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오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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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야오밍(요명, 姚明)
생년월일1980년 9월 12일
226cm[1]
체중140.6kg
포지션센터
드래프트2002년 NBA 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
휴스턴 로켓츠에 지명
등번호11번
소속팀휴스턴 로켓츠(2002~2011)
수상내역All-NBA Second Team 2회
All-NBA Third Team 3회
NBA All-Rookie First Team (2003)
FIBA Asian Championship MVP (2001, 2003, 2005)
상하이 샤크스 영구결번
No. 15

1 개요

부상 없이 선수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면 그가 NBA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센터 다섯 명에 드는 위대한 선수로 기억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2]

샤킬 오닐 . 야오밍의 은퇴식 헌사.

역대 최고의 아시아 농구선수.
아시아 불세출의 센터
그리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최초의 아시아선수
NBA선수. 이름에서 알수있듯이 중국인이며, NBA드래프트 역사상 최초의(사실상 최후의) 아시아 출신 1라운드 1순위 지명자이다.[3][4] 참고로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역시 키가 크다. 아버지의 키는 208cm, 어머니의 키가 190cm. 두 사람 다 전직 농구선수 출신이다.

야오밍은 이런 부모의 유전자를 받아서 태어났다. 태어날때 몸무게가 5kg이었고 10살때 키는 165cm였다. 13세때 상하이 샤크스의 주니어팀에 입단하면서 농구선수의 길을 걷게 된다.

2 샹하이 샤크스

야오밍은 매일 10시간씩 연습하는 강행군을 치르며 4년동안 주니어팀에서 뛴다. 17살때 성인팀으로 승격되면서 본격적으로 성인무대에 데뷔한다. 야오밍은 루키시즌에 평균 10득점 8리바운드를 기록하면서 준수한 활약을 보였지만, 다음시즌에 발이 골절되는 부상을 입으면서 한경기도 뛰지 못했다. 이때 야오밍의 제자리점프는 10에서 15센티 정도 줄었다고 한다.

하지만 세번째 시즌 네번째 시즌에 팀을 CBA 파이널에 올리는 등의 공을 세운다. 하지만 당시 중국최고의 농구스타 왕즈즈가 버티고 있던 빠이 로키츠(상무처럼 군인팀)에게 패배해 두번이나 준우승에 머물렀다. 하지만 2001년 왕즈즈가 NBA로 진출하면서 빠이 로키츠가 약화되자 바로 그해 결승전에서 빠이를 꺾고 CBA 챔피언이 된다. 샹하이 샤크스의 현재까지 유일한 우승. 이때 야오밍은 플레이오프 기간동안 평균 38.9점 20.2리바운드 76%의 필드골 성공률을 기록하면서 맹활약했다. 여기에 2001년에 아시아 선수권 대회에서 MVP까지 차지하면서 그는 NBA의 많은 팀에 관심을 받게 된다.

3 NBA 커리어

야오밍은 NBA에 진출하고픈 욕망이 강했다. 1라운드 1순위 지명권을 가지고 있던 휴스턴 로켓츠역시 야오밍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중간에 CBA와 야오밍의 원 소속팀이었던 샹하이가 야오밍의 NBA진출을 막으려고도 했지만[5] 이것도 여차저차해서 해결은 되었다. 야오밍 본인은 사비를 들여서 미국으로 건너갔고, 미국에 도착한 바로 다음날 프리 드래프트 캠프와 시카고 불스와의 워크아웃을 치뤘다. 하지만 시차적응도 제대로 안된 상태에서의 워크아웃은 독이었고,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6]

드래프트 당일에도 그에 대한 평가는 반반이었다.[7] 하지만 휴스턴은 하킴 올라주원시대의 재건을 꿈꾸면서 그를 1순위로 지명한다. 처음에 야오밍을 지명하는것을 별로 탐탁치않게 여겼던 스티브 프랜시스는 막상 그가 팀에 합류한 첫날에 그를 반갑게 맞아주웠고 친한 친구가 되었다.

NBA적응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2002년 6월 말에 드래프트되어 4개월 동안 NBA 준비를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중국 국가대표로 뛰느라 NBA 적응할 시간을 날릴 수 밖에 없었으며, 국제대회의 경험은 어느정도 있었지만 NBA의 거칠고 빠른 농구를 경험해보지 못한 야오밍은 NBA에 빠른 적응을 못했다. 드래프트때부터 야오밍을 씹어대던 찰스 바클리는 그것보라는 듯 TNT방송의 Inside The NBA에서 "만약 야오밍이 한경기에서 19득점 이상을 하면 내가 케니 스미스 엉덩이에다 키스를 하겠다." 폭탄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8]

하지만 2002년 11월 17일 LA 레이커스와의 경기에서 야오밍은 9개의 야투를 모두 성공시키고 자유투 2개까지 포함해서 20득점을 올린다. 이에 찰스는 빼도박도 못하고 케니의 엉덩이에 키스를 해야 될 판. 근데 케니 스미스는 이를 아주 잘 이용해먹었고, 스튜디오에 당나귀 한마리를 끌고와 당나귀 목에 KENNY라는 팻말을 걸고 찰스에게 "내 엉덩이에다 키스할건지 아니면 이 당나귀 엉덩이에다 키스할건지 알아서 해 ㅋㅋㅋ" 라고 약올렸고, 결국 찰스는 당나귀 엉덩이에 키스했다.[9]이 장면은 경기를 끝내고 락커룸에 있던 야오밍도 지켜봤다.

이 사건 이후 야오밍은 서서히 NBA무대에 적응해 나갔다. 2002년 12월과 2월에는 이달의 서부신인선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시즌 종료때 13.5득점 8.2리바운드 1.8블록슛 야투율 .498 자유투 .811을 기록해 피닉스 선즈아마레 스타더마이어와 치열하게 경쟁해서 아쉽게 53표차로 2위에 만족해야 했다. 03-04시즌에 새롭게 감독으로 부임한 제프 반 건디에 의해 팀의 중심으로 낙점되었다. 시즌 성적은 17.5득점 9.0리바운드 1.9블록슛으로, 대부분의 기록치가 상승했고 오랜만에 플레이오프에도 올라갔다. 1라운드 상대가 전당포 라인업 LA 레이커스였고, 1승4패로 탈락하긴 했지만.

04-05시즌에는 새로운 파트너로 올랜도 매직에서 온 득점머신 트레이시 맥그레디가 합류했다. 맥밍콤비의 탄생. 물론 처음에는 티맥의 부상과 처음으로 손발을 맞는거라 생각만큼의 시너지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시즌이 흐르면서 점차 호흡도 맞아떨어져 가면서 휴스턴 로켓츠는 서부의 무시할수 없는 팀이 되었다. 야오밍의 시즌 성적은 18.3득점 8.4리바운드 2.0블록슛.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는 댈러스 매버릭스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끝에 패했다. 물론 7차전의 경우 너무 압도적인 차로 패배하긴 했지만, 다음 시즌에 대한 기대치는 높았다. 그러나...

4 계속되는 부상 그리고 은퇴

그러나 05-06시즌 야오밍은 부상으로 시즌아웃되며 57경기 출장에 그쳤다. 이 시즌에 처음으로 더블더블을 기록하면서 상승세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쉬운 대목. 06-07시즌에는 커리어 하이인 평균 25득점을 올렸으나 역시 부상으로 48경기 출장에 그쳤고, 07-08시즌에는 평균 22득점 10.8리바운드로 커리어 두 번째 더블더블을 기록했으나 55경기 출장에 그쳤다. 이렇게 부상이 잦아지면서 중국 팬들과 휴스턴 팬들을 안타깝게 했는데, 특히 07-08시즌 그가 부재중인 기간에 휴스턴이 22연승을 달성하자 "이제 휴스턴에는 야오밍이 필요없는 거 아님?" 이라는 말까지 나오기도 했다. 물론 보스턴 셀틱스에게 패해서 연승행진이 끝났을때 그 말은 쏙 들어갔다. 보스턴의 골밑이 막강했기 때문에 야오의 부재가 너무 눈에 띄었던 것.

08-09시즌에는 모처럼 건강하게 77경기를 뛰었다. 평균 19.7득점 9.9리바운드로 기록은 다소 감소했지만, 그래도 야오밍이 모처럼 많은 경기를 소화해주면서 휴스턴은 트레이시 맥그레디의 시즌아웃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오프 2라운드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야오밍은 라운드 진행 도중 또 부상으로 아웃되었다. 이 때 휴스턴은 레이커스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치뤘고, 그가 있었으면 상황이 달라질수도 있었다고 아쉬워하는 팬들도 있었다.

09-10시즌에는 아예 한 경기도 뛰지 못해 팬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수술했던 부위가 아물지 않아서 골절이 재발한 것. 결국 야오밍은 클리블랜드의 지드루나스 일가우스카스스가 받았던 발에 인공관절을 삽입하는 수술을 받았다. 실제로 이 수술을 받기 전에 일가우스카스의 조언을 받기도 했다.

10-11시즌에 팀은 야오의 출전시간을 평균 24분 안팎으로 제한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결국 다섯경기만에 다시 부상이 또 재발해서 시즌아웃되었다. 야오는 인터뷰를 통해 복귀에 대해 회의적인 모습을 보이는 등 예전에 비해 자신감 없는 모습을 보였고, 결국 은퇴를 선언했다. 이 때 그의 나이 겨우 30세. 한창 전성기를 달려야 할 선수가 부상으로 잇달은 불운을 맞이하면서 선수생활을 접어야 했다.

5 왜 이렇게 자주 부상을 당했나?

일단 체격조건 그 자체가 문제다. 과거 휴스턴 로케츠에서 하킴 올라주원과 트윈타워로 대활약했던 223cm의 랄프 샘슨이나 231cm의 초거인 게오르그 무레산,마누트 볼이 그랬듯 220cm를 넘는 초거대 선수들이 NBA같이 82게임 풀시즌이라는 초 빡센 스케줄에 공수전환이 빠르고 운동량이 장난이 아닌 리그에서 오래 살아남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이들도 채 10년을 제대로 뛰지 못했다. [10]

그러나, 그가 이렇게 자주 부상을 당한 진짜 이유는 NBA의 하드한 일정에 여름에는 중국대표팀 일정까지 소화하다보니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NBA팬들과 중국팬 그리고 중국농구협회는 야오의 부상 책임을 누구한테 있느냐에 대해선 의견이 달랐다. NBA팬들은 중국농구협회가 야오밍의 몸상태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무리하게 국가대표로 차출시켜서 오늘날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야오밍은 잇단 국가대표 차출로 인해서 과부하가 걸린 상태였고, 결정적으로 자국에서 열린 베이징 올림픽에 참가한 것이 독이었다. 이때 야오는 부상에서 회복된지 얼마되지도 않았고 컨디션은 당연히 좋을 리 없었다. 아무리 자국에서 열리는 첫 번째 올림픽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참가했다고는 하지만, 결국 그것이 부상을 더 키우고 말았다.

반면 중국농구협회와 중국팬들은 야오밍의 부상이 휴스턴 구단의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야오밍의 백업요원만 영입했더라면 이런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그들의 주장. 이는 맞는 이야기이면서 틀린 얘기이기도 하다. 실제로 야오밍을 받쳐줄 백업요원은 팀내에서 디켐베 무톰보 정도였지만 그는 이미 불혹을 넘긴 노장이었다. 또 당시에는 NBA 리그 자체가 쓸 만한 센터가 많지 않았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척 헤이스가 있었다곤 하지만 그는 센터로써는 부적합에 가까운 198cm였고, 그나마 데려온 센터들은 10분을 맡기기에도 힘든 선수들이었다. 1차적인 책임은 야오밍 하나에만 의존한 중국농구협회의 책임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근시안적인 대표팀 운영으로 인해 정말 전성기를 달려야했던 야오밍은 그렇게 30세가 되기도 전에 은퇴하고 말았다.

6 이것저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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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오밍의 키 때문에 벌어진 착시효과인데, 가운데 부인은 키가 190cm다.[11] 배경에 있는 사람들과 비교해 보자. 왼쪽 딸은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지만 3세 여아다. 키가 110cm... 태어나보니 아빠가 야오밍

큰 키에도 불구하고 그 신장대에서는 가장 뛰어난 기동력을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게오르그 뮤레산이나 숀 브래들리와는 비교가 거부되는 선수. 슛 범위도 넓고, 포스트업 능력[12], 패싱 능력도 뛰어났다. 그래서 골밑에서는 다양한 공격옵션을 기대할수 있었다. 수비능력은 많이 부각되는 편은 아니지만 탄탄한 하체를 바탕으로 버티는 힘이 있고, 블록능력도 수준급이라 할수 있다. 패싱능력은 기록치에서 보여지는 것과는 달리 좋은편에 속한다. 자유투 능력은 센터들 중에서는 상위 탑 클래스에 들 정도로 뛰어나다. 통산 83.3% 더 설명이 필요한가?

다만 NBA시절 숨만 쉬어도 파울콜을 줘버린 심판들 덕에 인종차별 이야기 까지 들었을정도이다. 오죽했으면 경기도중 해설진(!!)이(심지어 휴스턴 지역방송도 아니었다) "파울이잖아!"라고 소리지를 정도였다. 편파판정이 극에 달한 경기 장면인데, 이 때 야오밍의 매치업은 벤 월러스, 그리고 헐리우드 액션으로 유명한 바레장이었는데 두 선수가 파울유도 액션을 하면 어김없이 파울을 선언하는가 하면 리바운드를 잡고 세컨샷을 시도하는 도중 바레장이 대놓고 야오의 손을 두차례나 갈겼는데도 파울을 안 줬다. 위에 언급된 "파울이잖아"가 이 플레이에서 나온 멘트. 이후 이 해설자는 "장난해요? 심판이 도대체 뭘 보고 있는거죠?? 15미터 밖에서(즉, 중계석에서도) 잘 보이네요."라고 했으며 그의 파트너는 "그냥 두들겨맞고 있네요(Just hammered)"라고 했다. 이후 리플레이에서 한번 더 파울성 플레이가 있었던게 드러났으나, 바로 앞에서 보던 심판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참고로 야오밍은 NBA선수치고 심판에게 항의를 안하는 축에 속하는데, 이 경기에서는 항의가 잦았다. 그럴수밖에 없는게 자리잡으면서 양손을 머리위로 쭉 들고 있었는데도 (즉 전혀 밀지 않았는데도) 공격자 파울을 불 정도로 말도 안되는 콜이 계속 나와서 누적된 파울로 인해 제대로 뛰지도 못했다.

하지만 불리한 파울콜에도 불구하고 공격력은 NBA 최상위권 수준이라 드와이트 하워드와 함께 센터의 최고를 다투었고 [13] 국제무대에서는 적수가 없었다는 평가가 지배적. 중국의 한 쿼터 득점을 혼자 한적도 있었다. 물론 다른 중국선수들과의 수준차가 있었지만, 아딜잔 은퇴후 한국 가드들에게도 탈탈 털리던 중국 국대의 식물 가드진을 밖에 두고도 그렇게 활약하는건 쉬운 일이 아니다.

위에 기술된대로 찰스 바클리에게 온갖 까임을 받았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고 오히려 찰스의 생일날 축하메세지를 보내주기도 하는 대인배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고, [14]

샤킬 오닐이 자신을 도발하는 발언을 할때도 "샤크의 팔꿈치는 물렁해서 아플것 같지 않다."라고 대답하는 등, 무뚝뚝한 얼굴과는 달리 상당히 위트가 있다. 또한 NBA에 진출한 중국선수중 유일하게 다른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왕즈츠, 이지엔리엔, 순 유에 등 대부분의 중국선수들은 필요한 의사소통은 통역을 통해서만 하고, 영어도 적극적으로 배우지 않으며, 이동시에 헤드폰 끼고 자기 할것만 하는 걸로 악명이 높다. 반면 야오는 영어를 거의 못 하는 상황에서 미국에 온 것은 마찬가지지만, 루키시즌부터 떠듬거리는 영어로 주변 사람들과 농담도 하고 얘기도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4년차부터는 아예 전담 통역사를 쓰지 않았으며 인터뷰나 방송출연도 혼자서 영어로 했다. 영어 실력을 평해보자면 목소리가 낮고 발음이 좋진 않아 (th를 완전히 S로 발음한다. 생큐, 아이 싱크(i think) 등) 알아듣기는 조금 힘들지만, 꽤나 유창한 편이다. 이때 야오의 전담통역사였던 콜린 파인은 당시 초짜 통역사였는데[15] 그러나 그를 고용한 로켓츠 구단은 경험이 전무한 파인을 못 미더워했었는데, 실제로 파인은 어린 시절부터 중국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야오보다 훨씬 더 불안해했다. 야오의 루키시즌을 다룬 다큐먼터리 "The Year of Yao"에 보면 한번은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파인이 깜빡 잊고 휴대전화를 안 꺼놔 전화벨이 울렸는데, 죄송하다며 버벅이는 파인을 보고 야오가 씨익 웃으며 어설픈 영어로 "All rookies, huh (우리 둘 다 초짜네요)?"라고 농을 던지자 파인이 두 손을 들며 "초짜입니다!(Rookie!)"라고 받기도 했다. 당시 기자회견장은 웃음바다가 됐지만 단 한 사람 웃지 않는 이가 있었으니 로켓츠 구단 관계자...그는 여러 번 야오에게 통역을 바꿔줄 수 있다고 건의했으나, 이미 파인과 친해진 야오는 이를 거절했다. 한번은 휴스턴의 기자가 야오에게 "NBA 생활하면서 가장 감사한게 뭐냐?"고 묻자 야오는 웃으며 말없이 파인을 가리킨 적이 있다.#, 이를 계기로 야오와 친해졌으며 지금도 종종 연락한다고 한다. 지금도 야오가 가끔 통역을 부탁할때도 있다고...#

휴스턴과의 재계약협상때 휴스턴이 처음 제시했던 계약을 한번에 수락하기도 하는 쿨한 모습도 보여주었고, 또 자신의 원 소속팀이었던 샹하이 샤크스가 경영난으로 허덕일때 구단을 사들여 구단주가 되기도 했다. 은근히 자신이 속한 팀에 대한 의리도 남다르다.

은퇴 후에는 상하이의 구단주로 지내다가 최근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와인사업에 뛰어들었다. 또한 상어요리에 반대한다는 발언을 해서 몇몇 중국의 호텔에서 상어요리가 없어지게 하는 등의 공도 있다. 영화에도 나오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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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국에서 개최된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회식에서 중국 선수단의 기수를 맡았다. 그의 국내외적 명성을 반영한 모습.[16]

2012 런던 올림픽 중 신화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고의패배로 탈락한 중국 여자 배드민턴 선수들을 '희생양'으로 표현하며 심정적으로 옹호하였지만, 이들을 실격처리한 국제배드민턴연맹의 조치에 대해서는 지지하는 입장을 표했다.

휴스턴 로키츠 후배인 제레미 린뉴욕 닉스 시절 뉴욕포스트와 가진 인터뷰에서 매 경기가 끝나고 그에게 조언을 얻는다고 했는데, 실제로도 제레미 린의 롤모델은 야오밍이라고 한다. 덕업일치

야오밍은 8살 때 왼쪽 귀의 청력을 상실하는 사고를 겪었다. 야오가 8,9살 때 병을 앓았고 약을 먹었는데, 알고 보니 야오는 이 약에 알레르기가 있었고 이 부작용으로 왼쪽 청력의 60%을 잃은 것. 이 사실은 야오의 2년차 시즌이 끝나고 나온 자서전 "Yao: A Life in Two Worlds"에 나와 있다. NBA 관계자들 뿐 아니라 팬들 사이에서도 한참 전부터 유명한 얘기였고 야오가 딱히 숨긴 적도 없다. 일단 자서전에 떡하니 적어놨구먼 아래 기사는 야오의 2년차 시즌 초반에 나온 기사인데, 야오의 루키 시즌에 치르던 경기 도중 한 심판이 야오가 자기 얘기에 반응이 전혀 없자 휴스턴 벤치로 가서 "저 친구 왜 저래요?"라고 묻자, 코치진이 "왼쪽 귀가 안 들려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야오 본인은 "좀 영향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더 이상 문제가 되진 않아요"라고 답했다. 재밌는 것은 그의 동료이자 당시 로켓츠의 스타 포인트가드였던 스티브 프랜시스 역시 02시즌 당시 겪었던 극심한 편두통으로 인해 왼쪽 청력이 좀 안 좋았다는 것. 이로 인해 로켓츠는 수신호를 자주 사용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읽어보면 짐작하겠지만 성격이 매우 점잖고 유쾌한지라 미국 내에서도 팬들이 많다. 휴스턴에 처음으로 도착해서 한 첫 마디가 "저를 보러 많은 분들이 와주셨는데 다 싸인을 못 해드려서 죄송합니다"니 팬들이 호감이 갈 수밖에. 높은 인기와 유니크한 스타일 덕에 야오밍의 현역시절 미국에서 키 큰 동양인은 백이면 백 야오밍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최희섭의 경우도 그를 야오밍으로 착각한 미국 어린이에게 싸인을 해 주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

트래쉬토킹이나 비매너 플레이도 안하고, 자주 부상을 당하는 몸에도 엄청난 노력파이기도 하다. 그러나 마냥 순둥이만은 아니라서 커리어 중반기로 가면서 자신감을 쌓기 시작하자 매치업 상대에게 득점을 먹이고 "넌 씨x 날 막을 수 없어!(You can't fuxxing stop me!)"라고 소리지른 적도 있다. 또한 09년 레이커스와의 서부 준결승 1차전 당시 심한 부상을 입고 코치진이 뛰지 말라고 만류하는데도 코치진과 싸우고 억지로 나와서 경기를 승리로 이끈 적도 있다. 다만 안타깝게 야오는 이때 부상 이후 결국 예전 기량을 회복하지 못하고 은퇴하고 만다.

모범적인 사생활, 불평을 안하는 성격, 노력파, 국가대표 소집을 거절하지 않고 매번 참석한다는 점에서 대한민국의 축구선수 박지성을 여러모로 떠올리게 한다. 다만 재미없는 인터뷰이로 악명이 높은 박지성과 달리 야오는 의외로 빵 터지는 유머감각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의 유머감각을 알 수 있는 좋은 예로 기자가 그에게 "좋아하는 미국 노래가 있나요?" 라고 하자 "미국 국가(anthem) 죠" 라고 대답하면서 "1년에 적어도 82번 (정규 시즌 게임이 82경기이고 매 경기 시작마다 국가가 흐른다) 은 듣거든요" 라고 하면서 기자들이 다 빵 터졌다.

7거장?

국내에선 소수 NBA매니아들이 붙인 별명이나, 해외에선 의외로 많이 알려진 야오밍의 코믹한 사진 모음. 그 어떤 미남미녀라도 순간 캡처하면 카오게이급 장면이 나오긴 하나 야오밍은 유독 이런 코믹한 사진이 많이 알려져 있다. 검색해보면 알겠지만...

유명한 사진 몇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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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비 브라이언트: ㅆㅂ 깜따기야 한눈에 봐도 미스매치.

yao-ming-tickles-underarm-nba-funny-photos.jpg 간지러워 ㅎㅎㅎㅎㅋㅎ

yao-ming-kiss2.jpg 쪼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ㅗㅇㄱ

yao-ming-wings.jpg 에에에에에에에에에추우우우우에엨ㄱ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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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얼굴표정은 4chan 필수요소(meme)인 Bitch Please의 원본으로 더 유명하다[17].

zvzh.jpg 난 누군가 여긴 어딘가



야거장의 강력한 라이벌 파우 가솔 Ang? You like that? Ang?

8 야오밍 작전

야오밍의 부모님은 두분다 모두 인민해방군 츨신이며 모두 180을 가볍게 넘는 장신이였다. 야오밍은 어릴적 부터 중국정부의 관리아래 농구선수로 길러진것이 알려졌었으나 현재는 묻히고 말았다.
  1. 그런데 휴스턴의 한 코치에 의하면 더 자라서 실제 맨발키가 7 ft 5.75 즉 228cm이며 신발을 신으면 232cm까지 됐다고 한다. 실제로 신발 신고 216cm인 샤킬 오닐과 섰을 때 차이가 상당했다.
  2. 샤킬 오닐은 해당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매우 프라이드가 강한 인물이다
  3. 참고로 다른 아시아계 NBA 선수였던 하승진, 다부세 유타는 그리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하승진은 불과 두 시즌, 그것도 가비지타임 위주로 뛰며 1~2점씩 넣다가 방출되었고 유타는 이보다 못해 한달 반만에 쫓겨났다. 그나마 하승진은 팀에서 "시간을 두고 키워볼만한 장기 프로젝트"로 봤지만 냉정하게 말해 타부세 유타는 일본 내 마케팅 때문에 계약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하승진은 기술은 꽝이어도 NBA에서도 손꼽히는 축복받은 신체조건(맨발키 221cm)이 있었지만 타부시는 175cm의 단신에다가 운동능력도 기술도 NBA급에 못 미쳤다. 애초에 NBA급으로 클 가능성이 사실상 없던 선수. 나이도 드래프트 당시 19세였던 하승진과 달리 23세였다.(유망주 레벨에서는 2~3살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크다. 어릴수록 성장가능성이 높다고 평가받기 때문) 이건 두 선수의 대접만 봐도 알수 있는데 하승진은 포틀랜드가 2라운드 지명권을 써서 뽑았고 3년 계약에 2년은 보장해줬지만 타부세는 아예 지명을 못받고 피닉스 선즈가 단기계약으로 데려온것. 한 가지 추가하자면 하승진 지명당시 미언론중 하나에서 "하승진은 키가 커서 지명됐을뿐 2년안에 퇴출된다"라고 언급했고 그대로 실현됐다. 실제로 이런 식으로 하위권에 뽑힌 선수들 중 대부분은 NBA에서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 그리고 지노 빌리, 드레이먼드 그린, 아이재아 토마스 같은 드래프트 하위권 출신 스타 선수들과 비교하자면, 이들과 하승진, 다부세 유타는 아예 기대치부터가 다르다. 하승진, 다부세 유타는 명백하게 그 실력과 가능성보다도 배후의 출신 국가에서의 상품성을 노린 드래프트였다.
  4. 중국리그에서 야오밍보다 한수 위의 기량으로 평가받던 왕즈즈나 멍크 바터 역시도 NBA에서 성공하지 못했다. 특히 왕즈즈는 NBA리그 적응을 위해 중국국대 차출을 거부했다가 중국언론과 팬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5. 막았다기보다는 리그의 탑스타이자 자신의 팀의 대스타를 그냥 보내주기는 뭐했던지 이적료 비슷한 걸 원했다.
  6. 이때 한 스카우터는 "그는 7피트6인치고 페이더웨이를 쏠 수 있다. 그렇지만 페이더웨이를 쏠 수 있는 6피트9인치 선수가 넘쳐나는데 왜 그가 필요하단 말인가?"란 말을 남겼다. 실제로 야오는 데뷔 당시 소프트하다란 평을 받았다. 그가 레이업을 하려다가 마찬가지로 신인이었던 네네 힐라리오에게 블럭당하자 한 해설자가 "여긴 국제무대가 아닙니다. 저건 덩크해야죠"라고 말을 하기도. 야오가 자서전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인유어페이스를 하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상대방을 도발하는 행위를 하면 상대방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다소 얌전히 플레이하는데 익숙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NBA에서 적응하기 위해 이런 거친 플레이에 익숙해지고자 노력했다. 결국 야오는 루키 시즌 도중 블럭슛의 달인 테오 래틀레프의 면상에 인유어페이스 덩크를 먹이고 괴성을 지르다가 "도발"로 생애 첫 테크니컬 파울을 받았는데, 이를 두고 그에게 "터프해져라"고 신신당부하던 로켓츠 선수단은 잔치 분위기가 되서 즐거워했다고 한다.
  7. 이 때 드래프트를 중계하던 찰스 바클리는 "내가 만약 1순위 지명권이 있다면 캐런 버틀러나 제이 윌리엄스를 지명했을 겁니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바클리는 야오의 루키 시즌에 그를 저평가하던 전문가 중 하나였는데, 야오가 실력으로 모든 걸 입증하자 그를 높이 평가했다.
  8. 사실 NBA수준에서 1대1로 먹힐만한 기술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았던 그 하승진도 받아먹기로 13점을 기록한 적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드래프트 1순위 지명선수가 19점도 못 넣는다고 한 건 야오밍이 완전히 망할 것으로 봤던 얘기다. 실제로 이 방송이 될 당시 야오밍은 데뷔 후 네 경기에서 0점-2점-8점-0점을 기록 중이었으며, 후술될 20점 경기 전까지 평균 4.3점을 기록하고 있었다. 훗날 데뷔한 다르코 밀리시치의 경우 2번으로 뽑혔음에도 데뷔 후 3년간 평균 5점을 못 넘긴 걸 생각하면 당시 NBA에서 하승진급으로 헤메고 있던 야오를 두고 이렇게 생각하는게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야오밍은 바클리의 호언장담 이후 열흘 뒤에 20점을 기록하며 이때까지의 부진이 오직 적응문제였음을 증명했고, 두 경기 뒤에는 야투 12개 중 10개를 적중시키며 무려 30점을 기록하며 바클리를 민망하게 했다. 30점 경기 이후 바클리는 방송에서 "그 친구가 잘할 거란 걸 알고 있었어. 근데 이렇게까지 빨리 잘하게 될 줄은 몰랐던 거지"라고 태세전환을 시도했다(...)
  9. 미국에서 kiss my ass(내 엉덩이에 키스해라)는 엿먹어에 해당하는 fuck off의 순화(?) 버젼이며 굴욕의 상징이다. WWE빈스 맥마흔부자나 방송에서 시전할만한 것. 굳이 다른 남자의 엉덩이에 키스를 하는 괴상한 벌칙을 택한 이유가 여기 있는 것. 또한 케니의 당나귀 대타 역시 엉덩이를 뜻하는 속어가 당나귀(donkey)의 속어도 된다는 걸 이용한 언어유희. 내기에서 이긴 상으로 뚱보 아저씨가 내 엉덩이에 뽀뽀하면 그게 상이냐 벌칙이지 재밌는것은 훗날 오픈코트에 출연한 케니가 "당나귀가 ass 니까 그냥 당나귀한테 키스하면 되는거지, 당나귀 엉덩이에 키스할 필요는 없었어. But you kissed an ass(당나귀) on the ass(엉덩이)ㅋㅋㅋㅋㅋ"하면서 비웃었다.
  10. 유일하게 12년이라는 긴 커리어를 보낸 228cm의 초장신 숀 브래들리는 매우 마른 체격(가장 무거웠을때가 125kg이었는데, 이는 그와 키가 비슷한 야오밍의 초창기 몸무게보다 15kg이나 가볍다. 게다가 이는 말 그대로 "가장 무거웠을 때"이고 데뷔 당시에는 불과 106kg이었는데 이는 201cm의 스몰포워드스카티 피펜랑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으로 신체에 오는 부담을 최소화한데다가 평균 출장 시간이 30분이 넘은 시즌이 세 번 밖에 없을 정도로 관리를 받았다. 게다가 커리어 후반의 세 시즌은 경기당 15분 미만으로 뛰었다. 애초에 그는 수비 전문 선수라서 팀 내에서 맡는 역할이 제한적이었다. 그럼에도 커리어 내내 부상에 시달렸다. 그러나 야오밍은 브래들리보다 훨씬 육중한데다가 팀의 기둥으로서 막중한 역할을 맡았고, 루키 시즌과 5 경기 만에 아웃된 마지막 시즌을 제외하고는 줄곧 평균 30분 이상을 뛰었다.
  11. 이름은 예리. 역시 중국 국대출신으로 농구선수였다. 야오밍은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첫 눈에 반해서 끈질기게 구애를 했는데 이 둘이 정식으로 사귀게 된 때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이 끝난 후로 야오밍이 폐막식때 다른 나라 선수들에게서 얻은 뱃지를 모아서 예리에게 선물로 준 걸 계기로 예리도 야오에게 반했고 2007년에 부부의 연을 맺었다.
  12. 사실 상체는 NBA기준으로 좀 부실한 편이었다. 야오밍 본인은 엄청난 노력파라 오프시즌중에 근육을 붙여오긴 했지만 체질인지 플레이오프쯤 되면 다시 빠지곤 했다. 그러나 워낙에 덩치가 좋고(비슷한 신장의 숀 브래들리보다 40파운드 정도 더 나갔다)하체힘이 좋아 막상 밀고 들어가면 막을 선수가 거의 없었다. 특히 2000년대에는 힘과 기술을 겸비한 센터가 드물어서 더욱 그렇다. 다만 거구 때문에 비교적 느린 편이라 빠르고 기술이 좋은 빅맨은 막기 힘들어했는데, 대표적으로 유타재즈의 카를로스 부저에게 플레이오프에서 털린 적이 있다. 재밌는건 야오밍이 NBA 커리어 초반에 낸 자서전 A life in two worlds에 보면 어린 시절 중국의 전문가들이 야오밍의 신체검사를 하고 "(왕즈츠와 달리) 엉덩이가 너무 커서 굼뜰것"이라며 농구선수로 대성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는데, 막상 NBA에서는 그 튼실한 하체를 이용한 골밑플레이로 최정상급 빅맨이 됐다. 정작 야오보다 기동력이 월등하고 슛이나 드리블도 더 좋았던 왕즈츠는 골밑플레이가 약해 NBA에선 그저그런 선수에 그쳤다는 걸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부분.
  13. 공격력이 강한 야오와 수비력이 강한 하워드의 기량은 백중세지만 (물론 선수가치는 더 젊고 부상도 훨씬 적은 하워드가 더 높다) 유독 매치업에서 야오가 하워드를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사실 하워드는 포스트업도 못하고 미드레인지도 없는 관계로 닥돌이 안먹히는, 자기보다 월등히 큰 선수와의 1대1 매치업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였는데, 하워드보다 거의 20cm 가까이 차이나고 기술까지 뛰어난 야오를 막는건 특히 어려웠을 것. 참고로 하워드는 1대1 수비보다 팀수비에 강한 선수인데 (물론 1대1 수비도 특급이다) 만약 지역방어가 허용되지 않아 맨투맨 수비가 주로 이뤄졌고 훌륭한 센터가 많았던 90년대에 활동했더라면 파워포워드로 활약했을 가능성이 높다.
  14. 사실 바클리의 경우 현역시절이나 은퇴이후에나 생각나는데로 막 말을 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렇지 야오밍을 그렇게 깐 건 아니었다. 위의 야오밍 폄훼 발언도 야오거 루키시즌 초반에, 별로 뛰어난 센터가 아닌 션 브래들리르 상대로 형편없는 모습을 보이자 까면서 한 것. 오히려 야오가 적응을 하고 좋은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자 높게 평가했는데, 이는 픽앤롤, 픽앤팝에 특화된 2000년대 대부분 센터들과 달리 야오밍은 포스트업을 포함해 정통센터플레이를 할줄 아는 몇 안되는 선수기 때문. 바클리와 마찬가지로 현역시절 막강 포스트업플레이어였던 샤킬오닐도 정통센터를 높게 평가하는데, 오닐의 경우 바클리보다 더 막무가내로 말하는 성격이라 포스트업이 뛰어난 앤드류 바이넘을 드와이트 하워드보다 더 뛰어난 센터라도 했다가 다른 패널들에게 까이기도 했다.
  15. 파인은 당시 법대를 갓 졸업한 20대 후반의 청년이었는데, 유창한 중국어 실력 덕분에 통역사 자리를 얻었다.
  16. 안 그래도 큰 키인데 맨 앞에 있으니 원근감 때문에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들이 죄다 미니어쳐로 보일정도(...)
  17. 해당 표정때문에 대한민국 배우 최성국과 일본의 여자 성우 하나자와 카나와 같이 호쾌한 웃음의 표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