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개요
한옥에 대한 많은 장점이 소개되지만, 분명하게 단점이나 논쟁점도 존재한다. 상세히 서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2 상세
2.1 장점
-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과 같은 시각적인 균형감에 신경써서 건물을 지었다. 기둥 정도가 아니라 건물의 전체적인 형상에 있어서 미묘한 곡선으로 시각적인 균형을 추구했다. 바꿔말하면 한옥에 있어서 완전한 직선보다는 곡선이 훨씬 많다는 것. 이는 중세 이후로 중국과 일본 건축에서는 사라진 특징으로, 한국 건축만의 특징이 되었다.
- 온돌과 들문 등으로 기온차를 극복하고 있다. 다만 우리 상식과는 달리 온돌은 통념보다 늦은 조선 후기에 일반적으로 널리 보급되었다. 온돌의 기원 자체는 길게 보면 선사시대며, 최소한 고구려 시대에는 온돌의 초기 형태가 발견된다.
- 정원 조성시 타국의 정원보다 주위 환경에 잘 녹아드는 자연미를 구축하였다. 이는 조상들이 자연과의 조화를 우선시하였기 때문이다. 서양의 경우에는 인위적인 모습을, 일본은 인간에 의한 자연환경의 모방을 보여주는 데 반하면 사뭇 다른 모습임을 알 수가 있다.
- 오래간다. 일반적인 오해와 달리 침수나 병충해, 부패, 부식등을 예방한다면 철근콘크리트 건축물보다 수명이 긴편이다. 단, 어떻게 시공하였느냐와 관리하였느냐가 관건이다. 주로 수분침투를 잘 방지했냐/못했냐로 나뉜다.
- 뼈대인 목재가 자정작용을 하여 실내의 습도와 온도, 기온등을 조절해 주어, 쾌적한 주거환경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2.2 단점
- 재료나 양식이 다양하지 못하다. 이는 고대와 중세 건축물이 많이 소실된데다, 바로 직전시대였던 조선시대가 화려함을 크게 배제한 탓도 크다.
- 구조재의 접합에 금속을 잘 쓰지 않기 때문에[3] 내구성이 약하고,[4] 목조건축이 대부분이라 목재가 부족한 경우 큰 건축물을 만들기 힘들었다. 금산사 미륵전 등에서 내부의 쌍기둥이 여러 부재를 짜 맞추어 큰 기둥을 만든 구조다. 다만 이렇게 기둥을 만든 탓에 요즘 기둥에 한계가 와서 지금은 건물 안에 철제 빔으로 된 별도의 쇠기둥을 설치했다.
- 지진에 취약하다. 혹자는 한국 전통 건축은 신축성 있는 목재를 짜맞춰서 지진에 강하다고는 하나,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로 한옥은 접합부분에 거의 결합재를 쓰지 않는 대신 기와 및 흙의 무게로 구조물을 지탱하는 형식이기 때문에 지붕의 하중이 수십톤 단위로 계산할 만큼 엄청나다. 따라서 유연성이 발휘될 여지가 없으며 기둥 및 주춧돌이 지진 등으로 조금 흔들거리거나 무너지면 수십톤 무게의 지붕으로 인하여 바로 무너진다. 이런 한옥구조의 취약성이 이번 경주지진에서적나라하게 드러났다.
- 축부에 보강재를 잘 안 쓰기 때문에 각 부위를 연결해주는 결구가 매우 취약하다. 그래서 지붕하중을 유지하는데 한계가 있으며 건물을 더 크게 설계하는 것이 힘들다.[5]
- 서까래를 깐 후 그 위에 흙반죽으로 모양새를 잡아 그 위에 기와를 올리는데 흙의 무게와 기와의 무게가 더해져 막대한 하중이 가해진다.시간이 지나면 부재가 하중 때문에 찌부러지고 구부러지는 등 변형이 생기고 건축 자체의 수명이 짧아지게 된다.
- 서깨리 위에 흙반죽을 올리게 되면 황토에 있는 수분이 그대로 골조인 목재에 스며들어서 부식을 초래하며 이는 내구성과 건물의 수명에도 악영향을 끼친다.인용 오류:
<ref></code> 태그를 닫는 <code></ref>
태그가 없습니다 수분의 투입에 취약하며, 수분이 침투할 경우 빠른속도로 부식된다.</ref>
- 단열이나 통풍에 대한 현대적인 대처가 부족하고, 이에 관한 최신공법을 도입하는 것이 서구나 일본에 비해 미흡한 실정이다. 예컨데 최종마감시 건축공법에 맞지않는 내장재가 들어가 단열과 환기 등의 문제로 공기중 수분과 온도조절등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심심찮게 보인다.
- 시공단가가 비싸다. 어느건축물이든 마찬가지이겠지만, 한옥은 손이 많이가 건축기일이 많이 소요되고, 인건비가 많이 지출되는 등[6] 전체적으로 시공비가 일반건축물이나 철근 콘크리트조의 건축물, 미국식 목조주택의 경우보다 비싸 주로 관용이나 공용 성격의 건축물로 시공되는 편이다.
흙의 이런 단점은 중량 문제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습기를 잘 흡수하는 흙의 특성상 항상 일정한 수분을 머금고 있는데, 유기물이라는 목재의 특성상 장기간 수분과 접촉하면 썩을 수밖에 없으므로 이중으로 건축물의 수명을 잡아먹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전통 한옥 지붕의 평균 수명을 짧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다.
경복궁 근정전 등 각종 문화재 공사를 맡아온 대목장 신응수도 전통 한옥의 최대 단점이 바로 지붕이라고 자신의 책에서 언급했다. 파리 고암서방 및 충북 진천 보탑사 등 다양한 문화재 복원에 참여해 온 신영훈 등 다수의 한옥 전문가들도 동일한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현대에 와서는 흙의 사용을 최대한 줄이거나 아예 서까래 위에 덧써까래를 깔아 이중지붕을 만들어 흙의 사용을 배제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현대에는 스티로폴 등 다양한 보온재가 있으니 흙을 보온재로 사용해야 할 필요가 없다.
기와 대신 나무널을 얹는 너와집[7]이나, 풀을 엮어 올리는 초가집, 굴피나무 껍질을 얹는 굴피집의 경우 무게를 기와집보다는 줄일 수 있지만 유기질 지붕재료이기 때문에 화재에 약하고 수명이 짧아 주기적으로 바꾸어야 하며, 여기다 굴피집의 경우 공기 중 습도에 따라 팽창/수축률이 커서 건조한 겨울이 되면 방한력이 크게 낮아진다.[8]
2.2.1 내진성
앞서 단점항목에서 연결철물이 부족하거나, 측부(옆면의) 보강자재가 부족하여 연결부가 취약하고 구조적으로 취약부분이 있음이 거론되었는데, 그부분이 집중적으로 부각되어 대량의 인명사고 및 재산피해로 이어졌던 것이 1990년대 발생한 고베 대지진이었다. 바다건너 일본에서 일어난 사건이고, 그사건으로 한옥이 부서지지는 않았지만, 당시의 지진으로 부서진 건축물 대부분이 한옥과 동일한 특징을 지닌 전통가옥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결코 남일이라고 볼 수 없다. 사건당시 일본측 언론에서도 보도되었지만, 신축주택이나 현대식 주택은 멀쩡했던데 비해 전통가옥 파손율이 엄청나게 높았다. 일본전통건축과 한국전통건축이 세부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장부결합방식인데다 지붕에 흙과 기와를 올리는 점, 설계상 측부의 보강자재가 모자라고 연결부 철물사용이 적다는 점 등 큰틀에서 많은 기본적인 특징들은 공유하였다.
굳이 지진을 겪지 않는 시점에서는 상관이 없지만, 지진을 상정할 경우 전통목구조는 일본이든, 한국이든 구조적으로 취약한 것은 매한가지다. 일본의 경우 현대에 이르러서는 임산물 협회에서 주 자재인 삼나무에 대한 하중값을 실험을 통하여 통계자료로 뽑아놓고 그것을 토대로 구조계산을 하여 설계를 하고, 측부의 보강자재를 늘리고, 철물의 사용을 적극적으로 하는 등철물사용례 구조적인 취약점 보완에 급격히 힘써왔다. 또한 지붕의 시공도 흙미장을 폐기하고 방수지와 건식시공이 보편화시켰다. 그런데 이러한 현대의 일본전통가옥과 달리 현대에 지어지는 한옥의 경우 수종별 하중저항 자료가 제대로 나온것이 부족하고, 철물의 사용도 여전히 부족한 편이다. 건물 골조에 대한 상세한 도면을 작성하고 만드는데다 자동화 가공도 시도하는 등 변화의 모습이 보여주지만, 현대화되고있는 일본가옥에 비교해볼때는 아직도 취약부분의 개선이 미흡하다.
때문에 일본과 달리 현재로선 통계화된 구조자료가 부족한 실정이라 지진등의 천재지변에 얼마만큼 저항하고, 그에 저항할만큼의 튼튼한 건축물을 지을 수 있는지, 전통한옥의 능력은 아직 검증이 부족한 실정이다. 게다가 현대화된 일본전통가옥과 달리 연결철물의 사용도 여전히 부족한 편.
2016년 9월에 강타한 경주 대지진으로 경주지역 한옥이 대거 파손되면서 이점이 더욱 부각되었다.
2.3 단점의 보완
그래서 최근엔 기존 기와 대신 무게가 훨씬 가벼운 동(銅)기와를 쓰는 경우가 늘고 있다. 특히 월정사나 상원사 같은 강원도 사찰에서 많이 쓰이고 있는 실정이다.[9] 물론 가벼운 동기와를 씀으로 축부하중이 줄어들어 구조안정성이 해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으나, 기존방식에서 기와만 바꾸어 불필요한 중량만 줄이는 방식이고 동기와를 시공하는 측에서도 이점을 고려하고 방수자재인 동판이나 아스팔트 도포재 등을 더 사용하는 식으로 대처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
동기와의 또다른 장점은 내구성이 매우 좋다는 것인데, 부식 및 산화에 매우 강한 구리의 특성상 수백년이 지나도 원상태를 유지할 수 있고 따라서 외장재로도 손색이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구리는 탄력성 및 복원성이 매우 우수한 자재란 점이 기와와 궁합이 맞는 것이 지붕을 보호하는 외장재인 기와는 특성상 빛,물,추위,더위 같은 외부환경에 강하게 영향을 받는데 특히 열과 추위가 문제되는 것이 견고한 재질이라도 열과 추위를 만나면 늘어나고 줄어들 수밖에 없는데 처음에는 괜찮지만 수백번을 반복하면 미세한 균열이 갈 수밖에 없고 그 틈사이로 물이 침투해서 얼어버리면 결국 깨져버린다. 도자기같이 경도는 높지만 연신율 및 탄력성이 매우 낮은 재료일수록 그러한데, 한국의 기후가 여름과 겨울의 온도차가 큰 편이라는 점, 그리고 한국의 유명 사찰이 조선시대 승유억불 정책때문에 하루 사이에도 날씨가 변화무쌍하게 바뀌는 산중에 위치해 있어 일반기와를 쓰면 매년마다 기와를 갈아야 하지만, 열과 압력이 비교도 할 수 없이 높은 총포류의 탄피로 쓰일 만큼 탄력성 및 복원성이 좋은 구리로 기와를 쓰면 이런 문제점이 발생할 여지가 거의 없어진다.
한편 황토를 이용한 기와의 습식접합은 목재에 수분이 스며들어 구조와 내구성의 취약점이라고 지적되는데 최근에는 서구식 건식공법을 도입하여 구조재위에 방수시트를 시공함으로써 수분침투의 취약점을 극복하고 있다.
3 오해/낭설
3.1 경복궁의 크기는 자금성보다 훨씬 작다?
'경복궁의 크기는 자금성 화장실 만하다.'라는 괴설이 나돌고 있다.
경복궁은 자금성에 비했을 때 물론 스케일이 작다. 실제로 규모 면에서 경복궁은 14만평(46만여 제곱미터)으로 자금성 24만평(79만 제곱미터)의 약 60퍼센트 규모다. 그것은 황궁(皇宮)과 왕궁(王宮)의 차이이다. 황궁은 5문3조(五門三朝)이고 왕궁은 3문3조로 한다는 것이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적 관례였다. 대문에서 정전에 이르기까지 황궁은 5개, 왕궁은 3개의 문을 거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정전의 월대(月臺)도 5단과 3단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것을 어기는 것은 국제 질서의 파괴이자 도전이니 그 뒷감당을 할 수 없는 한, 3문에 3단으로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로는 그렇게 작지 않은 경복궁이 왜 자금성에 비해 작게 느껴지는가 하면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건물이 너무 없다는 것이다. 자금성의 경우 건물이 빽빽한데 경복궁은 맨땅만 덩그러니... 그러나 참고로 지금의 경복궁은 일제강점기 때 많이 훼손되어 30%밖에 복원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이유로는 경복궁의 건물이 작기 때문이다. 경복궁은 면적이 넓을 뿐 경복궁 내부를 구성하는 건축물들은 작은 단층 목조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것에 불과하다. 자금성이 거대하게 느껴지는 건 그 자체만으로 거대한 석축 기반 위에 다시 거대한 목조건물들을 지어 단순히 면적만 넓은게 아니라 건물 자체도 위압감을 줄 정도로 거대하기 때문에 크게 느껴지는 것이다.
참고로 한자까지 같은 자금성 안의 전각인 자금성 경복궁을 얘기한다면 이 명제는 사실이다. 어?
반대로 뒤집어서 생각해서 자금성 내에는 건청궁이라는 권역이 있는데 경복궁 안에도 마찬가지로 궁안에 궁이라는 개념으로 건천궁이라는 권역이 있다. 자금성의 건청궁을 경복궁의 건청궁이라 생각하면 자금성의 크기도 마찬가지로 줄어든다.잉?
3.2 기술이 없어서 2층 이상의 주택이 없다?
물론 2층 이상의 주택이 존재한다. 사실 9층까지 지었었다.덕수궁의 석어당이 그것. 그러나 그 외에 2층 주택이 거의 없는 것은 온돌 때문이다. 온돌의 과도한 무게로 인해 온돌을 가진 다층 주택을 짓는 것은 불가능했고, 겨울이 매우 추운 한국에서 온돌도 없는 다층저택을 지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2층 이상의 건물이 기술적으로 어려울 것이라는 바보같은 편견을 버리자. 그런 이유로 대부분의 다층의 건물은 주거지가 아닌 창고, 사찰건물, 누각 등의 목적으로 지어졌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조선 초까지만 해도 2층 가옥이 흔했다. 이는 여러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숙종실록에 어느 처녀의 순결(...)에 관한 대화 중 여인의 주거공간이 2층에 있으니 계단을 오르내리는 과정에서 잃었을 것이라는 내용이 있다. 계단 아래에서 계단 위 여인의 치마 속을 보았을 거라는 얘기. 그래봤자 속치마 속바지 뿐이었을 텐데 성종 때에는 첫날밤에 피가 나오지 않아 소박맞을 위기를 맞은 새신부를 두고 원래 기거하던 방의 구조를 그려오라 했는데, 2층 침루였다. 이를 본 성종이 계단을 오르내리다 처녀막이 파열된 것이라는 판결을 내린 일화도 있다. 세종대왕이 침루에 올랐다는 기록도 있으며, 고려시대로 가면 이러한 루가 일반적인 가옥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기록이 넘쳐난다. 아예 규모까지 크게 해서 찻집이나 술집 등으로 썼다는 기록도 있다. '침루'는 침실로 쓰는 2층 이상의 집을 의미한다. 지금 흔히 아는 1층 가옥은 온돌의 보급으로 인해 실용성보다 따뜻한 온돌을 선택하게 된 것.
그리고 경북의 운조루 등 2층의 형식을 가진 특수한 형태는 남아있다. 주택은 아니더라도 황룡사와 미륵사의 9층[10]목탑, 법주사 팔상전 등 다층구조 건물은 많다. 실제로 온돌이 설치되지 않은 고궁 내 건축물들 중에는 다층건물을 상당 수 발견할 수 있으며,[11] 일부 사찰이나 수원 화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창덕궁 주합루의 모습. 원래 1층은 도서관인 규장각, 2층은 열람실인 주합루이나, 현재는 주로 건물 전체를 주합루로 부른다.
유형문화재인 방초정. 가운데 온돌방이 있는 2층 구조다.
덕수궁 석어당. 역시 2층.
북한 종성읍성의 수항루. 이건 아예 3층이다!
백련사 만경루. 비탈길에 지어 앞에서 보면 2층 건물이란 게 보이지만, 대웅전 쪽에서 보면 단층 건물처럼 보인다. 가운데 길은 후대에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밖의 2층 건물들 사진 링크 경복궁 향원정, 구례 운조루, 남산골 한옥마을 안동김씨 태장재사 이상루,용주사 천보루, 의성김씨 서지재사, 그 외 17세기 다층 한옥 관련 포스팅
그리고 누각의 구조는 대부분 바닥에서 들어올려진 형태인데, 앞서 말했듯이 여기서 벽만 쌓으면 사실상 2층이다. 또한 법주사 팔상전 등을 보면 기술이 부족해서라는 해석은 근거가 없다.또한 조선 세종 때의 가사제한령(家舍制限令)에 의해서 법적으로 주택을 장식하거나 크게 짓는 것을 금지함에 따라서 그러한 일을 제대로 하기 어려워진 측면도 있다. 이는 고려시대의 풍수지리에 따라서 조선 태종 이후 생긴 경향을 세종이 이어받는 것이다.[12] 여러 기록들을 보면 고려~ 조선 전기까지는 2층 살림집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이글루스의 관련 글 참조.
3.3 현존하는 전통 건축물 중 경복궁 근정전이 제일 크다?
높이와 면적을 다 고려한다면 가장 큰 건물은 경복궁의 경회루다. 그러나 가장 면적이 넒은 건물은 높이 14m, 길이 75m의 여수시 진남관이다. 그 다음은 통영시 세병관을 꼽을 수 있겠다. 근정전은 면적 30m x 21m에 높이는 22m(기단까지 합하면 25m 약간 못 미침)의 크기로 높은 편이긴 하지만 가장 넓지는 않다.
3.3.1 지붕 기와의 끝 치미부분에 하얀 회칠한 것이 그대로 보여 지저분하다?
일단 흰색 회칠 때문에 잘 모르는 일반인들은 그게 시멘트로 바른 것으로 오해하는데 시멘트가 아니라 회칠마감이다.[13] 이렇게 용마루나 막새 등에 흰 회반죽을 칠하면 단순히 기와를 쌓아 만드는 것보다 바람에 더 강하다는 장점은 있으나 태풍이 한국보다 더 잦은 일본에선 회반죽 안 써도 용마루가 멀쩡한 것을 보면 그다지 의미가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사실 이건 꼭 전통 건축의 문제라고 할 수 없다. 원래 막새라는 끝에 있어야 할 기와나 치미장식이 없기 때문인데 막새 대신 회칠을 하는 경우가 1970~80년대 이후부터 보인다는 것 때문이다. 그 전까지는 기와를 그냥 올려놓으면 놓았지 딱히 흰 회칠이 보이도록 마감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다.
막새가 없는 이유는 신라 때부터 신분에 따라서 쓸 수 있는 장식과 집의 크기 등을 자세하게 규정했는데, 이게 조선에도 적용되어 궁궐이나 사찰을 제외하고는 단청이나 막새, 치미, 다듬은 돌 등을 쓰지 못하게 제한했기 때문이다. 가난하거나 미적 감각이 떨어져서가 아니다.
오히려 막새가 지붕의 완성이기 때문에 다른 기와보다 더 중요시 했지만, 그 때문에 일반인들은 쓰지 못하게 했다. 법이 문제였다면 모를까 건축 기술이나 센스가 문제였던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지붕의 마감은 취향의 영역이기도 해서 오늘날에는 흰 회칠을 더 선호하는 경우도 있다.
3.4 한옥이 과학적이라는 것은 양반가에 한정된다?
온라인 상의 덧글에서 종종 보이는 중2병 병크발언. 이는 '난 고건축에 대해 눈꼽만큼도 모르는 사람입니다'라고 스스로 자폭하는 거나 다름없다.근데 원래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라는 게 함정 물론 스케일 차이는 크지만, 일반 민가나 양반가 건축이나 한옥으로서 갖는 기본 구조적인 측면에서는 같다. 다만 양반가 건축물에서 보다 다양한 부가요소가 보이고,[14] 더 좋은 자재로 더 좋은 자리에 지어졌으며, 무엇보다 일반 민가보다 양반가가 현대까지 남아있는 게 많기 때문이다.[15]
이건 어느 나라 고건축이나 신분이 존재하는 전근대적 시대의 물건이라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저런 종류의 덧글을 달기 좋아하는 일빠/중빠들이 숭배하는 일본/중국의 고건축도 지배층이 아닌 피지배층 레벨로 내려가면 건축물들의 수준은 바로 곤두박질친다. 일본이 자국의 대표건축으로 내세우는 고성이나 무가 건축물이 하층민들의 민가였는지 아닌지는 말할 것도 없고, 중국이 자국의 대표 고건축물로 내세우는 사합원도 하층민들의 민가는 아니다.
3.5 한옥은 나무로만 지어 열등하다?
'한옥은 서양 건축과 달리 불에 약하다. 그런데도 발전이 없었다.'라는 식의 논리.
많은 역사적 건물들이 온전히 남아 관광객들의 마음을 뺏는 유럽과 달리, 한국의 역사적 건물들은 대부분 목조건물인지라 전란으로 불타고 무너지고,(안학궁, 미륵사, 황룡사 등) 방치되면 목재가 썩어 붕괴되기 때문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 고작 고려시대에 지어진 것[16]이라 관광 자원으로서의 건축 유산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점이 아쉽다고 이런 주장을 한다는 것은 곤란하다.
그리고 한국 건축은 나무만 쓰는 게 아니다. 통나무를 쌓아 만든 귀틀집 수준이 일반적이고 기와조차 도입되지 않았던 삼국시대 가야 수준이라면 몰라도, 다양한 돌과 여러 흙과 복합재를 섞어 만든 일종의 시멘트를 사용해[17] 축대를 쌓고 벽은 현대 철근 콘크리트처럼 井자 형태로 여러 차례 엮은 골조에다 진흙을 발라 만들고 바닥에 온돌과 흙을 깔아 만든다.
그리고 한국도 다듬은 돌이나 벽돌로 아치의 원리를 이용해 다리를 짓고 성을 쌓는 등 생각외로 많이 활용했다.[18] 근데 왜 서양처럼 정교한 석조 건축이 없었냐 하면 이는 한국에서 주로 생산되는 석재가 화강암이기에 그렇다. 화강암은 경도는 HS) 70~80으로서 철 중에서 가장 경도가 높은 주철의 32~40의 거의 두배가 되기에 가공하기가 매우 힘들다.
또한 유럽에서 가장 흔했던 석재가 대리석 및 석회석인데 이 둘은 손톱으로 흠집을 낼 수 있을 정도로 경도가 약하고[19] 따라서 가공해서 사용하기가 용이하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한국에서 석조건물이 발달 못했던 것은 이러한 환경적 요인의 작용이 크며, 동시에 그런 화강암으로도 정교하게 만들어진 석굴암과 고구려 성벽[20]이 높게 평가되는 이유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및 오벨리스크 같은 정교한 화강암 건축물을 예로 들며 석조건축에 소홀히 했다는 비판을 하는 이도 있지만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이집트는 사막 국가여서 건축에 쓸 목재 자체가 아주 귀한 환경이었으므로 자연히 석재를 활발히 이용할 수밖에 없었으니 인프라 및 기술발달에 유리한 조건이 형성되었다는 걸 감안해야 한다. 온대 기후대에 속해 목재가 석재보다 훨 싸고 구하기도 쉬웠던 한국과는 일대일 비교는 금물이다.
더욱이 아무리 석재라도 나무가 연소될 정도의 강한 열(나무의 상태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나무의 착화점이 270~280도 정도다. 자연 발화점은 450도 정도.)에 화재 등으로 오래 노출되면 가뜩이나 인장력이 약한 석재가 열팽창으로 인한 균열과 화학적 변화가 일어나 내구력이 급격히 떨어져 쉽게 부스러지게 된다.
유럽의 민가, 목조건축
유럽의 목조교회 Hronsek
서양 건축도 중세/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석조 아치와 돔 구조가 건축에 대대적으로 쓰이기 전에는 목조 골격에다 석재를 혼용했고,[21][22] 석조 아치 건축도 대형 종교건물/왕궁에나 주로 사용했지, 그밖의 많은 부분에서 목조가 많았다.[23] 그리고 같은 서양 건축도 목재자원이 풍부한 동유럽/북유럽 국가들의 경우 지리적/환경적인 이유로 목재가 많이 사용되며,[24] 건조한 기후로 수목이 자라기 힘들어 대형 목재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남부 유럽으로 갈수록 줄어든다. 즉 지리적/환경적 문제와 직결되는 재료수급 문제로 인한 것이다. 미국만 하더라도 근대에 시카고 대화재로 도시 전체가 홀라당 다 타버린 사례가 있고[25], 현재에도 미국, 일본, 호주, 유럽등의 거주용 건축물의 절대 다수는 목조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자세한 것은 목수 항목 참고.
벽돌사용의 경우 알고보면 의외로 조선왕조실록 전체에서 벽돌의 사용에 관한 기록이 상당히 자주 나오고, 수원화성 이전에 전축성 건설도 몇 번 있었다. 그리고 벽돌 사용이 많았다고 하는 삼국시대에도 벽돌의 사용은 국영사찰의 장식벽돌이거나, 일부 성곽과 백제의 남조식 무덤 등의 국가의 지원을 받아 건축되고 관리되는 건물들이었다. 이는 사용빈도의 차이는 있어도 조선시대에도 큰 차이가 없었다. 조선시대에 벽돌 사용이 중국처럼 많지 못했던 이유는 (1)조선의 토질상 중국 화북지역만큼 낮은 온도에도 벽돌이 쉽게 만들어지지 않아# 조선후기 중국식의 벽돌제작전용 원추형 가마 도입 전까지 좋은 벽돌 만들기가 힘들었고 (2)대륙성 기후인 중국 화북지역보다 습기가 많아 벽돌이 흙에 잘 붙어있지 않았고[26][27] (3)자본주의와 상공업의 충분한 발달이 되지 않아 벽돌과 관련 산업에 대한 민간투자가 부족해 민간에 벽돌이 대중화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비록 조선후기에 들어 중국건축의 영향과 국가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벽돌이 보급되기는 했지만, 이 경우에도 담장이나 조선 초중기와 마찬가지로 기단 만들 때, 종묘에서처럼 조선 후기 등장한 화방벽을 만들 때 종종 사용되는 정도로 끝났다. 우리나라에서 벽돌이 완전히 대중화된 것은 관련 기술과 자본이 들어온 개화기~일제강점기부터였다.
사실 이런 온라인의 비판은 다분히 꼬투리 잡기에 가깝다. 굳이 이런 식으로 꼬투리잡자면 북유럽 고대건축은 "어휴 무식한 통나무덕후들"로, 로마건축은 "어휴 인장력 떨어지는 돌에만 하앍거린 아치덕후들"식으로 원한의 무한루프가 이어진다. 목조건축이라는 이유로 깐다면 일본 건축도 까야 일관성이 있다. 하지만 목조건축 까들의 대부분은 한국 건축만 까고 있다. 목조건축이 무조건 열등하다고 치면 건축 중 제일 우월한 것은 목재를 가장 적게 쓰는 아프리카와 중동 건축이다. 이쪽은 기후상 거의 흙과 돌만으로 지으니. 하지만 이쪽도 까자면 아프리카 전통 건축은 커다란 두꺼비집에 통나무를 삐죽삐죽 박아놓은 꼴이고, 중동 건축은 로마 건축처럼 돌과 아치, 돔덕후들이 된다. 건축이란 건 각 국가/집단의 자연 환경과 문화에 따라 각각의 장단점과 특색을 띄는 것이지, 쓸데없는 꼬투리만 잡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행동이다.
더불어 나무로 지어져 열등하다면 중국과 일본, 아시아, 그리고 유럽이나 아랍도 서민층은 나무로 지은 집이 대다수였으므로 인류의 대부분의 전통가옥은 모두 열등한 건물이 된다.
- ↑ "조금도 중국 본계의 양식을 이탈함이 없으나 또한 향토색의 수이(殊異)를 따라 다소 상위(相違)함이 있다. 일례를 들면 지붕의 곡선이 중국의 그것보다는 완만하여졌고 일본의 그것보다는 굴곡 있어 보이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향토색을 구비한 조선건축이 타방인국(他方隣國)에도 영향함이 있는가 하면 우리는 그것을 인정할 수 없다. 또 중국의 그것과 다른 독창이 있느냐 하면 그것도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조선건축은 중국양식의 일퇴화(一退化)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밖에 없다. 조선은 중국의 양식을 전부 포괄하여 그것을 변형시키지 못하고 다만 조선의 힘이 자라는 한에서 그를 섭취하고 말았다. 이것이 조선 건축의 동양에 있어서의 지위다." - 고유섭, 조선건축미술사
- ↑ 참고로 이 고유섭(1905~1944)선생은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미학 연구의 초석을 닦은 선구자로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자세한 사항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를 참조. 한국을 누구보다 사랑한 사람이 이런 평가를 내릴 정도면...
- ↑ 사용하긴 한다. 박공 서깨래의 처짐을 방지하고자 지네철을 이용하여 고정시키는 경우가 발견된다. 지붕 상단에 달린 지네모양 금속부착물이 지네철. 지네철을 사용하지 않을때는 건물 외부에 처마를 받치는 보조기둥을 쓰거나, 건물 안쪽에 강다리라는 나무 고정장치를 쓰거나 돌을 끼워 눌러 고정시킨다.
- ↑ 조금 있는 것들도 대부분 문에 다는 돌쩌귀나 문고리, 아니면 건축물이 완성된 후 겉에 다는 장식성이 강한 철물 일부 정도다.
- ↑ 건물이 커질수록 지붕도 커질 수밖에 없는데, 무게는 부피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물리학적인 법칙상 지붕의 무게가 기하급수적으로 늘 수밖에 없고, 그에 비해 제목의 크기는 한계가 발생한다. 이는 대량식 구조의 단점이며, 한국, 일본, 중국이 모두 겪는 문제다. 일본의 경우에는 기둥은 얇고 그 수를 적게 하는 방법도 가지고 있지만, 이 경우에는 가로로 배치된 보의 크기가 커지며, 높은 공간은 거의 포기해야 한다. 히가시혼간지 등을 참고. 이런 동아시아 전통 건축의 딜레마는 서구 건축에서는 트러스 구조와 공학목재의 사용 등으로 극복하고 있다.
- ↑ 인건비와 마진율이 논란이 되는데, 한옥시장 자체가 협소하다보니 정확히 추정, 파악되는 것이 없다.
- ↑ 돌너와집 제외. 해당 항목 참조
- ↑ 초가집도 기와집에 비해 지붕무게가 가볍지만 상대적으로 가볍다는 것이고 초가집 지붕도 중량이 많이 나간다. 최종 마감재가 기와가 아닌 짚/억새란 점을 빼면 구조가 기와집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짚을 써서 생기는 아이러니한 단점이...여름, 겨울에 폭우 및 폭설이 쏟아지면 안이 비어있다는 짚의 특성 때문에 물기를 많이 흡수하게 되어 갑자기 늘어난 지붕 중량때문에 집이 폭삭 주저앉을 수 있다. 물론 이런 극단적인 경우는 드물지만 말이다.
- ↑ 동기와를 썼다 하더라도 반년만 지나면 부식되어 일반기와와 얼핏 비슷해보이지만, 용마루 같은 물이 닿지 않는 곳을 유심히 살펴보면 구리 특유의 붉은 빛이 도니 식별이 가능하다.
- ↑ 이들 목탑은 현대의 20층대 아파트 수준 높이를 자랑하는 건축물로서,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는 구조였다.
- ↑ 대표적으로 경복궁 팔우정과 향원정
- ↑ 고려 충렬왕 때 관후서의 '도선 일기'에 의하면 "땅은 다산(多山)을 양, 희산(稀山)을 음. 옥(屋)은 고루(높은 다락)를 양, 평옥을 음이라 한다. 우리 나라는 원래 산이 많기에 고옥을 지으면 반드시 국운이 쇠퇴를 부른다."고 한다.
- ↑ 뭐 회반죽도 넓은 의미의 시멘트에는 들어가긴 한다. 석회가루와 물, 고운 흙, 느릅나무 접착제, 잘게 찢은 한지 등을 섞어 만드는데, 석회와 석고가루를 주성분으로 만든 초기 이집트 시멘트랑 비슷하다.
- ↑ 작은 예를 하나 들어보자. 양반가 건물은 일반 민가와 달리 여름에 통풍이 필요할 때 위로 올려 바람이 잘 통하게 하는 덧문이 있고, 마루가 더 넓다. 하지만 그렇다고 민가에 통풍용 뒷문이나 마루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기본적인 구조는 동일하되, 덧문같은 부가적인 요소들이 없을 뿐이다.
- ↑ 당장 현재 남아있는 고건축 중에 전통양식이 그대로 남아있는 게 양반가 건축이나 고궁, 사찰 제외하면 얼마나 되는지 따져보자.
- ↑ 피라미드나 파르테논 신전과 비교해보면 그야말로 안습.
- ↑ 시멘트는 이미 피라미드 건축시부터 사용된 유서깊은 건축자재다. 현대건축에 와서야 주류로 쓰여서 그렇지. 우리나라의 경우 몽촌토성을 지을 때 흙과 석회를 60:40비율로 섞어 일종의 고대식 콘크리트를 만드는 증토축성법(蒸土築城法)으로 지어졌다.
- ↑ 멀리 갈 것 없이 서울이나 수원의 아치형 성문만 봐도 된다.
- ↑ 성 비투스 성당이나 까를 교 같이 사암을 사용한 건출물도 있지만, 아무래도 화강암의 강도와 무게는 못따라간다.
- ↑ 참고로 고구려의 성 중 백암성은 석회암으로 지어졌다. 이 성은 이름 그대로 하얀 색을 띠고 있어서, 성벽이 주저앉고 잡초가 자라는 지금까지도 그 아름다움을 뽐낸다.
- ↑ 석재는 풍화에는 목재보다 강하지만 인장력이 약하다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콘크리트가 왜 근현대에 들어 철골 콘크리트 기술 개발 전에는 지금처럼 주 건축재료로 쓰이지 못했는지 생각해 보자.
- ↑ 그 대표적인 예로 로마 판테온을 들 수 있다. 출입구 부분의 삼각형 파사드 부분은 분명 목조 골격이 버티고 있으며 그 안의 돔은 순수 콘크리트로 버티고 있으니 건축적인 변화상을 잘 보여준다.
- ↑ 사실 석조 아치 구조도 목재 골조가 전무하지는 않다. 금속공학기술의 발달로 강하면서도 적절한 탄성을 가진 철근이 등장하기 전까지 건물의 인장력을 버텨내는 데 가장 좋은 재료는 오직 목재뿐이었다.
- ↑ 추가로 목재가 단열성이 좋다는 점도 있었다.
- ↑ 미국은 개척시대 문화의 영향으로 목조주택이 의외로 굉장히 많다. 흰개미 구제 업체들이 괜히 때돈 버는 게 아니다.
- ↑ 김왕직 저, 알기 쉬운 한국건축 용어사전 참조.
- ↑ 동아시아에서 벽돌사용의 본좌인 중국 건축에서도 전축건축은 대륙성 기후면서 좋은 흙을 구하기 쉬운 화북지역에 특히 집중되며, 습기가 많은 남부로 갈수록 전통건축에서 벽돌 사용은 감소하고 흙벽이나 목조 건축이 발달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한국 건축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