商鞅, BC 390 ~ BC 338
중국 춘추전국시대 진(秦)의 법가 정치가.
중국의 3대 개혁가 중 한 명으로 다른 두 명은 관중과 왕안석이다.
1 인생 전반기
본명은 공손앙(公孫鞅)인데, 성이 공손씨인 이유는 위나라의 공족이었기 때문이다. 또 위나라 군주의 서자 출신이라 희앙 또는 위앙으로 불리기도 한다. 상앙이라는 이름은 진에서 임용된 후 큰 공을 세워 받은 영지가 옛 상나라 땅이기에 붙은 이름이다. 그리고 여기서 나오는 위(衛)나라 출신이라는 소리는 삼진(三晉)에서 분열되어 나온 위(魏)나라가 아니고, 주나라 무왕의 아우 강숙 봉(희봉)을 시조로 하는 원래는 강대국이었지만 공족들간의 다툼으로 약해져 약소국이 된 국가 출신이라는 이야기다.
사기에 따르면 어렸을 때부터 형명학에 관심을 가졌고, 성인이 되어서는 고국을 떠나 위(魏)나라의 재상인 공숙좌를 섬겨 그의 가신이 되었다. 공숙좌는 그의 자질을 알아보고 위 혜왕[1]에게 추천했지만 혜왕이 공손앙을 시원치 않게 보자 공숙좌는 병으로 죽기 전에 문병온 혜왕에게 '왕께서 공손앙을 쓰지 않으시려거든 반드시 죽여서 후환이 없게 하소서'라고 조언하고 공손앙에게는 '왕에게 그렇게 말했으니 빨리 떠나도록 해라'라고 말했다.
공숙좌의 말을 들은 공손앙은 "왕이 저를 쓰라는 말도 안 들었는데, 죽이라는 말은 듣겠습니까?"라고 말하며 여느 때와 다름없이 위나라를 떠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혜왕은 "재상양반이 병이 심해지더니 별 듣보잡을 인재라고 추천하네? 아무래도 죽을 때가 다 돼서 노망난 듯"이라 말하고 공손앙을 내버려뒀다.
2 진에서의 변법
2.1 인정을 받기까지
결국 공숙좌는 병석에서 세상을 떴고, 공손앙은 진 효공(孝公)이 내건 구인령을 듣고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향했다.
각처에서 몰려온 제자백가의 인재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상황에서 효공과 대면할 수 있는 지름길을 찾으려 연구한 끝에 효공이 총애하는 신하인 경감(景監)이란 자에게 줄을 대서 기다리지 않고 바로 효공을 알현할 수 있었다. 이 당시의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처음 효공을 만났을 때 삼황오제의 도인 '성인의 도'를 설파했으나, 단기간에 강대국 반열에 올라가기를 원한 효공은 언제 이루어질 지 모르는 이런 방법 따윈 아웃 오브 안중이었고 내내 코를 졸며 졸았다.
상앙은 재차 경감에게 부탁해서 효공을 두번째로 만났는데, 이번에는 하-은-주 3대의 성군들의 정치철학인 '천자의 도'를 설파했다. 그러자 효공은 약간 관심을 기울이는 듯 했으나 그다지 솔깃한 기색은 아니었다.
사정사정해서 세번째로 효공을 만난 상앙이 '패자의 도'를 설하니 비로소 효공은 크게 기뻐하며 상앙을 중용했다고 전한다. 삼고초려의 역관광 버전
물론 사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지만 실제로는 상앙의 사상을 생각할 때 이게 사실이라면 첫번째, 두번째 만남에서 효공이 좋아하고 중히 쓰려 했다면 오히려 상앙 쪽에서 사환을 사양하고 떠났을 지도 모르겠다.
효공의 열렬한 지원을 받아 상앙은 법치 철학에 근거한 여러 가지 개혁을 실행하였다. 상앙은 군제, 세제, 법제를 정비하고 토지제도와 군현제를 시행하는 대개혁을 단행했다. 이로 인하여 진나라는 주변국에서 군사강국인 중앙집권 국가로 변화하였다. 행정적 변화는 농업에 중점을 두어 진행되었으며 귀족의 권력은 줄어들었다.
상앙은 그렇게 진나라가 전국시대를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으며 그 덕분에 옛날 진(晉)나라에 빼앗겼던 황하 이서 지역을 손에 넣을수 있었다. 이 지역은 알짜 지역으로 일명 하서(河西) 지역이라고도 한다. 원래 효공의 조상이었던 목공이 진(晉)나라의 내분을 수습해 주고 진 혜공(문공의 이복 동생)을 군주로 세워주는 조건으로 황하 이서 지역을 받기로 했는데 결국 받지 못하자 힘으로 결국 얻게 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진나라 문공의 아들인 진 양공 시대에 이걸 빼앗겼고 진나라가 분열된 후 위(魏)나라가 차지하고 있다가 손에 넣은 것이다. 다만 이를 상앙의 군사적 능력이라 하기는 뭐한 것이, 이 시기가 손빈이 군사로 있던 제나라 군이 마릉에서 방연의 위나라 군을 개발살내면서 위나라의 군사력이 큰 타격을 입은 상태였고, 하서를 확보하는 과정 또한 이곳을 지키고 있던 위나라 공자 앙과 자신 사이의 위나라 시절 친분을 이용해 사기를 쳐서(…) 탈취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군사적 능력보다는 외교능력에 가까운 일. 어찌되었든 큰 공적이므로 그 공적으로 열후에 봉해지고 상 지역을 봉토로 받으면서 이때부터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이름인 '상앙' 또는 '상군'이라 불리게 되었다.
2.2 개혁의 내용
상앙이 추진했던 개혁, 즉 변법은 당시 법가사상을 바탕으로 강력한 부국강병을 목표로 하였다. 천대받는 서생이었던 그는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가 자신의 정치사상과 법가를 실현할 나라로 진을 선택했다. 또한 강력한 부국강병을 원했던 효공과 뜻을 맞추어 2류에 불과했던 진나라를 전국칠웅 최강국으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두 차례에 걸쳐 실시된 상앙 변법의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십오제(什伍制)[2] : 5/10가구를 한 단위로 묶어 상호감시 체제를 만들었다. 이는 납세와 징병의 단위가 되었고, 한 집에서 죄를 지으면 한 단위로 묶인 나머지 네 집도 연좌제를 적용해 처벌함으로써 상호 감시용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이 제도는 유교 정책을 폈던 조선의 오가작통제와 같이 후세의 많은 동아시아 국가들, 심지어는 근현대 조선총독부와 북한의 독재정권도 활용할 만큼 효과가 좋았다!
- 억상정책 : 상앙은 강력한 중농주의자로 상업을 농업보다 낮게 보고 농업에 전념하기 위해 상업을 강력히 탄압했다. 당장 농업의 생산량을 늘린 사람은 요역을 면제해 준 반면, 상업을 하다가 실패한 사람은 그 처자를 노비로 삼았다. 그러나 상업을 매우 하찮게 여기지는 않았기 때문에 후에 진나라가 어느 정도 국력이 상승하자 농업과 상업의 균형있는 성장을 꾀하였다.
- 노예제 폐지: 노예제를 폐지하고 지주들의 노예를 해방시킴으로써 이들의 힘을 약화시킴과 동시에 양민의 수량을 확보하여 재정을 확충하였다.
- 군공수작제 : 누구라도 전쟁터에서나 국가를 위해 공을 세웠다면 그에 마땅한 작위를 내렸고, 반대로 군공이 없으면 귀족이라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사회로 만들었다. 이는 국가에 대한 백성의 전쟁참여도 증진 및 민심을 모으기 위함이었으며, 반대로 국가나 군주에 반하는 행위를 했다면 삼족을 멸하는 등 각종 엄벌을 내렸다.
- 예를 들어 불이 났을 때 불을 끄는데 공헌했거나 불을 끄다가 죽었다면 전쟁터에서 공을 세우거나 공을 세우고 죽은 걸로 인정했으나, 반대로 그렇지 않았다면 전쟁터에서 도망치거나 반역을 꾀하는 걸로 규정했다. 이 때 병사가 벤 적의 머리를 작위 1등급과 동등하게 적용하게 하면서 전시에 벤 적군의 머리를 '수급(首級)'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즉 "수급을 취했다"라는 말은 동시에 엄마 나 승진했어라는 의미.
- 악습 및 구습 타파 : 진나라에 내려오는 잘못된 악습이나 오랜 전통을 타파함으로서 백성들의 의식 향상을 도모하였다. 이 덕분에 진은 오, 월, 초나라 같이 변방 오랑캐가 세운 야만국이란 중원 사람들의 기존 인식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상앙은 일명 '신상필벌'로 요약할 수 있는 법제 개혁을 단행했으며, 이 때 제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행한 일화가 있다.
수도 남문에 나무를 심어 놓고 이 나무를 옮기는 자에게 금 50근의 포상을 내리겠다고 했다. 이 터무니없는 포고에 모두가 이뭐병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자 이에 포상을 100근으로 올렸다. 어느 사람이 미심쩍어하면서도 이를 행하자 즉시 그에게 약속한 상을 내렸다. 이후 상앙이 다시 한번 같은 포고를 내리자 사람들이 개떼 너도 나도 앞장서서 달려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도 있다. 상앙이 이렇게 법 제도를 확실히 하자 시민들은 그 제도를 칭찬했는데 병사들을 시켜 그들을 잡아오게 했다. 이유인 즉 "법을 싫어하는 자 못지않게 찬양하는 자도 잡아야 한다"라고. 즉 이런저런 감정을 넣지 말고 그냥 지켜라, 라는 의미다. 하지만 상앙은 오히려 이 때문에 자신이 위기에 몰리게 된다.
효공과 상앙의 강력한 추진에도 불구하고 이 변법을 좌초시키기 위한 시도는 여러 번 일어났다. 특히 진 최고의 유력부족인 맹, 서, 백씨 부족의 반발과 당시 태사였던 감룡과 두지의 반대로 변법은 여러 번 중단 위기를 맞는다. 효공에게 이르는 반대 상소만 하루 수천 개였다 하니 실로 나라를 뒤흔드는 것이었다.
그래도 상앙은 변법에 대한 반대자는 용서치 않았고 변법을 어길시 강력한 엄벌주의로 대처하였다. 이 변법 앞에서는 당시 태자였던 영사[3]도 예외는 아니었다. 태자가 변법이 불편하다며 일부러 어기자 스승이었던 공자 건(효공의 형이자 태자의 백부)의 코를 베는 형벌을 내렸고 다른 스승에게는 먹으로 죄명을 얼굴에 새기는 형벌을 내렸다. 이 일로 공자 건은 영원히 은둔했는데 나중에 태자가 다시 법을 어기자 발뒷꿈치가 잘리는 월형까지 받았다. 당연하게도 그와 태자는 상앙에 대한 증오를 품게 된다.
일단 20년 동안 부지런히 변법을 추진한 결과로 하서 지역을 수복했고 당시 마릉 전투이후 흔들리는 위나라를 치자는 주장을 해 군사령관에 임명된 후 당시 패권 국가였던 위(魏)나라를 제압하고 패자로 등극하게 되었다. 반대로 위나라는 이 때부터 약해졌고, 하서 지역을 잃어 도읍 안읍이 위급해지자 대량으로 천도하게 된다. [4]
또 원래 대대로 수도였던 옹 땅은 협소하고 교통이 불편했기에, 지금의 서안(장안) 부근에 있던 함양으로 천도함으로써 중원으로 진출할 발판을 마련한다. 함양은 나중에 효공의 5대손인 시황제 때는 천하 통일 이후로 천하 굴지의 도시로 발전했으며 시황제의 손자인 진왕 자영이 항우에게 피살되고 함양이 파괴될 때까지 수도로 번성했다. 함양이 훗날 장안이 되어 전한과 당의 수도로서 번영을 누린거야 유명한 이야기.
마지막으로 군사력이 매우 강대해졌는데, 양인이 많아지면서 군사수가 증대했고 재정이 확충되어 강력한 군대를 만들 수 있었다. 상앙은 이 공으로 대량조에 올라 효공과 함께 명실상부한 사실상의 공동군주가 된다.
3 몰락과 최후
그러나 후원자이자 지기였던 효공이 세상을 떠나자 점차 위태로워지기 시작했다. 특히 상앙에게 증오를 품고 있던 태자가 즉위했다. 태자였던 혜문왕은 왕을 자칭하고 상앙의 반대파를 규합했다. 이들은 이제껏 상앙의 변법에 반대를 해 온 진나라의 주요 원로 보수 세력이다. 진 목공 이후 진나라의 정치는 원로세력과 왕권의 균형을 통해 이루어졌으나, 점차 그 균형이 무너져 원로세력이 득세하게 되었다. 하지만 효공 이후 왕권을 다시 회복하고자 변법을 시행하였다. 이 외에도 혜문왕 대신 벌을 받은 공자 건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당연히 상앙에게 원한이 만땅인 상태인지라 상앙을 탄핵했다. 하지만 정작 상앙의 법은 쓸모가 많다면서 폐지하지 않았다. 일종의 토사구팽.[5]
이렇게 하루 아침에 반역자가 되자 일단 위(魏)나라로 망명을 하기로 하고 국경이었던 함곡관을 밤에 몰래 넘으려고 했다. 그러나 "새벽 첫닭이 울 때까지", 즉 어두워질 때부터 날이 샐 때까지 관문을 여는게 금지되어 있는 게 진나라의 법이었기에[6] 할 수 없이 그날은 여관에 머물고자 했다. 그러나 여행증이 없는 사람은 받아줄 수 없다.어기면 주인이 엄벌을 당한다.는 것도 진나라의 법이었기에 그는 거절당하고 만다. 그런데 이런 법들을 만든 것이 상앙 본인이었다.(…) 자승자박의 극치. 결국 자기가 만든 법을 자기가 어기려고 했으며 자기가 만든 법 때문에 자기의 목숨이 위험해지게 된 여기서 나온 고사성어가 작법자폐(作法自斃)다.
어찌어찌하여 위나라로 갔지만 위나라 사람들은 그가 공자 앙을 속이고 위나라 군사를 패배시켰던 일을 잊지 않고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상앙이 다른 나라로 떠나려고 하니 위나라 사람들은 그를 다른 곳으로 보내면 진나라의 공격이 있을까봐 그를 다시 진나라로 보냈다.꼼수의 말로
상앙은 할 수 없이 살기 위해서 일단 자신의 영지였던 상 땅으로 가서 군대를 모았는데, 강대한 진나라 군대와 맞설 자신이 없어 일단 약소국이었던 정나라를 공격해 영토와 인력물자를 확보하려고 했으나 민지라는 땅에서 혜문왕의 군대가 그의 배후를 쳤기에 대패하고 결국 사로잡혀 비참한 최후를 당하고 만다. 그의 시체는 함양으로 끌려가 그대로 거열형에 처해진 다음 갈기갈기 찢겨진 시체는 경계 목적으로 각 지방에 보내졌고 그의 삼족도 연좌되어 몰살당했다.
그는 강력한 법가만이 모든 걸 이룰 수 있다고 믿었으며 교육과 교화는 전혀 필요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간의 마음이나 인정 등은 불필요한 것이라 생각했고 반대파를 포용할 줄 몰랐으며 그들과 토론할 줄도 몰랐다.[7] 그렇기에 오직 자신의 생각만이 옳고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강력한 추진력으로 단시간에 성과를 만들어내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들에게 증오를 받았고 그의 반대파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한마디로 융통성을 모르는 정치인이라고 해야 하지만 어쨌든 그의 업적은 단숨에 진나라를 초강대국으로 부상시켰고 혜문왕의 현손인 시황제 때 이르러 천하통일을 하게 되는 원동력을 만들었다. 이는 혜문왕이 그를 죽이긴 했으나 정책은 그대로 계승했기 때문.
상앙은 생전에 상군서라는 책을 집필하여 남겨놓았다. 이는 전국시대 역사연구에 아주 중요한 사료가 되며 상앙 자신의 생각을 아주 잘 알 수 있어 귀중한 책이라 할 만하다. 다만 선진문헌이 다들 그러듯 상앙 본인이 쓴 것이 아닌 것으로 추정되는 부분이 있다. 비슷한 예로 여불위가 쓴 여씨춘추가 있다. 단 여씨춘추는 여불위 혼자가 아니라 식객 3천명이 함께 저술한 일종의 백과사전이었다. 현존하는 여씨춘추가 여불위가 쓴 게 아니라고(혹은 여불위 사후에 저술된 거라고) 의심받는 것은 나중에 여불위 사후의 일도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4 기타
상앙을 다룬 드라마로 대진제국이 있다.
5 관련 항목
- ↑ 맹자의 첫머리에 나오는 양 혜왕이 이 사람이다. 위나라가 영토를 상실하면서 수도를 대량으로 옮겼기 때문에 이 시기 이후 위나라를 수도의 이름을 따서 양나라라고도 불렀다.
- ↑ 십오(十五)가 아니다. 갖은자이기도 하면서 각각 "열 사람", "다섯 사람"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 ↑ 진나라 군주의 성씨는 영씨였다. 이 자는 나중에 효공의 뒤를 잇는 혜문공이 되는데 왕을 칭했기 때문에 혜문왕 혹은 혜왕이라고 한다.
- ↑ 이 과정에서 꼼수가 있었으니 위나라에서 공자 앙(卬)을 사령관으로 삼아 맞섰는데 때마침 상앙과 친분이 있었던 관계로 상앙은 평화회담을 하자고 해 그를 유인해 사로잡은 후 복병을 보내 위나라 군대를 크게 무찔렀다.
- ↑ 상앙은 적을 너무 많이 만들었고 진 혜문왕은 아버지 진 효공이 죽자 이때가 기회다면서 그 동안 권력을 누리다 상앙의 개혁에 의해 권력을 잃은 원로 세력들의 반격에 진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그들을 끌어 안을 필요성이 있었다. 혜문왕은 상앙을 증오했지만 또한 존경을 한 것을 알 수 있는게 이 대목이다. 50년 전에 초 도왕의 총애를 받으면서 초나라를 변법을 통해 부국강병하게 만들어 다시 초 장왕 이후 전성기를 일으킨 오기가 도왕이 죽자 뒤를 이어 즉위한 아들 숙왕과 원로 세력이 오기를 죽이고 그가 시행한 정책들을 모조리 폐지한 것만 봐도 혜문왕의 왕으로서의 그릇이 대단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즉 자신의 감정보다 나라의 이익을 생각한 것이고 즉위 초에 상앙을 제거하면서 본인의 원한도 풀면서 원로 세력들과 정적들의 한을 풀면서 국정을 안정화시킨 뒤 변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상앙의 변법을 폐지하고 예전으로 돌리려던 감룡과 두지가 중심이 된 원로 세력들의 통수를 치고 이에 반발한 원로 세력들도 제거해버렸다. 애초에 혜문왕은 비록 자신이 어렸을 때 처벌당했지만 상앙의 변법으로 진나라가 발전하는 것을 보고 존경을 표했던 변법 신봉자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며 이런 뛰어난 재치로 국정을 안정시키면서 상앙의 변법은 유지가 되었던 것이다. 이게 바로 진나라와 초나라의 차이였다. 결국 초나라는 숙왕 때부터 쇠약해지게 되며 진나라는 혜문왕 때부터 전국칠웅 최강국이 되면서 혜문왕의 현손인 진 시황제의 천하통일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 ↑ 나중에 혜문왕의 아들이었던 소양왕 시대에 그 유명한 제나라의 맹상군이 진나라에서 달아날 때도 이런 상황에 놓였는데 그의 식객 중에 닭 울음소리를 기똥차게 흉내낼 수 있는 자가 있었기에 속아 넘어간 수문장들이 문을 열어줘서 달아날 수 있었다.
- ↑ 자기 변법을 찬양한 사람마저 족쳤다는 걸 보면 그냥 인간 감정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