浪漫主義 / Romanticism[1]
1 개요
개성이 없는 고전주의(정확히는 신고전주의)[2]에 반발하여, 창작자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한, 서구 문명에서 문학작품·그림·음악·건축·비평·역사편찬의 특징을 이루는 정신적 자세나 지적 동향. 자유로운 공상의 세계를 동경하기도 한다.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유럽을 중심으로 발달했으며, 위에서 쓴 바와 같이 고전주의와 대립되는 사상이다.
1.1 배경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대부분의 예술은 바로크/로코코 양식으로서 높으신 폐하와 귀족님들을 화려하게 치장해 주는 데 급급했다. 덕분에 엄청나게 화려한 표현이 총출동했지만, 한편으론 낭비가 엄청난데다 퇴폐적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결국 프랑스 혁명을 부르게 된다. 이에 새로운 양식이 필요해지는 한편 "단정한" 예술을 하기 위해 고전주의가 "신고전주의"로 부활하게 된다. 대체로 옛날 그리스/로마의 신화나 영웅들을 주로 묘사했고, 그만큼 크고 아름다운 것들이 많았다.
그러나 창작자 자신의 세계가 없이 이전에 있었던 것을 챙기는 데에만 급급한다, 라는 반발의식이 생기면서 개개인의 공상세계를 주장하는 낭만주의가 생기며, 이 때부터 창작자 자신의 감정과 철학을 드러내게 된다.
2 미술에서
예술가는 자신의 앞에 보이는 것뿐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도 그릴줄 알아야 한다.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1774. 9. 5. ~ 1840. 5. 7.)
미술에 있어서 계몽주의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사조를 탄생시켰다. 하나는 이성적인 측면이 강조된 신고전주의였고 다른 하나는 감성적인 측면이 강조된 낭만주의였다. 낭만주의라고 하였을 때 '낭만'이라는 단어는 중세 유럽의 통속소설을 의미하는 로망(roman)에서 연원한 것이다. 그 연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낭만주의 사조의 유행은 기본적으로 중세, 더 정확히는 유럽의 고딕 문화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다. 비록 낭만주의에 속한 미술가들이 전적으로 중세의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졌다고는 볼 수 없지만 적어도 그들은 중세 통속 소설에서 보여주는 신비주의적인 요소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낭만주의가 미술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1820년을 전후로 하는 시기다. 하지만 낭만의 기원에서도 설명했듯이 기본적인 생각 자체는 이미 이전 시대에도 존재했었다. 용어 그 자체만을 따져보면 이미 1798년의 문화, 예술 관련 문건에서도 낭만주의란 용어가 보인다. 따라서 몇몇 학자들은 이 점에 착안하여 낭만주의 이전의 경향들을 묶어 전낭만주의시대로 규정하기도 한다.
낭만주의는 신고전주의의 또 다른 얼굴이다. 이것은 두 사조가 동일하게 자연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하지만 이 두 사조는 같은 자연을 두고서도 그를 이해하는 방식이 상이하였다. 낭만주의의 경우 자연을 억제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로 보았다. 이러한 생각 하에서 낭만주의자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감성, 상상력을 '자연스럽게' 발산하며 행동할 수 있다면 이를 억제하는 요소들인 종교나 제도 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보았다. 실천의 측면에서 낭만주의 미술가들은 기존의 규범적인 표현 형식을 탈피하고 주제에 있어서도 고전주의적 규범에 의거한 역사, 신화화를 최대한 배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 시기 화가들에게 부각된 것은 광기가 휘몰아치는 광경, 이국적인 전설과 자연의 풍경과 같은 것들이었다.
낭만주의 사조의 기본적인 생각 속에서 예술가 본인의 존재는 이전에 존재했던 그 어떤 사조들보다 중요하다. 결국 감성과 상상력을 발휘하는 주체는 예술가 개인이고 따라서 개인의 표현이 예술의 중요한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만큼 예술뿐만 아니라 예술가라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해서 고민한 사조는 없었다. 낭만주의 작가들이 고백록적인 성격을 띤 자서전이나 자화상 등을 자주 그렸던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심지어 몇몇 낭만주의 작가들은 이 시기 자주 그려졌던 풍경화를 자화상의 일종으로 이해하기도 했다. 터너의 경우 자신의 대표작 <눈보라- 항구 어귀에서 표류하는 증기선>을 그린 후 "난 단지 이런 장면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중략)... 그렇지만 누구에게도 이 그림을 좋아할 의무는 없다"라고 하였다. 그가 보이게 풍경을 그린다는 것은 단순히 자연의 외양을 표현하는 것이 자기 표현의 수단이었고 따라서 굳이 남들에게 이해 받아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독일 낭만주의 풍경화의 대표적인 인물인 프리드리히도 인체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거대한 자연을 통해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고자 했다. 예컨대 그는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를 통해서 개인의 심정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었다.
비단 낭만주의 사조 속에 들어간 생각 뿐만이 아니라 낭만주의 미술가 개개의 삶에 있어서도 여타 다른 사조와는 두드러지게 미술 사조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점이 많다. '광인'이라 불렸던 테오도르 제리코는 32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윌리엄 터너는 말년에 은둔 생활로 시종일관 바깥 세계와 격리된 삶을 유지했다. 그리고 이는 검은 방에서 독수공방하였던 프란시스코 고야도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낭만주의자들은 자신의 미술 사조와 삶이 밀접하게 연관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이것은 더 나아가 프랑스 혁명으로 대표되는 일련의 유럽 세계의 변화와 빈체제로 대표되는 반동적인 경향이 개인에게 미친 영향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혁명의 실패에 따른 개인의 충격이 '낭만주의적인 인간'을 탄생시켰다는 것은 비단 한 개인의 내면 세계에 대한 이해를 넘어 낭만주의와 신고전주의로 대표되는 18세기 ~ 19세기 초의 미술 경향을 이해하는 핵심적인 사실이기도 하다.
풍경화의 역사라는 측면에서 미술사를 바라보면 낭만주의는 풍경화를 역사화와 동등한 지위로까지 올려놓은 사조라고 볼 수 있다. 미술사의 큰 역사에서 르네상스 이후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역사화가 이제 풍경화의 부각으로 인해 독점적인 우위를 상실하게 된것이다. 이후 역사화가 그 지위를 완전히 상실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아카데미 미술 체제에서 역사화는 중요한 장르였고 평가에 있어서도 다른 여타 장르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만약 낭만주의자들이 풍경화의 지위를 상승시켜 놓지 않았다면 이후의 ism시대로 상징되는 19세기의 여러 사조들이 풍경화를 통해서 자신의 사조를 표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한 발 더 나아가 장르간의 위계가 더 이상 의미가 없으며 위계 자체가 18세기의 구체제를 답습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을 알려주었다.
낭만주의자들은 단순히 풍경을 묘사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풍경에 어떠한 가치를 부여하려고 했고 그러한 가치는 '영웅적인 풍경화', '종교적인 풍경화'라는 용어가 등장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이 두 용어는 풍경화와 낭만주의 그리고 낭만주의가 존재할 수 있었던 문화적인 배경을 동시에 설명해주는 용어 중 하나다. 영웅적인 풍경화라는 단어에서는 12~13세기 중세의 영웅담에 대한 낭만주의자들의 관심과 이를 풍경화로 은유, 혹은 전이하여 드러내려는 화가들의 생각이 드러나고 종교적인 풍경화라는 점도 중세 고딕의 종교적인 분위기를 풍경화라는 수단을 통해서 표현하려는 의도가 담겨져 있다. 물론 이러한 인식은 당대 낭만주의 작품들의 양상에 큰 역설을 드러낸다. 즉, 낭만주의 화가로 분류되는 화가들 조차도 신고전주의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는 역사화의 내용을 담은 경우가 많아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종교적인 색채라는 것은 역으로 그들이 18세기 계몽주의 사상으로 말미암아 탈피했던 종교적인 색채를 주관적인 영역에서 다시 적용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이것이 낭만주의가 사상적으로 오류에 이르렀다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역설. 그 자체도 사실은 낭만주의의 주관성과 역동성이 파생한 한 단면인 것이다.
낭만주의 예술가들의 자기 탐구는 창조성의 발견이라는 점이 핵심이었다. 양식의 기원에 있어 낭만주의는 결국 18세기에 발생한 일련의 억압적인 체계들에서 파생되어 나왔다. 미술의 측면에서 이런 억압은 표현 형식, 주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고 그것은 역사화로 대표되는 정형화된 미술 형식을 낳게되었다. 낭만주의자들이 줄곧 염두해 두었던 창조성이라는 점은 18세기 미술이 보여주었던 다소간의 획일적인 시점에서 탈피하고자 한 수단이었다. 따라서 낭만주의 예술을 특징짓는 기본적인 속성은 반항, 소외, 고통, 광기등과 같은 단어로 규정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낭만주의는 개인의 창조성 탐구, 현실 세계에 대한 절망으로 인하여 현실도피적 성격을 띄는 경우도 많았다.
3 문학에서
문학계 역시 독창적인 걸 추구하는 한편 감성과 이상세계, 이국적인 경향을 추구한다.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글씨〉,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의 작품을 비롯해 윌리엄 워즈워드, 위고, 바이런, 하이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등이 여기에 속한다.
4 음악에서
음악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 중 하나이다. 1810년대부터 1920년대[3]사이로 간주되며, 흔히들 19세기 음악이라고 하면 이 시기를 통칭한다. 이 시기를 수식하는 데는 주관적, 개인적, 극단적, 비현실적, 초자연적과 같은 어휘가 붙으며, 고전주의에서 탈피하는 모습이 보인다.
고전주의 음악을 아폴론적 음악이라고 흔히들 일컫듯이, 낭만주의 음악은 디오니소스적 음악이라고들 한다. 중세를 모델로 하는 경우가 많다. 음악계의 판타지 소설. 실제로 주제가 그렇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인권과 개인주의에 영향을 받게 된다. 이 시기에는 다른 분야의 예술과 통섭적인 교류가 이루어지는데, 문학가나 화가들과 밀접하게 주제의식을 교류하는 면이 있다.
산업사회가 진척된 결과로, 악기가 개발됨으로써 대량으로 보급되기 시작하며, 늘어난 음악 수요에 맞춰 공개음악회를 위한 연주홀이 개장되기도 한다. 이것들은 시간이 지나서 그 지역의 좋은 돈줄 랜드마크가 된다.
비루투오조와 같은 명인기를 갖는 대가가 출현, 이 중 피아니스트인 프란츠 리스트는 '초절기교연습곡' 같은 고난이도 연습 프레이즈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실용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면 들어봤을 지옥의 메커니컬 트레이닝 시리즈가 이 시기에 나왔던 거나 다름없다. 흠좀무.
예술가곡(시+노래)으로서 슈베르트, 슈만, 요하네스 브람스 등이 아성을 떨쳤으며, 당시로서 이국적이라 평가받았던 스페인이나 터키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이 시기를 관통하는 유명한 음악으로 슈베르트의 Sonata en A minor Arpeggione D821이 있다. 흥미있는 사람은 감상해볼 것.
낭만파와 현대음악 사이에 '후기 낭만파'가 들어가는데, 이때는 화음, 불협화음 모두 최대치로 쓰이게 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트리스탄 코드가 그 예시. 그래도 아직까지는 조성이 살아있지만. 리하르트 바그너, 주세페 베르디, 안톤 브루크너, 자코모 푸치니, 구스타프 말러가 여기에 속한다.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인상주의 음악의 클로드 드뷔시도 있다. 바그너를 가리켜 '새벽으로 위장한 황혼'이라 표현할 정도로 시대를 앞서간 모양을 보이나, 이후 현대음악이 뜨면서(...)
자세한건 클래식 관련 정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