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러시아어: Конституционный кризис в России (러시아 헌정위기), Октябрьские события (10월 사태)
영어: Russian constitutional crisis

1 개요

1993년 러시아 헌정 위기는 1992년부터[1] 1993년까지 러시아 대통령이었던 보리스 옐친과 러시아 최고회의 사이에서 헌법 제정 및 국정 운영을 두고 벌어진 정치적 분쟁이다.
러시아에서는 이 사건을 보통은 최고회의 해산(Разгон Верховного Совета) 또는 백악관 공격(Штурм Белого дома), 백악관 포격(Расстрел Белого дома) 등으로 부르고 있다. 러시아 내에서는 워낙 이 사건에 대한 평가가 갈리기 때문에, 보통은 중립적으로 통틀어 10월 사태(Октябрьские события)라고 부르는 편이다.

2 발단: 갈등의 조짐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는 명목상이나마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신생 국가였다. 비록 러시아는 1978년 제정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헌법에 따르고 있었지만, 소비에트 시절에 맞추어 제정된 이 법을 계속 쓰기에는 실정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러시아는 새로운 헌법을 제정해야 했다.

여기서 당시 러시아의 권력 구조를 잠시 살펴보면, 소련이 망하기 전 러시아 공화국의 헌법은 러시아 공화국의 최고권한이 대통령에게 있다고 규정했지만, 실질적인 권한 면에 있어서 대통령제보다는 이원집정부제의 대통령과 가까웠다. 즉, 대통령은 총리를 지명할 수 있었지만, 의회의 허락을 구해야 했다. 또한 의회는 대통령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거나 국정에 어느 정도 관여할 수 있었다. 이는 행정부(대통령)와 입법부(최고회의)가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는 장점처럼 보였지만, 사실 근본적으로는 소련 시절의 모순된 권력구조에서 시작되었다.

원래 소련이 처음 세워졌던 초창기에는 의원내각제 국가의 총리 격인 인민위원회의 의장에게 최고권력을 부여해, 어느 정도 의원 내각제 국가처럼 운영되었다.[2] 하지만 레닌 이후 실권을 장악한 스탈린이 집권과정에서 자신의 직위였던 서기장(또는 총서기)을 활용해 최고권력으로 부상했다. 따라서 이후 소련 최고권력은 행정기관 수장소련 장관회의 의장이나 입법기관 수장소련 최고회의 의장이 아닌 집권당의 총대표인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게 있었다.[3]

당시 소련의 정치구조는 소련 공산당이 국가의 입법기관과 행정기관을 직접 통제하고 있었고,[4] 소련 내 정치권력을 쥘 수 있는 정당이 오직 소련 공산당이었기에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1988년 다당제를 허용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만약 소련 공산당이 입법기관과 행정기관을 통제하는 정당이 아닌 소련을 구성하는 한 정치정당이라면, 기존의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최고권력자로써 남아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련은 1990년 개헌을 실시, 미국의 대통령제와 유사한 체제로 바꾸었다. 당시 미하일 고르바초프 본인이 공산당원이었고, 의회 다수정당 역시 소련 공산당이었기 때문에 이는 딱히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소련 붕괴 이후 상황이 급격하게 변했다.

소련이 무너진 이후, 러시아의 새 헌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민주국가로써 국가최고수장, 나아가 국정운영의 총책임자가 누구인지를 정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고, 이 과정에서 당연히 행정기관의 수장인 대통령입법기관최고회의, 인민대표회의는 이 문제를 가지고 이해관계가 다를 수 밖에 없었다.

보리스 옐친은 새 헌법을 재정하는 과정에서 기존 최고회의의 권한보다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시킨 대통령제 헌법을 원했다. 반면 러시아 최고회의는 소련 시절과 비슷하게 최고회의가 실권을 쥐는 내각제처럼 제정되길 원했다. 러시아 정부는 이 문제를 가지고 1992년과 1993년에 걸쳐 여러 차례 조율했지만, 당연히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상황에서 충돌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3 전개: 실패한 경제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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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르 가이다르

1992년 4월, 러시아 최고회의는 당시 재정부 장관을 지냈던 예고르 가이다르의 총리 임명을 거부했다. 당시 예고르 가이다르는 재정부 장관을 지내면서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에 '충격요법'이라 알려진 신자유주의적 경제 개혁을 도입하면서 악화되고 있던 러시아 경제를 부활시키려 하였다.

가이다르가 계획한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환율 자유화, 국가경제의 자유화를 통해 경기가 활성화되는 것이었지만, 문제는 페레스트로이카 때와 같이 급작스러운 경제개혁이 작동할 만큼 러시아 경제가 건실한 상황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특히 충격요법이 포함하고 있던 통화 자유화같은 조치는 페레스트로이카 시절 어느정도 남아있던 국가경제의 요소를 완전한 시장에 맡긴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시장이 경제를 운영하던 자본주의 국가에서라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갓 사회주의 국가에서 벗어난지 채 1년도 안된 상태였다.

이미 소련 경제는 1990년과 1991년에 완전히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가이다르가 진행한 충격요법은 러시아 경제를 다시 급격히 악화시켰다. 충격요법의 핵심인 경제 자유화는 달리 말하자면, 국가가 경제에서 완전히 손을 놓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장 정부에 의해 시장에 풀린 사회간접자본들은 전부 민영기업으로 넘어가 우리에게 흔히 올리가르히로 알려진 소수의 부유층과 다수의 빈민층을 만들어냈다. 또한 사회주의 시절 국가에 의해 지탱되던 시장경쟁력이 없던 수많은 공장들과 기업, 연구소들은 자동적으로 파산하거나 매각되어 버렸다.

가이다르가 펼친 경제개혁이 실패하면서, 수많은 러시아 국민들은 직장을 잃고 실업자가 되어버렸다. 소련 시절 축적한 고급 인력들은 생존을 위해 좋은 조건을 제시하던 외국으로 이민가버리면서 순식간에 유출되었다. 군대와 경찰은 제대로 된 월급조차 받지 못해 많은 장교들이 제대하거나, 뇌물을 받고 무기를 파는 등 부패가 만연했다. 이렇게 러시아 국민들은 소련 시절 구축한 복지제도마저 잃어버리고 가난과 절망에 빠졌다. 한마디로 처참한 실패였다.

이 상황에서 1992년 러시아 의회 총선이 실시되었다. 당시 국민들은 옐친 행정부의 경제개혁 실패에 분노했고, 그 결과 공산당 및 좌익계열 정당과 민족주의 계열 극우정당이 대거 약진하게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정부관료 내 옐친의 개혁에 반감을 품은 인사들이 증가하면서 민주화 투사로써의 옐친의 정치적 입지는 점차 정치적으로 위협받기 시작했다.

당연히 옐친의 경제개혁에 불만을 품었던 이들은 옐친의 경제개혁을 중지시키고 더 나아가 옐친을 견제하려 하기 시작했다. 1992년 4월 러시아 최고회의는 옐친이 제안한 예고다르의 총리 임명안을 기각했다. 이는 최고회의가 8월 쿠데타 당시 공산당에 맞서 협력하던 관계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국가의 급진적인 개혁을 원했던 옐친과 대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대통령과 의회는 이후 협상을 통해 빅토르 체르노미르딘이 총리에 임명했지만, 이후 옐친 행정부의 정책이 바뀌거나, 체르노미르딘이 훌륭한 국정운영 능력을 보여주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대통령과 의회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이렇게 의회가 비협조적으로 자신의 정책을 거부하자, 옐친은 점차 행정명령 등을 통해 나라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반면 대통령이 독단적으로 국정을 운영한다고 판단한 의회는 부통령이었던 알렉산드르 루츠코이와 손잡아 옐친을 탄핵하고 새로운 행정부를 구성할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물론 이대로 가다가는 당장 정치적인 파국이 몰아닥칠 걸 직감한 러시아 정부에서는 1993년 4월 25일 국민투표를 통해 헌법 제정 과정에서 대통령에 대한 신뢰와 대선, 총선의 조기선거에 대한 의사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했지만, 선거 결과 대통령에 대한 신임과 대선과 총선의 미실시로 결론났다.[5]

이렇게 국민투표에서조차 정말 애매모호하게 결론이 나버리자 어쩔 수 없이 대통령과 의회 둘 다 만족스러운 해결책를 얻지 못한채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대통령과 의회는 어떠한 해결책도 찾지 못한채 서로 극단적으로 대립했다.

4 절정: 불타는 모스크바

이 가운데 더이상 헌법 제정과 개혁을 미루어서는 안되겠다고 판단한 옐친은 9월 21일 최고회의를 해산, 12월에 새로운 입법부인 국가두마를 선출하겠다고 공표했다. 문제는 당시 현행헌법이었던 러시아 공화국 헌법에 따르면 러시아 대통령은 어떠한 국가기관도 해산시킬 수 없었다. 또한, 대통령이 국가기관을 해산시킬 경우 대통령은 면직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실제로 러시아 헌법재판소는 9월 23일 대통령의 최고회의 해산조치가 헌법에 위반되며, 현행 헌법에 따라 대통령은 해임될 수 있다고 판결했다. 옐친은 당시 최고회의와 대립이 고착된 상황에서 정국을 극단적인 수로 돌파하려 했었지만, 이는 아무리 좋게 봐줘도 사실상 최고회의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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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최고회의 역시 대통령의 해산선포에 가만히 앉아있지는 않았다. 최고회의는 당시 의장이었던 루슬란 하스불라토프의 주도 아래 9월 21일 밤 긴급회의를 열어 옐친을 대통령에서 해임하고, 루츠코이 부통령을 대통령 대행에 임명했다. 또한 당시 국방부, 보안부[6], 내무부 장관들을 재인가했다. 사실상 대통령을 탄핵시킨 것이었다.

한편, 최고회의는 지지하는 시위를 벌이던 시위대는 9월 27일 첫 유혈사태를 겪으면서 점차 과격해지고 있었다. 이에 옐친은 내무부 병력을 동원해 국회의사당을 포위하는 한편, 국회의사당으로 향하는 수도, 전기 공급을 중단시켰다. 하지만 시위대는 10월 3일 낮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했다. 루츠코이는 최고회의 건물에서 지지자들에게 모스크바 시청과 오스탄키노 탑을 점령할 것을 호소했다. 10월 3일 낮 시위대는 소련군 장성 출신이었던 극우파 알렉산드르 마카쇼프의 지휘 아래 오스탄키노 탑으로 진출, 경찰과 유혈충돌을 일으켜 약 62명 정도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제 대통령과 최고회의는 더 이상 협상의 여지가 없었다. 10월 3일 밤, 옐친은 행정명령 1400호를 발령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모스크바 외곽에 주둔한 타만스카야 전차사단[7] 등 군 병력을 동원해 빠르게 모스크바 시내에 배치시켰다.

당시 최고회의 지지자들은 시위과정에서 합류한 군인, 경찰들의 무장과 사제총기로 어느 정도 무장을 갖추고 있었지만, 정규 전차사단까지 동원한 러시아군과는 무장 자체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또한 옐친이 군을 동원하기로 결심하자, 그 때까지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군부 내 인사들은 점차 옐친 편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중화기로 무장한 러시아군은 최고회의 지지 시위대를 모스크바 시내에서 점차 몰아냈다. 10월 4일 러시아군은 최고회의 건물을 포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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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회의를 포위하는데 성공한 러시아군은 보병부대를 국회의사당으로 진입시킬 경우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에 러시아군에서는 겐나디 자하로프 장군의 제안으로 10월 4일 아침 T-80 전차병력을 동원해 국회의사당에 발포했다. 루츠코이는 라디오에서 공군에게 크렘린을 폭격하기를 호소하면서까지 군의 진압에 저항하려 했지만, 이미 군이 대통령을 지지하기로 한 상황에서 러시아군 쪽에서는 최고회의에 대해 어떠한 응답도 없었다. 최고회의 측에서 동요하기 시작하자 러시아군은 국회의사당 내부로 군부대를 진입해, 한층씩 차례로 점령하기 시작했다. 저항을 계속할 경우 대규모 희생자가 나올 것을 직감한 최고회의 측에서는 결국 항복했다.

(사진)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되는 하스불라토프와 루츠코이

5 결말: 피로스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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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으로 옐친은 공산주의 및 민족주의 세력이 10월 혁명과 같은 무력봉기를 일으킬 가능성을 완벽히 제압해버렸다. 옐친은 10월 5일 최고회의를 지지한 언론들을 폐간시키고 공산당 및 우익계열 단체의 활동을 금지했다. 또한 10월 6일 러시아 헌법재판소장이었던 발레리 조르킨을 해임시키고, 최고회의를 지지했던 지방 회의(지방 소비에트)들을 해산시켰다. 또한 언어학자였던 드미트리 리하쵸프, 가수였던 불라트 오쿠자바 등 개혁파 인사들은 10월 5일 옐친에게 공산주의 및 민족주의 정당 해체, 무장세력 해체, 파시즘 및 국수주의, 인종주의 프로파간다 금지 등을 담은 공개 서한을 보내 최고회의 세력을 철저하게 처벌할 것을 호소했다.

한편 옐친에 의해 해산된 최고회의는 1993년 12월 입법부 선거를 통해 새로운 의회, 즉 오늘날의 러시아 상원인 연방회의(Совет Федерации)와 하원인 국가두마(Государственная дума)로 재편되었다. 러시아 정부는 1993년 12월 국민투표를 통해 새로운 헌법을 채택, 기존의 소련식 정치체제에서 벗어나 대통령제 국가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러시아에서 옛 공산당 세력은 사실상 재기할 가능성을 거의 잃어버렸다. 비록 이후 1996년 대통령 선거나 1998년 탄핵 시도 등 거의 집권 전까지 근접했지만, 2000년 푸틴이 등장하면서 제1야당 수준으로 몰락, 현재는 자유민주당정의 러시아당같은 당과 비슷한 관제야당 신세가 되었다.

옐친은 이 사건 이후 반대파를 제압하면서 사실상 대통령으로써 정치적으로 확고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1994년 당시 조하르 두다예프가 이끌던 체첸 정부와 협상 실패 후 무리하게 1차 체첸 전쟁을 벌이면서 지지율을 잃어버렸고, 그 결과 1995년 총선에서는 자유민주당이 1당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물론 반대세력은 이 사건을 절대 잊지 않았다. 특히 이후 옐친의 실정이 계속되면서 선거를 통해 점차 세력을 강화했고, 1998년에는 체첸전 패배와 경제 위기 등으로 러시아가 혼란 상태에 빠지자, 의회의 주도 아래 탄핵을 한 번 더 시도하려다 간신히 부결되기도 했다.

6 의의

러시아 민주주의의 몰락을 예고한 사건

최고회의가 옐친에 패배한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몇가지 중요한 요인을 보면 군부의 비호응이 있었다. 당시 군부는 파벨 그라쵸프, 알렉산드르 레베디 등을 필두로 8월 쿠데타 당시 옐친과 러시아 행정부를 지지했던 소장파 인사들이 고위직에 대거 포진해 있었다. 이들 입장에서 옛 공산당 세력의 집권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자신들의 실각으로 연결되는 지름길이었다. 이 때문에 이들이 옐친 편으로 돌아서면서 공산당은 군부세력의 지지를 얻을 수 없었다. 실제 이들은 사태 진압 이후 군과 정계에서 상승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하지만 최고회의가 패배할 수 밖에 없었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모스크바 시민들의 비호응이었다. 비록 모스크바 시민들은 옐친에게 불만을 가진 시민들이 많았지만, 적어도 2년 전 일어났었던 1991년 쿠데타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공산당, 우익 세력이 민주 정부[8]를 전복시키려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 극좌, 극우 세력이 대거 포진해 있었던 시위대의 모습과 오스탄키노 탑 등에서의 유혈사태 등을 통해 최고회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강화시켰다. 물론 러시아 시민들은 당시 옐친에게 불만으로 가득한 상태였지만, 적어도 옐친보다 더 막장인 극좌파극우파를 집권시킬 만큼 생각이 없진 않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당시 러시아의 자유민주주의 세력의 정치적 입지에 큰 타격을 안겨주었다. 비록 상대는 극좌와 극우로 뭉친, 절대 민주 정부 입장에서는 허용할 수 없는 극단주의적인 정치세력이었다. 그러나 나름 정당한 선거로 집권한 최고회의를 헌법을 어겨가면서까지 유혈사태를 일으키면서 진압한 옐친은 그 명분이 어찌되었건 간에 정치적으로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었다. 결론적으로 국가적인 위기상황에서 행정부의 무능과 이로인한 극단주의 세력의 득세, 그리고 극단주의 세력을 유혈진압하는 과정은 여러모로 민주주의가 결여된 바이마르 공화국을 연상케하는 씁쓸한 모습을 보였다.

또한, 이후 옐친의 국정을 보면서 국민들이 실망한 상황을 이용해 블라디미르 푸틴같은 권위주의적 정치인들이 애국주의로 득세했다는 것을 떠올려 본다면, 사실상 러시아 민주주의는 이때부터 식물인간 상태로 접어들게 되었다. 특히 오늘날 보리스 넴초프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성향의 개혁정치인들이 옐친 시절과 연관지어 부정적인 인식을 받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9] 이 사건은 이제 막 자라나려던 러시아 민주주의에게 여러모로 적잖은 상처를 남겼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1. 역사학자들은 넓게는 1992년 총리 임명을 두고 벌어진 대통령과 의회의 대립부터를, 짧게는 1993년 10월 사건만을 기점으로 삼는다.
  2. 10월 혁명으로 임시정부를 몰아낸 이후 레닌이 구상한 체제는 전 인민이 비밀선거로 선출해 1년 내내 열리는 소비에트가 최고권력기관이 되고, 소비에트가 임명한 간부회(Президиум)가 일상적인 국정을 운영하는 형태로 서유럽의 내각제과 상당히 유사하였다. 10월혁명 이후 치뤄진 제헌의회(후에 있을 소비에트와는 다르다.) 선거에서 사회혁명당(나로드니키 계열)이 40%로 제1당,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이 24%로 제2당, 우크라이나 사회혁명당이 7.7% 제3당으로 좌익계 3개 정당이 총의석의 80%를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좌익세력들과 노선 차이로 대립하던 레닌은 이들이 제헌의회에서 정국 주도권을 잡을 것을 우려했다.(러시아 혁명 당시 좌익 계열은 정치적으로 극심하게 대립했다. 당장 레닌이 몰아낸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만 해도 멘셰비키 계열 정치가였을 정도.) 이를 염두에 둔 볼셰비키는 제헌의회를 개회식 다음날 무력으로 강제 해산시키고 같은 좌익세력인 나로드니키, 멘셰비키까지 배제한체 일당독재체제를 수립하였다. 이런 볼세비키의 막장 행태에 반발한 나로드니키와 멘셰비키가 무장봉기하면서 적백내전이 터졌다.
  3. 굳이 우리나라와 비교하자면, 국가지도자가 대통령이나 총리가 아닌 여당대표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4. 비슷한 이유로 소련 내에서도 소련의 입법기관이었던 최고회의 회의 결과보다는 소련 공산당 전당대회의 결의가 훨씬 영향력이 강했다.
  5. 사실 대선과 총선 모두 다 집계상으로는 조기실시 주장이 더 지지를 얻었지만, 둘 다 과반수인 50%를 넘지 못해 부결되었다.
  6. 훗날 러시아 연방 보안국의 전신.
  7. 공교롭게도 이 부대는 1991년 쿠데타 당시 보수파의 주병력으로 동원되었던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수도방위사령부 급 부대.
  8. 비록 옐친은 이후의 실정으로 막장이 되었지만, 적어도 선거로 집권한 정부였다.
  9. 정작 넴초프 본인은 옐친 시절 니즈니 노브고로드 주지사를 지내면서 개혁적인 정책으로 꽤나 호평을 얻은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