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RG(아이돌)

1 소개

서울가요대상 신인상
양파, 이지훈
애송이의 사랑, 이별
(1997)
김현정, 조성모, NRG, 유리
그녀와의 이별, To heaven, 할 수 있어
(1998)
채정안, 이정현, 샵, 코요태
무정, 와, Tell me Tell me, 순정
(1999)
N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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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문성훈, 이성진, 김환성[1] 노유민, 천명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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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NRG
엔알지
활동기간1997년 10월 28일~[3]
데뷔앨범1997년 정규 1집 New Radiancy Group
소속사뮤직팩토리
팬덤천재일우
링크공식팬카페

누룽지 노른자 NRG N.R.G N.R.G. 엔알지[4]
원조 트렌스젠더 컨셉

1997년 10월 28일에 데뷔한 남자 아이돌 그룹.[5] 정확히는 1996년 이성진, 천명훈의 듀오로 데뷔한 '하모하모'[6]가 멤버가 늘어나면서 이름을 바꾼 것이다. 소방차의 멤버 정원관과 김태형이 함께 프로듀싱했다. NRG의 뜻은 'New Radiancy Group' 즉, '새로이 빛나는 그룹'이다.[7]

공식 팬클럽의 이름은 '천재일우'[8]이고, 상징색은 분홍색, NRG가 쓰인 길다란 분홍색 풍선과 千載一遇가 쓰인 분홍색 우비를 응원 물품으로 사용했다.[9]

여담으로 멤버들 모두 여동생이 없다.[10]

또한, 3집때까지의 실력은 가히 안습이었으나 2년의 공백기를 거쳐 나온 4집에서는 확연히 발전된 실력을 확인할 수 있다.

2 멤버

하모하모[11]
이성진천명훈
003[12]
노유민문성훈김환성

3 공연 장면

NRG는 무대에서 활발한 멤버간의 동선 이동, 덤블링, 격한 안무, 미소년 이미지, 병맛 뮤직비디오등으로 유명했다.[13]

1997년 11월 SBS 생방송 TV 가요 20에서 해준 1집 <할 수 있어>의 무대 장면이다.할 수 있어 무대 중 그나마 덜 격한 무대다.[14][15][16]

그 유명한 1집 <티파니에서 아침을 (Remix)> 무대 장면이다. 그리고 격한 안무는 덤 [17]

1998년 8월 2집 <사랑만들기>의 컴백 무대 장면이다. 그치? 맞지? NRG![18]

1998년 11월 MBC 생방송 음악 캠프에서 해준 캐롤 앨범 'Season's Greetings' <우리만의 세상>의 무대 장면이다. 귀여운 NRG 반박자 빠른 문성훈[19]

4 음반 목록

자세한 음반 정보는 NRG(아이돌)/음반 목록으로.
굵은 글씨는 타이틀 곡이다.

발매일앨범명활동 곡명
1997. 11. 01.New Radiancy Group할 수 있어 / 티파니에서 아침을
1998. 08. 07.Race사랑만들기 / Messenger
1999. 11. 06.NRG 003Face / 너! 나
2001. 06. 05.悲 : Sorrow비 (悲) / 삶은…계란
2003. 02. 07.Hit SongHit song / 나 어떡해 / 친구
2004. 04. 30.NR6G대한건아 만세 / 롤리 박
2005. 11. 22.One of Five : 따로 또 같이별책부록

5 활동

5.1 데뷔 초기

데뷔 초(1~2집)에는 하이에너지(Hi-NRG) 장르를 하는 그룹이라고 활동했지만 실제로는 90년대 일본에서 인기가 있었던 유로비트 장르 음악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유로비트는 하이에너지의 영향을 받은 장르이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두 장르는 별개의 장르다.

NRG는 격한 퍼포먼스와 고난이도 춤을 전 멤버가 소화해서[20] 화제가 되었고 이런 격한 퍼포먼스 덕에 중국에서 컬쳐쇼크급의 큰 인기를 얻었다.[21]

당시 H.O.T.젝스키스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22]특히 이성진의 뛰어난 예능감 덕분에 각종 쇼오락 프로그램에도 자주 출연했다.[23] 쉽게 비유하자면 H.O.T.와 젝스키스가 1군이라면 NRG는 1.5군인 셈.

5.1.1 유로비트 샘플링 Rip-off

NRG의 초기 곡들은 외국의 유로비트 장르 곡들을 무단으로 샘플링 또는 카피해서 사용하였다. 원작자와의 합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부클릿에도 원곡 작곡가의 이름은 표기되지 않았다. 대부분 일본에서 96년~97년 발표된 SUPER EUROBEAT 시리즈에 수록된 곡들이다. 당시에는 국내에 유로비트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NRG 뿐만 아니라 다른 그룹도 비슷한 방식으로 표절을 하는 등 표절과 무단 샘플링이 가요계 전반의 악습이었기 때문에 별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 1집: 1집은 그래도 4곡밖에 안 배꼈으니 양심적(?)이다. <미소>, <진 자의 심판>은 유로비트 스타일이지만 전주까지 오리지널로 만들었으며 당시 한국 댄스 가요 수준을 생각하면 사운드도 준수하다. 그러나 타이틀 곡이었던 <할 수 있어>가 표절곡에 포함되어 있다. <할 수 있어(NRG Version)>는 소리바다 등의 일부 음원사이트에 원곡인 Domino & Aki의 Hot & Soul이 함께 표기되어 있다.[24]
  • 2집: 오히려 2집에서 표절곡이 늘어났으며 역시 타이틀 곡이었던 <사랑 만들기>가 표절곡에 포함되어 있다.

5.2 중국 진출

1998년 한중수교 6주년 기념 축하공연 차 중국을 방문했는데, 이때 반응이 상당히 선풍적이었다. NRG의 공연을 본 중국인들은 그들의 퍼포먼스에 놀라워했고[26][27], 이에 대응하여 NRG는 1999년부터 중국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결과는 대성공. 중화권에서 한류 1세대의 역할은 클론[28], 베이비복스와 NRG가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며, NRG는 한국 가수 최초로 중국 기업의 CF에 출연했다. 중국에서는 나중에 진출한 H.O.T.보다 더 인기가 많아서, 호텔에 레드카펫이 깔리고[29], NRG가 이용하는 호텔 벽에는 NRG 멤버들의 사진이 붙어있었으며, 호텔 한 층을 전부 비워줬고, 리무진 차량이 각 멤버의 수 만큼 대기해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정도면 중국에서 국빈(國賓)에 준하는 대우를 받은 셈.

인기만 보면 수익을 억 단위로 쓸어모았을 것 같지만 정작 그렇게까지 큰 수익을 얻지는 못했는데, 당시 계약 구조가 불평등했기 때문에 중국 공연을 하면 공연사가 9, NRG는 고작 1밖에 못 받는 식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5.3 천명훈과 이성진의 탈퇴, 부진한 3집 활동

1999년 8월말, NRG는 기자회견을 통해 천명훈과 이성진이 탈퇴한다고 발표했다. 기자회견에서 이성진은 "팀 불화가 아닌 명훈이와 저의 자진 탈퇴"라고 진술했고#, 3집 활동은 문성훈, 노유민, 김환성의 3인 체제로 이루어졌다. NRG 비주얼 유닛 사실 데뷔 초부터 소속사에서는 형들보다 어린 멤버들 위주로 푸쉬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NRG의 인기를 끌어올린 건 리더 이성진이었고, 결국 3집 앨범은 두 리더의 부재가 음반성적의 부진으로까지 이어졌다.[30][31]

이후 천명훈이 탈퇴의 전말에 관하여 해명했는데, 2집 <사랑만들기>라는 곡으로 활동하던 때 무대의상이 땀복이라 멤버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이성진과 함께 가서 사장님께 의상 교체를 몇 번 요구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고 한다. 이에 화난 천명훈은 그 자리에서 고가의 의상을 찢어버렸고, 소속사 사장은 이를 빌미로 이성진과 천명훈을 강퇴시켰다. 기자회견에서는 논란을 방지하고자 '자진탈퇴'로 진술했던 것. 이후로 천명훈은 음악공부를, 이성진은 Mnet 핫라인스쿨에서 VJ로 활동하기도 했다.[32] 탈퇴했다고는 하지만 그 후로도 김환성이 이성진에게 전화를 시도때도 없이 거는 식으로 멤버들끼리는 여전히 가깝게 지냈다.[33]

5.4 김환성의 갑작스런 사망

2000년 6월 15일, 제1차 남북정상회담에 온 국민의 이목이 집중되던 그 때, 멤버 김환성 군이 돌연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자세한 내용은 김환성 문서 참조.

5.5 2001~2002년

김환성의 사망 이후 강제탈퇴했던 이성진과 천명훈이 재합류하여[34] 북경에서 추모콘서트(For Antonio)를 열고 약 1년 간의 공백기를 가진 뒤, 2001년 6월, 타이틀 곡 <비(悲)>를 내세운 4집으로 음반 활동을 재개한다. 김환성을 기억하는 추모앨범 형식이었으며 타이틀 곡은 강타가 직접 작사, 작곡했다. 이때부터 천명훈이 작곡한 곡이 들어가면서 NRG의 전체적인 컨셉이 바뀌기 시작한다.[35][36]

이후 NRG의 업적은 이성진이 절반 이상을 쌓아 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는 멤버를 잃고 무너져가는 NRG를 다시 살리기 위해 개인활동을 시작하면서 그간 쌓아 온 미소년 이미지를 과감히 버리고[37] '주접쟁이' 이미지를 선보이며 각종 예능프로그램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38]

5.6 2003년 이후

NRG의 최전성기

데뷔 6~7년차이던 2003년 2월경, 5집 <Hit Song>이라는 천명훈 작사작곡의 타이틀곡[39]으로 활동해서 노래 제목에 걸맞게 가요프로그램에서 최초로 1위를 차지한다![40] 데뷔 6(7)년 만에 첫 1위. 음악캠프의 MC를 맡고 있었기도 했던 이성진은 울먹이면서 수상소감으로 "원래 이 자리에 같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는 환성이에게 너무 고맙고 이 상을 하늘에 있는 환성이에게 바치겠습니다"라는 말을 해 # 팬들의 눈시울을 붉혔다.[41] 또한 연말 가요대상에서도 본상을 수상하였으며, 이때 NRG의 인기는 남성그룹 중에서도 독보적이었다.

2004년에는 <대한건아 만세>라는 곡으로 체감 인기로는 5집에 버금가는 성과를 거둔 편으로, 아테네 올림픽을 겨냥했기 때문인지 이성진과 문성훈이 올림픽 성화 주자로 뛰기도 했다.

2005년에는 천명훈도 활발하게 예능에서 활동하면서 '부담보이' 이미지도 이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2005년 10월경 문성훈이 탈퇴하고, 그 다음달 말 3인조로 7집을 발표하여 <별책부록>이라는 곡으로 활동했으나 5, 6집에 비해서는 신통치 않았다.

5.7 2006년 이후, 공백기

2006년 이후로 NRG 그룹 활동은 중단된다. 공식적으로 해체 선언은 하지 않았지만 NRG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것은 중단되고 각자의 길을 걷는다. 이 시기 개인의 근황에 대해서는 개인 항목을 참고. 가시밭길 주의

이 시기 NRG에 대한 인식은 "개그맨 그룹"으로 요약할 수 있다. 아이돌 이미지를 완전히 버리고 이미지를 망가뜨리며 예능 활동에 집중했기 때문에 NRG가 H.O.T., 젝스키스, 신화, god와 같은 시기에 활동한 '아이돌'이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42] 이 인식은 2010년을 넘어서도 계속되다가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중반까지의 가요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2013년이 돼서야 1세대 아이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천명훈이 20세기 미소년에 출현하면서 비로소 NRG에 대한 인식이 '깨방정 아이돌'로 돌아오게 된다.[43]

사실 천명훈과 노유민의 군 제대 이후인 2010년도에 컴백할 가능성도 있었으나 이성진이 불미스러운 송사에 휘말리게 되면서 그룹 활동의 휴지기는 본의 아니게 더욱 길어져만 갔고 이후 천명훈과 노유민만 간간히 방송에 출연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멤버 가운데 한 명이 연예계를 떠나고 활동 당시 가장 인지도가 높았던 멤버가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활동 불능 상태에 빠지게 되어 나머지 멤버들이 팀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 방송 활동을 계속 이어가는 모습은 재결합 이전의 젝스키스의 행보와도 많이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5.8 2017년, 컴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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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부로 장기간 공백기를 가진 그룹들이 재결합, 컴백하고 토토가, 슈가맨, 히든 싱어 등 예전 히트곡들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며 핫젝갓알지, 이 컴백하자 자연스럽게 NRG 컴백에 대한 궁금증도 커져갔다.

노유민이 "이성진이 대중에게 용서를 받는다면 NRG로 컴백한다"고 밝히고, 문성훈과 오랜만에 만나 사진을 올리는가 하면 천명훈은 인스타그램 프로필을 'NRG singer songwriter'로 바꾼다던가 나혼자산다와 플랜맨에서 "재결합 의지가 매우 강하고 만나고 있다"며 기대감을 높였다.

이후 노유민이 2016년 6월 7일에 인스타그램에 사진 한장을 올렸는데 바로 NRG의 네 멤버들이 오랜만에 만나 식사를 하고 연습실에 모인 사진이었고 사진에는 없지만 NRG의 소속사 뮤직팩토리의 대표인 소방차의 김태형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당시 H.O.T.도 이수만과 회동을 가지면서 재결합 여부에 비상한 관심을 모았던 데다, 젝스키스도 YG엔터테인먼트와 전속계약을 체결하여 이슈가 되었던 시점에 NRG 역시 김태형과 회동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관심을 받은 바 있었는데...[44]

19주년 기념으로 10월 22일에 열린 팬미팅에서 2017년 2월 데뷔 20주년 기념 앨범을 통해 마침내 컴백을 알렸다. 그리고 2월에 컴백을 안 했다.[45][46][47]

다만, 이성진이 여전히 KBS, MBC 출연정지에 묶여 있는 터라 지상파 출연은 확실하지 않다. 1세대 아이돌에게 긍정적인 현 방송 기류와 호의적인 여론을 생각하면 가능성이 낮지는 않지만 확실한 것은 컴백 이후에야 알 수 있을 듯 하다.

6 그 외

데뷔 초 꽃미남, 귀여운 컨셉으로 기존 1세대 아이돌과는 차별화를 두었고, H.O.T., 젝스키스, 그리고 후발주자들인 god, 신화 등 다른 1세대 남성 아이돌 그룹중 신화 다음으로 오랜 팀 활동을 해온 케이스고, 데뷔 6년이 지나서 중견그룹이 된 상태에서 1위를 하는 나름 근성있게 활동해온 그룹이다. 여러모로 카라 또는 샤이니의 대선배격 그룹.

서로 감싸주는 아이돌의 우정과 애착, 헌신같은 진지하고 아름다운 가치와는 오히려 거리가 있는 것이 NRG만의 매력.

god가 데뷔 전 역경이 많았다면 NRG는 데뷔 후에 역경을 많이 겪은 팀이다. 예능에서야 웃기는 얘기로 넘어가지만 사실 굉장히 절박하고 심각한 사건들을 겪어왔다. 어느 프로그램에 가도 '고생'하면 NRG가 압도적이었으며[48] 그러다 보니 NRG는 '비극적인 그룹'과 '예능그룹'이라는 상반된 이미지를 공존하여 가진 묘한 그룹이 되었다.

  • <할 수 있어>로 활동했던 1997년 S.E.S.와 함께 1위 후보에 오른 주에 IMF가 터지면서 가요 순위 프로그램이 모두 없어지고 아이돌의 복장 규정이 엄격해졌고 인생은 타이밍[49]
  • 신인상을 받고 중국 진출을 성공하나 싶었지만 그나마도 불공정 계약으로 공정한 수익을 받지 못했고
  • 3집에서는 두 형이 강제탈퇴하고 앨범 성적은 저조했다.
  • 여기까지는 다른 아이돌들도 겪을 수 있는 일이니 그렇다쳐도 이듬해 막내 김환성이 사망하는 최악의 일이 벌어진다.
  • 이에 탈퇴했던 두 명이 다시 합류하지만 4집도 성적이 신통치 않아 팀은 벼랑 끝에 몰렸고[50]
  • 변변한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여느 실패한 아이돌들처럼 힘없이 사라져버리지 않기 위해[51] 이성진이 예능 프로그램과 시트콤 등에서 필사적으로 활동하면서[52] 근근히 명을 이어오다가 멤버들의 참여도가 가장 높은 5집으로 큰 성공을 거두면서 그야말로 고생 끝의 보답을 받는다.
  • 하지만 2005년도 이후로는 "NRG가 아이돌이었나?"할 정도로 관심에서 멀어져 예능 그룹으로 평가절하되고[53]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이미지가 하락한다. 평가가 비로소 제대로 된 건 거의 10년이 지난 뒤의 이야기.

말 그대로 환상, 판타지였던 다른 아이돌들에 비해 고생이 많았고 평가절하가 많이 됐다보니 천명훈은 20세기 미소년에서도 천데렐라 위축된 모습을 보여 팬들을 안타깝게하기도 했다.

  • 데뷔 당시가 아이돌들의 립싱크 문제가 제기되었던 시기라 라이브 무대에서 대부분 립싱크를 하지 않았다.
  • 멤버들 간의 팀워크가 꽤나 좋은 편이었다. 사실, 해체를 겪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1세대 아이돌 중에선 최장수 팀이다.
  • 격한 안무와 함께 무대에서 매우 활발한 멤버간의 위치 이동 또한 볼 수 있다.
  • NRG가 1위를 했던 5집 때보다 IMF였음에도 무려 40만장이 팔린 1집을 전성기라 말하는 사람도 많다. 즉, 1집 시절이 제 1의 전성기라면 5집은 제 2의 전성기라는 것.

7 관련 링크

  1. 긴 앞머리를 넘기기 위해 스타일리스트가 특수 제작한 하얀 머리띠를 쓰고 다녔다.그냥 하얀 철사 두개 꼬았다. 덕분에 머리띠가 잘 어울리는 남자 아이돌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참고로 이 머리띠를 본 한 사람은 '머리띠를 벗는 순간 앞머리가 확 벗겨져 비명을 지를법한 머리띠.'라고 표현했다.
  2. 2집 <사랑만들기> 활동 당시. 참고로 이때 천명훈은 앞머리를 넘기기 위해 테를 착용했는데 녹이 슬었고(...) 은으로 바꿨더니 이번엔 은이 시커멓게 변했다고(...). 천명훈 말로는 당시 컨셉이 세일러문이었다고 한다.
  3. 공식적으로 해체하지 않았다.
  4. 당시 아이돌 그룹 중 특이하게 그룹 명 사이에 점을 찍는 것에 민감하지 않은 그룹이다. 음원, 음반에는 N.R.G , 그 외에는 NRG라고 적는다.
  5. 당시 인기가 많았던 H.O.T.를 견제하기 위해 결성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H.O.T.는 젝스키스와 경쟁하게 되고 NRG는 태사자, 클릭비, OPPA와 경쟁하게 된다.
  6. 이 단어로 나무위키에 검색하면 이 문서로 리다이렉트된다.
  7. 사실 하이에너지를 뜻하는 Hi-NRG에 끼워맞춘 이름이다.
  8. 한자로 千載一遇, '천 년에 한 번 만날 수 있는 깊은 인연'을 의미한다. 4집 수록곡 중 천명훈이 작곡한 <천재일우>는 팬들에게 보내는 노래.
  9. 원래는 일반 분홍 풍선을 쓰다가 후에 긴 막대 형식의 NRG가 적혀있는 분홍 풍선을 쓰게 되었다. 그 뒤로 다시 NRG의 로고가 쓰여있는 일반 분홍 풍선으로 바꼈다.
  10. 여자 형제가 있지만 장남 겸 막내이거나, 아니면 2남 1녀 중 막내이며, 아예 3남 중 둘째인 경우도 있다.
  11. NRG의 전신이자 형님라인. (소속사에서는 형님라인을 잘 밀어주질 않았다) 이들을 괴롭히려면 빠삐용을 틀면 된다
  12. 3집 활동 멤버이자 동생라인. 당시 임시 리더는 문성훈, 메인보컬은 김환성.
  13. 실제로 <할 수 있어>, <사랑 만들기>의 뮤직 비디오를 보면 뒷배경에 웬 뜬금없는 비행선이 날아다니고(...) 멤버들이 노래에 맞춰 안무를 추는데 몸이 번쩍번쩍 빛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할 수 있어 MV 사랑 만들기 MV
  14. 춤이 매우 격하다.
    언뜻 보면 쉬워 보이지만, 일단 쉴 틈 없이 움직여야 하고 중간 간주 부분과 끝에 있는 덤블링이 압권. 실제 20세기 미소년에서 문희준이 뭐가 어렵냐며 춤을 췄지만, 결국 쉴 틈이 없다며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였다.
  15. 덤블링은 실제로 당시의 은퇴한 국가대표 체조 선수에게 배웠다고 한다. 당시 음악 프로그램 무대는 급하게 만들어진 경우가 대부분이라 덤블링을 하다 손에 못이 박히기도 했다고.
  16. 춤이 격하고 중간의 덤블링 때문에 라이브할 때는 마이크를 놓치거나 밟아서 망가뜨리는(...) 실수도 자주 했다. (실제 천명훈 본인이 밝힌 바에 따르면 데뷔 무대에서 마이크를 놓쳐 잡으려고 했었고, 다행히도 카메라에는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 그 바람에 나중엔 음악방송 관계자들이 NRG에게 좋은 마이크를 주지 않았다고. 참고로 가장 많이 망가뜨린 멤버는 노유민.
  17. 1집 활동 당시 원곡 버전보다는 리믹스 버전으로 더 많이 활동했는데 이 리믹스 버전은 후에 2집 수록곡으로 들어간다.
  18. NRG의 특징인 덤블링이 여전한 것을 볼 수 있다. 다만, <할 수 있어> 때처럼 모든 무대에서 덤블링을 하지는 않았다. 중간의 문성훈, 김환성의 쌍둥이 춤은 덤.
  19. 덤블링은 없지만 여전히 격한 안무를 볼 수 있다.
  20. 기본적으로 온 몸을 쓰는 춤이 쉴 틈 없이 이어진다. <할 수 있어> 간주에는 그 악명 높은 트레이드 마크, 전원 백덤블링이 있고, <Messenger>의 안무는 공중에 붕 떠서 떨어지거나 전갈춤과 윈드밀이 있는 등 몸을 확 던지듯이 거칠다.
  21. 당시 춤으로 아이돌 중에서 다섯 손가락에 들었던 문희준이 NRG의 1집 타이틀 곡인 <할 수 있어>를 봤는데일단 노유민의 비주얼에 한 번 놀라고 전 멤버가 덤블링을 하는 거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은지원은 다른 그룹에 들어간다 해도 백덤블링 때문에 NRG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고.(...)
  22. 다만, 중국에서는 H.O.T., 젝스키스보다 인기가 많았다.
  23. 지금은 천명훈이 예능위주로 가장 활발히 활동하고 있지만 의외로 그 당시땐 꽤나 조용했는데 아무래도 신비주의 컨셉이 유행이어서 과묵한 미소년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그런걸로 보인다.(실제 이런 이미지 덕분에 당시 천명훈의 별명은 '카리스마 천'이었다) 하지만 적자엔 못 버텼다 NRG가 나왔던 예능을 봐도 알 수 있지만 다른 멤버들은 말수가 적었던 거에 비해 유독 이성진만 굉장히 시끄러웠다(...).
  24. 핫젝갓알지가 2013년에 이 곡을 리메이크할 때 저작권 문제가 늦게나마 제기되고 해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25. 천명훈이 컨셉부터 맘에 안든다며 빼자고 했지만 회사에서 억지로 넣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빌미로 천명훈은 이성진과 함께 중간에 NRG를 나와야만 했다.
  26. 당시 선보인 곡이 2집 후속곡 <Messenger>였는데, 랩과 비트가 상당히 강한 곡이었고 퍼포먼스도 곡에 맞게 매우 강렬했다. 곡이 끝나고 마지막 동작으로 붕 떴다 옆으로 누워 착지했는데, 3초 간 조용하더니 다음 순간 기립박수가 터져나왔다고 한다. 정적이 흐르던 3초 동안 이성진은 '망했어요 끝났다, 이게 무슨 망신이냐' 생각했다고.
  27. 그런데 Messenger의 실제 안무는 이 설명과 조금 다르다. 붕 떴다가 옆으로 누워 착지하는 동작은 곡이 끝날 때가 아니라 간주 때 나온다. NRG - 한중 우호 방송 문화교류 공연
  28. 단, 클론은 NRG와 반대로 중화인민공화국보다는 중화민국 중심으로 인기몰이를 한 편.
  29. 이 때 레드카펫을 처음 본 멤버들은 자기들 것이 아닌 줄 알고 당황해서 레드카펫을 밟지 않고 옆문으로 기어들어갔다고 한다. 하도 인상깊었는지 중국 진출에 대해 물으면 다들 이때 경험을 이야기한다.
  30. 당장 메인보컬인 이성진이 나갔고, 천명훈 역시 나머지 고음을 김환성과 분담했던 멤버였다. 이 둘이 동시에 나가버렸으니... 문성훈은 랩 전담이고 노유민은 랩, 노래 모두 참여는 했지만 비주얼 담당 측면이 강했기에... 보컬 셋 중에 라이브도 제일 불안했던 김환성 혼자 남았고 김환성 혼자 짊어지기엔 부담이 컸으니 어떻게 보면 예견된 일.
  31. 실제로 이성진 탈퇴 당시 팬들 사이에선 메인보컬을 누가 할 것이냐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많았다. 결국 메인보컬은 김환성이 맡았다. 그리고 망했어요.
  32. 이 프로그램에 003이 출연하기도 했는데 서로 모르는 척 장난치다가 003이 "아빠 앞에서 재롱떠는 건데요."라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33. 김환성이 하도 전화를 많이 걸어서 나중에는 이성진에게 전화가 오면 천명훈이 "또 환성이야?"라고 물어볼 정도였다고..
  34. 이후 탈퇴선언이 자신들의 생각이 아니었다고 밝혔다.
  35. 이 때문인지 사람들 사이에서 NRG는 미소년 그룹의 이미지와 웃긴 그룹의 이미지가 합쳐져 있는 묘한 그룹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36. 후속곡이 천명훈이 만든 <삶은... 계란>이었는데 저작권료가 8만원(...) 들어왔다고.
  37. 사석과 이미지 차이가 굉장히 컸다고 한다. 사석에서는 큰 형답게 점잖고 조용했지만 카메라가 도는 순간 주접... 그래서인지 5집이 크게 성공하고 나서부터는 원래 성격대로 주접을 최대한 자제하기도 했다.
  38. 모 방송에서 자신을 하이에나라고 표현했는데 다른 연예인들이 펑크낸 방송을 다 주워먹고 다녀서. 이때도 NRG는 유난히 고생하고 구박받는 신데렐라 이미지가 강했다.
  39. 당시 인기 개그맨이었던 정종철이정수가 뮤직비디오에 출연한다.
  40. 여담으로 이 당시에 이성진이 천명훈의 통장을 슬쩍 봤는데 Hit Song 저작권료가 억단위로 들어왔다고 한다.
  41. SBS 인기가요에서는 이성진과 친분이 있었던 강타가 "이성진 씨가 제게 가슴 아픈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게 있다고요. 열심히 하니까 되죠?"라고 말하기도 했다.# 맴찢
  42. 이 시기가 하필 예능 프로그램의 가학성과 자극성, 외모비하가 하늘을 찌르던 시기였다는 것도 이미지 악화를 가속시킨 원인이었다.
  43. 방송에서 틀어주는 영상을 통해서만 과거를 알 수 있었던 예전과는 달리 유튜브나 방송사 아카이브 VOD를 통해서 개인이 얼마든지 NRG의 아이돌 시절을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도 한 몫 했다.
  44. 젝스키스를 따라한다는 비난의 여론이 많았지만, 천명훈의 말에 따르면 NRG의 컴백은 젝스키스의 컴백 전부터 계획되고 있었다고 한다.
  45. 팬미팅 자리에는 문성훈이 참석하지 않았으며, 컴백은 문성훈을 제외한 이성진, 천명훈, 노유민 셋이서만 한다고 전했다.
  46. 사실 컴백의 의미보단 2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가 크기 때문에 NRG가 이후에도 활동할지는 미지수이다.
  47. 천명훈이 밝힌 바로는 올해의 목표가 NRG의 이성진, 문성훈을 포함한 모든 멤버가 컴백하는 것이라고 한다.
  48. 한 방송에서는 '방송을 때려치고 싶었을 것 같은 사람"으로 이미지 투표를 하자 아주 당연하다는 듯 NRG가 선정되었고 MC들은 생각만해도 눈물이 난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49. 이때 교통사고를 겪기도 하고 덤블링을 하다가 손에 못이 박히거나 왼쪽 손목이 부러지고 척추를 다치기도 했다. <할 수 있어> 활동 중반부 영상에서 이성진을 보면 안무에서 왼손을 쓰지 못하는데 부러졌기 때문.
  50. 사실 추모앨범이라 대중적인 성공을 바라볼 수 있는 앨범은 아니었다. 다만 다시 돌아왔고,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증명 할 뿐!
  51. 현재 1세대 남성아이돌 중에서 지금까지 이름이 남겨진 그룹은 거의 다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던 1군들이다. 1.5군 중에는 NRG 외에 클릭비, 더 깊게 가면 태사자와 OPPA 외에는 없다시피 하다.
  52. 김환성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1년 반만에 NRG가 예능 이미지를 갖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멤버의 죽음을 겪었음에도 유쾌하게 방송하는 모습에서 비극 이미지가 씻겨나갔기 때문. 비극 이미지를 씻어내지 못했다면 무슨 활동을 하고 어떤 노래를 내도 우울하고 애잔한 동정받는 그룹이 되어 도리어 장기적인 활동의 발목을 잡았을 것이다. 비극을 극복하기 위해 완전히 유쾌한 그룹으로 선회한 것이 승부수가 된 것. 레이디스코드의 과제라고 할 정도
  53. 지금이야 '자체 프로듀스가 가능한 아이돌'하면 그것 자체가 엄청난 우상이 되지만 이상하게도 NRG는 자체 프로듀스 능력이 별로 부각되지 못했다. 천명훈이 작곡 능력으로 주목받게 된 것도 2013년 이후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