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견과 태권도의 관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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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특히 6. 25전쟁 이후에 만들어진 태권도(跆拳道)가 택견의 전통을 계승했다는 명분을 주장함으로써 1970년대 이후에는 태권도와 택견이 동일한 것으로 잘못 알려졌다. 그러나 택견과 태권도는 역사적·기술적으로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별개의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런 거 없다

동영상 두 편부터 감상해 보자.

1. 택견의 겨루기 - 결련태견협회의 2015년도 택견배틀 하일라이트

2. 태권도의 겨루기 - 제45회 협회장기 전국단체대항 태권도대회

두 무술이 닮은 꼴이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WTF측은 태껸을 우리 무술의 원형이자 태권도의 발전을 위한 재료로 보았으며, 태껸은 자신들을 개조해서 흡수하려는 태권도 단체들과 결별하여 고유한 전통을 지키는 문화재로서의 길을 선택했다.[1][2]

특히 택견측에서 반발이 심한데 이는 WTF 태권도 측에서 역사적 사료가 남아있는 태껸의 기록을 곧 태권도의 기록으로 삼는데 주저함이 없었던 것에서 비롯한다. 태권도는 태껸을 정통성의 근거이자 역사적인 뿌리로 삼았는데, 막상 태껸이 복원되어 정통성을 계승하자 태권도의 정체성이 흔들린 것이다. WTF 측에서는 기껏 만든 정통성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태껸과의 연관성과 현재까지 그 정통성의 계승을 지속적으로 주장해오고 있으며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본문에 들어가기 앞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다.

1. 태권도는 쇼토칸 가라테를 배운 사람들이 주가 되어 만든 신생 무술이다. 창작자가 명확하다.
2. 택견과 태권도는 기술적으로는 전혀 연관성이 없는 무술이다.
3. 태권도라는 이름은 ITF 총재였던 고 최홍희가 국군에서 위관 장교로 복무시절 이승만 앞에서 자신이 훈련시킨 병사들의 가라테 시범을 보이다가, 무술은 전혀 문외한인 이승만이 아 저게 "택견"이구먼 이라는 한 마디에 옥편뒤져서 跆(밟을 태) 拳(주먹 권)을 조합해 만들어낸 단어다. 즉 정치적으로 이용해 먹고자 쇼토칸 가라테를 개량한 무술을 택견으로 둔갑시키기 위한 술수를 부린데에서 만들어진 단어가 태권도이다.

태권도는 일본 가라테를 기반으로 발달된 현대무술이지, 택견을 계승한 무술이 아니다.

2 소개

2.1 왜 이런 논란이 생겼을까?

사실 태권도 조직과 인사들은 원래는 이런 주장을 하지않았다. 특히 태권도의 기원의 중심에 있었던 최홍희 총재와 ITF 수련자들은 당연히 본인들이 쇼토칸 가라테를 베이스로 태권도라는 신개념 무술을 창작하는 역사속에 있었던지라 창제원리를 분명하게 밝혔으며, 이는 오늘날의 ITF에서도 마찬가지이다.[3] 문제는 ITF가 정부에 의해 사실상 국내에서 말소당하고 정부 주도하에 만들어진 WTF는 이전 조직이었던 ITF와의 차별점을 둬야하는 동시에 더불어 국기(國技)의 정립을 원했기 때문에 약 반세기가량 이런 거짓 선전이 이루어진 것이다.

2.2 WTF가 태껸과의 연관성을 만들기 위해 했던 노력

실질적으로, 태권도는 오키나와의 무술인 카라테(당수도)의 일본화 버전인 쇼토칸 가라테로 만든 현대 무술이다. 정확하게는 창시자인 최홍희와 주요 원로들이 쇼토칸 수련자들이었다. 태권도는 80년대 올림픽을 앞두고 겨루기에서 가라테와 차별화를 주기 위해 공격-방어-반격의 가라테식 대련틀을 공격-반격의 형식으로 변경하고 발차기 기술을 대대적으로 개선 후 발펜싱이라 불릴정도로 변경하였다. 하지만, 태권도가 태껸을 존중하거나 계승한 무술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이유는 아래의 갈등 단락 참조.

도올 김용옥은 저서 <태권도철학의 구성원리>(1990, 통나무)에서 이러한 태권도의 왜곡된 역사를 정면으로 부정했다가 엄청난 비난과 인신공격을 받아야했다. 물론, 지금은 대다수 태권도인을 제외하고는 이러한 주장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있다. 즉, 최근의 태권도는 일반인들에게서도 현대무술이라는 평가를 듣고 있는 것이다.

현재 WTF 태권도 측에선 한반도에서 발생한 모든 무술들의 역사와 기술이 집대성 되어 현대에 태권도로서 통합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MMA?유전학적으로 내려오는 무술정보가 오늘날의 태권도를 낳았으니, 수박, 태껸, 날파람 등등, 모든 무술에 대한 기록이 태권도의 역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태껸 측에서는 이에 반발하고 있다.

역사적 측면에서 보면, 태껸의 정통성을 대표하는 송덕기 옹에게 해방 이후에 최초로 태껸을 배운 사람은 YMCA권법부[4]에서 윤병인 사범에게 사사하던 박철희 사범이었다.[5] 당시 경무대 상무관(오늘날의 청와대 경호실 무술도장)에서 무술을 가르치던 박철희는 송덕기를 경무대에 자주 초청하여 무술을 사사했다. 후일 김병수, 임창수 사범등이 배우기도 했다. 이들은 후에 이들은 태권도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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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덕기와 상무관

태권도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최홍희 총재의 경우, "태권도"라는 명칭을 만든 이유 중 하나로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태껸”이라는 어음(語音)을 연결시킬 수 있었고, 또 하나는 손보다 발을 더 많이 쓰는 이 무도의 성격자체를 나타내는데 적합한 글자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6]

초기 태권도의 경우 민족무술이란 정체성에 꽤 중점을 두었고, 이로 인해 당시 태껸의 명인이던 송덕기와의 교류를 하기도 했다. 다만 최홍희 총재 시절에는 단지 마켓팅용으로만 행해졌던 움직임이었다. 1960년 로마올림픽 당시 태권도를 소개하면서 태권도의 원형으로 태껸을 선택하였고, 이때 소개용으로 찍은 사진이 송덕기에 대한 가장 오래된 사진이다. 더불어 임창수 사범과의 시연사진이 1972년 발간된 태권도교본 품새편에 실리기도 했다.


송덕기김병수 사범. 경복궁에서 촬영된 사진으로, 당시 로마올림픽을 앞두고 태권도의 소개를 위해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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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덕기가 나온 태권도 잡지. 71년

태권도 통합시 가장 세력이 컸던 무덕관(武德館)의 황기관장의 경우 어렸을때 태껸을 배웠다고 하였으며 자신의 기술적 근원이 태껸에 있다고 강조하였다. 두번째로 컸던 청도관의 이원국 역시 안국동에서 태껸을 배웠으며 태껸의 발기술에 매력을 많이 느껴 태권도 수련 과정에 태껸의 발차기를 포함시켜 가르쳤다고 한다.

하지만 택견은 발로 하는 유술기라 불릴 정도로, 잡고 드잡이질 하고 발을 걸거나 차서 넘어뜨리는 무술이다. 물론 얼굴을 차면 한판 승으로 끝나는 타격기의 요소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태권도는 전형적인 입식 타격기 무술이라 발로 차서 포인트를 맞추면 점수를 따서 이기는 무술이다. 도대체 태권도 원로들이 택견의 요소를 태권도 어디에 도입했는지는 뒷받침 하는 증거자료가 없다. 만약 태권도 원로들 중에 정말 택견을 익혀서 그 기법을 태권도에 도입했다면 지금의 태권도와는 상당히 다른 무술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태권도가 발차기 위주의 입식 타격기로 바뀐건 가라테 색을 지우고 차별화를 위해서 주먹기술을 거의 사장하다 시피하고 발차기 위주로 대련 시스템을 바꿨기에 나온 결과이다. 즉 태권도가 받은 택견의 영향은 이름을 음차한것 외에는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2.3 갈등

당시 태권도인들의 립서비스 와는 별개로, 당시 태권도인들이 태껸에 품은 생각은 꽤 미적지근하였다. 태껸을 계승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태껸의 원형 보존과 기술 체계에 관해선 부정적이었던 것이다. 태껸의 놀이적인 성격과 스탠딩레슬링에 기반한 굼실거리는 움직임이 당시 무술인들에게는 절도가 없어보였으며[7], 당시 송덕기는 이미 노년이었기 때문에 낡은 문화에 집착한다는 편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더불어 당시 한국사회 전반에 퍼져있던 근대화의 바람 한복판에 있던 조선과 전통문화등에 대한 태도 까지 겹쳐져서, 비체계적이었던 태껸을 근대화 시켜야 한다는 인식이 강한 편이었다[8]. 극단적으로 평가하자면, 태권도 측에선 태껸을 현대무술로 엎어야 할 존재처럼 보았다. 태권도와 결별했던 태껸이 나중에야 복원되는데 성공했던 것도 도기현을 필두로한 80년대 대학생들의 민족주의 및 전통문화 복원에 대한 열정이 태껸에 향하면서부터다. 즉, 발차기 위주의 스포츠라는 정체성을 빼면, WTF 태권도인들은 태껸을 계승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9]

정확히 이야기 하면 일본 무술 가라테를 변형해서 태권도로 이름을 바꾸고 택견을 계승한 한민족 전통 타령을 했는데, 멀쩡히 택견이 존재하고 전혀 다른 무술임이 알려지면 자신들의 사기극이 들통나기에 택견의 존재 자체를 말소시키고 싶어한 것이다.

김운용 회장 이후 WTF는 태권도를 발 위주로 개조하기 시작했다. 이후, 현재의 태권도는 일제시대 말기의 가라데의 가타는 거의 계승하여 각 동작의 순서와 이름만 바꾼 형태로 남겨두고, 발차기 기술와 겨루기 형태만 대대적으로 개선한 형태로 변화되었다. 택견의 기술체계는 전혀 수용한 바가 없다. 그래서 품새와 겨루기가 완전 따로 노는 수련 형태가 되어 버린 상황이다.

결과적으로, 80년대 이후 태권도는 태껸의 하이킥을 독자적인 형태로 근대화 개조하겠다는 생각으로 가라데와 차별화 되는 무술이론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태껸꾼들은 전통문화를 기초부터 현대적으로 갈아치우겠다는 태권도에 반감을 품고 자신들의 연구를 지키기 위해서 결별했다.

3 세부

3.1 규칙

WTF태권도는 입식격투기를 기반으로 포인트제 룰을 취하고 있으며, 태껸은 전승자들의 증언에 따라 얼굴을 맞추거나 넘어뜨리면 승리하는 레슬링 방식의 단판제 룰을 취하고 있다. 또, 태권도에서는 상대를 잡아서 넘어뜨리는 씨름을 금지한다. 하지만 태껸에서는 씨름을 적극적으로 허용할 뿐만 아니라, 발차기에 준하는 수준으로 사용 빈도가 높다.

태권도 측의 주장에 의하면, 태권도 경기는 오히려 택견과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실제로도, 태권도는 80년대 태껸을 흡수하려고 했던 시절부터 '발차기 펜싱'이라고 불릴 정도로, 가라데와는 다른 스포츠 양상을 띄게 되었다. 즉, 올림픽 태권도는 태껸의 스포츠적인 규칙을 현대적으로 옮기려는 흉내를 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태껸의 정통성을 계승했다고 보기에는 부족한 편이다. 태권도 겨루기 기술체계와 택견의 기술체계는 전혀 연관성이 없다.

태권도는 가라테에서 분파하여 발차기 위주의 겨루기 형태로 발전했다 해도 택견과는 당연히 연관이 없다. 태권도는 일본무술에서 출발 했다는 과거를 지우고 한민족 전통무술로 둔갑하기 위해 택견의 역사와 정통성, 이름을 끌어다 붙였을 뿐이다.

3.2 기술

태권도장을 가면 주춤서기에서 정권 지르기부터 배우고 앞차기를 배운다.[10] 그러나 태껸 전수관에 가면 품밟기에서 딴죽부터 배운다. 즉, 기본기도 다르고 경기 방식도 다르고 간합도 다르다. 태권도는 중단과 상단 발차기를 유효하게 쓰기에 상대와의 거리가 제법 길다. 하지만 택견은 상중하 모두 유효하며, 일부 스탠드 그래플링을 허용하기에 태권도보다 짧은 간합을 가진다. 한마디로 차이가 엄청나게 큰 무술인 것이다. 태껸측의 입장도 이런 전통 규칙을 완전히 바꾼 태권도는 자신들을 계승한 흔적이 적다는 말을 하고 있다.

결국 태껸과 태권도의 무술적 성격은 매우 다르다. 전통태껸은 풀컨택트와 앞차기를 조합한 스탠딩 레슬링에 가까우며 (손을 이용한 타격기는 지금 안 쓰므로 발차기와 씨름만을 조합한 형상이다) 태권도는 현대적인 입식타격이기 때문에 기본적인 성향이 매우 다르다.

발차기에 있어서 태껸이 태권도와 가라데의 차별성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이견이 있을지언정 대체적으로 인정해주는 편이다. 대표적으로 디딤발로 도약하는 발차기, 내려차기는 태껸을 태권도 방식으로 받아들인 결과물이다. 무엇보다도, 곁차기를 태권도 방식으로 흡수하면서 생겨난 체중 분배 개념은, 이후 태권도의 개성을 만들어낸 핵심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태권도의 고유한 힘쓰임은 태껸식 발차기를 근대화한다는 당시의 생각이 구체화되면서 성립되었기 때문이다.[11]

문제는, 태권도가 직선적인 스포츠 역학을 도입[12]하면서, 태껸이랑 전혀 다른 방식[13] 으로 발전했다는 점에 있다. 또한, 태권도가 태껸에게서 받은 영향력은 이름을 음차한 것 외에는 없다. 고로 전통적인 문화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방향성을 지녔다고 보기는 힘들다. 즉, 태껸을 태권도의 태생 이었던 일본 무술 가라테에서 한국 전통무술로 둔갑시키기 위한 재료로 활용했을 뿐, 태껸을 계승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또한, 태껸과 태권도에 가장 큰 부분은 바로 손기술이다. 태권도의 손 기술은 상중하단 정권지르기와 4가지 막기 기술이 다인 반면에[14], 태껸은 흔히 하는 말로 스탠딩 그래플링을 구사한다. 예를 들어 레그 스윕의 일종인 딴죽을 걸때 필수적으로 상대의 어깨나 목등을 붙잡으며, 씨름이나 레슬링에서처럼 상대를 잡아 넘기는 기술도 존재한다. 옛법으로 가면 더 많은 기술들이 나오는대, 펀치 이외에도 상당수가 상대를 잡아 넘기거나 혹은 신체 부위를 잡아 뜯는식의 공격을 하며, 이는 중국무술들의 추수나 합기유술의 형태와도 비슷한 원리이다. [15]

한편, 경희대 태권도 학과 최영렬 교수는 택견과 태권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연구하였다.# 그러나 대한 택견협회의 이용복 상임부회장은 발차기 기술에 있어서 원리가 완전히 다르다고 한다.[16]

3.3 정통성 문제

태권도 측은 초창기부터 전통 무술을 발굴해서 이를 접목하려는 노력이 있었고, 그 중 하나로 태껸의 기술을 상당히 받아들여서 이를 발전시켰다고 주장한다. 원로 태권도인들 중 몇몇은 실제로 태껸을 배웠다. 무덕관의 황기는 자신의 무술적 근원이 태껸에 있었다고 인터뷰에서 몇번 정도 말했다.[17] 최홍희도 초창기 그의 저서에서 평양 에서 한일동이라는 명인에게 태껸을 배웠다고 밝혔지만, 후일 한병철과의 인터뷰에서는 배운 적 없다고 번복하였다.

그러나 초기의 관장들이 태껸을 수련했다고 해서 정통성이 전부 넘어가버리는 것은 아니고, 택견을 존중했다면 택견의 복원당시에 힘을 싣어줄 수도 있었을 탠데 오히려 태껸을 내치거나 공격했다는 점은 전통문화의 보존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정황을 보여준다. 위에도 서술된 박철희 사범의 경우 택견무도회를 설립하려고 했지만, 당시 전통무술의 기득권을 차지하던 수박도협회의 견제로 무산된바 있다. 또한, 당시 태권도인들은 사회 분위기와 맞물려 태껸을 보존하기 보단 근대화의 대상으로 보았으며, 자신들이 그 태껸을 근대화시켜 태권도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이상[18], 태껸의 보존에 미적지근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우리의 전통이 담긴 민족무술로 태껸을 대접하지만 구한말이나 일제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태껸이란 서울 및 수도권 근교에서 한량들이나 소년들이 주로 하던 힘겨루기 놀이정도로 취급되었다.

당연히, 그런 태도를 지켜보았던 태껸꾼들은 전통이 사라지는 것에 관심이 없던 태권도 단체의 태도에 실망할 수 밖에 없었으며, 무엇보다도 전통을 기초부터 개조하려고 했던 태권도에게 굳이 곧대로 정통성 합의를 해줄 수가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요약하자면, 태권도는 쇼토칸 카라테의 변형인데도 택견을 자신들의 정통성과 역사로 끌어다 쓰고 있다.

4 참고 문서

  1. 태권도가 워낙에 강세이기 때문에 태껸은 태권도 단체들 뿐만 아니라 대중에게도 무시받아왔지만, 90년대부터 태권도에 대한 중립적인 시각이 늘어나면서 점점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1년에 유네스코에서 태껸이 무술로는 최초로 인류무형 문화재로 등재되면서 문화적인 가치를 확실히 인정 받게 되었다.
  2. 다만 이 문화재로서의 등재는 택견 내부에서도 말이 많았다. 분열된 상태로 진행되었으며, 신한승 계열에서 주도했기 때문. 자세한 것은 신한승 문서 참고.
  3. 믿기 힘들다면(...) 당장 ITF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태권도의 역사와 원리 카테고리를 살펴보자.
  4. 후에 태권도 통합의 주요한 5대 도장중 하나
  5. 태껸과 태권도 양측에서 모두 중요한 존재감을 지니는 인물이다. 후에 육군사관학교 무술 교관과 태수도협회(태권도협회)의 이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6. 『태권도지침』최홍희,1966
  7. 택견에 대한 시선을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다. 이들이 접했던 무술들은 타격계 무술이 북파 소림권 계열 혹은 가라데로 한정되었던 환경임을 감안해야한다. 요즘같이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에 봐도 택견은 상당히 특이한 무술인데 그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는...
  8. 도복과 띠, 단급제도등은 이제와선 원래 부터 있던 무술의 특징 같고, 또는 한국과 다른 왜색 짙은 일본풍이라고 생각 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19세기 후반 유도가 처음 생기면서 만들어진 시스템이다. 당시로선 무술의 수련만을 위한 편한 복장, 실력을 평가 할 수 있는 등급과 그를 구분하기 위한 여러 색의 띠 등은 상당히 체계적이고 혁신적인 시스템이었다. 대한택견에서도 실력에 따른 등급을 나누고 철릭등을 이용한 전용 복장을 도입했다
  9. 목조 초가집을 다 무너뜨리고 철근콘크리트 아파트를 짓겠다는 관점과 유사하다. 당시 한국인들에게 태껸이라는 무술은 그 정도 존재였다.
  10. 이 방식의 수련법은 쇼토칸 카라테에서 하던 걸 변형없이 그대로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가라테와 차별을 두려고 노력은 많이 했지만 배운게 가라테다 보니 기본기는 가라테 수련법에서 그다지 바뀐게 없다.
  11. 단, 어느 정도까지 영향력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논쟁이 있다. 어쨌든, 태권도에서 쇼토칸 가라데와 차별화 점을 만들어낸 아이디어가 어디서 뚝 떨어졌느냐고 묻는다면, 단연 7080년대 태껸을 흡수하려고 했던 연구들을 꼽아주는 형식이다.
  12. 도입이라기 보다는 모체였던 가라테가 직선적인 무술이었다.
  13.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가라테를 개량한게 태권도 인데 택견하고 같은 방향으로 발전할 수가 없다. 태권도 측에서 어떻게든 택견과 엮어 볼려고 택견의 현대화를 위해 외래 무술을 도입했고 그 중 가라테가 포함되어 있다는 식으로 진실을 왜곡하는 사례가 많다. 일종의 물타기 수법..
  14. 품새에 있는걸 포함하면 다양해지긴 하지만, 그 품새에 있는 동작의 응용이나 실제 시합에서의 사용이 없고, ITF를 제외한 태권도인들도 더이상의 태권도의 주먹기술에 관심이 없는걸 생각해보면 사실상 안쓰는거나 마찬가지. 이쪽은 가라데와 가깝다.
  15. 과거 일부 태권도 도장에서 호신술 개념으로 이와 비슷한 기술을 가르쳤다는 증언은 있으나, 태껸과 어느 정도 기술적 공통점이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호신술 이라는건 오키나와테가 일본에서 가라테 (정확히는 태권도의 주 재료였던 쇼토칸 가라테)에서 시작된 유술기를 정규 커리큐럼 외로 전수하던 것이다.
  16. 실제로, 태권도는 직선적인 움직임과 현대적인 에너지 발산법을 활용한다. 하지만 태껸은 큼직하게 밟는 앞차기와 동양적인 무술철학이 강하게 드러난다.
  17. 황기 관장은 나중에 태권도 통합에 반대해서 따로 무술을 만드려 했고, 제자들은 거의 태권도 통합에 찬성하여 무덕관은 태권도 통합에 참여하게 된다. 후에 황기 관장은 무덕관에서 제명당하고, 무예도보통지의 권법을 연구해 수박도라는 무술을 창시한다. 그리고 수박도가 전통무술이라고 태권도와 똑같은 역사왜곡을 했다.
  18. 이건 일제시대 친일 매국노들이 우리는 독립운동했던 애국지사요 라고 하는것 만큼 말도 안되는 헛소리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