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정치

동아시아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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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의 정치 정보
부패인식지수61점2012년, 세계37위
언론자유지수24.372016년, 세계 51위

언론자유지수는 수치가 높을수록 언론 자유가 없는 국가, 언론자유 최상은 0점, 언론자유 최악은 100점, 2013년 이전 자료는 수치가 넘어가는 것도 존재한다.

1 개요

중화민국정치를 설명하는 항목.

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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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의 투표용지. 기표식 투표용지로 도장을 찍는 건 대한민국과 같지만 후보자 얼굴 사진이 인쇄되어 있다는 게 차이점. 비례대표 선거는 마지막 사진처럼 정당의 로고가 첨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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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지방선거 투표장면.

중화권에서 민주주의가 정착한 유일한 국가이다. 사실상[1] 혹은 대놓고 일당독재국가인 중국이나 기형적인 선거제도로 일당독재를 유지중인 싱가포르[2], 일국양제로 인해 형식적인 민주주의는 보장되나 기형적인 선거제도나 대륙의 개입으로 민주주의가 제약받고 있는 홍콩마카오와는 다르다. 중화민국은 동아시아권에서 대한민국, 일본과 함께 민주주의가 정착한 국가로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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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대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를 앞두고 대선 선거운동 유세에 나선 장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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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중화민국 지방선거 개표방송 장면.



2014년 11월 29일 대만 지방선거 NEXT TV 개표방송. 8시간짜리 풀영상이다.(...)

특징적인 점으로, 대만의 선거 투표시간은 토요일 오전 8시 ~ 오후 4시까지로 짧은데도[3] 투표율이 매우 높다. 기본 70%고 심심하면 90%도 나온다. 밑에서 보면 알겠지만 이는 대만 국민들의 양안관계에 대한 관심도가 높다는 방증이다. 중화민국대한민국처럼 재외국민에 대해 재외선거를 실시하지 않으나 재외국민들의 귀국 투표가 엄청나게 많다. 오로지 선거 투표를 하기 위해 비행기 타고 귀국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과 마찬가지로 지역구도가 형성되어 있는데 대만 섬 북부, 동부, 푸젠 성 지역에서 중국 국민당의 세가 강하고, 대만 섬 남부 지역에서는 민주진보당의 세가 강하며 대만 섬 중부 지역에서 경합을 벌인다. 다만 한국처럼 지역구도가 아주 확고한 것이 아니라서 민진당 소속인 천수이볜만 해도 타이베이 시장직을 역임했고 타이베이 현(현재 신베이 시) 현장을 민진당이 16년간 장악했던 적이 있었을 정도며, 반대로 90년대까지만 해도 가오슝에서 국민당 소속 시장이 재임했던 적도 있고 2006년 지방선거에서도 국민당 소속시장이 거의 간발의 차이로 당선될 뻔하기도 했을 정도다. 2016년 총-대선에서 국민당 지지세가 유난히 강한 동부 산간지대나 푸젠 성 일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민진당이 승리했기 때문에 이 선거를 기점으로 지역구도가 와해될 것으로 기대된다.

3 국부천대 이전

처음부터 중화민국에 민주주의가 정착된 것은 아니었다. 대륙을 통치하던 시기엔 대내외적인 불안정에 시달려 민주주의는 지리멸렬한 상태에 있었다. 북양정부 초기에는 위안스카이의 황제 욕심이 있었고, 위안스카이가 죽은 이후로는 군벌들이 깽판을 치니 민주주의 따위는 바랄 수 없었다.

1928년에 장제스북벌을 완료해 중국은 통일되고 난징에서 국민정부가 수립된다. 그러나 통일은 명목에 불과하여 군벌들은 여전히 자신의 지역에서 왕초 노릇을 하고 있었고 혼란은 계속되었다. 이 상황에서 장제스는 민주주의 이전에 강력한 국가정당, 즉 중국 국민당이 우선 국가 안정을 확보해야 한다는 논리에 따라 헌법도 갖추지 못한 채 일당독재적 통치를 펼쳤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중화민국 헌법을 제정하여 나름대로의 일당우위적 민주주의 형태를 갖춰보려는 시도는 있었다. 중국 국민당은 삼민주의 이념의 군정 => 훈정 => 헌정 논리를 바탕으로 1935년부터 1937년까지 여당/무소속/직업단체의 직선으로 선출한 제헌 국민대회를 1946년에 소집했으며, 여기서 중화민국 헌법을 반포하면서 다당제 헌정으로 전환했다. 그리고 1947년에 여당/야당/무소속/직업단체의 직선으로 행헌 국민대회/행헌 입법원/행헌 감찰원이 소집되었다. 그리고 중국 공산당이 참여를 거부하면서 중국 국민당(大)/중국 청년당(中)/중국 민주 사회당(小)의 여대야소를 자연스럽게 연출했으니, 장제스의 책략으로 '3당 훈정'을 형성했다.

'3당 훈정'은 강력한 총통제와 3개 정당의 연립내각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형식적인 헌정(憲政)과 실질적인 훈정(訓政)을 동시에 추구하는 1946년 체제를 가리킨다. 1946년에 장제스는 3당 훈정의 막후 공작을 추진하면서 중국 국민당과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의 정치인들을 차례로 초청하여 최고위급 관직에 등용을 약속했고, 곧이어 제헌 국민대회에서 중화민국 헌법을 입법하면서 3당 훈정에 바탕한 중화민국 헌정의 성립을 선언했다. 3당 훈정의 여당으로 변신한 중국 국민당과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의 정치인들은 연립내각의 여당으로서 중앙정부의 장차관으로 출세했지만, 그들의 표밭은 어디까지나 중국 대륙의 대도시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현실의 중화민국은 대륙 각지에서 중국 공산당에 패주하고 있었다. 이 때 장제스는 중국 공산당을 우선 토벌해야 한다는 이유로 헌법에 우선하는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을 제정해 다시 헌정을 중단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화민국은 전세를 뒤집지 못하고 화북 전부를 내주고, 인민해방군은 장강을 넘어 난징까지 들이닥쳤다. 광저우, 충칭, 청두 등으로 계속해서 도망가던 장제스와 중국 국민당은 생존을 위해 끝내 대륙을 떠나 정부를 타이완 섬으로 옮기는 국부천대를 해야만 했다.

4 국부천대 이후

대륙에 있던 시절 공산당에 밀려 각지에서 패주하고 있던 국민당은 전국에 계엄령을 내렸다. 전세를 뒤집지 못하고 결국 타이완 섬으로 밀려났지만, 대륙 수복을 명분으로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은 유지되고, 계엄령은 대만에 한해 계속 적용되었다. 더불어 타이완 섬에 전혀 기반이 없는 중국청년당과 중국민주사회당은 지지기반을 완전히 잃어 3당 훈정을 주도하는 국민당에 의지해야만 했다. 이로써 중국 국민당의 일당독재가 이뤄져 민주주의는 의미를 상실했다.

중화민국 자체가 대륙 중국인들 위주의 국가체제였기에 당연히 타이완 섬에 온 중화민국도 대륙에서 타이완 섬으로 온 외성인들이 주도했고 이에 따라 타이완 섬에 본래 거주하고 있던 본성인외성인 간의 차별이 암암리에 번졌다. 더불어 입법위원과 국민대회 선거도 총선거가 아닌 보궐선거 내지 증원선거로 진행되었고[4] 1947-48년 선거에서 선출된 의원들이 죽을 때까지 의원을 해먹을 수 있었다. 물론 대륙이 수복될 때까지 제대로 된 선거를 치를 수 없기에 별수없이 종신직으로 한다는 구실이였지만 실제로는 국민당에 대한 본성인들의 반감이 분출되는걸 막아 국민당의 일당독재를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제대로 된 야당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존재하더라도 무조건 재갈을 문 관제야당(어용단체)이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유엔 상임이사국에서 경질당하면서 본토수복이라는 목표가 실현 불가능 쪽으로 가까워지게 되면서 국민당에 반발하는 당외 세력들의 세가 조금씩 여론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 물론 국민당은 아직까지는 이를 제어할수 있었지만 대륙이 개혁개방에 나서게 되면서 대만의 중화민국이 가지고 있던 경제적인 가치마저 크게 떨어지자[5] 장징궈 정부가 더 이상 본성인과 외성인 간의 차별을 대놓고 식으로 진행할 수 없고 이를 조금씩 시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그 이전에 강경하게 탄압했던 야당도 조금씩 용인을 하여 민주진보당 창당이 묵인되는 등 민주화 작업이 시작되었고, 1987년에 대만 계엄령이 해제되면서 민주화 작업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장징궈 사망 이후 총통 자리를 이어받은 리덩후이 집권하에서 국민당의 대만화와 함께 차근차근 민주화를 진행시켜나가며 1988년에 언론통제를 폐지한 것을 시작으로, 1990년에 국민당 보수파의 반발을 진압한 후 1991년 국민대회, 1992년 중화민국 입법원 선거를 보궐선거에서 총선거로 변경했다. 1994년에 중앙정부에서 임명했던 광역단체장을 선거로 뽑도록 하고 선거를 치렀으며, 1996년에는 중화권 최초로 국가원수를 국민이 직접 뽑는 선거가 치러졌고 이 선거에서 리덩후이가 3선에 성공함으로써 민주주의가 완전히 정착되었다. 이 과정에서 국민당 내 외성인들이 대거 반발하여 신당을 창당하기도 했지만 1996년 총통-국민대회 선거에서 국민당이 승리하면서 유야무야되었다. 그리고 2000년 총통선거에서 렌잔과 쑹추위가 따로 출마하고, 천수이볜이 상당한 지지를 얻으면서 최초의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그 뒤로는 2008년에 다시 국민당이 집권하고 2016년에 또 다시 민주진보당으로의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는 등 절차적 민주주의가 확립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중화민국은 대만에 집약됨으로써 전보다 견고하고 안정된 국가로 오래 지속될 수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5 통독 논쟁과 양안관계

중화민국에서 자국이 '중화민국'인지 '대만'인지에 대해서는 큰 정치적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이상한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지만 이는 국가 정체성에 대한 문제이다.

중화민국은 전 중국을 통치하는 정통 국가로서 건국되었고, 그렇기에 아직 명분으로는 전 중국을 대표하는 정통국가를 자처하고 있다. 이 논리에서라면 대만은 공식적으로 중화민국의 한 지방에 불과하다. 그리고 1949년 중화민국이 타이베이로 수도를 옮겼을 때 대륙에서 건너온 외성인들을 위주로, 지금은 대만과 대륙 중국의 정부의견 차이로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대만과 대륙은 결국 중국이라는 같은 핏줄이며 궁극적으로는 양안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이 바라는 통일은 중화민국 위주의 통일이거나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대등한 관계로서의 통일, 그리고 민주국가로서의 통일이다. 중화민국에서 양안통일을 주장하는 정당과 세력들은 범람연맹이라는 이름으로 호칭된다.

그러나 중화민국이 대륙을 다시 차지할 수 있을 가능성은 없다시피 하며, 현실은 대만이 본토이다. 게다가 대만이 중국의 역사에 편입된 것이 고작 400여 년밖에 되지 않고 근대사를 대륙과 달리 일제 식민지로 지냈으며 그 후에 대륙에서 건너온 '중화민국'은 본래 대만에서 거주하고 있었던 사람들학살하고 암암리에 차별했었던 적도 있다. 그렇기에 '중국인'임을 거부하고 대륙에서 세워진 '중화민국'을 외래 정권으로 인식하는 대만 사람들이 상당수 존재하고, 이는 국가 정체성에 대한 논쟁을 야기하고 있다. 대만에서 중화민국의 국가 정체성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자국을 중국의 정통 국가로서의 중화민국이 아닌, 명분으로도 대만 섬을 위주로 하는 대만민국'대만국(臺灣國)' 혹은 '대만 공화국(臺灣共和國)'으로 국가를 개편하기를 원한다. 중화민국이 실질적으로 독립국이면서도 '대만 독립'이 주장되는 이유는 '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의 독립'뿐만 아니라 '중화민국으로부터의 독립'에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중화민국에서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정당과 세력들은 범록연맹이라는 이름으로 호칭된다. 양안 통일과 대만 독립 사이의 논쟁을 대만에서는 통독(統獨) 논쟁이라 한다.

현재 중화민국은 절차적 민주화를 완전하게 이룬 명실상부한 민주주의 국가이다. 그렇기에 본성인은 물론이고 외성인들도 지금의 일당독재국가 중국과는 통일을 논할 수 없다는 의견이 대다수이다. 아울러 사실 외성인과 본성인의 세력 밸런스는 중화민국이 국부천대로 대만으로 넘어왔을 때부터 본성인이 월등히 높았다. 본토 재수복을 노렸던 중추세력이자 대만이 어떤 형태로든 대륙과 재통합하는 것을 비교적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외성인들의 수는 원래부터 소수였는데, 이들의 후손들마저 세대를 거치면 거칠수록 대만에 동화되어 사상이 본성인과 비슷해지고 있기 때문에 안 그래도 없는 외성인의 세력은 계속 감소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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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의 국립정치대학 산하 선거연구중심이 조사한 대만의 정체성(臺灣民眾臺灣人/中國人認同趨勢分佈) 조사내용. 1992년부터 23년 동안의 추이를 보여준다. 가장 최근인 2015년 6월을 기준으로 1) 스스로를 '대만인'이라고 응답한 이는 59%, 2) '대만인이며 동시에 중국인'라고 응답한 이는 33.7%, 그리고 3) '중국인'이라고 응답한 이는 불과 3.3%로 나타났다. 특히 주목할 점은 2007년까지는 스스로를 '대만인이며 동시에 중국인'라고 생각하는 복수 정체성을 지지하는 응답이 제일 많았지만, 2008년부터는 '대만인'이라고만 대답하는 이들의 수가 더 늘어나 2010년 이후에는 줄곧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현재 대만이 독립을 천명한다고 해도 중국의 압력 때문에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어려우며, 중국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력통일을 시도할 것이 뻔하므로 반드시 피를 보게 되어있는 데다가 대만이 이 무력통일 전쟁에서 이길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리고 이미 대만은 중화민국이라는 형태로 실질적인 독립국 상태이며, 중국이 대만의 대외 교류를 방해하는 대신 양안 간의 교류를 계속해서 확대하고 있어, 현재의 대만 경제는 중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정치적으로는 비록 대립할지 모르나 현재 대만에서 중국은 경제적으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는데, 대만의 대중국 무역 비중은 27%로 매우 높다. 그렇기에 대만이 독립을 크게 부르짖어 중국에 밉보이는 상황은 경제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게 되었다. 최근에는 대만에서 양안통일에 대한 지지도가 크게 하락했기 때문에 중국 국민당 역시 양안통일보다는 독립 반대를 통한 평화 추구 및 중국과의 교류 확대를 통한 경제성장을 내걸고 있다.

때문에 결국 대부분의 대만 사람들은 굳이 양안통일을 추진해 민주주의를 잃거나 독립을 강행해서 피를 보는 것보다는, 독립 상태는 아니지만 사실상 독립 상태인 현 상황이 계속 유지되어 중국과 영원히 통일되지 않는 현상유지가 지속되는 방향을 선호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유지되기 위해선 외성인이 주축 세력이자 친중 성향인 중국 국민당과 반중 독립성향인 민주진보당이 균형을 유지하며 양안통일, 대만 독립 어느 쪽으로도 가지 않는 상태가 가장 이상적이다. 때문에 표가 엇비슷하게 들어가고 있으며, 양 세력간의 균형이 맞춰지는 편이다. 양 당도 이런 분위기를 잘 알고있기 때문에 양쪽 다 통일 혹은 독립을 강하게 강조하진 않으며, 작은 부분부터 점진적으로 서서히 바꿔가는 방향으로 정책방향을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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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예시로 들 수 있는 것이, 대만의 국립정치대학 산하 선거연구중심이 2015년 7월 발표한 대만의 통일, 독립 선호도(臺灣民眾統獨立場趨勢分佈) 조사내용이다. 1994년 이후 21년 동안의 추이를 보여준다. 가장 최근인 금년 6월을 기준으로 1) '최대한 현상유지'가 제일 많은 34.6%, 2) '영원히 현상유지'이건 사실상 독립 아닌가?가 그 다음인 24.9%, 3) '지금은 현상유지, 나중에 독립'이 16.4%, 4) '지금은 현상유지, 나중에 통일'이 7.4%, 5) '당장 독립'은 4.7%, 그리고 6) '당장 통일'은 겨우 1.7%로 꼴찌를 기록했다. 요약하면 현상유지는 약 60%로 압도적 다수이며, 독립은 약 21%인 반면, 통일은 10%도 안되는 상황이다.

그러나 중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을 확대하는 것과 같이 교류를 확대하고 가까워지는 것에 대해서는 범람과 범록의 여론이 극명하게 갈린다. 바로 여기서 '(궁극적)양안통일' vs '대만 독립'의 정치적 논쟁이 발생한다. 대륙 정부가 밉다고 해도 같은 중국간의 교류는 계속해서 이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자신들은 애초부터 대륙 중국과 일체 관련이 없던 남남인데 왜 중국과 교류를 확대하여 대륙 중국에 종속되려고 하냐면서 격렬히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쟁인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국회 공성전으로 나타난다. 대만의 국회인 중화민국 입법원에서 (궁극적)양안 통일을 지지하는 중국 국민당과 대만 독립을 지향하는 민주진보당은 한치의 양보없는 대결을 벌이기 때문에 무슨 '중국'관련한 뭐만 나오면 의장석을 점거하고 난투극을 벌이게 된다. 끽해야 몸싸움(?!) 수준인 대한민국공성전과 달리 여기 공성전은 각개전투 패싸움 수준으로 살벌하게 진행되며, 여자 의원들은 여자 의원끼리, 보좌관들은 보좌관끼리 싸운다는 나름의 규정기사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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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벌어지는 중화민국 입법원국회 공성전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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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많이 알려진 짤방.(...) 2010년 ECFA 상품부문 협정 비준동의안 처리 때이다. 중화민국 입법원국회의원들 옷에 자기 정당이름을 박은 덧옷을 입고 활동하게 되어 있어 누가 어떻게 싸웠나(...)를 알 수 있다. 저 사진에서 단상에 뛰어든 사람은 민진당주석(대표) 쑤전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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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의 ECFA에 서비스무역협정 확장안에 반대해서 2014년 3월 18일에 중화민국 입법원(국회)을 점거한 대만의 대학생들. 헌정 사상 최초의 일이다. 가운데 사진은 쑨원이다. #)

양안관계와 통독논쟁은 대만 정치뿐만 아니라 국민들 사이에서도 매우 민감한 문제이다. 위의 사진처럼 대학생들이 중화민국 입법원을 점거하여 해바라기 운동이 촉발된 이유도 결국 양안관계가 원인인데, 직접적인 원인은 대만과 중국의 자유무역협정ECFA(중화권지역경제협력기본협정)의 서비스업 확장문제였다. 이전에 있었던 ECFA 상품부문 협정도 대만 입법원에서 공성전 난투극 끝에 통과되었고, 서비스업 확장은 위에서처럼 입법원 점거에 ECFA 추진 세력이 항복하고 정권이 민진당으로 넘어가면서 사실상 무산.

이런 사정으로 대만 정치권에서는 중국을 제외한 다른 선진국(ex : 일본, 미국, 한국, 유럽연합 등)과 맺는 국가단위 교류는 외성인 본성인 모두 상관없이 매우 긍정적. 정말 웬만한 패널티가 부과되지 않는 이상 무조건 찬성한다. 외성인 입장에선 자신들이 나라로 인정받는거고, 본성인 입장에선 대륙 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 대표적인 사안으로 중국-대만 FTAECFA는 국민 - 민진 양당 간 국회 공성전이 벌어졌지만, TPP에 대해서는 국민 - 민진 양당과 친민당 등 군소정당들마저 위 아 더 월드로 찬성하는 모습을 들 수 있다. 차이잉원도 TPP에 가입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하였다.

현재는 홍콩우산혁명이 실패로 돌아가며 중국 정부가 일국양제 체제를 훼손하는 일이 발생하자, 그해 열린 지방선거에서 반중 독립성향인 민주진보당 쪽으로 몰표가 던져져 중국 국민당이 대패한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국민당에서는 주리룬 신베이 시장만 간신히 살아남았다. 이런 식으로 중화민국의 정치는 대륙 중국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는다.

물론 중화인민공화국은 가만히 있는데 중화민국만 이렇게 피터지게 싸우는건 아니고, 중화인민공화국 또한 중화민국의 정치상황을 매우 예의주시하고 있다. 당장 중화인민공화국은 중화민국을 떨어져나간 중국의 일부로 보고 있으며, 강제로라도 통일시켜야 한다고 보고있다. 사실 국민당 독재 시절만 해도 서로를 적대하여 서로가 중국의 정통정부라는 주장을 해왔다 해도 이는 양쪽이 하나의 중국이라는 대 원칙에 동의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었다. 하나의 중국이란 원칙만 잘 지켜진다면 대만은 결국 어떤 형태라도 언젠가는 중국과 하나의 나라가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 하지만 국민당의 독재가 무너지고, 대만 본성인이 주축이 된 민주진보당이 출연하여 하나의 중국 원칙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대만 독립을 주장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중화민국에 대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압박 수위가 엄청나게 강화되었다. 중국은 어떠한 형태로든지 대만이 독립을 시도하면 무력을 동원할 것이라는 입장을 수차례 밝혀 왔고, 실제 군사훈련을 빙자한 무력 협박으로 대만이 독립하지 못하도록 지속적으로 압박을 가하고 있다. 그리고 그나마 하나의 중국 원칙을 준수하고 있는 과거의 적 국민당과 친밀하게 지내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국민당과도 그렇게 친한건 아니고 티격태격 거리긴 하지만, 민진당에 대해선 죽일놈 수준으로 나오고 있으니 다투는 레벨이 다르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중화민국에 원하는 것은 대만을 홍콩처럼 타이완특별행정구로 만드는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홍콩처럼 일국양제는 기본이고, 홍콩보다 더 많은 자치권[6]을 부여하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 외의 방법은 중국의 성으로 편입되는 것이 아닌 이상은 절대로 수용할 수 없으며, 독립을 시도라도 했다간 즉각적인 무력개입을 하겠다는 입장이다. 중국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많이 양보했다고 말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 중화민국 국민들의 여론은 범람, 범록을 막론하고 부정적이다. 특히 홍콩에 대한 일국양제 원칙을 훼손하여 촉발된 우산혁명이후에는 더욱 더 부정적으로 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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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중국과의 일체성을 강조하는, 친중 성향의 역사교과서가 중국 국민당 정부에 의해 시행에 들어가려고 하자 고등학교 학생들의 교육과정 거부 시위를 벌어기 시작했다.링크 8월 초에 들어서는 관련 학생의 자살 사건을 계기로 시위대가 교육부 외곽을 점거하는 상황으로 악화되었다. 일단 대만 교육부가 "각 지자체 별로 개정 이전 교과서, 신규 교과서 가운데 하나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고 물러섰고, 시위대도 8월 6일 점거시위를 중단했지만, 2016년 1월 16일 제14대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 관련 정치쟁점으로 부각되는 상황이다. 그리고 2016년 차이잉원 총통이 취임하자마자 마잉주 정부 시절의 친중 교육과정을 전격적으로 폐지하고 천수이볜 시절의 교육과정으로 원상 복구하기로 결정했다. 기사

6 중화민국의 정부 조직

오권분립국가행정조직/중화민국 항목 참조.

7 정당

8 주요 선거

  1. 관제야당을 두어서 명목으로는 다당제 국가이기 때문이다.
  2. 싱가포르의 야당들은 중국처럼 관제야당이 아니긴 하지만 기형적 선거제도와 우회적 방식의 정치탄압으로 인해 총선에서 한 자리수 의석을 얻는데 그치고 있다. 총 의석은 80석 언저리이다.
  3. 다만 대만만 짧은건 아니고 볼리비아나 페루도 투표가 오후 4시에 마감되는데도 투표율은 기본이 80%를 넘는다. 차이점이라면 페루나 볼리비아는 의무투표제를 실시하고 있다는 점.
  4. 그나마 이 선거가 시작된것도 1969년부터였다. 대만 계엄령 첫 20년간은 선거자체가 없었다. 선거가 있었다 해도 타이완 성 의회 선거와 기초단체장-지방의원 선거만 있었을 뿐이다.
  5. 물론 당시 대만의 경제는 지속적인 성장세를 기록하긴 했고, 예나 지금이나 본토에 비해서 부유하다. 그렇지만 중국의 인구가 위낙 깡패이다보니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펼치자 세계 각국에서 잠재력이 어마어마한 중국에 물건을 팔아먹을려고 했고, 자연히 대만의 중요성이 엄청나게 떨어질수밖에 없었던 것.
  6. 심지어 국방권까지 허용하겠다는 입장이다. 군대를 보유해도 좋다는 의미. 도대체 뭐 때문에 통일을 하려는 것인가? 외교권? 장래에 이 나라 꼴이 날 수도 있다.
  7. 범람연맹에서도 이들은 범귤연맹으로 따로 분리하기도 한다. 이들은 사회복지 등의 공약에서 기존 범람연맹과 차이를 보인다.
  8. 사실상 범람연맹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