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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 ||||||
파일:Attachment/unesco-worldheritage.png | 이름 | 정식명칭 | 해인사 장경판전 | |||
영어 | Haeinsa Temple Janggyeong Panjeon | |||||
프랑스어 | Temple d'Haeinsa Janggyeong Panjeon | |||||
국가·위치 | 대한민국 경상남도 합천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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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재유형 | 문화유산 | 등재연도 | 1995년 | 지정번호 | 737 | |
등재기준 | (iv)[1], (vi)[2] |
대한민국의 삼보사찰 | ||||||||||||||||||||||||||||||||||||||||||||||||||||||||||||||||||||||||||||||||||||||||||||||||||
법보사찰 | 승보사찰 | 불보사찰 | ||||||||||||||||||||||||||||||||||||||||||||||||||||||||||||||||||||||||||||||||||||||||||||||||
해인사 | 송광사 | 통도사 |
전경
대한민국의 국보 National Treasures Of Korea | ||
공식명칭 | 한글 |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
한자 | 陜川 海印寺 藏經板殿 | |
영어 | Haeinsa Temple Janggyeong Panjeon | |
분류번호 | 국보 52호 | |
소재지 | 대한민국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22, 해인사 | |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기타 | |
시설 | 4동 | |
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 |
제작시기 | 고려 |
1 개요
순천시의 송광사, 양산시의 통도사와 함께 한국의 3보 사찰로 꼽힌다. 3보란 불교에서 불(佛), 법(法), 승(僧)을 뜻하는데, 해인사는 법보(팔만대장경), 송광사는 승보(수계사찰), 통도사는 불보(진신사리) 사찰이기 때문이다. 더하여 부산광역시의 범어사, 구례군의 화엄사 등과 함께 5대 사찰로 꼽히기도 한다.
대한민국의 국보이자 세계기록유산인 팔만대장경이 보관되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며, 대장경을 보관하는 장경판전 역시 국보이자 세계문화유산이다. 그래서 팔만대장경이 보관중인 곳은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유네스코 소속 관리자가 엄격하게 막고 있으니 눈으로만 보자. 둘을 헷갈려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연대부터 다르다! 본래 강화도에 보관하던 대장경을 조선 태조 때에 옮겨왔다.
2 창건 설화
전설에 따르면, 옛날 착하게 살던 노인이 떠돌이 강아지를 데려다가 정성껏 키웠는데, 사실 그 강아지는 용왕의 딸로 잘못을 저질러서 강아지가 되어 속죄하던 중이었다. 속죄를 마친 용왕의 딸은 용궁으로 돌아가 자신을 보살펴 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용왕에게서 도장을 노인에게 주었다. 그 도장은 원하는 것을 쓰고 도장을 찍으면 적은 것이 실현되는 도장이었다. 노인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도장을 쓰지 않고, 오히려 도장을 사용해 절을 세우는 비용을 댔다고 한다. 그래서 바다 해(海)와 도장 인(印)을 써서 해인사가 되었다고 한다.
943년 이후 기술된 것으로 추정되는 《가야산해인사고적(伽倻山海印寺古籍)》를 참조한 듯한 다음과 같은 전설은, 《거제현우두산현암선사중수기(巨濟縣牛頭山見庵禪寺重修記)》에 기록되어 전해져 온다.
"애장왕 대의 승려인 순응(順應)[3]이 766년 당나라로 건너가서 그곳에서 깨우침을 얻던 도중 보지공(寶誌公)의 제자를 만나 《답산기(踏山記)》를 얻은 뒤 보지공의 묘소에서 7일간 법(法)을 구하였는데, 그때 묘문이 열리면서 보지공이 나와 설법하고 의발(衣鉢)과 신발을 주면서 우두산(牛頭山) 서쪽 기슭에 절을 세우라고 명했다고 한다. 그후 귀국한 순응은 가야산에 들어가 사냥꾼의 도움으로 현재 해인사 자리에 암자를 짓고 그곳에서 지냈다. 그때 애장왕의 왕후가 등창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어떠한 약도 효력이 없어 고승들의 도움을 받으려 사람들을 풀었다. 가야산으로 간 왕의 사신이 몸에서 빛을 발하는 순응을 발견하고 왕궁으로 청했으나, 순응은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왕후의 병난 사연을 듣고는, 오색실을 주면서 실의 한쪽 끝을 배나무에 매고 다른 한쪽 끝을 아픈 곳에 대면 나을 것이라 하였다. 사신이 돌아가 왕에게 이를 알리고 그대로 시행했더니 배나무는 말라죽고 왕후의 병은 나았으므로,[4] 왕이 고맙게 생각하여 순응의 원에 따라 애장왕 3년(802년)에 해인사를 지을 때 인부를 동원하여 일을 도왔다."
3 기타
세월에 따라 화재로 인해 총 7차례 중수하였으며, 조선 후기에 마지막 중수를 마쳤다. 신기하게도 화재 때마다 장경판전은 화마를 피해 갔다. 화재가 하도 많이 일어나다 보니까 화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해마다 단오날만 되면 해인사 남쪽에 있는 매화산 남산제일봉 정상 및 절 경내 다섯 곳에 소금을 단지에 담아 묻는 행사를 벌이고 있다. 남산제일봉이 화기의 형상으로 여기서 화기가 날아들어 해인사로 오게 되고 불이 자주 나기 때문에 바닷물로 불길을 잡겠다는 의미라고.
현재 대한민국 조계종에서는 출가하여 스님이 될 사람을 모집하기 위해 홈페이지까지 만들었는데, 그 홈페이지에서 처음으로 행자교육원을 소개했던 MBC 다큐멘터리를 해인사에서 찍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이면서 조계종에서 중시하는 지눌과 관련된 교학을 승려 기초 교육 시 가르치지 않는데, 이는 이곳에 계셨던 성철스님이 "지눌은 마구니다" 라고 하면서 불교 내의 대논쟁을 일으켰었기 때문이다. 특히 성철이 지눌과 관련된 것들을 가르치지 말라고 한 게 발단이 되었다. 성철 스님에 따르면 지눌은 돈오점수를 주장했는데, 성철 스님은 수행이 필요하다면 이미 깨달았다고 볼 수 없다는 이유로 '돈오돈수'를 주장했다.
6.25 전쟁 때 빨치산들이 잠시 머무르며 싸울 거처로 삼아 폭격 대상으로 지정되었었으나, 김영환 장군을 비롯한 파일럿들의 명령 거부와 설득으로 인해 폭격을 피했다. 그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해인사는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했다. 따라서 2002년 이후로 해인사에서는 김영환 장군을 기리는 추모제를 매년 열고 있다.
2012년 5월 17일엔 해인사 주지스님이 보증을 섰다가 100억원대의 빚을 지게 되어 불상까지 압류당했다는 기사가 났다. 아이고 그놈의 보증
2014년 11월 24일 경내 전각에서 낙서가 된 것이 발견되었다. 한두 곳도 아닌 무려 17곳이나 되는 주요 전각의 벽면에 한자로 된 낙서가 되어 있었는데, 다행히도 대장경이 보관된 장경판전은 화를 면했다고 한다. 관련 기사
4 창작물에서의 해인사
홍길동전에서 홍길동 일당에게 털리는 절로 나온다. 땡중에 술과 고기를 처묵처묵하는 놈들이 승려로 있는 절인지라 의적들이 해인사를 털고자 해도 마땅한 지략이 없어 어려워하던 형편에, 홍길동이 해인사를 털어버릴 기막힌 묘책을 수립한다. 양반집 아들이 공부를 하러 절에 온다는 거짓 소식을 절에 전하자, 절에서는 손님맞이 준비에 난리가 났다.
드디어 홍길동이 부하들을 이끌고 해인사 레이드를 하기로 한 날, 당당히 들어가 음식을 대접받는 자리에서 일부러 모래를 입 안에 넣은 다음 큰 소리로 깨물어서 소동을 일으키더니, 음식을 부정하게 만들었다는 트집을 잡아 절 안의 중들을 모두 묶어놓고는 말끔하게 털어갔다. 여기서 '홍길동이 합천 해인사 털어먹듯'이라는 속담이 유래하였다.
눈물을 마시는 새에 등장하는 하인샤 대사원이 여기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김정한의 사하촌에 나오는 돈 많은 절이 해인사라는 설이 있다. 작가 자신은 부정했지만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이 작품이 나오자 해인사라는 소문이 퍼지고, 작가에 대한 테러가 벌어지기도 했다.[5]
5 관광 관련
해인사가 전국적, 아니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탓인지 해인사 주변에 각종 음식점과 숙박 시설 등이 즐비하다.[6] 호객 행위도 역시 무시무시하다.[7] 흔히 보는 산채비빔밥 같은 음식을 파는 곳은 기본이요, 관광 호텔, 유스호스텔이 있다.
진주, 대전, 대구에서는 해인사로 직행하는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해인사에 있는 시외버스정류장에서는 식권과 비슷한 승차권을 발매하며, 당일 어느 시간에도 사용할 수 있지만, 신용카드로 구매할 수 없으며 출발지에서 왕복 승차권을 구매할 수도 없으므로, 해인사에 도착하면 즉시 현금으로 승차권을 미리 구매하는 것이 안전하다.- ↑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 ↑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
- ↑ 최치원이 지은 전기(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에 따르면 옛 대가야 왕족의 후손이라고 한다.
- ↑ 왕비의 등창에서부터 작은 벌레들이 기어나와 실을 타고 배나무로 기어가고 있더라고...
- ↑ 실제로는 부산의 범어사가 아닌가 추정된다. 이 또한 김정한 작가는 부정했지만, 작가 자신이 살았던 동네가 부산인데다 소설 속 묘사가 상당수 맞아떨어져 최소한 모델이 된 것으로 추측. 그래서 이 항목에 있는 테러라는 건 실제로 범어사 스님들이 몽둥이를 들고 김정한의 집으로 몰려가서 드잡이질을 한 것(…).
- ↑ 김종국(고향이 멀지 않다고)의 친척들이 운영하는 곳도 있다. 한두 곳이 아닌 듯…….
- ↑ 원래 관광 명소가 다 그렇긴 하지만 여기는 그 규모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