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역사

1 태권도의 기원

태권도는 전 세계에 최홍희 총재가 이끌었던 ITF연맹, 그리고 김운용 총재가 이끌었던 WTF연맹으로 나뉜다.
후술 되어있지만, ITF와 WTF는 태권도의 기원을 서로 다르게 보고 있는데, 대략 정리하면,

ITF - 최홍희 총재가 쇼토칸 가라테를 기반으로 창조한 무술
WTF - 택견과 수박 등 한국 전통 무술에 근원을 둔 무술

그리고 대한민국이 소속된 연맹은 WTF(World Taekwondo Federation)이기에, 많은 한국인들은 아직도 태권도의 기원을 삼국시대 고구려 고분에서 발견된 수박을 계승한 전통무술이라 배우고 있다. 그리고 ITF연맹은 한국에서는 근 30년을 역사에서 잊혀졌으며, 지금도 단순히 WTF의 변형이나, 변종으로 생긴 "북한 태권도"라고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ITF연맹은 WTF보다 훨씬 앞서 대한민국에서 창설된 국제 태권도 연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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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TF가 주장하는 고구려 고분의 수박벽화ITF가 주장하는 최홍희와 ITF창설 당시

태권도는 전통 무술인가? 현대 무술인가? 여기에 수많은 갑을논박이 있을때쯤, 태권도의 기원을 밝혀줄 매우 중요한 자료가 발견된다.
태권도 송무관 노병직선생의 30년전 친필편지

본인은 일찌기 우리나라 고유 무술을 습득하고 뜻한 바 있어 일본으로 건너가서 근대적으로 체계화되어 잘 발달된 공수도를 연구하고 1944년 2월에 귀국하여 3월 11일 개성시 자남동에 당수도 송무관을 창설한 지 어언 41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 송무관 노병직의 편지 중 -

그는 우리나라 택견은 조선 말기에 문존무비의 악풍과 일제의 탄압으로 인하여 그 자체를 감추고 말았다며, 우리나라 고유 무술을 습득하기 위해서, 일본에 근대적으로 체계화가 되어있는 "공수도"를 연구했다고 스스로 밝혔다.

즉 WTF와 이에 동조하는 일각에서 얘기하고 있는 수박이 택견으로 발전했고, 택견을 개량하여 현재의 태권도가 되었다는 얘기는 틀렸다는 것이 증명이 된다. 송무관의 노병직선생은 스스로 택견을 찾을수도 배울 수도 없었다고 밝혔고, 그가 민족을 위해서 선택한 것은 가라데다. [1] 다만 택견은 끊긴게 아니라 송덕기 선생에 의해 당시 엄연히 존재했었다. 자세한 것은 택견 문서 참조

이 밖에도 태권도가 가라데를 개량했음을 뒷받침하는 자료는 수도 없이 많은 편이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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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의 모체가 되는 오키나와 가라데의 겨루기

사실 김운용 총재가 주장했던 수박과 택견과의 연계는 50년대 태권도 5대 도장을 연 무도인들이 대부분 가라데를 배운 무도인임은 이미 밝혀진 상황이고, 수박이 가라데 이전에 이미 한국에서 이러한 무술로 남았다는 형태가 전승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며, 현재 복구가 되어가는 택견과도 분명히 다른 모습을 보이는데, 결과적으로 억지 주장일 수 밖에 없다. [4]결국 현재까지는 ITF 태권도연맹 최홍희 총재가 말한 '태권도는 쇼토칸 가라테를 기반으로 창조한 무술' 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또한 최홍희가 총재가 태권도를 창설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아직도 의견이 서로 다름에도 그러나 그가 태권도라는 최초로 명칭했음은 최홍희 총재가 태권도를 창설했다는 것에 반대파이신 박철희선생께서 남긴 말에서 잘 나타난다.

그(최홍희)가 태권도라는 명칭을 만든 것은 분명하다. -박철희

1.1 정리

태권도는 대한민국의 현대창작 무술이다.

즉 내용을 정리하면,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청도관도 1944년 쇼토칸 가라데를 배운 이원국 선생이 도장을 열었고, 송무관도 노병직 선생이 가라데를 개량하여, 연구했다는 기록이 존재하며, 오도관을 연 최홍희 총재는 역시 가라데를 배운 무도인이며, 태권도라는 용어 자체도 처음 만들어 낸 단어라는 것은 사실로 규정이 되었다.

반대로 WTF 측에서는 계속 유구한 전통무술이라 얘기하지만 여기에 대한 사실은 없으며, 일본 가라테에서 태생된 역사를 지우고 전통무술로 탈색 및 왜곡을 해오다가 택견의 등장과 복구가 되어가면서, 그것도 하나씩 무너지고 있는 상황이다.

세계의 많은 무술은 원조를 떠나, 저마다 각자의 형태로 꾸준히 발전해왔다. 가라데에서 시작했지만, 이 사실이 태권도라는 무예에 욕이 되는 일이 아니다. 태권도는 해방 이후 70년동안 우리의 고유 무술이 되기 위해 수많은 태권도 무도인들이 노력하고 발전시켰으며, 전 세계가 대한민국을 종주국으로 인정하고 있는 무예이기에, 태권도를 "가라데의 아류", "가라데의 짝퉁"이라 매도해서도 안된다.

단, 태권도를 두고 유구한 한국 전통무술에 외국 무술의 일부를 도입한 것으로 몰고가려는 역사적 왜곡 및 국수주의적 행태는 반드시 지양 되어야 할 것이다.

2 가라데와의 관련

주짓수가 유도에서 출발하여, 현재는 전혀 다른 무술이 되었듯, 태권도도 가라데를 개량했지만, 현재는 분명히 다른 한국의 무술이다.

다음의 영상의 무술은 '쇼토간 가라데'의 카타이며 이름이 태극 1장 이다. [5]

다음은 태권도 태극 1장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태권도는 가라테를 모태로 창작 되어졌다. 물론 가라테도 중국에서 기원했다는 게 정설이고, 중국에서 오키나와를 거쳐 일본에 상륙한 무술이지만, 어쨌거나 대다수의 태권도 원로 사범들이 일본에서 가라테를 배워 온 이상, 태권도의 모태는 가라테라고 봐도 무방하다.

가라데는 본래 일본 본토가 아닌 류큐 전통무술로, 중국에서 기원한 무술이다. 17세기 일본 사쓰마번의 침략에 의해 무기를 소유할 수 없게 된 류큐 왕국(지금의 오키나와) 무인들이 수련했다는 전설이 널리 전해지고 있다.

1625년에 명나라 사람 진원빈이 류큐에 와서 자국의 권법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고 이것은 가라데 역사에서 꼭 다루어지는 사실 중 하나이다. 류쿠말의 '티(手, ティー)'는 ''을 가리키는 말이며 동시에 기술 전반을 가리키는 단어이기도 하다. 무인의 '디'는 '무술'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류쿠에서는 중국에서 전래되었다고 알려진 무술, '토디(唐手, トゥーディー)'. 즉, 당수가 있었다.[6]

1929년, 후나코시 기진이 사범을 맡고 있던 게이오 대학의 가라데 연구회에서는 '가라테'의 가라를 반야심경의 공(空) 사상에써 따와 표기를 '당수(唐手)'에서 '공수(空手)'로 수정한다고 발표하였다. 또한 일본의 다른 무술(검도, 유도 등)이 도(道)라는 표기를 쓰는 것을 받아들여, 가라데에도 도(道)를 붙이게 된다. 따라서 '공수도(空手道)'라는 한자 표기가 생겨났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으로 일본의 군국주의가 심화되는 상황이라, 중국을 연상시키는 당수(唐手)를 공수로 바꾼 것이다. 덕분에 우리나라에선 일본에 비해 당수라는 이름을 꽤나 오래 사용했었다. 60대 이후 분들은 젊은 시절엔 당수라는 이름이 태권도라는 이름보다 익숙했을 정도.

또, 맨손 타격 기술로 특화하기 위해 이나 쌍절곤의 기술 등 무기술을 제거하고, 유도와의 차별화를 위해서 본래 '데'에 있던 유술도 제거했다. 한편 일본무도계에 받아들여지기 위해 유도의 도복과 급과 단, 각 급수와 단수에 따른 띠 체계를 도입했다. 이렇게 해서 현재와 같은 '가라데'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라데는 일본에서 그렇게까지 환영받지 못하는 '이방 무술'이었다. 가라데가 일본의 무술로 인정된 것은 1933년에 이르러서야 있었던 일이고, 그나마 '유도/유술'의 일종으로 분류되어 유도가가 가라데의 승급을 심사하는 굴욕적인 대우를 받기도 했다. 당시 인식 또한 유도는 상대의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전통무도, 가라데는 단순히 두들겨 패는 하층민들이나 익히는 무술 혹은 싸움질, 이라는 왜곡된 가치관이 만연했다. 소설이나 영화에도 항상 주인공 역은 '유도 가(家)'이고, 반대로 악역은 거의 가라데 가(家)였다. 이런 면에서 보면 가라데에서 분파되었다고 굳이 '쪽바리' 짝퉁 무술로 볼 필요는 없다. 실제적으로 보자면 당시 식민지 조선인들은 일본에 진출한 지 십 여 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같은 식민지인 류큐의 중국 기원 무술을 배웠던 것 뿐이다. 단, 일본은 가라테의 기원이 중국 남권이고 오끼나와를 거쳐 일본에 정착 된 역사를 인정하고 있다. 한국의 태권도는 그 일본에 정착된 가라테를 개량하여 현재의 태권도가 된 것을 인정하지 않고 오천년 한민족 전통 무술이라는 역사 왜곡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기간도장 5대관 관장의 출신에서 보다시피 가라데를 배운 사람이 많으며 도장의 이름도 'XX관'이라는 식으로 가라데, 유도와 유사했다. 전반적으로 가라데의 영향을 받은 점이 많다는 것이다. 더구나 청도관(靑館)이나 송무관(武館)은 쇼토칸(松濤館)에서 글자를 따와 이름을 짓기도 했다. 따라서 태권도가 가라데를 변형시킨 무술임을 부정할 수 없다. 다만 태권도는 어느 가라데인 단 한 사람이 창시한 무술[7]이 아니다. 9대관 관장 중 거의 대부분이 쇼토칸 가라데를 직간접적으로 배우긴 했지만, 일부는 안 배운 사람도 있었고, 중국 권법에 능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태권도 측에서 주장하는 한민족 전통무술에 외래 무술을 도입했다는 증건 전혀 없다. 주 재료는 쇼토칸 가라테와 약간의 중국 북권이 혼합되었을 뿐이다.

체계적인 면에서 보자면, 태권도는 기본적인 수련체제와 단과 띠 체계, 도복 등에서 가라데의 것을 그대로 유지했다. 하지만 가라데 역시 일본에 진출할 무렵에 유도단급제도, 유도복[8]을 받아들이는 등 '유도화'를 통해 일본에 정착하려 했다. 그래서 사실 가라데도 체계화 쪽으로는 원조라고 내세울 게 못 된다. 당시 유도/가라데의 '체계'는 초기의 태권도인[9]들이 보기에는 현대화한 무술 체계로 보여서 이를 수용했던 것 같다. 여기에는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해방 되고도 꽤 오랫동안 지식인들 사이에서 일본이 근대화의 모델로 여겨졌던 영향이 있다. 하지만 그 밖에도 태권도 발전을 위한 고민과 시행착오, 연구와 개량이 끊이지 않았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태권도의 품세가 훗날 창조한 것이고, 품세는 가라테 카타(型)식 수행체계에서 왔다고 비판을 받기도 한다. 사실 카타를 통한 학습체계도 중국에서 온 것이다.[10] 무술을 늘 2명이서 수련할 수는 없는 것이고 "올바른 자세"를 잡기 위해서 특정한 동작을 반복하는 수행법은 중국과 일본의 전통 무술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품세를 통한 교육 시스템은 중국의 투로가 원조지만, 초기 태권도의 품세에는 가라데 카타를 그대로 수련하였다.[11][12]하지만 현재 태권도의 중심인 태권도 경기와 품세가 따로 노는 상황이라 품세에 남아 있는 영향도 현재로선 사람의 꼬리뼈 비슷한 상황이다.[13]

지금에 와선 무술간 교류와 장단점 분석이 이미 끝난 이른바 종합격투기의 시대인지라 인지하기 어렵지만 태권도의 찍기, 뒤돌려차기, 뒤후리기 등은 90년대 이전엔 허를 찌르는 비밀기술 정도의 취급이었다.[14] 일단 80년대 쯤 물건으로 보이는 쇼토칸 가라테 강좌 동영상에서도 뒤차기 뒤후리기 내려찍기 등의 발기술이 나오긴 한다.[15] 게다가 일본에서 무려 1958년도에 제작한 영상에도 뒷차기 정도는 정식 기술로 등록되어 있다. 시합에서 안 쓴다고 태권도의 손 기술이 없는게 아니듯이 시합에서 안 나온다고 쇼토칸에 발 기술이 없는게 아니다. 다만 시합에서 사용하는 것이 어렵다보니 실용적으로 발전된 흔적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딱딱했다. 하지만 80년대 일본 쇼토칸 가라테 발차기에 찍기 뒤차기 등이 나온다고는 하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가라테는 과거부터 해외 무술들과의 교류가 있었다. 지금 일본 가라테 사범들도 찍기나 뒤후리기등의 발차기는 태권도 기원이라고 말한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거지 진짜 사실이 그렇다는건 아니다. 태권도에서 해당 기술을 적극적으로 발전시켰다는 걸 강조한 표현이다. 가라테카들의 로우킥은 그들의 주요 기술이지만 이 역시 1960년대 무에타이와의 교류로 새로 받아들인 기술이며, 실제로도 부정하지 않는다.

ITF에 한정 짓는다면, 육체 단련과 직선적인 공격 위주로 발전한 가라데와 달리, 체중을 실어 파괴력을 극대화하는 사인웨이브 이론에서 파생된 동작 등 기술의 원리도 차이가 나게 되었다. 단, 이는 ITF 태권도에 한정된 이야기이며, 우리가 아는 WTF 태권도와는 관계가 없다.

196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발차기 기술 중심의 대련을 통한 경기가 태권도의 중심에 자리잡았다. 처음에는 풀컨택트 형식으로 호구도 대나무를 쪼개 만들고, 발차기 뿐 아니라 주먹도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호구도 개량되고, 발차기에 초점을 맞추는 등, 이때부터 태권도는 더욱 가라데와는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발전하게 되었다.

가라데 계에서도 슨도메의 한계를 고민하여 다른 지향점을 모색하기는 했는데, 태권도와는 달리 국가적인 단일 조직이 없는 상태에서 사범 개인의 다른 무술 철학에 따라 발전 방향을 모색하다보니 부작용으로 지나친 조직 분열을 겪게 된다. 크게 경기 방식에 따라 흔히 전통 공수도로 불리는 송도관으로 대표되는 슨도메 계열, 글러브를 끼고 하는 킥복싱 계열, 극진공수도로 대표되는 안면 이외의 타격만 허용하는 풀컨택트 계열, 극진 계열에서 보다 더 나가서 종합격투기의 영향을 받아들인 계열, 본토와는 별개로 오키나와의 공수를 보존하려는 오키나와 테 계열로 분열되었다. 대충 크게 봐서 이 정도고,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뭐 이리 많나 싶을 정도. (...) 자세한 사항은 가라테 유파 문서 참조.

태권도도 WTF와 ITF가 다른 조직이긴 하지만, 국가의 지원을 받고 올림픽 공식 종목으로도 채택된 WTF가 전 세계적으로 많은 수련 인구를 가지고 통일된 위치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세계 전파에 매우 긍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가라데 계열에서는 '극진회관'이 세계화 되었고 그 중에서 가장 큰 조직을 가지고 있으나, 세계 수련인구는 1천 400만 정도로 7천만에 달하는 WTF와 비교하면 훨씬 적다.[16]

결국 오늘날 '경기 태권도'는 가라데와는 다른 무술로 변화했다. 기술 70%가 발차기이며 상당수가 기존 무술에 없던 독특한 것이며, 태권도의 발차기는 다른 무술들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하물며 극진 가라데의 브라질리언 킥도 브라질 계 선수들이 태권도의 발차기를 보고 모티브를 얻어 개발한 기술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태권도에서 연구를 덜 한 손기술. 특히 정권 지르기와 막기, 관수 지르기 등의 기술은 지금도 쇼토칸 가라데 기술과 별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이 부분에서는 가라데 기술을 도입한 다음, 대련에 쓰이지 않다보니 기술의 발전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아 오직 동작만 따라하는 '신체단련용 기술'인 채로 남겨진 것이다.

최근 인터넷에서 논란이 됐던 '이종우 전 국기원 부원장의 충격고백'이라는 신동아 기사가 있었으나, 국기원측에서는 이를 공식 부정하고 있다.[17] 신동아 기사 이후, 이종우씨도 본래 인터뷰 내용과 다르다는 항의가 있었다고 한다. 이 기사 이후 이종우씨는 더 이상 언론과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 당시 해당 기사를 작성한 신동아 기자 육성철 기자는 당시 외부 기고자로 확인 결과 더 이상 신동아에 재직하지 않으며 (신동아에 직접 전화해서 확인) 인터뷰가 왜곡되었다는 주장도 있어 사실관계를 확인할려고 했으나 사실 관계를 확인할 수 없다. 신동아측에 전화 문의 결과, 신동아는 해당 기사의 진실성을 보증할 수 없다고 하였으며[18] 신동아는 원래 의혹 제기가 많은 잡지다. 지금도 발간되는 신동아 기사를 보면 3류 주간지스러운 가십 위주의 기사를 볼 수 있다. (그래야 팔리기 때문이겠지만) 이상하게 태권도계에 비판적인 잡지로, ‘태권도 황제’ 김운용 날개 꺾인 30년 신화 문화생활(2001-12-01), 부정 의혹에 흔들리는 국기(國技) 태권도 심층집중취재(2005-11-01) 등의 기사만 내보내고 있다. 신동아를 태권도에 대한 신뢰할만한 출처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말이다.

이종우씨의 다른 인터뷰 기사. 오마이 뉴스 인터뷰 내용은 다른데, 태권도는 부분적으로 가라데의 영향을 받았고 가라데는 중국 무술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도 하였으며, 중국의 우슈가 나오기 이전에 우리나라의 고유 무술이 있었다고 하였다.

<인용>"지금이 태권도는 부분적이나마 가라데에서 유래해 왔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가라데도 일본의 가라데가 일본이 독창적으로 만든 것도 아니다. 동양 문화권은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조상들이 무조건 외국의 무술만 모방한 게 아니다. 손발을 움직이면서 하나의 무술을 완성시킨 것이 일본 가라데 인데, 또 이전에 중국의 우슈가 나오기 이전에 우리나라에도 고유의 무술이 많이 있었다."

이 인터뷰 내용은 태권도가 전적으로 가라데다라고 주장한 신동아 육성철 기자가 만든 그와의 인터뷰 내용과 배치된다. 신동아 기사 하나만 이상한 거다.[19]

결론적으로 태권도는 가라테에서 분파되어 현대에 와서 창작된 무술이며, 발차기 기술과 겨루기 형태가 발전된 무술이다.

하초창기 일본의 가라데는 그야말로 태동시기에 불과했고 오키나와테에서 일본의 가라데로 변신을 하던 중이었다. 그 변신은 각 계파마다 서로 다른 양상으로 자라났는데 후나고시 계열은 슨도메로, 오키나와테의 영향을 깊게 받은 고주류는 오키나와테의 색채를 거의 그대로, 조선인들의 계열은 실제로 치고받는 것을 선호하는 실전계열로 나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오키나와테라는 아버지 아래에서 일본의 슨도메, 전통의 고주류, 실전지향의 조선파(태권도와 극진가라데) 이렇게 크게 구분할 수 있다.

또한 당시 일본에서 가라데를 배운 초창기 태권도의 사범님들의 실력은 가라데 계에서도 인정할 정도로 상당한 실력이었다. 그런 동등한 입장에서 스스로 권법을 발전시킨 것이라면 이것은 가라데의 짝퉁이라고 폄하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태권도 초창기 인원들 중 일부가 일본에 정착된 쇼토칸 가라테를 일본에서 배워온 사람들로, 오키나와에서 직접 배워온 것이 아니고 이미 일본에 정착되어 일본화된 쇼토칸 가라테를 위주로 수련한 사람들이 태권도를 만든 것이다.

태권도가 가라테를 모태로 현대 창작되었다고 시비 거는 사람은 없다. 다만 가라테로 부터 분파되어 새로 창작된 무술을 가지고 유구한 한민족의 전통 무술 운운하는 작태를 비판하는 것이다. 즉, 역사왜곡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태권도는 가라테의 아류가 아니라 전후의 일본에 전파된 오키나와테가 일본과 한국 양국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발전해 온 역사로 볼 때 형제격으로 봐야할 무술이다. 그 발전 도상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은 부분은 역사적으로나 기법적으로도 확인된다. 다만 지난 세월 태권도는 단군부터 내려온 민족 전통무술이라는 거짓말을 해서 국민들을 속였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아무래도 이런 논란은 한국의 단일민족을 강조하는 것과 전통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 근대, 현대에 들면서 중국, 일본의 영향을 아예 무시하는 것 때문일 것이다. 결국 태권도는 가라데로부터 파생되어 새로이 창작된 현대창작무술이다.

3 택견과 태권도의 관련성

그런거 없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태권도를 전통 무술로 포장 및 왜곡하기 위해 이름을 택견과 발음이 비슷하게 지었을 뿐, 택견과 태권도는 내용측면에서 공통점을 찾기 힘들다.

보다 자세한 사항은 택견과 태권도의 관련성 문서 참조.

4 ITF와 WTF

ITFWTF는 서로 태권도의 역사를 다르게 인식하고 있다. 이는 최홍희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달라질 뿐이지 그 근원은 같다. ITF입장에서는 무도 이론을 설립한 창시자로서 놓고 있으며 영국 브리타니커 백과사전[20]에도 태권도의 창시자로 등록되어있다. 한편 WTF에서는 최홍희씨가 캐나다로 망명한 것과, 노년에 고향인 북한측 인물들과 친한것을 문제삼아 한동안 언급조차 안하다가, 최근에는 60년대의 초창기 태권도 전파에 큰 영향력을 끼친것을 인정하고 있으나 그가 태권도의 창시자라고 까지 하지는 않는다. 현재 국내에서 구할수 있는 태권도 교범들은 대부분 WTF쪽에서 쓴 것이지만, 최홍희씨 와의 관계에 대해서 딱히 부정적으로 다루진 않으며, 다만 최홍희씨 망명 이후 독자적으로 발전해온 부분이 매우 많다는것도 강조하고 있다.[21] 일단 태권도라는 이름을 만든것은 최홍희가 확실하다.

ITF측 설명에 의하면, 오도관 창설자 중의 한 명이었던 최홍희가 1959년 대한태권도협회(大韓跆拳道協會)의 창립과 함께 태권도 기술이 체계화되면서 현대 태권도가 등장하였다고 한다. 군인이었던 최홍희가 예편하고, 1961년 초대 말레이시아 대사로 근무하고 있던 시기에 대한태권도협회는 ‘대한태수도(跆手道)협회’로 개칭되었다.

1965년 귀국한 최홍희는‘대한태권도협회’로 개칭하고 회장직을 역임하였으며 1966년 대한태권도협회를 중심으로 국제태권도연맹(ITF)를 설립하였다. 1971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국기태권도라는 휘호를 받고, 1973년 국기원(國技院)이 건립되며 태권도는 한국 고유의 무도로서 자리를 잡아갔으며, 사범 개인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던 해외 진출이 국가와 연맹의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1973년 최홍희가 캐나다로 망명하여 ITF 본거지를 토론토로 옮기자 대한태권도협회(KTF)는 독자로 세계태권도연맹(WTF)를 창립하였다. 이후 ITF는 초장기와는 달리 북한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에 태권도를 중심적으로 보급하면서 친북 세력으로 치부되어 최홍희는 국내에 입국하지 못한 채 2002년 숨을 거둔다.

좀 많이 요약하자면...

ITF - 최홍희가 쇼토칸 가라테의 영향을 받아 새로 창조한 무술.
WTF - 택견과 수박 등 한국 전통 무술에 근원이 있는 무술.

WTF의 주장은 일종의 역사왜곡이다.

수박은 특정한 무술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여러 무술을 지칭하는 일반명사라 추정되며, (즉 무술=수박) 특정 무술이라고 하더라도 그 형태가 전승 되지않았다. 현재 존재하지도 않는 무술이 태권도의 근원이라고 주장하는것 부터가 넌센스다.

그리고 아직도 전승되고 있는 택견과는 이름을 차용한것 외에는 기술적으로 전혀 연관성이 없다. 발로하는 유술기라 불리는 택견과 전형적인 입식타격기인 태권도는 완전히 다르다. 특정 무술을 모태로 전승 발전이 되었다면 그 주가 되는 기술 체계에 유사성이 있어야 하는데 택견과 태권도는 유사성은 0이라 봐도 될 지경이다. 되려 모체가 되었던 가라테와는 발 기술 중점으로 발전하고 대련 체계는 완전히 갈아탔지만, 품새는 가라테 카타와 큰 차이가 없다. 또한, 택견은 품새가 존재하지 않는 낱기술 위주의 무술이다. 택견이 근간인데 왜 가라테 카타와 차이가 거의 없는 품새가 존재하는지만 봐도 태권도의 근간이 어떤 무술인지는 딱 답이 나온다.

ITF 역사에 따르면, 최홍희가 1959년 대한태권도협회(大韓跆拳道協會)의 창립과 함께 태권도 기술이 체계화되면서 현대 태권도가 등장하였다고 한다. ITF 태권도에 끼친 최홍희의 업적은 끊임없는 연구와 개발 속에서 한국의 역사를 담은 천지, 단군, 도산 등 24가지의 틀로서, 가라데와는 다른 새로운 수련체계를 확립하였고, 둘째로 ITF 태권도는 모든 기술에 적용하는 사인웨이브 이론을 정립하여 독특한 무도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최홍희의 저서에 의하면 태권도는 쇼토칸 가라데를 베이스로 자신이 새롭게 창조한 무술이다. 현재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는 최홍희를 'The principal founder of tae kwon do'라고 서술하고 있다. 즉, 태권도라는 이름을 만든 최홍희는 태권도의 정의를 자신이 창시한 무술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ITF 혹은 그외의 분파가 아니거나 태권도의 창시자를 최홍희로 인정하지않는 측에서 태권도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그저 도용,사칭에 불과한 행위이므로 잘못되었다.

WTF 역사에 의하면, 태권도는 과거 한국에 존재했던 무술들의 정체성을 이어가고 있으며(물론 택견 협회는 이를 부정한다) 또한 외국 무술에 의한 영향도 인정하고 있는데, 현재 WTF 홈페이지에서 태권도 근대 역사서술을 보면 "한국형 무술[22]에 외국형 기술을 발전적으로 첨가시켰다"고 나와 있다. 그러는 한편으로 태권도는 한 사람이 창조한 무도가 아니고, 당수(唐手 가라테), 공수(空手 가라테), 권법 등으로 무도명이 난립하던 9대무도관(館)을 합치면서-초기에는 5대관- 태권도라는 통일된 명칭을 사용한 것도 사실이다. 사실 태권도 초기의 역사는 최홍희와 기타 도장관장들과의 정치적 알력싸움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쪽수로는 최홍희 쪽이 불리하지만 군장성이던 최홍희의 영향력이 강해졌기 때문. 덕분에 명칭도 태권도와 태수도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다.

WTF는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시범종목으로 채택되고,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부터 정식 메달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2007년 현재 WTF에는 185개국이 회원으로 가입되었고, 약 680여만 명의 유단자가 배출되었으며 ITF에는 2007년 현재 102개국이 회원국으로 가입되어 있다.

5 5대 도장

국기원으로 통합되며 현대 태권도의 근간이 된 도장들인 기간도장 중에서도 초기 다섯 도장에 대해 한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청도관(靑濤館), 송무관(松武館), 무덕관(武德館), 조선연무관, YMCA 권법부로 가라테(당수, 공수)와 권법을 가르쳤다. 6.25 이후 조선 연무관은 지도관과 한무관으로, YMCA 권법부는 창무관과 강덕원으로 나뉘어 총 9개 관이 되었다. 그리고 상기 주요 관들은 죄 일본에서 가라테를 배원 사람들이 세운 무술관이었다. 조상님들은 무술이라는걸 생업으로 팔아먹는 "관"이라는 문화가 없었다. 즉 관이라는 이름을 걸고 무술 도장을 업으로 삼는 건 일본의 문화다. 물론 중국에서도 무술을 생업으로 하는 도장문화가 있었지만 "관"이라는 이름은 쓰지 않았다.

제일 영향력이 큰 관은 무덕관과 청도관이었다. 무덕관은 1960년대 태권도 수련생의 75%가 수련했던 곳이고, 청도관이 그 다음이었다. 가라테와 차별화를 주기 위한 연구 일환으로 풀컨텍트+호구 기반으로 독자적인 기술이 속속 탄생하고, 수련 과정이 대련 중심으로 변하면서 태권도는 큰 전환점을 맞이한다.

더불어 한국에서는 통합을 통해 9대관 각각의 개성은 거의 희석됐지만, 과거 해외로 나간 태권도 사범들의 경우 국내 태권도의 통합을 겪지 못했거나, 자신의 도장에 자부심을 가졌기 때문에 아직도 XX관 태권도라는 명칭을 고수하는 경우도 있다.[23] 대표적으로 타이거JK는 무한도전에서 자신의 태권도를 지도관(智導館) 태권도라고 말한 적이 있으며, 멕시코에 진출한 문대원 관장은 무덕관 태권도라는 이름을 고수하여, 멕시코 내에선 무덕관의 지명이 상당한편.

태권도 도장의 기원은 1945년 일제 해방 이후 국내에 여러 개의 도장이 생기게 되고 크게 6개의 도장으로 분류할수 있는데 무덕관, 청도관, 송무관, 창무관, 윤무관, 오도관 이다. 이 도장들이 1960년대에 합쳐져서 현대 태권도의 모체가 된다. 여기서 가장 영향력이 큰 도장은 무덕관과 청도관이었다. 청도관은 이원국씨에 의해 설립됐는데, 그는 어렸을때 서울 안국동에서 택견을 수련하고, 이후 가라테를 배우고 중국 상하이와 허난에서 쿵푸를 수련했다. 해방 이후, 청도관은 2번째로 큰 도장이 된다. 가장 큰 도장은 무덕관이었다. 무덕관은 황기에 의해서 설립됐는데, 황기는 어릴때 택견을 배우고, 중국에서 태극권과 쿵푸를 배웠다. 덧붙여 그는 철도 회사를 다니면서 도서관에서 오키나와 공수도 책을 읽고 공수도의 철학을 읽었다고 한다.(그는 직접적으로 가라테를 배운 적이 없다.) 1957년, 무덕관 관장 황기는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서 권법을 참고하고 수박에 영감을 얻어 수박도를 창안한다. 무덕관은 당시 최대의 태권도 도장이었는데, 1953년과 1970년 사이에, 전체 태권도 수련자의 약 75%가 무덕관에서 배웠다. 무덕관이 현대 태권도 형성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곳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태권도라는 무술은 최홍희 주도로 창작되었으며 최홍희는 쇼토칸 가라테 수련자였다.

태권도는 단 한 명에 의해 창시된 무술이 아니며, 태권도의 모체가 된, 당시 태권도 9대관 관장중에는 무덕관의 황기와 같이 택견과 중국 권법을 수련한 사람도 있었으며, 조선 연무관의 전상섭은 송도관 공수도가 아닌 강유류 공수도를, (두 유파는 다른 무술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공수도참조), 윤병인과 윤쾌병(윤희병)은 수도관 공수도(오키나와 테)와 권법을 배웠다. 태권도는 이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발전되었으며, 후대의 노력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무술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Kimmo Rauhala 교수의 논문에 의하면 70%의 기술이 킥이며 이 킥 기술들은 기존 무술에 없던 독특한 것이다. 1962년의 대한 태수도 경기 내용을 보면 공수도와 크게 다른 격투방식을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초창기 태권도는 정권 지르기, 가타 수련, 약속 대련 등 가라테의 수련체계를 그대로 수련했다.

상기 문단에서 가라테 뿐만 아니라 기타 무술의 융합과 가라테와 차별화된 변화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부분은 누구도 부정하진 않는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가라테를 기반으로 재창작된 무술을 가지고 한민족의 유구한 전통무술 타령하는 것, 즉 역사자체를 왜곡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 태권도 역사 문서 자체가 이리도 장황하게 써져 있지만, 결국 결론은 태권도의 원형이 가라데이지 몇 백년 전의 한민족의 전통무술이 아니라는 것이다.

5.1 무덕관(武德館)

1945년 11월 19일 황기가 열었다. 처음에는 교통부에 화수도부를 설치하고 중국식 세법과 보법을 가르쳤다. 요즘 뉘앙스로 옮긴다면 '철도청 무술 클럽' 비슷하다. 어릴때 택견을 배웠고, 이를 훗날 자신의 무술에 접목한다.

관 통합 작업 당시에 태권도 협회에 참여한 그는 자신의 “무술의 기술적 근간은 택견이었으나 택견은 체계가 전혀 없어 무술로 보기 어려워" 자신이 이를 체계화한다는 식의 기록을 남겨 택견의 근대화 과정상의 주역들의 인식을 잘 보여 준다." <태권도와 택견 기술의 비교 연구>-경희대학교 교수 최영렬

물론 택견 측은 이에 반발하고 있다.

본인은 중국에서 사도를 양선생님에게 직접 사사받고 중국무도에 대하여 체험하였고, 일본무도에 대해서는 많은 일본 서적에 통하여 습득하였다. 그렇게 중국과 일본의 무술을 연구하며 공부하다보니 중국무도, 일본무도는 우리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장,단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중국 것은 순리적인 반면에 역리적인 것은 부족하고 일본 것은 반대로 역리적인 반면에 순리에 부족한 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중국 것은 부드럽고 다양성이 있고 약한 반면, 일본 것은 딱딱하고 소양성이고 강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이 무도는 동일한 것으로서 형태만 때와 장소에 따라 변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당연하고 자연적인 것을 가지고 내것이니 중국것이니 일본것이니 하는 것은 부당하고 불합리적인 것이므로 이러한 협소함과 편견을 버리고 진정한 마음으로 사도를 통하여 세계 전인류의 형제, 자매화 운동에 공헌하는데 이바지해야 한다.

중국무술은 직접 배웠다(기 보다는 체험했)고 일본무술은 책으로 배웠다면서 양국의 무술을 다 깐다.
처음에 무술관을 설립할때 이름은 "화수도"였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그래서 일부 사람들에게나마 알려진 무술 이름이었던 당수도라는 이름으로 바꾼다.(순수하게 비즈니스 차원)

"처음엔 화수도라 했지요. 발전이 안되더라고요. 일본 사범은 잘 되더군요. 습성에 묶이는구나 생각했지요. 그래서 당수도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1995년 11월 20일. KBS2 라디오 인터뷰중>

비록 명칭의 변경은 있었으나, 무덕관 무술(=가라데)은 태권도의 중요한 모체가 된다. 황기는 훗날 무예도보통지권법을 연구해서 손과 발의 타격 테크닉을 취한 수박도를 창안했다고 하지만 그 근거가 부족하다. 이 과정에서 태권도 통합을 지지하던 제자들과 불화를 겪어 후에는 오히려 무덕관에서 제명되었다.

황기 계열은 수박도로 해외로 진출을 꽤했고 일부 무덕관의 전통을 고수한 또다른 파벌은 "당수도"로 아직까지 무덕관의 명맥을 잇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황기의 수박도나 당수도 역시 태권도와 마찬가지로 한국전통 무술이라는 역사 왜곡을 하고 있다. 당수도는 일본식으로 읽으면 '가라테도'가 된다... 유튜브에서 무덕관이라고 검색해보면 전형적인 가라데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무덕관의 동작 중에 택견과 중국무술의 특징은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2 청도관(靑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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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이원국이 열었다. 최초로 개관한 태권도장. 어릴때 서울 안국동에서 택견을 배웠다. 이원국이 일본 유학중 쇼토칸 가라테를 배웠으며,[24] 허난과 상하이의 쿵푸센터에서 쿵후도 배웠다. 어릴때의 택견의 발기술에 매력을 느끼게 된 이원국은 이후 택견의 발차기를 태권도 수련의 과정에 포함시켜 관원들을 지도했었다고 한다.[25] 청도관의 분관으로는 정도관(正道館), 오도관(吾道館)[26] 등 이 있다.

5.3 송무관(武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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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노병직이 열었다. 청도관 이원국과 마찬가지로 후나코시 기친에게 쇼도칸(松濤館) 가라테를 배웠다. 송무관의 송(松) 자도 쇼토칸의 송 자에서 따와 이름 붙였다. 2대 관장인 그의 아들 노희상은 합기도와 북부 소림 무술도 배웠다.

5.4 YMCA 권법부

1946년 윤병인이 서울 종로YMCA에서 권법부를 창설한 데서 시작한다. 기반이 되는 무술은 2가지로, 하나는 윤병인이 어린 시절 만주에서 배운 권법(취안파(quánfǎ), 혹은 주안파라고도 한다. 권법의 중국 발음)) 과, 일본 유학 시절 배운 수도관(修道館) 가라데이다. 주안파의 경우, 몽골계 사범한테서 배웠다. 본래 조선인에게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을, 윤병인은 직접 사범의 집의 마당을 쓸고 교습료를 남들의 2배로 내는 등의 정성을 보이며 배웠다. 그가 배운 형은 '단권', '장권', '토조산', '태조권', '태극권', '팔기권' 과 '칠보대타' '일보대타'등의 수련법이다.이 중 대부분의 형들이 대타(對打)로, 2인의 약속 대련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로부터 윤병인을 가르친 몽골계 사범이 청나라 몽골 팔기군의 무술 사범이고 권법이란 몽골 팔기에서 연마한 군용 무술이라 추정하고 있다. 최고단 품새는 "팔기권(八驥拳)"인데, 팔기권은 팔극권의 투로 가운데 하나인 대팔극(大八極)의 팔극대타(八極對打)로 추정되고 있어 팔극권의 일파라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청나라 말 이서문의 제자 곽전각이 마지막 황제 푸이에게 팔극권을 가르치는 등 세가 흥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기법들중 일부가 군에 전수되었을 뿐, 팔기권을 제외한 나머지 기법들은 팔극권의 그것들과는 다르기에 팔극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단지 그 기법이 북파권법들의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권법이란 당시 중국 동북지방에서 연마되던 무술을 청나라 군에서 부분적으로만 수용한 것으로 본다.

창시자인 윤병인은 일본 도쿄 니혼대(日本大)로 유학을 했는데, 당시 조선인 유학생들을 괴롭히던 일본인 가라테 부 학생들을 중국 권법으로 혼내준 것을 계기로, 대학에서 가라데를 가르치던 수도관(修道館) 가라데 개조, 토야마 칸켄과 교류를 하고 토야마는 윤병인을 가라테 5단으로 인정한다. 토야마 칸켄은 일본 송도관 가라데의 개조, 후나고시 기친과 사동류 의 개조, 마부니 겐와의 스승인 이토스 야스츠네의 제자이다. 요컨데 후나고시 기친, 마부니 겐와의 동렬의 제자인 셈(사실 토야마는 개인적으로 후나고시 기친을 이토스의 정통 제자로 인정하지 않았음). 이 때는 가라데가 오키나와에서 건너온지 얼마 되지 않은 때이므로, 윤병인이 습득한 가라데는 실은 오키나와 테에 가깝다. 실제로 당시 YMCA 권법을 수련했던 사람들은,맨손 권법이외에도 중국식으로 보이는 창술(찌르기를 주로하는), 단검술(이제는 거의 남아 있지 않고 6.25 전날 보인 시범의 기법들만이 면면히 전해질 뿐이다.), 오키나와 테식 봉술을 수련했다고 한다. 주로 수련하는 가라데 형은 (이후 한자 음독 기준) 평안1~5, 발색 대, 발색 소, 공상군, 명경, 반월, 노패, 진수, 기마(내보진, 철기) 1~3, 십수, 오십사보 대, 소 등이 있다.봉형은 '윤선생(윤병인 선생)의 콘'이 있다. 현대화된 가라데와 달리, 오히려 1930년대 가라데가 일본에 전파되던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는 듯.

아직 관이 존재하던 시절엔, 타 관들과의 대련시 주로 손기술에 능했다고 한다.

윤병인은 수련 당시 오른손에 흰 장갑을 끼고 수련을 했는데, 이는 어린 시절 사고로 오른쪽 손가락 한 마디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경호원을 맡아달라는 요청도 오른손으로 경례를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현재 제자들은 윤병인을 존중하는 의미로 오른손에 흰 장갑을 끼고 수련한다.
파생관으로 강덕원(講德院) 과 창무관이 있다. 강덕원의 경우 홍정표, 박철희가 창무관은 이남석과 김순배가 설립했다. 미국에서는 Kang duk won 외에, 자연류(김병수 사범)와 파사류(이강희 사범)란 이름으로 수련되고 있으며, Kwan mu kwan 이라는 미국 가라데 유파에서도 박철희 사범의 영향으로 공산군, 장권등이 수련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윤병인, 홍정표와 박철희 사범에 이어 3대 전인(傳人)인 지승원 9단이 있다.

5.5 지도관(智導館)

1946년 전상섭이 열었다. 처음엔 '조선연무관(朝鮮硏武館)'이었으나, 6.25 와중 전상섭이 행방불명 되자 후인들이 이름을 고쳤다. 후나고시 기친에게 쇼토칸 가라테를 배웠으나, 윤병인과 친하여 같이 중국 권법을 수련하러 만주에 가기도 하였다. 전상섭이 행방불명된 후, 관원들은 투표를 통해 만주에서 주안파를 배웠던 윤쾌병씨를 1대 관장으로 추대하고 이름을 지도관으로 바꾼다. 이 과정에서 분열되어 파생된 도장이 한무관(韓武館)이다.

  1. 사실 가라데는 그 뿌리가 일본 본토가 아니라 오키나와라 일제강점기 시대에도 하류 무술로 취급받았으며, 이름도 당수도라는 이름까지 있었으니 그러니 그렇게까지 큰 거부감은 없었을 것이다.
  2. 당장 태권도에서 승급과 띠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가라데가 유도에게 심사받는 그 당시에 탄생되었다.
  3. 사실 이 사진은 해당사항이 없다. 극진 공수도 교범이 과거에 출간될 당시 정통 태권도 교범으로 번안되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4. 이해는 가는게, 최홍희 총재는 박정희 정권과 틀어져 캐나다로 망명했고, 월북한 인사다. 당연히 그 이름을 쓸 수가 없었으니, WTF의 주장은 결국 짜맞추기 한 꼴이다.
  5. 가라테에도 태극이라는 이름의 가타가 존재하며 태권도 원로들이 가라테 색을 지우기 위해 가라테 카타들을 버리고 품새를 재창작했으면서도 태극 품새 만큼은 가라테 태극 카타에서 크게 벗어난 개량을 하지 않았다.
  6. 메이지 시대의 가라데가들은 류쿠에는 고유의 '디(手)'가 있으며 '투디'는 '디'와는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으나, 현재는 자료가 없어서 실상은 알 수 없다.
  7. 단 태권도라는 말을 만든 것은 분명 최홍희 총재이다.
  8. 본래의 '가라데'는 딱히 특정한 복장이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사진 자료 등을 참고하면 웃통과 신발을 벗고 거의 빤스만 입은(…) 가뿐한 차림으로 수련을 한 것 같은데, 아마 류쿠의 기후가 더워서 이런 복장으로 수행했던 것 같다.
  9. 초기 태권도인 이래봐야 최홍희가 태권도라는 이름 만들어 보급하기 전에는 죄 가라테 사범들이었다. 중국무술 한 양반들이 있었어도 어차피 주도세력은 가라테인들이었다.
  10. [1] 이런 자료는 외국 가라데 사범등의 자료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11. 정말로 초창기에 아직 각 관별로 따로 기술을 수련하던 시절에는 품세로 중국 권법의 투로를 하던 곳도 있었고, 일본식 카타를 발음까지 그대로 부르며 수련 하는 곳도 있었다. 만화이긴 하지만 예를 들자면, 허영만의 작품 "변칙복서"의 주인공은 태권도를 배웠는데 비밀무기가 공수도의 산친이다... 근데 신기한건 저 5대 도장 관장 중에 가라데를 배운 사람은 있어도 고주류 가라데를 수련한 사람은 없다는 것.(사실 이건 당시 만화계에 파다하던 일본 만화의 영향일 수도 있다. 당시엔 그냥 일본 만화를 그대로 배껴 출판하기도 했으니...) 후나코시 기친의 쇼토칸은 산친을 하지 않는데? 그리고 삼전(산친)은 고주류의 오리지날은 아니며 중국의 오조권, 백학권등에서도 하는 중국기원의 투로이다.
  12. 현재 태권도의 품세 역시 중국무술과 가라테 중 어느쪽에 가깝냐고 질문한다면 아무래도 가라테다.
  13. 사실 이 건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며 태권도계 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있다.
  14. 공태랑 나가신다에서도 가라데 유단자들이 태권도 유단자의 찍기를 보고 아닛 저런 기술이?? 하고 벙찐 장면이 있다. 물론 적이기 때문에 바로 털리지만(...)
  15. 이 연도를 추정할 수 있는 것은 강좌의 주인공인 프랑스 공수도가 세르주 슈라키(Serge Chouraqui)가 1949년 생이기 때문이다. 5단 시절 찍은 동영상이기 때문에 그 정도 단 따는 데 10년 정도 걸린다는 것을 감안해보면 20대에 시작했다 해도 30대 초반의 나이다.
  16. 추가 설명을 하자면, 일본의 가라데는 유파 개념으로 각각의 단체가 독립된 조직이기 때문에 각 유파마다 자기 유파수련생 숫자만 계산한다. 때문에 전체 가라데 수련자 숫자를 추산할 방법이 없다. 게다가 현재의 극진은 기존 사범들이 분파를 많이해서, 전성기 숫자에 비하면 많이 적다. 반면에 태권도는 WTF라는 하나의 단체로 묶이기에 이런 통계와 기술 보급 등이 편한 것도 사실.
  17. 국기원 영어판 홈페이지 공지사항 30번 참고. 현재 홈페이지 리뉴얼로 해당 공지사항이 옛날 거라 삭제된 상태지만, 국기원 홈페이지에 이런 공지사항이 있었다는 것은 구글 검색으로 확인할 수 있다. "About ex-vice president Mr. Lee's talk in 2002," "Kukkiwon informs that the report of Mr. Lee Jong Woo(ex-vice president of Kukkiwon) interviewed with Shindonga magazine in 2002 was not official of Kukkiwon but just individual point of view talk. Therefore it's not proper to use that report as the reference of the history of Taekwondo."
  18. 당시에도 외부 기고자였으며 해당 녹취록 등의 증거 자료는 신동아 본사에 남겨진 게 없다고 한다
  19. 1. 국기원의 공식 부정 2. 본인의 부정 3. 다른 언론의 인터뷰 내용과 배치 4. 과거 태권도 계를 깠던 신동아의 행태 5. 녹취 자료 없고 당시 기자는 이미 퇴사. 원문 확인 불가능
  20. 사상 최초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백과사전으로 지금도 공신력으론 거의 세계1위급
  21. ITF가 북한으로 진출하면서 WTF측은 ITF와의 차별화를 두려고 꽤나 노력했다.
  22. 이 한국형 무술이 뭔지 정확하게 설명을 못한다. 기껏 보여주는 자료라고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씨름과 투기하는 그림이나 무예도보통지에 나온 "권법"그림들인데, 고구려 고분속 벽화의 속의 투기가 현재까지 어떤 형태로 전승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심지어 전통무술이 분명한 택견조차도 일본이나 중국의 도장 문화가 없던 조선시대 문화상 언제부터 행해져 왔는지 기록조차 거의 없다. 무예도보통지의 권법은 아예 기원이 중국 무술이라고 책 자체에 나와 있다.
  23. 대부분의 해외 사범의 경우 통합된 세계태권도연맹(WTF)에 협조하나 일부 소속 관에 대한 애착이 깊은 사범의 경우 세계태권도연맹의 정통성을 인정치 않고 반발하는 경우도 있다.
  24. 청도관의 물결 도(濤) 자도 쇼토칸(松濤館)의 도 자에서 따왔다.
  25. http://www.taekwonline.com/print_paper.php?number=1428
  26. 오도관은 청도관과 관계 없는 군 장성이던 최홍희가 군대내 세운 도장이지만 청도관 출신 부하들이 있어 청도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