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 제11 기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
(11.SS-Freiwillg.Panzergrenadier-Division 'Nordland')
1 개요
독일군 무장친위대에 속해 있던 외인부대 중 하나. 순혈 아리아인, 그 중에서도 나치가 가장 애호하던 바이킹 혈통이었기 때문에 SS의 칭호를 다는 것이 허가된 부대이다.
2 사단의 창립
1941년 7월에서 8월에 걸쳐 덴마크 의용병인 SS 자유군단 '단마크(Danmark)', 노르웨이 의용병인 SS 의용군단 '노르베겐(Norwegen)'이 편성되었다. 전자는 자동차화 보병대대로 부대본부, 3개 자동차화 보병중대, 1개 중장비중대(1개 전차소대, 1개 대전차 라이플소대를 합쳐서)로 구성되었고, 후자는 1개 보충대대 정도의 병력이었다.
1943년 5월, SS 제5 기갑척탄병사단 '뷔킹'(SS5PzD, Wiking)의 SS 척탄병연대 '노르트란트' 제Ⅰ대대와 당시 레닌그라드 포위전에 투입되어 있던 앞서 설명한 의용군단 2개를 모체로 그라펜베어 훈련소에서 1개 SS 기갑척탄병사단의 편성이 개시되었다. 새로운 사단장인 프리츠 폰 숄츠(Fritz von Scholz) SS 준장은 1941년 12월 로스토프 부근에서 SS5PzD 척탄병연대 '노르트란트'의 연대장으로 소련군 5개 사단과 1개 전차여단의 공격을 4일간 저지하여 전선 붕괴의 위기를 구한 공적으로 42년 1월 18일부로 기사십자장을 수여받은 맹장이었다. 그후 사단은 크로아티아로 이동하여 부대 훈련을 실시하고, 1943년 10월 22일 SS 제11 기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로 정식 명명되었다. 아래는 당시의 편성표이다.
SS 제11 기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Nordland)'
병력: 11,393명(12월 31일 현재)
-사단본부: 사단본부 중대, 지도반, 야전헌병대 외
-SS 제23 기갑척탄병연대 '노르게(Norge)'(SS23PGR)(3개 대대+1개 공병중대+1개 대전차포중대
+1개 고사포중대, 각 대대는 3개 중대+1개 중장비중대로 제Ⅰ대대는 1944년부터 SPW 장비)
-SS 제24 기갑척탄병연대 '단마크(Danmark)'(SS24PGR)(SS23PGR과 동등)
-SS 제11(자동차화) 포병연대 '노르트란트'(본부중대)
제Ⅰ~Ⅱ대대: 10.5cm 경유탄포 18형 각 12문
제Ⅲ대대: 15cm 중유탄포 18형 각 12문
-SS 제11 장갑정찰대대
제1중대: 8륜장갑차(Sd.Kfz.231)
제2중대: 장갑병차(Sd.Kfz.250/9)
제3~4중대: 장갑병차(Sd.Kfz.250,251)
제5중대: 전차엽병소대, 보병포소대, 기갑공병소대(Sd.Kfz.251 수투카 장비), 슈툼멜소대 8량)
-SS 제11 전차대대 '헤르만 폰 잘쩌(Hermann von Salza)'(SS11'HvS')(4개 전차중대)
제1, 3중대: 돌격포 각 14량
제2, 4중대: Ⅲ호 및 Ⅳ호전차 ?량)
※ 1944년 3월부터 판터 배치
-SS 제11 돌격포대대(1944년 9월에 SS 제11 전차엽병대대로 개편)
-SS 제11 고사포대대(3개 중대는 각 88mm 고사포 4문, 1개 중대는 37mm 또는 20mm 고사포?)
-SS 제11 공병대대, SS 제11 야전보충대대, SS 제11 통신대대 외 통상지원부대
1943년 11월, 사단은 철도로 북방군집단 전선의 제18군 SS 제Ⅲ군단으로 수송되어 레닌그라드 서방의 오라니엔바움 포위진의 키로바 부근으로 투입되었다. 44년 1월 14일, 소련군의 총공격이 실시되어 우익의 공군 지상사단 전선으로 8개 저격병사단과 3개 전차여단이 공격해 들어오고 동시에 레닌그라드 전선에서 소련 제42군의 공격이 개시되었다. 이로 인해 1월 19일에는 3개 사단이 포위되었고 전선은 모두 붕괴되어 사단은 남서 방향으로 후퇴를 개시하였다. 1944년 1월 26일 이른 아침, 퇴각 도중 소련군 기갑부대의 대군을 SS 제11 기갑정찰대대 제5중대가 맞아 싸워 75mm 대전차포 3문과 75mm 단포신 슈툼멜 8량의 빈약한 무장으로 전차 48량을 포함한 61량의 소련군 장갑차량을 격파하였다. 이중 11량은 카스파 슈포크(Kaspar Sporck) 중사가 75mm 대전차포를 가지고 혼자서 격파한 것으로, 10월 23일부로 기사십자장을 수여받았다.
3 나르바 전선
1944년 2월, 사단은 다른 부대와 함께 나르바강까지 후퇴하였다. 전략상 중요한 나르바강 동안 지구에는 SS24PGR과 SS 척탄병여단 '네달란트(SS'NDL')'가 배치되었고, 남측면은 SS23PGR, SS 제4 기갑척탄병사단의 일부, 파울 알베르트 카우슈(Paul-Albert Kausch) SS 중령 휘하의 SS11'HvS', 그리고 오토 카리우스 소위 지휘의 1개 티거 소대를 포함한 제502 중전차대대 제2중대가 배치되었다. SS11'HvS'는 1944년 3월 31일 당시, 판터 12량(수리중 7량)을 보유하였고, 이들 판터와 티거를 장비한 부대들이 교두보의 중핵이었다.
사단은 7월까지 나르바 교두보에서 계속되는 소련군의 공세를 격퇴하였으나 소련군의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중앙 집단군이 붕괴되어 남쪽에 큰 구멍이 생겼고, 7월 11일에는 소련군 20개 사단이 나르바 교두보로 총공격울 개시하여 교두보에 있던 군은 나루바에서 약 20km 서쪽의 '탄넨베르크 라인'까지 후퇴하여 방어 선을 재구축하였다. 방어선의 서열은 북쪽부터 SS 제20 의용사단 '에스토니아 제1', SS'NDL', SS24PGR, SS23PGR의 순으로 타린, 나르바 가도를 완전히 차단하였고, SS24PGR의 배후에는 최신병기인 48연장 네벨베르퍼 탑재의 마울티어를 장비한 SS 제521 다연장로켓중대가 배치되었다. 1944년 7월 27일 새벽 6시, 소련군의 총공격이 개시되었으나 SS 제11 전차대대의 돌격포 12량이 반격하는 등 제1파는 격퇴하였다. 그러나 적의 맹공은 다음날도 계속되었고, 포격으로 인해 사단장인 숄츠 SS 준장이 전사(사후인 8월 5일부로 전군에서 85번째 기사검십자장을 수여)하는 등 대손실을 입었으나 7월 29일까지 무려 113량의 적 전차를 격파하는 등 분전하여 방어선을 겨우 사수하였다. 새로 사단장을 맡게 된 요아힘 자이츨러(Joachim Ziegler) SS 소장은 취임 후인 9월 5일부로 철십자 훈장중 기사 철십자장을 수여받았다.
4 쿠를란트 회전과 포메라니아
1944년 9월 18일, 에스토니아에서의 후퇴작전이 발령되어 사단은 SS 제Ⅲ전차군단과 기타 부대 등과 함께 펠나우, 드블렌을 경유하여 10월 13일에는 플레크린 부근 남서에 도달하였다. 이 전선에서 사단은 10월 16일, 10월 27일, 12월 21일, 1월 23일의 제1~4차 쿠를란트 회전을 벌였다. 사단은 연속된 대전투로 대타격을 입어 1월 23일의 제4차 쿠를란트 회전시, SS24PGR 제Ⅱ대대 제6중대의 병력은 4명, 제7중대는 15명으로 감소된 상태였다. 1945년 1월 31일까지 SS 제Ⅲ전차군단의 잔여는 르부프에 집결하여 슈테틴으로 해상수송되어 재편성이 개시되었다. 이때 SS11'HvS'의 명칭이 SS 제11 전차연대 '노르트란트'로 개칭되었지만 실제 병력은 1개 전차대대 정도였다.
전국은 이미 위기적 상황이었고, 1월 12일부터의 대공세로 소련군의 선두는 오데르강에 도달하였다. 이를 막기 위해 편성 도중의 SS11'HvS'의 잔여 돌격포 10량, 슐츠 슈트레크(Karl-Heinz Schulz-Streeck) SS 중위 휘하의 SS 제11 돌격포대대의 돌격포, SS 제503 중전차대대의 티거 2 3량과 제25 강하엽병연대의 일부로 2월 8일부터 샤코부하겐 부근에서 적의 북측면으로 반격을 개시하였고, 2월 16일에는 긴급동원된 편성중인 SS23PGR과 SS24PGR 등의 사단 주력으로 포위중인 안스발데(Arnswalde)로의 공격을 실시하여 그날 중으로 포위를 풀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SS 제11 돌격포대대는 16일에 22량, 2일 후에는 17량의 적 전차와 대전차포 다수를 격파하였고, 3량의 T34를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어 슈트레크 SS 중위는 5월 2일부로 기사십자장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후에 행해진 반격작전 '지점 작전'(Operation Sonnenwende)이 실패하였다. SS 제11 돌격포대대만이 포메른를 경유하여 3월 20일 오데르 강 서안으로 후퇴하였다. 또한 이때 SS11'HvS'의 가동전차는 돌격포 6량과 4호전차 2량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5 베를린 공방전
1945년 4월 7일, SS 제11 기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는 SS 11'HvS'의 3호 돌격포 26량(가동상태 24량), 4호 L70V ZL 10량, 제Ⅱ대대로 편입된 헬티히 SS 소령 지휘의 SS 503 중전차대대의 티거 2(Tiger-II) 12량(가동상태 10량), 4호 대공전차 8량(가동상태 7량)을 보유한 채 제3 전차군(3.Pz.Armee)의 슈베트 전구에 있었다. 소련군의 베를린 총공격이 개시된 4월 17일, 사단은 제9군의 예비부대가 되어 제로우 고지에서 대손실을 입어 후퇴중인 칼 바이틀링 대장 지휘의 제56 전차군단(제9 강하엽병사단, 제20 기갑척탄병사단, 전차사단 '뮌헤베아크')에 배치되었고, 베를린 동쪽의 슈트라우스베르크 부근에서 해일처럼 밀려온 소련군의 선두 기갑부대의 전면에 위치하였다. 사단은 군단의 후위를 떠맡아 포위되면서도 그때마다 돌파하여 남서 방향으로 물러났고, 4월 23일 밤에는 베를린 시가로 후퇴하는데 성공하였다. 4월 26일, 사단의 잔여는 새 사단장인 구스타프 쿠르켄베르크(Gustav Krukenberg) SS 소장의 지휘로 티거 2와 돌격포의 지원 아래 총통관저 남동의 운터 딘 린덴 부근에서 절망적인 방어전을 개시하였다.
4월 29일 히틀러는 자살했지만 사단의 생존자들은 5월 1일까지 티거 II 5량, 4호전차와 돌격포 6량을 가지고 하렌제역 부근에서 일보도 물러서지 않고 방어선을 사수하였다. 다음날 한밤중, 최후의 티거 II 2량을 선두로 탈출전이 벌어졌다. 여기까지 살아남은 많은 장병이 목숨을 잃거나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고, 한줌의 스칸디나비아 의용병만이 엘베 강까지 도달하였다.
이 부대의 1개 소대가 라이히스탁(제국의사당)에서 소련군 1개 연대를 반나절동안 방어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결국 전멸당하고 라이히스탁에 적기가 계양된다.
6 평가
SS 제11 기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는 엘리트 사단의 하나로, 스칸디나비아 의용병은 최후의 1명까지 히틀러를 위해 베를린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 때문에 주요 SS사단인 LSSAH, 다스 라이히, 토텐코프, 비킹, 노르트 등과 함께 최강의 SS사단으로 부른 전사연구가도 있다.[1] 기사십자장 수령자가 31명에 이르고, 후기에는 전차연대까지 보유하였다. 하지만 유난히 독특한 정체성을 가진 제10 SS기갑사단 프룬츠베르크와 전쟁 말기의 발악에 가까운 제12 SS 기갑사단 히틀러 유겐트의 틈에 끼여 있고, 활약한 기간이 전쟁말기로 방어전의 성격이 짙어 제 6 SS산악사단 노르트와 함께 지명도가 낮은 취급을 받은 정예사단이라고 할 수 있다.
부대 장병 중에는 핀란드 출신도 있는데, 이들은 도중에 핀란드로 귀국하여 핀란드군에서 계속 복무하였다. 하지만 소수의 신원 미상의 핀란드계 병사들이 계속 SS사단에 남아 있다가 베를린 공방전 때 전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