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blius Cornelius Scipio(BC 236~BC 184)
간디
목차
1 개요
로마가 본격적인 대제국으로 발돋움 하는 발판을 마련한 군사적 천재이자 적수가 없었던 희대의 명장 한니발 바르카를 이긴 유일한 인물. [1]
최고의 전략가[2]
이 인물을 '대' 아프리카누스라고도 하는데, 이 사람의 아들의 양자인 '소' 아프리카누스와 구분하기 위해서이다.[3] '소' 아프리카누스는 제 3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사람이다. '대' 아프리카누스의 아버지도 스키피오.[4] 사실 기록된 스키피오 가문 사람들 이름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세가지 밖에 없다.
2 그의 생애
2.1 초기 생애
푸블리우스 스키피오는 로마의 명문인 코르넬리우스 가문 출신으로 제2차 포에니 전쟁 초기의 장군 P.C.스키피오의 아들이다. 그의 태어난 시기는 그의 생애에 대한 수많은 기록으로 정확한 추측이 가능하다.
그에 대한 많은 기록들은 여러모로 정확한 일치를 보여주고 있다. 가령 그가 17세에 그의 아버지를 티키누스 강에서의 싸움에서 기병과 함께 돌진해 구해냈다던가, 24세에 그가 히스파니아 전쟁에 지원했다던가 또는 27세에 그가 그의 아버지와 삼촌의 복수를 위해 지휘권을 요구했다던가 하는 것등이 기록에 나오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틀림없이 기원전 236년 또는 기원전 235년에 태어났을 것으로 여겨지며 실제로 대부분의 학자들은 기원전 236년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는 로마가 탄생한지 517년이 지난 해였다.
그의 가문인 스키피오에선 여러 집정관을 배출하였고 그의 증조부는 원로원의 최고직이라 할 수 있는 감찰관을 역임하였다.[5] 그의 아버지 역시 젊은 나이때부터 두각을 나타내 순조로운 출세를 하고 있었다. 스키피오의 어머니는 폼포니아로 비록 평민 출신이었으나 그녀의 아버지는 집정관 마니우스 폼포니우스 마토였다.
스키피오 가문은 그 시절 최고 잘나가는 가문 중의 하나였고 따라서 이런 환경에서 큰 스키피오는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스키피오에겐 루키우스 스키피오라 불리는 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동생 역시 뛰어난 인물로 스키피오가 두각을 나타내기 전부터 안찰관에 당선되는 등의 출세를 하고 있었다. 스키피오의 동생은 훗날 셀레우코스 왕조와의 전쟁에 장군으로 참전해 아시아티쿠스라는 칭호를 얻는다.
2.2 군사 경력의 시작
스키피오의 유년시절은 그가 군사에 참여하면서 종지부를 찍는다.
그는 어린 나이에 카르타고와 로마와의 전쟁에 가담한다. 전쟁 중 어느 시점에서 스키피오는 그의 아버지에게 그의 모든 생애를 카르타고와의 전쟁에 바치겠다고 맹세하였다고 한다. 이는 한니발과 유사하다.[6] 젊은 스키피오는 트레비아 전투 직전에 벌어진 티키누스 강의 기병 전투에 기병으로써 참전하였는데 패배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이후에도 그는 트레비아, 칸나이 전투에도 기병으로써 참전하였다. 폴리비우스에 따르면 티키누스 강의 전투에서 스키피오는 17세의 나이에 그의 아버지의 생명을 구했다고 하는데 이때 그는 포위된 아버지를 향해 단기필마로 뛰어들어가 포위망을 뚫는 용맹을 보였다고 한다.
스키피오의 예비장인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였는데 파울루스는 다름아닌 칸나이 전투의 로마측 사령관이었다. 20세인 스키피오는 군사호민관의 직책으로 칸나이 전투에 참여하였고, 로마군이 참패하자 카누시움으로 달아난다.
이때 파비우스 전략을 주창한 퀸투스 파비우스의 친아들을 비롯해 여러 젊은 장교들이 모여있었는데 이들은 눈물을 지으며 '공화국은 끝장났다. 죽은 것과 다름없다 (the republic was completely finished, as good as dead!)'고 외치거나 이탈리아를 떠나 다른 왕조로 망명해야 한다는 의견을 말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이때 스키피오는 격분하여 로마에 그의 모든 생애를 바치겠다고 맹세하였고 다른 이들에게 이 맹세를 요청함으로써 이 분위기를 수습한다.
그 후 스키피오는 기원전 213년에 안찰관(curule aedile)이 되기로 했는데 그의 나이는 고작 22세였다. 안찰관 혹은 조영관으로 번역되는 해당 직책은 로마에서 상당한 고위직으로 귀족, 평민에게 각각 두 석씩만 할당된 직책이었다. 특히 스키피오 같은 귀족 출신은 호민관 출마가 불가능하였다. 귀족이 얻을 수 있는 공직 중엔 당시 네 석만 존재하던 법무관의 바로 아래 직책이 안찰관이었고, 때문에 귀족 사이에서 안찰관이 되기 위한 경쟁은 매우 치열하였다. [7] 훗날 술라가 나이제한을 도입했을 때 안찰관은 36세부터 출마가 가능한 직책이라고 규정한 것을 고려하면 스키피오의 나이는 안찰관이 되기엔 상당히 어렸던 것이다.
스키피오가 안찰관에 등록할 때 그의 사촌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와 동행하였다. 선거를 주재한 호민관은 그의 나이가 어리다고 하며 등록을 거부한다. 그 이유는 당시 로마에선 공직에 출마하기 위해선 최소 10번의 복무를 하는 것이 관습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스키피오는 이미 그의 전장에서의 용맹과 애국심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평민들의 지지를 많이 받았으므로 호민관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선출을 허가한다. 이어진 선거에서 스키피오는 무난히 안찰관에 당선된다.
2.3 스페인 원정 시작
스키피오가 안찰관의 직무를 시작한지 2년 뒤인 기원전 211년 스페인에서 스키피오의 아버지인 푸블리우스 스키피오와 삼촌인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베티스 고지의 전투에서 스페인 원주민 동맹군의 배신과 카르타고군의 매복 공격으로 패배한 끝에 전사했다는 소식이 로마로 전해졌다. 로마측에서는 즉시 그 해의 법무관 중 하나였던 나중에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우게 되는 클라우디우스 네로에게 2개 군단을 주어 파견해 2개 군단에 해당되는 패잔병을 수습하게 하였다.
다음해인 기원전 210년, 로마 정부는 스페인에 추가로 보낼 2개 군단을 편성하였는데 스키피오는 이 병력의 지휘권을 요청하였다. 이때 스키피오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언변을 보여주었고 때문에 민회에서는 그를 파견하는 것을 압도적으로 지지하였다고 한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스키피오만이 유일하게 이 자리를 요구한 사람이었는데 그 이유는 스페인에서의 전황이 로마측에서 매우 불리했으므로 누구도 이 지휘권을 맡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때 귀족사이에선 스페인 원정군의 지휘권을 사형선고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8]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이례적으로 스키피오는 지휘권을 수여받았는데[9] 원로원은 스키피오에게 지휘권을 주는 대신 그해 기원전 210년에 선출된 법무관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에게 (Marcus Junius Silanus) 공식적인 지휘권을 주고 대신 실질적인 지휘는 스키피오가 위임받도록 하였다.
스키피오는 기원전 210년 2개 군단을 이끌고 4개 군단이 머물고 있었던 에브로강 북쪽의 로마 군단과 합류하였고, 지휘관인 전직 법무관 네로에게서 전체 군단 지휘권을 넘겨받는다. 추가로 스키피오는 원로원에게서 28척의 함대를 받아내었다.
스키피오가 도착했을때 에브로강 남부 전체는 카르타고가 장악한 상태였다. 스키피오의 아버지와 삼촌이 10년에 걸쳐 이룬 성과가 원점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스키피오는 에브로강을 건너 적진의 영토로 들어가야했는데, 그 이유는 스페인이 카르타고에 의해 장악된 상태라면 카르타고 본국이 마음놓고 이탈리아에 원군을 보내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스키피오는 청년 시절 부터 연설을 잘했는데 그는 자신의 부대를 모아놓고 연설을 하여 그들의 사기를 올린다. 그후에 적 부대의 동향을 파악하였는데 에브로 강 남쪽의 카르타고 영토에선 한니발의 동생인 하스드루발 바르카, 마고 바르카, 그리고 카르타고 본국에서 파견된 하스드루발 기스코가 각각 그들의 부대를 이끌고 있었다. 이들 세 부대는 각각 상당한 거리에 위치하여 배치된 상태였다.
이렇게 적의 위치를 파악한 스키피오는 그들 부대가 합쳐지기 전에 각개 격파하고 싶어했다. 따라서 그는 에브로 강을 건너 남하하는 단순한 행군 대신 로마 해군을 통해 우회 상륙하여 카르타고의 본부가 위치한 카르타고 노바, 즉 지금의 스페인의 항구도시 카르타헤나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2.4 카르타고 노바 공격
카르타고 노바엔 상당량의 물자가 비축되어있었는데 지키는 병력은 사령관 마고(마고 바르카와는 동명이인이다) 휘하의 3천여명 정도밖에 없었다. 스키피오는 하루만에 그 도시를 향해 이동한 뒤 다음날 아침 도착하였다. 스키피오는 그 날 내내 도시에 대한 포위 준비를 벌였고 다음날 공격을 시작하였다.
로마군과 카르타고군은 처음엔 투창과 투석, 활을 쏘면서 전투를 시작하였다. 양측의 공방전은 치열하였고 카르타고군은 로마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로마군은 이 공격을 견디면서 계속 공성무기를 전진시켰고 마침내 성벽에 도달하게 되자 본격적인 공성전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한참을 싸우는 동안 스키피오는 바다에 닿아있는 성벽 한측이 낮고 썰물이 되면 성벽 밑바닥이 드러난다는 것을 파악하였다. 그는 썰물이 될 때 병력을 이끌고 그곳으로 가 선두에 서서 사다리를 손수 끌어다 설치했다. 이에 카르타고 수비대도 황급히 병력을 파견해 로마군을 방해했으나 로마군은 사력을 다해 사다리를 설치하였고 마침내 병력이 성벽을 점거하는데 성공하였다. 성벽에 오른 병사들은 스키피오의 명령에 따라 승리의 나팔을 불었고 이 소리를 들은 카르타고군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기세를 탄 로마군은 성벽을 넘어 성문을 여는데 성공했다. 마고는 자신의 병력을 후퇴시킨 뒤 시내의 시장터로 가서 항전을 벌였지만 로마군에 의해 수비군 거의 대부분이 목숨을 잃자 어쩔 수 없이 로마군에게 항복했다.
카르타노 노바를 접수한 스키피오는 약탈을 하는 대신 3일에 걸친 축제를 개최하였고 이로써 도시민들의 환심을 살 수 있었다. 그리고 군영 설치와 성벽 수리를 마친 뒤 그는 병력을 이끌고 주변 도시를 점거하기 위해 떠났다.
카르타고 노바의 함락 뒤 주변 도시들은 스키피오군이 도착하면 저항없이 항복하였다.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자신의 군영을 떠나 스키피오군을 향해 이동하였고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주변 도시에 사절을 파견해 원군이 곧 오니 이탈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마고 바르카는 누미디아 왕자 마시시나와 함께 용병을 소집하면서 병력을 증강하였다. 이러면서 기원전 210년이 지나갔다.
209년에는 양측간의 전투가 없었는데 이는 카르타고 장군들이 적극적인 군사활동을 펼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스키피오는 계속 병력을 증강한 뒤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머물고 있는 바이쿨라를 공격할 채비를 하였다.
2.5 바이쿨라 전투
스키피오가 다가오는 것을 안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서둘러 군영을 요새화하고 언덕 위에 병력을 배치하였다. 전장에 도착한 스키피오는 카르타고군이 공격하기 어려운 위치에 자리잡은 것을 알고 고민에 빠졌으나 지체하다가 마고와 기스코가 합류할 것을 우려하였으므로 서둘러 공격하기로 결심한다.
공격하기 이전 스키피오는 그의 병력 하나를 보내 카르타고군과 로마군 사이의 길을 점거하여 카르타고군이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렇게 한 뒤 그는 자신의 경보병을 내세워 카르타고군에게 접근하게 하였다. 카르타고군은 언덕 위에서 투창을 던졌으나 로마군은 방패로 방어하며 접근한 뒤 곧바로 교전에 임하였다.
교전은 상당히 길게 벌어졌는데 스키피오는 계속 그의 주력군을 자신의 캠프에 감추어두고 있었다. 전투가 길어진 뒤 스키피오는 캠프에 감춘 병력을 모두 내보내 전선의 양측을 우회하여 기동하게 하였다. 양측의 군을 맡은 지휘관들은 스키피오 그 자신과 부관인 가이우스 라일리우스였다. 스키피오는 좌익을, 라일리우스는 우익을 맡았다.
이 로마군의 기동은 하스드루발의 허를 찌른 것이었는데 그는 로마군이 자신의 주력을 계속 숨겨두었을 것이라고 예상치 못했다. 때문에 하스드루발 군은 세방면에서 공격을 받기 시작하였고 이를 견디기 힘들다는 것을 안 하스드루발은 자신의 병력을 캠프에서 철수시키기로 결정하였다.
하스드루발은 싸우는 동안 중요한 물품과 주력군을 모으기 시작하였고 곧바로 철수를 시작하였다. 하스드루발은 전투경험이 풍부한 장군답게[10] 병력을 거의 보존한채 혼란에 빠지지 않고 질서정연하게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로마군은 이들을 추격하지 못했는데 이는 캠프에 진입한 로마군이 서로 전리품을 줍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철수한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각기 부대를 이끌고 있었던 마고 바르카와 하스드루발 기스코에게 스페인 방어를 위임한 후 자신은 거의 온전하게 남은 직속 부대를 직접 이끌고 이탈리아에 있는 한니발에게 합류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는 한니발이 당시 이탈리아에서 로마군의 파비안 전략에 휘말려 고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도움이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곧바로 병력을 이끌고 북상하기 시작하였는데 스키피오는 그의 행군을 방해하지 않고 철수하였다. 이런 스키피오의 행보에 대해 당대 원로원은 물론 몇몇 역사가까지 비판하였는데,[11] 스키피오는 하스드루발을 추격했다가 마고와 기스코에 의해 후방을 공격당할 것을 염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2.6 기원전 208년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방해받지 않고 갈리아를 지나 이탈리아 내부로 진입하였다. 그는 비록 알프스를 넘었으나 로마군은 그의 진입로를 예측하고 있었다. 여기서 하스드루발과 한니발의 재능 차이를 볼 수 있는데 한니발은 언제나 로마군의 허를 찌르는 행군을 하였으나 하스드루발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하스드루발이 이탈리아에 진입했을때 리비우스가 이끄는 3만 이상의 로마군이 하스드루발을 기다리고 있었고 거기다 하스드루발이 한니발과 합류하려고 하는 사실을 알게된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리비우스를 지원하러 젊고 건장한 체격의 병사들로만 구성된 중무장보병 6천명과 기병1천기를 급히 이끌고 와서 합류해있던 상황이었다. 양군은 메타우루스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며 이 전투에서 네로의 활약으로 하스드루발의 군대는 완벽하게 괴멸된다.
하스드루발 군의 소멸로 스페인내에서는 두개의 부대, 하스드루발 기스코 군과 마고 바르카의 군대가 존재하였다. 이들은 스키피오가 머무는 카르타고 노바를 공격하지 않고 그해를 보냈는데 아마도 카르타고 본국이 보낼 병력의 증원을 기다리고 있엇던 것이라 여겨진다.
2.7 기원전 207년~종전
기원전 207년 한논이 이끄는 카르타고 본국의 병력이 스페인에 도착하여 마고 바르카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여기에 마고 바르카는 이베리아 용병을 대규모로 고용하여 강력한 군대를 편성했다. 그리고 가데스에 주둔하고 있던 하스드루발 기스코의 병력도 안달루시아 방면으로 진군해왔다. 이에 스키피오는 부관 실라누스로 하여금 마고의 군대를 습격하게 하여 한논을 사로잡고 마고의 이베리아 용병군을 상당수 와해시켰다. 그러나 카르타고 측 지휘관들이 정면대결에 응하지 않아 그 이상의 전과는 올릴 수 없었다.
이듬해인 기원전 206년, 스키피오가 지휘하는 4만 8천명의 로마군은 스페인 남부 일리파에서 마고와 기스코가 함께 지휘하는 카르타고 병력과 마시니사의 누미디아 기병 연합군 7만명 이상을 맞이하여 회전을 벌였다. 이 회전에서 스키피오는 뛰어난 전술적 역량을 발휘하여 카르타고군을 거의 전멸시켰고 이베리아 반도에서 카르타고 세력을 사실상 소멸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중요도는 약간 떨어진다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일리파 전투의 전략 전술적 전과는 칸나이 전투와 비교할만 했다.
BC 205년에는 집정관의 자격으로 원로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공격을 결의하고 스스로 시칠리아섬으로 건너가 아프리카 원정군을 편성하였으며 BC 204년 아프리카를 침공, 우티카와 바그라데스에서 시팍스와 하스드루발 기스코가 이끄는 카르타고-누미디아 대군을 연거푸 대파하여 카르타고를 압박하고 누미디아의 수도 키르타를 점령하여 마시니사를 왕으로 앉혔다. BC 202년 아프리카의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을 무찌르고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종결시켜 '아프리카누스'라는 칭호을 얻었다. '소(小)' 스키피오도 카르타고를 멸망시켰기 때문에 같은 칭호를 얻었으니 주의.
2.8 포에니 전쟁 이후
그후, 한니발이 망명해있던 셀레우코스 왕조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와 결전을 벌여 한니발이 또다시 망명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단, 직접적으로 지휘를 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로 몸이 굉장히 안 좋았다고 한다.
이 시절에 한니발과 '당대 최고의 장군은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 것은 유명. 이때 한니발 본인인 고대 최고의 장군이 누구냐는 스키피오의 질문에 알렉산드로스 3세를 첫번째로, 피로스를 두번째로, 그리고 세번째로 한니발 자신을 꼽았다. 이에 스키피오가 "당신은 나한테 졌지 않소?"라고 묻자 한니발은 "만약 내가 당신을 이겼다면, 나는 알렉산드로스까지 앞질러 첫번째가 되었을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귀국 후 '대大' 카토 일파의 맹렬한 정치적 공격을 받았는데 법적으로 스키피오는 무죄였지만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실의에 빠져 시골에 처박혀 살다가 쓸쓸히 죽었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유언으로 "배은망덕한 조국이여! 그대는 나의 뼈를 얻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실의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부분. 스키피오의 묘지는 그가 말년에 은둔한 리테르눔에 있었다고 하나, 현대에는 남아있지 않다.
다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내용과 달리 당시 스키피오가 공격받았던 것은 단순히 정적들이 그를 시기해서만은 아니었다.[12][13] 제2차 포에니 전쟁을 끝마친 스키피오는 고작 30대였는데, 이전에는 이렇게 젊은 나이에 집정관이 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런데 그는 30대에 원로원 의원들이 평생 이룩했던 것보다도 더한 공적을 이룩하여 아프리카누스라는 칭호까지 얻게 된다. 자연스럽게 명성을 얻게 된 스키피오가 참주가 되지 않을까, 공화정에 해가 되진 않을까 원로원 의원들은 경계했고, 그래서 한니발이 참전했던 마그네시아 전투 이외엔 그에게 군대를 이끌게 하지 않았다. 원로원은 그에게 적합한 자리를 만들어주려고 노력했지만, 그 당시에 아우구스투스 이런 칭호를 줄 수 있었던 것도 아니라서 실패했다. 결국 스키피오를 정계에서 배제하는 것이 더 손쉬운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3 장군으로서의 평가
3.1 전술
리델 하트를 비롯해서 소수이지만 스키피오가 더 뛰어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먼저 포위전을 실현한 지휘관이 한니발이라는 점에서 대부분 한니발을 한 수 위로 친다.[14] 한니발에게 당하기 전까지 로마군의 전술은 적군을 아군의 중심으로 몰아넣는데 집중하는 등 전술적으로 경직된 모습을 자주 보였지만, 스키피오와 그 이후 로마 장군들은 기병을 적극적인 활용하여 포위전술을 펼쳤으며 이것만 봐도 한니발이 얼마나 로마군에게 큰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다.
물론 적의 전술을 배워서 써먹는 것도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며, 결국 자마에서 한니발을 이겼으니까 스키피오가 더 낫다는 주장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고대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한니발을 더 칭송하고 있다. 애시당초 망치와 모루 전술을 완성한 사람이 한니발인지라 이러한 평가를 뒤집기는 어려울 듯하다. 순수하게 전술가로서만 봤을 경우 한니발이 알렉산드로스보다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이유도 이러한 업적 때문이다.
그러나 포위섬멸에 있어서 한니발이 아주 뛰어난 모범을 보여 후대에 귀감이 된건 사실이지만, 전투에서 포위전술이란건 까마득한 옛날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전투에서도 보이는 병법이다. 즉, 한니발이 포위섬멸전의 정석을 보여준건 맞지만 한니발이 포위섬멸전을 '발명'했다고는 말 할 수 없다. 애당초 선사시대 인류가 매머드 같은 거대한 짐승을 사냥하는 주된 전법부터가 소수의 인원이 매머드를 유인한뒤 매복해 있던 다른 사냥꾼들과 합세하여 한꺼번에 에워싸서 죽창...아니 투창질을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스키피오가 한니발의 전술을' 배웠다' 혹은 '베꼈다'라고 볼 만한 근거가 어디에도 없다. 실제 스키피오의 전술전개를 봐도 딱히 한니발로부터 '배워서 써먹었다'라고 볼 만한 구석이 없으며, 위에서 스키피오가 한니발을 베꼈다고 주장하며 제시하는 유일한 근거는 '포위섬멸전을 썼기때문'인데, 상술했듯 실제로 스키피오가 구사한 전술은 한니발이 칸나에에서 펼쳤던 전술과는 다르며, 무엇보다 포위섬멸전(혹은 망치와 모루 전술) 자체는 알렉산드로스와 한니발을 거치며 정형화 되었다고는 할 수 있어도 그 둘중 한명의 '발명품'이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언제나 로마보다 기병 전력에서 우세한 상황이었던 한니발과 다르게 스키피오는 자마 이전까지 카르타고보다 기병 전력에서 열세로 싸웠다. 지휘관의 질적 차이가 있을지언정 매회 전투마다 각기 다른 전술로 상대를 이겨야 했다는 점에서 스키피오도 한니발 못지 않게 고생했다. 게다가 아프리카 침공 때는 로마에서 풍부한 지원을 해준 게 아니라 본인 스스로 병사를 모아서 가야했을 정도였으며 심지어 한니발보다 병력수에서 열세였는데도 불구하고 대승리를 거뒀다.
3.2 전략
버나드 로 몽고메리나 리델 하트가 자신들의 저서에서 썼듯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위대한 면은 바로 그 전략성에 있다. 그가 한니발을 로마에서 끌어내기 위해 단계적으로 수립하고 시행한 전략은 탁월하다고 밖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요약해 보면,
1. 한니발의 실질적인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스페인 남부 지방(한니발의 가문인 바르카 가문의 본성이 있었다)의 카르타고 세력을 일소한다. 이것은 한니발의 잠재적 보급로 하나를 영구히 차단하는 것이자, 동시에 그의 퇴각로를 카르타고 본국으로 한정시키는 의미도 있었다. 이 의도는 멋지게 성공했고,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 또한 이 과정에서 한니발을 지원하러 로마로 오다가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전사했다.
2. 북아프리카로 진군해 카르타고의 유력한 동맹국이었던 누미디아를 로마 편으로 끌어들인다(이 과정에선 상당한 행운이 따르긴 했다. 당시 누미디아는 마실리 족과 마사에실리 족으로 나뉘어 시팍스와 마시니사가 주도권 독점을 놓고 다투고 있었는데 이것을 스키피오가 잘 이용한 것이었다. 이후 마시니사를 지원하고 후에 누미디아의 왕이 된 마시니사의 지원을 받게된다). 이 때문에 카르타고는 고립되었고, 그 결과로 인해 부수적으로 한니발은 자신의 군단에서 유력한 전력 중 하나였던 누미디아 기병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하게 되었다. 참고로 자마 전투에서 카르타고 편으로 들어온 누미디아 기병은 시팍스의 잔당들이 가담하며 지원한 것이었으며 그나마도 숫적으로 많이 부족했다.
3. 최종적으로 카르타고 본국을 목전에 두어, 본국을 구하기 위해 한니발이 별 수 없이 귀환하도록 만들어 결전 혹은 강화를 강요한다. 이것은 어떤 형태로던 전쟁을 마무리짓기 위함이었고, 나아가 한니발을 이탈리아 반도에서 몰아낸다는 로마의 최종적 목표를 이루어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모두 알다시피, 완벽히 성공했다.
상대의 손발을 묶고 행동을 강제한다는, 전략의 기본 목표를 충실히 실행했다는 점에서 이보다 더 이상적인 케이스는 많지 않다. 한니발이 자신의 최종적 목표였던 '로마 연합의 해체'를 끝끝내 이루어내지 못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스키피오의 이러한 전략적 성공은 빛나 보일 수 밖에 없다.
물론 로마 본국에서 분투한 '지구전주의자'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나 '로마의 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등 여러 걸물들의 역할, 한니발의 군단이 가지고 있었던 극복하기 어려운 여러 약점들을 생각해 볼 때 이러한 성공의 모든 공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 허나 제2차 포에니 전쟁을 결국 끝낸 것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위대한 전략 때문이라는 점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한니발의 화려한 전술적 성공은 높이 평가하면서, 스키피오의 전략적 성취를 폄하할 이유가 없다는 이야기.
3.3 결론
분명히 고대 서양사에서 손에 꼽을만한 명장이건만, 비교대상이 하필이면 전략의 아버지[15]인 한니발이라 상대적으로 저평가되는 데다가, 역사상의 위치도 한니발의 적이기에 별로 인기가 없는 비운의 장군이다. 현대인들은 물론이고 로마인들까지도 한니발이 스키피오보다 낫다고 평가했으니 안습[16]. 한니발보다 더 낫다고 평가받을 장군이 몇이나 되겠냐마는
단, 객관적으로 봤을 때 승자는 엄연히 스키피오이다. 스키피오가 한니발의 전술을 배워서 써먹었다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 말엔 근거가 전혀 없다. 자마 전투 당시 스키피오가 쓴 전술은 한니발이 쓴 전술과 확연히 다르다. 게다가 한니발의 전술을 스키피오가 '배워서 써먹었는가'에 대한 근거도 제대로 없다. 애초에 자마 당일 스키피오가 전술적으로 한니발한테 밀렸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스키피오는 사전행보에서 물이 없는 지역까지 한니발을 유인했고, 전투 시작 직후 한니발의 코끼리 러쉬조차 완벽하게 파훼했다. 무엇보다 동시대 두 명장이 국운을 걸고 싸웠는데 그 승자는 스키피오였다. 물론 전투 한 번으로 명장의 우열을 판가름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말이다. 어쩌면, 자마 전투는 엇비슷한 명장끼리 만났기에 전력이 더 유리했던 스키피오가 이겼다고 볼 수 있다.
4 기타
정치가로서 활동하던 시절엔 대머리에 마른 몸을 가진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젊었을 적에는 꽤나 미남이었으며, 성품도 누구나 격의없이 대하는 호인이라 따르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자식 농사를 잘 지었다. 딸 코르넬리아는 그 유명한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 현명하고 담대한 여인으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소위 '소(小)' 스키피오로 불리는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법적으로는 조카뻘에 해당되는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에 비판적인 모습을 보이는 등, 다분히 보수파적인 인물이었지만 가이우스 마리우스 이전까지는 로마군의 가장 뛰어난 장군이기도 했다. 다만, 이 인물 역시 사생활 면에서는 비판을 받았다. 동성애 관련 문제로 공격받았는데, 이유가 여자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 정확히 말하면, 2차 포에니 전쟁 이후에 셀레우코스 왕조로 한니발이 망명한 후 한니발은 로마에게 또 진다. 다만 이건 해전이라 보통 논외로 친다.
- ↑ 버나드 로 몽고메리의 평가이다. 그는 한니발은 최고의 전술가이지만, 스키피오는 최고의 전략가이며 그것이 둘의 승부를 갈랐다고 평했다. 보급과 큰 그림을 그리기 좋아했던 사람다운 평가.
- ↑ 대 스키피오와 소 스키피오의 구분은 아프리카누스의 아버지와 아프리카누스를 구분하는 것이고, 대 아프리카누스와 소 아프리카누스의 구분이 아프리카누스와 아프리카누스의 양손자를 구분하는 것이다.
- ↑ 스키피오는 가문 이름, 즉 성이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다. 단 아프리카누스와 그의 부친은 성 뿐만 아니라 별호를 제외한 이름까지 완전히 똑같아 '대' 스키피오와 '소' 스키피오로 구분되었다.
- ↑ 감찰관은 집정관보다 권위있는 로마 사회의 최고의 직책이었다.
- ↑ 이는 로마인 역사가들이 한니발과의 라이벌 기믹을 극대화 하기 위해 각색한 것일 수도 있다.
- ↑ 평민은 귀족과 달리 10석이나 되는 호민관의 직책에 출마할 수 있으므로 공직 경쟁에서 오히려 평민이 유리하다고 볼 수도 있으나, 로마 귀족들은 신관, 제관과 같은 업무를 독점하였고 당시 로마에선 이것도 꽤 중요한 경력으로 쳐주었다
- ↑ 당시 베티스 고지의 전투에서의 패배로 로마의 세력은 에브로 강 남쪽의 스페인에서 완전히 소멸한 상태였다. 로마측에서는 스페인에 파병할 병력을 증강하였으나 그 병력의 규모는 이전 지휘관인 스키피오 형제들의 병력보다 규모가 작았으며 사기도 떨어졌고 병력 구성도 신병이 많았다. 게다가 이때 이탈리아 내에서의 전황도 대단히 심각한 상태여서 이탈리아 남부 전체가 한니발에게 넘어갔으며 이탈리아 북부 역시 갈리아족의 반란으로 장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거기에 로마의 아래에 위치해 있었던 카푸아 역시 한니발에게 넘어간 상태인데다가 스페인에서의 로마 세력의 소멸로 인해 곧 스페인 식민지와 카르타고 본국의 원조가 한니발에게 도달할 것이 임박한 상황이었다. 스페인 원정군은 과거 스키피오 형제가 했던 것처럼 스페인을 공격함으로써 스페인과 카르타고 본국의 지원을 그 지역에 묶는 임무였고 때문에 매우 중대한, 그리고 아주 위험한 임무였다. 거기에 스페인 현지의 자세한 실상을 원로원 의원들이 잘 모르고 있던 점도 불안감과 거부감을 가중시켰다. 이 때문에 로마의 귀족들도 이런 임무를 맡는 것을 꺼린 것인데 이를 스키피오가 자원하고 나선 것이었다.
- ↑ 사실 이런 상황이 당대 로마에 매우 이례적인 것은 아니었다. 당시 로마에서는 실력있는 지휘관이 필요한 상태였고 따라서 종종 의외의 인물이 지휘권을 받기도 하였다. 예를들면 고작 백인대장에 불과했던 마르쿠스 센테니우스 페눌라는 로마가 속한 주인 라티움의 바로 밑에 위치한 캄파니아 주의 지역을 잘 안다는 이유를 들어 로마 원로원에게 군단 지휘권을 요구하였고 로마 원로원은 이를 승인한 바 있었다. 단 그는 4개 군단, 1만 6천 병력을 이끌고 행군하다 근처에 있었던 한니발의 본대의 정찰에 의해 동향이 파악되었고 한니발은 자신이 직접 이끄는 군대를 행군로에 매복시킨 뒤 실라루스 지역에서 적을 전멸시켰다. http://en.wikipedia.org/wiki/Battle_of_the_Silarus
- ↑ 로마측 사료에 따르면 그의 군사적 재능은 카르타고에서 한니발 다음이라고 하였다. 사실 막강한 로마군을 상대로 10년 가까이 스페인을 방어해냈던 점을 본다면 장수로써 재능이 없는 편은 아니었다. 물론 그의 형인 한니발과 비교하면 한참 떨어지지만 이건 한니발이 워낙 천재적인 지휘관이라 그렇다.
- ↑ 하스드루발이 이탈리아로 데리고 간 병력의 규모와 이탈리아 내에서 그동안 로마가 감수한 피해를 고려하면 이러한 비판이 나오는 것도 사실 당연하다. 당시 로마의 지구전법으로 한니발을 상당히 약화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한니발은 남부 이탈리아를 자기 발 아래에 두고 있었으며 로마는 이들을 완전히 몰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이탈리아 안에 있는 동맹시들의 인적, 물적 자원도 점차 고갈되고 있는 상태였고, 사기 측면에서도 로마 시민들은 또다른 하밀카르의 아들이 알프스를 넘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공포에 떨었다. 이 상황에서 한니발이 한 번이라도 성공적으로 대규모 지원을 받게될 경우, 그동안 로마가 수년에 걸쳐 엄청난 피해를 감수하면서 시행한 지연전술의 성과가 완전히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이탈리아 전장의 상황이 단번에 뒤집힐 수도 있었다. 괜히 현대 전사가들이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전환점이 된 전투로 하스드루발의 카르타고 지원군을 전멸시켰던 메타우루스 전투를 드는 것이 아니다. 다만 스키피오 입장에서는 키르타고군의 후방 기습을 우려해서 그랬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인식과 다르게 그때까지 스페인의 카르타고 세력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 물론 스키피오가 정치적으로 실수하기는 했다. 일례로, 정적들이 그를 고발하자 "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고발하는 자의 기소 이유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로마 시민에게 어울리는 행위라고 생각되지 않소. 이 스키피오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지금 스키피오를 고발하는 자들도 고발할 자유는커녕 육신조차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오."라고 대답했는데 이는 스키피오 찬양자 리델 하트조차 '인간적이었으나 정치가로서는 실책'이라고 평가했다.
- ↑ 다만 이때 스키피오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으니 여러모로 참작할 여지는 있다. 안티오코스 3세와 싸울 때조차 아파서 제대로 지휘에 나서지 못했는데, 이 시기쯤 되면 스키피오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유가 어쨌든 로마를 위해서 노력한 인물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므로 스키피오의 마음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 ↑ 이 전술이 바로 망치와 모루 전술로, 이것 자체는 오래 전부터 있었지만 그 완성자가 바로 한니발이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 ↑ 영어로는 father of strategy. 이 말은 Ayrault Dodge, Theodore라는 미국의 전쟁사 전문가의 저서인 Hannibal: A History of the Art of War Among the Carthaginians and Romans Down to the Battle of Pydna, 168 BC. With a Detailed Account of the Second Punic War에 나온다.
- ↑ 심지어 한니발을 알면서 스키피오를 모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