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콜럼버스의 정식 초상화로 알려진 이 그림은 콜럼버스의 초상화가 아니라는 이야기가 있다. 일단 당대 기록과 얼굴이 다른 셈. 다만 기록과 대단히 비슷한 류의 초상화는 하나 있긴 하다.

1451년 10월 30일 ~ 1506년 5월 20일

  • 이탈리아어 - 크리스토포로 콜롬보(Cristoforo Colombo)
  • 스페인어 - 크리스토발 콜론(Cristóbal Colón)
  • 영어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 소개

이탈리아 출신으로 스페인에서 활동한, 탐험가, 항해가. 이탈리아 출신의 항해사이자 스페인콩키스타도르. 80년대에는 그냥 콜롬부스라고도 위인전에 나오기도 했다.

어린시절의 행적은 불분명해서 태어난 연도도 자세한 기록이 없다. 1451년생으로 보통 많이 알려졌지만 1447년생이라는 주장도 많다. 오늘날의 이탈리아 지역인 제노바 공화국 출신이면서, 스페인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그래서 이탈리아어로는 크리스토포로 콜롬보(Cristoforo Colombo), 스페인어로는 크리스토발 콜론(Cristóbal Colón)이다, 유럽인들 기준으로는 영웅 중의 영웅이라는 역사적인 인물이라서 그런지 유럽 언어로는 이 인물을 표기할 때에는 이탈리아어나 스페인어 식이 아닌 자국어 식으로 표기하는 것이 관례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영어식 발음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로 소개가 되어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공식 표기법으로 굳어졌다.

  • 그런데, 콜럼버스에서 파생된 Columbia의 공식 표기법은 컬럼비아이다. 영어 발음에 의해 외래어표기법으로 정확히 표기하자면, Columbus도 컬럼버스라고 표기해야 되겠지만, 관용을 존중해 콜럼버스가 표준 표기가 되었다. 하지만 Columbia의 표준 표기는 컬럼비아이므로 주의해야 한다. 컬럼버스라고 하고, 콜럼비아라고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자주 틀리는 외래어의 하나.

2 신항로 개척과정

콜럼버스는 동생인 바르톨로메오 콜롬버스와 지도 제작일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동방견문록을 읽고 기존의 관념과는 다르게[1] 지구는 둥글고 세상은 그다지 크지 않으며, 바다 서쪽 끝에는 낭떠러지가 아닌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지구는 둥글테니까 서쪽으로 계속 항해를 하면 언젠가는 세계를 한바퀴 돌아서 중국인도에 닿을 수 있으리라 믿었으며, 지중해를 점거하고 있는 오스만 제국을 거치지 않고 교역과 거래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획을 세우고 스폰서를 구하며 포르투갈, 영국,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 국가들의 지도자에게 지원 요청을 하지만 대부분 거절당했다. 거절당할만한 게 밑에서 설명하겠지만 군주들이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어서가 아니라 콜럼버스의 이론이 완전히 틀린 이론이라서 그리고 결정적으로 콜럼버스의 요구조건이 꽤나 까다롭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땅에서 나오는 보물 10% 및 그 섬들의 총독 자리를 평생 보장할 것 외에도 꽤나 많이 요구했다. 동시대에 살던 마젤란의 요구가 보물 5% 양도 및 기록에 대한 저작권 요청에 그친 것에 견줘보면. 날강도 수준이다.

그러다 마침내 이사벨라 1세의 후원으로 탐험을 시작할 수 있었다. 여왕도 권력이 꽤 있었음에도[2] 콜럼버스의 요구가 워낙 까다로워 여왕 자신이 아끼던 보석까지 팔아가면서 개별적으로 후원해줘야 했다고. 또한 이사벨라 1세는 자신의 왕관을 톨레도 대주교에게 팔았으며 그 왕관은 현재 톨레도 대성당에 보관되어있다. 그리고 1492년 8월 3일 스페인 카디스를 떠나 3달뒤인 10월 12일 지금의 바하마 제도에 상륙한다.

이사벨라 1세의 신대륙 개척 지원에 대해선 세간에 알려진대로 여왕이 콜럼버스에게 개인적 흥미를 느껴 지원했다라는 일설 보단 당시 스페인의 상황에 대해서 생각해 봄이 맞다. 레콩키스타 이후 스페인은 지중해 무역이 떠 오르는 오스만 투르크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득세로 인해 설 자리가 그닥 많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했고 또한 옆나라 포르투갈이 항해왕 엔리케를 필두로 서아프리카인도 지역을 탐사 및 개발해서 막대한 이득을 챙기기 시작하는 것을 목격했다. 고로 여왕은 신항로 개척이 나라의 미래에 큰 도움이 될꺼라 내다보았고 이 때문에 콜럼버스의 이 말도 안되는 탐험계획과 요구를 살라망카 대학을 포함한 스페인 학자층, 그리고 정부부처가 격렬히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원했던 것이다.
다만 여왕이 남편인 페르난도 2세와는 무관하게 개별적으로 밀었던 탐험이라 후에 신대륙에서 막대한 이득이 스페인으로 몰려왔을때 덕을 보는 쪽은 카스티야 뿐이었고 동시에 지중해무역을 업으로 삼던 스페인 동해안쪽의 카탈루냐 지방은 피박을 쓸 수 밖에 없었다... 지못미 카탈루냐...

2.1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의 최초 발견자인가?

일반인들에게는 아메리카 대륙을 최초로 '발견'한 위인으로 잘 알려져 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유럽인들 기준이고, 애시당초 콜롬버스가 도달한 시점에 아메리카 대륙은 이미 원주민들이 바글대는 곳이었다. '신대륙'이니 '발견'이니 뭐니 할 것도 없던 행위로 사실 전체 인류 기준으로 신대륙의 정의에 가장 맞는 대륙은 남극대륙말고는 없다. 다만, 세계사 자체가 서양인 시점인데다 서양 기준에서는 놀라운 발견이긴 했었다. '신항로' 발견이라고 하면 뭐 누구 시점으로 봐도 맞는 말이 되기는 한다.

거기에 유럽인 기준으로도 대부분의 경우가 확실한 근거가 없다 뿐이지, 아메리카 대륙을 찾은 사람들은 콜롬버스 전에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바이킹이 알려졌고(빈란드 항목 참조) 아일랜드 사람들이 아이슬란드를 거쳐 아메리카에 왔다거나[3][4], 폴리네시아인들이 진출해서 고구마를 수입해 갔었다거나한다는 얘기도 있고, 아프리카인들이 남아메리카에 온 적이 있다는 증거로 흑인을 닮은 얼굴 조각상이 있다며, 이집트가 오랫 옛날 아메리카와 교역했다는 근거 적은 떡밥도 있다.[5][6] 심지어 콜럼버스조차도 자신의 항해일지에서 이름모를(일지일부가 소실되었다) 이에로섬 출신의 사람이 카나리 제도 서쪽에서 육지를 보았다고 진술했고 같은 일지에 1484년에 있었던 일을 인용하면서 마데이라 섬의 주민이 포르투갈의 국왕을 찾아가서 자신이 본 육지를 언급하면서 지원을 요청했다고 일지에 쓰고 있다.(출처: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이종훈(역), 콜럼버스 항해록, 1492년 8월 9일 일지) 하지만 아메리카 원주민과 지속적인 수탈관계를 맺고 유럽인들의 진출을 시작케 한 사람은 콜럼버스가 처음이다.[7] 첫 상륙 이후로도 그 후에도 4번의 항해를 했다.

2.2 콜럼버스는 지구 구형론의 선구자였는가?

위인전같은 곳에선 사람들이 지구가 평평한 줄 알고 콜럼버스의 탐험에 반대했다는 식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이건 19세기 소설가 워싱턴 어빙의 소설의 묘사일 뿐이지 이미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은 고대 그리스 시절에 발견된 사실이었고 애초에 지구가 둥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이미 1700년 전에 지구 둘레의 계산까지 끝나 있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일화도 천동설에 대한 논쟁이였지 지구 구형론에 대해서는 중세시대 종교인들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과 알마게스트의 주장대로 지구 구형설을 믿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원양 항해기술 자체가 지구가 둥글다는 전제하에 발전한 것이었고, 바다를 끼고 사는 뱃사람들에게 있어선 상식이나 다를 바 없는 사실이 바로 지구는 둥글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탐험을 거부한 이유는 콜럼버스의 매우 매우 심각하게 틀린 거리계산법 때문이다. 어느 정도냐면 대충 지구 반바퀴 정도. 좀더 정확히는 유럽에서 아시아, 즉 일본중국까지의 거리인 19600 km를 3700 km로 줄여버렸다. 깊게 따질 것 없이 인도와 미국의 거리를 생각해보면 된다. 콜럼버스의 계산대로라면 미국이 있어야할 위치에 인도나 일본이 있었어야 했었던 것. 즉, 콜럼버스는 지구가 둥글다는 신념으로 항해를 마친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완벽히 빗나간 계산을 가지고 항해를 한 것이다. 때문에 콜럼버스 이전에도 아시아 탐험대를 여러번 조직해봤던 포르투칼의 왕 주앙 2세나 영국, 제노바의 정부 입장에서는 어디서 굴러온 이상한 놈이 맞지도 않은 이론을 들먹이면서 대규모 투자를 해주라고 징징대는 콜럼버스를 보고있으면 사기꾼이 생각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탐험대 선원들도 정규 선원들이 아닌 죄수들로 구성된 이유도 상식선에서 이런 어처구니 항해를 했다가는 대서양에서 플라잉 카탈루냐가 될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콜럼버스를 반대한 사람들은 당시로서도 지금으로서도 매우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이었다! (아메리카 대륙을 모르던) 당시 상식선에서는 사람들은 대서양으로 인도를 가기엔 너무 멀어 가다가 굶어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만약 아메리카 대륙이 하와이나 이스턴 섬 정도의 위치에 있었더라면 콜럼버스는 굶어죽거나 선상반란으로 죽었을 것이다. 비슷한 사례로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세계일주 선단도 콜럼버스의 가설보다 훨신 짧은 항해를 했음에도 괴멸적인 타격을 입고 수십 명의 사람들만 간신히 살아 돌아온 것을 생각한다면 콜럼버스가 얼마나 오류로 점철된 허황된 꿈을 가지고 항해를 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 이를 두고 콜럼버스가 투자를 위해서 사기를 친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1차 원정대에 자신도 동행했고 언급했다시피 콜럼버스 본인은 죽을 때까지 자신이 당도한 곳을 인도로 믿은걸로 보아 사기를 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자신이 발견한 곳이 인도 본토는 아니었을 것이다 정도는 인지했을 거란 주장이 많다. 인도랑 무역을 얼마나 오래 했는데 설마 몰랐을까 이는 당시 유럽인들의 인식도 그러했는데 허나 그렇다 해도 기껏해야 아시아의 동북부 지역 정도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았고 아시아도 유럽도 아닌 전혀 별개의 대륙이라는 사실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이탈리아 항해사인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아메리카 대륙을 아시아가 아닌 신대륙으로 선포할 때까지 사실로 받아들여졌다.[8] 그래서인지 이 대륙의 이름은 콜럼버스가 아닌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딴 아메리카라고 이름지어졌다. 그런데 이것도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아닌 리처드 아메리크에서 따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근거는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아메리카에 오기 2년 전에 이미 아메리카 대륙이라는 지명이 문헌에 나오고 당시 지명은 사람의 이름이 아닌 성에 따라서 짓는다는 것.

  • 하지만 콜럼버스에서 유래한 이름도 많다. 미국을 시적으로 표현할 때에는 아메리카 대신 콜럼버스에서 여성형 어미를 붙인 컬럼비아(Columbia)라는 말을 많이 쓴다. 이는 미국 수도 워싱턴의 공식 명칭인 컬럼비아 특별구(District of Columbia, D.C.)에서 쓰이고, 그 외에도 캐나다브리티시 컬럼비아를 비롯, 수많은 지명에서 컬럼비아라는 말을 찾아볼 수 있다. 콜럼버스 이름을 그대로 쓴 오하이오의 주도 콜럼버스도 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도 콜럼버스 이름에서 유래한 지명이 많다. 콜롬비아 공화국이 이러한 지명의 사례로 가장 유명하고, 콜럼버스의 스페인식 이름인 콜론이라는 지명도 파나마 등 여러 나라에 있다.

카리브해를 한때 서인도 제도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 역시 콜럼버스의 인도 항해를 기념(!)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여기에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경멸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3 비판

일반인의 시점에서는 아메리카를 발견한 위인으로만 여겨지고 있지만, 사실은 이 인간이 진짜로 과연 위인이라고 불릴 만한 자격이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논쟁이 많다. 즉, 실상은 원주민 수천 명을 학살하고 노예로 팔아치웠으며, 각종 재물을 약탈해 간 인간쓰레기, 천하의 개쌍놈 등이자 희대의 학살자 뿐이었다는 것.

위인전에서는 그의 탐험 목적이 순수한 탐구심이었다고 묘사하지만, 사실 앞서 서술했듯 그의 1차 원정의 진정한 목적은 순수한 탐구심이 아니라 (富)였다. 그리고 그는 순진무구한 '인디언'[9]들을 접하면서 원주민들이 가지고 다니는 에만 관심을 가지며 1차 원정을 끝냈다.

문제의 2차 원정에서부터 콜럼버스의 탐욕이 본격적으로 드러난다.[10] 우선 그는 1차 원정에서 돌아올 때 선원 30명 가량을 아이티에 남겨두고 스페인으로 돌아와 이사벨라 여왕에게 이번 원정에서는 엄청난 수의 노예와 금을 얻을 수 있다며 1차 원정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원조를 받아낸다.[11]

이렇게 2차 원정이 시작되었으나 막상 다시 아이티로 돌아와 보니 일전에 남겨놓은 30명 가량의 선원들은 병으로 죽거나 원주민들에 의해 죽어 있었다. 그런데 딱히 원주민 잘못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게 선원들이 한 사람당 최고 5명씩 원주민 여자를 거느리며 금을 찾기 위해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행패를 부린다든가 했기 때문.[12]

이후 콜럼버스는 안전을 위해서 호전적인 부족뿐만 아니라 보통 원주민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한 마을에서는 700명 가량을 자비도 없이 모두 생포해 창칼로 찔러 죽였다. 그 후로도 학살은 계속 이어졌다.[13] 3, 4차 원정이 계속될수록 콜럼버스의 후계자들은 점점 더 잔인해져선 마스티프라고 하는 맹수사냥용 초대형견을 데리고 와서 원주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살아남은 원주민들은 노예로 팔리거나 14세 이상의 원주민들은 석 달마다 콜럼버스가 제시하는 금 할당량을 채우지 못했을 시 손이 잘리는 형벌을 받고 과다출혈로 죽어갔다.

콜럼버스가 오기 전까지 30만명이었던 아이티 섬의 인구느 2년만에 10만 명이 죽고 나중에는 결국 500명밖에 남지 않아 처음에는 원주민 노예들을 수출하다가 나중엔 역으로 흑인노예들을 수입해 왔다. 하지만 흑인노예들도 원주민 노예들처럼 얼마 안 가긴 마찬가지였다고 한다.[14]

위에서 서술되었듯이 콜럼버스 자신은 그 땅이 중국의 남서부, 즉 광둥 성이나 하이난 성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중국 황제나 황금 광산을 찾았지만 당연히 나올 턱이 없었다. 사실 중국이 아니었던게 콜럼버스에게는 다행이었던 것이, 만약 진짜 중국은 물론이고 조선일본에서도 그렇게 안하무인으로 굴었다간 대포 몇 개 들고 깔짝거리는 해적들을 순삭했을 거다. 그 당시 중국은 전성기였던 명나라 시대로, 화포류가 꽤 퍼져 있었다. 그리고 조선에서만 해도 아무리 임진왜란이 있었다지만 임진왜란은 제승방략 체계 자체의 문제에 불과했고, 이 체계조차도 임진왜란의 경우처럼 십수만의 대규모의 정규군대에나 약했지 콜럼버스 탐험대 수준의 서양 오랑캐 수십명은 그냥 기병포병 몇몇 보내 쓸어버릴 만 했다. 실제로 이 즈음 포르투갈 무장 상선들이 광둥 성에서 깽판을 치다 명군에게 진압당하고 가지고 있던 물자와 무기를 몰수당했던 일이 있었다. 여담으로, 이때 명군이 포르투갈의 후장식 선회포를 얻은 걸 모방해 도입한 게 불랑기포다.

[1]
[2]

1519년, 다른 스페인 관리들이 본국에 이 학살을 알렸지만 당연하게도 충격적이게도 본국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애초에 당시 백인들의 눈에 원주민이나 흑인들은 인간으로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15] 이후 콜럼버스는 죄수선에 실려서 소환조치 되었다. 원주민 학살건도 있지만 실은 그렇게 사망자를 많이 내고도 황금을 전혀 건지지 못했다는 점이 더 문제시되었다.
더구나 별로 건져온 것도 없는 주제에 자기가 정복한 땅의 총독 자리와 지도자 자리를 요구했으며, 해군 제독이라는 지위를 주장하면서 이것을 자식들에게 세습시켜 달라고까지 요구했고, 사업에서 얻은 이득의 1/10은 자신의 것으로 하겠다고 했다. 주는 것도 없이 얻어만 먹으려는 심보였으니 그야말로 버틸 재간이 없었다.[16] 그 외에도 부하 선원이 발견한 섬을 자기가 발견한 것으로 협박을 해서 거짓 보고한 적이 많다. 그리고 그에게 호의적으로 다가왔던 원주민들을 강제로 끌고 가서 노예 시장에 팔아넘긴 기록도 있다. 한마디로 인성 자체가 쓰레기+양아치였던 것이다.

다만, 원주민들은 자연친화적이고 평화롭게 살고 있었는데 유럽 침략자가 그들의 유토피아를 파괴해버렸다는 나이브한 주장은 영화 아바타에서나 존재하는 일로 사실은 원주민들끼리의 전쟁도 빈번했으며 아즈텍 같이 발전된 곳에서는 생태계 파괴도 여지없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유럽 침략자들의 침략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고, 또한 콜럼버스가 저지른 짓은 당시 기준으로 봐도 꽤나 사악한 짓이었다. 오히려 학살자로 널리 알려진 에르난 코르테스가 훨씬 더 온건하게 통치를 했다. 비록 아즈텍 제국 때문이지만 자신에게 호의적인 원주민들은 확실히 보호했고 의도적인 학살도 크게 없었다. 그리고 적어도 코르테스는 충성을 맹세한 원주민을 보호하고 그들은 우리 백성이자 동족이라고 약속은 받아준 사람이고, 덕분에 (아즈텍에 대한 원한도 있었지만) 틀락스칼텍의 경우처럼 슬픔의 밤때 개털된 코르테즈를 끝까지 지지한 원주민 세력도 나온다. 게다가 코르테스는 아즈텍의 인육공양을 막으려고 사재를 털어서 자기네 나라에서 돼지 60여 마리를 사다가 아즈텍에 선물하기까지 했다. 돼지라는 동물은 번식력이 끝장나게 좋아서 불과 60마리에 불과했던 코르테스의 선물이 단 3년 만에 3만 마리까지 불어났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그런 건 없었다. 야만인과 약속은 어기는 것이라고 당연히 여겼는데 부하들에게도 하두 이래서 견디다 못한 부하들이 몇번이나 반란을 일으키고 그에게 덤벼들기까지 했다. 1504년 1월에는 부하 일부와 이젠 원주민들까지 손잡고 콜럼버스를 죽이려 들었는데 겨우 잠자다가 대충 입고 속옷차림으로 겨우 달아나 다른 스페인 주둔군에게 보호를 받아 살았다. 그 꼴을 본 스페인군들도 웃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4 몰락과 지금의 대우

간신히 누명을 벗고 탐험에 나섰지만 그의 후원자이던 이사벨라 1세가 죽자마자 몰락하게 된다. 당연히 무수한 빚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결국 겨우 몇 해 사이에 그야말로 몰락하여 아들 디에고와 몇몇 소수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죽게 된다. 병명은 알려지지 않았는데 매독으로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참고로 콜럼버스의 시신 일부가 있다고 전해지는[17] 도미니카 공화국에선 당당하게 그가 매독으로 죽었다고 설명이 동판에 새겨져 있다. 이곳을 찾은 매독 연구 관련 책자 지은이에게 현지 길라잡이도 비웃듯이 "그가 매독으로 죽었다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사실아닙니까? 그나마 이게 하느님이 내리신 작은 벌입니다." 라고 씹어준 적도 있다.

앞서 말했듯이 제3회 항해(1498∼1500)에서는 트리니다드 섬과 오리노코 하구(河口)를 발견하였으나, 히스파니올라에서 내부 반란으로 그의 행정적 무능이 문제화하여 본국으로 송환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항해에서 그는 온두라스와 파나마 지협(地峽)을 발견하고 가장 고생스러운 항해를 마치고 귀국하였다. 1504년에 이사벨이 죽은 뒤 그의 지위는 더욱 하락하였으며, 그의 직책의 세습까지도 인정되지 않았다.[18] 심지어는 20세기 학자들조차 그를 학살자라고 비판했다. 만일 시튼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창작물이 나오면 아마 후손놈한테 두들겨 맞아죽을 게 뻔하다

10월 12일 그의 아메리카 '발견'을 기념해 남북 아메리카 여러 나라의 기념일로 지정되어 있고, 일부 국가에서는 공휴일이다. 미국에서는 매년 10월 둘째주 월요일을 콜럼버스 데이라 하며 기념한다. 기념일이나, 쉬어도 되고 안 쉬어도 되는 기념일로 지역에 따라 공휴일이기도 하고 그냥 기념일이기도 하다. 웬만한 직장/학교는 이날 안 쉬는 지역에서 만약 이날 쉬는 곳이 있으면 '우리 직장/학교는 널널합니다 ^^'라 말하는 거나 다름없다. 하지만 일부 지역은 공휴일이므로 직장/학교도 다 쉬게 되어 있다.

미국에서 하와이, 알래스카, 사우스 다코타, 그리고 오레건 에서는 콜럼버스 데이가 없는데, 하와이와 알래스카는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과 관계가 없는 지역이며, 사우스다코타는 이름의 유래에서 보듯 원주민이 많은 지역이라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이며, 오레건은 바로 윗동내이자 같은 북서부 경제권역을 구성하는 워싱턴시애틀과 비슷한 시기에 콜럼버스 데이 기념을 중단했다. 워싱턴 주의 중심도시 시애틀은 그 어원때문이라도 쉬지 않고, 주 전체는 아니더라도 시애틀과 그 주변 카운티에서 기념을 중단하였으며, 주 공휴일에도 등록되어있지 않다.
그 외에도 아이오와네바다에서도 공식적으로 그런날이 있다는걸 알리기는 하나, 쉬거나 기념하지는 않는다.

남아메리카 여러 나라에서는 이 날을 "종족의 날(dia de la raza)"이라고 하는데, 유럽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이 처음 만난 것을 성대하게 기념하는 것으로 여러 나라에서 공휴일로 되어 있기도 하나, 원주민들은 왜 그런 개쌍놈을 기념하느냐며 학을 떼기도 한다.

최근 들어 콜럼버스의 날을 원주민의 날로 바꾸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IMG_0600_resized.jpg
스페인 바야돌리드에서 세상을 떠난 후 그곳에 묻혔던 콜럼버스의 유해는 1542년 대서양 건너편 산토도밍고로 이장되었고, 1795년 프랑스가 히스파뇰라 섬을 점령하자 아바나로 이장되었으며,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쿠바가 독립하자 다시 스페인으로 옮겨져 세비야 대성당의 남쪽 익랑에 안장되었다. 그의 유언인 '죽어도 스페인 땅 안 밟겠음, 흥'을 고려하여 그의 은 현재 4명의 동상[19]에 의해 지면으로부터 붕 떠서 받들려 있다. 스페인이 이러한 무리수까지 두면서 그의 시신을 운구한 이유는 비록 이 인간이 악행과 온갖 뻘짓을 자행했지만 결과적으로 스페인의 황금기는 이 인간의 행적으로 부터 시작되었기 때문.

5 콜럼버스의 교환

콜럼버스와 유럽인에 의한 아메리카와 유럽의 동식물, 문화전파를 콜럼버스의 교환(Columbian Exchange)이라고 부른다.

결과적으로 유럽에서는 아메리카에서 가져온 생산성과 고자 높은 작물들로 인구가 늘어난 반면, 아메리카에서는 유럽에서 가져온 전염병으로 원주민의 대부분이 죽었다.[20] 그리고 정말 운좋게도, 아메리카 원주민은 딱히 치명적인 공기 전염병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21] 만약 그랬었다면 구대륙 사람의 대부분도 같이 몰살당했을 것이다.

­유럽아메리카아메리카→유럽
동물고양이, 낙타, , , 당나귀, 염소, 꿀벌, , 패릿, 거위, 토끼, 돼지, , 비둘기, 호로새, 물소알파카, 밍크, 기니피그, 칠면조, 야마, 머스크오리
식물아몬드, 사과, 살구, 아티초크, 아스파라거스, 바나나, 보리, 비트, 빌베리, 비터멜론, 후추, 브로콜리, 양배추, 케일, 콜리플라워, 방울다다기양배추, 오렌지색메론, 카람볼라, 카다멈, 당근, 시나몬, 정향, 커피, 오렌지, 레몬, 오이, 대추야자, 아마, 무화과, 마늘, 아메리카머루, 헤이즐넛, 대마초, 키위, 상추, 망고, 기장, 귀리, 오크라, 넛메그, 올리브, 양파, 복숭아, 아편 양귀비, 완두콩, , , 피스타치오, 루바브, , 호밀, 대두, 사탕수수, 토란, , 순무, , 호두, 수박, 양조용포도, , 목화악키ackee[22], 용설란, 선인장, 아마란스, 애로루트, 아보카도, 강낭콩, 검은나무딸기[23], 고추, 피망, 블루베리, 치클, 캐슈넛, 치아시드, 번련지, 체리모야, 커스타드 애플, 크랜베리, 코카나무, 카카오, 구아바, 허클베리, 해바라기, 돼지감자, 옥수수, 지카마, 카사바, 파파야, 패션프루트[24], 땅콩, 피칸, 파인애플, 감자, 호박, 퀴노아, 고무나무, 사포딜라, 딸기[25], 고구마, 담배, 토마토, 바닐라, 야생쌀[26], 마떼, 실유카, 주키니
병균수두, 페스트, 콜레라, 감기, 디프테리아, 인플루엔자, 한센병, 말라리아, 홍역, 성홍열, 장티푸스, 천연두, 발진티푸스, 백일해, 황열, 매종[27]베젤(= 풍토성 매독), 열대성 백반피부염, 샤가스병, 매독

6 기타

아들이 둘 있었는데 전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디에고는 아버지의 직책을 명칭만 이었지만 손자인 루이스는 스페인 국왕 카를 5세[28] 로부터 베라과 지역[29]을 봉토로 받음으로써 1대 베라과 공작(Ducado de Veragua)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은 베라과 공작위를 이어 현대까지 내려오고 있다. 조상이 조상인지라 이쪽에서는 해군이나 해운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이 꽤 많이 나온다고 하는데, 17대 공작 크리스토발 콜론 데 카르바할 이 마로또 (1925~86)는 해군 중장까지 지냈다.

한편 콜롬버스의 다른 아들 하나는 첫 부인 사후 내연녀와의 관계에서 나왔는데, 이사벨라 여왕의 시동으로 들어가 궁정 신하로 출세하게 된다. 다만 아버지와 달리 그냥 관리로 살았다. 참고로 책벌레였던 탓에 이 사람이 가진 도서 컬렉션은 지금도 스페인에서 알아준다고 하며 콜럼버스의 전기를 최초로 쓴 사람이기도 하다.[30]

달걀의 아래쪽 껍데기를 살짝 깨뜨려 달걀을 똑바로 세워, 신항로 개척이 불가능할 것이라던 사람들을 데꿀멍시켜버린 일화로 유명하지만, 사실 달걀을 세운 것은 콜럼버스가 아닌 필리포 브루넬레스코라는 이탈리아의 건축가이다. 브루넬레스코가 피렌체 성당의 설계를 공개했던 당시 일어난 일이라는 것. 하지만 실제 있었던 일인지는 명확치 않다. 그러나 콜럼버스의 달걀을 세운 일화가 와전되어 만들어진 것만큼은 분명하다.

- 소프라노소 시즌3에서 이탈리아인들이 콜럼버스에 대해 갖는 감정이 어떤 것일지 알 수가 있다.

세계적인 물류기업인 DHL에서는 업계 최초로 해외발 미국행 항공 특송 서비스를 시작했다는 자사의 기록을 홍보하기 위해,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을 테마로 재밌는 광고를 만들기도 했다. 대략적인 내용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하고 기뻐하는데, 이미 DHL 배달원이 콜럼버스를 한참 기다리고 있었으며 한국에서 온 물건인데 확인해 달라고 콜럼버스에게 서명을 부탁하기까지 한다. 마지막에 콜럼버스가 DHL이 전달해 준 물건이 뭔지 박스에서 꺼내보니 다름아닌 모터보트 엔진(...) 이 CF는 원래 1998년에 호주에서 제작된 CF를 1년 뒤인 1999년 당시 DHL의 한국 대리점 역할을 했던 일양 익스프레스에서 수입하여 우리말 더빙과 자막 편집만 거쳐 그대로 방영한 것으로, 원판 CF에서는 배달원이 싱가포르에서 온 물건이라고 말한다. 참고로 한국판 CF에서 배달원의 목소리 더빙을 맡은 성우강수진이다.

어쌔신 크리드에서는 암살단의 협력자로 나온다. 어? 아메리카 원주민 성당기사단 단원설[31]

에로게 영웅전희에서는 모에화되어 USA의 수장으로 등장하며, 플레이어와 세력이 인접하면 80.000골드와 자신의 영토를 교환하자는 이벤트를 볼 수 있다. 이 때 제안에 따라 영토를 구입하거나 제안을 거절한 후 USA를 멸망시키면 동료로 영입할 수 있다.

대항해시대 5에서는 라몬의 해도에 감춰진 비밀을 해명하기 위해 항해한 주인공 일행이 제노바에서 프랑스 서해안의 해도 2를 얻기 위해 찾아오자 자신을 박대한 포르투갈 소속 사람이라는 이유로 매몰차게 쫓아내면서 국적을 바꾸라고 했으며, 주인공 일행이 쥬피톨 에르난데스에게서 받은 잉글랜드 국적 증명서를 가져오자 주인공 일행에게 해도를 건네준다.

주인공 일행이 메르카토르로부터 라몬이 카보베르데에서 서쪽으로 향했다는 것을 듣고 신대륙으로 향했다고 생각해 콜럼버스를 찾아가는데, 주인공 일행이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하자 콜럼버스는 자신이 찾은 것은 인도라면서 화내면서 주인공 일행이 이야기를 제대로 하기 전에 쫓아낸다. 주인공 일행이 토스카넬리에게서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대해 언급한 것에 대해 기분 나쁜 이유를 들은 후에는 니나의 설득으로 주인공 일행과 항해를 하면서 파리, 이스탄불, 케이프타운, 누비아 거점 등을 다녔다.

그래도 바르셀로나에서는 영웅시되는 모양이다. 다만 본문상단에도 적혀 있지만, 콜럼버스의 행적은 카탈루냐에 이득이 가는 결과물을 만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카탈루냐가 스페인에 흡수합병되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면 몰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콜럼버스를 밀어주는건 아무래도...

외계인의 지구방문(혹은 침공)이 주제로 나올때 흔히 콜롬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사건을 많이 빗대여 말한다. 그 예로 스티븐 호킹은 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한다면 외계인은 콜럼버스, 지구인은 아메리카 원주민꼴이 될 것이라고 했다.

7 창작물

적어도 세 편의 영화화가 이뤄졌다.
Christopher_Columbus_FilmPoster.jpeg
가장 걸작은 프레드릭 마치가 주연한 1949년 영화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40년대 말 영화치고는 남미 원주민들의 학살 등의 이야기도 중립적으로 다루고 있다. 영국과 미국, 프랑스 합작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흥행은 그리 안 좋았는데 20만~30만 파운드로 만들어 12만 1천 파운드를 벌어들였다.

1992년, 그의 미국 대륙 서구권 발견 500주년을 기념해서 나온 영화가 두 편이 있는데 하나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er Columbus : The Discovery)가 먼저 개봉했다.
Christopher_columbus_the_discovery.jpg
유어 아이스 온리부터 살인 면허까지 다섯 편의 007 시리즈를 연출한 존 글렌이 감독을 맡고, 그리스계 프랑스 배우인 조르주 코라파스가 콜럼버스로 나오고 인디아나 존스가 될 했던 톰 셀릭(그는 이걸로 골든 라즈베리 최악의 남우조연상을 받았다...)이 왕으로 나오고 말론 브란도가 수도사로 나왔다. 그밖에 베니치오 델 토로도 나왔으며 슈퍼맨 시리즈를 제작했던 살카인드 부자가 제작을 맡았다. 워너브라더스가 배급을 맡은 이 영화는 1992년 8월 21일에 미국에서 개봉했는데 4500만 달러를 들여 만들어 전세계에서 8500만 달러를 벌어 흥행은 실패했으나 같은 시기 개봉한 경쟁작인 1492 콜럼버스보단 약간 더 흥행은 했다...이걸로 위안을 한국에서는 개봉도 못하고 비디오로만 먼저 나왔으며 나중에 공중파로 더빙 방영했다.

1492film.jpg
또하나는 당시 가장 유명하고 잘 알려진 작품으로 리들리 스콧이 감독,공동 제작하고 제라르 드파르디외(콜럼버스 역)와 시고니 위버(이사벨라 여왕 역)가 출연한 《1492 콜럼버스》(원제 : 1492 Conquest of paradise)이다. 1992년 10월 9일에 북미 개봉을 했는데 고증오류도 적지 않지만[32] 원주민에 대한 착취와 학대 등의 어두운 측면도 다루어 균형잡힌 시각을 유지하려 애썼다는 점에서 꽤 볼만한 작품. 다만 영화 내에서 콜럼버스 개인에 대해서는 무척 호의적이고 역사와 안맞는(원주민들에게 너그러운 유화책을 편다던가... 대신 동행한 에스파냐 귀족들이 착취와 학대를 저지르고 콜럼버스와도 충돌하는 것으로나타난다.)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은 주의할 점이다. 4700만 달러를 들여 만들었으나 전세계 흥행 다 합쳐서도 7천만 달러를 겨우 넘겨 본전치기조차 실패했다.
e0006522_576e17cf019be.jpg
한국에서는 영웅인가? 약탈자인가? 라는 문구를 달고 1992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개봉했으나 서울관객 33,700여명에 그쳐 한국에서도 망했다. 여하튼 92년작 두 영화 모두 흥행은 실패하고 지금은 잊혀졌다.



'1492 콜럼버스' OST.
다만 반젤리스가 작곡한 OST가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음악은 의외로 거대한 건축물 등을 보도할 때 배경음악으로도 많이 쓰이는데, 가끔 몇몇 다큐멘터리나 뉴스 등에서 바다나 큰 강 등에 송전탑이 줄줄히 늘어선 송전선로나 큰 철탑 등을 건설한 소식을 보도하면서 그 위용을 보여주는 씬에서 많이 사용하는 배경음악이 바로 이 음악이다(...). 그래서 큰 송전탑이 줄지어 서 있는 광경이 나오면 자연스레 이 음악을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1. 후술하지만 사실 당시의 사람들도 아리스토텔레스덕에 지구가 둥글다고 알고있었다.
  2. 당시 스페인은 카스티야 왕국아라곤 왕국동군연합이었는데, 이사벨 1세는 카스티야 국왕이었다. 카스티야가 아무래도 아라곤보다 훨씬 컸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지원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성과도 독차지. 애초에 카스티야는 대서양에, 아라곤은 지중해에 접하고 있어서 대항해시대 이후 아라곤은 찬밥신세가 된다.
  3. 이들이 왔다 간 아메리카 대륙은 당연히 캐나다 동부이다
  4. 참고로 프랑스의 노르망디 어부들 사이에서도 캐나다의 래브라도 반도에 대해 언급이 있었고 아일랜드 전설에 나오는 이어도삘의 유령 섬 오브라세일도 여기로 강하게 추정된다.
  5. 참고로 이집트에 흑인 왕조인 누비아 왕조가 들어선 적이 있긴 했다.
  6. 그런데 브라질 동부지역은 확실히 아프리카와 가깝기는 하다.
  7. 제임스 로웬이 쓴 Lies My Teacher Told Me 참조.
  8. 아메리고의 항해중 일부가 논란이 이는건 사실. 이후 유행한 어느 책에서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신대륙의 발견자라는 헛소문이 돌았고, 당대의 지도학자가 그 책에 낚여서 대륙이름에 이 사람의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
  9. 실제로 그들은 콜럼버스 일행이 신기해서 물이고 음식이고 가져다 주며 환영하며 철제무기를 보고 신기해 했다.
  10. 1차 원정에서는 콜럼버스가 유럽으로 보낸 기록을 보면 원주민들을 우호적이고 영리하다고 묘사하고 있으나, 2차 원정 때부터는 멍청하고 폭력적인 야만인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11. 1차 원정 때의 선박수는 여왕에게 대여받은 3척과 아는 사람에게 빌린 1척 도합 4척이 전부였다. 하지만 2차 원정 때는 17척으로 원정을 시작했다. 선원들은 1차, 2차 모두 면죄부를 미끼로 범법자를 모집하기는 했지만 2차는 전직 군인들도 모집함으로써 원주민들을 족칠 전력을 모은다. 실제로 대포, 갑옷 등 무기를 들고갔다.
  12. 단, 이 부분은 확인되지 않았다. 왜냐 하면 남겨 놓은 선원 중에 살아남은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단지 이후 온 탐험가들이 위의 서술대로 생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추측하는 것.
  13. 아무리 순진무구한 원주민들이라도 저항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당시 원주민들은 철의 주조법을 알지도 못했고 로 만든 무기들을 가지고 싸웠으니 당연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덧붙여서, 저항하다가 붙잡힐 시 불태워졌기 때문에 패배에 직면했을 시 독약을 먹고 자살을 했다.
  14. 보르헤스의 책, 픽션들의 첫 페이지에 나온다. 대충 번역해 보자면, "지옥같은 광산에서 여위어가고 있던 인디언들을 불쌍히 여겨, 베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는 황제 샤를 5세에게 흑인들을 카리브 제도로 데려와 그들이 대신 지옥같은 광산에서 여위어가게 하도록 청했다."(...) 참고로 이 베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는 신부로 가혹한 노동을 하는 인디언동정하고 그들의 처우를 개선하려고(?) 이런 제안을 한 것이었다. 그러다 나중에 생각을 바꾸고 흑인노예의 대우도 개선하라는 주장을 했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15. 그나마 흑인들을 겉으로나마 사람이라고 인정하기 시작한 게 1960년대 쯤이다. 그 이전의 인식이라고 해봐야 인간 이하의 가축 비스무리 정도였으니...
  16. 빌 브라이슨은 10년도 안되는 시간 동안에 콜럼버스처럼 몰락하려면 대단한 무능과 오만이 필요한데 콜럼버스는 그 2가지 모두를 갖추고 있었다라고 평가했다.
  17. 물론 확실한 인정을 받은 건 아니다. 되려 과학적인 조사를 거부하고 있어 의심을 많이 받는다.
  18. 다만 실제적인 직책의 세습은 인정되지 않았지만 명칭은 대대로 가지게 된다.
  19. 관을 들고 있는 앞의 두 사람은 그의 항해를 지지한 두 왕, 뒤에서 고개숙이고 짊어지고 있는 두 왕은 항해 지원을 거절한 두 왕이다. 옷차림에 상징물이 있기 때문에 알아보기 편하다.
  20. 그나마 메스티소(백인-원주민 혼혈)로 피가 이어진 경우는 많으나 문화적으로는 유럽에 가까운 경우가 대부분이고, 원주민 인구가 많은 곳(볼리비아, 멕시코, 페루)도 19-20세기의 급속한 인구증가 버프의 영향이 컸다. 그리고 북미나 카리브,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의 경우는 메소티소의 인구비율도 적어서 원주민의 피가 이어진 경우가 많지 않다.
  21. 매독은 성접촉을 통해 전파된다.
  22. 자메이카 원산의 과일
  23. 블랙베리
  24. 시계초의 일종
  25. 정확히는, 오늘날 우리가 먹는 딸기의 교배친들. 유럽에도 동속이종의 야생 딸기는 존재하였다.
  26. 벼 종류는 아니고, 줄의 한 종류이다.
  27. 열대 피부병
  28. 스페인 국왕으로서는 카를로스 1세
  29. 현재 파나마의 베라과 지역. 선조의 업적을 주장하며 상당한 영토를 주장하는 콜럼버스의 후손들과 스페인 왕실간의 오랜 갈등을 봉합하기 위하여 일단 명목상 영토인 미정복지를 던져주고 알아서 정복하라고 작위를 내렸다. 1대 공작인 루이스 콜론은 파나마쪽으로 가서 자신의 통치권을 확립하려 했지만 원주민의 반발과 악천후 등으로 실패하고 20년만에 스페인으로 복귀하면서 봉토를 반납하는 대신 작위의 보존과 연금을 받기로 하였다. 참고로 내려진 봉토가 완벽한 정사각형이었다.
  30. 리들리 스콧의 영화에는 콜럼버스는 인정도 못 받다가 이 아들의 전기로 진가가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그건 오류이다. 적어도 당대에는 연대기 작가들 중에 콜럼버스를 찬양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31. 하지만 암살단 입장에서도 협력자를 잘못 고르는 경우가 종종 있는 모양이다. 대표적으로 마오쩌둥...이 의심받고 있었으나 어쌔신 크리드 2의 시나리오 디렉터가 성당기사단이었다고 공인한 바람에 콜럼버스는 더 이상한 위치가 되어버렸다.(...) 다만 암살단이 언제나 정의를 대변했던 것은 아니다. 암살단도 여러 병크들을 일으켰고, 이것들을 다잡은 것이 알테어, 에지오 같은 유명한 인물들인 것이다. 그러니 암살단이 콜롬버스를 협력자로 뒀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이상할 점은 없다.
  32. 예를 들자면, 1492년 항해에 나서기 전 콜럼버스 자신이 아프리카 희망봉 경유 인도행 항로 얘기를 언급하는데, 실제로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행 항해가 성공한 건 그로부터 6년 뒤(1498년)이다. 그리고 추가 항해를 준비하던 동안 자신이 "발견"한 "신대륙"이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라고 명명되었다는 소식을 듣지만 (대륙의 이름을 아메리카라고 지어 소개한 책자는 이미 발표되어 있었던 시점이었으나) 이제 막 탐사를 시작한 당시의 시점에서 아메리카라는 지명이 확정되어 보편화되었을지는 의문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