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 행정원 원장 | |||||||
12대 | → | 13대 | → | 14대 | |||
리환 | → | 하오보춘 | → | 롄잔 |
郝柏村(학백촌) / Hau Pei-t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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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시절 장제스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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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모총장 재임 시절의 공식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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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행정원장 재직 시절. 리덩후이(왼쪽)와 함께 세상에서 제일 어색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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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의 모습. 90대를 넘겼는데도 꽤나 정정하시다)
1 개요
중화민국(대만)의 군인이자 정치인. 1981년부터 8년 동안 중화민국군 참모총장을 역임했고, 이후 국방부장과 행정원장, 그리고 집권 국민당의 부주석 등을 차례로 지내면서 대만 군부와 정계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거물이자 중화민국 군사, 정치사의 산 증인이다. 한국으로 치자면 백선엽 장군과 비슷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
2 상세
2.1 직업군인의 길
1935년 중국 국민당이 설립한 중앙육군군관학교(中央陸軍軍官學校)[2]에 12기생으로 입학했고, 중일전쟁 발발 2년째였던 1939년부터 종군하기 시작했다. 국공내전 패배로 중화민국 정부가 대만으로 후퇴하자 참모총장 판공실의 수행 장교로 복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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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진먼 포격전 당시 제9사단장 시절의 모습)
1958년 8~10월 진먼 포격전에서는 당시 진먼다오에 배치된 중화민국군 육군 제9사단의 사단장으로 참전하여 중국의 대규모 포격으로부터 진먼다오를 방어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당시의 전공을 인정받으면서 장제스의 총통 재임시절 총통부 특위장(1965~1970년. 한국의 청와대 경호실장에 해당), 육군 제1군단장(1970~1973년)을 차례로 역임했고,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가 후임 총통에 오른 후에도 부참모총장(1977~1978년), 육군 총사령관(1978~1981년)을 지낼 정도로 승승장구했다.
2.2 최장기 참모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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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모총장 재임시절. 장징궈 당시 총통과 함께)
1981년 12월에는 중화민국군 참모총장[3]에 임명되어 군인으로서 최정점에 올랐으며, 1989년 12월까지 무려 8년 동안 재임했다. 이는 중화민국군 역대 참모총장들 가운데 단연 최장기 재임 기록이다. 그의 참모총장 재임기는 대만이 1970년대 이후 UN 축출, 미국과의 단교 등으로 인한 외교적 고립이 심화되고 있던 위기 상황이었기 때문에 국방 부문에서의 도전이 가중되던 시절이었다.
이에 하오보춘은 비현실적인 본토수복 전략 대신, '1) 진먼다오 등 도서 지역에서의 견제, 2) 대만해협에서의 해상 및 공중 요격, 3) 대만 연안에서의 상륙 저지, 그리고 4) 대만섬 내륙에서의 저항' 등 4단계의 방어 전략을 채택했다. 아울러 전쟁 초기에는 중국의 대규모 침공으로부터 대만군 전력의 생존성을 최대한 유지, 확보하는 데 주력하고, 이후 살아남은 각 군 전력을 최대한 동원하여 중국의 침공을 결정적으로 격퇴하는 '전략지구, 전술속결'(戰略持久 戰術速決) 원칙을 강조했다. 이들 개념은 오늘날까지도 대만군의 기본적인 국방 전략지침으로 계승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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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대만의 징궈 전투기 개발, 초도비행 성공 직후, 장징궈의 묘소에 참배하는 하오보춘)
또한 국산 무기 개발을 담당하는 중산과학연구원(中山科學研究院. 한국의 국방과학연구소에 해당)의 원장까지 겸임하여 대만 최초의 자국산 전투기인 징궈, 핵무기 비밀 개발 사업을 진두 지휘했다. 이들 가운데 징궈 전투기 개발은 성공했지만, 핵무기 개발은 1988년에 관련 책임자가 미국에 망명하면서 누설되어 수포로 돌아갔다. 하오보춘은 2000년에 출간된 참모총장 시절 회고록에서 당시의 핵개발에 관한 비화를 공개했는데,[4] 곧바로 대만 정부가 핵개발 의사가 없음을 밝히는 해프닝을 빚기도 했다.
2.3 정계의 실력자에서 몰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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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덩후이 총통과의 모습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있는 듯 불편한 표정)
1988년 장징궈의 사망 이듬해인 1989년 퇴역했다. 이후에도 국방부장(1989~1990년), 행정원장(1990~1993년)을 차례로 역임하며 외견상 정계에서도 실권자의 지위를 차지한 듯 했다. 그러나 이는 장징궈의 후임 총통인 리덩후이가 국민당 내의 권력 기반이 미약했던 과도기적 상황에서, 외성인 중심의 국민당 원로 세력들로부터 지지를 얻으려는 일시적 타협책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서술된 내용에 나오듯이 하오보춘은 전형적인 장제스, 장징궈 부자 총통의 가신(家臣)격 인물이었고, 본성인 출신인 리덩후이에게는 국민당 내의 세력 강화를 위해 언젠가는 몰아내야 할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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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하오보춘의 입각에 반대하는 대만 야권의 시위)
뿐만 아니라 당시 막 출범했던 민주진보당을 비롯한 대만의 야당, 재야 진영도 하오보춘을 장제스, 장징궈 시대 국민당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했던 군부, 그것도 외성인 출신의 대표적인 '구(舊)시대 인물'로 규정하며 강력히 반대, 비판했다. 아울러 민주화 촉진을 계기로 활기를 나타내기 시작한 민진당, 재야의 대만 독립 주장에 대해서도 "대만 독립은 불가능하며, 자멸의 길"(台獨是不可能的,台獨不是自保是自滅), "대만의 장래는 대만 혼자만의 뜻으로 결정될 수 없다"(台灣的前途不由台灣人決定)고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을 나타냈다. 이는 본성인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대만 재야뿐만 아니라, 내심 대만 독립을 지지했던 리덩후이 당시 총통과도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결국 하오보춘은 1990년대 대만에서 민주화 이행이 진전될수록 리덩후이 중심의 국민당 신진 세력, 야권으로부터 동시에 협공당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리덩후이의 국민당 내 권력 기반 강화 추세에 따라 1993년, 1995년에 각각 행정원장과 국민당 부주석에서 물러났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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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총통 선거 당시의 모습)
1996년 대만 최초의 총통 직접선거에서 린양캉(林洋港) 전 행정원장의 러닝메이트로 무소속 출마를 했지만, 약 14%만을 득표하며 낙선했다. 이후 더 이상 현실 정치에 참여하지 않은 채, 군부와 정계의 원로 역할만을 하고 있다.
3 저서
- 郝總長日記中的經國先生晚年(하오보춘의 일기를 통해서 본 장징궈 전 총통의 만년): 1995년 저작.
- 教戰記(하오보춘의 병법서(임의 해석): 1998년에 출간되었으며, 하오보춘이 장성 재임 시절 대만의 군사전략, 전력 발전 등에 관하여 공개석상에서 밝혔던 주장, 발표 등을 담고 있다.
- 八年參謀總長日記(하오보춘의 참모총장 8년 일기): 2000년 저작. 대만군 참모총장 재임 8년 동안의 정치, 군사 관련 사건들을 일기 형식으로 회고한 책이다. 위에 소개된 장징궈 총통 시절을 다룬, 1995년작 저서와 시기 및 내용이 상당부분 겹쳐지지만, 이 책이 보다 많은 분량에 걸쳐 자세히 다루어졌다. 1988년에 폭로된 대만의 비밀 핵개발 계획에 대한 언급도 다수 등장하여 출간 당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 郝柏村解讀蔣公日記一九四五~一九四九(하오보춘이 읽고 평하는 장제스 총통의 일기) : 2011년 저작.
- 郝柏村重返抗日戰場(하오보춘이 회고하는 중일전쟁) : 2015년 저작. 2차대전 종전 70주년을 맞아 발간되었다.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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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내에서는 정통 보수의 대표격 인물로 손꼽힌다. 외성인 출신의 국민당원으로서 중화민국의 역사적, 정치적 정통성에 확고한 입장으로 본성인 진영의 대만 분리독립에 강력히 반대한다. 중국 본토와는 '같은 중화민족으로서 궁극적으로는 통일해야 한다'는 입장이면서도, 중국과의 화해 협력이 유화적으로 변질되는 것 역시 경계한다. 지난 9월 3일 중국이 중일전쟁 70주년 전승절 행사, 열병식을 주최할 때 대만 내 인사들의 참석 반대를 주장했던 것도 같은 맥락.
2012년에는 대만은 마치 중국이 아닌 것처럼 서술한 초중고 교과서를 비판하기도 했다. 마잉주 정권 시절이지만 천수이볜 시절에 뼈대가 잡힌 교육과정에 의해 편찬된 것이라서. '중국은 대만을 포함하지 않았고 우리 나라는 중국 대륙을 포함하지 않았다.'고 지적하였다.
2014년 루거우차오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중국 대륙을 방문했는데 방문 직전 중국 중앙 텔레비전 기자들이 대만에 와서 그를 인터뷰하던 중 그는 항일 전쟁 시기에 유행했던 노래에 대한 이야기 중 의용군 행진곡을 예로 들고 이것을 부를 줄 안다고 하면서 실제로 불러 보였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자 대만에서는 적과 아군을 구분하지 못하는 행위라고 비판을 받았다. 게다가 (그가 활동하던 시기인) 장제스, 장징궈 시대에 그걸 부른 사람은 살아남지 못했을 거라는 비판까지 덧붙여졌다. 아들인 당시 타이베이 시장 하오룽빈은 의용군 행진곡은 항전 시기 국민혁명군의 군가이기도 하다고 해명하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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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기준으로 95세의 고령이지만, 일선에 물러난 후에도 중일전쟁, 국공내전, 요직 재임시절을 다룬 다수의 회고록을 출간하여 여전히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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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에 해군 장교로 복무 중이던 마잉주 현 총통과 만난 적이 있다. 마잉주는 오늘날까지도 하오보춘을 국민당 원로로서 극진히 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