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후기인상주의 1886 ~ 1905
인상주의가 형식상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데 반해, 후기인상주의(Postimpressionism)에 속하는 쇠라, 세잔, 고흐, 고갱은 별로 비슷한 구석이 없다. 이 용어는 영국의 미술비평가 로저 프라이(Roger Fry)가 1910년에 <마네와 후기인상주의(Manet and Post-Impressionism)> 전시를 기획하면서 처음 쓴 용어이다. 다만 이들은 하나같이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다는 게 공통점이다. 그리고 이들은 이후의 예술 경향을 미리 보여주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1.1 쇠라
조르주 쇠라,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1886
쇠라는 점묘법으로 잘 알려진 화가다. 많은 사람들이 단지 그것만 알고 있지만,(…) 사실 이 점묘법은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과학과 예술을 융합하려 한 시도이기 때문. 물론 이미 르네상스 때부터 원근법에 광학이 적용되었고,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화가는 아예 엔지니어이기도 했지만, 이후 과학과 예술은 서로 별도의 다른 길을 걸어갔다. 인상주의자들이 인간 안구가 어떻게 시각적 인지를 하는가에 대한 연구에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사실 그보다는 물감튜브가 개발되면서 야외작업이 쉬워진게 더 큰 영향이었다.(…) 반면 쇠라와 소위 신인상주의자들은 과학적 원리에 정말 심하게 집착했고, 이걸 그림에 적용하는데 강박적일 정도의 모습을 보였다.
구체적으로 쇠라가 영향을 받은건 19세기에 발표된 선과 색채에 대한 과학적 이론들이었다. 특히 화학자 셰브뢸(Michel-Eugene Chevreul)의 색채의 동시적 대조의 법칙에 관하여 De la loi du contraste simultane des couleurs(1839), 미학자 샤를르 블랑(Charles Blanc)의 책 조형 예술의 문법 Grammaire des arts du dessin(1867), 미국인 물리학자 루드(Ogden Rood)가 1879년에 쓰고 1881년에 불어로 번역된 현대 색채론 Modern Chromatics 등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한다. 쇠라는 선과 색채가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 색채는 주위 색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과 보색 대비 이론, 물감을 섞으면 색이 탁해지나 광선의 혼합은 명도를 높인다는 사실 등에 쇠라는 특히 주목했다. 비평가 펠릭스 페네옹은 과학적 원리를 예술에 도입하려 시도한 쇠라나 폴 시냑 같은 작가들을 신인상주의자라고 불렀다.
쇠라의 대표작은 누가 뭐라해도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인데, 여기서 쇠라는 모든 인물을 비트루비우스의 비례[1]에 맞춰 8등신으로 딱 맞추고, 3/4 정면, 측면, 3/4 뒷면, 뒷면의 다양한 각도로 인물들을 배치했다. 그리고 색이 탁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물감을 섞지 않고 점을 찍어 보색대비효과만을 이용했다. 때문에 그림의 채도가 매우 밝아 보인다. 쇠라는 거의 강박적으로 보일정도로 점을 찍었는데, 심지어 액자틀에까지 점을 찍었다.(...) 다만 그림이 굉장히 딱딱하다는 느낌을 주는데, 일반화된 체격과 얼굴의 사람들은 아무런 감정도 표현하지 않으며,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교류도 없다. 서로 마주보고 대화를 나눈다던지, 장난친다던지, 놀이를 한다던지 하는 게 전혀 없다는 말이다.
조르주 쇠라, <서커스>, 1891년
하지만 정작 말년의 쇠라 그림에서는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와 같은 엄정함과 밝은 색채가 없다. 대표적으로 쇠라가 그린 <서커스>에서 채도는 떨어지고 인물들은 물흐르듯 곡선이 강조된다. 내용 면에서도 차이가 있는데, 구체적으로 쇠라는 이 그림에서 성장하는 문화 산업이 제공한 인공의 세계, 꾸며낸 쾌락, 수동적인 구경꾼을 표현하였다. <서커스>를 보면 뭔가 예술이 기술덕분에 진보한 것 같고 유토피아를 표현하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론 그렇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오늘날 우리가 전자계집에 빠져있으면서 또르르 눈물흘리듯이 쇠라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문화를 좋아했고 기계적인 것도 선호하는 취향을 갖고 있었다. 쇠라는 찬반양론이 뜨거웠던 에펠탑을 완성도 되기 전에 화폭에 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근대 대중문화의 패러독스가 항상 드러난다. 쇠라는 과학에 끌리는 동시에 실체가 모호한 이상주의와 연결되어 있었고, 대중문화를 선호하면서도 고전과 아카데미 미술이라는 엘리트 전통에 집착했다. 그 결과로 나온 그림들은 분석하기 난해한 지적인 작품이지만, 아무 생각 없이 보아도 휴식을 주는 편안함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말년에는 곡선이 강조되고 비례가 흐트러지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모순으로 쇠라는 20세기 모더니즘 미술의 성격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 받는다.
쇠라는 오늘날 미디어아트와도 연관해 생각해볼 만한 작가이다. 그가 과학을 예술에 적용하려 한 태도는 오늘날 미디어아티스트들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게임 등 엔터테인먼트 산업 분야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다만 앞서 말한 것처럼 긍정적으로 볼게 아니라 비판적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노력을 했지만 생각만큼 매력적이지는 않았다 의미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솔직히 쇠라의 작품은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가 더 유명하지만, 역동성이나 매력 면에서는 후기 작품인 <서커스>가 더 매력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인지도나 인기 면에서도 세잔, 고흐, 고갱이 쇠라보다도 더 높기도 하고 말이다.(…) 예술과 과학의 조합은 언뜻 보기에는 반드시 가야할 길처럼 보이지만, 과학을 지나치게 적용하면 규격화되고 딱딱한 느낌을 주게 되고, 그러면 그 예술은 매력이 없어진다. 예술가들은 분명 과학의 산물들을 쓰지만[2], 아이러니하게도 그 과학의 산물들을 도구로만 쓸 때 더 매력적인 결과물을 만든다. 예술가가 과학자나 기술자가 되면 작품은 재미가 없어진다는 이 아이러니에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고 있다.
1.2 세잔
폴 세잔, <바구니가 있는 정물>, 1879 ~ 1880
세잔의 그림은 철학 분야 중 실존주의와 현상학에서 특히 좋은 평가를 받는다.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1945년 "세잔의 의심(C?zanne's Doubt)"이란 에세이에서 세잔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세잔은 눈에 비친 상을 그대로 포착하여 살아있는 지각을 얻기 위해 전통적인 미술의 기법들을 포기했다. 상의 정렬, 색을 구분하는 바깥 테두리, 단일 관점 등을 말이다. 궁극적으로, 세잔은 보는 것이 곧 만지는 것이 되는 경지를 추구했다. 세잔은 붓으로 한 획을 긋고 몇시간을 기다리는 경우가 허다했는데, 왜냐하면 한 획, 한 획마다 "공기와, 빛과, 물체와, 구성과, 테두리, 그리고 스타일"을 함유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잔은 그림을 그리는 동안 이미 지나가버린,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순간을 잡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가 그림을 그리는 환경은 그림을 그리는 현실의 일부분이 되었다. 세잔은 이렇게 말했다. "미술은 개인적인 통각이며, 자신이 이해한 것을 그림에 구성하여 그려 넣을 수 있어야 한다."
세잔은 "사물의 본질적 구조를 드러냄으로써 인상주의를 박물관의 미술품처럼 견고하고 지속적인 것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사물의 모습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자연의 견고함을 그리려 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세잔은 모든 사물들을 원, 원기둥, 원뿔로 나눌 수 있다고 보고 이를 분석해 그렸다. 실제 색을 윤곽에 그대로 채워넣어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색을 이루는 많은 조각들을 수없이 계산된 부분 부분에 적용해 입체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낸것.
한 예로 작품 <바구니가 있는 정물>에서 세잔은 테두리를 그리지 않았다. 그는 바구니와 과일들, 식탁보, 유리병 등 모든 것을 고르게 붓질해 그렸다. 윤곽을 그리고 색을 채워 그리는 것이 아니라, 같은 붓으로 물감을 계속 덧칠해 그렸기 덕분에 그림 속에 그려진 대상은 원근법과 형태가 강조되지 않는다. 초점도 기존 회화처럼 단일초점이 아니고, 어느 면에서 보아도 초점이 맞을 정도로 다초점, 다시점을 맞추었다. 이는 서양의 원근법적 관점이 아닌 동양 산수화의 다중시점과 오히려 더 흡사한 것이다. # 세잔느의 정물화룰 들여다보면 시점을 한군데다 고정시켜 그린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전경의 정물들을 그린 시점이 배경의 정물보다 위로 잡혀있는 경우도 있다. 즉 오늘날로 따지면 여러 사진을 촬영해 포토샵으로 합성한 것 같은 그림을 그렸다는 것.[3]
이런 특성 때문인지 세잔은 (당연히 다는 아니지만) 회화전공자 들이 좋아한다고 한다. 실제로 그림을 그려본 사람들은 저렇게 그리기가 어렵다는 걸 알아챈다고 한다. 반면에 그림을 안 그려본 사람들은 세잔의 그림이 어떻게 특별한지 잘 모르는데, 회화전공자들 말로는 '그림이 꿀렁꿀렁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또 한가지 신기한 점은, 일부 정물화를 자세히 보면 책상 양 끝이 안 맞아 보이는 그림이 있다.# 그런데 멀리서 전반적으로 보면 정상같이 보인다.(?) 그림을 더 자세히 보면, 여러 개의 붓을 사용해 살살해가며 명암을 만든게 아니라, 일정한 넓이의 붓으로 그린 것이다.# 그냥 붓질로 색면을 슥슥 그린 거란 말이다. 그런데 명암이나 양감이 있어 보인다.(?) 그리고 세잔의 그림을 볼 때는 눈을 한 점에 고정시키고 보지 말고 조금씩 움직이면서 보라고 카더라. 기묘한 화가…
세잔은 이후 피카소와 입체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대상의 객관적 진실을 표현하려는 현대미학의 뿌리를 제시했다고 평가받는다. 세잔과 쇠라는 둘다 감정을 표출하기 보다는 엄정한 원리에 의거해 그림을 그렸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쇠라가 과학과 기하학같은 이론에 의거해 도식적인 그림을 그린데 반해, 세잔은 분석과 관찰에 의거해 그림을 그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세잔은 예술가는 자기 주관과 예술관에 의지해 그림을 그려야 한다 보았으며, 이는 후대 예술가들의 창작태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반면 오늘날 미디어아트(영화, 컴퓨터 작업)에서는 예술가와 기술자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협업하는 것을 강조하기에 세잔의 영향력이 크게 미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반대로 여전히 새로운 시도를 하기 원하는 예술가들은 이런 협업에 근거한 집단작업을 기피하기도 한다.
1.3 고흐
후기인상주의 4인방(쇠라, 세잔, 고흐, 고갱) 중에서 아마 가장 유명한 화가는 빈센트 반 고흐일 것이다. 고흐의 작업은 그 일렁이는 듯한 강렬한 붓터치를 특징으로 한다. 이와 같이 작가가 고유의 화풍[4]를 강조하기 시작한데 어찌보면 고흐가 큰 영향을 끼쳤다 할 수 있다. 이후 뭉크 같은 표현주의적 작업을 하는 화가들이 등장하게 된다.
고흐의 경우 그의 삶은 비극적이었다. 그의 마지막도 자살을 시도한 뒤 비참하게 끝났으니 말이다.[5] 그의 삶을 이해할 때는, 그가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고, 아버지가 고흐를 목사로 만들길 원했으며, 그 과정에서 권위적이고 규제된 삶에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걸 아는 것이 중요하다. [6] 이 때문에 고흐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알려져 있으며, 유독물질이 들어있는 물감이 묻은 붓을 그대로 빤다던지 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가 정신나간 상태에서 그림을 그린건 절대 아니다. 일례로 아래 그림을 보고 약빨고 그린거 아니냐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상식적으로 술이나 마약에 쩔은 상태에서는 몸조차 가누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고흐는 어디까지나 제정신일때 그림을 그렸다. 비록 정신병원에 갇히기도 했지만 말이다.
고흐는 일관적으로 자기 작품에 '자신의 정념을 표현하는 것'에 집중했고, 이를 위해 관습적인 그림을 그리던 관학파 화풍(아카데미즘)을 계속해서 부정했다. 인상파를 접할 때도 훌륭하다고는 생각하나 자신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얘기했으며, 적분에 그는 개성있는 화풍을 획득했다. 이 덕분에 고흐는 미술사에서 작가주의를 강조하는 경향에 영향을 끼쳤다. 물론 이전 예술가들도 작가나 그 작가가 살던 시대 환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고흐의 작품을 이해할 때만큼 그 작품 자체보다 작품을 만든 작가의 생애가 더 중시되는 경우는 드물다. 이전에는 대부분 표현 기교나 작품 주제에 집중해 작품을 분석했기 때문. 이후 예술작품을 볼때 작품의 겉표면 이미지만 보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의 내력과 작가의 생각, 감정, 의도를 이해하는게 매우 중요해지게 됐다.
1.4 고갱
고갱님이 아니다! 고갱님은!
고흐처럼 외젠 앙리 폴 고갱 역시 작가의 생애가 예술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작가중 하나다. 단 고흐가 표현주의 경향에서 하나의 지표가 되었다면, 고갱은 원시주의 경향에서 하나의 지표가 되었다. 어찌보면 그의 예술은 여러 상징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상징주의와도 연관된다. 주의할 점은 고갱 자신은 자기 예술을 종합주의(Synthetism, 綜合主義)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본디 고갱은 주식 중개인으로 넉넉하게 살아가고 있었고 여유 있는 아마추어 미술 애호가들이 주말을 이용해서 그림을 그리는 "주말화가"로서 그림을 어느 정도 그리고 있었다. 되려 이 시기에는 카미유 피사로 등의 후에 인상파 화가들로 불리던 화가들의 그림을 사줄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폴 고갱, 설교를 들은 뒤에 나타난 환상 :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1888
그러나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35세에서 돌연 처자식 내팽개치고 화가가 되었다. 초기에는 프랑스 서부 부르타뉴 지방 퐁타방에서 농민의 삶의 모습을 연구하고 파리로 가서 미술계의 최신 트랜드를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뚜렷한 윤곽선과 단순화한 형태, 음영과 그림자가 없어서 평평한 느낌을 주는 색면, 실제 대상의 색깔과는 다른 강렬한 색채가 고갱 그림의 특징이다. 고갱의 목적은 인상파들이 초기에 줬던 충격처럼 이 인간들에게 엄청난 쇼크를 주는 작품을 만들면 나는 미술계의 no.1이 되겠지라는 것에 있었다. 하지만 생각만큼 쇼킹한 작품을 내놓지는 못했다. 오히려 조르주 쇠라가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에서 점묘법으로 미술계에 쇼크를 일으켜서 쇠라에게 이목이 쏠리자 쇠라의 점묘법을 가리켜 저주받은 점들이라고 칭했을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일본의 우키요에를 접하고, 어린 시절 본 페루의 도자기들을 사 모으면서 그런 경험을 살려서 도자기 만드는 작업도 했다. 이를 통해서 고갱은 유럽에서 있어봤자 모두가 놀랄 그림은 안 나오겠다. 유럽에서 떠나자.라고 결심하고 매형이 파나마 운하 건설 현장에서 근무한다는 것을 알고 파나마로 떠났다. 하지만 파나마 운하 공사는 개쪽이 나고 있었고 매형은 파산해서 고갱을 챙겨줄 처지가 아니라는 걸 알고 파나마를 떠나 마르티니크 섬에서 몇 달 간 머물렀다. 이때 마르티니크 섬에서 고갱은 자신의 스타일을 찾는 성과를 거둔다.
마르티니크에서 돌아온 후 빈센트 반 고흐와 그의 동생 테오 반 고흐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이 친구였던 것으로 유명하다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흐가 고갱을 동경해서 그를 스승으로 생각하고 자신이 있는 아를로 와주기를 간청했다. 여기에는 고흐의 이상인 화가들의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뜻도 있었다. 고갱은 9주일 동안 고흐와 함께 지내며 작업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성격과 예술관의 차이 때문에 불화가 심해졌고, 결국 고흐가 자기 귀를 자르는 자해 사건이 일어나자 고갱은 식겁해 노란 집을 떠났다. 두 사람은 이후에 다시 만나지는 않았다.
이후 부르타뉴로 돌아가서 "황색의 그리스도" 같은 걸작을 만든 후 1889년에 열린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동남아시아와 일본, 태평양의 독특한 문화를 접한 고갱은 다시금 유럽을 탈출하면 영감이 솟구치는 이상향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있는 돈을 다 긁어모아서 타히티로 떠났다. 심지어 타히티에 갈 때 고갱은 공식적인 초상화 화가로 자신이 파견되었다고 구라까지 쳤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무도 고갱의 구라를 몰랐던 게 타히티가 프랑스의 식민지이긴 했어도 머나먼 변방이었기 때문에 그런데서 사기를 쳐봤자 아무도 따질 생각을 안했던 탓이 컸다.(...)
고갱은 때묻지 않은 타이티의 원주민들과 교류하는 밝고 희망찬 미래를 상상했지만 현실은 시궁창. 이미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타이티는 문명화가 진행된 곳이었고 타이티의 원주민 소녀들은 뚱한 표정으로 고갱을 소닭보듯 할 뿐이었다.(...) 고갱 그림 속의 원주민 여성들의 표정이 그냥 뚱한 것은 이런 이유도 있다고.뭐야 이거
부인과 다섯 명의 아이까지 뒀음에도 여자 관계도 꽤나 복잡한 편이었다. 타히티에 간 뒤로 몇 차례 현지 여성과 결혼과 동거를 거듭했고, 개중에는 15세 정도의 미성년자 소녀도 있었다. 로리콘은 병입니다 고갱님... 첫번째로 타히티 생활을 하고 돌아온 뒤에 프랑스에서 머물던 시절에도 미성년자들과의 관계가 심각했다. 안나 자바네즈라는 동남아계 미성년자 소녀와 애인으로 동거하기도 했다. 다만 안나 자바네즈는 20대였음에도 고갱이 13살이라고 구라를 쳤다는 이야기도 있긴 하다.
고갱,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1897-1898년
타히티에서 2년 동안 머무르면서 자신만의 그림을 체득한 고갱은 이후 프랑스로 돌아왔다. 의기양양하게 타히티에서 그린 그림들이 미술계에 쇼킹한 반응을 일으킬 것이라고 믿으면서. 하지만 파리에서 전시회를 열었지만 사람들은 이게 그래서 뭐 어쨌다고?라는 반응 정도였다. 게다가 고갱이 그림제목으로 붙인 타히티어들을 유치찬란하다라고 비꼬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작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보면 원초적인 그림과는 다르게 금테두리로 장식을 하였는데 자신의 그림이 대작이라고 확신한 고갱이 르네상스나 바로크 시대의 고전들처럼 화려한 장식을 한 것이다. 이것도 당대에는 뭔 허세를 부리냐며 조소하는 이들도 있었다고.무슨 생각이냐, 돈을 시궁창에 갖다 버릴 셈인가 하지만 지금은 인간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고민을 잘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제목 자체가 사실 우리가 고민해봐야 할 문제 그 자체기도 하다.
결국 다시 타히티로 돌아간 고갱의 삶은 그야말로 궁핍과 뻘짓의 극치(...)였다. 그림을 그려서 프랑스로 보내서 친구들에게 팔아서 돈을 부치라고 했고 친구들은 어렵게 그림을 팔아서 돈을 부쳐줬다. 하지만 고갱의 경제관념 자체가 빵점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쳐진 돈은 며칠 안돼서 날리기가 일쑤였다.
이후 타히티보다 좀더 문명의 손길이 덜 탄 마르키즈 제도의 히바오아로 옮겼지만 이곳에서는 앞서 정착해있던 가톨릭 주교와 다툼을 일으켰고 현지인들을 위한답시고 총독을 비난하는 등(...) 좌충우돌 했다. 결국 알콜중독과 악화된 매독의 증세로 1903년 5월 8일 고갱은 히바오아에서 숨을 거두었다. 지금도 그의 무덤은 그곳에 있으며, 덕분에 고갱의 묘는 유명 화가의 묘역 중에서 찾아가기 가장 빡센 곳이다.(...) 고갱님 덕분에 고갱님 돈을 뜯을 수 있었습니다.
- ↑ 왜 사각형과 원이 겹쳐져 있고 그 가운데에 사람이 팔 파닥거리며 서있는 그림 있잖아.(…) 그러니까 이거.#
- ↑ 각종 산업표준 규격부터 해서 포토샵, 프로세싱 등의 프로그램까지 말이다.
- ↑ 인간의 눈은 카메라와 다르다.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보면 실제로 우리가 본 광경보다 좁아보이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는 하나의 초점만 가진 카메라와 달리 인간의 눈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실시간으로 이미지를 합성하기 때문이다. 세잔은 이를 알고 다중시점으로 그림을 그려 캔버스 안에 전후경의 많은 정물을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 ↑ 이를 작가의 시그네쳐 스타일(signature style)이라고 한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서명적 양식. 요즘 식으로 말하면 작가 고유의 그림체라 보면 된다.
- ↑ 까마귀 나는 밀밭을 그리고 권총자살을 시도했으나 한방에 죽지 못하고 사경을 헤메다 죽었다고 한다.
- ↑ 기독교 문화는 기업가 정신이 강조하는 효율성과 근면성을 뒷받침해주었다는 점에서는 장점이 있지만, 지나친 권위주의와 포용력 부족으로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능력을 감퇴시킨 점은 단점으로 지적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