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일본 이름인 도쿠야마 후미무네로도 들어올 수 있습니다. |
홍문종(洪文宗) | |
생년월일 | 1954년 11월 11일 |
출신지 | 일본 오사카 부 |
국적 | 대한민국 |
학력 | 코우고쿠 고등학교[1], 리츠메이칸 대학 |
포지션 | 외야수 |
투타 | 좌투좌타 |
프로입단 | 1976년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즈 드래프트 2번 |
소속팀 |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즈(1976) 세이부 라이온즈(1977~1980) 롯데 오리온즈(1981~1983) 롯데 자이언츠(1984~1988) 태평양 돌핀스(1989~1990) |
등록명 | 徳山文宗(도쿠야마 후미무네, 1976~1983) 홍문종(1984~1990) |
1984년 한국프로야구 외야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 ||||
김종모(해태 타이거즈) 장효조(삼성 라이온즈) 박종훈(OB 베어스) | → | 김종모(해태 타이거즈) 장효조(삼성 라이온즈) 홍문종(롯데 자이언츠) | → | 이광은(MBC 청룡) 박종훈(OB 베어스) 장효조(삼성 라이온즈) |
1984년 한국프로야구 최다 안타상 | |||||
박종훈 (OB 베어스) 장효조 (삼성 라이온즈) | → | 홍문종(롯데 자이언츠) | → | 김성한(해태 타이거즈) |
1984년 한국프로야구 최다 득점상[2] | |||||
이해창(MBC 청룡) | → | 이해창(MBC 청룡) 홍문종(롯데 자이언츠) | → | 이순철(해태 타이거즈) |
1 일본 시절
1976년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즈에 드래프트 2번으로 입단했다. 팀 내에서는 호타준족의 외야수로 성장하기를 기대했지만, 2군에서는 1979년에 도루왕을 차지할 정도로 귀신같은 활약을 하고도 1군에서는 그 분의 조상으로 보일 정도로 제대로 된 성적을 기록하지 못했다. 그렇게 기회를 살리지 못하다가 1980년 오프 시즌에 전력 외 통보를 받았고, 롯데 오리온즈로 이적을 갔다. 그런데 1983년까지의 기록을 합산해서 보면 44경기 42타수 1안타 0.024, 홈런 0, 타점 0으로 형편없다는 말도 아까울 정도로 매우 부진했다.야, 이거 미치겠다.
2 한국 롯데와의 계약
이때 한국 롯데 쪽에서 일본 롯데에게 선수 수급을 요청하게 되고, 그 때 한국 롯데로 건너온 선수가 박덕용과 홍문종이다. 그 당시 홍문종의 나이가 30살이었지만 계약금, 연봉 모두를 합쳐 4천 8백만원이나 지급했을 만큼 한국 롯데는 그의 가치를 높이 평가해 줬다. 1984년 이전까지 롯데는 외야수 부족과 함께 적당한 1번타자감이 없어 크게 곤란을 겪던 팀이었다.[3] 하지만 홍문종은 이 두가지 롯데의 고질적인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해 준 선수였다.
3 한국 시절
홍문종이라면 떠오를 수 있는 것이 9타석 연속 고의사구인데 삼성과 롯데의 마지막 2연전은 9월 22일과 23일 부산에서 벌어졌다. 롯데를 한국시리즈의 파트너로 점 찍은 삼성은 '저주기 경기'로 욕을 바가지로 먹으면서도 홍문종 말살 작전을 진행시켰다. 이 때의 이만수 타율은 0.340으로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나 야금야금 따라붙은 홍문종의 타율은 0.339이었다. 이만수와는 1리(0.001) 차에 불과했다. 매우 근소한 차이였기 때문에 충분히 뒤집힐 수 있는 상황. 그래서 그 2연전에서 이만수는 절대 나오지 않고 백업포수가 대신 나와 경기를 해야만 했다. 동시에 홍문종이 나오면 타석에 들어서는 족족 무조건 고의사구로 걸러서 타율을 굳히게 했다. 결과는 이만수가 트리플 크라운을 받게 되었지만, 비난의 여론은 끊이지 않았다.
또한 도루왕 타이틀을 얻기에도 실패했는데 그 당시 도루왕 경쟁에 나선 세 명은 해태의 김일권, MBC 청룡 이해창과 홍문종이었다. 가장 앞서 나간 것은 이해창(36개)이었다. 그러나 9연속 볼넷으로 출루를 많이 하게 된 홍문종이 도루 3개를 추가하며 이해창과 같아졌다. 이때 다른 팀들이 김일권(41개) 밀어주기를 하는 바람에 홍문종과 이해창은 타이틀을 놓쳤다.특히 김진우는 장명부가 홍문종에게만 도루를 많이 허용해서 빡친 나머지 김일권에게도 도루를 허용해주는 맞불을 놔줬다.
비록 홍문종은 타격과 도루 모두 아쉬운 2위에 머물러서 콩문종 타이틀은 얻지 못했지만 1984년에 타점과 홈런까지 포함해서 4개타이틀 모두 10위권안애 드는 흔치않는 진기록을 만들어 냈다.[4] [5] 그러나 첫해 맹활약한 이후 한국에서의 나머지 6년간 도루부문에서 꾸준히 높은 순위를 기록할뿐 다시는 그런 성적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뛰어난 외야수비덕분에 롯데에서 5년, 그리고 태평양으로 팀을 옮겨서 2년을 더해 7년이나 한국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다.
참고로 저 '사단'이 났던 1984년 한국시리즈(그러니까 최동원의 원맨쇼가 있었던)에 나름 팀에 이득이 되는 영향력(?)을 끼쳤는데, 3차전에서 삼성 선발진의 두 축의 하나였던 김시진이 홍문종의 타구에 복숭아뼈를 맞아 조기 강판된 것이 그것. 근데 김시진은 1차전에 부진한 모습을 보여서 의욕이 앞섰던 나머지 자신 스스로 무의식적으로 타구를 막으려고 발을 갖다 댔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 이후로, 야구 팬들이 아는 대로 김시진의 가을 야구는 한번도 순탄한 적이 없다...
롯데의 재일 한국인 신분 선수들 중 가장 활약이 뛰어났고, 첫 해의 강렬한 이미지를 보여줬던 홍문종은 1988 시즌을 마치고 롯데 자이언츠에서 방출된 후 태평양 돌핀스에 이적하여 활동했다. 1990년 시즌을 마치고 태평양에서 방출된 후 일본으로 귀국하게 되었는데, 지금까지도 홍문종과 연락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다.
4 역대 성적
역대기록 | ||||||||||||||||
년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
1984 | 롯데 자이언츠 | 100 | 360 | .339 (2위) | 122 (1위) | 25 | 7 | 11 | 53 (4위) | 62 (1위) | 36 (3위) | 50 | .539 (3위) | .420 (2위) | ||
1985 | 107 | 393 | .260 | 102 | 23 | 2 | 11 | 58 (4위) | 42 | 16 | 42 | .412 | .331 | |||
1986 | 103 | 387 | .274 | 106 | 20 | 3 | 3 | 29 | 46 | 39 (2위) | 46 | .364 | .349 | |||
1987 | 108 | 415 | .287 | 119 (5위) | 19 | 4 | 7 | 49 | 59 (2위) | 25 (3위) | 45 | .402 | .356 | |||
1988 | 87 | 319 | .279 | 89 | 13 | 3 | 4 | 25 | 46 | 22 | 37 | .376 | .352 | |||
년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
1989 | 태평양 돌핀스 | 114 | 381 | .241 | 92 | 15 | 3 | 6 | 31 | 60 | 16 | 41 | .344 | .314 | ||
1990 | 74 | 179 | .235 | 42 | 6 | 1 | 1 | 14 | 23 | 7 | 36 | .296 | .363 | |||
KBO 통산 (7시즌) | 693 | 2434 | .276 | 672 | 121 | 23 | 43 | 259 | 338 | 161 | 297 | .398 | .353 |
5 트리비아
여담으로 대구 지역에서 활동 중인 동명이인의 성우가 있는데, 대구MBC에서 평일 아침에 방송하는 "달구벌 만평"을 진행하기 시작한 해가 1984년인지라 홍문종이 한국프로야구에서 뛰기 시작한 시기와 겹친다.
마구마구에서는 성명권 문제로 인하여 본명이 아닌 '홍영종'이라는 가명으로 선수카드가 등록되어 있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홍문종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 ↑ 한국식으로 번역하면 흥국고등학교다.
호랑나비와는 다르다! 호랑나비와는!!! - ↑ 최다 득점상은 1999년에 신설
- ↑ 오죽했으면 육상선수 서말구를 주루코치 겸 대주자로 쓰겠다고 영입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 그러나 안타수는 많아서 지금이라면 최다안타상을 수상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그 상이 제정되기 이전이라 상을 받지는 못했다.
우승도 하고 골든글러브도 받았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아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 홍문종은 주무기인 도루 말고도 타점에서도 강세를 보였는데 첫해는 둘째치고 타율이 2할 6푼으로 뚝 떨어진 2년차때도 타점 만큼은 5위에 랭크될 정도로 득점권 타율이 높은 선수였다. 그래서 3번 타자로도 많이 나오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