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 한국-조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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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명칭
한국어재일 한국-조선인
재일 한국인
재일 조선인
재일교포
재일동포
일본어在日韓国・朝鮮人
在日韓国人
在日朝鮮人
在日コリアン[1]
일본의 민족(日本の民族)
주요 민족비주류 민족사라진 민족
야마토 민족
(大和)
류큐인
(琉球)
아이누 인
(アイヌ)
재일 외국인(在日)구마소
(熊襲)
에조
(蝦夷)
하야토
(隼人)
재일 한국인
(在日朝鮮)
재일 중국인
(在日中国)

1 재일 한국-조선인이란?

대한 독립 이전에 일본으로 이주한 조선인들과 그 자손. 재일동포라고도 한다. 줄여서 재일(자이니치[2])[3]이 라고도 부른다.

대한민국 국적[4]을 가지고 있는 일본 거주자는 재일 한국인이라고 부르며 이들은 일본에 거주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법적으로 교포의 기준은 해당 국가의 영주권을 취득한 사람이다. 그 나라에서 태어난 2세 이하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이주해서 10여년 넘게 체류하여 영주권을 취득하면 해외교포로 등록되게 되어있다. 15년 1월 22일 이전까지는 여권 갱신시 주민등록이 말소되었으나 재외국민 주민등록제도 실시이후 영주권 취득자, 해외 이주자도 이전처럼 주민등록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재일교포는 일본에서 "외국인"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당연히 일본 내 선거권이 없다. (특별)영주자도 엄연한 외국인이므로 '시민권'의 일부인 참정권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참정권을 갖고 싶으면 귀화하거나, 정 일본인이 되기 싫으면 조상의 나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현재 일본으로 귀화한 한국 혈통, 즉 한국계 일본인의 숫자는 326,671명이다. 재일 한국인 중 영주자는 461,627명이다. 이들은 한국인으로 한국 국적을 보유하거나 조선적[5]이다. 일반 체류자와 유학생 등을 합치면 일본 내의 재외국민은 578,135 명 정도이고 귀화자까지 합치면 한국인이거나 한국계 혈통은 90만명 수준이다. 1980년대 말부터 귀화를 해 1990년대엔 연 1만명 이상이 귀화를 했으나 현재는 감소세다.

재일 외국인 중에 가장 수가 많다고 알려졌지만 재일 중국인이 더 많다. 하지만 귀화자까지 합치면 한국계가 더 많긴 하다. 재일 외국인 참고.

그러나 혐한넷 우익이 점거한 일본의 넷상에선 재일+한국계를 혼동시켜서 재일한국인의 숫자는 100만이 넘는다, 집계되지 않는 인원을 더하면 재일한국인이 재일중국인보다 더 많다 카더라가 사실처럼 알려져있다. 넷 우익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모든 분야에 걸쳐 재일한국인이 일본을 조종한다는 주장을 한다. 일루미나티? 또한, 자기들의 의견이 맞지 않은 상대방을 재일로 몰아간다[6]. 유명한 일화로는 박존파.

2 재일동포의 역사[7]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에 건너간 패망한 백제의 유민들이 최초의 재일동포로 볼 수 있으며, 그 후 왜구들의 해적질, 특히 임진왜란 때 잡혀간 조선인들도 재일동포로 볼 수 있다. 이 당시 잡혀간 학자와 도공들, 특히 도공들은 도쿠가와 막부의 재산으로 관리되었으며 "조선인"의 "자기"를 유지관리하는 차원에서 좋은 대우를 받으며 도자기를 굽든지, 귀화해서 바닥부터 시작하든지 선택지를 강요받았는데 메이지 유신으로 인해 막부의 비호가 사라지면서 "조선인"적을 대부분 포기하고 일본인으로 귀화했으나, 그대로 도공으로 남아 아직까지 도자기를 굽고 있는 경우도 있다.

본격적인 재일동포의 시작은 대한제국 때 일본으로 유학한 학생들이 해당된다. 일제강점기부터는 2등 국민 신세가 되지만, 병역의 의무가 없어서[8] 일본인보다 사업에 유리하고 외지에서 산다는 끈기가 있어서 조선인을 우대하는 업자도 나와 사업에 성공하는 동포도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로 인하여 일본 본토인부터 자기 일자리를 빼앗겼다는 시기를 받게 된다.

일본에 돈을 벌기 위해 넘어가는 사람도 많았는데, 경상도 출신도 많았지만 특히 제주도 출신이 일본에 많이 건너갔다. 제주도의 주산업이 농업,어업으로, 열악한 산업환경과 인구증가 따른 실직자가 다수 발생하였고, 당시의 제주도출신에 대한 멸시가 한반도에 있었기에 결국 제주도에서 발생한 실업자를 받아들일수있는 곳은 필연적으로 일본본토에 한정되어 일제강점기초기부터 많은 제주도인이 일본으로 떠났다. 경술국치 이후 일단은 한반도가 일본의 일부로 편입됐기 때문에 그 절차도 다른 외국에 가는 것보다는 훨씬 쉬웠고, 특히 1922년 자유도항제가 실시된 후에는 폭발적으로 일본으로 일하러 넘어가는 사람이 늘어났다. 1923년에는 제주도와 오사카를 잇는 직항 배편이 개통하기도 했다. 한때 제주도민 1/4이 일본에 가 있고 오사카 재일교포의 60%가 제주 출신이었다. 또한 주로 정치적 이유로 양반등의 지식계급이 귀양오는 유배지였던 덕분에 한반도에서 문해 수준과 교육수준이 상당히 높았다. 그 덕분에 일본생활에서도 적응에 어려움이 없고나 상당한 지위를 구축하는 사람도 나오게 된다. 지금도 제주 토박이치고 일본에 친척 없는 사람이 드물 정도고, 거의 모든 동네의 마을회관 앞에는 재일교포 공덕비가 세워진 곳이 많다.

1928년에는 제주와 오사카를 잇는 배편의 운영사인 일본 회사가 운임을 기존 8원에서 12원 50전으로 오르자 오사카 거주 제주인들이 반발해 '우리는 우리 배로' 구호를 내걸고 '동아통항조합'을 결성해 1930년 11월 임대 선박 '교룡환'을 운항하기 시작했다. 교룡환의 요금이 6원 50전이었기에 일본 선사는 부랴부랴 3원으로 운임을 내렸지만 제주 사람들은 두 배가 넘는 돈을 내면서도 우리 배를 이용했다. 이는 1930년 11월 7일자 동아일보에 올라와 있다.

때는 태평양 전쟁. 일본 정부는 조선의 불균형발전과 공업화의 부진[9], 인구 증가, 세계 불황, 대량의 실업자 발생, 그로 인한 독립운동의 기운에 대처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중국만주에서 벌이는 전쟁, 그리고 나중에는 태평양 전쟁으로 병역의무가 있었던 자기 국민을 마구 징발해 갔기 때문에 일본 본토는 노동력이 부족한 사태가 되었다. 일본 정부는 이 문제들을 "조선의 실업자에게 일본에 일자리를 소개"하는 것으로 해결하려 한다. 처음에는 일본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조선인 실업자와, 싼 노동력을 얻을 수 있는 일본업자들의 서로 이득되는 정책이라 호평이였지만, 싼 노동력의 대량공급은 노동자의 대우를 급격하게 하락시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인 노동자를 혹대하여 노예취급하게 된다.[10]

전시상황에서 구 일본군의 일본 본토로 강제 징용으로 끌려가는 조선인들이 늘어나기 시작한다.[11][12][13][14]

전쟁 말기에 일본의 패전으로 가면서 일본의 공권력의 약화한 뜸에, 일본 내의 조선인 노동자들은 대우의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하거나 조합을 설립하여 일본 업자와 일본 정부에 대항하게 된다. 후에 이 조합들이 이념으로 해산/분열되어 민단/조총련이 된다.

1945년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도 많은 조선인들이 군수공장에서 일했었는데, 이때 원자폭탄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이외에도 홋카이도, 사할린등 석탄 다산지에서의 석탄 강제노동으로 끌려간 조선인도 숱하다.[15] 오늘날, 이들 원자폭탄으로 희생된 조선인들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한국 정부 양측에서 전혀 보상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혼란의 와중에서 일본 민간인(자경단)과 일본군, 일본 경찰에 의하여 무차별적으로 조선인을 대상으로 학살을 벌여 상당수의 조선인들이 희생되었다. [16][17] 이미 이 당시에 상당히 많은 수의 조선인들이 일본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그들에 대한 취급이 어땠는지 이를 보아 짐작할 수 있다. 1923년에 일본 열도에 있던 조선인의 수는 8만 명으로 추정한다. 1945년 패전 직전에는 200만에 이른다. 갱스 오브 뉴욕아일랜드 이민자들도 아니고..


해방 후 일본에 체류하던 조선인의 대부분은 한반도로 돌아갔지만,[18] 불안한 한반도의 정치상황과 경제혼란으로 일본으로 돌아가는 사람의 숫자도 많았고 이들은 일자리가 부족[19]했기에, 노동력이 필요했던 한때 일했던 공장과 지역으로 돌아간다. 오사카가 재일동포가 많은 이유는 그 곳에 있는 군수공장이 밀집하고 있었고, 그 곳에서 많은 조선인이 일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재일동포 1세대는 이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남북 분단과 한국전쟁의 혼란이 시작되면서, 일본의 재일교포 사회에서도 북한을 지지하거나 남한을 지지하는 쪽으로 갈라서기 시작한다. 이쯤에서 재일교포 양대 단체인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이하 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하 조총련)가 발족되기 시작한다. 또한 이 시기에는 4.3 사건의 참화를 피하기 위한 제주도출신의 한국인이 대거 일본에 입항하고[20], 한국전쟁의 참화를 피하기 위해서 건너온 이들도 많았다. 반대로 재일학도의용군이란 이름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재일교포도 있었다.

해방과 전쟁 이후를 거친 뒤로, 일본에 잔류한 재일교포들은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져온 각종 사회적 차별에 여전히 시달려야 했다. 또한 남북간의 반목이 민단 vs 조총련이라는 형태로 재일교포 사회에서도 나타났었고, 이들은 서로 헐뜯기 바빴다. 그 와중에도 이 두 단체가 화해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대개 좌절로 돌아갔다.[21] 60년대~80년대의 독재체제에는 재일교포가 피해를 특히 심하게 봤다. 한국에 잘못갔다 억울하게 붙잡혀서 고문당하다 죽은 사람들이 숱하며 한국어도 제대로 못하니 외국인 취급받기가 일쑤였다. 북한에선 더 심했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와중에, 일본정부는 패전초기에 비해서 급격하게 늘어난 재일교표와 그에 따른 물자부족, 치안악화, 잦은 민족단체들의 충돌에 따른 테러위험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북한과 협의하여 자국에 있는 다수의 북한 출신이나 좌익인 재일 조선인을 일본 적십자회의 이름으로 배에 태워 북으로 돌려보내는 사업을 실시한다. 본래 북한은 UN에서 인정하지 않은 비합법적인 국가였으나, 일본 적십자회는 이를 묵인하고 북송을 추진하였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강력히 반발하여 한반도의 합법적인 정부는 오직 대한민국뿐이며, 따라서 일본에 거주하던 교포의 송환지도 대한민국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본 내부의 분쟁들을 하루 빨리 정리하고 싶어했던 미국이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국적 선택은 다른 국가가 참견할 수 없는 권리라고 내세우면서 대한민국 정부의 주장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 와중에 북한과 일본 매스컴 모두가 북한을 살기 좋은 유토피아로 묘사하면서 북송을 희망하는 교포들을 끌어 모았다. 허나 실상은 일본에 살던 시절보다 더욱 궁핍한 수준. 게다가 이렇게 북송한 사람들을 자본주의에 물든 사람들이라 치부하며 온갖 차별을 가했다. 이윽고 북한 내부의 비인권적인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져나갔는데 정작 국제 적십자회는 이를 쉬쉬했다.[22]

게다가 소문은 처음 북송한 지 몇 년이 지나 처음 흘러나왔으나[23], 일본 적십자회는 무려 80년대까지 재일교포의 북송을 추진했다.

멋모르고 북한행 배에 탑승했던 9만명의 재일조선인과 1800여명의 일본인들의 운명은...[24][25] 안습.

아무튼 이 과정에서 재일 조선인, 특히 조총련계의 반수 이상이 일본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결국, 북한에만 득이 되었고, 일본 내 조총련계 재일한국인들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재일교포 북송을 참고할 것. 다만 이때 북한과 일본이 저지른 일은 나중에 일본인 종북주의자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요도호 공중 납치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이 이들의 약점과 꼬투리를 잡을 구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 때문에, 일본 내부에서는 조총련빨갱이 공작원, 민단파시스트 깡패라는 악명을 얻기도 했다. 이 항목 초반에도 잠시 나와있듯, 민단의 구성원 중 상당부분이 무직인데다가, 이 항목 끝에 서술되어 있는 재일한국인 중 민단계의 거물 상당수가 실제로 야쿠자라는 점, 그리고 심지어 그 야쿠자들이 한국정부로부터 민단 건설 및 교포사회 확립에 대한 공로로 훈장까지 받았다는 점[26][27]에서 이런 오명을 얻은 흑역사가 존재하는 셈이다(...). 그리고 조총련계는 일본 내 민간인 납치사건과 관련하여 흑역사가 존재하고, 실제로 조총련은 동아시아 반일 무장전선을 비롯한 급진 과격단체와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보니, 시선이 고울래야 고울 수가 없다.

조총련계와 그 가족의 현재 처지를 단적으로 나타낸 비극적인 사례로, 옴진리교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사건의 주범 중 하나인 재일조선인 하야시 야스오(임태남)이 있다. 야스오의 아버지는 북한 출신의 조총련계 비밀공작원이었고, 이미 일본 경찰에게 항상 마크당하는 상태였다. 중학교 때까지 자신이 재일조선인이라는 걸 몰랐던 야스오는 평소 재일한국인들을 멸시해왔으나, 아버지가 북파 공작원이라는 사실과 자신이 재일조선인이라는 걸 알게 되자 대학교를 졸업한 후 전 세계를 방황하며 떠돌다 옴진리교 조직에 가입하게 된다.

교단 내에서도 운전사 등 한직에 위치했던 그는 아사하라 쇼코에게 스파이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사고 있었다. 결국 도쿄 사건에 가담하게 된 그는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하려고 남들은 사린가스 용액이 든 봉지 하나만 들고 가는데 3개나 들고 나가서 더 많은 구멍을 뚫었으며, 지하철이 출발하는 타이밍을 잘 잡은 덕분에 그가 탔던 열차 안에서 희생자가 가장 많이 발생하였다. 이 후, 1년여의 도주 생활 동안 가장 위험한 도주범으로 손꼽혔으며, 결국 1996년에 잡혀 사형판결을 받았다.

근래 들어서서 일본의 단일민족 사상이 조금씩 사라져 가면서 면서 아시아계 노동자나 특히 화교에 대한 묘사가 미디어에 가끔씩 등장하는 데 반해 '재일 조선인'에 대해서는 의식적으로 언급을 회피하는 성향이 여전한 편이다.(단 일반 문학에서는 원래부터 꽤 보인다.)[28]

당시 GHQ(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전후에 조선인의 귀국을 허락하면서 귀국시 가져갈 수 있는 재산 규모에 제한을 두었고 일본이 패전하고 나서 연합군 최고사령부 측에서 징용된 조선인들의 귀국을 일본 정부에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 상당수는 이 명령을 따르지 않아 전쟁이 끝났음에도 여전히 일본의 공장이나 농지 등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던 조선인 노동자들의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이러한 여러가지 이유로 일본에 남아 있다가 이후 발발한 한국전쟁 등의 여파로 계속 일본에 사는 것을 선택했다.[29]

3 재일 동포의 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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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부터 일본의 식민지배를 거쳐 서서히 늘어나 관동대지진 당시에 8만 명 수준이었다. 1950년대부터 신규 유입이 줄어들고 자연증가하는 만큼 귀화자가 생기면서 일정한 숫자를 유지하고 있다.[30][31]

재일동포도 3~4세대로 가면 일본인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가 된다. 이른바 "통명"이라고 불리는 일본식 이름을 쓰면서 한국어에 서툴고 일본어에 유창하다. 혹은 이 두 언어가 피진화된 '재일어'로 통칭되는 언어를 구사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조총련이 운영하는 민족학교 등의 교육기관을 통해서 "조선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꾸준히 교육받았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현재 일본 인구 중 재일교포는 약 60만 명이며, 그중 40만이 특별영주권을 가진 재일교포이며 60%이상이 노년층이다. 그중 상당수가 오사카 및 관서지방에 몰려 살고 있다. 특히 오사카의 이쿠노구는 츠루하시 시장으로 대표되는 일본 최대의 재일교포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을 정도.[32] 이러한 사정 때문에 오사카2ch 관서 외 지방의 혐한초딩으로부터 오사카민국[33]이라는 욕을 듣기 일쑤다. 그렇다고 오사카의 한국인들이 순조롭게 정착한 것도 아니었다. 이들도 해방 이후 일본 사회에서 자리매김할 때까지 차별로 인해서 불안하기는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관동 쪽의 재일교포가 많은(많았던) 곳은 도쿄에다가와와, 카나가와현의 카와사키다. 이 2곳은 오사카와 마찬가지로 공장지대라서 조선인 노동자가 많았던 지구였다. 오사카와 달리, 이 2곳은 한국적인 것은 없다. 길게 보면 일제강점기부터, 일반적으로는 해방 전후부터 쭉 살아왔던 오사카와 달리, 도쿄올림픽 유치에 성공하면서, 판자촌에 살던 재일교포들을 치안과 경관문제를 이유로 공업지구에 이주시키면서 생긴 곳이다.

당연히 그 곳의 치안은 개판이 되었고, 일본 경찰은 그 지구를 포위하는 형식으로 곳곳에 파출소를 설치했다. 깡패마을로 밤마다 폭주족과 야쿠자가 수두룩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재개발되어 치안이 급격하게 호전되어 현재는 도심부에 편입되었다.

관동 지역의 한인촌으로 도쿄의 신주쿠구 오쿠보로 대표되는 동신주쿠 일대가 있다. [34] 원래 이 일대는 빈국 출신의 불법체류자 거주지로 유명했다. 카부키쵸에 가까워 암흑가와도 연결된 우범지대라 땅값이 저렴했다.

이 일대에 한인촌이 형성된 데 2개의 설이 있는데, 롯데의 껌 공장이 이곳에 세워져 재일교포의 고용이 다수 이루어져 노동자거주지가 형성되었다는 것이 있고, 또 다른 설은 이후 70~80년대 일본에 일하러온 불체자 한국인이 그 시초라는 설도 있다. 어느쪽이든 다른 국가 출신 체류자들과 달리 이 일대에서는 재일교포의 네트워크 이용이 가능했기 때문에 다른 국적에 비해 자리잡기가 유리했다. 그렇게 형성된 코리아타운에, 90년대 후반부터 한일간 교류가 활발해지고 일본의 한류열풍으로 일본으로 넘어가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이 급증하게 되었다. 이렇게 90년대 이후에 일본에서 정착생활을 하기 위해서 건너오는 한국인들은 보통 재일교포 사회에서 뉴커머(New comer)로 불리고 있다.[35]

이 뉴커머들이 오쿠보에 들어온 초기에는 사회문제가 된적이 있었다. 일본은 쓰레기를 정해진 곳에 투명 비닐봉투를 구매하여 정해진 시간에 버려야 하는데 쓰레기를 아무곳에나 투기하거나 길거리에 버리거나 편의점 쓰레기통에 투기했었다. 담배꽁초를 아무데나 버리고, 한밤 중에 난동을 부려 현지 일본인들과 마찰이 많았다. 그러나 2010년 이후에는 한인촌 자체가 축소 되면서 중국인-재중동포(조선족)와 베트남, 네팔, 파키스탄 등의 아시아계 다국적 체류자들이 많다. 할랄푸드 취급점도 찾아볼 수 있을 정도이니 서아시안타운이라고 해도 될 기세...

한인촌 축소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바가지였다. 애초에 일본물가로 봐도 너무 높은 바가지 장사를 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일본인도 한류붐과 희소성을 이유로 납득해왔지만, 판매하는 제품이나 서비스, 음식의 질이 가격에 비해 너무 후져, 대다수의 뉴커머 가게는 단골을 만들지 못하고 한인촌=비싸기만 하는 동네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버렸다. 때문에 한류가 가라앉고, 그나마 있는 한류팬도 차라리 한국에 가버림과 동시에 혐한바람이 불면서 한인촌에 찾아가는 일본인이 줄어 줄줄이 망했다. 반면 현지화가 이뤄진[36] 일본의 차이나타운이 중일관계악화로 가속된 혐중에도 큰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과는 대비되는 결과다.

재일교포에서는 이러한 뉴커머를 "한국인"이라 부르며 싫어하는 재일교포들도 있다. 뉴커머들에게는 일본에서 사업에 실패하거나 문제를 일으켜도,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선택을[37] 할 수 있지만, 재일교포에게는 일본이 삶의 터전이며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에, 일본에 뿌리를 내려 일본사회에 적응하려는 재일교포과 일본에 잠깐 있었다가 가는 한국인의 인식차이에서 오는 한국인의 경솔한 행동이 일본 내에서의 재일 조선인의 입지를 좁혀버리기에 경계할 수밖에 없다.

또한, 한국에서 온 사람(아주 먼 친척)들에게 사기를 당하거나, 한국에 가지도 않았는데 자기를 사칭하는 인간에게 유산을 빼앗기거나, 한국에 가서 따돌림을 당하는 등의 사례가 있다. 특히 심각한 문제로서 재일교포가 자기의 뿌리를 잊지 않도록 세워진 한국학교에, 해외학교에서 3년을 지내면 재외교포로 대학에 쉽게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해 "한국"에서 "한국인 학부모"들이 몰려와 "한국인 교사"와 "한국 교과서"로 "한국어"만 공부시키게 만들어 버려서 정작 재일교포가 제대로 혜택을 못 받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진행되고 있다.

또 다른 문제는 뉴커머의 무분별한 길거리 생방송과 뉴커머남성들의 길거리에서 일본인여성 헌팅이다. 뉴커머 뿐만이 아니라 다른 관광객들도 문제가 되고 있는데, 무허가로 가게를 촬영하거나, 길거리를 걸으면서 생방송을 하는 행동은 상당한 실례이며 재수가 없으면 어디로 끌려갈지 모른다.[38] 어디서든 허락받고 찍거나 촬영 중임을 고지해야한다.
그리고 일본인 여자는 가볍다라는 편견과 일본에선 한류가 대세라는 잘못된 인식하에 한국에서 여자라곤 엄마밖에 없지만, 일본에선 인기 좋을 거란 생각으로 무리하게 헌팅하는 한국인 남성이 최근 급증하고 있다. [39]여기까지는 다른 외국인과 비슷하지만, 유난히 한국인 남성만 거절한 여성에게 한국어쌍욕을 하고 있다. 하지만 뉴커머, 관광객들이 배회하는 곳은 대게 한국어을 알아듣는 사람이거나,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주변에 있는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다. 게다가 그런 곳에 다니는 젊은 여성들은 자기들이 자주가는 장소에 연관된 정보망을 공유하고 있으니, 헌팅하고 다니는 남자가 출몰하면, 그 남자의 특징과 국적, 어디까지 따라오는가?등이 SNS등을 통하여 전파되기에 나라망신을 시키고 있다.

참고로 일본에 있는 파칭코 점포의 8할은 한국계가 운영하고 있다. 그 8할 중에 5할이 북한계, 3할이 한국계. 북한의 핵실험에 일본 파칭코로 번 돈으로 미사일을 만든다며 비난여론이 심하게 일어나기도 했다.[40] 현재는 한국인이 아니라 "한국계"라면 문제가 없지만, 한국에선 파칭코가 금지되어 있는데 일본에서 한국인이 파칭코를 운영해도 되냐는 식으로 까인다.

4 재일 동포마을 및 코리아타운 목록

  • 동경
    • 신오오쿠보 [41] 구분 : 뉴커머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 5 | 규모 : 5 | 치안 : 3
    • 아자부쥬반 [42] 구분 : 뉴커머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 3 | 규모 : 2 | 치안 : 4
    • 아카사카 [43] 구분 : 뉴커머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 4 | 규모 : 4 | 치안 : 2
    • 미카와시마 [44] 구분 :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 4 | 규모 : 5 | 치안 : 3
    • 히가시우에노 [45] 구분 :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 5 | 규모 : 3 | 치안 : 2
    • 우에노나카쵸우 거리 [46] 구분 : 뉴커머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 4 | 규모 : 2 | 치안 : 2
    • 아사쿠사 데라(절)뒤 [47] 구분 :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 3 | 규모 : 3 | 치안 : 2
    • 에다가와 1번지 [48] 구분 :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 4 | 규모 : 2 | 치안 : 2
    • 킨시쵸/카메이도 [49] 구분 : 다민족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 4 | 규모 : 4 | 치안 : 1
    • 코이와 [50] 구분 : 다민족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 3 | 규모 : 3 | 치안 : 2
    • 산겐챠야 [51] 구분 :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 2 | 규모 : 2 | 치안 : 3
    • 오오야마/오오야구치 [52] 구분 :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 2 | 규모 : 3 | 치안 : 3
    • 시바우라 다카하마바시 [53] 구분 :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 3 | 규모 : 1 | 치안 : 2
    • 니시아리이 [54] 구분 :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 3 | 규모 : 4 | 치안 : 2
  • 카나가와
    • 오오힌 지구 [55] 구분 :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 5 | 규모 : 5 | 치안 : 1
    • 토데4번지 [56] 구분 :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 5 | 규모 : 1 | 치안 : 1
    • 신마루코 [57] 구분 :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 2 | 규모 : 2 | 치안 : 3
  • 사이타마
    • 니시카와구치 [58] 구분 : 다민족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 4 | 규모 : 3 | 치안 : 2
  • 치바
    • 사카에마치 [59] 구분 : 뉴커머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 4 | 규모 : 4 | 치안 : 1


외국인의 관점으로 치안이 3이하의 지역은 거주를 추천하지 않습니다. 치안이 2이하의 지역은 관광하는 것을 추천하지 않습니다.
[60]
\[출처 필요\]

5 재일한국인과 일본인의 통혼

800px-Marriage_of_Koreans_in_Japan_ja.png
보라색은 한국과 일본이 아닌 외국인과의 결혼, 연두색은 재일 조선인 아내와 일본인 남편, 붉은색은 일본인 아내와 재일 조선인 남편, 파란색한국인과의 결혼을 뜻한다. 재일 한국인 30만명 이상이 일본으로 귀화하고 저출산 등으로 젊은 층의 인구가 줄면서 결혼 건수 자체가 감소하고 있다. 어쨌든 통혼으로 한국과 일본의 혈통이 동시에 흐르는 일본인들이 늘고 있다.

여담으로 여자의 혼인 비중이 남자의 혼인 비중보다 높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생애 미혼율[61]이 남성이 16%, 여성이 8%인 점을 감안하면 재일 한국인도 일본인의 인구구조를 따라가고 있는 셈[62]이다. 일본 전체로는 여초지만 청장년층에선 남초라 그렇기도 하고. 관련기사

6 관련용어/문서

6.1 양대 단체

  •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약칭 민단)
  •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약칭 조총련)

6.2 관련 문서

6.3 유명한 인물 & 나무 위키에 등록된 인물

이하 목록에는 일본으로 귀화한 한국계 인물들도 있으니 주의. 일본 국적을 취득하여 귀화한 사람은 재일 한국인이 아니라 그냥 한국계/조선계 일본인이다.

6.3.1 정치인

  • 아라이 쇼케이(한국명 : 박경재) - 정치인. 1998년 주식 불법거래 혐의로 체포되기 전에 자살했다.

6.3.2 기업인

  • 강정호 - ABC마트 설립자.
  • 김상호 - 한일전기 설립자.
  • 손정의(일본명 : 손 마사요시[63]) - IT기업 소프트뱅크의 창립자. 재일교포 3세.
  • 신격호 - 롯데그룹 회장.
  • 신동빈 - 신격호의 차남.
  • 신동주 - 신격호의 장남.
  • 한창우(일본명 : 한창우) - 마루한[64] 그룹 회장. 2011년 말 자신의 전 재산인 2조원을 한일 양국에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현재 일본 국적으로 귀화해서 정확히는 한국계 일본인인데, 한자 이름을 반드시 일본식으로만 읽으란 법이 있냐고 주장하여 성도 이름도 모두 한국 이름이고, 일본인인 부인도 성을 한(韓) 씨로 바꿈은 물론 자식 이름도 모두 한국식으로 이름을 지었다.

6.3.3 작가

  • 가네시로 가즈키 - 소설가. 단 국적은 일본으로 귀화한 상태이며, 자신의 정체성을 '한국계 일본인'이라고 한다. 그의 소설을 읽어보면 잘 알 수 있다.
  • 유미리 - 소설가. 1997년 아쿠타가와상 수상.
  • 정의신 - 연극 극작가 겸 연출가. 한국에서도 자주 공연 중에 있다.
  • 양석일 - 소설가

6.3.4 학자

  • 금병동 - 역사학자
  • 강덕상 - 역사학자
  • 강상중 - 대학교수, 국제정치학자. 한국 국적자 중 최초로 도쿄대 교수가 되었고 정년을 남겨두고 2013년 퇴임, 세이가쿠인대학의 학장을 역임하였다. 현재 도쿄대 명예교수. 대학 시절까지 '나가노 테츠오'란 일본명을 쓰다가 1972년 한국에 온 후 한국명을 쓰기 시작했다.
  • 전길남
  • 이성시 - 역사학자, 와세다대학 교수
  • 이진희 - 역사학자. 광개토왕릉비가 변조됐다는 주장을 함.
  • 한태순 정보 이론 학자 전기 통신 대학 교수 역임 정보이론 분야의 최고상인 Ieee 클로드 섀넌상 수상

6.3.5 배우 & 성우 & 영화인

  • 김향리 - 성우.
  • 공대유 - 배우.
  • 박로미 - 성우.
  • 아란 케이 - 다카라즈카 남탑 출신의 뮤지컬 배우.
  • 야스다 나루미(한국명 : 정성미) - 배우. 일본의 유명 개그맨 콤비 톤네루즈의 키나시 노리타케의 부인.
  • 양영희 - 영화감독
  • 와다 아키코(한국명 : 김복자)[65] - 가수. 일본 연예계의 대모. 한국로 치면 김수미, 고두심씨 정도? 천하의 사와지리 에리카에게도 한소리한 여자다. 귀화하여 국적은 일본.
  • 이하라 츠요시 - 배우. 귀화하여 국적은 일본.
  • 이상일 - 69, 훌라걸즈.악인,용서받지 못한 자 등 대형 작품을 찍은 영화 감독.
  • 최양일 - 영화 감독.
  • 마츠다 유사쿠 (한국명 : 김우작) - 배우. 형사 드라마 태양에게 외쳐라에서 전설적인 명장면을 남겼다. 귀화하여 국적은 일본.
  • 마츠자카 케이코(한국명 : 한경자) - 일본의 톱배우, 아버지가 대구 출생의 한국인이다.
  • 아라이 히로후미 - 배우. 한국식 이름은 박경식. 재일교포 3세.
  • 칸 하나에(한국명 : 한영혜) - 배우. 아버지는 서울 출신 한국인이며, 어머니는 일본인. 일본식으로 이름을 읽기에 귀화했을 것 같지만 본인의 국적은 한국이라고 한다.
  • 쿄 노부오(한국명 : 강창웅) - 배우. 인풍전대 허리켄쟈에서 고우라이쟈 중 한명인 쿠와가라이쟈 카스미 잇슈 역으로 활약했다. 귀화하여 국적은 일본.
  • 타마야마 테츠지(한국명 : 김철) - 배우. 아버지가 한국인. 백수전대 가오렌쟈에서 6번째 전사인 가오 실버 오오가미 츠쿠마로 역으로 활약했다. 귀화하여 국적은 일본.
  • 하쿠류(한국명 : 전정일) - 배우.
  • 홍영희 - 성우
  • 이가와 하루카 (한국명 : 조수혜) # 재일 한국인 3세
  • 이토 미사키 - 배우. 체포하겠어전차남 등에 출연
  • 이하라 린 - 전 기상캐스터 그 유명한 마츠모토 히토시의 부인이다.

6.3.6 음악가 & 가수

  • 리세(레이디스 코드)  : 후쿠시마 현 출신. 재일교포 4세 레이디스 코드의 멤버.
  • 김홍재 - 지휘자.
  • 나카무라 유리 (한국명 성우리) - 2의 배우.아버지가 재일 3세, 어머니는 한국인
  • 마츠야마 치하루 - 1955년생인 포크 가수.
  • 문리나 - 작사가. 비스트(아이돌), 포미닛 등의 일본어 가사를 작사했다. 축구선수 다카하기 요지로의 부인이다.
  • 소닌 (한국명 : 성선임) - 가수.
  • (걸그룹 S.E.S의 멤버, 한국명 : 유수영, 일본명 : 쿠니미츠 슈)
  • 이토 유미 (걸그룹 슈가의 멤버, 한국명 : 이아유미, 일본명 : 이토 아유미) - 가수.
  • 양방언 - 음악가.
  • 이츠키 히로시 - 엔카 가수. 한국명 : 이교부
  • 최성일 - 바이올리니스트. 주로 사운드 호라이즌에 바이올린 세션으로 참가하여 한국에선 이를 통해 아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바이올린 솔로 앨범[66]을 내기도 하고 작곡활동도 하는듯. 사운드 호라이즌의 첫 내한공연때 아리랑을 연주하고 약간은 어눌한 한국어를 보여주기도 했다.
  • 전월선 - 성악가
  • 토와 테이(한국명 : 정동화) - 음악가.
  • JONTE(한국명 : 시종태) - EXILE 신멤버 오디션의 결승진출자, 후에 극단 에그자일 소속으로 활동 하였으며, 현재는 에이벡스 소속으로 가수로 활발히 활동중이다.
  • VERBAL(한국명 : 유영기) - 가수.
  • Crystal Kay - 아버지는 미국인, 어머니가 재일교포 3세. 가수.
  • 호테이 토모야스 - 기타리스트. 아버지가 한국인.

6.3.7 만화가

6.3.8 스포츠 선수

  • 김정행(일본명 : 카나이 마사유키) - 야구선수. 귀화하여 국적은 일본.
  • 가네다 마사야스(한국명 : 김정태) - 야구선수. 야구감독. 귀화하여 국적은 일본.
  • 가네무라 요시아키(한국명 : 김의명) - 야구선수, 야구해설가. 귀화하여 국적은 일본.
  • 김성근(일본명 : 가네바야시 세이콘) - 전 야구선수, 야구감독. 다만 이제 영구귀국한지 오래됐다.
  • 강병수(일본명 : 오하라 헤이슈) - 야구선수.
  • 강창남(일본명 : 코야마 마사오) - 야구선수.
  • 고원부(일본명 : 요시무라 모토토미) - 야구선수, 야구코치
  • 고지행(일본명 : 다카야마 토모유키) - 야구선수.
  • 김기태(일본명 : 가네시로 모토야스) - 야구선수. 귀화하여 국적은 일본.
  • 김무종(일본명 : 다키무라 시게미) - 야구선수, 야구코치.
  • 김성길(일본명: 가네모토 세이키치) - 야구선수.
  • 김실(일본명 : 다나카 미노루) - 야구선수, 야구코치.
  • 김영덕(일본명 : 가네히코 나가노리 → 가네히코 히데시게) - 야구감독.
  • 김용강(일본명 : 아마노 유고) - 야구선수. 프로듀서. 탤런트
  • 김태영 - 이종격투기 선수.
  • 김홍명[67]
  • 나카무라 타케시(한국명 : 강무지) - 야구선수. 국적은 일본. 주니치 드래건스 시절 선동열과 배터리를 이뤘다.
  • 니시오카 츠요시 - 야구선수.할아버지가 한국인인 한국계 일본인. 김별명의 통수
  • 김일융(일본명 : 니우라 히사오) - 야구선수. 야구해설가. 귀화하여 국적은 일본.
  • 리 타다나리(한국명 : 이충성) - 축구선수. 귀화하여 국적은 일본.
  • 마쓰이 가즈오 - 야구선수. 할아버지가 2008년 화재로 사망했다는 보도에서 할아버지의 이름이 한국이름으로 표기되면서 한국계설이 사실로 밝혀졌다. 국적은 일본.
  • 마고 - 일본명 : 하야시 켄료, 한국명 : 임현형. 일본의 프로게이머. 얼굴 생김새 때문에 계속 한국인이라고 의심을 받아왔음에도 계속해서 부정하다가, 2012년에 비자 문제로 트러블이 생겨 한국적임을 고백하였다. 세계최대의 격투게임 대회인 EVO에서는 줄곧 일본명인 HAYASHI KENRYO로 엔트리 했으나, 국적이 밝혀진 이후에 개최된 2013년의 EVO 2013에서는 한국명인 Hyeonhyeong Im 으로 엔트리하였다. 이는 국적이 밝혀지자 손바닥을 뒤집고 마고를 까대기 시작한 넷우익 유저들에 대한 반발로 사료된다.
  • 모리모토 히초리(한국명 : 이희철) - 야구선수. 국적은 일본.
  • 박강조 - 축구선수. 한국 최초의 재일교포 국가대표 선수.
  • 송재박(일본명 : 요시모토 히로시) - 야구선수. 야구지도자. 은퇴 후 사실상 대한민국에 정착했다.
  • 송일수(일본명 : 이시야마 카즈히데) - 야구선수. 야구지도자. 국적은 일본.
  • 신용균(일본명 : 히라야마 요우나라) - 야구선수, 야구코치, 야구감독.
  • 아라이 타카히로(한국명 : 박귀홍) - 야구선수. 국적은 일본.
  • 아리토 미치요(한국명 : 김유세) - 야구선수, 야구해설가. 귀화하여 국적은 일본.
  • 안창림 - 유도선수.
  • 역도산(일본어 : 리키도잔/한국명 : 김신락) - 프로레슬링 선수.
  • 이영구(일본명 : 기야마 에이큐) - 야구선수.
  • 이충남(일본명 : 야마모토 타다오) - 야구감독.
  • 장명부(일본명 : 후쿠시 히로아키) - 야구선수. 결혼하면서 일본 국적 취득.
  • 장훈(일본명 : 하리모토 이사오) - 야구선수. 야구해설가.
  • 정대세 - 축구선수. 아버지가 한국인이나, 어머니가 재일 조선인. 아버지 국적을 이어 본인의 실제 국적은 한국이나 실제 거주지는 일본으로 되어 있고 선수 등록은 북한으로 되어있는 등 복잡한 내력을 갖고 있다.
  • 주동식(일본명 : 우다 토쇼쿠) - 야구선수. 야구해설가. 야구지도자.
  • 최일언(일본명 : 야마모토 가즈히코) - 야구선수. 야구지도자.
  • 추성훈(일본명 : 아키야마 요시히로) - 전 유도선수. 이종격투기 선수. 2001년 일본 국적 취득.
  • 가네다 마사이치(한국명 : 김경홍) - 야구선수. 야구감독. 국적은 일본.
  • 가네모토 도모아키(한국명 : 김박성) - 야구선수. 국적은 일본.
  • 긴조 다쓰히코(한국명 : 김용언) - 야구선수. 국적은 일본. 아버지는 재일 한국인 2세인 김황세.
  • 홍문종(일본명 : 도쿠야마 후미무네) - 야구선수.
  • 홍창수(일본명 : 도쿠야마 마사모리, 徳山昌守) : 전 복싱 선수, 전 WBC 슈퍼플라이급 챔피언. 원래 조선적이었으나 2007년 대한민국 국적 취득. 현재 일본 거주.
  • 황태호(일본명 : 히야마 야스히로) - 야구선수.
  • 히야마 신지로(한국명 : 황진환) - 야구선수.
  • 초슈 리키(한국명 : 곽강웅) - 프로레슬러. 뮌헨 올림픽에 레슬링 한국 국가대표로 참가한 적이 있다. '혁명전사' 라는 링네임으로 유명한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스트롱 스타일을 대표하는 선수이자 명실상부 쇼와시대 신일본의 에이스 중 한명.
  • 사이 료지(한국명 : 최영이) - 프로레슬러. 재일한국인 3세. 신일본 프로레슬링ZERO-ONE을 거쳤으며 ZERO-ONE MAX 에서는 챔피언을 하기도 했다. 형인 RYO(한국명 : 최영)[68]는 공수가이자 종합격투기 선수.
  • 마에다 아키라 - 쇼와의 격투왕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프로레슬러.
  • 호시노 칸타로 - 올드 프로레슬러. 한국 프로레슬링 올드팬들에게는 한국 이름인 "여건부" 로 더 유명하다.
  • 가네무라 킨타로 - 한국명 이형호. FMW, W☆ING, HUSTLE 등을 거친 프로레슬러. 구 FMW 시절에는 믹 폴리오니타 아츠시 등과 살벌한 데스매치를 치르기도 했고, 엔터테인먼트 노선 전환 후의 FMW나 HUSTLE 에서는 코믹한 경기를 자주 하는 편. 하지만 성폭력 사건으로 평가는 바닥
  • 다이너마이트 칸사이 - 한국명 이강자. 여자 프로레슬러. 일본 여자 프로레슬링계에서 손꼽히는 선수 중 하나이자 스플래시 마운틴(크루시픽스 파워밤)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 가네모토 고지 - 한국명 김일우. 전 신일본 프로레슬링 소속이였고 지금은 프리로 뛰고있는 프로레슬러. 쥬니어 프로레슬링 레전드로 쥬신 선더 라이거 등등 유명 선수와의 명경기를 양성했다.

6.3.9 범죄자 & 야쿠자

6.3.10 기타

  • 김수진 - 연극 연출가
  • 김태현 - 작사
  • 박리혜(일본명 : 가쓰다 리에) - 재일 한국인 3세, 남편이 박찬호. 본직은 요리 연구가, 미국의 유명한 요리학교인 CIA[69] 출신이다. 케이블 올리브 채널에서 홈메이트쿡에 MC로 출연한 적이 있다.
  • 조치훈 - 바둑기사.
  • 조선진 - 바둑 기사.
  • 진창현 - 세계에서 5명뿐인 '마스터 메이커(Master Maker)'[70] 칭호를 받은 바이올린 장인 중 한명으로, 그가 제작한 바이올린은 스트라디바리우스에 가장 근접했다는 평가를 받아 '동양의 스트라디바리'라 불렸다.
  • 최영의(최배달) - 극진공수도의 창시자이자 전설적인 무도가.
  • 곽인식-화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그의 회고전이 개최되기도 했다.
  • 정창욱 - 재일 한국인 4세, 국적은 대한민국. 셰프 이전에는 방송국에서 통역사로 활동했다. 교포 출신임에도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고, 군복무(의경)까지 한 특이 케이스.
  • 홍맑은샘 - 바둑기사.

6.4 재일교포에 대해서 다룬 미디어

  1. 재일 코리안. 남북관계를 고려하여 한국, 조선 대신 Korean을 그대로 음역하여 사용함으로써 재일 한국-조선인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표명할 때 사용한다.
  2. 在日(ざいにち)
  3. 엄밀히 말하면 '재일조선인'이라고 해야 하지만, 일본 내 재일 한국-조선인의 규모 및 역사 등의 이유로 단지 '자이니치'라고 줄여 부르는 것만으로도 이들을 의미하게 된 것.
  4. 넓게 보면 북한의 국적까지 포함된다. 일본에 귀화한 한국인들을 재일 한국-조선인으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는데 엄밀히 말하면 이전 국적을 포기하고 일본 국적을 취득한 경우이므로 재일 한국-조선인이 아니다. 일본에서도 귀화한 한국인이나 일본 국적을 가진 한국계 일본인들을 재일 조선인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5. 조선국적. 조선은 현존하지 않기에 사실상 무국적.
  6. 여기에는 일본인, 외국인, 심지어 같은 넷우익(!!!)도 포함된다
  7. 재일 1세들의 증언을 모아 재일 3세 사진작가가 쓴 책인 '재일 동포 1세, 기억의 저편'을 참조하면 많은 도움이 된다.
  8. 조선인을 강제 징병한 것은 일제의 패망이 가까워진 시기 한정. 그 전에는 일본인만 징병했다.
  9. 만주진출을 의한 중간기지로, 일본에서 부품을 수입하여 조립해서 만주에 공급해 왔다.
  10. 현대 일본에서도 "외국인견습생제도"라는 이름으로 동남아/중국에서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
  11. 처음에는 우선대상 직업군(탄광, 군수공장 등)을 제외한 취업지를 제한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러다가 건너갔던 사람들의 편지 소식으로 인해 취업지의 열악한 환경이 알려지면서 그나마 자발적으로 돈벌러 가던 사람들이 사라졌다. 물론, 일손은 엄청나게 필요하고 할당량은 채워야 되고 결국.....
  12. 의외인 것이 당시 징용자들의 가족 대상으로 고용사무소에서 배급품 우선 지급권 등의 혜택을 명시해 놓은 법안은 전쟁 도중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당시 고용사무소는 일본에서는 각 현마다 적어도 2~3개, 많으면 5~6군데 있던것을 조선팔도 전체에 딸랑 2곳....... 당연히 가족에 대한 지원 따위는 아웃오브 안중이 되었다
  13. 당시 강제징용의 형태는 노동력이 필요한 기업의 채용 담당관(!)이 조선에 건너와 인력을 데려가는 형태였다. 그나마 일본에서는 위에서 상술했듯이 고용사무소가 잘 설치되어서 인력이 금방금방 채워졌지만 조선에서는 고용사무소를 통한 인력수급에는 무리가 있었다. 당연히 채용 담당관들이 전국 각지를 돌면서 채용하게 되었다. 물론 이 사람들이 조선 지리, 사정을 알 리가 없으니 지방 공무원들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 지방 공무원들이 처음에는 구슬리고 위에 나온 택도 없는 법률로 추천하였지만 나중에는 강제로 트럭에 태우는 수법으로...
  14. 참고로 제주도 사람들은 3.1 운동이나 관동대지진으로 취직입국이 제한되어 있던 일본을 거의 자유로이 오고 갔다. 얼마나 자유로이 오고 갔으면 이런 말이 전해졌다. 긴자의 미츠코시 백화점 스카프가 경성 미츠코시 백화점에 걸리는 것은 1달 뒤, 제주도 소녀의 목에 걸리는 것은 1주일 뒤(...)
  15. 이에 대해서는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 후반부에 제법 묘사되어 있다. 홋카이도답게 아이누 촌락도 나온다.
  16. 요시노 사쿠조의 <<압박과 학살>>에는 2534명, 김승학의 <<한국독립연구서>>에는 6,066명, 일본 정부의 조사 결과로는 200명 대
  17. 관동대학살은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인뿐만 아닌 류큐인, 부라쿠민, 쓰시마인, 일본에 거주하던 중국인, 심지어 좌파운동가/아나키스트 일본인(대표적으로 오오스기 사카에)들도 희생당했다.
  18. 이명박 전 대통령 역시 몇 살배기 시절에 일본에서 일하던 노동자 부모가 한반도(주로 포항)로 돌아간 경우였다.
  19. 해외 이주한 일본인이 돌아올 때까지다. 해외의 일본인이 돌아오면 일본인 노동자가 남아돌고, 법적보호가 없는 재일동포를 고용할 필요도 없기에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 업자가 나온다.
  20. 제주 4.3 사건에서 군정경찰 및 서북청년단 등의 반공 극우단체의 가혹한 탄압을 피하기 위해 이른바 "보트피플"로 현해탄을 건너 일본지역(주로 오사카)을 피난처로 떠나간 사람들이 많았다. 애당초 일제식민지 당시 제주 출신 중 1/4이 일본으로 건너가 살아서, 거기 정착했거나 혹은 제주로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다 제주에 4.3 사건이 발생하여 대규모 학살이 있자, 그것을 한국을 피해 연고가 있는 일본으로 피난한 것이다.
  21. 한민통등의 단체가 줄기차게 동포사회의 통합을 추진했고, 한국의 민주화 운동도 지원하는 등 여러가지로 노력했으나 한쪽에서는 용공이라고 까이고 한쪽에서는 반동이라고 까였다(...) 단, 한민통 자체는 한국의 대법원이 이적단체로 규정한 단체이다.
  22. 한 마디로 국제협회가 한국의 의견을 무시하고 수많은 민간인들을 속여 악랄한 북한에 보냈다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당시 한국은 국제적 발언력이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 그땐 북한보다도 국력이 약하고 힘없는 국가였으니..
  23. 북한에 간 사람들이 가족을 만나기 위해 일본으로 다시 돌아온 적이 없었다. 편지로 가족들간의 안위를 물을 수 있었는데 심한 검열 속에서도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편지들이 일본에 전해졌다. 북송된 사람들 중 극히 일부의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탈북하여 일본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그것도 90년대에 말이다.
  24. 당시 북한행 배에 몸을 실은 교포들 대부분은 북한을 엄청나게 선진화된 사회,복지국가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70년대 중반까지는 소련 지원에 의해 남한보다 북한 경제사정이 더 나은 편이긴 했지만, 훨씬 선진국이었던 일본에 비할 바는 아니었고, 그나마 북한의 나았던 경제사정도 이후 상황은 역전되고. 거기에 남한사회가 민주화 되는데, 북한은 막장으로 치달으면서,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25. 강철환의 수필 <수용소의 노래>에서 작가의 조부모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이민을 가 그 곳에서 자수성가한 분이라고 한다. 그런데 저 시기 북한행 배를 타고 평양에서 정착하다 어느 날 작가의 어머니의 밀고로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요덕수용소에 끌려갔다고 한다... 이 때 당시 많은 조총련계 재일조선인이 이러한 이유로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간 것으로 추정된다.
  26. 박정희전두환 정부는 일본 내에서 조총련의 활동을 견제하기 위해 민단을 지원했다. 하지만 조총련처럼 학교를 세운다거나 하는 식의 지원이 아니고 그냥 민단이라는 단체에만 지원했다. 재일동포를 위한 지원이 아니라 북한세력 견제라는 정치적 목적만을 가진 이 지원은 남북한을 각각 지지하는 재일동포사회에 반목만 심어주게 되었다. 현실적으로는 그 지원이라는게 평범한 재일동포에게까지 오지도 않았기 때문에 특히 올드커머 사이에서 한국 정부의 신뢰도는 바닥을 쳤었다. 사실 북한이 조총련계긴 하지만 재일동포에 들인 공에 비하면 한국 정부는 재일동포에게 무심해도 너무 무심했었다.
  27. 이 과정에서 한국은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요원을 비밀리에 보내어 민단직원으로 등용시켜서 대한민국산하기관으로 만들려고하고, 민단은 독립성을 지키기위해서 안기부요원을 색출해내는 첩보전이 적지않게 있었다. 당시 북한에 대한 정보는 북한으로 간 재일교포들과 연결된 북한계재일교포단체인 조총련이였으며, 조총련은 북한 첩보전에도 협력하고 있었다. 따라서 민단조총련은 서로 요원을 보내, 도청과 미행하여 기밀정보를 빼돌리는 등의 첩보전을 해왔고, 북한에 대한 정보를 얻기위해서 민단에 대한 한일첩보기관의 요원이 접촉하려는 움직임이 잦았다. 현재는 조총련자체의 영향력의 저하와 더불어, 일본정부의 감시태세강화, 북한에서의 조총련의 중요성 하락에 따라 민단에서 얻을수 있는 정보의 중요성도 떨어지면서 이러한 첩보전은 서로 상대를 도청하는 정도로 되었다.
  28. 그래도 조금씩 나오고는 있다. 서브컬쳐에는 아후로디같은 캐릭터가 있다.
  29. 지금 일본인들 중에 할아버지가 조선 사람이었다는 경우는, 대부분 이런 상황에서 일본에 정착한 조선인 노동자가 일본인 아내를 들인 케이스.
  30. 파란그래프는 일본에 거주하는 모든 조선인/한국인을 나타내며, 빨강그래프는 일본의 "특별영주자"의 수이며 진정한 재일교포의 수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일본거주한국인"은 재일교포과는 다른 종족이라 할만큼 다르다.
  31. 특별영주허가는 일본이 패전후 일본에 거주하는 한때 지배하던 대만/한반도 출신에 한하여 일본인과 거의 동등한 사회활동이 가능하게 하는 영주허가다. 재일교포의 자손에게만 발행받을 수 있는 영주허가이며, 특별한 문제나 전과가 없는 한 귀화에도 유리하게 작용된다.
  32. 2011년 9월 8일에 방영된 KBS 특집 '쯔루하시 사람들'이 참고가 될 것이다.
  33. 대판민국, 大阪民國, 공교롭게도 대한민국과 한자가 비슷하다. 이 점에서 착안하여 아예 大阪을 음독으로 읽어서 '다이한민코쿠'(ダイハンミンコク)라고 읽는다.
  34. 전후 롯데의 껌 공장이 이곳에 세워졌고, 일본 롯데의 본사도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35. 참고로 이러한 뉴커머들이 모여서 세운 단체가 있는데 이것이 재일본한국인연합회다.
  36. 무려 19세기부터다.
  37. 일본에서 망한 인간이 한국으로 돌아가 재기할 수 있을지는 차치하고
  38. 생방으로 인한 초상권 침해 + 외국인 + 일본어가 통하지 않음 + 한국인 조합으로 불량배에게 딱 좋은 먹이다.
  39. 만국공통으로 자국에서 별로면, 해외에서도 별로다. 그리고 이런 짓은 중국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40. 실제로 북한계 점포들은 대북송금을 하고있다. 대표적인게 규모가 줄긴 했다해도 조총련계의 꾸준한 대북송금...
  41. 원래 이곳은 옛부터 저렴한 숙박시설이 집중해있었으며, 주로 일용직노동자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이곳이 코리아타운화 된것은 일본 패전후에 이곳에 재일교포기업인 롯데의 공장이 들어서면서 공장노동자로서 재일교포가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한국에서부터 일본으로 돈을 벌기위해 넘어온 불법체류자를 포함한 뉴커머들을 재일교포 업소와 기업들이 받아드리게된다. 그 과정에서 점차 뉴커머에 침식당하면서 올드커머가 쫒겨나면서 급격하게 한국화된 코리아타운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곳에 한국인 학부모를 위한 한국어로 한국대학수능공부하는 학원도 생길정도로 심하게 한국화된 지역이다.
  42. 이곳에는 여러나라부터의 대사관이 모이고 있는 지역인데, 한국대사관과 민단본부가 들어서고 있는 관계로 한국인도 많히 생활하는 지역이다. 게다가 주변 자체가 도쿄에서도 알아주는 부촌이라 기본적인 치안이 뒷받침되어준다.
  43. 원래 이곳은 구일본군 군사시설이 밀집해있었던 관계로 공습으로 완전히 폐허로 변하였다. 폐허가 된 그 곳에 자리잡기 시작한 재일교포들로 인하여 재건이 시작되었고, 이곳에서 역도산과 같은 신흥 일본 재일교포 사업가를 많히 배출시면서 재일교포 경제의 중심지적인 역할을 하게되었다. 현재는 한국기업의 일본지사가 들어서면서 뉴커머에게 잠식당한다. 또한 이러한 경위로 이곳을 야쿠자와 한국인밖에 없다고 해서 "얏칸(한국인을 일본어로칸코쿠진이라고 한다.)"이라 불리기도 한다.
  44. 관동쪽에서 가장 역사가 있는 재일교포마을이다. 옛부터 소규모공장이 밀집해있던 지역으로 제주도출신의 재일교포가 가장많다.
  45. 이곳은 원래 아메야요코초에 있었던 암시장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그곳에 있던 재일교포들을 이곳으로 이주시키면서 생긴 마을이다. 이러한 경위로 좁은 면적에 비해 높은 밀집도를 자랑한다. 이곳에 다른 이름으로 한국인이 많다는 의미로 "키무치요코쵸"(김치거리)라 불린다.
  46. 히가시우에노와 가까운 지역에 위치하는 마을이지만 이곳은 홍등가이다. 애초에 우에노 아메요코쵸 일대가 좀 낙후되어있긴 하다.
  47. 일본패전직후의 혼란기에 재일교포가 눌러살면서 판자촌과 술집을 열면서 성립된 마을이다. 한때는 조총련사무소도 있었지만 공터로 되었으며, 현재는 관광객도 주민도 다가가지 않는 쇠퇴한 마을이다.
  48. 일본영화인"박치기!"의 무대가 된 장소로, 이곳은 간토 대지진이 발생후, 지진피해로 발생한 잔해처리를 위해서 매립하면서 생긴 지역으로 그후 공장이 들어서면서 일본의 환경오염의 대표적인 지역이 된다. 이곳에 재일교포가 들어서게된 계기는 바로 맞은편에 있는 시오하마에 전후부터 재일교포들이 판자촌을 형성하면서 급격한 슬럼화가 진행되었는데, 동경올림픽 유치로 인하여 경관상/치안상 문제있었던 시오하마에 있었던 판자촌을 철거하고, 다리건너 맞은편에 있는 에다가와에 이주시키면서 형성되었다. 그러한 경위로 이곳은 일본화되어서 그냥 일본지방시골도시와 비슷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한국적인 문화를 느낄수 있는건 굉장히 적으며, 한국계가계와 불고기집이 몇개 있는 정도다. 바로 옆인 토요스 및 아리아케를 포함한 오다이바 일대가 급격하게 개발되면서 중국인이 대거 진출하면서 에다가와에도 최근 중국요리집이 늘어나기 시작하고 있다.
  49. 원래부터 외국인, 특히 동남아계가 많았던 지역이라 외국인술집과 야쿠자가 활보하는 어둠가의 하나였으며 대다수의 뉴커머가 어둠가에 진출하는 것처럼 이곳도 뉴커머의 한국인음식점부터 시작되었다. 혈기왕성한 야쿠자와 육식문화인 외국인들을 상대로 형성되었지만, 지금은 가까운 코이와에 한국인이 몰리면서 한국인의 밀도가 낮아지면서 다문화지역의 일부가되었다.
  50. 이곳도 킨시쵸와 같은 다문화 마을이지만 최근 뉴커머들이 대거 들어서면서 코리아타운을 형성되기 시작하고 있다.
  51. 토지개발에서 버려진 지구에, 한때 암시장이 있었던 복잡한 골목길에 자리잡은 재일교포가 소소 하게 남아 거주하고있다.
  52. 조선학교도 있는 올드커머의 지역이 였지만 이케부쿠로 부터의 중국인의 생활문화가 많히 들어오고 있는 지역이고, 한때 있었던 재일교포의 슬럼가도 현재진행형으로 철거되고 주택가로 변해가고 있다.
  53. 토지개발에서 버려진 지구에 있는 소규모 판자촌으로, 반쯤 강위에 세워진 집이나 다른 집을 뚫고 통하는 등의 괴상한 형태로 만들어진 집을 볼수있다. 바로 가까이에 도살장이 있는 관계로 고기집이 많다.
  54. 이곳은 소규모공장이 전쟁전부터 많았던 지역으로 거기에 근무하는 조선인노동자가 많히 생활하고 있었던 지역이다. 또한 아라카와(강)의 방수로건설에도 조선인 노동자도 투입된 관계(주의:강제징용이전인 1924년이기에 강제징용과 연관 짓지말것)로 이 지역에 뿌리를 내린 올드커머가 많은 지역이기도 하다. 또한 조총련이 운영하는 병원이 이곳에 있다.
  55. 이곳에는 일본근대화로 인하여 공업지구가 형성되었고 그에따라 많은 조선인노동자가 넘어오게 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특히 "오오힌"지구라는 이름은 근무하던 조선인들이 오오시마/사쿠라모토/하마쵸우의 세 지구를오오힌지구라고 불렀던 것이 그대로 행정지구명으로 된것이다. 현재는 역부터 먼 관계로 크게 쇠퇴하고 있지만 규모와 역사는 관동지역에서는 가장 높은 수준이다.
  56. 이곳에는 전쟁이전부터 자갈채집작업에 일하던 조선인노동자들이 근무했었던 지역으로 전후에 하천부지를 불법점거하면서 만들어진 슬럼가였다. 불법점거이기에 인플라개발이 이루어지지않아 굉장히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 카와사키 역 주변이 신흥주택가로 재개발되면서 역에 가까운 관계로 지역도 급속도로 재개발이 이루어져 완전히 철거되어 소멸되었다. 일부 남은 옛공장과 폐허만이 그 흔적을 느낄수있다.
  57. 형성배경은 공장노동자가 살던 마을이였으며, 한국요리점이 많지만, 특필할게 없을 정도로 평범한 일본마을이다.
  58. 전쟁전부터 이곳에 있던 주물산업의 공장에 근무하는 조선인노동자가 살면서 형성된 지역으로 현재는 관동에서도 유명한 홍등가이다. 땅값이 저렴하기에 국내외로 저소득층이 몰리면서 다국적도시로 변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한글을 적지않게 볼수있다.
  59. 지역이름이 "번창하는 마을"처럼 이곳은 원래 치바현의 중심시였었다. 하지만 일본유수의 군사도시였던 관계로 집중적로 공습을 받아 말그래도 삭제당하는데, 전후 혼란기에 공백이 된 자리에 재일교포가 들어서면서 형성되었다. 시내 중심지를 재일교포가 점거하자 재개발계획이 이루어지지않아 홍등가로 변모하였고 결국 치바역이 현재위치로 옮겨지면서 치바현은 중심지를 옮기게된다.
  60. 현 리비전에선 간토지역만 작성되어있다.
  61. 50세까지 결혼을 하지 않음.
  62. 이는 다른 집단이 같은 국가 내에서 결혼에 대한 관점이 크게 차이나지 않는 이상 어디서나 나타나는 현상이다. 한국 내의 화교도 한국인들의 인구 현상을 따라간다.
  63. 손정의가 귀화한 1990년 당시의 일본에서는 일본국적을 취득할 경우 일본식 성으로 변경하거나 일본식 통명을 그대로 쓰는 게 일반적인데 특이하게도 성이 한국식인 손(孫)을 유지한 채로 귀화했다. 때문에 귀화 신청 당시 '일본식 성이 아니다'라며 거절당했으나, 결혼시 배우자의 성으로 변경할 수 있는 제도를 이용하여 일본인 아내의 성을 손씨로 바꾼 후 아내의 주민등록을 들고 가서 '일본인 손씨가 여기 있으니까 손씨도 일본식 성이다'라고 주장하여 성을 유지한 채로 귀화에 성공했다.
  64. 일본 제일의 파칭코 그룹(물론 파칭코 외에도 다른 사업을 하긴 하지만 매출이 제일 높은 건 파칭코 쪽인 듯.). 그룹 회장이 재일교포다 보니 자사 로고에 영어, 일본어에 한글도 병기한다. 덧붙여 마루한이란 이름은 파칭코의 구슬(丸, 마루)과 한창우의 회장의 성에서 따와 지어졌다.
  65. 김현자라고 알려져있지만 귀화 전에는 김복자(金福子)라는 이름이었으며 일본으로 귀화할 때 변경한 와다 아키코(和田 現子)의 한자를 한국식으로 읽은 '화전 현자'이며 '김현자'라는 이름을 사용한 적은 없다. 최영의가 실제로는 '최배달'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적이 없는 것과 비슷한 상황.
  66. 한국에도 정식 발매됐다.
  67. 재일한국인이 아닌 순수 일본인이라는 설이 있다.
  68. Spirit MC의 신인발굴프로그램인 '슈퍼 코리안'을 통해서 한국무대에 데뷔한 후 Spirit MC 7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당시에는 본명으로 활동했으나 주무대를 일본으로 옮긴 후에 남동생과 이름이 겹친다는 이유로 링네임을 RYO로 변경했다.
  69. 절대로 미국 중앙 정보국이 아니다.
  70. 다른 이의 감독 없이 바이올린을 만들 수 있다는 뜻.
  71. 김명준 감독 작품. 홋카이도 조선학교 고등부 3학년들의 생활을 감독이 직접 함께 생활하면서 담은 다큐멘터리 작품. 국내에서는 2007년 초 개봉.
  72. 메인 캐릭터중 한명인 곽영사가 재일교포
  73. 2014년 작품으로 오사카 조선학교 고등부의 럭비팀이 전국 출전 중에 겪는 일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촬영한 작품.
  74. 한일 양국 배우들이 섞여 공연했는데, 일본배우들은 한국어를, 한국배우들은 일본어를 배워 한본어 2개 국어를 공연 내내 섞어 썼다. 흥미로운 일화로는, 재일교포의 삶을 포기하려는 극중 주인공의 딸이 "북한으로 가겠어요"라고 선언하자, 일본 관객들은 충격과 공포에 빠진 반면, 한국 관객들은 "하하, 저거 바보 아냐?"하며 웃음이 터졌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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