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당시 존재했던 독일국방군 및 무장친위대 소속 외국인 병력에 대한 문서이다.
목차
- 1 개요
- 2 국가별 상세
- 2.1 그리스
- 2.2 네덜란드
- 2.3 노르웨이
- 2.4 덴마크
- 2.5 라트비아
- 2.6 러시아
- 2.7 루마니아
- 2.8 리투아니아
- 2.9 미국
- 2.10 벨로루시
- 2.11 보스니아
- 2.12 불가리아
- 2.13 세르비아
- 2.14 스웨덴
- 2.15 스위스
- 2.16 스페인국
- 2.17 슬로바키아
- 2.18 아르메니아
- 2.19 알바니아
- 2.20 에스토니아
- 2.21 영국
- 2.22 왈론
- 2.23 우즈베키스탄
- 2.24 우크라이나
- 2.25 이탈리아
- 2.26 인도
- 2.27 조지아
- 2.28 코사크
- 2.29 크로아티아
- 2.30 키르기스스탄
- 2.31 타타르
- 2.32 투르크멘
- 2.33 프랑스
- 2.34 플랑드르
- 2.35 핀란드
- 2.36 헝가리
- 3 한국인 독일군?
- 4 말로
- 5 창작물에서의 등장
- 6 관련항목
1 개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사실상 전 유럽을 상대로 혼자서 싸웠다. 당연히 전쟁 내내 독일군은 병력 부족에 시달렸고, 국방군과 무장친위대를 가리지 않고 외국인 장병들을 다수 입대시켜 독일 편에서 싸우게 했다. 전쟁 후반으로 갈수록 병력 자원을 두고 각군간의 다툼이 심해지면서 외국인 부대를 육군에서 무장친위대로 강제 전속시키는 사례도 잇따르게 된다.
독일군에 복무한 외국인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당연히 먼저 거론되는 이들일수록 선발 우선순위였다.
- 주로 동유럽에 거주하는, 독일계 외국인 : 이들은 독일어로는 폴크스도이체(Volksdeutsche), 영어로는 에스닉 저먼(ethnic German)이라고 한다. 이들은 그냥 독일인으로 취급되었으므로 애초에 "징병"된 경우가 많다.
- 스칸디나비아, 네덜란드 등 북유럽계 외국인 : 독일인과 동족인 게르만족으로 간주되었으므로 역시 전쟁 초기부터 우대받았다. 나치는 장차 유럽을 정복하면 이들을 그냥 독일인으로 취급할 예정이었지만, 아직까지는 다른 나라 국민이므로 징병은 하지 않고 자원 입대자만 받았다. 다만 룩셈부르크는 독일에 합병되어 청년들이 독일군에 징집되었다.
- 기타 서유럽, 남유럽, 동유럽, 아시아, 아프리카계 외국인 : 애초에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지만 병력 부족 문제 때문에, 또는 정치적인 목적에서 상징적인 카드로 받아들인 병력이다. 국가별 항목에서 후술한다.
2 국가별 상세
국가 기준. 독립국가가 없는 민족이거나, 별도 기술이 필요한 경우 별도 항목으로 독립시켜 서술한다.
정식으로 독일군에 편입된 인원만 서술 대상이므로, 슬로바키아군이나 살로 공화국군, 밀리스 등의 괴뢰군은 포함시키지 않는다.
소련 출신자는 출신 공화국 또는 민족별로 구분해서 서술한다. 각기 동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2.1 그리스
2.2 네덜란드
2.3 노르웨이
2.4 덴마크
2.5 라트비아
2.6 러시아
소련 포로 출신 안드레이 블라소프 장군이 조직한 육군의 ROA가 유명하다. 하지만 이외에도 카민스키 여단 등 독일군 편에서 싸운 러시아인의 수는 상당히 많았다. 전쟁 첫해만 해도 독일군은 대부분의 러시아인 포로를 처형하거나 방치해서 죽게 했지만, 병력 부족이 심각해지면서 독일군에 지원하는 이들은 받아들여 활용했다. 다만 이들을 별도 부대로 편성한 것이 아니라, 미군이 카투사를 쓰는 것처럼 독일군 부대에서 보조요원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들을 히비(Hiwi)라고 부른다.
러시아인들이 독일군에 지원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하나는 공산정권이 싫어서고 다른 하나는 독일이 이길 줄 알고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후자의 경우 소련 당국이 장병들에게 전황에 대한 정보를 전혀 주지 않았기 때문에 상당한 수가 나왔는데, 소련군이 이기고 있는 전투에서도 독일에 항복하는 장병들이 나올 정도였다. 뭐니뭐니해도 이런 케이스의 압권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군이 독일 육군 제6군을 완전히 포위한 상황인데 그것도 모르고 포위된 독일군에 투항한 장병들......자기 발로 지옥에 들어가다니
2.7 루마니아
2.8 리투아니아
2.9 미국
독일 국방군에는 상당히 많은 수의 독일계 미국인이 있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등장한 독일군 포로처럼 미국이 참전하기 전, "조국인 독일이 싸우고 있으니까" 귀국하여 참전한 사례가 상당히 많은 것으로 보이며, 이중에는 육군 제320보병사단 소속인 뉴욕 태생의 보이 리커머 보병소위처럼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을 정도로 용맹히 싸운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무장친위대에는 미국인이 거의 없었다. 1940년 5월에는 미국 시민권을 가진 SS대원 5명이 있었던 것이 문헌으로 확인되나 그 이후에는 확실한 자료가 없다. 다만 SS에 소속되어 있다가 전사한 미국인은 최소 8명은 된다고 한다.
독일군, 특히 무장친위대 복무자의 수가 확실하지 않은 것은 미국 정부가 의도적으로 묻어버렸기 때문이다. 배신자를 처벌하기 위해서였겠지만, 악착같이 무장친위대 복무자들을 색출해낸 영국 정부와 달리 미국 정부는 그냥 묻어버렸다. 그래서 누가 얼마나 복무했는지 확실한 자료가 없다. 무장친위대 내 미국인 부대로 잘 알려진 조지 워싱턴 여단은 실제로 존재한 적도 없고, 미국인 부대 자체가 편성된 적이 없다.
2.10 벨로루시
2.11 보스니아
2.12 불가리아
2.13 세르비아
2.14 스웨덴
2.15 스위스
2.16 스페인국
스페인 내전을 지원한 독일에 대한 감사의 표시, 그리고 공산주의 맹주 소련을 치는 데 대한 공감의 표시로 자원병을 파견하였다. 스페인인 부대는 높은 전투력으로 명성을 떨쳤다.
먼저 육군은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직후에 청색 사단이라는 이름으로 1개 사단을 대소전에 파견하였다. 파병 인원들은 극렬한 반공주의자가 많았으며 대부분이 내전에 종군해서 전투경험이 풍부한 베테랑들이었다. 극렬 반공주의자들을 전쟁터로 보내서 정권 안정에 보탬이 되지 않는 이들을 제거하려는 프랑코의 의도가 있었다는 설도 있고, 공화파에 연루된 이들이 충성심을 입증하기 위해 지원한 케이스도 있었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청색 사단은 독일 육군 250보병사단으로 편제되어 동부전선에서 맹활약하였으나 차츰 전세가 연합군에게 유리해지자 영국 및 미국으로부터 압박을 받은 프랑코 정권은 1943년 10월부로 이 사단을 철수시켰다. 하지만 숙련된 전투원이 하나라도 간절했던 독일군은 프랑스-스페인 국경에 모병소를 설치하고 귀향하는 스페인인 병사들을 상대로 모병활동을 전개하여 약 3천 명에 달하는 스페인인들을 다시 모병했다.
독일군에 재입대한 스페인인들은 청색 군단으로 불렸고, 주목을 피하기 위해 독자적인 대부대를 편성하는 대신 121사단 예하로 배속되었으나 이들도 1944년 3월에 귀환 명령을 받았다. 이후에도 남아 있던 병사들은 소대 또는 중대 단위로 흩어져 일부는 국방군, 일부는 무장친위대에 배속되었다. 노르트란트 사단에 배속되어 있던 스페인인 중대는 베를린 공방전까지 분투했다.
스페인 파견군은 로테이션이 몇 차례 이루어졌으므로 참전 인원이 총원 47,000여 명에 달한다. 여기서 4,954명이 전사하고 8,7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포로가 된 인원은 372명이며 이들 중에서 286명이 생존했는데, 이들은 1954년이 되어서야 국제 적십자를 통해서 송환되었다.
루프트바페에는 일부 조종사들이 의용비행대를 결성하여 참전하였다. 5차에 걸쳐 총 89명의 조종사가 참전했고 출격 3천회, 159기 격추라는 기록을 세웠다. 일부 인원들은 크릭스마리네에 입대해 해군 함정 승조원으로 복무, 수병에만 머무르지 않고 원사 이상 상급 부사관까지 진급한 경우도 있다.
2.17 슬로바키아
2.18 아르메니아
2.19 알바니아
2.20 에스토니아
2.21 영국
2.22 왈론
2.23 우즈베키스탄
2.24 우크라이나
2.25 이탈리아
2.26 인도
파일:/pds/200811/30/91/b0041991 4932a9bba593b.jpg
독일은 독일 내에 있는 인도인들로 군대를 편성해서 연합군과 싸우게 하려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자유 인도군단(Legion Freies Indien)이었다. 사실 이 부대는 정말 제대로 된 전투부대라기보다는 정치선전을 위한 선전도구로서의 역할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유학생이나 기타 이유로 체류하고 있던 인도인들이 입대했지만 제대로 부대를 구성할 숫자는 당연히 되지 못했다. 이에 독일군 당국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포로로 잡은 영국군 소속의 인도 병사들을 상대로 모병을 한다. 일단 선발된 27명의 장교가 베를린으로 불려갔고, 그 뒤에 포로들 중 자원자들을 중심으로 해서 6천명 규모로 부대가 편성되었다.
영국군 소속 인도인 부대가 인도인들의 분열을 조장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종족별/종교별로 단위부대를 편성한 데 비해서 자유인도군단은 모슬렘, 힌두, 자트, 마라타, 라지푸트 등 제민족을 혼합편성했다. 이는 인도 독립운동에서 무투파의 영도자였던 수바스 찬드라 보스의 강력한 주장에 의한 것으로, 이렇게 함으로써만 전 인도인의 단결이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부대원의 2/3는 모슬렘이었고, 나머지가 힌두교도 및 기타 소수민족이었으며 시크교도의 비중이 꽤 컸다.
이들 인도인 부대는 실제 전투임무에는 거의 투입되지 않았다. 일부 분견대(보병 2대대 소속의 제9중대)가 이탈리아에서 파르티잔 소탕에 투입되어 종전시까지 버티다가 항복한 것 외에 주력은 노르망디 상륙 이전에는 국방군 소속으로 대서양방벽을 지키는 요새선 구축작업에 주로 동원되었고, 미영 연합군이 상륙한 후에는 무장친위대로 전속(44년 8월)된 후 약간의 전투를 겪으면서 내륙으로 후퇴하여 1944년 겨울에는 독일 본토로 들어간다. 사실 본래 예정되어 있던 이들의 임무 중에는 동부 이란에 낙하산으로 강하하여 지금의 파키스탄인 발루치스탄에 잠입, 선동과 테러, 사보타주를 벌이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것 역시 제대로 되진 않았다.
하지만 다음해 5월, 독일이 항복하면서 이들은 갈 곳이 없어진다. 자유인도군단의 장병들은 논의 끝에 2.6km의 알프스 산길을 돌파하여 중립국인 스위스로 탈출하려고 했지만, 미군과 프랑스군에게 잡혀 영국군에게 넘겨졌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군 소속 모로코 병사들이 포로가 된 상당수의 자유 인도 군단 병사들을 학살했는데 그 숫자는 확실하지 않다고 하며, 이후 영국군에 인수된 장병들은 인도로 송환, 반역죄로서 재판에 회부된다. 인도국민군 장병들도 이들과 함께 재판에 회부되었다.
2.27 조지아
2.28 코사크
2.29 크로아티아
2.30 키르기스스탄
2.31 타타르
2.32 투르크멘
2.33 프랑스
1940년 프랑스 침공으로 프랑스가 먼저 항복한 후 독일에 병합된 알자스-로렌 출신자가 주를 이루었는데, 순수 독일계거나 부계 또는 모계 중 어느 한 쪽이 독일계인 경우가 많다. 잊혀진 병사의 저자 기 사예르에 따르면, 혼혈인 자들 중 프랑스인 아버지를 둔 자들은 전후 분류 과정에서 반역자로 분류되어 처형되었지만 자신처럼 독일인 아버지, 프랑스인 어머니를 둔 자들은 처형 대상으로는 분류되지 않고 프랑스군에 재입대하는 선에서 처분이 끝났다고 한다.
하지만 독일 혼혈이 아닌 진짜 프랑스인들도 상당수 독일군에 참여하였다. 독일군에 입대한 프랑스인들은 원래 극우 파시스트인 경우가 대부분이나, 그저 군대에 다시 들어가 전투를 하고 싶어서 입대한 경우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라이프 2차대전사에 등장하는 한 프랑스인 장교는 "어느 군대건 상관없다! 내 휘하에 다시 포병 중대가 들어온다는 게 중요해!"라는 멘트를 남긴 바가 있다.
전쟁이 끝날 때 샤를마뉴 사단 소속 무장친위대원 일부가 자유프랑스군 르클레르 장군이 지휘하는 병력에게 포로가 되었다. 르클레르가 이들을 심문하면서 "왜 독일 놈들 옷을 입고 있나!"하고 질책하자, 이들은 도리어 "그러는 댁은 왜 양키 놈들 옷을 입고 있소?"라고 패기 있게 대꾸했고, 르클레르는 이들을 모조리 총살형에 처했다.(...)
2.34 플랑드르
2.35 핀란드
핀란드와 독일이 같은 추축국이긴 했으나 핀란드가 독립국인 이상 핀란드군 자체는 독일군과는 독립된 명령체계를 유지했다. 다만 이와는 별도로 무장친위대인 노르트란트 사단에 소수의 핀란드인 병사들이 지원하여 복무하였다. 이들은 계속전쟁이 시작되면서 대다수가 핀란드군으로 복귀했으나, 소수의 신원 미상의 핀란드 장병들이 끝까지 무장친위대에 남아서 베를린 공방전까지 참전했다. 이들의 최후는 잘알려져 있지 않으나, 신분을 숨기고 도망친 극소수의 장병들을 제외하면 베를린에서 전원 전사한 것으로 추정한다.
2.36 헝가리
3 한국인 독일군?
떠도는 풍설 말고, 진지하게 한국인 독일군이 있을 수 있었다는 의문을 제시한 매체는 호비스트가 출간한 알기 쉬운 세계 제2차대전사가 최초이다. 베를린 공방전 당시 베를린의 한 지하실에서 무장친위대 제복을 입고 할복한 동양인 30여 명이 발견되었다는 서술과 함께 당시 이들을 발견한 소련군이 이 시체들을 일본인 또는 한국인으로 추측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하지만 독일군에 한국인이 있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노르망디의 한국인 항목을 참조할 것.
4 말로
히틀러와 제3제국을 위해 싸운 이들인데다가 조국을 배신한 배신자들이기도 한 만큼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은 경우라도 그 말로는 대개 좋지 못하다. 조용히 숨어서라도 살 수 있으면 다행이고, 조국이 히틀러 때문에 쑥대밭이 된 나라라면 반역자로 처형당한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영국 의용군과 프랑스 의용군들은 대부분이 처형되었고, 100만이 넘는 소련군 출신 독일군 부역자와 전향한 의용군들도 대부분이 처형되거나 굴라그로 끌려갔다가 흐루시쇼프 때에야 대규모로 사면되었다.
하지만 고국으로 귀환하여 무사히 살거나 독일, 미국등 타국으로 이민을 간 의용병들도 적잖다. 잊혀진 병사의 저자인 기 사예르는 고국으로 돌아가 회고록 집필을 하고 만화가로 살았으며 비킹사단에 의용군으로 참전한 핀란드인 올로프 라구스는 1943년 고국으로 귀환하여 핀란드군으로 계속전쟁에 참전하여 돌격포병으로 활약, 후엔 은행가로 생을 마쳤다. 그 외 상당수의 의용군이 처형당하지 않고 평범한 말년을 보내고 생을 마쳤다
특히 발트3국은 소련/러시아에 대한 반감이 워낙 컸기 때문에 독일군에 입대하는 것이 조국 광복을 위해 독립군에 입대하는 정도로 취급되었다. 이 나라들은 무장친위대 복무 경력을 자랑스럽게 떠벌릴 수 있는 세계 유일의 국가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에스토니아의 영화 1944를 보면 이러한 시각을 잘 보여준다
5 창작물에서의 등장
- 고바야시 모토후미의 창작 만화들 중에 종종 등장한다. 대부분 실존한 부대지만, 작가가 확실히 꾸며낸 것으로는 해피 타이거에 등장하는 몽골인(사실은 일본인), 동아총통특무대에 등장하는 일본인 무장친위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