려 40득점을 폭발시켰다.

2016년 4월 7일 플레이오프 경쟁팀인 휴스턴 로케츠와의 홈 경기에서 7득점 6리바운드 야투 2/8을 기록했지만 4쿼터 클러치 타임에서 돌파하는 제임스 하든의 공을 멋지게 스틸해내며 팀의 88-86 승리를 지켜냈다.

2016년 4월 12일 역시 플레이오프 경쟁팀인 유타 재즈와의 원정 경기에서 22득점 11리바운드 야투 7/12 3점4/7의 활약으로 팀의 101-92 승리와 플레이오프 진출 확정에 기여한다. 휴스턴과의 경기와 비슷한점이 있다면 이때 결정적인 블록슛이 팀승리에 보탬이되었다. 말년에 뽀록수비가 꽤 나온다.

2016년 4월 24일 윌트 체임벌린엘진 베일러를 넘어 포스트시즌 득점랭킹 15위에 올라섰다.

5 플레이스타일

다양한 공격기술과 180 클럽[33]의 슛터치를 가진 득점형 파워포워드.
수비에서 가넷이 있다면 공격에선 노비츠키가 있다.
슛에 장인정신이 담긴 대표적인 선수, 쉽게 말하자면 NBA 역사상 최고의 스트레치 4.

7피트의 장신 선수임에도 4번 포지션에서 뛰는데 일반적인 4번, 아니 프로농구의 웬만한 4번과는 판이하게 다른 타입의 플레이어.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전형적인 스트레치형빅맨도 아니다 노비츠키에 관해 플레이가 너무 외곽슛 위주라는 편견이 있는데 사실 그는 커리어초기부터 전성기까지 슛뿐만이 아니라 기술적으로도 노련했던[34] 내외곽을 가리지않는 득점머신이었다.[35] 팀의 상황에따라 5번 센터 포지션을 맡은적도 있으며 7풋의 장신으로 스윙맨같은 플레이를 했던 그야말로 리쎌웨폰.

일단, 노비츠키는 플레이 시작을 하이포스트에서 주로 한다. 4번 사이즈를 가진 공격형 파워포워드스트레치 포워드도 이렇게 시작은 안한다. 외곽에서 공을 잡고 돌파를 시도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이포스트에서 스크린으로 시작하는 투맨게임을 통해 패싱으로 빈 공간을 만들어내고 슛을 던진다. 거기다 자신이 직접 미드레인지에서 슈팅을 던지면서 마무리하는 타입이라 인사이드 리바운드에 들어가지 않는다. 결국 노비츠키의 타점높은 슛을 막으려면 상대 4번도 같이 나와서 컨테스트를 해주지 않으면 안된다.

사실은 농구의 기본명제를 고려할 경우 매우 비효율적인 공격이다. 지금도 골대 가까이에서 슛을 던지는 것은 기본중의 기본이며 멀리서 던지는 것은 성공률도 문제고 실패시 리바운드 가능성을 떨어뜨리며 멀리서 던질 것이면 차라리 3점 라인 바깥에서 던지면 3득점을 얻는 메리트가 있으므로 그 쪽이 더 효율적이다.[36][37] 그런데 노비츠키의 주요 득점루트는 3점 라인 살짝 안에서 장거리 미들슛이다. 현대 농구에서는 가장 기대치가 떨어지는 슛이며 농구에서는 가장 금기시하는 슈팅이다. 노비츠키의 사기성은 여기서 발휘된다. 던지면 다 들어가니까.

MVP 시즌이었던 06-07 시즌 골밑슛 시도횟수가 260번, 3~10ft 내외의 짧은 야투 시도수가 116번이었는데 비해 10~16ft 중거리슛 시도수는 363번, 16ft~3점라인 안쪽의 롱2는 504번이다. 3점 시도수도 192번으로 짧은 야투 시도수보다 많은 수준. 야투시도 차트만 보면 파워포워드가 아니라 슈팅가드의 그것이라고 봐도 될 정도.

마찬가지로 06-07시즌의 슈팅 성공률을 보면, 골밑슛의 성공률은 정확히 6할로 르브론 제임스처럼 7할 내외를 찍는 괴물은 물론이고 6할 중반에서 7할대를 찍었던 케빈 가넷, 팀 던컨에 비해 꽤나 처지는 수준이다. 짧은 야투 성공률은 .397로 파워포워드의 그것으로는 낙제점인 수준. 그러나 중거리 성공률이 .493, 롱2 성공률이 .500, 3점슛 성공률이 .396으로 림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위협적인 슈팅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우승시즌인 2010~11시즌 노비츠키가 기록한 야투성공률은 51.7%로 커리어 하이기록인데 12월 부상으로 9경기를 쉬기전까지는 무려 54.9%였다. 단순한 인사이더가 아닌 중장거리 슛을 주 무기로 삼고있는 선수라는 점을 감안하면 정말 놀라운 기록.

ESPN Sport Science에서 분석한 내용을 보면 이게 왜 사기인지 이해가 갈 것이다. 야오밍의 키를 가진 선수가 데릭 로즈만큼 점프를 해도 블럭이 불가능한 슛을 어쩌란 말인가? 페이더웨이슛을 쏠때 무릎으로 방어하는건 덤이다.


이 안 들어갈 것 같은 미들슛이 막 들어간다. 가뜩이나 막기 힘든 높은 타점인데 페이드어웨이까지 구사한다. 슛거리는 길고 들어가봐야 2점이다. 그런데 계속 들어간다. 상대팀 입장에서는 속이 뒤집힐 수 밖에 없다. 어중간하게 마크맨이 컨테스트해도 다 씹고 들어간다. 사기츠키라는 별명은 이런 사기적인 슈팅능력때문에 생긴 것이다.[38] 게다가 저런 슛을 궁지에 몰린 중요한 순간,역전이 걸린 상황에서도 곧잘넣었으니 사기란말이 나올수밖에...

거기에 자유투까지 좋다. 물론 플레이스타일상 빅맨치고는 얻어내는 자유투의 수가 적은 편이지만, 90퍼센트를 넘긴 시즌도 수차례 있고 통산 성공율도 87프로에 달하니 이건 뭐 파울로 끊을수도 없고...

노비츠키의 시그니쳐기술인 ONE LEGGED FADEAWAY에 관한 얘기를 빼놓을수가 없는데 페이스업 혹은 포스트업을치며 스텝을 밟다 다리하나를 올리며 쏘는 페이더웨이슛이다 국내에선 슛을 쏘는 폼이 어쩐지 학과 비슷하다하여 주로 다리웨이라고 부르는편. 기술적으로 기존의 페이더웨이슛과 다른점이있다면 마이클 조던의 턴어라운드 페이더웨이는 선수본인의 높은 체공력을 살린것이고 노비츠키의 페이더웨이는 자신의 큰 신장을 십분발휘한것이다 게다가 올린다리로 공격시 방어까지 겸하니 막기가 여간 까다로울수밖에... 사실상 알고도 못막는 수준이다. 그래서 그런지 노비츠키본인은 이 기술을 두고 백인버젼의 스카이훅이라 말하기도.[39] 기술의 위력이 상당한것을떠나 배우기엔 그렇게 어렵진 않은것인지 다른 선수들도 많이 써먹는편. 대표적으로 가장 유명한 선수들이 코비 브라이언트르브론 제임스 그리고 케빈 듀란트다.[40]

[41]
[42]
[43]

득점의 효율도 효율이지만 가공할 클러치능력 으로 명성이 높다. 워낙 4쿼터에 강한 선수기도 하고 유튜브역전샷을 넣은 장면으로만 만들어진 하이라이트들이 많을정도.


노비츠키는 2미터13이란 키에 비해 스피드도 좋은 편이고 드리블 능력 역시 훌륭하다. 이 때문에 슛을 페이크로 쓰고 나서 돌파로 득점을 올리기도 한다. 운동능력이 좋지 않다는 오해도 있지만 실상은 당대의 선수들중 동급신장 최고 수준의 스피드를 지닌 선수였다.



이 영상과 아래영상에서 현재와는 사뭇다른 리즈시절 노비츠키의 운동능력을 실감할수있다. 특히 요즘은 좀처럼 볼수없는 탄력적인 덩크와 코스트 투 코스트를 하는 모습들이 단연 압권

노비츠키의 4년차 2002년 플레이오프로 케빈 가넷의 미네소타 팀버울브스를 상대로 39점 17리바운드를 기록한, 말그대로 날라다닌 수준의 경기였다. 당시 시리즈 평균기록은 33.3득점 15.7리바운드 1.3블록 3.0스틸 야투율 52.6 3점 72.7(!)(평균 2.6개) 자유투 88.9 참고로 이시리즈에서 댈러스는 내리 3승을 따내며 다음 라운드로 올라갔다.

데뷔 초기에는 수비를 계속 지적당했지만 거듭된 노력 끝에 일대일 수비에서 구멍이 되는 일은 없어졌다.

6 트리비아

  • 독일 출신으로서 먼저 NBA에 진출했던 데틀레프 슈렘프[44]와 함께 NBA에서 성공한 독일인 농구선수로 평가된다. 독일 농구국가대표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편. 거의 대표팀 소집을 거른적이 없다. 심지어는 유럽농구에서 존재감이 미비한 마케도니아와 독일의 평가전때도 소집에 응했을 정도. 노예가 따로없다. 奴婢츠키? 하지만 10-11시즌이 시작되기 전 오프시즌에는 대표팀 차출을 처음으로 거부했다. 독일 농구협회에서도 그의 결정을 이해하는 분위기. 그리고 그해 우승을했다. 이것이 국가대표 은퇴가 아니라고 밝힌 것으로 보아 향후에도 대표팀 소집에 응할 용의는 있는듯? 그리고 선수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2016년 그는 국가대표은퇴를 선언했다.
  • 2011년 독일 최고의 운동선수에 뽑혔다 농구선수가 뽑힌건 최초라고.
  • 사실 독일 농구 국가대표팀은 노비츠키 때문에 그나마 이만큼 먹고 산다. 노비츠키가 없으면 그야말로 시망. 이는 다른 독일 국가대표 농구선수들 기량이 노비츠키와 너무 차이가 나는데다 노비츠키 역시 국가대표 에이스라는 막중한 자리때문에 많은 부담감을 느끼고 혼자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45]
  • 플레이 스타일이 주로 슛을 위주로 한 플레이다 보니, 무시무시한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한 화려한 농구를 구사하는 케빈 가넷이나 아마레 스타더마이어에 비하면 좀 재미가 없는 플레이 스타일이기도 하다. 포스트업과 페이스업, 돌파를 장착하긴 했지만, 역시 재미보다는 공격의 다변화라고 보는게 맞을 듯.
  • NBA에서 통산 2만득점을 돌파한 첫번째 유럽인 선수다. NBA리그에서 자신만의 족적을 잘 남기고 있는중.
  • 올해의 유럽선수상을 7번 수상했고 이탈리아 스포츠 신문인 가제타 델라 스포츠에서 선정한 올해의 유럽 농구선수상에 5년 연속 선정되었다하며 이탈리아 스포츠 잡지인 슈퍼바스켓이 선정하는 올해의 남자 유럽 선수상과 FIBA 유로 올해의 농구의 선수상에 2005년에 동시에 선정되었다.
  • 2011 NBA 챔피언이 된 이후 주가가 급상승했다. 팬들 사이에서는 플레이오프 및 결승전에서의 대활약으로 노비츠키를 재평가하는 분위기이며, 언론매체 여기저기서 찬양, ESPN에서 수여하는 "ESPY Best NBA Player" 부문에 이어 "ESPY Best Male Athlete"[46] 부문까지 수상함으로써 2011년을 명실상부한 더크 노비츠키의 해로 만들었다.[47]
  • NBA 역사상 올스타전에 10번이나 출전하고 정규시즌 MVP와 파이널 MVP를 수상한 선수는 단 13명뿐인데 마이클 조던, 래리 버드, 매직 존슨등이 다른 주인공들이다. 유럽인으로는 노비츠키가 처음이라고
  • 11시즌 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노비츠키는 11시즌 연속 정규시즌에서 1500득점 이상을 올렸다 유럽선수 중에서는 전무한 성과 NBA에서는 칼 말론 이후 처음인데 말론는 1986~87시즌부터 1997~98시즌까지 이 기록을 달성한바있다.
  • 2015년 12월 22일 기준 현재 코비,던컨에 이어 오로지 한팀에서 세번째로 가장 오랫동안 뛴 선수. 원클럽맨이 점점 사라지고있는 추세인 NBA에서 몇안되는 진정힌 프랜차이즈 스타라 볼수있다.
  • 노비츠키는 2016년을 기준으로해서 1996년 이래 커리어 +/- 탑3에 속한다 3위는 +6,658의 르브론이고 2위는 +6,725의 노비츠키인데 1위는 무려 +10000의 팀 던컨...
  • 어릴적부터 코치의 가르침대로 농구외적으로 음악과 문예에도 열심이었는지 다룰줄아는 악기가 꽤있는것같은데 색소폰을 잘분다고 알려져있다.
  • 비미국선수중 가장 NBA에서 많은 경기를 뛴 선수가 되었다.[48]
  • 차갑고 무뚝뚝한 독일사람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인터넷을 잘 뒤져보면 예술급 표정의 그의 사진을 감상할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사진.

dirk-nowitzki-twitter.jpg
(...)[49]

  • 농구에서는 사기꾼이지만 랩에는 젬병이다. 압권은 27초 부근...[50]
  • 샤킬 오닐의 유년기와 비슷하게도 어릴적엔 큰키로 놀림을 많이받았다고한다 스포츠집안의 내력이어서그런지 다른 종목에도 두각을 나타냈지만 굳이 농구를 선택한것은 그냥 놀림을 덜받기 위해서였다고... 인신공격이 사람 인생을 바꿨다...
  • 래리 버드는 노비츠키의 우승시즌, 파이널이끝나고 한 라디오방송에 출연해 노비츠키에 관해 이렇게 언급한바가있다.
"우리는 공통점이 많다. 둘다 크고 외곽슛도 가능하다. 리바운드도 잘하며 경기에 헌신 할수 있다. 노비츠키를 고교시절부터 봐왔는데 그때 난 사람들이 왜 나와 덕을 비교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가 내 이름과 함께 연관된다는것은 기분좋은 일이다.
다룰줄 아는 악기가 몇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첼로. 어렸을적부터 지도한 코치가 오케스트라수업까지 받길 권유했기때문.[51] 게다가 한 TV쇼에 나와선 기타연주를 선보이기도했다.
  • 2014년에 본인의 농구인생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더 퍼펙트샷이 개봉되었었다 그의 훈련방식이라던가 성장과정이 궁금하다면 꽤 흥미롭게 다가올 작품.
  • 7풋이상의 빅맨의 3점슛 성공갯수기록에서 압도적인 1위를 유지중이다 2위하고의 차이는 꽤 큰편. 2016년 4월 13일 기준 전체 통산 3점슛 누적순위는 1700개로 전체 15위에 랭크되어있다. 가드와 전문슛터가 아님에도 꽤나 상위권인데 현재도 갱신중이다.
매버릭스가 노비츠키의 이름을 딴 'Dirkburger'를 출시했다. 노비츠키는 칠면조 버거를 원했지만 프레즐 번에 루꼴라, 할라피뇨 비어 치즈를 곁들이고 베이컨 마멀레이드를 얹은 소고기 패티 버거로 완성되었는데 영상을 보면 노비츠키 본인이 직접 만들기도한다.[52] 가격은 12$. 3월 동안 아메리칸 에어라인 센터 구내 매점에서 판매했다한다 올랜도 매직과의 경기에서 최고매상을 올렸다고
  1. 착화신장
  2. #
  3. 드래프트 당일 바로 댈러스 매버릭스가 지명한 로버트 트레일러와 트레이드 되었다.
  4. 물론 나이지리아 태생의 하킴 올라주원이 커리어상으로 노비츠키보다 한 수 위이지만, 올라주원은 고등학생때 미국으로 이주했고 96올림픽땐 아예 미국 국대로 나가서 뛰기까지 했는지라 그가 미국인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편이다...
  5. 정말 사기를 저질러서가 아니라 클러치 상황에 나오는, 혹은 그냥 단순한 플레이가 너무나 사기적이어서(...)
  6. 2016년 ESPN에서 발표한 파워포워드 랭킹에서 3위가 노비츠키 4위가 바클리 5위가 가넷이었다.
  7. 현재는 NBA 케이블 TV에서 일한다고 한다. 그리고 미인이다.
  8. 전 독일 국가대표 출신의 코치. 대개 노비츠키의 은사로 알려져있다.
  9. 주 2~3번, 주로 슛과 패싱 연습. 지금의 노비츠키와 NBA의 대세를 생각하면 앞서 봤다고도 볼 수 있다.
  10. 첼로라든지 현악기 등. 그래서인지 노비츠키는 독일의 한 토크쇼에서 기타 연주 및 노래를 부르기도했다. 노래연습은 안 한 듯 하다.
  11. 노비츠키가 군복무 전이라 군대 가야 한다고 말하자 "너 키가 7피트가 넘는데 군대는 무슨 군대냐? 은폐엄폐도 안된다(...)"며 나이키에 전화해서 이 독일친구 원하는 거 다 해주고 자기 모교인 오번 대학교에 보내라고 통화했다고 한다. 하지만 외지의 낯선 탤런트를 모교로 스카웃하려는 이 남자의 야심은 드래프트에서 댈러스가 노비츠키를 냅다 지명해버리면서 물거품이 되었다. 그리고 앙심을 품은(?) 바클리는 댈러스를 두고두고 까게 된다(...)
  12. 노비츠키와 상대한 바클리는 당시 인터뷰에서 "이 소년은 천재다, 만일 그가 NBA에 오길 원한다면 그는 나를 상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한다. 후에 그의 커리어가 바클리에 대등 혹은 그 이상으로 평가되는 걸 봤을 땐 대단한 선견지명. 여담으로 어렸을 적부터 노비츠키의 우상이 바클리였고 그의 우승을 점친 사람도 바클리였으니 참 인연이 깊다 볼 수 있다.
  13. 이 과정에서 보스턴의 헤드코치였던 릭 피티노는 내심 노비츠키를 점 찍어두고 있었는데 선수알아보는 눈과 트레이드감각이 있던 돈 넬슨이 먼저 가로채버렸다... 하지만 후에 보스턴이 뽑은 선수도 레전드 반열에 오르게 되었으니 지금보면 아쉬울 결정은 아니었던듯.
  14. 후에 신인시절 Jump shoot이 없다며 ason kidd라고 조롱받던 제이슨 키드가 자신의 첫팀인 친정 댈러스에 돌아오면서 함께 우승을 일군걸 생각하면 참 희한한일이 아닐수없다.
  15. 아쉽게도 기량발전상은 수상하지 못했는데 암묵적으로 통해지는 기량발전상의 저주라는게있어 오히려 다행으로 생각하는 팬들도있다(...).
  16. 노비츠키가 얘기하길 완벽한 환경을 만들어주었기에 나가서 이기기만하면 됐다고.
  17. 노비츠키의 대표적인 절친. 사진들을 검색해보면 좀 게이같다. 노비츠키는 내쉬와의 관계에 대해 슈퍼마켓에서 만났어도 친구가 됐을거라고 말한적이 있을정도로 매우 절친한사이. 해외생활에 있어 노비츠키가 많이 힘겨워할때 내쉬가 많은 부분에서 도움울 주었다한다.
  18. 파일:UjoXBxT.jpg이 셋은 2015년 NBA시즌이 끝난뒤 야구행사로 오랜만에 재회했는데 여전히 절친한 모습을 보여 골수 댈러스팬들에게 훈훈함을 전했다.
  19. 당시 돈 넬슨은 패싱력도 좋은 노비츠키의 능력을 생각해 포인트 포워드로 활용하기도 했다.
  20. 근데 이 때 제이슨 테리의 실수가 보통 실수가 아니긴 했다. 플레이오프 마지막 경기에서 3점차로 앞서고 있었는데, 경기 종료 10초 전 3점라인 정면 지점에서 NBA 최고의 3점슈터인 스티브 내쉬에게 밀착하지 않고 공간을 줬다가 사실상 시리즈를 결정지은 동점 3점슛을 얻어맞았다.
  21. 참고로 이때 파이널은 댈러스팬들에게 금지어수준이다... 편파판정이 유난히 심했기때문.
  22. 사실 이게 역사상 최초는 아니다. 75-76시즌의 카림 압둘자바는 당시 레이커스가 40승 42패로 플옵실패조차 실패하면서 "플옵 무대도 못 밟아본" MVP가 되었다.
  23. 당시 필 잭슨감독이 이끌었던 레이커스는 쓰리핏이란 대업에 도전하는 팀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충격적인 결과. 4대0이라고해서 순탄했던건 아니었다 1차전부터 16점차라는 점수차를 뒤엎고 어렵게 승리를 거두었으니... 근데 4차전엔 3점퍼레이드로 36점차로 벌리며 쉽게이기긴했다...
  24. 참고로 이날경기는 댈러스에게 있어 정말 뭘해도 되는 그런 날이었다. 오클라호마시티가 케빈 듀란트의 득점력과 세폴로샤-이바카-퍼킨스-콜리슨이라는 수비라인업을 갖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주축선수인 키드는 노장임에도 11어시스트를 차곡차곡 쌓았고 제이슨 테리는 32분을뛰며 24득점 3점슛 4개, JJ바레아는 16분을뛰며 21득점 3점슛 2개를 기록했다.
  25. 손가락이라서 실감이 잘 안나겠지만 꽤 심각한 부상이었다 힘줄이 아예 끊어진 상황이었었다고. 당시 기사로 이 사실을 알게된 댈러스팬들의 분위기는 완전히 절망 그 자체였다.
  26. 당시 4쿼터에만 평균 8.2득점을 기록했었다. 노비츠키가 얼마나 고비와 중요한 순간에 강한지 알수있는 대목.
  27. 31득점 11리바운드를 기록하고도 졌던 경기에 더더욱... 당시 승부는 고작 2점차로 끝났었다.
  28. 참고로 현지의 기자들은 이때 노비츠키의 독감투혼에 관해 조던의 플루게임에 비교하기도했었다.
  29. 노비츠키의 은사인 게쉬바인더가 밝히기를 당시 세간에 알려진 증상보다 훨씬 심각했다고한다. 사실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컨디션이 최악이라는걸 알수있다. 열이 39도까지 치솟았었다고하니 뻔한거지만...
  30. 참고로 시리즈 6경기동안 그가 4쿼터에만 넣은점수는 총 62점이다 상대팀의 드웨인 웨이드와 르브론 제임스를 합친수치와 같다.
  31. 단순히 다득점 경기여서가 아니라 5차전은 NBA팬들에게 두고두고 회자될 명승부로 기억된다 내용은 팽팽하면서도 시원시원했고 경기질적으로도 매우 양질이었기때문. 한마디로 꿀잼이었다
  32. 45/46. 그 놓친 하나도 독감으로 고생한 4차전에서 놓친것이었다. 믿기 힘든 집중력이다.
  33. 역대 가입자중 최장신이다. 비슷한 장신라인으론 래리 버드케빈 듀란트가 있지만, 이들은 3번 스몰 포워드다. 반면 노비츠키는 4번 파워 포워드빅맨중 유일한 180클럽 가입자다. 이점만 보더라도 노비츠키의 유니크함을 잘 알 수 있다.
  34. 오해에 가려져있을뿐 그는 포스트업과 페이스업, 돌파외의 온갖 공격기술들을 안정적이게 갖춘 선수였다.
  35. 우승을 차지했던 2011년파이널 2차전에서 경기종료까지 얼마남지않은 클러치상황에 팀을 승리로 이끈 위닝샷이 돌파에 이은 레이업이었던것을 생각해보자.
  36. 실제로 농구에 세이버매트릭스를 적용하는 전문가들은 3점슛의 성공률에 가산점을 주는 Total Shooting Percentage(TS%)라는 기록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37. 아니면 가까이 붙어서 성공률도 높이고 리바운드 다툼에도 도움이 되거나. 그래서 롱2라고 불리는 장거리 미들슛을 주무기로 삼는 선수들은 노비츠키나 라마커스 알드리지처럼 높은 성공률을 갖지 못하면 팀에 민폐가 되는 경우가 많다. 13-14시즌 디트로이트 피스톤스 패망의 주인공인 조쉬 스미스처럼...
  38. 오죽하면 수비엔 정말 둘째가라면 서러운 케빈 가넷도 저걸 어떻게 막냐란 말을 했었을정도. 동포지션의 매치업상대중 혼자서는 막기가 좀 버겁다는 말을 하는 선수들도 많았다
  39. 여담으로 르브론 제임스가 이 기술에관해 앞서 말한 압둘자바의 스카이훅 다음으로 가장 막기 힘든 슛이 아닐까란 평가를 한적이있다. 그리고 본인도 써먹고있다 래리 버드는 이 슛을쏘는 노비츠키를 두고 "그런 슛을 본적이없다. 그슛을 완전히 마스터해버린듯한 느낌이다. 놀라울 정도. 솔직히 말해 내가 그와 매치업될일이 없어서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라는 말을 전했다 평소 버드의 이빨을 생각하면 엄청난 극찬...
  40. 자주는 아니지만 마누 지노빌리도 썼던적이 있었고 등번호를 41번으로 할정도의 노비츠키의 팬으로 알려진 켈리 올리닉은 노비츠키 본인앞에서 쐈던적이있다 그리고 들어가지않았다
  41. 이때 수비가 케빈 가넷, 클러치능력을 떠나 저 보기만해도 토나오는 부비부비 수비를 뚫어 3점플레이를 해낸것만으로도 그가 뛰어난 공격수임을 말해준다.
  42. 첫우승을 차지한 2011년 파이널 2차전중 클러치 레이업으로 경기를 종결짓는 장면, NBA역사에 남을 명장면중 하나로도 손꼽힌다.
  43. 커리어 후반부에 뉴욕 닉스와의 경기에서 넣은 클러치샷으로 그가 아직 건재하다는것을 몸소 알린 경기
  44. 2년연속 식스맨상을 수상한선수. 지금은 추억하는사람이 드물어졌지만 나름 대단한 커리어를 보낸선수였다. 93,95,97에 올스타로 선발되기도 했는데, 특히 93시즌에는 19.1점 9.5리바운드 6어시스트를 기록하면서 올라운드 빅맨의 상징이자 상당히 드문 기록인 20점 10리바운드 5어시스트에 근접하기도 했다. 노비츠키가 대성하기 전까진 노비츠키가 슈렘프에 비교되었다.
  45. 크리스 카만등 NBA에나 유로리그에서 뛰는 독일선수는 있지만 유럽농구의 수준이 상향평준화가 돼서 이렇다할 성적이 안나온다.
  46. 1993년 마이클 조던이 수상한 이래로 NBA 선수로선 최초이며, 현재 유일무이한 외국인 선수 수상자이다.
  47. 참고로 "Best Team" 부문은 댈러스 매버릭스가, "Best Coach/Manager"는 댈러스의 릭 칼라일 감독이 수상했다. 말그대로 댈러스가 상을 휩쓸었다.
  48. 수정되기전 귀화한 비미국선수라고 기록되어있었는데 노비츠키는 귀화한적없다. 귀화선수를 포함한 비미국선수중 1위인것은 확실하다.
  49. 참고로 트위터엔 이것이상의 상상을초월하는 사진이 올라올때가 있다... 굉장히 유쾌한사람인듯
  50. 참고로 말하자면 댈러스 매버릭스와 노비츠키는 이런짓(...)을 거의 매시즌간 했었다. 팀관련해서 웃긴영상은 유튜브에서 쉽게 찾아볼수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노래 가사를 가운입고 낭독하는 노비츠키라던가...
  51. 퀄텟이라던가 어떤형태의 밴드든 팀웍과 팀원과의 호흡을 이해하는데 좋을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한다.
  52. 동료선수,스탭들과 함께 직접 시식해보는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