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열보병



(4:10) 영화 군주의 하인(Sovereign's Servant) 中
영화 패트리어트


戰列步兵
Line infantry(영어)
Infanterie de ligne(프랑스어)
Hat piyadesi (터키어)

1 정의

본격적으로 머스킷이 전장의 주역이 되면서 그에 따른 전법으로 열을 짜서 싸운 보병을 가리키는 말. 영어로는 line infantry, 부대 단위로 부를 때에는 Infantry를 생략하고 Line company(전열보병중대), Line battalion(전열보병대대) 식으로 부른다. 18세기 초반에 등장하기 시작하여 7년 전쟁, 나폴레옹 전쟁 등에서 그 위력을 과시하였다.

참고로 전열보병이 사용하는 진형인 선형진(line formation)이나 전술인 선형전술(linear tactics)을 보고 인터넷에서는 라인배틀이란 용어를 쓰는데, 이는 잘못된 용어이다. 비슷한 라인 오브 배틀(line of battle)이란 용어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형성되는 "전선(戰線)"을 통칭하는 용어이다. 애초에 우리가 한국어로 '전선'이라고 쓰는 것 부터가 일본에서 'line of battle'을 '戰線'으로 번역하는 것을 그대로 따온 것이다.[1]

한국군도 전열보병을 상대한 적이 있다. 최초는 나선정벌 당시의 러시아군과의 교전. 신유 장군은 북정록에서 러시아군의 전열보병 전술에 강한 인상을 받았던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후 병인양요, 신미양요 때도 전투가 벌어졌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은 정족산성에 야포도 없이 닥돌하다가 피를 봤고, 이와 달리 신미양요때 미군들은 충분한 함포 지원을 받으며 광성보를 함락시켰다.

2 역사적 배경

화승총이 전장에 등장했지만 초기의 총은 상당히 조악한 무기였다. 살상력은 둘째치고라도 장전 속도가 꽤나 느릴 뿐더러, 명중률도 썩 좋지 않았고, 만드는 것도 쉽지 않은 무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방 장갑을 일격에 꿰뚫는 위력을 갖춘데다, 오랜 훈련이 필요한 활에 비해 비교적 단기간 내에 숙련될 수 있다는 장점이 매력적이었기에 서서히 보급된다.

하지만 초기의 총이 생각만큼 갑옷과 기병을 무력화 시켰던 것은 아니다.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중장기병이 패하기는 하였으나 이후 주요부위에 대한 두께를 늘리고 범위를 줄인 방탄갑옷이 나타나게 되었으며 기병도 총을 들고 다니게 됐다. 기병이 랜스를 포기한 것은 16세기 위그노 전쟁 이후 부터이고 갑옷이 완전히 물러난 것은 18세기 부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초기 은 명중률이 낮았기 때문에 확실한 위력을 보려면 집단으로 운용해야 했고, 자연히 총을 사용하는 보병들이 밀집한 형태의 진형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당대의 총병은 근접전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그동안 상대방 기병이 들이닥치면 꼼짝 없이 사냥당해야 했다. 그 때문에 장창병이 밀집하여 적 기병의 돌격을 막는 동안 총병이 총을 쏴 공격하는 방식이 탄생했다. 이 간단하면서도 유용한 아이디어의 선구자인 에스파냐 테르시오는 이후 약 60년에 걸쳐 무적으로 유럽에 군림하며 그 전과에 주목한 각국도 비슷한 전술을 모방하게 된다. 물론 영원한 무적은 없듯이 로크루아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몰락한다.[2]

화승총의 발달로 인해 이전의 창기병들이 다 사냥당해 벌어진 전장환경의 변화로 기존의 강력한 기병랜스돌격이 전장에서 거의 사라진 후[3], 근접전의 위협이 줄어들었는데 창보다 먼 거리에서 적 기병을 상대할 수 있는 총은 서서히 창을 대체해 장창병 역시 필요성이 줄어들었으며, 잔존한 기병들도 장창을 위시한 보병화력의 증대로 보병에 대해 절대우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어 기동성이 필요한 분야에서만 사용되고 과거의 모습은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전장의 주역이 보병으로 옮겨간 후 총의 비율은 계속해서 높아져가 16세기 말에는 50%를 넘기기 시작하였고, 테르시오는 로크루아에서 불패 행진을 끝냄과 동시에 사라짐으로서 마우리츠가 제창한 선형진이 다시 각광을 받기 시작한다. 이후 총검이 개발되면서 장창은 완전히 퇴출되고 총의 시대가된다.

선형진은 전열보병의 프로토타입격 전술인데, 16열로 늘어서는 기존 총병대와는 달리 2~3열로 늘어서는 선형진을 선보였다. 하지만 그 시절만 해도 아직 보병 화력이 강력하지 못했던 시절이었기에, 오히려 테르시오에게 당해버려 사장당해 있었다. 선형진과 테르시오가 처음 맞붙은건 '니우포르트 전투'인데, 테르시오의 병사들이 선형진을 거의 밀어내자 자신들이 이겼다고 생각해 전리품 챙기겠다고 대거 전열을 이탈하는 뻘짓을 해서 네덜란드군이 승리했다 (...) 그리고 마우리츠는 이번 전투는 이겼지만, 네덜란드 육군이 스페인 육군을 상대하는건 무리라 여겨 이후에는 회전을 최대한 피했다고 한다.

마우리츠식 선형방진의 전면적 보급을 확고히 한 것은 플러그식 총검의 등장이었다. 이것으로 기존의 이 가지던 임무는 자연스럽게 머스킷에 적용될 수 있었고 안그래도 점점 줄어드는 추세였던 파이크가 총으로 완전히 대체되는 계기가 되었다.[4] 때문에 창과 총을 겸하는 당대 "최고의 무기"인 총으로 "최선의 전투방법"을 찾다보니 어느새 전열을 갖추고 사격을 주고받게 된 것이었다. 산개가 원칙인 현대 보병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이해가 힘들다면, 총을 창의 대체재라고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진형을 이루고 창검을 맞붙이는 중세 백병전에서 냉병기를 그저 총으로 대신했다고 생각하면 저런 선형진을 이해하기가 쉽다.

여기에 대포의 정확도와 구경이 증가하면서 이전처럼 밀집 대형을 이루면 순식간에 몇십명이 몰살당할 가능성이 늘어났고, 창과 달리 총은 최대한 많은 수가 동시에 발사할때 화력이 나오기 때문에 대형은 2~3열 정도로 얇아지면서 대신 횡대로 길게 늘어나게 되었다. 기술 발달로 매치락플린트락으로 대체되어 12열씩 늘어서지 않고도 3열 이내에서 순차적으로 장전-사격을 나눌 수 있게 된 점도 한 몫 했다.

3 전열보병은 왜 이렇게 싸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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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트누아 전투(1745년)에서 서로 먼저 쏘라고 양보하는 영불 양군

요즘 상식으로 생각해보면 전열보병들의 전투 방식은 코앞에 적을 두고 일렬로 마주서서 을 쏘는, 어찌보면 매우 신사적이고 어찌보면 몹시 멍청하고 미개한 우스꽝스러운 방식의 전투이다. 실제로 퐁트누아 전투에서는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서로 먼저 쏘라고 선빵을 양보하는 웃지 못할 광경까지 연출되었다. 진위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는 이야기지만, 볼테르에 따르면 영국 제1 보병 근위연대(1st Foot Guards)의 사령관 찰스 헤이 경(Sir Charles Hay)은 "프랑스 근위 연대의 신사들이여 먼저 사격하시오"앞에는 죽으라는 건가? 라고 권했고, 이에 프랑스 장교 드 안테로셰 백작는 "말씀은 고맙지만 우리는 먼저 사격하지 않겠소. 그쪽이 먼저 사격하시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당시 1열에 서있었던 병사들 입장에서는.... 이새끼들이?

결국에는 영국군이 먼저 사격해서 프랑스군의 1열이 증발해버렸다.(...) 그런데 퐁투누아 전투에서 이긴 건 사격을 양보한 프랑스군이었다. 당시는 '상대의 총신을 비운 후 우리가 더 가까이 가서 사격하면 우리쪽 명중률이 더 높게 나오겠지?' 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행동하는 장교도 꽤 있었다고 한다. 물론 순차사격술이 퍼진 뒤엔 이런 일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래서 "당신이 먼저 쏘라"라는 말은 동양의 송양지인(宋襄之仁)과 비슷한 뜻으로 쓰인다. 오늘날의 상식으로 생각해보면 흩어져서 엎드려 쏘면 간단히 이길 수 있을 것을 굳이 열 맞춰서 마주 서서 쏘려고 하는 것이 쓸모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런 전투 형식이 고집되었던 것은 엄연히 이유가 있었다.

3.1 근본적인 원인 1: 머스킷의 근본적 한계와 전장의 특성

흔한 편견과 달리 머스킷이 그렇게 정확도가 떨어지는 무기는 아니다. 머스킷이 너무 안 맞아서 엄폐가 필요없다거나 목표물에 대고 쏴야 맞는다는 과장된 말은 오해거나 훈련 강도가 대체로 낮았던 당시 병사들의 투정에 불과하다. 만약 머스킷이 그 정도로 명중률이 나쁜 무기였다면 애당초 대량으로 보급되지도 않았을 것이며, 민간에서 사냥도구로써 활을 밀어내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그 예로 명나라에서는 화승총의 명중률에 감탄해서 나는 새도 쏘아 맞춘다는 의미로 조총이라 불렀다. 물론 사냥의 경우 20m 내외의 근거리에서 행해지며, 활보다는 총의 화력이 뛰어나기에 대체한 측면도 고려되어야 하지만.[5]

다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이미지 처럼 시궁창은 아니라는 뜻이지 수십미터의 근거리를 벗어나면 탄도의 불안정이 심해져 명중률이 떨어지며 1747년에 발표된 벤자민 로빈스의 논문에 따라 발사체의 명중률을 올리기 위한 강선(라이플)과 유선형 탄환을 도입한 후대의 소총과 비교하면 민망하기는 하다. 그렇다 해도 숙련된 사수의 손에 들어가면 약 70~80미터 정도 거리의 사람 몸통 크기의 목표물을 조준사격으로 명중시킬수 있는 수준이었다. 유투브에서 머스킷 사격 영상들을 살펴보면 흔히 생각하는것보단 명중률은 높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명중률과는 달리 훈련이나 기타 노력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그 구조에서 나오는 본질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머스킷의 장전 방식과 속도였다. 우선 전장식 머스킷은 길다란 관의 열린 끝에서 막힌 끝까지 화약과 총알을 쑤셔넣는 방식으로 장전을 한다. 그나마 화약은 흘려 넣기만 하면 되지만, 탄환은 굴러나오지 않도록 가죽끈으로 감싸 넣다보니 총구에 꽉 막혀 잘 들어가지도 않았다. 따라서 선 채로 장전하면 중력이 장전을 도와주지만, 은엄폐를 위해 엎드리거나 누운 채로는 사실상 장전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아무리 빨리 장전하더라도 머스킷의 발사 속도는 훈련상황과 같은 최적의 조건에서조차 1분에 2~3발이 한계였으며, 방아쇠 한번 당긴다고 반드시 격발된다는 보장이 있는 물건도 아니었으므로 연사속도는 더 느려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공격 속도가 느린 보병을 산개해서 배치하면 적의 기병이나 수백명씩 떼지어 착검돌격하는 적 보병에 대한 저지력을 갖추지 못해 각개격파되어 전멸당하게 된다. 즉 전열을 갖추는 것은 단순한 화망구축뿐이 아니라 중세시대의 파이크방진과 같은 역할도 겸하고 있었던 것. 이런 상황에서는 촘촘한 진형의 유지 그 자체가 부대의 생사를 가르므로 나폴레옹의 말처럼 제식이 곧 전투력이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흑색화약 자체가 엄청난 양의 매연을 발생시키기 때문에 많은 수의 병사들이 두 세번만 사격을 주고받아도 한 치 앞도 못 볼 정도로 시계(視界)가 제한되기 마련이었다. 즉, 조준사격을 하고 싶어도 적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전장 상황 때문에 사격의 효과를 확률적으로 극대화 할 수 있는 면 단위 사격으로 적을 제압하는 방식을 사용하게 되었다. 사실 보병을 제압할 수 있는 수류탄이 있긴했지만, 현대의 수류탄과는 달리 사용하기가 까다로웠고 무게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척탄병들이 따로 존재했을 정도였던지라.

물론 이런 밀집진형은 포병의 공격에는 더 심대한 타격을 입을 수 있지만 당시의 대포도 머스킷처럼 전장식 형태에 주퇴복합기도 없었으므로 연사력이 형편없었다. 거기다 사용하는 탄환도 볼링공과 같은 거대한 쇠공 그 자체였으므로 기병이나 보병의 돌격으로 진영 전체가 쓸려나가는 것보다는 일직선만 날라가는 대포가 훨씬 견딜 만한 공격이었다. 물론 이건 지휘관의 입장이고 일반 병사 입장에서는 피하거나 방어해볼 기회도 가지지 못하고 대열속에서 죽어야하니 이전시대보다 더 암울했겠지만(...)

그러므로 위에서 언급된 퐁트누아 전투의 사례에서 서로 선빵을 양보한 것은 단지 겉멋든 신사들의 허영 때문이 아니라, 상대방이 먼저 쏜 뒤에 장전하느라 한 자리에서 멈춰 서 있으면 그만큼 이쪽은 더 전진해서 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리가 가까워지면 당연히 전열에서 뿜어내는 탄환의 밀집도도 올라가기 때문에 더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항목 맨 위에 걸려 있는 패트리어트의 전투신에서도 먼저 사격한 대륙군은 영국군에게 그다지 큰 피해를 입히지 못한 반면, 영국군이 피해를 감수하고 대륙군이 장전하는 동안 더 다가가서 사격하자 한번의 일제사격으로 큰 피해를 입고 전열이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프렌치-인디언 전쟁 중 퀘벡 전투에서도 영국군은 프랑스에게 선제공격을 받으면서도 적을 18미터 안까지 끌어들인 다음에 발포하여 프랑스군 중앙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다고 한다.출처 '신사들의 허영'도 사실은 어느 정도 합리적인 판단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전열보병과 동시대에도 산개대형으로 은엄폐한 채 조준사격을 하는 경보병은 존재했지만, 이들 역시 엄폐물이나 아군의 엄호가 없는 독자적인 행동은 적병의 먹잇감일 뿐이었다. 때문에 산개한 경보병 부대들은 정찰과 교란 용도로나 쓰였으며, 회전 이전에 선두에 서서 본대인 전열보병의 움직임을 가리거나 보조하는 정도였다. 이들조차 필요할 때는 산개하는 대신 밀집전열을 짜고 교전하는 것을 선호했다.

강선이 적용해 명중률이 획기적으로 개선된 신형 라이플이 대량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이후에도 전열은 계속 유지되었는데, 이 역시 단순히 소총의 명중률이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전장식 소총의 화력 한계가 더 본질적인 문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강선이 파인 전장식 총은 장전속도가 더 시궁창이 된다. 탄이 강선에 맞물려야 되니까 총구보다 큰 탄환을 쓰거나 총알에 헝겁을 감기도 했다. 미니에 탄의 발명으로 이 또한 극복되긴 하지만 그래봤자 강선이 파이기 전의 속도로 돌아갔을 뿐이고 후장식 소총에 비하면 여전히 연사력은 형편없었으니 전투교리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고 전열보병은 이후로도 이어져갔다.

3.2 근본적인 원인 2: 돈

사실 이 시절에도 군대는 '숙련된 사수'를 구하거나[6] 키워서 운용해왔다. 이렇게 군대에서 경보병의 전투력을 이해하고 있었음에도 전열보병이 여전히 군대에서 주축을 담당했는데, 사실 돈 때문이다(...)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예산이다

대규모 상비군 체계로 전환된 당대 유럽에서는 십만 단위로 급격히 증가한 군대에서 화약을 대량으로 소모하는 사격훈련은 비효율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 당시는 화약이 엄청난 고가품이었고 재료수급의 문제로 생산량 자체가 제한된 물품이었다. 화약을 만드는 공정은 까다롭고 복잡한 과정이었으며 안정성 문제로 사고의 위험도 높았다. 또한 그 재료중 하나인 초석은 구하기도 상당히 힘든 물건으로 신대륙의 구아노와 초석광산을 개발하기 전까진 동양이나 서양이나 크게 다를건 없었다. 덤으로 수발식 총의 부싯돌 또한 30회 정도 사용하면 갈아줘야하는 소모품이었다. 이러다보니 화약이나 수석같은 물품들은 실전을 위해 비축해두는 게 당연했고 그 당시 사격훈련이란게 달랑 장전연습과 화승총의 지향연습이 전부인 상황까지 나타나게 된다.

프랑스군의 경우 장전하지 않은 총으로 사격연습을 하면서 부싯돌 대신 나무조각을 끼웠을 정도였으며, 당대에 실사격으로 훈련을 한 국가는 신대륙 개발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은 영국 밖에 없었다.대영제국의 돈지랄 이런 실탄훈련은 꽤 효과가 좋아서 영국군 특유의 씬 레드 라인 전술이 가능하게 해줬고 레드코트는 그 시대를 주름잡는 군대가 되었다.[7]

그리고 이렇게 단순해진 훈련으로 인해 남는 시간에 대부분의 군대는 제식훈련과 군기를 이유로 병사들을 마구 두들겨팼다. 그 이유는 열에서 벗어나면 확실하게 지휘관에게 죽지만 전열을 유지하면 기적적으로 살 확률이 있다는 걸 머리에 각인시켜주기 위해서(...). 결국 그 당시 열강들은 제한된 자원과 예산으로 사격훈련을 해 소수에 병사들 개개인의 전투력을 올리기 보다는 돈이 안드는 훈련으로 자신을 노리는 총구앞에서도 서서 버티는 정신상태를 가진 다수의 병사를 만들겠다는 결정을 한 것이다. 수십 미터의 간격을 두고 줄지어 선 상태로 서로 총질을 해대는 환경을 견디게 하는 훈련이 얼마나 가혹할지는 뻔한 일이다. 이렇게 대우가 시궁창이 되다보니 병사를 기피하게되고 그 수를 채우기 위해 상당수를 죄수나 부랑자 등으로 채워넣어야 했는데, 그렇다보니 군기나 사기 등의 문제가 심화되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더 강력한 체벌이 필요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기도 했다.

3.3 부수적인 원인: 병사들의 낮은 사기?

전쟁사 서적 등에서는 전열보병들이 방진을 이루어 싸운 이유 중의 하나로 군인들의 낮은 사기를 드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는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다.

확실히 전근대~근대 초기의 많은 국가에서 병사들의 충성심이나 사기가 영 믿을 만하지 못했다. 영국과 프랑스[8]를 제외하고 당시에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나 소속감을 일으키는 민족주의가 퍼져있는 나라는 없었다. 개인은 국가를 이루는 구성원이 아니었으며 과거 18세기 초 유럽 국가의 병사들은 대부분이 하층민 출신이었다. 생존 이외에는 딱히 싸워야할 이유가 없었던 이들은 당연히 사기가 그다지 높지 않았고, 이들을 지형을 이용해 엄폐하도록 산개시켜둔다면 전투가 벌어지기 전이라든가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지휘관의 통제가 느슨해질 경우 병사들이 모두 도망쳐 부대가 와해될 가능성이 충분했다.

현대의 군대도 이 점은 마찬가지 아니냐고 할 수 있는데, '피지배 계급'이 "나라를 위해 싸운다"는 의식을(즉 '피지배 계급' 자신도 국가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이 시기와,[9] 대부분의 국민이 자기가 사는 나라를 "자신의 나라"라고 여기는 민주화된 현대의 국가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이러한 단적인 예가 약탈을 통한 보급인데, 일반적인 편견과 달리 중/근세시대에는 이걸 제대로 못했다. 약탈하러 보낸 병사들이 탈영하는 상황을 꺼렸기 때문이고 실제 당대 탈영율은 지금보다 훨씬 높았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높은 기동력을 가질 수 있던 이유의 하나가 사기 높은 시민병은 약탈하러 보내도 탈영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장교들이 귀족층이라는 것도 이런 생각을 크게 부채질했다. 신분제 사회가 당연했던 시대인지라 귀족들은 명예를 아는 우리는 전장에서 용감하게 싸우겠지만 명예와 부끄러움도 모르고 범죄자 출신에 거짓말쟁이인 병사들은 그냥 내버려두면 쉽게 도망치겠지?"'라는 시각으로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때문에 당시 장교들은 같은 나라 출신인 자기 휘하의 병사들보다 적국의 장교를 더 신뢰했다고 한다. 유럽 귀족들은 서로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라틴어를 교양어로 썼으므로 언어적 장벽도 크지 않았다. 문화적으로나 혈연적으로 따지고 들면 자국 백성들보다 적으로 만난 타국의 귀족이 더 가까웠던 것이다. 물론 여기서 신뢰했다는 의미는 약속을 어기지 않을 존재로 여겼다는 점이다.

게다가 19세기만 해도 '영국 안에는 두 개의 나라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므로, 신분제에서 비롯되는 사관과 병사간의 불신 문제는 매우 심각했다. 이 불신 문제는 절대로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그리고 전쟁 양상이 변화함에 따라 전열보다는 산병전이 더 나은 상황도 곧잘 발생했지만 이 때에도 지휘관들은 계속 전열을 고집했고 산병 상황을 훈련시키지도 않아 많은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미국 독립전쟁 당시의 미닛맨같은 경보병의 유격전에 정석적인 전열보병은 의외로 취약했기 때문에, 결국 나폴레옹 전쟁 후반기에는 그 영국군에도 그린 자켓(Green Jackets)과 같은 경보병 부대가 만들어지게 된다.

하지만 초기와 달리 시간이 지나며 프랑스 혁명 이후 민족주의의 고취와 고참병들로 이루어져 사기가 충천했던 프랑스 제국 근위대[10]는 어김없이 전열을 이루어 싸워도 도망가지 않았으며 거의 완벽히 근대적인 국민국가의 병사들이 상당수 자의로 참전한 남북전쟁이나 보불전쟁에서는 여전히 전열이 유지되어 혁명 이후 프랑스군과 같이 병사 개개인의 사기가 높은 군대나, 영국군처럼 돈지랄로병사들의 훈련 수준이 높은 군대의 경우 당대의 경직된 다른 군대에 비해서 상당히 유연한 대형(지형지물을 이용한 산개 대형이나 빠른 돌격을 위한 느슨한 종대 대형)을 사용하기 수월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들도 야전에서 적과 화력으로 맞서야 할 때는 일반적인 횡대로 전열을 짜 싸웠다. 이는 상기된 대로 머스킷이라는 화기의 근본적인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며 장전속도나 명중률이 훨씬 높은 후장식 소총으로 무기체계가 넘어가고 나서도 전열은 유효했기에 오랬동안 존속되었다.

결국 '병사들의 낮은 사기'는 전열보병이 이루어지게 된 부수적인 원인일 뿐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3.4 전열보병의 싸움은 단순한 소모전이었나?

전열보병끼리 기동할 공간이 딱히 없는 좁은 전장에서 소규모 제대끼리 싸울 때, 혹은 전술도 모르는 멍청한 지휘관들끼리 맡붙었을 때는 그야말로 양쪽이 서로 무너질 때까지 총을 쏘다가 한쪽의 전열이 무너지면 총검돌격으로 마무리되므로 마치 소모전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전열보병의 시대가 바로 인류사상 최고의 전쟁 천재라 불리는 바로 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시대라는 것을 상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병사 하나하나의 입장에서는 이런 전열보병의 전투가 답답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 뒤에서 이를 지휘하는 장군들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그리 단순한 싸움이 아니었다. 우선 통신과 도로 사정이 열악한 당시 기준으로는 전장까지 부대를 이동시키는 것부터가 치밀한 전략적 판단을 요하는 일이고, 회전을 벌일 때에도 전장의 상황에 맞추어 보병들을 기동시키고 기병을 투입시키고 예비대를 활용하는 등 끊임없는 계획이 필요했다. 나폴레옹의 경우 자신이 수적으로 분명히 열세였던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탁월한 지휘력과 부하 장군들의 용전으로 싸움에서도 이기고 사상자도 적군보다 훨씬 적었다. 아우스터리츠 외에도 전열보병 시대의 많은 주요 전투들이 현재까지도 전쟁사 연구가들이나 각국의 사관학교에서 연구과 교육의 대상이 되고 있다. 즉 전열보병의 싸움이 단순하게 보일지라도 아무 의미 없는 머리수 싸움이나 소모전인 것만은 절대 아니었다. 이게 소모전이면 시대를 막론하고 보병전투는 모두 무의미한 소모전이라는 소리와 똑같다.

전열보병의 시대는 전쟁을 개인의 무용이나 일부 지휘관의 카리스마보다는 잘 정비된 보급체계와 관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명료한 보고서에 더 의존하게 만들었다. 전술은 단순한 상황 판단력과 임기응변을 넘어서서 수학적 연산을 요구하는 학문체계가 되었고, 결국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전쟁론과 같은 서적이 나오기에 이른다.

4 훈련

"전열"은 중요했으며, 전열이 무너져 내린다는 것은 그 보병군 전체가 무너져 내린다는 것과 같았다. 1분 1초가 급박한 전투에서 한번 무너진 대형을 다시 가다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전열보병은 머스킷의 조악한 명중률을 집단 사격과 대열을 통해 이를 극복하고 화력을 투사했다. 이를 위한 제식훈련과 행군, 대형 유지는 매우 중요하였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 굉장히 가혹한 군기와 세뇌에 가까운 훈련이 이루어졌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했다고 전해지는 명언 "제식은 전력이다." 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기인한다. 단순히 머스킷의 화력 투사에만 관련한 것은 아니고, 보병의 생존률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이 제식 훈련이다. 길게 횡대로 늘어선 선형진의 경우 적의 포병 세력으로부터 받는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었지만 기병대의 돌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없었고, 보병들이 정사각형 모양으로 진을 구성한 방진의 경우 기병의 돌격을 무력화시키는 데에는 좋았지만 포병들의 사격에는 무력했던데다 대열 또한 좁았으므로 상대적으로 대열이 넓고 더 광범위한 화력을 투사하는 상대 보병의 선형진에 대응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그 때 상황에 맞추어 능수능란하게 진형을 바꿀 수 있어야 했고, 이를 실패할 경우 해당 제대의 생존률은 극도로 떨어졌다.

사실 머스킷의 명중률이 아무리 형편없다 하더라도 겨우 100야드(90m)떨어진 곳에서 서로 마주보고 서서 포화를 교환한다는 것은 정상적이라고 보기 힘들다. 그걸 가능케 하기 위해서 태형이 성행했는데, '100% 죽는 항명을 선택하느니 확률적으로 살 가능성이 있는 전열에 서고 말지' 정도의 수준이었다. 영국군 레드코트들이 겉으로는 멋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태형으로 인해 죽거나 병신이 되는 비율도 상당히 많았다. 채찍질 100대 정도는 기본이고 300대, 500대, 900대 형도 존재했으며 최고는 1200대까지도 가능했다.

다만 유의할 점은 전열보병 시대의 체벌이 어디까지나 장교의 명령에 따라 공개적으로 행해지는 군법상의 형벌이라는 것이다. 규정상의 근거 없이 선임병 혹은 상급자의 기분에 따라 아무 기준 없이 음성적으로 이루어지는 일본군의 닥치고 구타 같은 경우와는 다르다. 또한 태형은 국가별 차이가 커서, 모병제로 병력 자원의 질이 상당히 낮았던 영국군이나 수백개의 나라를 통일해서 만든 봉건적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던 프러시아군 등에서는 태형이 강력했지만 프랑스군의 경우 프랑스 혁명 이후엔 군 내 태형이 아예 금지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기가 잘 유지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기간 모든 국가 모든 병사들이 쓴 플린트락 머스킷의 경우 지금 가격으로 따지면 개당 100만원을 호가하는 생각보다 비싼 무기였다. 현재 국군 제식 소총인 K2 자동소총의 납품가는 처음 생산된 80년대는 30만원 가량이었으나 물가가 오른 2010년대를 기준으로 80만원 정도하니 큰 차이는 없다. 단 당대의 경제력과 현대의 경제력이 차이가 있으니, 당시 기준으로는 비싼 무기인 것이 맞다.

따라서 전투중 머스킷이 불발될 경우의 응급 대처 요령 또한 훈련받았으며, 모든 절차를 밟았음에도 발사가 불가능한 경우, 소대장의 허가를 받고 전열 이탈도 허용되었다. 물론 그러기 전에 보통 죽거나 다친 동료의 머스킷을 이어받는다(…). 다만 전황에 따라서는 그러한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투입되는 경우도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원정 실패 이후 벌어진 전역에서 총을 쏘지 않는 병사에게 마르몽 원수가 이유를 묻자 "쏘는 방법만 알면 쏘겠습니다"라는 답변을 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하사관들의 주 업무 중 하나가, 부상병이나 시체에서 멀쩡한 머스킷을 수습해 자기 머스킷이 맛갔다고 손드는 병사의 것과 교체해주는 것이었다.

5 쇠퇴

전열보병의 전투 방식을 만들어낸 각 요인들은 19세기 중반 이후 기술의 발전과 사회 변화를 통해 하나 하나 제거되었다. 총기의 낮은 명중률은 라이플과 무연화약의 등장으로, 느린 장전 속도는 후장식 소총의 등장으로, 낮은 사기의 병사들은 강도 높은 훈련을 받는 지원제 상비군의 등장으로 사라지면서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보어전쟁에 이르면 산개 대형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전훈이 확실하게 자리잡게 된다.

하지만 보어전쟁 이전인 남북전쟁에서도 전열보병식의 전투 방식에 대한 회의가 일어났다. 이 당시 남군이나 북군의 일부 부대는 후장식 소총으로, 심지어 연발 소총으로 무장한 부대도 있었고, 총알이 많이 낭비된다는 이유로 지급한 전장식 제식 소총도 뇌관식 적용에 미니에탄을 써서 발사속도나 명중률이 크게 향상된 상태였다. 물론 장교들은 세이버와 연발이 되는 리볼버로 무장했다. 역시 우리의 주적은 간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교리는 그대로여서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이 전쟁에서 희생된 사상자의 숫자는 훗날 1차, 2차 양차대전에 희생된 미군의 숫자보다도 더 많을 정도였다[11] 이 때문에 미국 의학계는 남북전쟁을 계기로 크게 발전했다는 말도 있을 정도다. 틀리지도 않는게 총상환자가 널리고 널렸으니...

이후 제1차 세계대전에서 기관총이 본격적으로 실전에 투입되면서 밀집 대형을 유지하는 것은 자살 행위가 되었으며 실제로 19세기식 구식전술과 지휘관들의 감투정신으로 인해 많은 전투에서 참호에 설치된 기관총을 향해 무작정 전진하다 떼죽음만 당하는 상황이 종종 연출되기도 했다. 이후 전쟁 후반기 본격적으로 제병협동전술이 발달하게 되면서 전열보병은 완전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전열보병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 특유의 각잡힌 멋은 어느 나라에서나 군인의 이상적인 모습으로 각인되었고, 제식을 통한 집단행동은 소속부대원간의 유대감이나 부대에 대한 소속감을 느끼게 해주며, 명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버릇을 몸에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총알을 한 탄창에 30발씩 넣으면서 1초에 12발씩 쏟아내는 돌격소총이 판치는 오늘날에도[12] 군대의 열병식이나 '받들어 총'으로 대표되는 제식동작, 그리고 군대의 예식이 있을 때 입는 정복 및 예복 등에 전열보병 시대의 흔적이 면면이 남아 있다.

당연한 소리지만 정신만은 본받을지언정 전열보병 전술 자체를 부활시키는 경우는 없었다. 20세기 이후의 기술력이 판치는 전장에서 전열보병 전투방식의 열화카피 같은 짓을 해서 시원하게 망한 일본군 빼고. 정신을 받들어도 너무 받드는 바람에...

2504년 코프룰루 구역저저전에서 하였다.

6 이 시대 각국의 군복

전열보병 시대의 군복은 위장이 아닌 아군 구별과[13] 사기 증진이[14] 목표이기에 당시 유럽 군사들은 다들 각자 색깔을 정해서 화려하게 차려입었다. 이때의 군복에다가 가슴에 흰색 끈으로 친절하게 / 혹은 X자로 차려입은건 여기에 쏴달라(...)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여기 있다는 의미다. 즉 연기가 자욱한 전장에서 지휘관에게 위치를 알려주고 아군들에게는 적군과 구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 영국


통칭 레드 코트. 이 분야에서는 가장 유명할 것이다. 이름대로 제복은 붉은색 계열. 왜 붉은색이였냐 하면 당시 붉은색 염료가 가장 가격이 쌌기 때문. 하지만 해군과 특수 병과는 파랑, 경보병은 녹색을 입었다고 한다. 위 짤에서는 시대별 변화상을 볼 수 있는데, 18세기에는 샤코를 쓴 모습을, 19세기 초에는 스펀툰을 든 모습 등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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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
영국 경보병. 단, 모든 경보병이 이런 녹색 제복을 입은 것은 아니며 레드코트를 입은 경우도 많았다. 저 녹색 제복은 경보병 중에서도 라이플 연대만 입었다. 일반적인 머스킷이 아니라 강선이 파인 베이커 라이플[15]로 무장했고 전열을 이루어 싸우기보다 산개대형으로 유격전을 벌였다. 흔히 그린 재킷이라고 불렸고 정예병 취급을 받았다. 위의 샤프 대령의 제복을 보면 이 제복이다. 원래 제95 라이플 연대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무려 91m에서 274m에 달하는 교전거리를 자랑했고 나폴레옹 전쟁이베리아 반도 전쟁에서는 토머스 플렁켓이라는 병사가 600m에 달하는 거리에서 프랑스의 오귀스트 마리 프랑수아 콜베르 장군을 저격하는데에 성공했다. 당시 전열보병들이 쓰던 머스킷 수준이 50m 밖에서 명중을 보장하기 어려웠다는 점을 상기하자. 이렇게 뛰어난 명중률이 보장되었으니 밀집대형보다 산개대형을 선호한 것이고 허용된 것이다. 여담으로 일반적인 전열보병의 총검과는 달리 21인치(53.34cm)짜리 대형 총검이 지급되었는데 라이플이 일반적인 머스킷보다 짧을 뿐더러 워낙 재장전이 늦다보니 자위용 무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요즘 미군 보병들이 권총을 따로 들고 다니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단 이 총검은 일반 전열보병들의 총검과는 달리 단독으로도 써먹을 수 있는 물건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사실상 숏소드 정도의 물건을 따로 들고 다닌 셈. 일반적인 머스킷에 장착하는 총검은 단독으로 쓰기엔 좀 어려운 소켓식 총검인 경우가 많았다.

  • 프로이센


나폴레옹 전쟁 후반기 프로이센군의 모습. 프로이센은 주로 파랑/진녹색 계열의 군복을 착용했다고 한다. 프러시안 블루가 여기다가 쓰려고 나온 색. 짤에서 Musketiere('머스킷총병'의 복수형)로 쓰인 보병들이 전열보병. 여담으로, 나폴레옹 전쟁 중반부의 군제개혁 이전에는 양각모(bicorn hat)를 착용했었다.

  • 프랑스


나폴레옹 전쟁프랑스군 병사들. 프랑스 역시 파랑의 군복을 착용. 좌측부터 경보병인 볼티져(Voltigeur), 전열보병인 퓨질리어(Fusilier), 정예 전열보병인 척탄병(Grenadier), 뒤에 깨알같이 선 2명의 스위스 보병(Suisse) 앞치마를 입고 도끼를 든 공병(Sapeur, 영어의 Sapper를 생각하면 된다.), 북을 든 척탄병 드러머다. 이 외에도 프랑스 제국 근위대 문서를 참고하면 당대 프랑스 전열보병의 모습을 좀 더 볼 수 있다.

여담으로, 나폴레옹 전쟁기 이전의 프랑스군 전열보병은 부르봉 왕가의 상징색인 백색 군복을 입었다.

  • 오스트리아


역시 나폴레옹 전쟁 초기 전열보병의 모습으로, 이 당시에는 그림에 나온 것과 같이 헬멧을 착용하였으나, 1808년의 군제개혁 이후에는 샤코를 착용하게 된다. 오스트리아는 흰색의 군복을 착용해서 특이한 경우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작센스페인, 상술된 프랑스 혁명 이전의 프랑스 왕국, 나폴레옹 휘하의 이탈리아 출신 보병들도 흰 색의 군복을 착용한 것을 보면 그리 특이하다고 볼 수 없다. 그리고 부대 지휘관을 비롯한 하급 통솔장교들은 검정색 코트에 금빛 복대를 착용했기 때문에 유독 장교가 눈에 띄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작센군의 경우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일 때 프랑스 측에서 싸웠다. 그리고 앞서 말했던대로 작센군이 회색군복을 입었는데, 문제는 전시에는 흰색과 회색을 분간하기 어려웠다는 점. 결국 바그람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오스트리아군으로 오인받아 오스트리아군과 프랑스군 양측에게 사격을 여러번 당해서 전열을 무너뜨리고 패주한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그러니까 오스트리아군과 싸우다가 수적으로 밀려 프랑스군 쪽으로 퇴각했더니 프랑스군이 작센군을 오스트리아군으로 오인하고 신나게 쏴제꼈던 것.

게다가 뒤에서는 진짜 오스트리아군이 추격하며 역시 신나게 쏴제끼고 있었다. 그러니까 프랑스군도 작센군을 아군으로 쓸 생각이 있었다면 자기네 푸른 제복을 줬어야 했다. 군복의 통일과 제식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부분. 하지만 전성기에는 50만이 넘었던 대육군 군복도 챙겨주기 힘든 마당의 다른 나라 제식 군복까지 입혀줘야하는 것은 무리라고 볼 수도 있다. 영국은 반도전쟁에서 포르투갈 보병에게 영국 군복을 입혀줬는데...?

  • 오스만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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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라클라바 전투당시 오스만군 전열보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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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 전쟁 당시 오스만군의 모습을 그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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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오스만-그리스 전쟁 당시 전열보병의 모습

본래 오스만 제국에는 전열보병의 개념이 없었다. 초기 오스만 제국 시절에는 경기병 위주의 전술이 성행했으니 그렇다 쳐도, 17세기 이후 오스만 제국이 유럽영토에서 징집한 보병들을 활용하기 시작한 이후에도 한동안 오스만 제국은 서구 군사전술의 도입에 적극적이지 않았으며, 전통적인 방식대로 머스킷조차도 화망형성이 아닌 조준사격 위주로 활용해왔다.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과 그리스 독립전쟁에서 쓴맛을 본 이후, 그리고 니자므 제디드 등의 서구식 군제개혁에 매우 저항이 심했던 예니체리가 혁파되고 나서 이루어진 탄지마트 이후 오스만 군도 프랑스군과 영국군의 영향을 받아 전열전술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보다시피 상당히 늦은 시기의 일이다. 남들은 뇌관식 소총에 연발소총에 관심쏟는 마당에 이제서야 전열전술이라니(...) 하지만 후기 오스만 제국이 상대했던 나라들이 다행스럽게도(...) 오스만 제국과 비교했을때 전술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우위에 선 나라가 없어서 후기 오스만 군대의 전열보병 전술은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발칸 전쟁 직전까지 군복개혁도 안한채 전열전술을 고집하다가 피를 보게 된다(...)

오스만 전열보병의 복식은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남청색 군복을 입었으며 여기에 탄지마트 개혁 이후 착용하기 시작한 페스 모자를 썼다. 출신지역에 따라 복식이 다른데, 아랍 징집병들은 주아브부대처럼 헐렁헐렁한 바지를 입었고, 알바니아, 북부 그리스, 발칸 징집병들은 푸스타넬라(Φουστανέλα)라는 치마 비슷한 옷을 입은게 특징이다.
  1. 근대 이후 양차세계대전처럼 몇 개 국가에 걸쳐 대규모로 나타나든, 전근대 시절에 벌이는 회전에서 두 군대가 맞붙으면서 형성되든, 해상에서 전근대의 함선들이 맞붙으며 만들어지든간에 두 세력의 접전 결과 만들어지는 그 '선'은 모두 다 'line of battle/battle lines'로 불린다.
  2. 화망은 매우 중요했는데, 이 시기의 머스킷이나 화승총의 진정한 화력을 유도하게 하기 위해선 화망이 중요했다. 신미양요때 조선군의 화승총은 제대로된 화망구성을 못한채 개별사격에 의존했고, 그 결과 미해병대가 200m를 자유로이 전진하는데도 2명밖에 부상당하지 않았다.
  3. 물론 프랑스에서는 폴란드 창기병 같은 창기병 운용을 선호해서 대기병전, 대포병전, 대보병전 할거없이 가리지 않고 썼지만, 과거의 그 무거운 랜스의 활용은 사라졌다.
  4. 이 때문에 초기의 머스킷의 정착과정에서 머스킷은 창의 대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근대 총검술의 근간이 된건 창술이었고, 중국에서는 지금도 총을 창이라고 부른다.
  5. 문서 상단의 패트리어트 영화를 보면 미국 시민병들 일부가 발사 순간에 고개를 돌리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은 단순히 화약 연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다. 반대편의 레드코트들은 표정 하나 안 바뀌고 잘만 쏘고 있다. 현대전에서도 상당수의 병사들은 전투상황에서도 같은 인간을 향해 조준사격을 하는 것에 심리적 저항감을 느끼거나 또는 적의 위협에 공포를 느끼고 대충 지향사격만 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당연히 총알을 아무리 퍼부어도 명중률이 낮게 나올 수 밖에 없다. 과거의 엽병이나 현대의 저격병들은 마인드 트레이닝이 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꽤 차별화가 되는 것이다.
  6. 유럽 각국은 평소에 사냥으로 총기를 항상 다루고 그만큼 숙련이 된 사냥꾼들을 징집하여 샤쇠르예거 같은 엽(獵, 사냥 렵)병부대로 편성하여 군의 정예부대로 운용했다.
  7. 영국 육군의 규모가 다른 유럽 나라들에 비해 작은 것이 한 몫 했으며, 씬 레드 라인은 산업혁명 후인 크림 전쟁 때의 일화이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엔 미국이 독립한지 꽤 됐기에 신대륙 개발을 통한 부는 영국군의 사격훈련에 전혀 상관 없었다.
  8. 두 국가의 국민 모두 백년전쟁 이후 국가개념을 인식하게 된다.
  9. 프랑스 혁명 당시 유럽의 수많은 나라들이 프랑스에 대항해서 연합했는데, 이는 프랑스를 가만히 놔두면 나라는 왕의 소유물이 아니다라는 다른 나라의 왕들이 보기에는 해괴한 사상이 유럽 전체로 퍼질 것이라는 걱정이었다. 그리고 이 때 프랑스를 조지러 출정한 군대들은 프랑스 국민들이 왕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나라를 위해서 싸우는 장면을 보고 아주 크게 멘붕했다.
  10. 워털루 전투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고참 근위대는 항복하느니 대포알 맞아 죽는 쪽을 선택한 인간흉기들이었다.
  11. 물론 전쟁 후반부로 가면 전열보병식 전투를 포기하는 부대가 늘어난다. 숲같이 엄패물이 많은 곳에선 병사들이 알아서 몸을 사렸고, 평지에서도 참호를 파는데 몰두했다. 심지어 전장식임에도 최대한 엎드려서 사격하고 장전하는 병사들도 나타났다. 이 때문에 남북전쟁을 참관하러 온 유럽의 무관들은 "양키들 싸우는 거 하곤 ㅉㅉ"하고 비웃었다. 그러나 수십년 후 유럽도 참호전을 겪게 된다. 그래서 남북전쟁은 근대전의 시초로 여겨지기도 한다.
  12. 라인배틀 시절의 관점으로 보면 이거 모든 병사들이 개틀링을 들고 뛰어다니면서 싸우는 거나 마찬가지다. 실제로 라인배틀 시기의 기관총의 정의를 그대로 적용하면 모든 돌격소총은 기관총이 된다!
  13. 흑색화약은 터질 때 연기가 심하게 발생하기에 화약 연기가 자욱한 전장에선 피아구별이 쉽지 않았다. 또한 지휘관이 멀리서 병력 상황을 잘 파악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기도 했는데 당시에는 통신수단이 없었던데다가 연기 속에서 피아구별하는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색을 많이 썼다.
  14. 근대 시대에 멋진 군복은 군대에 지원하는 동기가 되기도 했다. "군대에 가면 번쩍거리는 칼도 차고 저렇게 멋진 옷도 입을 수 있구나!"는 생각에 지원하는 사람이 의외로 적지 않았던 것.
  15. 사실 후대의 혁신적인 후장식 소총같은 물건은 이니고 플린트락 방식의 강선 파인 머스킷으로 보는 편이 맞다. 자세한건 라이플 문서를 참고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