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집

1 개요

볏짚, 밀짚, 갈대등으로 지붕을 엮어 만든 집. 선사시대에 본격적인 집의 형태가 생겨날 때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주로 서민들이 짓고 살았던 주택 형태이다.

여담으로 초갓집이라고 흔히 쓰지만 원래는 초갓집도 초가집도 아닌 초가 가 올바른 말이다.

2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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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특징

단열이 잘되어서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지만 지붕이 수시로 썩기 때문에 1/2년에 한 번씩 갈아줘야 했다[1][2]. 거기에다가 방역이 잘 되지 않던 시절에는 빈대같은 벌레 때문에 잠을 설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빈대의 경우는 초가가 원인이 생기는 게 아니고 외국에서 들어온 벌레라서 한 번 생겼다하면 DDT로 방역하기 전까지 없어지지 않는 건 기와집이나 양옥도 마찬가지였고 해방 이후 DDT로 방역한 이후에는 사라졌지만 초가에 생기는 문제의 벌레는 바로 굼벵이류였다. 지붕 이은지 조금만 오래되어도 천장에서 한 마리씩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이 벌레들은 약용이나 식용으로 좋다고...[3]VJ특공대에서 관광지용 초가집 지붕을 보수하는 일꾼들이 오래된 초가 지붕에서 나오는 이런 벌레 애벌레들을 기름에 볶아서 좋아라 먹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그중 나이가 많은 일꾼은 어릴적 초가집 살때 지붕고칠때마다 이런 벌레 나오는 걸 볶아먹는 추억이 흔했는데 이젠 이런 관광지용이나 봐야지 먹을 수 있다며 아쉬워했다.

소박하면서도 워낙 흔했기 때문에 현대에 와선 초가집 자체가 옛 조선 민중들의 상징처럼 되었다.

4 현재

의외로 1960년대까지도 초가집이 많이 남아있었다. 이유는 당대에는 현대식 가옥이나 기와집같은걸 건축하기에 건축비가 많이 들었는데 일제시대때는 인구의 절대 다수가 소작농에 문맹이었고, 독립 이후로도 상당기간 세계 최빈국이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현대식 가옥이나 기와집을 짓고 살만한 사람들이 적었다. 더군다나 초가집은 매우 구하기 쉽던 재료로 만들었던데다가 농촌인구가 전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시절이어서 힘든 일이 있을때면 상부상조하는게 보통이었기에 인건비도 별로 들지 않았고, 설사 도시에 살더라도 농촌문화의 영향이 남아있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건축비가 적게 들었고 초가집은 그냥 판잣집을 짓는것에 비해서 (여름에 벌레가 뒤끓고 겨울에는 화재가 날 위험도 있었지만) 단열도 잘 되었다. 그래서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때 서양의 문물이 대거 들어와서 서양식 건축이 대세를 이루게 될 때에도 돈이 없던 당시 서민층으로써는 초가집을 짓는게 집을 마련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으며[4] 그래서 1970년대 초엽까지는 도심 중심지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초가집이 즐비했다. 다만 지붕갈기 귀찮은 점은 존재했기 때문에 50~60년대에는 페인트 비슷한 화공약품을 뿌리기도 했다. 이걸 뿌리면 1년은 더 버틸 수 있었다고.

그러나 새마을운동[5]의 여파로 초가집을 가난의 상징이라며 그 많던 초가집들이 대규모로 허물어지거나 지붕을 슬레이트와 기와 지붕으로 갈아엎었기 때문에 7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농촌에서도 초가집을 찾아보기 힘들어지게 되었고, 그 이후로는 하회마을, 양동마을 낙안읍성 같은 일부 보존된 전통마을이나 민속촌 같은 데서나 볼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이런 곳들은 기관에서 지원금을 받거나 관광산업으로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유지하고 있는 거라고 한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은 초가집을 가난의 상징으로 여겨서 초가집들을 대규모로 갈아엎었지만 정작 초가집들이 대거 철거되고나서부터는 뭔가 허전햇는지 간간히 초가집을 그리워하는 말을 하기도 했다나 뭐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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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지금은 상상이 전혀 안되지만 1980년대 초반에는 강남구 대치동에도 초가집이 존재하였다! 이 사진은 참고로 현재의 은마아파트뒤, 하이스턴 아파트 자리에서 촬영되었다.

북한도 한발 앞서서 1960년대에 도시지역에 아파트를, 농어촌 지역에는 문화주택이라는 현대식 가옥을 대대적으로 보급하면서 초가집이 많이 줄어들었다. 허나 남한처럼 초가집을 대대적으로 없앤 것도 아니어서 초가집 보기 힘들어진 남한과 다르게 북한에서 아직도 상당수 지역에서 초가집을 비교적 흔하게 볼 수 있고, 90년대 이후 북한의 경제난으로 주택사정이 급속히 악화되고, 시멘트도 귀해지면서 초가집도 다시 늘어났다고 한다.

5 해외에서

일본에서는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1950년대까지는 초가집이 상당히 흔하게 존재했지만 1950년대와 60년대에 출산율 저하와 이촌현상으로 농촌공동화 현상이 일어나면서 일손이 달리게 되고, 삼나무 가격도 상승하는 바람에 현대식 주택으로 대부분 교체되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시라카와고 마을이 대표적인 일본의 초가지붕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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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네덜란드 등 유럽에서도 생각보다 많이 찾아볼수 있다. 이쪽은 하프 팀버나 벽돌집에 갈대지붕을 올려놓은 형태가 많다.

6 기타

7 관련 문서

  1. 강가에 사는 사람들의 경우 볏집보다 덜 썩는 갈대를 대신 사용하기도 했다.
  2. 사실 갈대보다는 억새를 더 많이 사용했다. 갈대집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억새집인 경우가 제법 있다. 갈대집이든 억새집이든 초가와는 비교가 안 되게 오래간다. 초가의 경우 최소한 1년에 한 번은 지붕을 교체해 줘야 하지만 억새나 갈대의 경우 잘 이으면 4, 50년도 간다고 할 정도다. 다만 지붕을 얹을마큼 대량으로 구하는 게 어려워 재료를 대량으로 구하기 가능한 곳에서만 볼 수 있다.
  3. 그래서 간식으로 꽤 먹었다고 하며, 가뭄이나 홍수로 작황이 안 좋았다거나 하는 이유로 보릿고개가 찾아왔을때 구황식품으로 먹었다고도 한다.
  4. 물론 당대의 돈 있는 사람들은 기와집이나 서양식 주택을 짓고 살았다. 일본인들은 일본식 주택(적산가옥)에서 살았고
  5. 새마을노래 가사를 봐도알겠지만 초가집을 없애자는게 당시 정부의 정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