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로타어 헤르베르트 마테우스[1] (Lothar Herbert Matthäus) |
생년월일 | 1961년 3월 21일 |
국적 | 독일 |
출신지 | 에를랑겐 |
신체 조건 | 174cm |
포지션 | MF/SW |
소속팀 |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1979 - 1984) FC 바이에른 뮌헨 (1984 - 1988)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1988 - 1992) FC 바이에른 뮌헨 (1992 - 2000) 메트로스타즈 (2000)[2] |
지도자 | SK 라피트 빈 (2001 - 2002) FK 파르티잔 (2002 - 2003)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 (2003 - 2005) 아틀레치쿠 파라나엔시 (2006) 레드불 잘츠부르크 (2006 - 2007) 마카비 네타나 FC (2008 - 2009) 불가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2010 - 2011) |
국가대표 | 150경기 23골 |
1991 FIFA 올해의 선수상 | ||
수상 로타어 마테우스 | 2위 장 피에르 파팽 | 3위 게리 리네커 |
1990 Ballond'or | ||
수상 로타어 마테우스 | 2위 살바토레 스킬라치 | 3위 안드레아스 브레메 |
1991 Ballond'or | ||
수상 장 피에르 파팽 | 2위(공동) 다르코 판체프 데얀 사비체비치 로타어 마테우스 | 3위 수상자 없음 |
1990 FIFA 월드컵 | ||
골든 볼 살바토레 스킬라치 | 실버 볼 로타어 마테우스 | 브론즈 볼 디에고 마라도나 |
FC 바이에른 뮌헨 역대 주장 | |||||||||||
라이몬트 아우만 (1991 ~ 1994) | → | 로타어 마테우스 (1994 ~ 1997) | → | 토마스 헬머 (1997 ~ 1999) |
철인[3]
역대 최고의 박스 투 박스 형 미드필더[4]
스위퍼부터 중앙 수비수, 수비형 미드필더, 공격형 미드필더까지 모두 월드 클래스의 플레이를 선보였던 선수
월드컵 통산 최다 출전 기록 보유자[5]
1 소개
독일의 전 축구 선수이자 축구 감독.
선수 시절 포지션은 스위퍼와 미드필더. 하지만 스위퍼와 미드필더로 국한하기엔 너무 많은 포지션에서 뛰었다. 정확히 표현하면 스위퍼, 중앙 수비수, 수비형 미드필더, 박스투박스, 윙어, 공격형 미드필더로 모두 뛰었고 94년 월드컵 이전 모든 월드컵에서 포지션이 달랐다. 유연하고 유능한 선수로, 마테우스는 넓은 시야에 패싱 능력, 포지션적 역할, 태클 타이밍, 그리고 폭발적인 슈팅을 지녔다. 2000년대 축구 팬들에게 미하엘 발락이 있다면 그 이전에는 마테우스가 있었다. 현역 시절, 그는 주로 박스-투-박스 미드필더로 활약하다가 말년에는 스위퍼로 활약하였다.
2 선수 시절
2.1 클럽
강력한 포스를 보여주던 인터 밀란 시절
1979년 분데스리가의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에서 프로 선수로 데뷔했다. 데뷔 시즌부터 주전을 차지했으며 해당 시즌 결승 1차전에서 결승골을 득점하는 등 팀의 UEFA 컵 준우승을 견인한다.[6][7] 82-83 시즌엔 키커 평점 미드필더 부문 1위를 차지하며 분데스리가 대표 선수로 자리매김한 마테우스는 84-85 시즌, 거대 클럽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한다.
이 시기의 바이에른은 근 3시즌간 리그 타이틀 획득에 실패하고 4위권을 맴돌고 있었는데 여기에 주축이었던 브라이트니게의 해산[8] 이후 전체적인 팀의 재정비를 꾀할 필요가 있었다. 이는 멤버 구성에서도 확연히 드러나는데, 전성기였던 70년대의 화려했던 면면들과 달리, 리베로형 수비수인 클라우스 아우겐탈러와 벨기에의 전설적인 골키퍼 파프, 아약스에서 활약하다가 이적해온 덴마크 출신의 쇠렌 레르비 정도를 제외하면 국가 대항전에 소집되지도 못하거나, 소집되어 봐야 시니어 B팀에서 뛸 뿐, A매치 경력은 기껏해야 2, 3경기면 많이 뛴 이들이 대다수였다.[9] 마테우스는 이들을 이끌고 4시즌간 분데스리가 3연패를 차지하는데, 그 마지막이었던 86-87 시즌엔 유러피언 컵 결승까지 진출하나 파울로 푸트레가 이끌던 FC 포르투에게 밀려 아쉽게 준우승에 그친다.
이후 바이에른에서 동료였던 안드레아스 브레메와 함께 인터 밀란으로 이적하는데, 여기서 끝판왕급 하드캐리를 보여준다. 이는 팀 성적에서 바로 알 수 있다. 마테우스가 이적하기 전 87-88 시즌 인터 밀란인 11승 10무 9패로 5위, 현재 기준인 38 라운드, 승리 승점 3점에 맞춰 환산시 54.4점에 불과한 승점밖에 얻지 못했으며, 팀내 최다 득점원이던 알레산드로 알토벨리는 9골, 그 다음인 알도 세레나는 고작 6골에 그쳤다.[10] 물론 당시 인터 밀란에는 1980년대 세계 최고의 명장인 지오반니 트라파토니 감독이 있었지만 최고라 하기엔 다소 처지는 선수들을 이끌고 우승까지 이끌어 가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마테우스를 영입한 88-89 시즌, 인터 밀란은 26승 6무 2패로 우승, 당시 기준 58점이고 현재 기준으로 환산할시 93.8점이라는 어마무시한 승점을 얻었다[11]. 이전 시즌 9골로 팀내 득점 1위였던 알토벨리가 유벤투스로 이적한 가운데, 6골을 넣었던 세레나는 무려 22골을 몰아넣으며 득점왕을 차지한다. 이전 시즌과 감독도 그대로고, 선수단도 그대로고, 상대팀도 그대로. 미드필더 마테우스와 사이드백 브레메 둘을 영입하여 이와 같이 어마어마한 차이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 시기부터, 절정의 폼에선 내려온 디에고 마라도나, 87-88 시즌을 불태운 후 부상으로 고생하던 루드 굴리트의 뒤를 이어 3시즌간 세리에 A의 에이스로쏘 활약한다. 비슷한 시기 세리에 A의 지배자로는 마르코 반 바스텐이 있었다.[12]. 1990 발롱도르 수상이 이 시기의 일. 1991년에는 중앙 미드필더로 세리에A에서 16골을 득점하는 한편, UEFA 컵에선 12경기 6골 2어시스트라는 절정의 활약으로 우승을 이끌어 1991 FIFA 올해의 선수상 수상을 차지하기도 했다.[13]
91-92 시즌은 부상으로 유로 1992에도 불참, 다음해에는 4시즌간 활약했던 인터 밀란을 떠나 바이에른 뮌헨으로 복귀한다. 92-93 시즌부터 슬슬 수비형 미드필더와 센터백을 오가던 마테우스는, 그 다음시즌인 93-94 시즌부터 본격적으로 센터백으로 플레이하기 시작한다. 센터백에서도 변함없이 최고의 모습을 보여줬는데 93-94 시즌의 경우 올리버 칸의 뒤를 이어 분데스리가 전체 평점 2위, 94-95 시즌은 부상으로 16경기밖에 플레이를 못했으나 평점 기록은 전체 1위에 해당하는 등 좋은 활약을 이어가며, 특히 98-99 시즌엔 한국 나이로 마흔의 고령에도 분데스리가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는 등 수비수로도 최고 수준임을 입증하였다. 아쉬운 건 98-99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실패인데, 당시 바이에른은 결승전까지 진출해서 맨유를 상대로 전반 6분만에 선취 득점을 하여 정규 시간 내내 1:0 리드를 유지했으나 후반 추간 시간에 2골을 얻어맞으며 결국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마테우스의 입장에선 후반 80분에 교체된 이후, 자신의 교체 멤버인 토르스텐의 실책으로 인해 역전패를 당한 것이라 더욱 안타까울 것이다.
2.2 국가대표
1990 이탈리아 월드컵의 영웅
마테우스는 데뷔 이듬해인 1980년 처음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네덜란드전에서 데뷔했다. 그해 유로에서 주로 교체 멤버로 활약하면서 서독이 우승을 차지하는데 일조했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 조별예선 칠레전에 교체로 투입되어 처음 월드컵 무대를 밟았다. 이 대회에서도 로테 멤버로 주전과 벤치를 오가며 팀의 준우승에 기여했다.
1984년 베켄바워 감독이 선임되면서 대표팀의 핵심 멤버로 활약하기 시작했고, 1986년 월드컵에서 맹활약했다. 결승전에선 펠릭스 마가트와 함께 마라도나의 마크맨으로 기용되었는데, 하프타임 감독의 지시로 인해 대인방어를 그만두고 올라가기 전까지 철저하게 묶었다. 이러한 지우개로써의 역할은 소속팀에서의 역할과는 다른 것이었는데, 아쉬운 점은 정작 팀의 코어였던 마가트가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감독은 결승전 후반에 가서야 마테우스를 올려 공격의 활로를 찾는 선택을 하고, 실제로 해당 시점 이후부터 서독의 공격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지만 정작 마라도나가 살아나며 너무 늦은 선택이었음을 드러냈다. 과감히 마가트를 대신하여 마테우스를 공격의 중심으로 팀을 개편했으며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는 부분.
자연히 다음 메이저대회인 유로 88부턴 팀의 핵심 에이스로 본격적으로 활약했다. 해당 대회에서 주장으로 팀을 이끌었던 마테우스는 중앙 박스 - 투 - 박스 미드필더로 기용되어 자신의 탁월한 개인 전술을 마음껏 뽐낸다. 4강에서 리누스 미셸이 이끄는 네덜란드를 만났는데 당시 네덜란드는 전성기의 오렌지 삼총사를 비롯한 강력한 스쿼드를 가진 팀이었다. 마테우스의 페널티킥 선취골에도 불구, 로날드 쿠만의 페널티킥 동점골에 이어 마르코 반 바스텐에게 경기 막판 역전골을 허용함으로써 결승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오렌지 군단으로 도배된 대회 베스트 11에 선정된 것으로 그 활약을 가늠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다음 90 월드컵을 마테우스는 자신의 대회로 삼는다. 대회 직전 시즌 큰 부상을 당해 시즌을 접고 반년 가량 쉬었으나 월드컵 개막 타이밍에 맞추어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되었다. 서독 국가대표팀의 주장으로서 월드컵에 참여한 그는 늑대사령관이라는 별명답게 특유의 킥 테크닉으로 팀의 빌드업을 주도함은 물론 종종 올라가서 상대 수비를 직접 타격하는 드리블 능력과 장기인 대포알 같은 중거리슛을 과시하였다. 특히 유고슬라비아와 조별 경기에서의 득점에서 이런 모습이 잘 드러난다. 마테우스를 중심으로 한 서독 대표팀은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고, 이 대회에서 마테우스는 전문 공격수가 아님에도 네 골을 기록하여 득점 2위를 차지하는 등 전천후 활약을 바탕으로 1990 발롱도르와 월드사커 올해의 선수를 동시에 수상했다.
그러나 부상으로 유로 92에 참석하지 못했고, 이 대회에서 팀을 이끌었던 클린스만에게 서서히 대표팀에서 에이스 자리를 내주기 시작한다.
30대 중반에 이르러 소속팀 바이에른 뮌헨에서 수비형 미드필더에서 리베로(스위퍼)로 포지션을 옮겼는데, 이후 대표팀에서도 리베로 역할을 맏게 된다. 리베로라는 개념이 다소 명확치 않은 개념인데, 마테우스가 90년 월드컵에서 주로 뛰었던 포지션을 수비형 미드필더라 보지만 워낙 자유롭게 움직인지라 포어 리베로라 부르기도 한다. 다만 30대 초중반 이후 바이에른 뮌헨에서는 기본적으로 스위퍼에 바탕을 둔 리베로의 움직임을 보였다. 원래 수비형 미드필더 시절부터 대표팀에서 경기를 조율하며 공수를 가리지 않고 활동했기 때문에 리베로 포지션으로의 이동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는데, 문제는 당시 대표팀에는 전성기에 이른 또다른 천재 리베로 마티아스 잠머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90년대 내내 독일 대표팀에서 마테우스와 잠머의 리베로 포지션 중복 문제가 논란을 일으킨다.
만 33세가 넘은 시점에서 참여했던 94 월드컵은 40도에 육박하는 유래없는 폭염이 경기력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평균연령이 31세가 넘는 독일 대표팀은 무더위 속에서 급격한 체력 저하를 겪으며 똥줄 경기력으로 일관했다. 다만 전성기에 이른 클린스만이 팀을 하드캐리하는 양상을 띄기도 했다. 전 대회에 이어 주장으로 참가한 마테우스는 이 대회부터 리베로(스위퍼)로 포지션을 옮겨서 출전했고, 소속팀에서 리베로로 활약했던 잠머는 대표팀에서 수비형 미드필더로 출전했다. 잠머는 소속팀에서 전성기 시절 마테우스처럼 포어 리베로에 가까운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얼핏 둘의 공존이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마테우스는 무더위 속에서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기대에 못미치는 모습을 보였고 마티아스 잠머와 호흡에 문제를 노출했다. 게다가 졸전을 펼친 한국전에서 물의를 일으킨 에펜베르크가 대회도중 강제 귀국 조치를 당하는 등 독일 대표팀은 외우내환을 겪으며 결국 광탈하고 말았다.
30대 후반으로 들어선 유로 96 시점에선 사실상 국가대표 은퇴에 가까운 상태였다. 마테우스를 대신한 새로운 리베로 마티아스 잠머가 팀을 캐리해 유로 우승컵을 거머쥐면서 이제 대표팀에서 마테우스가 모습을 보일 일은 없을 것으로 보였다.
98월드컵도 불참이 유력했는데 마티아스 잠머의 십자인대 부상으로 인해 대체자로 들어왔다. 이미 37세를 넘긴 노장 중 노장이었다. 당시 독일에서도 논란이 많았으나, 그럼에도 딱히 대안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독일 대표팀이 리베로를 둔 포메이션으로 오랫동안 운용되어 왔기 때문에 대회를 목전에 두고 갑자기 포백 등 새로운 포메이션으로 변경하는 것이 어려웠다. 역시 8강에서 크로아티아에 참패를 당하며 월드컵을 접었다.
유로 2000에서는 39살이라는, 결코 적지 않은 나이로 참가했다. 그러나 독일은 1승도 못거두고 심지어는 라이벌 잉글랜드에 30년만에 지며 1무 2패로 쓸쓸히 탈락했다.
39세까지 국가대표로 뛴 마테우스의 커리아 후반기 그를 둘러싼 두 가지 루머가 있었는데, 엇갈리는 이 두 루머 중의 하나는 "아직도 저 늙은이 꼰대가 국대냐?"라며 불만을 품었다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반대로 당시 에리히 리벡 감독에 대해 불만을 품은 후배 선수들이 마테우스를 찾아가 "차라리 당신이 감독을 해달라"라고 요청했다는 것이었다. 마테우스의 성격을 보면 이 루머가 신빙성이 없다고 할수가 없다(...) 어느 것이 사실이든 당시 독일 팀분위기가 최악이었다는 것은 사실인듯 하다.
거기다 마테우스가 국가대표 리베로 자리를 지키고 싶어했기에 독일 대표팀은 당시 대세인 포백으로의 전환이 상당히 늦었다. 이것이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 독일 암흑기의 원인 중의 하나라고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당시 에리히 리베크 감독과 그 전부터 감독 자리 문제와 선수단 지휘 방식을 놓고 갈등이 있었던 수석코치 울리 슈틸리케는 마테우스의 스위퍼 기용과 쓰리백에 반대하며 격한 갈등을 빚다가 물러나는 일까지 빚어졌다. 결국 옌스 노보트니가 등장하며 스위퍼 위치를 다른 중앙 수비수들 쪽으로 올려가며 루디 푈러 감독 부임 후에야 포백이 정착되었다.
사실 독일 대표팀이 리베로를 중심으로 한 포메이션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 것은 마테우스 개인의 고집 때문만은 아니었는데, 독일 대표팀이 유독 리베로 포메이션으로 재미를 많이 봤고 큰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도 했기 때문이다. 독일 대표팀에선 베켄바워, 마테우스, 잠머와 같은 뛰어난 실력과 팀원들을 통솔할 만한 카리스마를 지닌 리베로들이 연이어 등장했다. 카리스마 있는 리베로가 부재하던 시기 독일은 결승, 4강 등에서 번번히 고배를 마신 경우가 많았다. 조직력과 팀정신(Team Geist)를 무엇보다도 중시하는 독일 대표팀에서 선수들을 하나로 묶고 경기를 조율하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담당하는 리베로의 존재는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정리하자면 당시 서독대표팀의 에이스로서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우승, 주축으로서 1986 멕시코 월드컵 준우승, 로테or벤치로 유로 1980 우승 및 1982 스페인 월드컵 준우승이라는 엄청난 커리어를 쌓았다.
3 마테우스에 대한 말말말
그가 최고의 폼을 유지할 때면, 뭐 그는 늘 그랬지만, 그보다 나은 선수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프란츠 베켄바워
난 미셸 플라티니를 동경한다. 디에고 마라도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승리하려면 내겐 로타어 마테우스가 필요하다.
그 동안 같이 뛰어본 선수 중 제일 두렵고 강한 라이벌이었다. 이것으로 그에 대한 설명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디에고 마라도나가 본인의 자서전에서
(경기에 출전한 로타어 마테우스를 가리키면서) 로타어 마테우스가 디에고 마라도나의 오랜 라이벌이자 어쩌면 디에고 마라도나 이후의 인물이 될 수 있는 후보일 것이다. 둘은 인연이 깊다. 한 명은 이탈리아 남부에서 활약했고 다른 한 명은 북부에서 활약했다. 한 명은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86 월드컵을 가져갔고, 다른 한 명은 서독 출신으로 90 월드컵을 가져갔다.- 디에고 마라도나의 은퇴 경기를 해설하던 중계진
나의 완벽한 우상은 로타어 마테우스다. 그는 스스로 골을 넣는 동시에 나머지 모두에게 영감을 주는 No.10이다. 나에게 있어 그보다 나은 선수란 없었다. 비아레조(Viareggio)에서 처음 만나 그의 사인을 받았던 날은 아주 오랫동안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최고의 날이었다.- 안드레아 피를로
4 플레이스타일
많은 이들이 그리워하는 마테우스 특유의 셀레브레이션
마테우스의 장기를 이야기하며 수비력이나 멀티 포지셔닝을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부분도 대단하긴 했지만 막상 마테우스의 경기를 구해볼 경우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미들 라인부터 시작하는 저돌적인 드리블과 어디서든 포워드 라인으로 빵빵 때려주는 킥 테크닉이다. 경기 내 볼 전진 능력은 당대 다른 포워드나 사이드 선수들과 비교해봐도 이례적일 정도. 온더볼도 상당하고 팀 템포를 이끄는 능력까지 타고났기에 하프라인에서 자연스러운 빌드업 리딩을 이끌기도 했다. 이걸 밑에서 받치는 건 역시 탁월한 운동량이고, 이 운동량을 바탕으로 한 수비 능력도 역시 마테우스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장점.
이 모든 게 맞물린 마테우스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이처럼 두루두루 미드필더에게 갖추어야할 능력들을 상당한 레벨로 갖추고 있었기에 굉장히 자유로운 플레이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볼의 흐름을 읽어내는 포지셔닝을 갖춘 미들 플레이어는 일정 이상의 패스 능력과 온더볼 능력이 된다면 팀의 호흡을 조절하는 빌드업 리더가 될 수 있다. 이 킥 테크닉이 상대 문전을 위협할 수 있을만한 수준이라면 후방의 찬스메이커가 될 수 있고. 다시 해당 선수가 상대 수비 라인을 직접적으로 부수고 들어갈 수 있는 신체 능력과 드리블링까지 갖추었다면 말 그대로 전후방을 포괄하는 만능 플레이메이커가 되는 것이다. 어느 위치에서 볼을 잡건 상대를 다양한 방식으로 괴롭힐 수 있는 전술적 유틸리티가 되고, 어느 위치에서 볼을 잡건 우군의 공격을 이끌어나갈 키플레이어가 된다. 그리고 바로 마테우스가 그런 선수였고. 그야말로 전천후 박스 - 투 - 박스. 최후방에서 수비나 싶더니 어느새 쉐도우 스트라이커처럼 오르내렸다는 건 결코 과장이 아니다.
90년 월드컵은 이러한 그의 박스투 박스 미드필더의 모든 것을 보여준 화룡점정의 대회라고 할수 있다. 물론 90년 월드컵이 골가뭄으로 인해, 다이나믹한 공격축구기조라기보다는 미드필드에서 압박을 모토로 하는 "압박축구"라는 트렌드가 유수의 언론에서 대두될 정도로 다소 지루하기도 한 대회였긴 했지만, 서독의 경기력만은 예외였다. 상대를 틀어쥐면서도 공격에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 당 대회에서 가장 많은 골을 뽑아냈을뿐 아니라, 4강전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 치고받는 난타전을 펼친 걸 제외하면 거의 모든경기에서 상대를 압도하여 우승팀이라는 결과에 걸맞는 경기력을 뽐낸 대회이기도 하다. 따라서 특정 수정자가 마테우스 커리어의 정점인 90년 월드컵이 이른바 '망한 대회'며, 그를 검색할때 제일 처음보게되는 대회가 이대회라서 안타깝다는 말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 된다. 왜냐하면 서독의 90년 월드컵은 대회자체의 기조와는 별개로 경기력과 결과가 뒷받침되는 보는 재미가 충분한 팀이었으며 경기력, 골로도 답답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또한 이에 마테우스의 플레이가 기여한 바가 매우 크므로, 오히려 마테우스가 돋보이면 돋보였지 안타까울 일은 전혀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 대회에서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로 최고의 활약을 하여 피파 올해의 선수 초대수상자가 되었고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이전 수정자가 "포백 앞에서 빌드업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며, 그 이외의 다른선수가 포백앞에 위치 하지 않으므로" 딥라잉 플레이메이커라 지칭을 주장하나, 박스투 박스 미드필더라는 것은 반드시 포백앞 다른 홀딩미들을 한명 박아놓은 상태에서 유유히 전방으로 마실나가는 선수를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다. 본인 이외에 포백 바로 앞 다른 미드필더가 없더라도, 그리고 포백앞의 그 혼자인선수가 빌드업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더라도, 후방에서 볼 리딩및 빌드업도 하고 전투적으로 태클및 볼탈취도 하며 필요시 전방으로 튀어나가 저돌적 드리블로 상대를 타격하는 모습을 한 대회에서 다 보여줬다면 그것이 바로 박스투 박스 미드필더의 교과서와도 같은 모습이다. 기억해야 한다. 90년 서독팀의 최다 득점자는 클린스만도 푈러도 아닌 4골의 마테우스이며 유고슬라비아전 원더골, 잉글랜드전에서의 터치라인부터 40미터 이상의 드리블 장면은 이를 입증하는 상징과도 같다.
단순히 경기를 시작할때 포백앞에서는 미드플더가 그 하나라는 이유로 이러한 퍼포먼스를 보인 선수를 딥라잉이라 한정하는 것은 용어속에, 포지션속에 그를 가둬버리는 일과 다를바가 없다. 그가 미드필더 후방에 있다가 공격지원으로 튀어나가면 그 자리는 후방의 클라우스 아우겐탈러가 메꿨으며 유고슬라비아전에서는 이러한 성향이 더 강했다. 앞서 서술한 유고전의 원더골 이전 전반전에도 그는 아예 전방에서 위치해있다가 볼을 받아 왼발로 대포알 슛을 박아넣는 장면을 연출한다. 이전 수정자가 챔스 맨유전에서 레돈도가 드리블 돌파를 하는 장면을 예로 들며 이런 드리블을 해도 레돈도는 후방 플메였다는 주장을 하는데, 그런장면을 연출햇지만 레돈도는 후방플메로 훨씬 더 많이 플레이 했고 그러한 직접적인 드리블 타격은 사실상 돌발적이고 빈도가 극히 적인 일탈적 플레이였다. 90년의 마테우스는 이와는 전적으로 다르며, 후방플메-볼위닝-전방 드리블 침투를 한대회내내 모두 보여준 괴물같은 장악력을 선보였으며, 90년 월드컵 전후 소속팀에서도 이런 기조는 그대로였다. 박스투 박스가 드리블로 수비수를 직접적으로 타격하는 공격본능만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다. 말그대로 이쪽 페널티박스서 저쪽 페널티박스로 후방플메질도 했다 볼 탈취도 했다 드리블 돌파도 하다 골도 넣기도 하는 그야말로 신출귀몰 활동량을 바탕으로 이곳저곳 필드를 모두 누비는 선수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한경기를 보다보면 메시같은 선수마저도 포백 라인 바로 앞에서 피케와 원투패스하거나 그 위치에서 전방으로 롱패스를 때려넣는 장면이 있다. 하지만 그장면으로 메시를 후방 플메라 하지 않는다. 중요한것은 특정한 한 두 장면이 아니라 어느 기조로 플레이를 유지하느냐이다. 90년 월드컵에서 마테우스는 후방 플메라는 용어로 한정할만큼 특정한 후방 위치에서 볼 리딩만 담당하던 선수가 절대로 아니었으며 따라서 해당대회에서의 마테우스를 본직이 아닌 후방 플메로 뛰어 아쉽다거나, 그의 커리어 하이인 90년 대회가 망한대회라 그를 이 대회로 판단하기가 아쉽다는 말은 그야말로 본말이 전도된 궤변이라고 밖에 아니할 수 없다. 1990년 월드컵은 마테우스의 커리어 하이임에도 분명하지만, 대회자체의 지루한 압박,수비축구의 트렌드와는 별개로 그가 주장으로 팀을 이끌던 서독만큼은 화끈한 경기력으로 결과와 인기 모두를 잡은 대회였으며, 볼리딩-볼탈취-저돌적 드리블 타격-골(대회 4골로 팀 최다이자 모든 팀을 통틀어 그보다 많은 스코어러는 스킬라치(6골)-스쿠라비(5골) 단 둘뿐이다.) 이 모든것을 다 보여준 대회로, 커리어 전체로 놓고보면 꽤나 다양한 포지션에서 활약한 그를 명실상부 역대 최고의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로 자리매김하게 한 지표같은 대회이기도 하다.
이 대회를 기점으로 그는 점점 후방으로 내려가 94년 월드컵에선 리베로, 그 이후 바이에른 뮌헨에서는 대놓고 최후방 스위퍼로 활약하기도 하나, 마테우스는 90년에 커리어의 정점을 찍은 박스투박스의 교과서라 칭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5 감독 시절
선수 시절에 비해 감독경력으로는 그다지 신통치 못하다. 오스트리아 클럽인 라피트 빈 감독으로 데뷔하고 ,그 후에 유고슬라비아 클럽 FK 파르티잔 감독을 역임했다. 파르티잔 감독 시절에는 부천 SK와의 전지훈련 대회 도중에 트나즈 트르판 감독에게 시비를 걸고 욕설을 퍼부어서 빈축을 샀다. 그 후 2003년에서 2005년에 헝가리 국가대표팀을 맡았으나 별 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고 별 다른 성과를 못낸 정도가 아니라 '마지막 나치의 스파이'라고 헝가리 언론에서 까였다., 그 이후 브라질리그 클럽인 아틀레치구 파라나엔시에서 한시즌 동안 감독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2006년 조반니 트라파토니의 부름을 받아 오스타리아 클럽인 잘츠부르크 감독을 지휘하며, 커리어 최초 리그 우승을 차지 했으나 트라파토니와의 불화로 한 시즌 만에 해고 된다. 그 후엔 이스라엘 리그 클럽인 마카비 네타냐 감독을 맡기도 했으며 2010 - 2011년에는 불가리아 대표팀 감독을 맡은 후 감독직을 이어나가기 보다는 TV해설과 신문 칼럼을 작성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라이벌인 클린스만이 독일 대표팀 감독으로 2006년 독일 월드컵 3위, 미국 대표팀 감독으로 2014년 브라질 월드컵 16강 진출 등 나름대로 괜찮은 커리어를 쌓은 반면 마테우스는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이스라엘, 브라질리그와 헝가리, 불가리아 국가대표팀 등 축구 변방국들 중심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지만[14] 이렇다할 성과는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6 기타
사생활로도 추문이 많은데 4번씩이나 결혼을 했다. 그 중 하나는 무려 26살 차이로 어린 우크라이나 출신 모델도 있었다. 그러나 네 번째 결혼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이혼했으며, 2014년 11월 다섯 번째 결혼을 했다. 기사.
대표팀 동료이자 FC 바이에른 뮌헨 시절에 잠깐 함께 했던 위르겐 클린스만과는 앙숙이었다고 한다. 사실 클린스만이 모범적인 행동을 보인 것에 비하면 마테우스는 그야말로 개막장이니 서로의 성격이 맞을 리가 없다.
리자라쥐와의 난투극이 찍히기도 했다. 영상 중후반부부터 나온다.
스타 선수들이 많이 배출되고 많이 영입되는 FC 바이에른 뮌헨에서 여태껏 레전드로 인정하는 "Hall of Fame"에 들어갔던 선수는 프란츠 베켄바워, 제프 마이어, 게르트 뮐러, 칼 하인츠 루메니게, 울리 회네스, 그리고 6번째로 등록된 선수가 마테우스였다.
선수 생활의 대부분을 바이에른에서 보냈으며, 12년동안 리그 우승도 7번이나 한 전설적인 선수지만 현재는 서로 원수 지간이다(...) 이유는 바이에른을 떠난 후 특유의 노가리(...)로 바이에른을 엄청 깠기 때문이다[15]. 결국 참다 참다 못한 단장 울리 회네스는 "마테우스같은놈은 바이에른으로 와 봤자 관리직도 제대로 못가질 것" 이라고 맞디스를 외쳤으며, 마테우스도 이에 질세라, 위에 나온 레전드 명함이 박탈되었다는 이유로[16] 소송을 먹일려하였다. 다행히 바이에른 뮌헨 회장인 칼 하인츠 루메니게가 끼어들어서 말리는덕에 서로 화해하고 끝나나 싶었지만....
마테우스는 다시 회네스는 프란츠 베켄바워의 그림자 속에 사는 인물 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이 분쟁을 중재한 루메니게는 가식떤 것일 뿐이라고 디스했다(...) 마테우스와 원수 중의 원수인 위르겐 클린스만을 감독으로 데려온 것도 마테우스를 깔려고 대려온거라는 말이 있다(...) 위의 관리직도 못할거라는 말을 보면 꽤나 그럴싸한데
할머니가 유태인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 프리미어리그로 가서 08~09 마카비 네타냐 감독을 맡기도 했다. 성적은 뭐 그냥 그랬다. 2010년 4월 말 내한을 했는데, 수원 삼성 블루윙즈 감독 협상을 위한 것이 아니냐는 떡밥이 돌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당시 수원의 차범근 감독은 성적 부진으로 입지가 불안했었다. 결과적으로 사퇴하긴 했지만. 그리고 마테우스는 카메룬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들어가 버렸다.
월드컵 역사에 기록을 세웠는데 5회 연속(1982,1986,1990,1994,1998)으로 월드컵에 출전해서 무려 25경기나 뛰었다.[17] 월드컵 5회 출전은 멕시코의 안토니오 카르바할, 이탈리아의 지안루이지 부폰과 더불어 공동 최다 출전 기록이며 필드플레이어로는 유일한 기록이다. 또한 25경기 출전은 최다 경기 출장 기록으로 이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파올로 말디니가 2002 월드컵 때 이 기록을 깰것으로 유력해보였으나 동방의 어느 나라에게 16강에서 패하며 23경기에 그쳤다.[18]
여담이지만 김성모 화백의 만화 마계대전에 나오는 마테우스는 이 마테우스에게서 이름을 따온 걸로 추정되고 있다. 이름을 지을 적에 마계의 제왕답게 마자를 들어가면서도 간지나고 강해 보이는 서양 이름을 찾다가 이 마테우스의 이미지에서 차용해 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오오 김화백 오오...
아놀드 슈왈제네거랑 닮았다는 의견이 많다.
7 경력
7.1 리그 기록
시즌 | 클럽 | 소속리그 | 리그 | FA컵 | 대륙대회 |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
1979/80 |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 독일 분데스리가 | 28 | 4 | 2 | 0 | 11 | 2 |
1980/81 |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 독일 분데스리가 | 33 | 10 | 5 | 2 | - | - |
1981/82 |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 독일 분데스리가 | 33 | 3 | 5 | 4 | 4 | 1 |
1982/83 |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 독일 분데스리가 | 34 | 8 | 5 | 2 | - | - |
1983/84 |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 독일 분데스리가 | 34 | 11 | 6 | 4 | - | - |
1984/85 | FC 바이에른 뮌헨 | 독일 분데스리가 | 33 | 16 | 6 | 0 | 5 | 1 |
1985/86 | FC 바이에른 뮌헨 | 독일 분데스리가 | 23 | 10 | 5 | 2 | 3 | 0 |
1986/87 | FC 바이에른 뮌헨 | 독일 분데스리가 | 31 | 14 | 3 | 1 | 7 | 4 |
1987/88 | FC 바이에른 뮌헨 | 독일 분데스리가 | 26 | 17 | 4 | 3 | 4 | 1 |
1988/89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 이탈리아 세리에 A | 32 | 9 | 7 | 3 | 5 | 0 |
1989/90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 이탈리아 세리에 A | 25 | 11 | 2 | 2 | 2 | 0 |
1990/91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 이탈리아 세리에 A | 31 | 16 | 3 | 1 | 12 | 6 |
1991/92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 이탈리아 세리에 A | 27 | 4 | 5 | 1 | 2 | 0 |
1992/93 | FC 바이에른 뮌헨 | 독일 분데스리가 | 28 | 8 | 0 | 0 | - | - |
1993/94 | FC 바이에른 뮌헨 | 독일 분데스리가 | 33 | 8 | 3 | 1 | 4 | 1 |
1994/95 | FC 바이에른 뮌헨 | 독일 분데스리가 | 16 | 5 | 2 | 0 | 6 | 0 |
1995/96 | FC 바이에른 뮌헨 | 독일 분데스리가 | 19 | 1 | 0 | 0 | 7 | 0 |
1996/97 | FC 바이에른 뮌헨 | 독일 분데스리가 | 28 | 1 | 3 | 0 | 2 | 0 |
1997/98 | FC 바이에른 뮌헨 | 독일 분데스리가 | 25 | 3 | 3 | 0 | 5 | 0 |
1998/99 | FC 바이에른 뮌헨 | 독일 분데스리가 | 25 | 1 | 5 | 0 | 12 | 1 |
1999/00 | FC 바이에른 뮌헨 | 독일 분데스리가 | 15 | 1 | 2 | 0 | 9 | 0 |
2000 | 메트로스타즈 | 미국 메이저리그 사커 | 16 | 0 | 5 | 0 | - | - |
7.2 우승 경력
- FC 바이에른 뮌헨 (1984/85 - 1987/88, 1992/93 - 1999/00)
- 분데스리가 (7) : 1984/85, 1985/86, 1986/87, 1993/94, 1996/97, 1998/99, 1999/2000
- DFB 포칼 (2) : 1985/86, 1997/98
- DFB-리가 포칼 (4) : 1997, 1998, 1999, 2000
- DFL-슈퍼컵 (1) : 1987
- UEFA컵 (1) : 1995/96
- UEFA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 (2) : 1986/87, 1998/99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1988/89 - 1991/92)
- 세리에 A (1) : 1988/89
-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1) : 1989
- UEFA컵 (1) : 1990/91
- 메트로스타즈 (2000)
- MLS 서부 디비전 우승 (1) : 2000
- 독일 국가대표팀 (1980 - 2000)
-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 : 준우승
-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 준우승
-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 우승
- 유로 1980 : 우승
- ↑ 독일어의 eu나 äu는 'ㅗ+ㅣ'로 발음하는 것이 원칙이다. Deutshland가 "도이칠란트"로 발음되는 것이 그 예. 하지만 일부 예외가 있는데 주로 라틴어 등 외부에서 유입된 고대어 계열의 단어들이 그렇다. 박물관을 뜻하는 das Museum도 "무조임"이 아닌 "무제움"으로 발음하고 Wolfgang Amadeus Mozart를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로 발음하는 것도 그예라 할 수 있다. 성경의 인물에서 유래된 이름인 마테우스(Matthäus)를 "마토이스"가 아닌 "마테우스"로 발음하는것도 이런 경우에 속한다.
- ↑ 현 뉴욕 레드 불스
- ↑ 사실 이 별명은 우리나라에선 어느 축구 게임에 의해 유명해졌다.
- ↑ 보통 브라질의 디디, 네덜란드의 프랑크 레이카르트, 스페인의 사비 에르난데스 등과 함께 역대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 중 한 명으로 언급된다.
- ↑ 하지만 최다 출전 시간으로는 파올로 말디니에게 크게 밀린다. 이런 이유는 말디니가 출전한 경기들이 전부 풀타임이었기 때문.
- ↑ 차범근과 맞대결을 펼쳤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해당 경기 마테우스가 라이트 윙으로 출장했기에 경합 보직이 아니었다. 선수 생활 말년 마테우스가 수비수로 활약했던 사실을 취합해 잘못 알려진 사실.
- ↑ 어쨋든 그 경기에서 맞붙기도 하고, 리그에서도 몇번 봐서 그런지 차범근과는 사이가 돈독하다.
- ↑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까지 뮌헨의 두 축이었던 파울 브라이트너와 칼 하인츠 루메니게 콤비를 일컫는 표현이다. 브라이트너는 83년에 은퇴, 이후 루메니게는 83-84 시즌 이후 인터 밀란으로 이적하며 자연스레 해산된 것.
- ↑ 물론 이후 안드레아스 브레메도 영입되어 마지막 두시즌간 함께 활약하긴 한다.
- ↑ 물론 알레산드로 알토벨리의 경우 선수 말년이던 해당 시기 활약이 돋보이지 않았을 뿐, 해당 시기 아주리와 인터 밀란을 이야기할 때 유의미하게 언급해야할 선수 중 하나긴 하다. 문제는 이 알토벨리도 87-88 시즌을 마지막으로 이적.
- ↑ 18팀 체제 아래서 세리에 역대 최다 승점 기록이며, 06-07 시즌 로베르토 만치니의 인터 밀란이 갈아치우기 전까지 역대 최다 승률 기록이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안토니오 콘테의 유벤투스가 다시 한 번 갈아치운 상태이지만...
- ↑ 마테우스와 반 바스텐 이후 이 자리는 로베르토 바죠에게 이어진다. 도식화할 경우, 플라티니-마라도나-굴리트-마테우스&반 바스텐-바죠로 이어지는 식. 물론 로베르토 만치니처럼 플라티니 시대부터 바죠 시대까지 꾸준히 지배자의 컨텐더로서 좋은 활약이어간 선수도 있다.
- ↑ 참고로 FIFA 올해의 선수상의 경우 마테우스가 초대 수상자다.
- ↑ 한때 K리그 수원삼성 감독 임명설도 있었다.
- ↑ FC 바이에른 뮌헨의 반대파들은 물론 라이벌인 도르트문트, 함부르크 SV, 샬케 04같이 라이벌 팀의 레전드들도 있지만, 마테우스, 클린스만, 프링스, 오토 레하겔과 같이 바이에른 뮌헨에 몸담은 인물들도 꽤 있다. 사실 바이에른 뮌헨은 라이벌 팀 인물이라도 어떻게든 빼내 오지만, 대부분은 정리할때 냉정하게 정리해버린다. 헤어질 때 굉장히 섭섭하게 대접했기에 더욱 더 반대파가 되는 것이다.
- ↑ 그래서 풋볼 매니저등 축구게임에서 보면 바이에른의 레전드 목록에는 마테우스가 없다. 그래도 베스트 11등에는 마테우스가 들어간다.
- ↑ 1982, 1986 월드컵은 수비형 미드필더와 수비수로 1990년 월드컵은 공격형 미드필더로 1994, 1998 월드컵은 스위퍼로 뛰었다 흠좀무
- ↑ 하지만 경기에 뛴 시간을 따지면 말디니가 더 많다. 그것도 교체된 적이 없이 풀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