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의 역사 Historia Polski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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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 대공국 | 러시아령 | 입헌왕국 | 러시아령 | 소비에트령 |
목차
1 개요
폴란드의 역사를 다루는 항목.
2 연표
- 10세기 경, 서슬라브인의 일파인 폴라브족(혹은 폴라니에족= '평원의 민족')을 중심으로 민족과 국가가 성립.
- 서기 966년, 폴란드 왕국의 첫 왕인 미에슈코 1세(재위: 960?~992년), 세례를 받으며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
- 1000년, 그니에즈노 회합. 신성로마제국 오토 3세 황제가 폴란드 공작이었던 용감공 볼레스와프(Bolesław, 후의 볼레스와프 1세)와 만나면서 그니에즈노 메트로폴리아(대주교좌)가 폴란드에 처음 생긴 교황청 직속 교구로 탄생했다. 하지만 오토 3세가 죽은 이후로 폴란드는 독일과 반목하게 되었다.
- 1018년, 볼레스와프 공의 키예프 공국 침공으로 키예프가 함락되었다.
- 1025년, 볼레스와프 공의 대관식. 그리고 폴란드 왕국이 성립. 그러나 블레스와프 사후 폴란드는 독일의 조공국으로서 체코, 헝가리의 외침에 시달리게 되었다.
- 11~12세기 : 몽골 제국의 침략.
- 1226년, 튜튼기사단이 폴란드 서부 프로이센으로 이주해 독일계 농민들의 이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1333년, 폴란드 최고의 명군인 카지미에시 대왕(카지미에시 3세)의 즉위.
- 1364년,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을 본뜬 첫 대학인 크라쿠프의 야기엘로인스키 대학('아카데미아 크라코프스카 Akademia Krakowska') 설립.
- 같은 해 9월, 카지미에시 대왕이 주도하여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롤 4세를 포함한 덴마크, 헝가리, 키프로스, 브란덴부르크의 여러 왕과 공이 참석한 '크라쿠프 회합'이 열리다. 이때 열린 비에쥐넥(Wierzynek)의 화려한 만찬이 유명하다.
- 1377년, 요가일라의 리투아니아 대공 즉위. 9년 뒤인, 1386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이 성립되었다.
- 1410년 7월 15일, 그룬발트 전투(Bitwa pod Grunwaldem). 튜튼 기사단에 맞서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대승을 거두다.
- 1543년, 수도자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을 다룬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출판.
- 1569년, 루블린의 통합('우니아 루벨스카 Unia Lubelska')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단일 의회를 가진 연방이 되다.
- 1573년, 종교적 양심의 자유와 관용의 법칙을 주장한 법령 '콘페데라치아 바르샵스카(Konfederacja warszawska)' 발효.
- 1596년, 지그문트 3세, 크라쿠프에서 바르샤바로 천도. '황금의 세기'가 시작되다.
- 1609년, 지그문트의 군대가 스몰렌스크를 점령하고 대항하는 모스크바 군대를 패배시키고 모스크바에 입성하였다. 하지만 차르가 되지는 못하다.
- 1619년, 폴란드 영토가 가장 넓어지다.
- 1683년, 2차 빈 포위. 폴란드의 얀 3세 소비에스키(Jan III Sobieski)의 8만 대군이 신성동맹군에 참여하여 오스만 제국군을 격파하다.
- 1772년,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1차 폴란드 분할.
- 1791년 5월 3일, 유럽 최초의 근대적인 성문 헌법인 5월 3일 헌법(Konstytucja 3. Maja)이 제정되었으나 친러파에 의한 타르코비차 반동의 결과 폐지되었다.
- 1793년, 1795년, 2-3차 분할로 폴란드는 지도상에서 사라졌다.[2]
- 1794년, 타데우쉬 코시치우슈코(Tadeusz Kościuszko)의 봉기. 미국 독립전쟁에도 참여했던 코시치우슈코의 봉기가 일어났으나 마치에요비체 전투에서 진압되었다.
- 1797년, 프랑스령 롬바르디아에서 폴란드 의용군 결성.
- 1806년, 나폴레옹 전쟁 중에 바르샤바 공국이 일시적으로 성립되었다. 1813년 러시아에 의해 멸망.
- 프레데리크 쇼팽(1810년 3월 1일 ~ 1849년 10월 17일)의 일생.[3]
- 1815년 러시아 제국의 동군연합 국가 폴란드 입헌왕국이 수립.
- 1830년 '11월 봉기'와 1863년 '1월 봉기'로 러시아에 저항.
- 1867년 폴란드 입헌왕국이 러시아 직할령으로 완전히 편입,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가 됨.
- 1903년, 폴란드인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퀴리가 방사능 연구로 노벨상을 수상했다.
- 1915년,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 제국의 괴뢰국 폴란드 섭정왕국이 수립.
-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폴란드 독립.
- 1919년, 적백내전에 이어진 소련-폴란드 전쟁. 1920년, 바르샤바 전투로 저지되었다.
- 1922년, 폴란드 최초의 영화.
- 1939년 9월 1일, 독일의 전함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호의 그단스크 포격으로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폴란드 분할.
- 1940년, 영국 본토 항공전. 폴란드 망명정부 조종사들의 참전.
- 1944년, 이탈리아 카시노 산 전투. 바르샤바 봉기.
- 1945년, 소련의 위성국이 되다.
- 1956년, 6월의 첫 파업과 고무우카의 '10월의 해빙(Odwilż)'.
- 1968년, 68혁명의 일부인 폴란드 3월 시위.
- 1970년, 12월 파업. 1976년, 6월 시위.
- 1978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선출 및 즉위.
- 1980년, 레흐 바웬사의 자유노조 성립해 1만명 참가.
- 1981년,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Wojciech Jaruzelski) 장군의 계엄령으로 1만명 이상 체포. 1982년 말일 휴지되어 다음해 7월 종료.
- 1989년, 원탁 회의와 자유선거.
- 1999년, 폴란드의 NATO 가입.
- 2004년, 폴란드의 EU 가입. # 주한폴란드 대사관
3 슬라브족 이전
슬라브족이 폴란드 땅에 살게 된 것은 게르만족의 대이동 시절에 슬라브족들이 게르만족들의 뒤를 따라왔기 때문이다. 그 이전의 폴란드 땅에는 켈트족, 게르만족, 발트족들이 살고 있었다. 원래 슬라브족 자체가 폴란드보다는 벨라루스나 우크라이나 부근에 살았던 민족이다.
켈트족들은 현 폴란드의 남쪽 끄트머리 산악지대에, 발트족들은 현 폴란드의 북동쪽 구석 후세에 동프로이센이라고 불리는 지방에 살았고. 게르만족들은 나머지 폴란드 대부분의 영토에서 살았다. 이들은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서쪽으로 이동하거나 슬라브족에 동화되었다.
4 폴란드의 등장과 리투아니아와의 연합
960년 폴라니아인 미에쉬코 1세(Mieszko I)가 폴란드 서쪽의 그니에즈노(Gniezno)에 둥지를 튼 것으로 폴란드 역사가 시작된다.
후일담에 가깝지만 미에쉬코 1세의 선택은 (농담조로 말해) 폴란드 역사 내내 최악의 선택으로 판정된다. 나토의 군사전문가들이 '이상적인 전쟁터'라고 부르는 드넓은 평원지대에 살림을 차린 것이다. 그 결과는 말 안해도 알 듯이 몽골의 기병 러쉬와 독일&소련의 기갑 러쉬(...).
물론 늘 그랬던건 아니다. 폴란드도 이러한 자국의 상황을 잘 이용하여 주요 무역로가 되어 유럽과 아시아를 이어주기도 하고, 수많은 유럽의 학자들을 배출한 크라쿠프의 야기에우워 대학의 경우는 유럽 학자들의 고향으로 불릴 정도였다. 그리고 그 평야 지역에서 폴란드인들이 대규모로 농사를 짓고 수확물을 바탕으로 군사력을 키웠고 또 평야를 따라 외국으로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하기도 했으니 탁 트인 평야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4]
역사적으로는 10~11세기 가톨릭 개종 이래 1024년 볼레스와프 1세의 왕위 등극부터 폴란드 왕국으로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다. 볼레스와프 1세는 곳곳으로 뻗어나가면서 영토를 넓혀나갔다. 볼레스와프는 키예프 공국과의 전쟁에서 승전하여 영토를 넓히기도 했는데, 그 덕분에 그의 별명이 용감왕이 되었다.
하지만 이후 신성 로마 제국과의 전쟁으로 날을 지세우고, 12세기에 벌어진 내란으로 나라가 쪼개졌으며, 뒤이어 벌어진 몽골 제국의 침략을 막아내느라 거지 국가가 되었다. 폴란드의 악몽인 레그니차 전투도 이 때의 일. 이렇게 안습하게 지내던 폴란드는 14세기 초반부터 피아스트 왕가의 브와디스와프 1세(Władysław I)를 중심으로 통일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브와디스와프 1세는 북쪽의 독일 기사단국과 리투아니아의 압박을 막아내면서 폴란드를 계속 통일하기 시작했고, 이후 자신의 아들 카지미에쉬 3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사망한다.
폴란드가 본격적으로 강대국으로 뜨기 시작한 것은 카지미에시 3세(재위 1333-1370)가 폴란드를 통치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물론 미에쉬코 1세 사후 그의 아들 볼레스와프 1세가 사방팔방으로 영토를 넓히면서 폴란드의 위용을 자랑하기도 했지만 이후 폴란드가 분열 지경에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 몽골이 동쪽에서부터 침공해 왔기 때문에 나라 전체가 막장 오브 막장이 되어버렸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전성기는 바로 카지미에쉬 3세부터 시작한다. 카지미에쉬 3세는 행정, 외교, 경제, 정치, 군사, 문화 등 각 분야에서 모두 뛰어난 성과를 올렸고, 그 덕분에 카지미에쉬 3세는 '대왕'으로 불리기도 한다. 폴란드판 세종대왕이라 보면 될 듯.
http://bi.gazeta.pl/im/cc/aa/11/z18524364Q,Jadwiga-Andegawenska1373-lub-1374-1399----jedy.jpg
카지미에쉬 3세는 적자를 남기지 못했기에 폴란드의 왕위는 헝가리 왕이 계승하게 되었는데, 폴란드 영주들이 이러한 군합국 상태를 싫어했다. 이 때문에 폴란드 왕위는 헝가리 왕 사후 1383년 앙주 왕가의 야드비가(Jadwiga)가 계승하게 되었다. 야드비가는 1373년생으로, 즉위 시 10살의 로리 여왕님(...). 이후 1386년 동쪽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33살 노총각 요가일라가 아직도 13살 로리인 야드비가와 결혼을 하여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Władysław II Jagiełło)로 즉위하게 된다(...). 그리고 리투아니아도 발트 신화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이로써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군합국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고. 얘네들 사정에 대해 알고 싶다면 폴란드-리투아니아를 클릭하시길.
폴란드-리투아니아는 1410년 그룬발트 전투를 통해 독일 기사단국을 철저히 박살내버렸다. 초반에 리투아니아 기병대가 독일 기사단을 유인하기 위해 일부러 패주하며 후퇴했고, 그 뒤를 독일 기사단이 따랐다. 여기까진 좋았는데... 숲에 매복했던 폴란드 군대가 리투아니아 군대를 돕기 위해 나타났고, 결국 독일 기사단은 산산조각나며 괴멸당했다. 39,000여 명에 이르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에 맞서 27,000여 명에 이르는 독일 기사단은 8,000여 명의 전사자와 14,000여 명의 포로라는 엄청난 피해를 내며 묵사발이 났고, 전사자 중에는 독일 기사단의 최고 지도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불과 1,400여 명만이 그단스크(단치히)로 도망쳐 들어갔을 정도였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독일 기사단을 완전히 정복하지는 못했지만 이후 독일 기사단의 명예와 영향력은 땅에 떨어져버렸고 1460년에는 무역의 황금알인 그단스크까지 폴란드에 빼앗겼다. 그리고 1454-1466년의 13년 전쟁을 통해 완전히 폴란드에 복속된다.
5 동유럽의 패자가 되다
이후 폴란드는 과거 자신들을 지독히도 괴롭혔던 독일 기사단을 아예 속국으로 만드는 등 세력을 크게 불리기 시작했다.[5] 또한 1480년에는 킵차크 칸에 대항해 독립전쟁을 벌이던 모스크바 공국의 뒤통수를 치며 킵차크 한국과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독일 기사단과 싸우느라 도울 수는 없었다.
카지미에시 4세 시기에 폴란드와 야기에우어 왕가는 가장 드넓은 영토를 자랑했지만[6], 이후 러시아와의 전쟁을 말아먹으면서 동부 영토의 1/3을 날려먹고 말았다. 하지만 이후 중흥 노력이 결실을 맺으면서 폴란드는 다시 발전하게 되고, 지그문트 2세 시기에 단순한 동군연합이 아닌 단일 연합국가로 통합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재차 괄목할 만한 국가로 성장하였다.
지그문트 2세 사후 개시된 선거왕 시대(1569-1795) 시기에 자유 선거(Wolna Elekcja)로 약혼녀 안나 야기에우오(Anna Jagiellonka, 1523~1596, 재위 1575~1587)[7]의 공동국왕으로 선출된 스테판 바토리(Stefan I Batory, 1533-1586, 재위 1576-1586)는 그단스크의 반란을 철저히 진압하였다. 이 양반이 반란을 어떻게 진압했냐면, 6배의 그단스크 군(폴란드 군 2,000 vs 그단스크 12,000)을 거의 학살 수준으로 이겨버리고(그단스크 군 4,500명이 전사하고 5,000명은 포로) 다음으로 그단스크 장기 포위전에 들어가서 항복을 받아냈다. 다음으로 그는 과거 반역을 일으켰던 코사크 헤트만 사무엘 즈보로프스키도 참수하였고(...) 주요 귀족들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이후 그는 폴란드 역사 최고의 재상 얀 자모이스키(Jan Zamoyski)의 지원을 받아 이반 뇌제(Ivan the terrible)의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전, 동부 영토의 일부를 다시 되찾았다. 이후 지그문트 3세 치세에서 폴란드는 동부의 중요한 영토인 스몰렌스크도 다시 되찾는다. 참고로 또라이지그문트 3세는 무능했지만 대신 그의 유능한 부하들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면서 지그문트 3세가 일으킨 여러 사건들을 해결하고 덤으로 외국의 침략까지 격퇴해 내면서 폴란드의 위용을 계속 떨쳤다. 그 유명한 윙드 후사르의 활동 시기 역시 바로 이 때의 일이다.
1582년의 영토.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반영해서 고골리의 소설 <타라스 불바(역제: 대장 불리바)>에서, 불바를 위시한 자포로제 코사크들의 주적은 폴란드다. 폴란드 기병은 전투에 이골이 난 코사크들에게조차 강적으로 등장한다.
마침 러시아에서 내란이 일어나자 적극 개입하여 러시아의 차르를 바꾸기도 하였고 아예 1611년에는 크우쉰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모스크바까지 함락시켰다. 얼마 안가 쫓겨나기는 했지만... 어쨌든 폴란드는 리투아니아 공국과 연방을 이루며 발트해에서 흑해 사이의 모든 영토를 지배하는 강국이자 오스트리아와 함께 오스만 제국을 막아내는 가톨릭의 방패 및 유럽의 방파제로 군림했다.
그런데 하필 리투아니아랑 연합하고 있을 때가 전성기라서, 폴란드까들은 폴란드가 대단한게 아니라 리투아니아가 대단한거다란 발언으로 폴란드의 전성기를 깎아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단지 명목상으로만 연방이었을 뿐 사실상 리투아니아가 폴란드에 완전히 종속된 상태였으므로 이러한 폄하는 옳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다.
크고 아름다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Commonwealth)의 최대 영역, 1635년.
6 "대홍수"
1600년대 후반 잃은 영토(연주황색, 1657~1686).
지그문트 3세 사후 그의 아들인 유능한 브와디스와프 4세(Władysław IV Waza, 재위 1632-1648) 재위 시기에는 러시아와 오스만 튀르크의 침공도 격퇴하고 스웨덴과도 자국에 유리한 조약을 맺으면서 동유럽의 전통적인 노(老) 강대국의 위엄을 보여주면서 위엄을 뽐낸다. 그러나...
잘 나가면 반드시 망조가 찾아오는 법인지라, 17세기 중반 이후 지금까지 심심하면 털어먹던 코사크들, 북방전쟁을 일으켜 스웨덴, 모스크바 차르국 (러시아) 등의 집중 견제를 받고, 그 와중에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도 슬슬 국력의 한계를 보이면서 망조가 들기 시작했다.
폴란드의 강대국 시기는 헤트만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코사크 대반란으로 막을 내렸다. 코사크의 반란은 1651년 베레스테츠코(Beresteczko)에서 63,000여의 폴란드 군이 140,000여의 코사크-타타르 연합군에 거의 학살 수준의 대승을 거둠으로써 겨우겨우 진정되었으나, 이 봉기에서 엄청나게 많은 군인이 희생되었고, 또한 국력이 계속 소모되어 결과적으로 대홍수(Potop) 시기를 맞이하였다.
코사크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다시 공격해 왔고, 얼마 되지 않아 러시아가 '직접' 공격에 나서면서 폴란드는 순식간에 국토 절반이 점령당했다. 이후 1655년 스웨덴도 브란덴부르크와 함께 침공해 오면서 나머지 절반을 점령해 폴란드는 거의 패망 직전에 이르렀지만, 폴란드 농민들이 스웨덴의 폭압적인 지배에 민중봉기를 일으키고 타타르가 폴란드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후 폴란드의 전설적인 명장이자 대귀족(왕당파) 스테판 차르니에츠키(Stefan Czarniecki)와 파베우 얀 사피에하(Paweł Jan Sapieha), 얀 소비에스키(Jan Sobieski), 스타니스와프 포노츠키(Stanisław Rewera Potocki) 등이 이끈 폴란드군이 스웨덴군과 브란덴부르크, 러시아 등에 맞서 여러 번의 승리를 거둔 덕분에 스웨덴을 몰아내고, 1660년에 올리바 조약을 체결하여 리보니아를 스웨덴에 양도하는 선에서 스웨덴과의 전쟁은 끝냈다만, 아직 '러시아'와의 전쟁이 남아있었다.
러시아와의 전쟁은 1668년까지 계속되었으며, 양측 모두 엄청난 피를 흘린 끝에 1668년 안드루소보 조약을 끝으로 전쟁을 끝맺었다. 원래 포원카(Połonka), 루바르(Lubar), 바시아(Basia) 강, 추드누프(Cudnów) 등에서 폴란드가 대승을 거두면서 폴란드가 승리하는 듯 했으나 막판에 흘류키프(Hlukiv) 공방전에서 타타르가 발을 빼고 계속된 전쟁에 지친 리투아니아군이 후퇴하는 등 군대가 붕괴하면서 다 말아먹고 말았다.
이후 폴란드는 후퇴하여 다시 힘을 키우나 이번에는 헤트만이자 마찬가지로 명장인 예르지 세바스티안 루보미르스키(Jerzy Sebastian Lubomirski)가 국왕의 권력에 반란을 일으킨다(...). 경악한 당시 폴란드 국왕 얀 2세 카지미에쉬(Jan II Kazimierz Waza)가 진압군을 이끌었으나 몽트비(Mątwy)에서 대참패를 당한 이후 루보미르스키는 더 날뛰면서 폴란드 전 국토를 유린, 황폐화시켰다. 때문에 폴란드 정부는 할 수 없이 러시아와 조약을 맺어야 했고, 그것이 바로 폴란드 몰락의 시초인 안드루소보 조약이었다.
이 전쟁의 결과 폴란드는 전체 인구 중 1/3이 사망하거나 외국으로 편입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무엇보다도 리보니아와 스몰렌스크, 키예프 등 폴란드 변경의 주요 부분들이 다 날아가버려 정치적, 경제적으로 매우 심한 손실을 입었다. 게다가 전성기만 해도 그럭저럭 지배층의 이해 관계가 일치하여 제대로 작동하던 귀족회의 정치체제도 나라가 망조가 드니 주변 국가들의 정치적 침투에 넘어가 이 이후로는 얀 소비에스키의 재위 시절 빼고는 나라 정치 자체가 개막장이 되었다.
6.1 귀족 공화정은 망국의 원인이었는가?
흔히 세간에서는 만장일치가 아니면 제대로 된 결정을 못 내리는 귀족 공화정 체제 자체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몰락의 주 원인으로 지적하지만, 되려 귀족 공화국 체제가 가장 활발하게 작동한 17세기 초반이야 말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최전성기였다. 나라 자체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면 만장일치까지는 아니라 해도 그럭저럭 지배 계급의 이해가 일치하기 마련. 게다가 귀족 공화국, 즉 황금의 자유 체제는 화백회의 마냥 단순히 귀족들이 이거 저거 다 해먹는게 아니라, 당시로는 놀라울 정도로 진보적이었던 인권 사상, 피지배자의 권리 등을 바탕으로 한, 나름대로 이념적 토대가 있었던 체제였기도 하다.
뒤에 보지만 폴란드가 괜히 유럽 최초로 성문화된 헌법을 제정한 나라가 아니다.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란 국가 자체가 토후들의 정치적 연맹을 토대로 생긴 국가이기 때문에 이러한 국가적 정치적 전통을 깡그리 무시하고 다른 유럽 국가들 따라 중앙 집권화를 추진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짓이었다. 실제로 앞에 설명한 지그문트 3세와 브와디스와프 4세가 다른 유럽 국가식 중앙 집권화를 무리하게 추진하다가 대대적인 귀족들 반란만 맛보고 삽질만 했다. 지그문트 3세의 경우 왕당파 대귀족이자 뛰어난 헤트만으로 유명했던 얀 카롤 코트키에비츠(Jan Karol Chodkiewicz, 1560-1621)가 분쇄하기는 했으나, 지그문트 3세는 이를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하고 결국 반역자들을 사면하고 말았다.
그러나 폴란드 망국의 원인이 귀족 공화국 체제 자체에 있지 않았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아니다. 예를 들어, 1648년 코사크 헤트만 흐멜니츠키의 대반란이 왜 일어났을까? 18세기 농민들의 산발적인 봉기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17세기 초반 제브지도프스키의 반란은 어찌 설명할 것인가? 1772년 폴란드 귀족들로 구성된 바르 연합이 대러시아 봉기를 일으켰을 때, 수많은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의 농민들이 폴란드 국왕군과 러시아군을 도와 바르 연합에 대항하는 봉기를 일으켜 수많은 귀족들을 학살했던 행동은 어찌 설명할 것인가?
10%에 이르는 두터운 귀족층과 그들에게 모두 국왕 선거권을 부여한 것이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이고 민주적이었다는 점, 인정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폴란드 망국의 원인이 자유 선거에 있었다는 점 역시 인정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폴란드 귀족들은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에만 매달려 농민이나 시민들의 권리를 외면했다. 당시 폴란드는 유럽에서 가장 견고한 농노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결과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바르 연합을 일으킨 귀족들에 대한 농민들의 대학살이었다. 폴란드는 혈통적, 문화적 거리감을 모두 초월하여 하나의 '귀족'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모든 사회 계층들을 통합하여 하나의 '민족'으로 만들어 내는 데에는 실패했다.
일부 국가주의적-민족주의적 폴란드 역사가들은 스웨덴에 대한 민중봉기를 이유로 들며 당시 농민들에게 국민의 이미지를 씌우지만, 실상 그것은 학살과 폭력을 밥먹듯 하는 스웨덴에 대한 농민들의 분노가 주를 이루었다. 당시 폴란드 농민들이 민중봉기를 일으킨 이유에 국가에 대한 충성 따위는 없었다. 스웨덴의 압제를 받고 봉기를 일으킨 후 국가에 대한 충성이 발생했을 뿐이었다.
그나마도 대(對) 스웨덴 전쟁이 1660년에 종전을 맞자, 농민들의 국가에 대한 관심은 싸늘해졌다. 일부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은 폴란드를 이탈하여 스웨덴 측에 가담한 귀족들을 민족 반역자들이라고 가루가 되도록 까는데, 그것은 민족이나 국가 개념이 희박했던 당시 폴란드 귀족들에 무리하게 국민의 이미지를 덧씌운 것이었다. 게다가 그것도 당시 폴란드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스웨덴 왕을 폴란드 귀족들이 '모시는' 과정은, 이미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보장해주기만 하면 출신 국가 따위 문제가 없던 폴란드 귀족들이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보장받기 위해 밟은, 아주 당연한 수순이었다.
7 폴란드의 분할과 러시아 치하
1764년 분할직전의 폴란드. 라트비아나 프로이센이 빠지고 동부 국경이 상당부분 후퇴했다.
18세기 폴란드의 분할 멸망(1773~1795) 신나는 삼국지
17세기 후반에 접어들자 러시아와 프로이센은 날이 갈수록 기세가 무서워졌다. 결국 1772년 폴란드에 살던 온갖 민족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여기에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가 개입함으로써 1773년 8월 영토가 쪼개졌다. 물론 친러파가 가득한 의회의 동의를 얻은 조치였다. 당시 폴란드 의회의 의원 타데우슈 레이탄(Tadeusz Rejtan)이 결사적으로 저항하였으나 분할안의 통과를 막는 데에는 실패했고, 이후 그는 울분에 휩싸여 자결했다.
폴란드의 마지막 국왕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Stanisław II August Poniatowski)는 영국의 입헌군주제에 상당한 이해를 하고 있었던 인물이었으며, 국가를 이끌기에 충분한 지성과 근대적 능력을 갖추고 있던 개념있는 양반이었다. 그러나 그의 유약한 성품은 동쪽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를 막는 데에는 결국 실패하였다.
스타니스와프 2세는 기사학교(Szkola Rycerska)의 설립안을 가결시켜 이곳에서 수많은 개혁 청년과 엘리트들을 양산해내었고, 세계 최초의 국립 교육 위원회인 국민 교육 위원회 설치안도 가결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또한, 1차 분할 이전에 폴란드에 관세 제도를 도입하여 외국 물건에 대한 관새를 매겨서 자국의 산업 보호를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그는 휴고 코원타이(Hugo Kołłątaj), 스타니스와프 스타쉬츠(Stanisław Staszic), 안제이 자모이스키(Andrzej Zamoyski), 아담 카지미에쉬 차르토리스키(Adam Kazimierz Czartoryski), 스타니스와프 마와호프스키(Stanisław Małachowski), 이그나치 포토츠키(Ignacy Potocki) 등 열렬한 개혁가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계속 폴란드를 개혁해나갔고, 1788-1792년에는 위대한 4년 세임을 개최하여, 동시대인의 평가에 의하면 폴란드에 '산사태같은 개혁'을 일으켰다.
그 결과물이 바로 1791년 5월 3일 가결된 5월 헌법이었다. 세계사에서 2번째(미국 다음), 유럽에서는 최초로 가결된 성문 헌법, 바로 5월 헌법이었다. 182명의 세임 의원들의 서명은 받은 5월 헌법은 입헌군주정과 세습군주제, 국왕의 자유도시, 종교의 자유, 귀족에 대한 과세(10%의 소득세) 등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또한 농민들은 귀족들의 자의적인 재판을 당하지 아니하며 국가가 이들을 보호하고, 도시민들에게 토지 구입을 허용하며, 농노제가 소작제, 즉 계약제로 전환된다는 내용도 담고 있었다.
소작제는 전적으로 귀족과 농민 모두의 동의를 받은 상태에서 행해야 했으며, 농민들은 원한다면 도시로 떠날 수도 있었다. 문제가 많은 자유 거부권을 폐지하고 의회에 2/3 다수결 제도를 도입하였으며, 의회에 외국에 대한 전쟁 선포와 화폐, 공채 등 대외적, 대내적 정책에 대한 가결과 부결의 권리를 맡겼다. 슐라흐타의 국왕 선출권을 박탈하여 포니아토프스키 가의 세습 군주제를 명확히 하기도 했다.
여기에 왕의 조카인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Józef Antoni Poniatowski)가 의회 내에 군대를 이끌고 들어왔고, 일체의 자유 거부권이 무시되는 친위 쿠데타 상황에서, 5월 3일 헌법은 수많은 귀족들의 반항을 무릅쓰고 가결되었다.
하지만 이것을 빌미로 다시 1793년 러시아가 폴란드를 침공한다. 폴란드는 훌륭하게 맞서 싸웠지만 러시아는 물량을 앞세워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왔고, 결국 1793년 다시 한 번 영토가 분할된다. 최전성기에 100만 제곱킬로미터가 넘는 영토를 자랑했던 폴란드의 영토는 이제 불과 21만 제곱킬로미터와 370만 명의 인구를 보유한 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1795년,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3국이 미국 독립 혁명에서 큰 공헌을 했던 타데우쉬 코시치우쉬코(Tadeusz Kosciuszko)의 대(對) 러시아 봉기를 철저히 탄압, 완전히 폴란드를 갈라먹으면서 폴란드의 존재는 아예 지도에서 사라졌다. 이때부터가 차마 눈물없이 보기 힘든 폴란드 시련의 본격적인 시작이었고 폴란드의 국가 폴란드는 아직 죽지 않았다가 탄생했다. 헌법이 생긴지 고작 4년만이었다.
독립을 위해 프랑스 혁명정부와 협력했던 폴란드 군단의 공로로 나폴레옹이 잠깐 바르샤바 공국을 세운 기간동안 잠시 독립했다가 이후 빈 회의에서 다시 소멸한다.[8] 결국 빈 체제 성립 이후 폴란드 입헌왕국이라는 러시아 제국의 동군연합 형태로 사실상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점차 자치권을 상실하더니 1월 봉기 실패 이후에는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라는 이름으로 제1차 세계대전까지 러시아의 직접 지배를 받았다. 폴란드인들은 11월 봉기와 1월 봉기, 크라쿠프 봉기, 포즈난 봉기 등 수많은 봉기를 일으키면서 러시아의 폴란드 지배를 거부하였으나 러시아 차르는 이들을 철저히 탄압하였다.
8 독립과 전간기의 폴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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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대전 말기의 독일 제국의 괴뢰국 폴란드 섭정와국.
이후 1차대전이 발발하면서 1915년 폴란드는 동맹국이 점령하였고 위와 같이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공동으로 지배했다. 그러나 1918년 동맹국이 항복하게 되면서 폴란드는 마침내 123년만에[9] 공화국으로써 독립할 수 있었고 군인 출신이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 1867~1935)가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폴란드의 옛 영토를 되찾고 싶어했는데 마침 러시아가 적백내전으로 혼란에 빠지자 이를 이용해 소비에트 러시아와 전쟁을 개시했고 이것이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이다. 초반에는 폴란드가 키예프를 점령하는 등 우세를 점했으나 1920년 즈음에서 적백내전의 승기를 잡게 된 소련[10]은 이것을 기폭제로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 혁명을 일으키고 싶어했고, 그 교두보인 폴란드를 점령하기 위해 폴란드 방면으로 군대를 집중시켰다. 이에 전황이 바뀌어 소비에트측에 유리하게 돌아가 역으로 바르샤바가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피우수트스키의 지도하에 폴란드군은 기적적으로 비스와 강에서 붉은 군대를 대파, 폴란드 영내에서 소비에트군을 몰아냄으로써 국가 존망의 위기를 넘기고 마침내 1921년 리가 조약으로 예전의 영토를 어느 정도 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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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폴란드는 이때 왕년의 한 나라였던 리투아니아와 같이 적군을 막았는데, 빌뉴스[11] 일대를 폴란드가 점령하고 돌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세운 괴뢰국이 중앙리투아니아 공화국(초록색, 1919년)이다. # 해당 글쓴이가 편협한 면이 많지만 일단 여기 참고. 결국 이 땅은 결국 리투아니아에 돌아가지 않고 1920년 강화조약에 따라 폴란드 영토가 되었다.
하지만 많은 나라의 독립영웅이 권력에 취하면서 독재자가 되듯이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독재자가 되면서 반대파를 학살과 숙청을 통하여 제거하면서 폴란드를 말아먹었다.[12] 그가 죽고나서도 유제프 베츠크(Józef Beck) 외무장관을 비롯한 부하들이 권력을 이어받으면서 반대파를 제거하며 정치적으로 불안하게 만들었다.
9 제2차 세계대전 - 폴란드 침공과 독소 분할
이렇게 돼서,
분할완료(...).
제2차 세계대전으로 세계를 갈라먹으려는 실제로는 서로 뒷통수를 치려는 히틀러와 스탈린은 서로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그러다가 1939년 폴란드는 독일과 소련에게 동시에 침공을 받아 분할 점령을 당했다. 이후 소련이 폴란드의 민족성을 죽이기 위해 지식인들과 장교들을 카틴 마을 인근 숲속에서 집단 학살하는 카틴 학살이 일어났고,[13] 뒤이어 아우슈비츠로 대표되는 유대인 학살의 중심지가 되었으며(상당수의 폴란드인이 여기에 동조했다는 사실은 흑역사이기도 하다), 수도인 바르샤바는 1944년 8월 봉기 때 독일군이 도시 전체를 다 쓸어버려 아무것도 안 남을 정도로 파괴되었다.
2차 대전의 포커스가 미국, 영국, 중국, 독일, 일본, 소련에게만 집중되어 가려졌지만 폴란드는 세계2차대전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국가 중 하나로, 소련과 중국에 이어 사망자가 3번째로 많은 나라다. 여기서 사망자는 민간인과 군인의 사망을 모두 포함한 수치. 소련과 중국이 냉전시대에 강대국으로 발돋움한 것에 비하면 더욱 안타까운 수치다. 전 인구의 20%가 사망했으니...
이때 폴란드 정부는 파리로 옮겼다가 독일의 프랑스 침공 때는 프랑스 서부의 앙제 시, 그 다음에는 런던으로 옮겨가서 망명정부를 구성하고 소련에 억류된 폴란드인과 망명 폴란드인들을 모아서 자유 폴란드 군단을 조직해서 서방연합군과 함께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지에서 피터지게 싸웠다. 참고로 연합군 내에서 폴란드군이 네번째로 제일 큰 군대였다.[14] 하지만 스탈린은 이런 망명정부의 축출을 위해 나치 점령하의 바르샤바에 봉기를 강요했으며(쉬운말로 '니들 봉기 안하면 다 나치' - 나치 개객끼 해봐) 이 때문에 소련이 들어왔을 때 영국에 있는 망명정부 세력은 거의 나치에게 저항하다가 사라진 무주공산이었다.
이렇게 2차대전 중 동유럽 전체에서 가장 크고 조직적인 반나치 저항 운동을 펼친 나라로 일단 폴란드의 반나치 조직 중 하나인 국내군(Armia Krajowa)만 하더라도 40-60만의 병력을 보유했을 정도였으며, 반나치 봉기의 전설이 된 1944년 바르샤바 봉기도 일으켰지만 일부 폴란드인들이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이율배반적인 흑역사 또한 가지고 있다. 승냥이 질 좀 했지 일례로 유대계 폴란드인 만화가 아트 슈피겔만은 만화 쥐에서 폴란드인들도 나치 못지않게 유대인 등 소수민족을 박해하고 국수적인 모습을 가진 사람들로 묘사했다. 그 대표적인 상징이 폴란드인을 돼지로 설정했다는 점이다. 또한 유대인 역사학자 에마누엘 링엘블룸은 유대인들이 수용소행 열차로 끌려갈 때 열차 주위의 폴란드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으며, 독일군과 손잡고 유대인을 잡으러 다닌 반유대주의자들이 많다고 일기에 기록했다.
가장 참혹했던 사건은 1941년 7월 10일에 예드바브네(Jedwabne)에서 폴란드 주민들이 유대인 남녀노소 340(최소 수치)여 명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것이었는데, 독일군은 이 학살 행위를 주민들에게 직접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선전용 카메라로 촬영하면서 방관하였다. 후일 폴란드계 미국인 역사학자 얀 그로스(Jan Gross)가 이웃들(Neighbors)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하여 폴란드인들이 주도한 이 대학살을 두고 문자 그대로 가루가 되도록 깠다. 그리고 역사는 돌고 돌았다그 뿐만 아니라 종전 이후(!)에는 키엘체(Kielce)에서도 폴란드인에 대한 유대인 포그롬이 발생, 폴란드인들이 200여 명의 유대인들한테 달려들었다. 그 결과 유대인 42명이 사망하고 4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이때 어느 농민 대표는 키엘체 포그롬을 비난하라고 폴란드 정부가 갖다 앉혔더니 유대인을 청소해준 히틀러에게 감사드린다라고 말했다. 말 그대로 ㅎㄷㄷ이다.
이렇게 폴란드인들이 유대인들을 해친 것 뿐 아니라, 유대인 빨치산들이 소련 빨치산들과 연합하여 폴란드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건도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예드바브네와 키엘체에서 폴란드인들이 저지른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냥 '아, 이런 일도 있었구나'라고 알아두면 된다. 물론 폴란드 인구의 1/5과 지식인 층의 1/3, 도시 인구의 1/2을 날려버린 나치의 대학살이 정당화되거나, 폴란드나 나치나 그 놈이 그 놈이라는 양비론은 옳지 않다.
사실 폴란드에서는 전통적으로 유대인에게 대단히 관대한 대접을 해주고 있었으나, 그것은 귀족들이 자국 부르주아들의 성장을 막기 위하여 외부의 이민족 장사꾼들을 끌어들인 결과였다. 그 결과 폴란드는 동유럽 제일의 막장 농노제를 자랑하는 국가가 되어버렸고, 그 나라의 실권을 틀어쥔 귀족들이 자기 맘대로 해먹으면서 나라도 함께 막장으로 치달았다. 민족 정서가 유대인들한테 그렇게 우호적인 편도 아니어서, 일반 폴란드 민중들의 반유대주의는 일상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20세기에 들어 폴란드 민족주의의 대두와 함께 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였다. 또 이런 막장 취급을 받다보니 폴란드 침공 때 소련 점령지의 유대인들은 "폴란드보단 차라리 빨갱이가 낫겠지"하면서 소련에 적극 협력한 편이고[15], 이게 또 폴란드인들에게 밉보이면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독재자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사망 이후 폴란드 권위주의 정권은 유대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중이었고, 전쟁이 끝난후 유대인들이 자신의 재산을 되찾으려 하자 이에 반발하거나 심지어 살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폴란드의 불특정 다수 전부가 유대인 배척에 앞장선건 아니다. 또다른 많은 폴란드인들은 유대인들을 도와주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제고타(Zegota)로, 이 단체가 게토와 수용소에서 구출한 유대인의 수효가 무려 6만여 명에 이른다. 또한, 당시 유대인들의 탈출을 도와준 폴란드인들이 전체 성인 인구의 2%에 이른다는 사실을 봐도 꽤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제고타의 대다수는 가톨릭 교도였으며, 반유대주의자(!)도 상당수 섞여 있었다.
10 공산 폴란드와 자유 노조
소련이 들어온 후 재구성된 폴란드는 영토적으로 상당부분 달라진 국가였다. 소련은 점령했던 영토를 소련령으로 병합했으며, 해당 지역들은 아직도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리투아니아의 영토로 남아있다. 반면 프로이센 지역은 독일인들이 추방되면서 폴란드령으로 흡수되었다. 좀더 정확한 사항은 2차대전 후 독일과 폴란드의 영토 문제 참조. 하지만 1960년대 사민당 빌리 브란트 총리가 "영토문제를 거론하지 않겠다"라고 천명했고, 브란트의 무릎 꿇기로 이 문제는 상당부분 일단락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1947년 총선 결과 노동자당의 압승으로 공산당 정부가 수립되었다. 1948년에는 노동자당과 사회당이 합병해서 통일노동당이 되고, 1952년에는 인민공화국 헌법이 채택되면서 '폴란드 인민 공화국(Polska Rzeczpospolita Ludowa)' 이라는 사실상 소련의 위성국가가 세워졌다. 이에 대해 영국은 국내에 머물고있는 10만여명의 폴란드인들에게 시민권을 전부 부여하는 특혜를 수여했으나 그것으로 어디 보답이 되랴... 폴란드인들의 입장에서는 사실상 나라를 숙적에게 45년간 점령당한 셈이다. 한국의 일제시대보다 더 길다. 한편 폴란드에서 40년대 말부터 50년대 중반까지 비에루트가 집권하며 스탈린주의식 정치가 펼쳐졌다. 공산당이 소련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의 비호 아래 잘 놀던 사이 폴란드 본국은 나치 독일에게 점령을 당하였고 수많은 군인들이 해외로 망명해서 폴란드를 위해 싸웠으며 국내에 남은 사람들은 폴란드 국내군(Armia Krajowa)를 조직해서 바르샤바 봉기 등의 숱한 항쟁을 벌였다. 그러나 이들에게 소련은 지원을 해주기는 커녕 전후에 폴란드를 점령하여 수많은 전쟁 영웅들을 잡아다 시베리아에 보내버렸으며 대부분이 거기에서 옥사하였다. 폴란드 국내군의 마지막 사령관이었던 레오폴트 오쿨리츠키(Leopold Okulicki) 여단장도 시베리아에서 옥사했으며 폴란드 국내에서 나치 독일에 대항하는 암살 작전을 지위했던 아우구스트 에밀 피엘도르프(August Emil Fieldorf) 여단장은 전후 폴란드 공산 정권에 의해 사형을 당했다. 이에 일부 우파 인사들은 6년간 폴란드를 점령했던 나치 독일에 이어 소련과도 맞서 싸우기로 결정하고 다시 숲 속으로 들어가 반소 반공 항쟁을 벌였다. 이들의 저항은 1963년까지 계속되었으며 반소 저항군들은 대부분 공산 정권에 의해 현장에서 사살당했다. 반소 저항군들은 대부분 대독 전쟁에 참여한 참전 영웅임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민주화 시절까지 반역자로 몰렸으며 민주화 이후에나 사면 복권 및 훈장이 수여되었다. 하지만 1956년 비에루트가 소련을 방문하던 도중에 사망하고 그 직후 반소 자유화 운동이 펼쳐지자(포즈난 항쟁) 이를 강경진압한 국방장관 콘스탄틴 로코솝스키는 엄청난 비난을 받으며 쫒겨나버렸다. 이로써 당내에서 스탈린주의파 강경파는 실권을 잃어버렸으며 상대적으로 진보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16]가 집권했다.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는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해서 폴란드 인민들에게 인기가 많았지만 외교적으로 WTO에 잔류하는 등 소련에 유화적인 체스쳐를 취했기때문에 동시기 헝가리와 다르게 뒤엎어지지는 않았다. 어쨌든 임기 초반에 고무우카는 농업 집단화 정책을 중단시키고 언론통제를 완화하는 등 자유화 정책을 펼쳐나갔으며 그 동안 대립했던 가톨릭을 복권시키는등 나름대로 진보적인 정책을 폈지만, 얼마 지나지않아 개혁작업이 지지부진해졌고 언론통제도 다시 강화되는등 자유화 조치도 후퇴하면서 지식인층에게 실망감을 주었다 거기에다가 60년대 중반 무렵부터 경제가 침체되면서 고무우카는 지지기반인 노동자들 사이에서의 지지도가 급속히 떨어졌다.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는 이를 서독과 외교관계 개선으로 풀려했고 나름대로의 성과를 얻는데 성공했지만 이는 실망스런 정치를 펼친 것에 대한 면피로 보여졌다. 그리고 1968년 학생들의 시위로 위기를 맞자(다만 시위 규모자체는 소규모라 비교적 쉽게 진압된 편이었다) 고무우카는 소련의 지시대로 체코슬로바키아에 폴란드군을 출동시키는 짓을 해버렸고, 덕택에 당내에서도 고무우카에 대한 지지도가 떨어져 그 해 11월에 경쟁자들의 도전 속에 간신히 서기장 재선에 성공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후에 경기침체는 더더욱 심해졌고 1970년 크리스마스에서 급작스러운 식료품값 인상을 시행하자, 식료품값 인상에 항의하는 노동자의 투쟁으로 당내에서 지지기반을 완전히 상실하며 결국엔 사임하였다. 그 후 기에레크가 집권해서 경제침체를 타개할 방안으로 서방과 좋은 관계를 맺고 경제개방정책을 폈다. 그 덕분에 당시 폴란드는 매년 9%의 성장을 기록하면서 TV나 세탁기같은 전자제품도 대대적으로 보급되는 등 경제적으로 호황을 누렸고, 지지도가 높아진 기에레크는 소련과도 적극적인 외교를 펼치면서 잘나가는 듯 했다.
하지만 이러한 호황은 오일쇼크의 여파로 폴란드의 수출이 크게 위축되면서 오래가질 못했고, 결국에 1976년에 대대적인 물가인상을 시행하면서 노동자들 사이에서 실망감이 커져나갔다. 물가인상은 인민들의 저항으로 단기간에 철폐되었지만 그 대신에 외화난에 시달리면서 풍족해졌던 가전제품도 수입량이 줄면서 품귀현상이 벌어졌으며 거기에다가 70년대 말에 이루워진 금리 인상으로 외채가 그야말로 산더미처럼 쌓여가면서 폴란드는 파산상태에 직면하고 말았다. 이러한 을씨년스러운 상황에서 자유노조가 결성되었다. 한편 1980년 기에레크가 불명예스럽게 물러나고 카니아가 집권하며 새로이 등장한 자유노조를 인정했으나 소련이 폴란드에 정치적-경제적-군사적으로 압력을 가하자 군부에서 카니아를 내쫓고 계엄령을 시행했으며 이에따라 참으로 오랜만에(...) 강경파인 야루젤스키가 집권하여 레흐 바웬사를 구금하는 등 탄압을 가하자 이에 맞선 자유노조 연대를 중심으로 지속적인 공산당 독재 타도 투쟁이 전개되었다. 자유노조를 강경진압한다는 명목으로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군사정권에서 빚을 상환하기 위해 긴축정책을 대대적으로 펴는 동시에 구제금융을 받기 위하여 IMF에도 가입하였지만 경제는 도저히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내핍을 강요받은 노동자들의 군사정부에 대한 반감만 대대적으로 늘어났다(이 당시 폴란드인들의 삶이 어땠는지 마르지 항목 참조).
결국 명분을 잃은 공산정권이 굴복하여 원탁회의가 진행되었고, 동유럽 혁명 와중이던 1989년 6월 실시된 총선에서 통일노동당(공산당)이 다수의 의석을 상실[17]하면서 동구권 국가 중 처음으로 비공산 연립정권이 출현하는 기록을 세우며, 1990년 레흐 바웬사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을 계기로 진정한 독립을 얻었다.[18]
한편 폴란드 망명정부는 이때까지 런던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다. 레흐 바웬사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망명정부는 해체되고 1935년 폴란드 헌법 원문과 폴란드 대통령의 상징물 등이 레흐 바웬사에게 전달되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등 가톨릭 세력도 큰 영향을 미쳤다.
11 폴란드 공화국
폴란드의 구 신영토에 따른 정치성향의 비교(2010년 대선). 구영토에서 카친스키, 신영토에서 코모로프스키의 지지가 뚜렷하다.
바웬사는 정권을 잡는데는 성공했으나 경제정책에 실패에 따라 1991년과 1993년 총선에서 참패하여 공산당의 후신인 사회민주당이 연립정부를 구성하여 동거정부가 형성되었고, 1995년 대선에서도 패배하면서 구 공산당 출신의 사민당 알렉산데르 크바스녜프스키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었다. 이후 크바스녜프스키는 의외로 친EU, 친서방 정책을 펴면서 10년간 폴란드의 상황을 잘 이끌어나갔다. 퇴임 당시에는 무소속. 하지만 임기 말에 부정부패 스캔들이 수시로 터지는 바람에 지지율이 급속히 떨어져나가 결국 2005년 총선과 대선에서 사회민주당은 군소정당으로 몰락하고 말았고, 이후에는 법과 정의당과 시민강령이 정권을 주고받는 보수양당제가 형성되었다.
폴란드는 이원집정부제 국가로 대통령이 5년 중임이다. 민족주의 우파 성향의 "법과 정의당(PIS)"에서 2005년 당선된 레흐 카친스키 대통령(동생)과 2006년 취임한 야로슬라프 카친스키(형) 총리가 쌍둥이로 집권하면서 화제를 끌기도 했다. 앙겔라 메르켈과 신나게 갈등을 빚기도 했다.
하지만 야로슬라프 총리는 2007년 총선에서 시민강령이 승리하면서고작 1년 3개월만에 사임하여 동거정부가 형성되었고, 형인 카진스키 대통령이 2010년 임기를 6개월 남겨놓고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그해 7월 중도파인 시민강령(PO) 당의 브로니스와프 코모로프스키(Bronisław Komorowski)가 5년 임기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11년 총선에서도 시민강령이 승리하였다. 형 야로슬라프는 결선투표에서 탈락. 코모로프스키는 반공운동을 이끌던 친유럽주의자로, 카친스키보다 친유럽 성향이 강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코모로프스키 대통령은 러시아에 대해서도 온건한 정책을 펴고 있었다가, 2014년 크림 위기 이후에 강경성향으로 돌아섰다.
한편 코모로프스키 대통령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의 비호를 받은 우크라이나 극우주의자들이 1943년에 서부 우크라이나에서 폴란드인에 대해 벌인 학살을 추모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루치크(우크라이나어 : Луцьк, 폴란드어 : Łuck)를 방문하였다가 우크라이나의 극우 정당인 자유당(Свобода) 청년 당원에게 어깨에 계란을 맞았다. 참고로 극우 청년은 계란을 대통령에게 투척한 것이 아니라 가까이에서 직접 어깨에 짓눌러 버렸다. 루치크는 원래 키예프 루스의 땅이었으나 폴란드 왕국에게 먹혔고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폴란드 분할로 인해 러시아 제국에게 먹혔고 러시아 제국 붕괴 당시 인구 대다수가 우크라이나인이었기 때문에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Західноукраїнська Народна Республіка)으로 독립하였으나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가 이끄는 폴란드 제2공화국의 침공을 받아 아홉 달도 안되어 멸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루치크는 폴란드의 강제 지배를 이십 년간 받게 되었다. 이는 폴란드의 리투아니아 침공, 소련-폴란드 전쟁 등과 함께 그때까지의 폴란드의 피해자 이미지를 완전히 개발살내버리고 하는 짓은 프랑스, 독일, 소련, 영국같은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과 다를 바가 없었으면서 벨기에, 이스라엘, 네덜란드, 일본, 인도네시아같이 피해자 코스프레하는 제국주의자들이라며 폴란드가 지금까지 줄창 욕을 먹는 주 원인이 된다. 그러다가 1939년의 폴란드 침공 이후 동부 지역이 소련에 편입되자 거기에 살던 소수계였던 폴란드 장교들은 카틴 학살을 당하게 되고 폴란드 지주들은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그리고 소련의 지배가 이어진지 2년 뒤, 나치 독일이 독소 전쟁을 벌여 이 곳을 점령하였고 소련과 폴란드에게 실컷 얻어맞았던 우크라이나인들은 독일군을 반겼다. 참고로 루치크는 1939년 당시 유대인이 절반 이상이었고 우크라이나인이 폴란드인보다 두 배 많았는데, 일부 우크라이나인들은 나치 독일과 협력하여 유대인들을 전부 죽여버렸고 자신들을 이십 년 간 지배를 했던 폴란드인들을 같이 죽였다.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아인자츠그루펜의 독일산 총알이었다.[19] 아무튼 이에 코모로프스키 대통령은 칠십 년이 지나서야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폴란드인 소수민족의 학살을 추모하기 위해 우크라이나를 방문하였다가 극우 정당 소속 청년에게 계란을 맞는 봉변을 당한 것이다.
한편 위 동영상에서는 폴란드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서 계란을 맞았음에도 댓글에는 폴란드인들이 폴란드어로 자국의 대통령보고 계란이 아니라 똥을 맞았어야 했다든지 코모로프스키는 쓰레기라는 등의 욕을 하고 있는데 2014년 현재 폴란드에서는 민족주의 성향의 법과정의당(Prawo i Sprawiedliwość)의 지지율이 현 집권 여당인 시민연단(Platforma Obywatelska)의 지지율보다 무려 12%나 높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코모로프스키 대통령은 2013년 10월 21일부터 23일까지 한국을 국빈 방문하고, 박근혜 대통령과 한-폴란드 양국관계를 전략적 동반자관계로 격상시키는 데 합의하였다. 또한 한국외국어대학교를 방문하여 "유럽 속의 폴란드, 폴란드 속의 유럽"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그런데 대통령님아 한국외국어대학교 폴란드어과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캠퍼스에만 있는데 왜 서울캠퍼스에서 강연을 하셨는지요?
2014년 현재 폴란드에서는 집권 여당이 아니라 민족주의 성향의 보수 우파 야당인 법과 정의당(Prawo i Sprawiedliwość)이 35%의 지지율을 얻고 있으며 친유럽연합 성향의 자유주의 우파 집권 여당인 시민연단(Platforma Obywatelska)이 23%의 지지율을 얻고 있으며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좌파 정당인 민주좌파연합(Sojusz Lewicy Demokratycznej)이 8%의 지지율을 얻고 있으며 시민연단과 연정을 맺은 연립 여당인 농민당(Polskie Stronnictwo Ludowe)은 4%의 지지율을 얻고 있다.Wchodza_tez_SLD_i_PSLSONDAZ_.html # 다만 가을 들어서 시민연단이 지지율을 차츰 회복해가고 있다. 그래서 코모로프스키 대통령이 안정적으로 재선에 성공할 듯 보였지만 정작 1차 선거에서 법과 정의당 안제이 두다 후보가 코모로프스키 대통령을 제치고 근소한 차이로 1위를 차지했고, 2차 선거전에서는 접전을 벌이다가 두다 후보가 결선투표에서 51.55%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세대별로 지지세 차이는 그리 크지는 않지만 20대 표가 두다 후보로 쏠려서 이길 수 있었다는 평. 여담이지만 결선투표 진행과정에서 웃지 못할 일이 있었다. 원래 밤 9시에 투표를 마쳤어야 되는데 불미스러운 일이 터지는 바람에 느닷없이 밤 10시 30분까지 투표시간이 연장되었다. 하지만 정작 대부분의 투표소가 이미 문을 닫았고 몇몇 투표소만 문을 열었기에 정작 연장된 시간에 투표를 한 사람은 얼마 없었다고(...).
2015년 총선에서도 강경 우파인 법과정의당이 승리하면서 정권이 교체되었다. 전체 의석 460석 중 법과정의당이 235석, 시민연단이 138석을 가져갔으며, 우익 포퓰리즘 정당인 쿠키즈 2015(42석), 자유주의 정당인 현대당(28석) 등 신흥 정당들이 그 뒤를 이었다. 좌파의 경우 "통합 좌파"라는 선거연합을 이루어서 선거에 나섰으나 득표율이 불과 0.4% 모자라[20] 좌파는 의석을 한 석도 얻지 못했다.- ↑ 이 영상은 2010년 상하이 국제 엑스포에서 첫 선을 보였으며, 2015년 6월 5일부터 2015년 8월 30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된 폴란드, 천년의 예술 전시전에서도 선 보였다.
- ↑ 러시아는 니에멘(Niemen)과 부크(Bug) 강 동쪽의 폴란드 영토 전부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오스트리아는 루블린 지역과 크라쿠프를 포함한 나머지 마워폴스카(Małopolska; 소폴란드) 지역, 포들라시에(Podlasie)와 마조프셰(Mazowsze) 지역 일부를 복속시켰다. 프러시아는 바르샤바를 포함한 마조프셰 지역과 포들라시에와 리투아니아 지역을 크라쿠프 지역 일부와 함께 차지했다.
- ↑ 위 애니메이션 동영상의 5분 7초 경에 잠깐 울리는 곡이 쇼팽이 작곡한 <혁명>의 일부.
- ↑ 무슨 폴란드를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처럼 서술했는데 남쪽 끄트머리의 산악지대를 제외하곤 끝없이 이어지는 대평야이긴 하지만 울창하기 짝이 없는 대삼림이 끊임없이 이어진 땅이다. 기마민족이던 스키타이-사르마티아족,훈족,아바르족,머저르족도 산림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뻑하면 진흙탕 라스푸티차가 일어나 기병이 활동하기 매우 힘든 폴란드 그리고 상태가 비슷한 북부 유럽지역 러시아로는 잘 진격하지 않았고 주로 그마나 초원이 많은 헝가리 지방에 정착하였다.그리고 페체네그족 쿠만족 기타 군소 기마민족들도 헝가리 정착을 시도했다. 기갑을 위시한 근현대전의 경우는 기병이랑 완전히 다른 강력한 화력의 투사병기들로 무장해서 나무따윈 커다란 장애물이 안 돼니 그때부턴 탁 트인 초원이랑 다를바가 없어졌지만... 단지 폴란드가 침공을 많이 받은것은 유럽의 한가운데이다가 주변에 강대국들이 득실거리는 지정학적인 요인이 맞다.
- ↑ 튜튼 기사단은 후에 프로이센 공국이 되지만 1700년 왕국이 될 때까지는 형식적으로 폴란드의 속국이었다.
- ↑ 아들을 통해 헝가리-보헤미아를 별도의 왕국으로 다스리기도 했다. 단, 폴란드-리투아니아와 헝가리-보헤미아 전체를 단일 통치자가 다스린 적은 없었다. 야기에우어 왕가의 헝가리-보헤미아 왕국은 1490년에야 완성되었으며, 러요시 2세가 모하치 전투(1526)에서 오스만 제국군에게 전사하면서 2대만에 단절되고 합스부르크 왕가로 넘어가게 된다. 보헤미아 참조.
- ↑ 야기에우오 왕가의 마지막 혈통으로 그녀가 자식 없이 사망하면서 야기에우오 왕가는 단절되었다.
- ↑ 이때 프로이센은 자국이 점령했던 폴란드 지역을 러시아에 넘겼다.
- ↑ 바르샤바 공국이나 폴란드 입헌왕국 등은 사실상 괴뢰국이었다.
- ↑ 이때는 아직 소련이 건국하기 전이지만 편의상 소련으로 표기.
- ↑ 리투아니아의 수도였으나 이 당시 인구 비중이 유대인 40%에 폴란드인 50%였다.
- ↑ 정식 대통령은 딱 4년하고 물러났으나 국방장관으로 군사력을 휘어잡고 외무장관과 여러 요직을 독점하면서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부리듯 군림했다.
나! 국방장관이요! 나 참모총장이요!게다가 차기 외무장관 및 다른 정부 요직도 죄다 그의 부하들이나 인맥이 독점했다. - ↑ 러시아는 한동안 이 학살을 인정하지 않았고 추모제를 위해 러시아의 초대없이 (친러시아계 총리만 초대) 러시아로 향하던 폴란드 대통령과 국가 주요 고위인사들(무려 97명!)이 의문스러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아픈 기억이 있다. 고작 2010년의 일.
- ↑ 첫째는 소련, 둘째는 미국, 셋째는 대영제국. 다만 이는 소련측에서 싸운 폴란드 동방군단을 합산한 규모이다. 영국쪽의 자유 폴란드 군단만으로는 자유 프랑스 군단보다 규모가 작았다.
- ↑ 니얼 퍼거슨의 《증오의 세기》에선 적기(赤旗)를 흔들며 "소련 만세! 폴란드에 죽음을!"하는 유대인이나, 백적의 폴란드 국기에서 흰 부분을 떼어내 붉은 깃발을 만드는 유대인들이 나온다. 저 머나먼 중앙 아시아로 실려가는 동포들을 보는 폴란드인들의 시점에선 뭐…
그 전에 잘해줄 것이지 - ↑ 옛날에는 'ł' 표기문제로 고물카(...), 고무카라고 불리기도 했다.
- ↑ 1989년 4월 당, 정부, 노조, 지식인 대표 등 55명으로 이루어진 '원탁회의(Obrada Okragłego Stołu)'에서는 자유노조의 합법화, 자유선거에 의한 상원 신설, 하원 460석 중 35%의 자유선거, 대통령제 신설 등이 결정되었다.출처. 여기서 상원 100석중 99석 하원 161석을 자유노조가 차지했다.
- ↑ 레흐 바웬사 이전에 상, 하원 합동회의에서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를 초대 대통령으로 지명하였고 야루젤스키는 자유노조 기관지의 편집장 타데우시 마조비에츠키를 총리로 지명했다. 그런데 개혁의 지연, 옛 공산권 세력 잔류에 불만을 품은 개혁파들이 야루젤스키에게 조기퇴임 압력을 넣었고 결국 야루젤스키가 퇴임하여 임기 5년의 대통령 직선제가 채택된다. 따라서 레흐 바웬사는 2대 대통령이다. 참고로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는 아직 공산 폴란드였을 당시 80년대 폴란드의 서기장이었고 이때는 자유노조를 탄압했다. 계속 강경책을 써오다가 여러 곳에서 터져나오는 불만을 잠재우고자 최후에는 자유노조를 인정하였다.
- ↑ 물론 정말 자기 말 잘 듣는 우크라이나인들에게는 우크라이나 SS나 명예 아리아인 어쩌고 하는 온갖 수식어들을 다 갖다 붙여주며 잘 대해줬다.
- ↑ 폴란드 총선에서 의석을 얻기 위해선 정당은 5%, 정당간 선거연합은 8% 이상을 득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