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칠웅

중국의 역사
中國史
기원전 1600 ~ 기원전 206기원전 206 ~ 907년
907년 ~ 1644년1616년 ~ 현재
중국의 역사 기원전 1600 ~ 기원전 206
기원전 1600 ~ 기원전 1046상(商)은(殷)
기원전 1046 ~ 기원전 256주(周)서주(西周)
동주(東周)/춘추전국(春秋戰國)춘추(春秋)
전국(戰國)
기원전 221 ~ 기원전 206진(秦)
후초(後楚)

戰國七雄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에 돌입하면서 굳어진 7개 나라들을 가리키는 말.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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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 (楚), (齊), (燕), (趙), (魏), (韓) 이렇게 7개의 국가로 되어 있으며 이들 국가순은 최강국인 진나라를 기준으로 반시계방향으로 읽은 것이다. 실제로도 최고 전성기때의 국력은 이 순서와 맞아 떨어진다. 때문에 한중일 세나라에서 중국사를 배울때 이 순서로 외우게 하는 것이 현재 정석으로 자리매김 해버렸을 정도. 아마 고등학교 세계사를 배운 학생이라면 이 순서가 별로 낯설지만은 않을 것이다. 화학시간에 멘델레예프 주기원소 순서를 배우는 것처럼 거의 외우다 시피하는 순서다.

참고로 이 일곱 국가들이 주요 강대국이었을 뿐, 이외에도 중산 , 송, 정 등 다른 국가들이 있었다. 왕실도 더이상 관심을 못 받아서 그렇지 두개로 쪼개진채 전국시대까지 남아있었다. 흔히 보는 전국칠웅도는 한눈에 보기 좋게 이런 듣보잡약소국들을 표시하지 않은 것이다.

각 나라의 전성기와 쇠퇴기를 나열해 보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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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전성기

진효공이 상앙을 중용한 이후부터 계속 전성기였으나, 진짜 전성기는 진소양왕 이후로 잡는 학자들이 많다. 장의의 연횡책이 성공하고 초회왕을 인질로 잡아두는 등 당시 헤게모니를 장악했다는 데 이의를 다는 학자는 전무하다.

2.2 쇠퇴기

상앙의 변법으로 줄곧 성장하여 쇠퇴기가 없었고,연합군을 조직하여 제나라를 2등 국가로 만든 소양왕 때에는 이미 전국최강자가 되어 결국 전국시대를 끝장내고 천하를 통일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진시황 사후에는 빠르게 쇠락하며 최초의 통일국이라는 명칭이 무안하게도 통일한지 20년도 안 되어 멸망한다. 이후 이어진 시기가 그 유명한 초한지의 무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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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전성기

춘추시대부터 전통적인 강자로 자리매김하였고,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장강 중류부터 하류에 이르는 모든 땅을 지배하게 된다. 말하자면 오나라와 월나라에 이르는 땅을 병합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했을 때는 초도왕 시절로 보는 시각이 대부분인데 이때 재상이 다름아닌 오기(오자)였기 때문. 그러나 오기의 죽음과 함께 쇠퇴기가 찾아오는데, 오기와 초도왕이 시행했던 변법이 워낙에 급진적이었 까닭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이 초도왕의 장례날 오기를 살해했다.

3.2 쇠퇴기

오기가 죽고나서 바로 쇠퇴기에 돌입하게 되고, 장의의 말재간에 놀아난 초회왕은 급기야 진나라에 끌려가 죽기 전에는 초나라 땅을 밟지 못하게되는 사태에 이른다. 그의 시호인 회(懷) 자체가 영(靈)보다 더 안 좋은 뜻을 갖고 있는 이유가 다 여기에 있다. 이 사건 이후, 전국사군자 중 한명인 춘신군 황헐이 개혁을 시도하지만 오기도 실패한 일을 황헐이 성공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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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전성기

최고 전성기는 제위왕, 제선왕 때로 보는 시각이 많은데 이유는 전국사군자 중 수위로 꼽는 맹상군 전문이 국정을 보좌하고 있었고, 병권을 맡고 있던 사람은 다름아닌 손빈이었다. 위나라 혜왕[1]을 쳐서 위나라로부터 땅을 할양받은 것은 물론이고, 이 시기에는 진나라조차도 자신들과 유일하게 견줄 수 있는 나라로 여겼을 정도니 이쯤 되면 말 다했다. 오죽했으면 진나라는 개나 소나 쓰던 왕 칭호 대신 서제(西帝)-동제(東帝)로 칭하자고 제나라를 꼬실 정도였다.[2]

4.2 쇠퇴기

제선왕의 아들인 제민왕이 쇠퇴기를 이끌었다. 맹상군을 시기해서 재상직에서 내려오게 하는 한편, 송나라를 치면서 삼진의 힘을 빌렸음에도 송나라 땅을 나눠갖는게 아까워 뒷통수를 치고, 연나라 왕 자지(子之)를 죽인 걸로도 모자라 연나라를 황폐화한 일은 최악의 실책이었다. 한마디로 천하를 상대로 혼자 어그로를 끌었다(…). 이 시기에는 손빈도 없었고, 맹상군은 제민왕에게 죽는게 두려워 조나라로 망명을 가 있었으니 말 다한 셈이다.

결국 연나라의 명장 악의가 5국 연합군을 구성하여 침공했다.[3] 당연하게도 제는 거와 즉묵을 제외한 모든 영토가 제압당하면서 7웅중에서 제일 먼저 제나라가 멸망당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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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전성기

연나라의 전성기는 연왕 자지가 죽은 이후에 연왕 쾌의 아들인 연소왕이 집권하고, 그 유명한 악의를 등용한 이후부터다. 연소왕은 악의를 참소하는 세자에게 되려 매질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 당시 진나라와 나란히 할 정도의 강대국이었던 제나라를 멸망 일보까지 몰아붙이는데 성공하였고, 거기에 진개가 고조선을 관광시켜 2천리 가까이 되는 요동지역 일대를 확보했으며 동호도 굴복시켰다.

5.2 쇠퇴기

연소왕이 죽은 이후에 악의가 참소당하고 제나라가 즉묵을 기점으로 다시 국토를 회복하면서 연나라는 아예 전국역사에 힘을 쓴 일이 전혀 없다. 그제서야 악의를 다시 데려오려 했지만 악의는 조나라에 망명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심지어 장평대전 이후 쇠망 일보직전까지 몰린 조나라를 공격했다가 되려 역관광 당했다(…). 이후 그나마 비중있게 나오는건 태자 단과 번오기, 형가가 중심이 되는 진왕 암살미수사건. 이 때는 거의 진나라가 탁치면 억하고 멸망할까 두려워하는 약소국 취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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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전성기

무령왕 때 흉노의 일부를 토벌하고 장성을 쌓았으며 이 시기 조나라는 함곡관 옆 동네임에도 진나라와 전면전을 벌인 일이 없었다. 또한 무령왕의 아들 중 하나가 전국사군자 중 한 명인 평원군 조승이고, 무열왕 사후 뒤를 이은 혜문왕도 집권 초기에는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혜문왕 시절에는 혜문왕의 동생인 평원군뿐만 아니라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3군인 염파, 인상여, 조사 등 걸출한 인재들이 함께 있었다. 게다가 인재들의 수준도 대단하여 염파는 전국시대 당시 손꼽히는 명장이었고, 조사는 그 염파가 승리를 장담하지 못한 진나라와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뒀다. 인상여는 진나라 역대 최강의 군주 소양왕과 그 신하들을 입으로 개관광을 보내며 기죽인 인재였다. 다른 건 다 제쳐두고 진나라와 인접국이면서 전면전을 하지 않았다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전성기라 할 수 있다. 물론 조나라-진나라 양측의 대군이 격돌했던 적이 있었지만, 위에서 언급한 진나라와의 전쟁은 엄밀히 말하자면 조나라 영토에서 싸운 것이 아니다. 한나라의 영토였던 연여(혹은 알여)에서 싸운 것이라 조나라 본토에는 피해가 전무했기 때문에 진나라에 대한 피해는 매우 적었다.

6.2 쇠퇴기

많은 사가들이 장평대전을 조나라의 멸망과 가장 많이 연관짓는데 왜냐하면 중국 역사 뿐만 아니라 전 세계 고대전사를 통틀어서 하룻밤새 40만이 넘는 군사가 생매장으로 몰살된 병크는 어디에도 찾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장평대전이 발발한 시기는 조나라의 재상인 인상여가 병으로 재상에서 물러나고, 염파와 동급으로 평가되는 마복군 조사는 아예 세상을 뜬 상태였다.

이런 쇠퇴기에 염파를 이어 조나라를 지켰던 이목이 진나라를 역관광 보내면서 조나라의 수호신이 되었지만, 조나라 최고의 간신이었던 곽개 때문에 이목은 조나라에서 탈출해 위나라로 망명갔고, 이목이 떠난 그 이듬해 조나라는 빛의 속도로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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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전성기

특이하게 7웅 중에서 전성기가 왕호를 칭하기 전에 있었는데, 위문후 시절에 중산국을 점령했을 때가 바로 그때이다. 당시에는 악의의 조상인 악양이 중산국을 점령함으로써 그 시기에는 제나라와도 비견할 정도. 또한 위문후의 주변 인물들이 하나같이 거물들이 즐비했는데, 예를들면 사마는 오기, 재상은 이극, 사구[4]로는 서문표 등이 있었으며 이 밖에도 인재 보는 데 당대 일인자라고 해도 무방한 책황이 있어서 위문후시절이 가장 강성하였다고 봐도 좋다. 당장 책황이 추천한 인물이 병법의 달인 악양과 당대 먼치킨 오기이다.
위문후 이후 별다른 병화를 입지않아 위혜왕 초기에 실질적인 국력은 가장 강했을 것이나....

7.2 쇠퇴기

위무후 사후 그의 아들 위앵과 공중완이 임금 자리를 두고 싸우다가 외국 군대까지 끌어오는 소동을 벌이면서 이미 조짐이 심상치 않았지만... 결국 위앵이 군위를 이어받고 나서 왕호를 사용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위혜왕(혹은 양혜왕)이다. 일단 벌인 사업으로는 조, 제나라와 싸워 이기고, 도성을 옮기고, 맹자를 초청하는 등 여러가지 일을 했다. 그런데 상앙이 위나라를 떠나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을 뿐더러 그 상앙이 위나라의 상어 땅을 뺏아 버리고, 월형을 받은 손빈이 제나라로 가버리게 하고 제나라에 선빵을 후렸다가 그 손빈에게 마릉에서 대군이 전멸에 가깝게 관광당하는 등 완전히 굴욕의 나날을 보내며 국력이 급속도로 쇠퇴한다.
사실 위나라의 쇠퇴기는 위문후의 뒤를 이은 위무후가 오기를 견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봐도 좋지만, 양혜왕때는 가히 화룡점정급이라... 이후부터 위나라가 전국시대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일은 아예 없다. 한나라와 마찬가지로 진나라의 땅셔틀화.

8

전성기와 쇠퇴기가 뚜렷하지 않은 유일한 나라. 바꿔 말하면 대체 이 나라가 딱히 뭘 한 게 없다(…) 그나마 한애후 시절에 정나라를 정복한게 전성기?
지형이 안습이라 옛 수도인 의양을 진나라에게 따이자 길이 막혀 나라가 세토막나고 급속한 좆망테크를 타게되었다.
사실 지도에서 한나라 위치만 봐도 답이 없겠지만.

덕분에 사방이 적국이라 전국시대 후기 진나라와 싸우면 진나라에게 성을 바치고, 제나라와 전쟁하면 데꿀멍하는게 이 나라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머리를 굴려서 토목공사로 진나라를 피폐하게 만들기 위해 토목기사 정국을 보내 운하를 건설하게 했지만 이는 도리어 진나라의 경제력이 급상승하게 만들어주는 돌이킬 수 없는 삽질이란 결과로 되돌아오고 만다(…). 자폭

한때는 연나라보다 강성했고, 왕호 또한 빠르게 사용했으나 결국 전국시대의 헤게모니를 이끈 역사는 단 한번도 없다. 여담으로 그런 나라 꼴을 보다 못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쓴 저작이 그 유명한 한비자다.

9 기타 창작물

만화 킹덤의 배경은 전국칠웅이다. 자세한 것은 해당항목 참고.

삼국지 12 PS3, 엑스박스 360버전, 파워업키트의 시나리오로 등장했다. , 다만 징기스칸 4처럼 전국칠웅의 유명한 일부 사람들만 나온다.[5] 진시황, 한무, 위앵, 옹의, 조옹, 전인제, 희평이 군주로 나온다.(각각 진, 한, 위, 초, 조, 제, 연) 국가가 7개이라서인지, 장수배치가 영 웃기고 하고 이상한데, 위나라는 군주의 성이 위씨라서 위연이 위나라 소속이고, 조운은 조씨라서 조나라 소속이고, 한현(!), 한호 한충은 성씨가 한씨라서 한나라에 소속 된 인것은 좀 웃긴다.(...)

그리고 이상한 곳에서 고증을 살린 것이 있는데, 마등일족은 조나라 땅 업의 재야로 나오는데, 이유는 마원조사의 후손이기 때문. 손오는 제나라 소속인데 손빈의 후손들[6]이라서 그렇다. 장막, 장익은 낙읍의 재야로 나오는데, 그 이유는 바로 한삼걸 장량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이벤트까지 있으니 소소한 재미를 느낄수가 있다.

다른 세력들이 모두 중원이나 하북 쪽에 몰려 있는 것에 반해서, 는 남쪽에 위치한 익주 및 형주, 양주를 쉽게 차지할 수 있기 때문에 비교적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
  1. 훗날 위나라가 대량(大梁)으로 천도하면서 국호를 양으로 바꿨기 때문에 양 혜왕이라고도 한다. 맹자의 오십보 백보 고사에 등장하는 양혜왕이 바로 이 사람.
  2. 다만, 제호를 칭하자고 꼬신 건 제민왕 재위기간 때의 일이다.
  3. 염파, 백기 등을 이끌고 쳐들어왔다는 건 소설인 열국지의 얘기다.
  4. 현 기준으로 본다면 대법관이 이에 해당한다.
  5. 특히 풍환, 모수, 조사, 상앙같은 인물들은 나오지 못했다.
  6. 다만 진수는 손오는 손빈의 후손들 것라고 추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