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전쟁/해석

페르시아 전쟁은 후일 세계를 지배하게 된 서구문명의 시초인 고대 그리스 문명을 페르시아의 침공으로부터 지켜냈다는 해석이 있는 전쟁이라 전쟁의 결과가 후대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해선 논란이 많다. 특히 주된 해석이 서구중심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해석이 아니냐라는 의견과 그렇지 않다는 의견이 대립하는 중.

1 일반적인 해석

페르시아군이 전쟁에서 이겼다면 인류 문명의 역사는 영원히 바뀌었을 것이라는 얘기가 많다. 그리스가 승리한지 수십년 후, 그리스를 통일한 알렉산드로스 3세가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유럽과 이집트, 아프리카 일부, 중동, 동방까지 정복하는 기염을 토해내면서 그리스 문명의 흔적이 퍼져나간다.

그때 퍼져나간 문명의 영향을 받아 이탈리아 반도에서 로마 제국이 발전하고, 그 로마 제국이 다시 지중해유럽을 지배한다. 그리고 영국을 점령하여 영국에 문명을 남겼고, 그렇게 성장한 영국 문명의 흔적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으니 중요하게 여길만도 하다.

덕분에 전쟁사를 따지고 들어가다 보면 책에서 제일 첫페이지에 나올만한 내용이 바로 아테네가 치루었던 마라톤 전투의 전령 이야기나 테르모필레 전투스파르타 전사들의 희생이다.[1]

사실 과거엔 '그리스인들이 자신들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전제주의 국가 페르시아의 침략과 맞서 싸운 위대한 전쟁'으로 칭송받았으나 요즘은 별로 그리스가 페르시아보다 나은 게 없고, 페르시아가 오히려 나은 부분도 있다는 게 밝혀져서 좀 위상이 추락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리스 문명에 서구 문명사에서 차지하는 비중 때문에 여전히 높게 평가받고 있다.

2 서구중심주의적인 해석이라는 의견

이 전쟁의 결과에 대해 너무 서구중심주의적인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의견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따지고 보면 그리스 문화는 당시 페르시아 문화보다 훨씬 뒤져 있었으며, 또한 페르시아 문명은 오히려 그리스 문명보다 훨씬 평등했다(여성인권이 존중됨)[2]는 것.

일례로 페르시아의 황제들 중 하나였던 키루스 2세는 세계 최초로 인권 보장 정책을 펼친 황제였으며, 그에 비해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스파르타는 노예 900명을 끌고 죄다 같이 죽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스파르타 시민병 300명은 300 등으로 현대에까지 유명하지만, 스파르타군과 함께 싸우다 같이 몰살한 테스피아이군 700명은 완전히 잊혀져 버렸고, 테베군 400은 마지막 싸움이 일어나자마자 항복해 사기를 떨어뜨렸다는 누명을 뒤집어썼는데 이것이 과연 정당한 일인것인가라는 의견도 존재.

또한 그리스인들이 페르시아 내 그리스계 주민들을 선동하는 것에 대하여 크세르크세스가 본때를 보여준 것이란 해석이 있다. 사실 실제로 페르시아가 테실리아에 남겨놓은 잔여병력이 이듬해에 재침공하자 아테네는 또 불탔다. 거기다 테르모필레 전투에서는 스파르타의 왕이 죽임을 당했으니 피해가 큰 것은 사실이다.

이쪽에서 주장하는 좀 더 온건한 해석들 가운데는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전력을 끌어모은 그리스군과의 육상전에서 페르시아가 대패했고, 동시에 일어난 미칼레 전투에서 에게해에 남겨놓았던 페르시아 해군까지 완파당했다는 걸 생각하면 페르시아가 이겼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아테네는 두번 불탔으며, 스파르타의 왕은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은 피할 수 없기에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페르시아 국민들이 보기에 페르시아 전쟁은 페르시아의 승리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3 기존의 해석이 정당하다는 의견

사실 페르시아 문명이 그리스 문명에 비해 훨씬 앞서있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증명할 길이 없으며 현대 문명에 가장 많은 기여를 한 것은 페르시아 문명보다는 그리스 문명이라는 점은 과연 페르시아 문명이 그리스 문명보다 앞선 것인가?라는 의문을 던지게 하는 점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이쪽에서는 그리스의 문명은 민주주의의 법제도, 과학 기술, 철학, 조각, 건축, 연극 등 뚜렷한 족적을 남겼으며 이들 중 많은 부분이 현대에도 그대로 계승 되었는데 페르시아 문명은 대부분 현대까지 전해 내려오는 것이 없다. 만일 페르시아 문명이 그리스보다 우월했다면 어째서 이 그리스를 뛰어넘는 문화가 계승되어지지 않았는지 해괴한 일이라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3][4][5]

비록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미숙했다하더라도 인류사에 굉장히 희귀한 사례를 남겼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당장 생각해봐도 근현대 이전에 민주주의를 정치체제로 택하고 장기간 발전시키고 선기능과 부작용을 모두 남긴건 아테네와 그리스 문명 정도로 결코 흔치 않다. 페르시아같은 왕정은 흔하디 못해 21세기 현대에도 넘쳐난다. 아테네 거주민 30만 중 약 5만명의 자유민이 참정권을 행사 했는데 이는 대략 10%에서 20%에 해당한다. 페르시아가 아무리 선진적이었어도 시장 상인이나 노젓는 노동자가 왕을 선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6]

이런 과격한 주장이 아니더래도 페르시아 문명이 그리스 문명보다 더 평등하며 우월한 문명이었는가에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많다. 일례로 여성의 대우가 그리스 보다 나았다는 점을 언급하는데 이러한 단편적인 부분만 가지고 전반적으로 페르시아가 더 평등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실 노예 계급에 대한 처우는 페르시아나 그리스나 마찬가지므로 여자와 자유민을 비교해야 하는데, 페르시아가 여자에 대한 처우가 나았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여자에게 참정권을 부여한 것은 아니었고 따라서 이는 그저 대접이 좀 더 나았다는 정도이지 더 평등하게 대우했다라고까지 부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자유민을 비교한다면 페르시아엔 이들 중에 왕족, 귀족 계급과 사제 계급이 존재하였고 참정권은 이들 계급에게만 국한 되어있었으나 그리스는 모든 시민들이 참정권을 가지고 있었다.[7] 게다가 폴리스엔 선거와 의회가 있고 헌법이 존재하여 한 개인의 전횡을 제도적으로 견제하였는데 페르시아는 왕이 절대 권력을 갖고 있었고 그 왕의 변덕에 따라 자유민의 생사가 결정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자유민의 경우 그리스가 페르시아보다 평등하다고 볼 수 있다는 것. [8]

거기에다가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스파르타 시민과 노예와 같이 죽은 것과 키루스 2세가 인권 보장 정책을 핀 것을 비교하면서 페르시아가 더 평등했다고 말하는데 이는 비교를 잘못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키루스 2세의 인권 보장 정책에서 스파르타의 경우처럼 전선에서의 노예에 대한 처우를 명시했는지는 알 수 없으며 또한 페르시아가 그리스 군에게 끔살당한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이 그들과 보유한 노예들에게 그들의 생존을 위한 어떠한 노력을 했는지를 서술해야 옳은 비교라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9] 그리고 테르모필레 전투 문서에서 나오듯이 다른 이들을 후퇴시켜주기 위해 자발적으로 싸운 시민들도 있는데 이들의 행동을 무시하고 테르모필레 전투를 무작정 폄하하는 거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이 의견에서는 스파르타의 왕이 죽고 아테네가 두번 불탄것이 문제가 아니라 페르시아가 전쟁을 일으킨 당면 목적은 그리스를 복속시키려 한 것이었고 그리스의 목적은 이를 지키는 것이었으며 전쟁의 결과 페르시아는 목적 달성에 실패하였고 그리스는 목적 달성에 성공하였는데 따라서 이는 명백한 그리스의 승리라고 본다.[10]

일단 페르시아 왕이 직접 친정한 점, 수륙 양면의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한 점을 본다면 단지 본때만 보이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를 복속시키는 것이 크세르크세스의 목적임은 분명하다. 비록 아테네가 불타고 스파르타 왕이 죽었으나 페르시아는 해군이 궤멸되고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수만의 페르시아군이 참패당한 끝에 그리스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된것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이후의 대 페르시아 전선에서도 아테네의 델로스 동맹이 이오니아 지역을 점령하였고, 그 이후 그리스의 참주가 된 마케도니아가 페르시아에 적극적으로 공세를 펼쳤다는 것을 보아 자신들의 자유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까지 전쟁의 주도권을 가지게 된 그리스 측의 승리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당대 그리스 문명의 수호 및 확장'이라는 측면에선 그리스의 승리가 맞다는 주장이라 하겠다.
  1. 지금도 테르모필레에는 "지나가는 나그네여, 라케다이몬(스파르타가 있는 지역 명칭)에 가서 전해주오. 우리는 국가의 명에 의해 여기 누워 있노라고"라고 적힌 석판이 놓여 있다고 한다.
  2. 고대 그리스 여성들은 기본적으로 남자들이 누리는 참정권이 주어지지 않았으며, 남편의 허락 없이는 집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심지어 갓 태어난 여자 아이를 생매장하는 일도 허다했다. 여자 아이가 자라서 시집갈 때 지참금을 줄 형편이 못 되는 경우에 한해서. 그나마 스파르타는 다른 폴리스들에 비해서 여성의 권리가 좀 더 보장받았다. 남편이 죽으면 재산을 아내가 물려받고, 여성도 군사 훈련을 받고 군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수적으로 훨씬 많은 노예인 헬로트들의 반란을 우려해서였지만.
  3. 물론 당시 그리스가 크레타의 영향을 받았고 크레타가 동방문명의 영향을 받은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실제 최근 역사가들의 의견에 따르면 그리스가 서구의 시초로 유럽인들에게 여겨진것도 19세기 민족주의와 근대의 탄생 이후부터이며 고대 그리스 자체도 동방문명적인 성격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많다. 당장 그리스 폴리스 문명에서 그리스 본토뿐 아니라 페르시아 지배 영역인 이오니아 역시 중요 지역이었다.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이런 주장에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명의 발전사는 상호교류의 역사에 가까운 것이다. 일례로 중세까지만 하더라도 서구인들이 그리스 문명권인 동로마 제국을 같은 기독교 지역이긴 해도 이질적인 동방 문명권으로 보았으며 그리스인들 역시 서구에 대해서 이질감을 가졌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4. 또한 '그리스 문명은 현대에 계승되었고, 페르시아는 그렇지 않으니까 그리스 문명이 더 우월하다'는 식의 논리는 굉장히 단순한 사고방식이다. 그리스 문명이 현대까지 전해진 것은, 고대 로마-동로마(비잔티움)-르네상스-근대 유럽을 거치면서 꾸준히 계승 및 발전을 시키는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당장 동아시아만 하더라도 고대의 중화 문명이 열등해서 현대인들이 서구식 생활을 하는건 아니지 않은가?
  5. 무엇보다 페르시아 문명이 제대로 후세에 계승되지 못한 이유는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이 이슬람 정복의 첫빠따를 얻어맞고 멸망한 뒤, 페르시아 문명의 근간이었던 조로아스터교와 전통들이 이슬람화 과정에서 그야말로 갈려나갔기 때문이지 그리스 문명보다 뒤떨어져서가 아니다. 반대로 이슬람 정복으로 조기에 멸망당한 게 동로마 제국이고 건재한 게 사산조 페르시아였다면 그리스 문명이 과연 지금처럼 "현대에도 그대로 계승"될 수 있었을까? 그리고 페르시아 문명도 그냥 인류사에 무의미하게 소멸한 건 결코 아니다. 제국과 종교는 망했을망정 문화와 기술은 이슬람 제국에 상당 부분 흡수되어 전성기 이슬람 문명의 발전에 충분히 한몫을 했다. 당장 그 유명한 아라비안 나이트도 페르시아의 천일야화가 원조 아니던가? 게다가 페르시아는 로마에게 정복당한 뒤 한동한 정체성 자체가 없었고 근대에 와서야 그리스인이라고 자각한 그리스와 달리 마케도니아의 정복, 파르티아의 지배 이후 부활했으며 이슬람화 이후에도 페르시아의 정체성은 남아 근세에는 오스만 제국과 함께 중동을 양분하는 제국이 되었고 지금도 페르시아 국가는 계승 되고 있다.
  6. 아테네 공화정 자체는 당대를 놓고 봐도 그렇게 선진적인 시스템은 아니다. 법치에 기반하는 현대 민주주의와는 당연히 비교할 수도 없고, 비슷한 정치 시스템을 찾는다면 오히려 원시 부족정에 가깝다. 그런 시스템을 규모가 커진 다음에도 유지하는게 신기하고 희귀한 사례이긴 하지만
  7. 물론 그리스 시민 자체가 일종의 특권계급이다.
  8. 다만, 헤로도토스의 말을 신용할 경우 페르시아 군주는 마음대로 사람을 사형시킬 수 없었다.
  9. 이것 또한 마찬가지로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 이르기를 페르시아의 귀족은 아무리 노예가 죄를 지었어도 사망할 만큼 형벌을 가하지는 못했다.
  10.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침공 목적이 조선의 복속과 명나라 침공이었는데 조선이 큰 피해를 입었지만 이런 일본의 목표를 저지하는데 성공했으므로 승리했다고 여길수 있는 것(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여겨지는 것)과 유사한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