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Victory Through Air Power 42년에 디즈니!?에서 제작된 선전영화로서 당시 폭격기 무적론을 잘 보여주는 영상중 하나이다.[1][2]
과학적 근거로, 전투기가 총을 쏘기도 전에 전투기를 폭격기가 박살내 버릴것입니다. -알렉산더 세베르스키[3]
폭격기는 무엇이든 뚫고 나아간다. -스탠리 볼드윈
"최전선에 있는 적을 섬멸하는 것, 전선에 걸쳐 있는 물자 및 유류 보급선을 차단하는 것, 모여있는 전차 대열을 파괴하는 것을 넘어서, 과연 어떤 병기가 적의 본토 깊숙히 침투하여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 자체를 꺾어버릴 수 있겠는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 제2차 세계대전 직전의 전간기(戰間期) 동안 각국 공군 전략의 대세였으며, 결국 수뇌부의 착각으로 결론난 이론. 폭격기 만능주의라고도 부르며, 일본에서는 '전투기무용론(戦闘機無用論)'이라 부른다.
대충 요약하면 "대형 폭격기에 방어 기총을 다수 탑재하고 떼로 몰려다니면 전투기도 못 건드린다. 고로 호위기 따위 필요없어! 폭격기가 대편대를 이루면 적진돌파도 문제없다!"
이러한 주장은 항공전력을 운용하는 주요 국가에 퍼져있었다. 이러한 사상을 퍼트린 장본인은 이탈리아(?!)의 줄리오 두헤였으나, 정확히 말하자면 두헤가 원조는 아니다. 당시 공군력을 건설하던 주요 국가들의 공군 선구자들 대부분이 이런 사상을 갖고 있었다.[5] [6]이 덕분에 미사일 만능주의와 함께 미 공군의 양대 과오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폭격기 무적론을 단순히 과오로 치부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데, 이 이론에 입각하여 설계된 폭격기가 2차대전에서 하늘의 요새라 불린 B-17이고 그 이외에 B-24 등의 4발 중폭격기가 있으며, 나중에는 B-29까지 탄생하였기 때문이다. 그 외에 중(重)폭격기를 중심으로 한 융단폭격과 각종 폭격기 관련 기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측면도 있다. 덤으로 쑥재배에도 기여했다
2 실상
영국은 이 이론에 입각하여 독일을 언제든지 칠 수 있는 위치에 대규모 폭격기 부대를 배치했고, 2차대전 중에 아브로 랭커스터를 비롯하여 성공적인 4발 중폭격기를 개발해냈다. 미국도 여러가지 고생끝에 B-17을 개발하여 주력 폭격기로 배치했다. 이 과정에서 전투기를 중시하는 세력들이 상대적으로 천대 받기도 했지만...
독일도 영국을 침공할 때, 폭격기가 스스로 방어를 할 수는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는 점에서 어느정도 영향을 받았다고 보이지만,독일군한테 공군이란 육군을 지원하는 공중포대정도가 고작이었다. 이는 Ju-87의 능력에 대단히 만족해하면서, 중(重)폭격기는 개발하지 않고 쌍발 중(中)폭격기에도 급강하 폭격 능력을 강요한 사례에서도 잘 드러나있다.
대신 폭격기가 빠르면 전투기가 못따라오리라 보고 고속 폭격기를 계속 개발하려 했으나, 폭격기가 빨라질 수 있다면 당연히 전투기도 더욱 빨라지니 결국은 꽝. 게다가 장거리 중폭격기가 없었으니 전략 폭격도 못했고, 이 점이 독소전쟁에서 소련의 물량에 짜부러진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당장 소련 땅 깊숙히 자리를 옮긴 생산 공장을 쳐야하는데, 끽해야 쌍발 폭격기로 그 넒은 땅덩어리를 날아다닐 수가 있나... 그나마 전략폭격의 중요성을 이해한 베버 장군이 일명 '우랄폭격기'라는 4발 장거리 폭격기 개발을 추진했지만, 한정된 인원과 예산으로 빠르게 공군을 확충하면서 전투기와 급강하폭격기 사업에 우선순위가 밀리고 말았다. 결국 베버 장군의 죽음과 함께 우랄폭격기 계획은 완전 묻히게 된다. 결과적으로 봐서는 크게 생각도 없었고 그나마도 실천을 못했기 때문에 폭격기 무적론의 영향을 덜 받은 편이다.
정작 이탈리아는 전략폭격이론의 시초였던 줄리오 두헤가 있었음에도 그의 이른 사망으로 인해 발생한 정치적 문제, 공업생산력 및 관련 기술력이 떨어졌던 관계로 당초 높은 이상과는 달리 기대 이하의 폭격기만 개발했다. 그래서 이탈리아도 실천하지 못해서 피해를 덜 입은 셈이다.
일본도 이 이론을 받아들여 한때 전투기 조종사를 줄이는 짓을 하기도 했으나 중일전쟁을 하면서 소수며, 훈련도와 장비성능도 낮은 중국군의 전투기에 일본군의 폭격기가 격추되었고, 플라잉 타이거즈가 본격적으로 출격하기 시작하면서 항공기 손실이 늘어나자 뭔가 이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다시 늘리기도 했다. 그나마 일본이 조금이라도 정상적이였을 시기 여담으로 저 이론을 받아들인 사람은 다름아닌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었다.
2.1 생각보다 못 막네?
일단 폭격기는 전투기보다 크고 많은 중량을 감당할 수 있으니 기관총이나 기관포를 가득 싣고 전담사수를 배치하면 전투기가 쫒아오더라도 화력으로 압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어?
진행방향이 고정되어 있고 민첩성이 떨어지는 폭격기의 기총좌와 민첩한 전투/요격기는 그 유연성에서 비교할 수가 없었다. 무적론자들은 상대속도에 따른 조준(예측사)과 명중률의 변화가 생긴다는 것을 생각치 못했다. 이는 기관총좌가 조준하는 것이 다르고 전투기 조종사가 조준하는 것이 다르며, 무엇보다 덩치의 차이가 엄청나기 때문에 전투기가 폭격기를 조준하는 것은 쉽지만, 폭격기가 전투기를 조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지 생각해 보면 쉽다.
게다가 전투기가 공격해올 경우 전투기는 자신이 가진 화력을 100% 발휘하지만 폭격기는 항상 해당 방향을 사격할 수 있는 방어총좌만 대응사격이 가능하므로 화력에서도 밀리는 엿같은 경우가 발생한다. 그리고 전투 중 방어총좌가 파괴되거나 손상되면 해당 방어총좌가 담당하던 방향은 말 그대로 폭격기가 방어화력을 발휘할 수 없는 사각이 돼버리므로 설령 전투기 1대와 방어총좌가 양패구상을 하더라도 다음 전투기가 폭격기의 해당부위를 노리게 되므로 폭격기가 격추당할 확률이 높아진다.
훗날 미군은 전투기보다 빠른 폭격기를 결국 만들어낸다. 물론 이후 YF-12 같은 물건이 나오긴 했지만.
2.2 전투기의 발전
폭격기 편대군의 강력한 방어 기관총좌는 전투기가 근접하면 확실히 위협적이었지만, 요격하는 전투기들의 화력은 2차 대전 기간 내내 크게 상승하였다. 전투기의 기본 무장이 소총탄 수준의 기관총에서 20mm급 기관포, 더 심하게는 30mm 이상의 대구경 기관포로 차츰 강화되어 Me262에는 폭격기에만 대응이 가능하지만 50mm 기관포까지 달렸다. 이 거대한 물건은 262말고도 쌍발 야간전투기에 장착되기도 했다. 제아무리 야간전투기들이 주간에는 샌드백 신세라지만 4발 중폭격기 상대로는 그렇지 않았다!
결국 더 이상 폭격기를 튼튼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는 전투기의 공격을 버틸 수가 없었고, 편대 자체를 흩어 놓는 전술이 개발되면서 폭격기의 피해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4발 폭격기는 승무원의 수도 더 많고 제조 비용도 전투기의 4배이상이라 손실에 따른 피해는 더 컸다. 설상가상으로 독일은 아예 대구경 로켓탄을 쏘거나, 로켓탄 탄막을 뿌려 방어 기총의 사정거리 밖에서 폭격기를 박살내거나 폭격기보다 높은 고도에서 폭탄을 떨궈 편대군 자체를 와해시키는 전술을 쓰기도 했다. 그리고 편대군이 와해되면 그 다음에는 즐거운 사냥시간이다.
한국전쟁 이후 제트 전투기의 시대가 되면서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한국전쟁 때쯤 되면 더이상 폭격기의 기관총으로는 총탑 선회속도와 반응성에서 목표를 맞출 수 없을 정도로 전투기가 빨라졌기 때문이다.
2.3 삼일천하(?)
항공기술 발달이 잠시동안이지만 불균형하게 이루어지면서 전간기 초반 폭격기의 스피드가 단순히 엔진 숫자 증가로 전투기를 넘어선 시기가 있었다. 이러면 다수의 기관총좌를 가진 폭격기가 고속폭격후 이탈하는게 가능해지므로 폭격기무적론을 더더욱 부채질했다. 1930년대 들어서면 다시 전투기가 빨라지지만 독일공군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계속 고속폭격기 개발에 몰두했다.
2.4 복병의 등장
폭격기무적론이 탄생하던 시기에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복병이 등장하였으니, 그것은 바로 레이더였다. 레이더가 중심이 된 조기경보체제와 이를 이용한 전투기/대공포/대피유도 및 피해복구반으로 구성되는 유기적인 방공망의 탄생은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다.
폭격기무적론의 주창자들은 설령 전투기가 폭격기를 압도하는 속력을 갖게 되더라도 폭격기군의 행방을 알 수 없으므로 도시는 무방비 상태로 폭격에 노출될 것이라 믿었으나, 영국 본토 항공전부터 레이더의 조기경보와 전화망 보고체계, 우수한 장거리 무선 통신으로 적 폭격기의 움직임을 미리 파악하고 추적하여 전투기들을 전개시킬 수 있게 되면서 가장 중요한 가정 하나가 깨져 버렸다. 독일군 또한 영국의 야간폭격과 미군의 주간폭격에 맞서 레이더를 이용한 조기경보체제의 덕을 많이 보았다.
이에 반해 레이더를 갖추지 못한 일본은 B-29 방어를 외각 섬의 관측소나 바다에 떠있는 선박의 목측에 의존하여 방공 효율이 지극히 낮았다. 그리하여 결국 미국은 전간기 항공전 이론에 그대로 들어맞는 폭격기로 항복을 받아낸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여기에도 웃지못할 비화가 있는데, 사실 일본은 영국이나 미국보다 제일 먼저 가장 성능이 좋은 안테나를 발명했었다. 이름하여 야기-우다 안테나. 이 안테나는 무려 1926년에 개발했지만 일본군은 적 앞에 전파를 쏘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다 라는 웃기지도 않은 이유로 이 안테나를 안 썼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안테나의 성능에 좌지우지하는 레이더가 없으니만 못하게 된 것. 여담으로 미국, 영국, 심지어 독일마저 이 야기-우다 안테나로 레이더 만들어 잘만 써먹었다... 게다가 적들이 이 안테나를 쓴다는 것을 일본군이 알아챈 게 1942년 역시나 핑계없는 무덤은 없다고, 물론 전파도 탐지가 되므로 적 세력 직전에서 전파를 쏴대는 짓을 하면 역탐지의 우려나 적어도 적함이 왔다고 광고하는 상황이 생겨 문제가 생기긴 한다. 특히 수뢰전대 따위로 야간 뇌격전이나 야간 근접전을 노리던 일본군 해군에는 확실히 우려할만한 상황이었던 셈. 하지만 적어도 무조건 위치가 파악된다고 봐야 하는 육상기지나 상대적으로 원거리 포격력과 높은 피탐지율을 가지는 전함 같은 대형함선에는 충분히 달 가치가, 아니 무조건 달아야 했다. 그리고 전파 역탐지 문제가 가시화될 정도의 거리라면 그냥 레이더를 잠시 안 쓰면 된다는 아주 편리한 해결책이 있었다. 야간전에서 탐조등으로 대놓고 함대위치를 노출시키며 닥돌하던 놈들이 정작 이상한 이유로 더 필요한 장비는 버렸던 셈.
3 대응
먼저 독일을 폭격해본 영국이 이 이론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아무래도 요격이 어려운 야간폭격으로 전환하였다. 하지만 후에 참전한 미국은 "우리 폭격기는 그렇게 당할 정도의 수준이 아니다!"라 이야기하고 한동안 4발 중폭격기들만 독일로 날려 보냈다가 무의미한 희생을 치루고 나서야 이 생각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여기에는 폭격기 방어기총을 담당하는 사수들이 뻥튀기한 격추보고를 올린 것이 영향을 줘 착각에서 빠져나오는데도 시간이 오래걸렸다.
예를 들어 24대의 폭격기가 몰려온 적기 중에서 1대만 격추시켜도 각 폭격기 사수들은 자기가 각각 1대씩을 격추시켰다고 생각했고, 그 덕에 24기 격추로 오인된 것이다. 이런식으로 집계된 적기 손실숫자는 향후 전략 결정에 중요하다. 실제로 영국 본토 항공전의 패배 원인중 하나도 독일군이 영국군의 손실을 과대평가하고 영국 공군이 전멸했다고 판단하고 여기에 맞춰서 작전을 수립한게 한몫 했다. 여기에 더해서 영국의 전투기들도 기만행위를 했는데, 미리 발연통을 가지고 출격한 다음, 자신에게 폭격기의 방어사격이 집중된다싶으면 발연통에 점화한 다음, 마치 명중돼서 추락하는 것처럼 묘기를 부렸다. 이러면 명중하지 않았더라도 폭격기 입장에서는 마치 전투기가 격추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해당 전투기에 대한 사격을 멈추므로 전투기가 살아남아서 다음 전투를 대비할 수 있으며, 안그래도 과다평가된 전투기 격추숫자를 더 늘린다.
결국 아무래도 안전한 폭격을 위해서는 호위 전투기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으나 슈퍼마린 스핏파이어나 P-47 썬더볼트 같은 전투기들은 항속거리가 짦아서 독일 영공까지 호위해줄 수가 없었다. 결국 P-51 머스탱이 폭격기 편대의 호위기로 운용될 때까지 미국 폭격기들은 독일 요격기들의 밥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의 경우에는 비교적 빠른 시기에 문제점을 찾아내고 대응책을 내놓았으나, 늘 일본이 그리하였듯 정작 그 대응책의 중심인 전투기의 개량 및 대량생산, 파일럿의 대량육성에 실패하는 바람에 미국 폭격기에게 밀려버리는 대참사를 기록하고 말았다.
4 결론
이론 자체의 헛점은 기술 개발에 따라 폭격기가 대형화, 고속화되는데 발맞춰 전투기 역시 고속화, 고화력화 될 것임을 간과한데다가, 레이더와 같은 장거리 탐지 수단의 개발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한데에 있다.
복엽기의 전성기 시절에 탄생한 폭격기무적론은 20여년만에 급속도로 발전한 항공기술의 속도를 간과하였고, 그래봤자 별로 바뀔게 있겠어?라는 생각이 대다수였다. 한마디로 말해 기술발전은 한쪽에서만 일어나지 않으며, 신기술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을 무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폭격기 무적론이 상당부분 허상이 끼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상에 따라 대규모 폭격기 군을 조직했던 영국과 미국이 적국을 전략 폭격으로 두들겨 패면서 국가 역량을 저하 시켜나가서 결국 승전국이 되었다는 사실 역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5 참고
무적론이건 만능주의건 일단 무적을 내세우는 순간부터 문제가 있는 법이다. 세상의 모든 일이 다 여러가지 요소가 조합돼서 순차적으로 돌아가야 유리해지는 법이지 누구 하나가 독불장군처럼 다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 알아도 위의 이론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래도 이해가 안간다면, 폭격기무적론의 허점은 스타크래프트의 가필패를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 ↑ 위에서 나온 폭격기는 참고로 페이퍼 플랜이다.그리고 전후방에 기관포를 설치한거 처럼 보이는데, 사수들이 죄다 뉴타입인지 잘만 맟춘다. 밀덕이라면 이게 상당히 잘못된거라 잘 알수있다.
- ↑ 영어되는 밀덕들이라면 42년에 미군이 무슨생각을 했는지 보여주는 영화라 생각보단 볼만하다. 그리고 몇몇 틀린 이야기도 있지만 의외로 미래를 내다본 내용들이 있어서 놀랄것이다.
- ↑ 러시아 조종사이자 항공기 제조업자. 폭격기 만능론을 펼쳣던 사람중 하나로서, 전략폭격의 유용성을 예견한 사람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 사람은 '세베르스키 항공제작소'를 운용했는데 훗날 이 회사는 리퍼블릭사가 된다.
- ↑ 르메이 장군 본인은 전투기 조종사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폭격 훈련을 받아본 뒤
폭격이란 개념에 완전히 뿅 갔다당시 프롭 전투기가 지니는 근본적인 역할의 한계를 실감하고 폭격기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거기에 그에게는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이 당시 미군이 발주한 폭격기가 바로 B-17이었다. - ↑ 정확히 말하자면, 두헤가 주장한 것은 전략폭격의 개념에 가까웠고, 이 시점의 전략폭격은 화학무기 같은 대량살상무기를 적국의 민간인 상대로 사용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터라, 나름 사정 봐 가며 폭격을 하게 된 후대의 흐름과는 맞지 않게 되었다.
- ↑ 영국의 트렌차트, 미국의 미첼등이 비슷한 시기에 거의 유사한 주장들을 하고 다녔고, 특히 트렌차트는 1차대전때부터 영국공군 건설 과정과 운영에서 이런 사고를 보여줬다. 미첼은 이 문제로 해군 수뇌부와 마찰을 빚어 군법회의에 회부되고 군에서 추방되기도 했다. 두헤가 이 사상의 원조로 알려진 이유는 그의 저작물이 유명해졌기 때문이지 그만이 이 사상의 원조로 보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