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고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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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의 고갱. 건강이 많이 좋지 않아 보인다.

외젠 앙리 폴 고갱 안녕하세요 고갱님
Eugène Henri Paul Gauguin[1]

1848년 6월 7일 ~ 1903년 5월 8일

프랑스후기인상주의 화가.

프랑스인이긴 했지만 그의 가계는 거슬러 올라가면 페루를 통치하던 스페인 관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런 연고로 고갱의 어머니는 한때 어린 고갱과 함께 페루에서 산 경험이 있었다. 이때 경험한 페루 고대문명의 독특한 도자기들은 고갱의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고갱의 외할머니는 당대 과격한 페미니스트이기도 했다. 아마 고갱의 외할머니가 살아서 고갱을 봤다면 경악했겠지만. 그러나 두 사람은 닮은 부분이 있었는데 글 쓰는 데에 재주가 있었다는 것과 과격한 성품이 닮았다.(...)

본디 주식 중개인으로 넉넉하게 살아가고 있었고 여유 있는 아마추어 미술 애호가들이 주말을 이용해서 그림을 그리는 "주말화가"로서 그림을 어느 정도 그리고 있었다. 되려 이 시기에는 카미유 피사로 등의 후에 인상파 화가들로 불리던 화가들의 그림을 사줄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35세에서 돌연 처자식 내팽개치고 화가가 되었다.[2] 초기에는 프랑스 서부 부르타뉴 지방 퐁타방에서 농민의 삶의 모습을 연구하고 파리로 가서 미술계의 최신 트랜드를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고갱의 목적은 인상파들이 초기에 줬던 충격처럼 이 인간들에게 엄청난 쇼크를 주는 작품을 만들면 나는 미술계의 no.1이 되겠지라는 것에 있었다. 하지만 생각만큼 쇼킹한 작품을 내놓지는 못했다. 오히려 조르주 쇠라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에서 점묘법으로 미술계에 쇼크를 일으켜서 쇠라에게 이목이 쏠리자 쇠라의 점묘법을 가리켜 저주받은 점들이라고 칭했을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일본의 우키요에를 접하고, 어린 시절 본 페루의 도자기들을 사 모으면서 그런 경험을 살려서 도자기 만드는 작업도 했다. 이를 통해서 고갱은 유럽에서 있어봤자 모두가 놀랄 그림은 안 나오겠다. 유럽에서 떠나자.라고 결심하고 매형이 파나마 운하 건설 현장에서 근무한다는 것을 알고 파나마로 떠났다. 하지만 파나마 운하 공사는 개쪽이 나고 있었고 매형은 파산해서 고갱을 챙겨줄 처지가 아니라는 걸 알고 파나마를 떠나 마르티니크 섬에서 몇 달 간 머물렀다. 이때 마르티니크 섬에서 고갱은 자신의 스타일을 찾는 성과를 거둔다.

마르티니크에서 돌아온 후 빈센트 반 고흐와 그의 동생 테오 반 고흐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이 친구였던 것으로 유명하다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흐가 고갱을 동경해서 그를 스승으로 생각하고 자신이 있는 아를로 와주기를 간청했다. 여기에는 고흐의 이상인 화가들의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뜻도 있었다. 비록 결말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고갱은 고흐의 초청으로 아를에 있는 고흐의 집, 노란색 벽 때문에 노란 집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했던 그곳에서 9주일 동안 고흐와 함께 지내며 작업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성격과 예술관의 차이 때문에 불화가 심해졌고, 결국 고흐가 자기 귀를 자르는 자해 사건이 일어나자 고갱은 노란 집을 떠났다. 두 사람은 이후에 다시 만나지는 않았지만 오만한 고갱도 고흐의 사건이 충격이었던지 파리로 돌아간 후 귀에서 피를 흘리는 남자의 모습으로 만든 도자기가 남아있다. 근래에 고갱이 고흐의 귀를 잘랐다는 설이 돌기도 했지만 고갱의 성향이나 여러 정황으로 봐서는 그냥 설에 불과한 듯.

이후 부르타뉴로 돌아가서 "황색의 그리스도" 같은 걸작을 만든 후 1889년에 열린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동남아시아와 일본, 태평양의 독특한 문화를 접한 고갱은 다시금 유럽을 탈출하면 영감이 솟구치는 이상향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있는 돈을 다 긁어모아서 타히티로 떠났다. 심지어 타히티에 갈 때 고갱은 공식적인 초상화 화가로 자신이 파견되었다고 구라까지 쳤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무도 고갱의 구라를 몰랐던 게 타히티가 프랑스의 식민지이긴 했어도 머나먼 변방이었기 때문에 그런데서 사기를 쳐봤자 아무도 따질 생각을 안했던 탓이 컸다.(...)

고갱은 때묻지 않은 타이티의 원주민들과 교류하는 밝고 희망찬 미래를 상상했지만 현실은 시궁창. 이미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타히티는 문명화가 진행된 곳이었고 타히티의 원주민 소녀들은 뚱한 표정으로 고갱을 소닭보듯 할 뿐이었다.(...) 고갱 그림 속의 원주민 여성들의 표정이 그냥 뚱한 것은 이런 이유도 있다고.뭐야 이거

타히티에서 2년 동안 머무르면서 자신만의 그림을 체득한 고갱은 이후 프랑스로 돌아왔다. 의기양양하게 타히티에서 그린 그림들이 미술계에 쇼킹한 반응을 일으킬 것이라고 믿으면서. 하지만 파리에서 전시회를 열었지만 사람들은 이게 그래서 뭐 어쨌다고?라는 반응 정도였다. 게다가 고갱이 그림제목으로 붙인 타히티어들을 유치찬란하다라고 비꼬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작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보면 원초적인 그림과는 다르게 금테두리로 장식을 하였는데 자신의 그림이 대작이라고 확신한 고갱이 르네상스나 바로크 시대의 고전들처럼 화려한 장식을 한 것이다. 이것도 당대에는 뭔 허세를 부리냐며 조소하는 이들도 있었다고.무슨 생각이냐, 돈을 시궁창에 갖다 버릴 셈인가

결국 다시 타히티로 돌아간 고갱의 삶은 그야말로 궁핍과 뻘짓의 극치(...)였다. 그림을 그려서 프랑스로 보내서 친구들에게 팔아서 돈을 부치라고 했고 친구들은 어렵게 그림을 팔아서 돈을 부쳐줬다. 하지만 고갱의 경제관념 자체가 빵점이었기 때문에주식중개인이었다며 그렇게 부쳐진 돈은 며칠 안돼서 날리기가 일쑤였다.

게다가 외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투견본능이 충만했는지 타히티의 정치싸움에 끼어들어서 타히티에 건너온 중국인들을 대놓고 잘근잘근 씹는 글들을 현지 잡지에 기고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타히티의 중국인들은 지금도 고갱 이름만 나와도 손사래를 칠 정도라고.

이후 타히티보다 좀더 문명의 손길이 덜 탄 마르키즈 제도의 히바오아로 옮겼지만 이곳에서는 앞서 정착해있던 가톨릭 주교와 다툼을 일으켰고 현지인들을 위한답시고 총독을 비난하는 등(...) 좌충우돌 했다. 결국 알콜중독과 악화된 매독의 증세로 1903년 5월 8일 고갱은 히바오아에서 숨을 거두었다. 지금도 그의 무덤은 그곳에 있으며, 덕분에 고갱의 묘는 유명 화가의 묘역 중에서 찾아가기 가장 빡센 곳이다.(...) 고갱님 덕분에 고갱님 돈을 뜯을 수 있었습니다.

뚜렷한 윤곽선과 단순화한 형태, 음영과 그림자가 없어서 평평한 느낌을 주는 색면, 실제 대상의 색깔과는 다른 강렬한 색채가 고갱 그림의 특징이다. 그는 자연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그리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상상을 자신의 그림 속으로 녹여내서 그려냈다. 이 때문에 한때 고갱과 절친했던 카미유 피사로는 고갱을 격하게 비난했지만. 그림을 통해 자신의 감정과 내면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후대의 표현주의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문명을 혐오하고 원시와 자연을 예찬했다는 특징도 있다.

부인과 다섯 명의 아이까지 뒀음에도 여자 관계도 꽤나 복잡한 편이었다. 타히티에 간 뒤로 몇 차례 현지 여성결혼과 동거를 거듭했고, 개중에는 15세 정도의 미성년자 소녀도 있었다. 로리콘은 병입니다 고갱님... 첫번째로 타히티 생활을 하고 돌아온 뒤에 프랑스에서 머물던 시절에도 미성년자들과의 관계가 심각했다. 안나 자바네즈라는 동남아계 미성년자 소녀와 애인으로 동거하기도 했다. 다만 안나 자바네즈는 20대였음에도 고갱이 13살이라고 구라를 쳤다는 이야기도 있긴 하다.

사실 고갱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들은 좀 에누리를 해서 들을 필요가 있다. 상당한 허세의 소유자로 블리치? 그가 적은 글이나 작품에 대한 설명, 심지어는 미성년자 소녀들과의 관계조차도 말이다. 이는 고갱 본인이 상당히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과시욕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갱이 화가로서의 인생 중 상당 기간을 보낸 타히티에는 고갱 박물관이 있다. 근데 "Musèe Gaugain"이라고 간판달고 영업하는 주제에(?) 정작 이곳의 콜렉션엔 고갱의 진품 그림은 한 점도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고갱은 돈이 필요해서 그림을 그리면 말리자마자 배편으로 프랑스로 보내 팔았기 때문에 당연히도 타히티에 남은 건 없다. 고갱이 직접 만든 것으로 범위를 확대하면 도자기 하나랑 목각 숟가락 세 개가 전부. 고갱의 그림 말고, 고갱이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갔는지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가 보는것도 나쁘지 않다. 다만 타히티가 우리나라에서 일부러 가기엔 워낙 빡센 동네라... 오지

영국 작가 서머셋 몸소설 달과 6펜스의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가 이 사람 일생을 바탕으로 지어진 것이다. 하지만 달과 6펜스가 스트릭랜드의 진면모를 알린다는 취지의 내용으로 전개되는 소설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고갱을 신화적 존재로 만들어서 고갱의 진면목을 못 보게 만드는 부작용이 있다.

영국의 가수 엘튼 존은 고갱에 대한 노래 Gauguin Goes Hollywood를 썼다. 여기서 말하는 할리우드는 명성에 관한 일종의 숙어.
  1. 프랑스어 발음으로는 '외젠(/ø.ʒɛn/)'이라고 읽지만 국내에서는 어째서인지 영어식 발음인 '유진(Eugene)' 쪽으로 읽히는 경우가 더 많다.
  2. 1883년 금융위기가 닥치자 주식사업이 위축된 원인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