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원

강릉 김씨시조이자, 신라진골 출신으로, 현대에 남아있는 대부분의 김씨가 내물왕계인 것과 달리 이 사람은 태종 무열왕의 7세손이다.(6대손이자 7세손) 다만 문무왕의 후손은 아니고 무열왕의 차남 김인문의 후손이라는 설[1]과 무열왕의 3남 김문왕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는데, 강릉 김씨 족보에서는 김문왕의 후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김주원이 왕위 계승에 실패한 이후 원성왕대에 명주 군왕(溟州郡王)으로 봉해졌다. 명주는 강릉의 옛 이름이며 군왕(郡王)은 지역의 제후왕을 가리킨다.

그리고 김주원의 강릉 김씨를 중심으로 한 무열왕계 후손들이 몇몇 존재하고 있다. 무열왕의 혈통을 따지자면 지증왕-법흥왕-진흥왕-진지왕-김용춘-무열왕으로 이어지는 혈통을 가지고 있다. 강릉김씨 계열을 제외한 다른 신라계 김씨들은 모두 내물왕계라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김주원에게는 3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는 김종기, 둘째는 김헌창, 셋째는 김신이다.

첫째 김종기는 신라에서 시중직을 지내면서 관리로 지내다가 명주군왕의 뒤를 이었고, 김종기의 아들인 김정여 또한 명주군왕의 뒤를 이었다. 하지만 김헌창의 난, 그리고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의 난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명주군왕이라는 것은 없어지게 된다. 다만 명주군왕이란 것이 후대에 생긴 전승에 불과하다는 견해도 있다. #

후에 첫째 김종기, 둘째 김헌창의 후손들은 모두 대가 끊겨 셋째 김신의 후손이 강릉 김씨를 형성하고 있다.

본래는 선덕왕의 뒤를 이을 왕위계승권자였고, 실제로도 선덕왕이 죽자 궁에서는 김주원을 불러서 왕위를 잇게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마침 그 때 비가 많이 와서 홍수가 나 버렸다. 김주원의 집에서 궁에 가려면 알천(현재는 북천이라 부른다)이란 냇물을 건너야 했는데, 물이 불어버린 바람에 며칠동안 알천을 건너지 못해 화백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결국 뒤늦게 홍수가 잦아들고 나서 왕궁에 가보니, 그 사이에 왕위는 다른 사람이 집어삼킨 상태.[2] 결국 김주원은 왕위를 포기하고 명주로 내려가서 거기서 생을 마감한다. 이후 그의 후손들은 강릉을 본관으로 삼았는데, 이것이 바로 강릉 김씨의 시작이다.

김주원이 김경신(원성왕)과의 왕권경쟁에서 밀려 외가가 있는 명주로 일가를 이끌고 갔었는데 그 행렬이 아주 볼만 했다고 한다. 무지막지하게 길고, 규모가 엄청났다고 한다. 하긴 신라에서 최고 귀족가문이었으니 알만하다. 그렇게 이주를 하던 중에 어떤 산에 머물렀는데 그 산이름의 지금의 주왕산이라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주왕산에서 공부를 하였으며, 고려의 군사를 막기 위해 주왕산성을 쌓았다는 전승도 있다. 기사아니 그 때 고려가 어디 있다고

둘째 아들 김헌창김헌창의 난을 일으켰지만, 김주원 본인은 김헌창이 난을 일으킨 웅주와 완전히 국토 반대편에 있었고 반란에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별달리 큰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

김주원의 증손자가 바로 신무왕 옹립에 공을 세우고 문성왕 때 최고의 권신으로 자리매김한 김양이다. 참고로 김양과 앞에서 언급한 김흔은 서로 사촌지간 이라는 점이 주목할만 하다. 이에 따르면 김흔의 할아버지는 김주원의 첫째인 김종기이고 김흔의 아버지는 김양의 아버지인 김정여와 형제가 된다.
  1.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에서는 김주원의 증손자가 되는 김흔의 조상이 김인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2. 옛날에는 왕도 하늘이 내리는 거라며, 자연재해때문에 즉위식에 가지 못한다면 하늘이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것으로 여겼다는 이야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