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인 참수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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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어: 百人斬り競争
영어: Contest to kill 100 people using a sword
파일:Attachment/100인 참수 경쟁/test.jpg

1937년, 난징 대학살 사건 당시 일본의 두 장교가 전쟁포로와 민간인을 누가 더 많이 살해하는지를 겨룬 사건.[1]

2 사건 상세

파일:Attachment/100인 참수 경쟁/일본의 흔한 쓰레기.jpg

일본군 무카이 토시아키(向井敏明) 소위와 노다 츠요시(野田毅) 소위[2]일본도(日本刀)로 누가 먼저 100인을 참수 시키는지를 겨뤘다고 보도되었는데, 당시 신문에 게재된 100인 참수시합의 기사는 다음과 같았다. 몹시 잔인한 내용을 담고 있으니 읽기 전에 주의할 것.

<1937년 11월 30일자 도쿄 일일신문 조간 - 제 1보>

(제목) 100인 참수경쟁! 양 소위, 빨리도 80명.[3]

상열(常熱), 무석(無錫)간의 40km를 6일간에 답파한 ○○부대의 쾌속은 이것과 동일한 거리의 무석, 상주(常州)구간을 3일만에 돌파했다. 이것은 신속, 쾌진격, 그 제일선에 선 카타키류(片桐)부대에 <백인참수경쟁>을 꾀한 2명의 청년장교가 있다. 무석출발 후 재빠르게도 한 사람은 56명을 베었고, 한 사람은 50명을 베었다고 한다. 한 사람은 도야마 부대의 무카이 토시아키 소위(26세)

- 야마구치 출신 - 한 사람은 같은 부대의 노다 츠요시 소위(25세) - 가고시마 출신 -

총검도(銃劍道) 3단의 무카이 소위가 허리에 찬 보도 <세키노 마고로쿠>를 휘두른다면 노다 소위는 무명검이지만 선조 대대로의 보도라 말한다. 무석출발 후 무카이 소위는 철로를 따라 16,7km를 따라 대이동하며 전진, 노다 소위는 철도노선 앞에서 전진하면서 일단 둘은 헤어졌다. 출발 다음날 노다 소위는 무석에서 80km 떨어진 무명부락에서 적 토치카에 돌입해 4명을 베면서 선진의 이름을 떨쳤다. 이를 들은 무카이 소위는 분연히 야간에 적진에 부하와 함께 뛰어들어 55명을 베어넘겼다. 그 후 노다 소위는 횡림진에서 9명, 위관진에서 6명, 19일 상주에서 6명, 합계 15명을 베었다. 무카이 소위는 그 후 상주역 부근에서 4명을 베고 기자가 역에 갔을 때 두 사람이 역전에 서 있는 광경과 마주쳤다. 무카이 소위는 남경과 단양에서 백명을 넘게 베었다고 해서 노다의 패배였다. 무카이의 칼은 56명을 베었지만 날이 상한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노다 소위는 두 놈이 달아나버려 베지 못했다고 하며 대신 고관을 처치했으니 내가 성적이 더 위가 아닌가 하고 단양까지 대기록을 세우겠다고 했다.

<1937년 12월 4일 도쿄 일일신문 조간[4] - 제 2보>

제목) 급핀치로 활약, 백인 참수경쟁의 경과

남경까지 백인참수경쟁을 시작한 ○○부대의 급선봉 카타키류 부대, 도야마 부대의 두 청년장교, 무카이 토시아키, 노다 츠요시 소위는 상주 출발이래 분전을 더하여 2일 오후 6시 단양에 입성하기까지 무카이 소위는 86명 참, 노다 소위는 65명을 참하는 서로 호각인 대접전을 이루어냈다. 상주에서 단양까지 십리간에 전자는 30명, 후자는 40명의 적을 베었다는 것으로, 장렬하다고 말할아수라의 분전이었다. 이번에는 두 용사가 함께 철로를 따라 이동하면서 우진, 여성진, 능구진의 적진에 뛰어들어 적들을 베어넘겼다. 그 중에서 무카이 소위는 단양중정문의 일차돌입을 결행했는데 노다 소위도 우측 손목에 경상을 입었지만 이 백인참수경쟁은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루어냈다. 기자 등이 단양입성 후 숨을 돌릴 새도 없이 추격을 실행하는 도야마 부대를 쫓아갔지만 무카이 소위는 행군대열 속에서도 여유를 부리며 이야기하더라. 노다녀석이 갑자기 따라와 놀랐다. 노다의 상처는 가벼워 염려않는다. 능구진에서 벤 놈들의 뼈에도 나의 마고로쿠는 한 군데도 상한 곳이 없다, 아직 백명, 이백명을 더 벨것이다. 기자가 심판관이 되어 주구려라 말하더라.

<1937년 12월 6일 도쿄 일일신문 조간 - 제 3보>

(제목) 89-78, 백인베기, 대접전/ 용장! 무카이, 노다 양 소위!

남경을 둘러 싼 백인참수경쟁의 두 청년장교, 카타키류 무카이 토시아키, 노다 츠요시 소위는 무사히 입성했지만 최전선에 서서분전. 입성직전까지 전적은 무카이 소위가 89명, 노다 소위가 78명이라는 접전이었다.

<1937년 12월 13일 도쿄 일일신문 조간 - 제 4보>

(제목) 백인베기 "초기록" 무카이 106-105 노다 / 양 소위들은 연장전

남경에 들어서기까지 백인참수경쟁이라는 진기한 경쟁을 시작한 이례적인 카타키류 부대의 용사, 무카이 토시아키, 노다 츠요시.양 소위는 10일간 자금산 공략전 등에서 106대 105라는 레코드를 작성하여 십일 정오에 양 소위는 대단한 서로의 칼날을 지닌 일본도를 한 손에 쥐고 대면했다. 노다 왈 <이봐, 나는 105명인데 너는?> 무카이 왈<나는 106이다!>미친놈들 할말이 없다....양 소위는 아하하하 하고 웃으며 결국 어디까지 누가먼저 백명을 벳는가를 불문에 하기로 하고 <이건 비겼다. 하지만 150명은 어떤가>하여 일치단결해 십일 이내에 150명 베기에 들어갔다. 십일일 낮에 중산릉이 내려다보이는 자금산에서 패전병 사냥에 한창이던 무카이 소위가 백인베기 무승부의 결말을 위해(중략)..양 쪽은 백명을 넘기면 원래 서로의 칼을 내기로 하였다더라...(사진 상 게재)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大阪毎日新聞)

(표제) 난징을 향한 상쾌한 목 베기 경쟁
관의 손육(關의 孫六)은 56명을 베었고, 전래의 보도는 25명을 쓰러뜨리다. 카타기리 부대의 두 소위
100인 목 베기를 계획한 청년장교 두 명이 있다. 이 경쟁은 무석(無錫,우시) 에서 출발할 때 시작되었는데, 한 사람은 이미 56명을 자르고, 또 한 사람은 25명을 잘랐다고 한다.한 사람은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 소위(26)이고, 또 한 사람은 같은 부대 노다 다케시(野田毅) 소위(25) 였다. 이 두 사람은 무석입성과 시작된 주력전에서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난징도착까지 100인 목 베기 경쟁을 하자라고 얘기했다. 두 사람에게 "이 이야기가 신문기사로 나가면 신부후보들이 많이 오겠네요"어떤 골빈년이?[5]라고 했더니 80여 명을 벤 두 용자들이 얼굴을 붉히며 쑥스러워 했다.

이 기사 쓴 기자 색히도 기관총으로 갈겼어야 했는데.... 최소한의 저널리즘 원칙과 인간으로서의 도덕심까지 내다버린 기자놈의 패기에 무릎이 꿇려진다.

더욱더 기가 막힌 내용은 나중에 500명 베기의 약속까지 했다.

참고로 이 기사를 쓴 기자는 나중에 변명하길 "나는 총 든 군인만 죽인줄 알았다"라는 주장을 했다. 그냥 취재만 한 것이어서 전범재판에서도 증인으로만 출석. 연합국의 설명을 듣고 진심으로 허탈해한 걸 보면 거짓이 아닐 공산이 크다. 당장 기사만 봐도 적진에 뛰어든다든지, 토치카에 돌입한다든지, 고관을 베었다든지, 적군이라든지, 군인이라는 걸 기본으로 전제하고 쓴 글이다.

3 전쟁범죄가 된 이유

칼 들고 전장에서 적군 목베기를 하며 싸우는 것은 정말 싸이코 같긴 하지만국제법상 전쟁범죄가 아니다. 즉 기사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들은 구시대적이고 무모하다는 평가를 받을지언정 전쟁범죄자는 될 수 없었다. 문제는 이 기사 내용이 거짓이라는 것. 그리고 그 뒤에 밝혀진 진실이 추악한 걸 넘어 성악설을 믿고 싶을 정도라는 데 있었다. 애초에 평범한 장교 둘이 공적을 부풀리려고 거짓말을 한 거였다면 평생 놀림감이 되었을 지언정 이 항목이 만들어질 일은 없었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이들 말고도 전장에서 칼로 무쌍을 펼친 인간병기들이 소수나마 있었고, 대부분은 전쟁범죄자 취급은 커녕 영웅 대접을 받았고 전후에도 용감한 군인으로 인정받았다. 이러한 인간병기들의 경우, 단시간의 치열한 백병전에서 갈고 닦은 실력이 빛을 발한 경우. 그러나 이 두 놈과 그 외 전쟁범죄로 처벌된 자들은 민간인이나 포로를 상대로 참수경쟁을 벌였다는 점에서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생각해보자. 중일전쟁 당시 중국군은 전쟁 초기에는 나치 독일로부터 무기를 공급받고, 중후기에는 미국으로부터 군수지원을 받은 적어도 장비는 적지 않이 현대화된 군대였다. 다만 훈련수준, 정신무장, 전술교리나 지휘가 막장이어서 일본군에게 힘을 쓰지 못한 것으로 봐야 한다. 당시 일본군들의 수기만 보아도 중국군의 독일식 장비가 더 우수하다는 평가가 적잖게 나온다. 중국군이 독일제나 미국제 화기로 무장하고 있는데 정상적인 교전 중에 이들의 머리를 100명이나 벤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중세 시대였다 하여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이렇게 무쌍을 찍는다면 석궁이건 활이건 원거리 무기로 먼저 저격당했을 것이다. 결국 이 두 놈들의 100인 참수 운운은 무력한 포로나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경우가 아니라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전장이라는 특수상황상 도검류를 이용하여 적 병사를 살상하는 것 자체는 무조건 비난하기 어려운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걸 두고 누가 더 사람을 많이 죽였는지 '경쟁' 한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고, 그걸 즐기고 자랑했다는 것은 더욱 다른 문제이다. 전장의 군인으로써 적을 죽였다전장에서 적을 죽이는 것을 즐기며 누가 더 많이 죽였는지 경쟁하고 자랑했다 벌써 써 놓기만 해도 전혀 다르지 않은가? 이 면에서 보면 해당 사례를 보도한 기자 역시 살인행위를 무슨 운동 시합처럼 상쾌한 느낌으로 기사화 한 시점에서 도저히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인간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애시당초 참수 경쟁이라는 말도 할 수 없다. 힘없는 사람들을 마구 죽이는 행위에 경쟁이라는 개념이 존재할 수가 없으니까.

실제로 이들의 참수 경쟁을 그냥 전투에서 중국군 참수하는 경쟁이라고 믿고 쓴 기자도 나중에 실상을 알고는 허탈해했다고.

4 처벌

사실 참수 경쟁에 가담한 자들은 한둘이 아니었지만 상술한 이유로 대부분은 전쟁영웅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민간인과 포로를 대상으로 참수경쟁을 벌인 이 2명을 비롯해 몇몇은 결국 일본이 패하자 전범이 되어 체포되었고, 이후 300명 베기를 한 인간도 숨어 살다가 체포되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46년에 극동군사재판의 법정에 서게 되었다. 무카이와 노다는 그렇게 사람 죽여대며 의기양양할 때는 언제고 그야말로 하얗게 질려서 100인 참수 경쟁은 신문기자들이 멋대로 지어낸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증거는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았고 용케 살아남은 증인들도 수천명에 달했다.

극동군사재판은 A급 전범만 다루기 때문에 이들은 B, C급 전범으로 분류되어 현지 재판을 받기로 하고 1947년 9월 2일에 난징의 국민당 정권으로 신병이 인도되었다. 그리고 무카이와 노다는 전쟁포로의 학살 및 민간인 살인이 인정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1948년 1월 28일에 난징의 우화대(雨花臺)에서 노다와 함께 총살형으로 다나카 군키치[6]와 다니 히사오와 처형된다.

다니 히사오의 경우에는 워낙 헌병들에게 얻어맞았는지 유언도 못 남기고 죽었다. 꼴좋다

5 기타

일본 극우들은 일본도는 3명만 베도 날이 무디어지므로 이런 만행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어떤 의미로는 자기네 물건도 디스하는 것이라고 비웃을만 하지만 이 극우들이 때론 일본도로 멋지게 활약할 때는 일본도의 우수성을 이야기하는 걸 생각하면 이랬다 저랬다 개소리하는 거다.[7] 필요할때만 일본도의 우수성을 지껄이다가 쓰레기인 이 놈들을 이야기하면 일본도를 디스하는 통에 국제적으로 더 까인다.

훗날 무카이의 딸과 노다의 아내, 손녀는 아주 뻔뻔하게도 아사히 신문과 마이니치 신문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해 우익단체들의 재정지원을 받으며 대법원에까지 상고했지만 당연히 패소했다. 애초에 이딴 놈들에게 명예 따위가 있을리가....

여담으로 강제규 감독의 영화 마이웨이의 조연들의 극중 성이 무카이와 노다이다. 아무래도 전술된 두 명에서 따온 이름으로 보인다.
  1. 사건의 명칭은 100인 참수 경쟁이긴 하지만, 두 장교 다 100인 참살을 달성하고도 살인을 멈추지 않았고, 이후엔 150인 베기, 300인 베기 등의 정신 나간 짓거리를 계속 했다.
  2. 게다가 더 어처구니없는 내용은 전자는 포병 소대장이었고 후자는 대대의 부관이었다. 그러니까, 최전선에서 백병전을 치루며 적군을 참수한 게 아니라 100% 포로나 민간인을 베었다는 것. 당연하지만 실전에는 나간적도 없다.
  3. 정작 진짜 전투때는 공포에 질려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아무런 작전지휘를 못 내렸다. 답이 없는 작자들이다.
  4. 도쿄일일신문은 동명으로 조간지와 석간지의 2가지가 존재한다. 조간이라 기재한 것은 동명의 석간지와 구분하기 위한 것. 참고로 이 신문은 현 일본의 3대 일간지가 되는 마이니치 신문의 전신이다
  5. 반전! 이놈들은 나중에 결혼한다. 눈도 없다 끼리끼리지 뭐
  6. 민간인과 포로를 300명 이상 학살한 전범.
  7. 기사에서 명검 마고로쿠 카네모토를 사용한 것으로 나오는데, 에도시대야마다 아사에몬이 직접 시체를 여러 번 베어가면서 최고등급 도검인 사이죠오오와자모노(最上大業物)로 분류한 물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