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역사

1 개요

아르헨티나역사를 다루는 항목.

2 독립 이전의 간단한 역사

12000년전에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아르헨티나 일대에서 부족별로 나누워서 살았으며 아르헨티나 동북부 지역은 투피-과라니 어를 쓰는 부족들이 살았고 피타고니아라고 볼리는 중부와 남부지역은 전통적으로 유목민의 영역이었으나 이후에 마푸체족으로 통합되었다. 서북부 지역은 15세기에 잉카제국에 복속되었으며 이로 인해서 현재의 아르헨티나 국기에 잉티가 그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16세기 중엽에 피타고니아 일대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스페인식민지가 되었다.(피타고니아 지역은 마푸체 족 등 원주민들이 독립을 유지하며 살고 있었다.) 18세기 중엽에 부왕령이 설치되었다.

3 독립

19세기 초 영국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침공을 시민들의 힘으로 물리친 사건을 계기로 독립의지가 촉발되었고 이후 호세 데 산 마르틴의 혁명이 일어나면서 1810년 5월 독립을 선포하고 임시정부를 수립, 1816년 7월 9일에 투쿠만 회의에서 중앙 집권적 공화국으로 성립되었음을 선언했다. 그러나 패권을 잡으려는 항구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자치권을 지키려는 다른 지역들 사이에 마찰이 심해 한참 동안 투닥투닥거리다 독재자 로사스 때에 와서야 어느 정도 안정된다.그리고 그때까지 완전히 통제하지 못 하고 있던 원주민 영토를 향한 정복 및 식민에 착수한다.

하여간 이러한 영토 확장을 배경으로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목축업은 물론 농업 등도 발달해 세계 10대 경제대국에 늘 빠지지 않았고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구입할 정도로 한때 남미에서도 지역 강대국이기도 했던 나라였다. 익히 알려진 동화 '엄마찾아 삼만리'에서 이탈리아인이던 꼬마 주인공이 엄마찾아 가던 곳이 바로 아르헨티나였다.즉 유럽에서 아르헨티나 드림을 찾아 이민왔다는 것.

그러나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을 시작으로 세계 경제가 큰 타격을 받으면서 목축업과 농업에 쇠고기, 곡물 수출에만 의존[1]하며 부를 쌓던 아르헨티나는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고 이때 국내 위기의 혼란을 틈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치에 개입하게 되면서 아르헨티나는 여타 중남미 국가들처럼 잦은 군부 쿠데타와 군부 독재 등 군부의 정치 개입이 반복되는 등 경제적, 정치적으로 끝 없는 혼란에 빠져들게 되었다.

4 2차 세계대전 시기

아르헨티나에는 나치 독일의 전횡을 피해 도망친 유럽 이주민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일례로 볼펜을 발명한 신문기자 비로 라슬로(Bíró László) 역시 원래는 헝가리 사람이었으나 나치를 피해 아르헨티나로 도망쳤다.

이렇게 아르헨티나는 나치를 피해 도망친 사람들이 몰린 나라인 데다가 세계적인 농업국인 덕에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아르헨티나'라는 나라 자체가 연합국의 군량고 역할을 담당했다.

5 2차 세계대전 이후, 아르헨티나의 안습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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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페론

그러던 중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6년 육군 대령이었던 후안 페론대통령이 되면서 정세는 어느 정도 안정화되기 시작했고 대통령이 된 페론은 노동자와 빈민층을 위한 사회 복지 정책을 펼쳤다. 흔히 말하는 포퓰리즘의 대명사인 '페론주의'는 이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에비타'로 잘 알려진 영부인 에바 페론은 빈민의 어머니로 추앙받으며 어찌 보면 페론보다 국민들의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페론이 펼친 정책은 상당히 문제가 있었다. 지속가능한 정책도 아니었을 뿐더러 거기다 만만한 부자들과 중산층들의 돈을 뜯어 회생 가능성이 없는 노동자나 빈민층들을 일방적으로 지원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서민을 위하는 지도자랍시고 포퓰리즘 정치와 선동으로 자국민들을 철저하게 우민화시켜 아내였던 에바 페론과 함께 대통령궁에서 호화 생활을 누렸고 권력 요직에 자신의 추종자들만을 무조건적으로 기용하였다. 그리고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페론은 자신의 정책에 반기를 드는 정치가들은 가차 없이 억압하고 탄압하는 권위주의적 독재자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1952년 영부인이었던 에바 페론이 암으로 죽으면서 페론 행정부가 추진하던 정책들 상당수가 한계를 드러냈고 더군다나 페론 정부가 이혼과 매춘을 합법화하며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의 지지를 완전히 잃게되어 페론 정부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면서 페론의 입지는 약화되기 시작하더니 결국 페론은 1955년 9월 군부내 페론 반대파들이 일으킨 쿠데타로 실각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후 지속되는 군부 쿠데타와 정치갈등으로 아르헨티나는 끝 없는 혼란에 빠져들었고 결국 오일쇼크로 아르헨티나가 위기에 처하자 아르헨티나 정부에서 후안 페론의 귀국을 허용해주었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후안 페론은 대통령에 재당선되었다. 후안 페론이 재집권하면서 일시적으로나마 경제가 나아지는 듯했지만[2] 고령이었던 페론은 얼마가지 않아 사망했고 이어서 대통령이 된 후안 페론의 후처 이사벨 페론은 수완부족과 좌파에 대한 탄압, 보수적인 재정정책, 급속히 올라가는 물가등으로 인기를 잃어가며 결국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를 중심으로 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아르헨티나 군부가 다시 집권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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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이렇게 쿠데타를 통해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 된 사람이 바로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다 하지만 군부는 이사벨 페론보다도 무능해서 월드컵을 무리하게 개최하고 이 시기부터 형식적이나마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하고 인플레이션을 잡기위해 임금동결을 추진했지만 이러한 정책들은 오히려 국내산업의 피폐화를 가져와, 도리어 국가부채가 폭증하는 결과만을 낳게 되고 특히 좌파와 페론주의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벌이며(일명 "더러운 전쟁") 국민들의 대대적인 반감을 사게되었다. 이 당시 탄압의 강도는 단순한 독재 정도가 아니라 수천명의 반정부 인사들과 시위 참여자들을 재판 없이 고문하고 대서양에 수장하는 정도의 막장이었다.


레오폴도 갈티에리

결국 포클랜드 전쟁에서 영국에게 참패를 당하고 포클랜드 전쟁 직후에 70년대 후반에 들어와있던 외국자본도 대거 빠져나간데에다가 이자율 상승까지 겹쳐서 외채를 도저히 갚지 못하게 되어 경제도 파탄위기에까지 직면하자 명분을 잃은 군부는 민주정부에게 정권을 이양할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지게 되었고 레오폴도 갈티에리가 대통령직에서 사퇴하고 아르헨티나 군사정부는 1983년 급진시민연합소속의 라울 알폰신에게 정권을 넘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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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울 알폰신

라울 알폰신은 민주화를 위해 정치개혁을 단행하였고 경제정책에도 어느정도 신경써 집권 초기에 어느정도 성과가 나오나싶지만 임기 말년에 초 인플레이션 현상을 막지 못한 채 임기를 6개월 남겨놓고 결국 사퇴하고 말았다. 곧이어서 페론주의 정당인 정의당이 집권하게 되나 카를로스 메넴은 적극적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쳤다. 초기엔 이러한 약빨이 먹는가 싶었고(특히 저환율 정책으로 인플레이션이 일시적이나마 멈췄던것이 주효했다.) 1995년 대선에서도 재선에 성공했으나 2기 집권시에 1기 집권시 정책의 부작용으로 빈부격차가 급속히 확대되고 저환율 정책으로 수출경쟁력이 떨어져 무역적자가 급속히 커지는 등의 부작용을 겪다가 1997년 IMF 외환위기로 쐐기타를 맞고 부정부패마저 횡행하면서 3선까지 노렸던 카를로스 메넴은 1999년 쓸쓸하게 임기를 마치고 퇴진 하였다. 그러나 정권교체로 집권한 급진시민연합 정부도 영 신통치는 않아서 기존정책을 계속 유지하다가 결국 2001년 지속되는 경제난[3] 분노한 시민들의 시위로 퇴진을 하게 된다. 이후로는 다시 정의당이 집권하게 되나 대통령이 일주일만에 4명씩이나 바뀌는 등 급속한 정치적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네스토르 카를로스 키르치네르(Néstor Carlos Kirchner Ostoić, 1950년 2월 25일 ~ 2010년 10월 27일)

그러다가 2003년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어느정도 정치적으로 안정을 찾게되었고 경제도 IMF 외환위기의 후유증을 벗어나 연간 8.9%대의 급속한 성장을 거두게 되었다. 그러다가 키르치네르의 아내인 페르난데스가 집권하면서 남편에 비해 부족한 수완과 때 마침 세계적인 경제위기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경제성장의 호조와 임기도중에 키르치네르가 사망하면서 과부가 된 페르난데스에 대한 동정으로 2기 집권에 성공했다 하지만 2기 임기 들어서부터는 급속한 물가상승과 경제성장률 저하, 외화부족[4]으로 급속히 흔들리고 있는 형태다.

그리고 2014년 8월, 또 다시 디폴트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사실 디폴트 선언자체는 아르헨티나 정부에서 의도한 바가 크다. 미국 헤지펀드들이 채무조정에 합의를 안하고 아르헨티나 정부에게 소송을 걸어서 재판에까지 갔는데 아르헨티나 정부가 재판에서 패소했다. -> 결국 미국 헤지펀드에게 돈을 갚는다.-> 근데 헤지펀드에게 돈을 갚게 되면 그 동안 채무조정을 해서 군말없이 지내던 여러 금융기관과 투자자들에게 압력이 들어와 그 동안 채무조정을 통해 탕감받은 몫까지 돈을 갚으라는 요구가 나오게 된다. [5] -> 근데 그 이전에 진 빚이 너무 많아서 이걸 다 갚게 되면 아르헨티나 재정이 완전히 거덜나게 생긴다. = 즉, 아르헨티나라는 국가 자체가 털리게 된다. -> 씨바, 어쩔수 없다 디폴트 고고씽 하자!(...) 대충 이런식의 과정을 거치게 된 것. 그러니까 100% 망하기 VS 70% 망히기 다만 아르헨티나 입장에선 그 동안 쌓아놓았던 경험도 있고 브라질이나 칠레, 우루과이, 볼리비아 등의 인접 남미국가랑 정치성향을 무기로 경제적 교류를 활발히 하고있고 그 인접국가들이 그 전에 아르헨티나가 경제사정이 막장이었을때보다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겨진 상태이기때문에[6] 1980년대,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보다는 덜 지옥이기는 하다. 하긴 물가 1000배 뛰는 것보다 10배정도 뛰는게 덜 지옥스럽기야 하겠지만 다만 2012년 이후에 경기침체와 상당한 물가상승으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에 대한 여론이 많이 안 좋아진지라 현지에선 그냥 빚갚으라고 하는 여론이 다수. 뭐, 여하튼간에 경기침체가 지속되었던 차라 2013년 총선에서 승리를 위한 전선이 패배한 이후로는 줄곳 레임덕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만 의외로 2015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정권 재창출이 가능할것이라는 전망이 있었는데, 의외로 지지기반 자체는 꽤 탄탄했던데다가 아무리 아르헨티나 경기가 침체가 장기화되고 있다해도 사실 그 동안 여러차례 찾아왔던 경제난에 비하면 사실 경제난 축에 못들 정도로 양반인 수준이었기 때문이다(...)[7] 또한 1차 투표 1위를 한 여당의 시올리 후보 말고도 3위 후보인 세르히오 마사 역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래에서 일한적이 있었던 페론주의자였기 때문에 잘만 회유하면 정권 재창출이 가능할것이라는 전망이 있었던 것, 그러나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대통령이 다니엘 시올리(Daniel Scioli)을 적극적으로 밀어준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3위 후보인 세르히오 마사(Sergio Massa)와도 이미 관계가 좋지않았던지라 시올리 후보가 1차 투표에서 37%를 얻는데 그친데다가 3위 마사 후보를 지지한 표의 대다수가 마크리 후보로 날아들어오면서 결국 결선투표에서 시올리 후보는 48.6%의 득표율을 얻어 야당 공화제안당 소속이자 최대 야당인 급진시민연합의 지지를 받은 마우리시오 마크리 후보에 패배하면서 허무하게 정권을 내주었다. 그나마 의회 선거에서 승리를 위한 전선이 선전을 거두웠기 때문에[8]마크리 대통령이 마냥 힘을 얻을수 있는 처지는 아니겠지만...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는 아르헨티나 하면 과거 남미에서 잘살던 강대국이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페론 대통령의 과도한 복지와 지나친 포퓰리즘 정치로 인해 경제의 성장동력을 잃고 국가 재정이 붕괴되어 강대국 자격을 상실한 불행한 나라라는 인식이 강하다. 허나 사실 아르헨티나는 페론이 펼친 과도한 복지 정책로 인해 경제적으로 망한 것도 있지만 페론이 대통령에 집권하기 훨씬 이전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 대공황에 이전의 권력층들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먼저 몰락한 상태였다. 게다가 여러 중남미 국가들처럼 군부 쿠데타와 군부 독재자 등의 군부 독재 등 군부의 정치권력 개입이 반복되면서 정세적 혼란이 반복되었다. 참고로 이 때 중남미 국가들에게 군부 쿠데타나 군부 독재자는 아주 평범한 일이었는데 아르헨티나도 그렇고 페루, 에콰도르, 브라질,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칠레 등등 군부의 쿠데타로 정권이 바뀌는 등의 혼란을 안 겪은 나라가 별로 없었다. 경제대국으로 잘 나가던 시절에도 다른 국가들과 같이 기계공업이나 제조업과 같은 산업도 별로 없어 경제가 망하기 딱 좋은 국가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렇다 보니 공업화나 제조업 육성등 산업화등을 추진하여 성장을 기조로 국가 경제를 살렸어야 했고 대공황 와중에 군부 쿠데타로 들어선 군부 정권의 주도로 여러 차례 공업 육성과 같은 산업화 추진과 토지개혁 등 대대적인 경제 구조 개혁이 시도되었지만 개혁에 대한 기존 기득권층들의 반발로 파행을 거듭하면서 개혁은 실패로 끝났다.[9]결국 어느 것이 정설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겠지만 쿠데타 등 군부의 정치 개입 반복과 산업화 실패, 경제 구조 개혁 실패, 포퓰리즘 난립, 정치 혼란으로 인한 성장동력 상실, 복지 실패에 따른 부채의 증가 등이 복합적으로 얽히고 쌓이면서 아르헨티나는 강대국의 자리에서 밀려나 몰락하고 만 것이다.

6 기타

6.1 과거사 청산

라울 알폰신은 집권하자마자 호르헤 비델라레오폴도 갈티에리같은 군부독재자들이 자행한 반인륜번죄 청산을 시도했다. 그는 이전에 군부가 스스로 만들어놓은 자동사면법을 폐기하고 대통령 직속으로 를 설치하고 더러운 전쟁 기간동안 일어난 일들에 대한 진상조사에 착수했다. 그리고 다음해에 그 결과물로 발표된 보고서가 바로 ‘눈까마스Nunca Más’, 한국 말로 ‘더 이상은 안돼’였 다. 약 5만 페이지에 달하는 이 보고서는 실종자 8,960명의 명단과 약 340곳의 비밀 지하감옥 등 수용시설의 위치와 실상이 자세히 적혀있는 상당히 의미있는 성과물이었으며 더러운 전쟁 동안 자행된 수많은 인권유린 사례들이 바로 이 ‘눈까마스’에 의해 밝혀진 내용이 많다

문제는 라울 알폰신 정권의 과거청산 노력은 여기까지였다는 점이다. 알폰신은 1986년 12월에 ‘60일 이내에 모든 군정 관련자들에 대한 기소를 마무리한다’는 ‘기소종결법’을 내놨으며, 1987년 6월에는 중하급 장교들은 단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며 기소대상에서 제외시켜주는 ‘강제명령에 따른 복종법’을 통과시켜 버렸다. 이후 1989년에 들어선 까를로스 메넴 정권도 두 차례의 대규모 사면을 통해서 과거 인권유린의 책임이 있는 군인들과 그 뒤 과거청산 작업에 저항해 네 차례나 반란을 일으켰던 군인들을 풀어줌으로써 알폰신의 과거사 청산은 흐지부지 되어버렸다. 다만 이 선택은 당시 여전히 군부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과거 군정 책임자들과 중하급 장교들의 조직적인 반발과 쿠데타 위협 앞에서 사회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그렇게 별거 넚이 끝날 듯하던 아르헨티나의 과거 청산작업은 2003년 5월 좌파인 키르치네르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다시 시작되게 된다. 과거사 청산을 위한 기구가 다시 설치되어 지금까지(2015년) 5,400여 건의 인권유린 사례를 추가로 접수했으며, 재판 녹취록, 영상 자료, 언론 자료, 수 만명의 실종자와 가족들에 대한 DNA 뱅크에 이르기까지 150만 건의 자료를 모으고 디지털화하고 있다. 2013년에는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지 30주년을 맞아 그동안 묻혀왔던 군대의 모든 비밀자료들을 공개하겠다는 국방장관의 발표도 있었다.

또한 2005년 6월 대법원은 1986년의 기소종결법을 무효화하고 국가에 의한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가 없다는 판결을 내렸고, 그 뒤 2005년 10월 연방검찰이 인권유린 가해자 295명을 한꺼번에 체포하는 등 약 460여 명 이상이 구속수감되어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추가로 762명에 대한 체포영장이 신청되어 재판에 넘겨져 형을 선고 받았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수장되었던 라플라타 강변에는 기억의 공원이 조성되었으며, 무자비한 고문이 행해졌던 해군공병학교에는 군정 역사박물관이 건립 중인 상태다

6.2 원주민들의 수난

아르헨티나는 원주민의 비율이 적은 데, 그 이유는 독립 이후에 백인들의 탄압 때문이다. 독립하고 난 뒤에 독재자인 로사스를 비롯한 모든 정파가 참여한 이른바 사막 정복전쟁Campaña del desierto으로 초원의 원주민들을 대거 학살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노예로 팔아넘기며 현재의 영토를 확보하였고 여기서 살아남은 원주민들은 북서부 일대나 남부일대로 도피하며 아르헨티나 백인들에게 멸시를 당하며 어려운 삶을 살아야했으며. 원주민 지도자들은 덜 진화한 생물의 표본으로 산 몸이든 시체로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박물관에 전시했다. 로사스, 로카 장군, 사르미엔토 등 거의 모든 아르헨티나의 '영웅'들이 이 학살에 관련되어 있다. 물론 국기에는 잉카 제국의 태양신인 인티가 그려져있지만 그와 별개로 원주민에 대한 대우가 개차반이었고[10] 이렇게 원주민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여기는 정서는 20세기 중반까지도 남아있었으며 후안 페론이 아니었다면[11]아르헨티나의 원주민들이 죄다 멸족됐을것이라는 얘기도 나올정도였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원주민 문화에 대한 재조명과 격동의 현대사를 거치며 원주민들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지기는 했지만 대다수의 원주민들은 서북부와 남부 일대에서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건 매한가지이고 전체 인구 4000만 가운데서 0.5%가량 정도의 소수이고 백인과 혼혈된 메스티소까지 합해도 여전히 소수인건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것이 현실이다.
  1. 아르헨티나 수출은 심지어 1960년대까지도 농산품이 90% 이상을 차지했다.
  2. 아르헨티나 상품(주로 농축산품)의 주요 구매처중 하나인 소련이 오일쇼크로 경제적으로 호황을 맞았던 것도 있기는 하다.
  3.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고객들이 은행에 몰려들자 경비원이 고객들에게 총을 쏘는 막장 상황이 펼쳐질 정도였다.
  4. 아르헨티나에서 여러차례 경제위기를 겪은 여파로 아르헨티나에선 달러를 소유하고 있는 가정이 많으나 국가에서 보유하고 있는 외화는 여러차례 경제위기의 영향으로 경제규모에 비해 그리 많지 않고, 거기에다가 페르난데스가 석유산업 국유화정책을 펼치는 과정에서 삐그덕거리는 바람에 안 그래도 경제규모에 비해 적은 외환보유고가 줄어들었다.(물론 자원국유화 정책은 다른 남미 국가(볼리비아, 에콰도르, 베네수엘라 등)에서도 펼치긴 하던거지만 다른나라는 그래도 효과는 보고있는 것에 비해 아르헨티나는 그냥...)
  5. 아르헨티나는 이미 2000년대 초-2010년대 초반에 여러 차례 채무조정을 거치면서 상당수의 채무를 사실상 탕감받은 상태였다. 그런데 헤지펀드에게 돈을 갚는다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을 생략한다.
  6. 브라질의 경우 룰라 시절을 거치면서 세계 수위권의 경제강국으로 부상했고 (자우미 호세프 시기들어 성장률이 둔화되었지만 여전히 수위권의 경제강국이라는건 변함없다.) 우루과이와 볼리비아도 2000년대 중반 이후에 4-5%대의 꾸준한 경제성장을 기록하고 있으며 칠레도 꾸준한 성장으로 남미에서 가장 높은(1인당으로 따지면) 경제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7. 물론 심각한 수준의 경기침체인건 맞지만 그 전의 경제난이 위낙에 임팩트가 깊었다(...) 매년 수십%씩 물가상승하고 있다지만 80년대 초반, 1980년대 중후반이나 90년대말-2000년대 초반처럼 매년 수백배씩 물가가 올라가고 실업률도 수십%에 달하는 상황은 아니니까 말이다. 여하튼 경제상황이 안 좋은건 맞다
  8. 하원에서 의석 상당수를 상실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원내 1당 자리는 유지했고(107석/257석) 상원에서도 과반수 이상의 의석(40/72석)은 여전히 확보했다.
  9. 대공황 직후 같은 시기 아르헨티나와 같이 경제적으로 망했던 브라질은 정부의 주도로 기계공업 밑 제조업 육성등 산업화에 성공하여 경제적으로 재기할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게다가 흔히 브라질은 포퓰리즘을 끊어 재기에 성공했고 아르헨티나는 포퓰리즘을 끊지 못해 재기에 실패했다고들 주장하는데.. 실상은 브라질은 산업화에 성공했고, 아르헨티나는 산업화가 실패한 점도 간과할수 없다.
  10. 옆나라 칠레도 역사적으로 북중부지역은 잉카제국에 속해있었기에 잉카의 후예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와 별개로 남부 원주민들에 대한 대우는 개차반이다.
  11. 후안 페론은 아버지가 백인이고 어머니가 원주민-백인 혼혈인 메스티소였었다. 그래서 집권시기에 아르헨티나 원주민들의 권리향상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