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당(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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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会党

  • 일본에 존재했었던 현재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정당.
  • 일본의 역사에서 사회당은 몇차례 같은 이름,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

1 일본사회당(1906년)

1.1 개요

사회주의협회(1900년)에서 사회민주당(1901년), 평민사(1903년)로 이어지는 일본 사회주의 운동의 흐름을 계승한 일본 최초의 합법적 사회주의 정당. 기존 무산정당과는 조금 다른 정당으로 분류된다.

1.2 역사

1906년, 사이온지 긴모치 내각으로 내각 개편이 이루어 지면서 일본 내의 분위기는 좀 더 융화정책으로 바뀌었고, 이에 따라 사회주의 정당 설립에 대한 열망이 높아져 갔다. 같은해 1월, 일본에서 일본평민당[1] 이 결성되었고, 당국에 단체 신고를 접수시켰는데 무리없이 접수되었다고 한다.[2] 이에 고무받은 사회주의자들도 사카이 토시히코를 중심으로 일본 사회당을 결성하게 된다. 1907년 2월, 일본평민당과 일본사회당은 합당, 일본사회당이 결성되기에 이른다.

이들은 "국법이 인정하는 범위에서 사회주의를 주장한다"는 모토로 당국에 단체 신고를 하였으며, 이로인해 무리없이 합법 단체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창당 직후, 도쿄시전(도쿄시영전철) 인상 반대운동을 비롯해서 적극적으로 대중운동을 전개했다. 당 내부적으로는 미국에서 아나르코 생디칼리즘의 영향을 받고 돌아온 고토쿠 슈스이가 주장한, 총파업에 의한 직접행동론과 노동자의 보통선거를 주장한 타조에 테츠지(田添鉄二)[3]의 의회정책론과의 대립이 심해졌다.

이로 인해 정부는 사회당 내부의 강경파들을 위협적인 존재로 여겼고,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비롯한 정부 요인들에 의해 단속을 단행할것을 촉구하는 요구를 지속적으로 받게 된다. 결국 1907년 2월 결사 금지 명령에 따라 해산되었다. 이유는 "안녕질서방해".[4]

참고로 이 이후 사회당, 공산당등의 정당이 생길때 까지 합법적 좌파정당 건설운동은 칠전팔기의 역사를 쓰게 된다(...).

2 일본사회당(1945년~1996년)

2.1 개요와 정당성향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전에 비공산당 계열이던 합법 사회주의 세력이 단결하여 결성하였다.

주로 좌파의 노동농민당, 중간파인 일본노농당, 우파인 사회대중당 등이 결집하였으며, 우파와 중간파는 민주사회주의적인 사회민주주의를, 좌파는 수정 마르크스주의적인 사회민주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또 일부였던 사회대중당 세력은 태평양 전쟁때 사회주의의 실현을 국가주의에 요구하며, 군사 독재에 협력한 강경파적인 색채가 강한 의원도 많았다. 그럼에도 대체적으로 미국에 비판적이었으며 신생국인 중공(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를 중시했다. 사회당의 지도자였던 아사누마 이네지로 의원은 중공을 방문하여 미국은 일본, 중공의 공동의 적이라고 하기도 하였으니...

전쟁 이전에도 창당 당시에 당명을 ‘일본사회당’으로 할지 ‘사회민주당’으로 할지 논의하다가 일본어 명칭은 일본사회당으로, 영문 명칭은 Social Democratic Party of Japan (SDPJ, 일본 사회민주당)으로 하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그러나 후에 좌파가 주도권을 잡으면서, 점차 Japan Socialist Party (JSP)라는 영문 명칭이 사용되게 되었다. 그 후 다시 우파의 영향력이 강해져 사회민주주의가 당의 노선이 되면서 SDPJ의 영문 명칭을 회복하게 되었다고 한다.

2.2 지지기반

  • 노동자를 기반으로 한 정당 답게 초기에 도쿄, 오사카, 나고야 등 대도시와 그 근교지역에서 상당한 강세를 보여(물론 중소도시나 시골은 자민당의 압도적인 우위였다. 물론 중소도시나 시골이라도 노조나 농민단체 가입률이 높은 일부 지역은 사회당의 지지세가 높았기는 했지만 훗카이도 지역을 뺀 나머지 지역에서 가입률이 높은곳이 그리 많지 않았다.) 선거구당 후보를 서너명씩 보내기도 했었으나 19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면서 공명당, 민사당, 공산당이 사회당의 지지기반을 잠식하게 되어 표를 나눠가지게 되면서 대도시 지역에서 우위를 상실하여 대도시 지역 선거구에서도 대체로 한두명씩 정도나 후보를 보내서 당선시키는 수준이 되었고 오히려 농어촌에서의 세력보존이 오히려 잘 된편이었다.
  • 그 이외에는 홋카이도에서 상당히 강세였다.[5]

2.3 역사

2.3.1 초기

도쿠가와 요시치카 후작 등의 명망가를 추대하려는 의도로 당초의 위원장은 공석으로 되어, 초대 서기장으로는 가타야마 데쓰가 취임했지만, 곧 위원장에 취임하게 된다.

2.3.2 가타야마 데츠 내각 ~ 분열

일본국 헌법에 의해 치러진 1947년 중의원 총선거에서 143석을 획득해 제1당으로 부상한다. 그 결과 민주당과 국민협동당과 연립하여 가타야마 데츠내각이 출범했다. 하지만 히라노 리키조 농림성 장관이 공직에서 추방된 것을 둘러싸고 우파의 일부가 탈당하고, 당내의 좌파는 공공연하게 내각을 비판하는 등 분열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1948년에 가타야마 내각이 당내의 파벌 대립의 선동으로 와해되었다. 니시오 스에히로 내각관방 장관은 좌파의 입각을 인정하지 않았고, 좌파는 사실상 당내의 야당처럼 되어 가고 있었다.

2.3.3 재통합

이렇게 좌우로 분열하는 문제를 저지르고 자민당으로의 합당이 이루어질 즘(1955년, 55년 체제)에야 다시 심기일전하여 뭉쳤다. 1956년 참의원 선거에서 사실상의 개헌 저지선을 확보하는데 성공했으며 전국구 의석수에서 자민당을 앞지르는 위엄을 보였다. 하지만 1958년 총선에서 8석을 늘리는데 그치고 1959년 참의원 선거에서 개헌 저지선에 못미치는 의석을 얻는데 그치면서 일부계파가 민사당(민주사회당)으로 탈당하여[6] 점점 의석을 깎아먹는 계기가 되었다.

안보투쟁 국면에서도 제 역할을 하지 못 하고 도쿄 찌르기 사건으로 아사누마 이네지 위원장(대표격)이 죽은 동정표도 얻지 못했다. 여당 자민당이케다 하야토 총리가 아사누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 때문에 역관광되었다.

이후 1960년대 후반, 사회당은 사민주의와 용공노선의 불편한 동거로 인한 당내 갈등이 격화되어 유권자에게 실망감을 주었고[7] 이는 1968년 참의원 선거와 1969년 중의원 선거에도 영향을 미쳐 자민당의 득표율 감소에도 텃밭인 대도시 지역에서 타 야당(공명당, 일본 공산당)에게 표를 빼앗기며 참패하였다.

하지만 1960년 후반 ~ 1970년대 후반의 야권 연대(사회당-공산당)로 상당수 지역에서 지자체장을 차지했고, 동시에 중, 참의원 선거에서 의석을 회복하는데 성공했다.[8]그리고 70년대 중반 자민당 정권이 위기를 맞았으나 정권을 확보하지 못하고 오히려 지리한 노선투쟁으로 내부 분열 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결국 1977년 참의원 선거에서 27석에 그치는 부진을 면치 못했고[9], 이후 1979년 통일지방선거에서 지방권력을 잃어버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6개월 후에 치뤄졌던 중의원 선거에서도 자민당의 부진(248석)에도 불구하고 또 의석을 까먹었다(119석에서 107석으로[10]). 하지만 자민당의 내분이 장기화되자, 상황은 역전되었고, 이 와중에 의회해산안이 통과되어 중참의원 동시선거가 펼쳐지자 드디어 정권교체를 이룰 기회를 잡았다.[11] 오오.

하지만 선거운동기간 도중 오히라 마사요시 수상이 죽어버리는 바람에 도로아미타불이 되었다. 중의원 의석수는 줄어들지 않았지만 참의원 의석수는 최저수준을 기록했다. 그 이후에 별 다른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하며 선거마다 족족 져버리는 모습을 보였고[12], 1986년 중,참의원 동시선거에서 나카소네 야스히로에게 통합 이후 최악의 참패를 당했다.

최악의 참패를 당한 사회당은 여성인 도이 다카코를 사회당 위원장으로 선출하고 대대적인 쇄신에 나섰다. 그 결과 80년대 일본 버블경제로 요약되는 호경기였을때였음에 불구하고 선거때 마다 선전하는 모습을 보였고. 1989년 참의원 선거에선 드디어 자민당을 제치고 개선 1당이 되는데 성공한다.[13]

그러나 다음해 중의원 총선거에서 연립 정부구성에 참여하기로 한 타 야당(공명당, 민사당)이 지리멸렬한데다가[14] 후보자수를 1986년 총선거보다 5명 더(1986년 144명->1990년 149명) 내는데 그쳤고 정권교체엔 실패했다.[15]

그리고 1991년 걸프전이 터지자 사회당은 걸프전을 협상을 통해 종결하자는 비현실적인 논평을 발표했고 이는 도이 위원장의 지도력에 의심을 가게 만들었다. 결국 사회당은 그 해 통일지방선거에서 참패하고 도이 다카코는 사회당 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사회당 우파가 권력을 잡았다.

당초에는 사회당이 제1당이 되지못하더라도 어느정도 의석수를 늘릴수있을것이라고 예측이 되었지만, 하지만 1992년 참의원 선거전에서 PKO(유엔평화유지활동) 법안이 쟁점이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PKO법을 민사당과 공명당이 찬성하면서 야당의 공동 전선이 흐려졌고, 결국 PKO법안 시행에 대해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다. 당내도 분열되었다. 독자후보를 내세우는 측과 그래도 공명-민사당과 같이 가야한다는 측이 나눠진 것. 그 결과, 1992년 참의원 선거에서는 (사과와 규빈사건까지 겹쳐 자민당의 지지율이 최악이었을 때임에도) 투표율이 50.7%에 그쳐 반사이익을 얻지못하고 22석을 확보하는데 그쳤다. 다음해엔 1993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을 대신할 비전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되려 쇄신이미지를 일본신당, 신생당 신당 사키가케 등이 가져가면서[16] 기성 정당적인 이미지가 씌여지며 1986년 총선거보다도 의석수가 적은 70석에 그쳐 참패했다.

2.3.4 무라야마 도미이치 내각

1993년 중의원 선거 참패에도 불구하고 정권교체가 되어 호소카와 모리히로 내각의 여당내 1당이 되었으나[17] 여당내 갈등으로 1994년 4월에 연정을 깨고 그 해 6월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총리가 되는 조건으로 자민당과 연립정권을 수립했다. 하지만 무라야마 내각은 낮은 지지율로 인해 삐끄덕 거렸고, 결국 무리야마 도미이치가 사의를 표명한 뒤, 일본 사회민주당으로 당명을 변경했다.

2.3.5 몰락

이렇게 짧은 여당시기를 거치면서 자민당이 부진했던 기회를 전혀 살리지 못하고, 도리어 사회당이 정체성을 잃고 자멸해버렸다. 그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당 우파가 민주당(일본)으로 건너가고 좌파가 신사회당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설상가상 지지기반마저 민주당으로 떨어저 나가 계속 의석수가 반토막나고, 결국 군소정당으로 전락하고 만다...

2.4 일본 사회민주당 외 후신 정당

이후의 역사는 일본 사회민주당 참고.

  • 사회당의 해산 이후 지금의 일본 사회민주당 이외에 무라야마 내각의 이념 변화을 반대하던 강경파들이 떨어져 나가 스스로 살림 차린 신사회당이 있다. 국회 원내로는 진출하지 못하고 기초자치단체 의석만 전국구적으로 엄청 많이 갖고 있다. 이전에 한국의 민주노동당과의 간담회도 있었고 통합진보당을 응원했고 박근혜 정부에게 진보세력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방북한 적도 있다.
  • 이외에 사회당이라는 정당이 또 있었으나 여기는 2000년애 치뤄진 제42회 중의원 선거에 한 번 나오고 국회 입성에 실패힌 뒤 이후 활동이 없다.
  • 박상희 기자 - 일본 사회당의 몰락은 무엇을 말하는가 #

2.5 일본 민주사회당 - 방위노조를 따라 강경우파로 돌변

1959년 참의원 선거에서 사회당이 개헌저지선 확보에 실패하여 부진하자 사회당 좌파가 우세를 점하고 있던 우파의 일부계파가 민주사회주의를 주창하면서 창당된 정당으로 창당 초기에는 민주사회주의를 주창했지만 1960년대 중반 방위 노조가 민사당에 가입하면서 기존 호헌노선에서 개헌노선으로 갈아탔다.[18] 이에 당내 좌파가 대거 민사당을 탈당하면서 외교, 국방정책에서 자민당보다 우파라고 불릴 정도로 우측으로 기울어졌다.

이후 좌우의 전체주의를 배격하겠다는 당의 규약을 안드로메다로 날려먹고 칠레피바다로 만든 피노체트반공주의를 국시로 했다는 이유로 옹호했고[19], 심지어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당시 전두환에게 김대중을 석방하지 않으면 북한과 수교협상을 하겠다고 압박을 넣은 스즈키 젠코 수상을 한국의 내정에 간섭한다(...)고 비판했으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다만 민사당 내에서도 자유민주당(일본), 공명당과의 연대를 주장하는 자공민 연대파와 공산당, 자민당 빼고 다 뭉치자는 민 연대파가 대립해서 이와 관련해 그 안에서도 내분이 있었다. 다만 그와 별개로 복지를 중시하는 경제정책과 방위노조의 영향력 때문에 대도시 지역[20]에서는 지지율이 그럭저럭 있었던 편이었다.

어쨌든 그와 별개로 1970년대 중, 후반에 세가 강해졌고 이를 바탕으로 1980년 중, 참의원 동시선거에서 사회당, 공명당과 연합전선을 짜서 정권교체까지 노렸으나 오히라가 선거운동기간 중에 사망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후 1983년 중의원 선거에서 39석을 확보해 세를 확보했을 때도 있었지만 나카소네 야스히로 수상 하에서 세가 약해졌고, 특히 리쿠르트 사건에 민사당 위원장이 연루된 것으로 드러나면서(...) 1990년 중의원 선거에서의 정권교체 실패의 원인이 되었다.

그 직후 자민당과 정책적으로 연합을 꾀하기도 했지만 별 이득을 보지 못했고, 1993년 자민당이 과반확보에 실패하자 사회당, 공명당, 일본신당, 신생당, 사회민주연합, 신당 사키가케와 함께 연립정권에 참여했다.

그러나 1994년 신생당, 일본신당과 연합해서 새로 원내교섭단체를 만들자 사회당이 이에 반발해서 연립정권에서 탈퇴했고 하타 내각이 단명으로 끝나면서 야당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1994년 12월에 신진당에 합류하면서 해산되었다. 여하튼 구 민사당 출신 의원과 민사당을 지지했던 노조 등의 조직은[21] 신진당 해산후 이합집산을 거쳐 대다수가 민주당(일본)으로 이적했고, 이는 현재의 민진당(일본)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나, 일부는 자유연합을 거쳐서 자민당으로 흡수되었다.

혐한, 혐중 발언으로 악명이 높은 카와무라 타카시가 민사당 서기장이었던 가스가 잇코의 비서 출신이다.그 오야붕에 그 꼬붕 사실 민사당의 노선자체로만 본다면 노다 요시히코 수상때 민주당의 노선과 비슷하다.[22]

2.6 역대 선거결과

2.6.1 중의원

횟수선거연도의석수/총의석득표율
22회1946년93/46617.9%
23회1947년143/466(제1당)26.2%
24회1949년48/46613.5%
좌우 분열
25회1952년좌파 사회당 54/46611.6%
우파 사회당 57/46612.2%
총 111/46623.8%
26회1953년좌파 사회당 72/46613.0%
우파 사회당 66/46613.5%
총 138/46626.5%
27회1955년좌파 사회당 89/46615.3%
우파 사회당 67/46613.9%
156/46629.2%
재통합
28회1958년166/467[23]33.9%
29회1960년145/46727.1%
30회1963년144/46728.9%
31회1967년140/48627.8%
32회1969년90/48621.8%
33회1972년118/49121.5%
34회1976년123/51120.8%
35회1979년107/51119.8%
36회1980년107/51119.3%
37회1983년112/51219.7%
38회1986년85/51217.3%
39회1990년136/51224.8%
40회1993년70/51215.3%
일본 사회민주당으로 당명 변경

2.6.2 참의원

횟수선거연도개선/비개선총의석참의원 정수득표율(지역구/전국구)
1회1947년47/0[24](제1당)4725022.2%/16.4%
2회1950년36/2561(제2당)25025.2%/17.3%
3회1953년좌파 사회당 10/162625010.5%/6.4%
우파 사회당 18/224014.0%/14.3%
총 28/386624.5%/20.7%
4회1956년49/318025037.58%(제2당)/40.38%(전국구 제1당)
5회1959년38/4785250
6회1962년37/2865250
7회1965년36/3975250
8회1968년28/3664250
9회1971년39/2766252
10회1974년28/3462252
11회1977년27/2956252
12회1980년25/2752252
13회1983년22/2547252
14회1986년20/2141252
15회1989년46/2268[25]252
16회1992년22/4971252
17회1995년17/2138247
일본 사회민주당으로 당명 변경
  1. 보통선거 추진을 모토로 결성된 일본의 무산정당. #
  2. 당시 메이지 시대의 정부에서는 정치단체를 해산시키는것은 사회안정과 치안유지를 명분으로 얼마든지 가능했다. 앞서 이야기 한 사회주의협회나 사회민주당같은 단체와 정당들도 몇달 혹은 몇년만에 강제로 해산당하는 일이 빈번했다. 심지어 1901년의 사회민주당은 일본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이었지만, 신고한 당일날 금지 및 해산을 당해서 최초이긴 하나 최초의 합법정당은 아닌 괴랄한 사례가 되었다(...).
  3. 일본의 초기 사회주의자. 당시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주의와 조선 침략을 비난한것으로 유명하다. 1908년 사망.
  4. 훗날 어마어마한 악명을 떨치게 되는 치안유지법(국가보안법의 전신)이 생겨나고 고등경찰이 활개치는건 수십년 뒤의 이야기다. 그만큼 이 시대는 단체를 금지시키고 탄압하는데 엄청나게 얼렁뚱땅이었다는 이야기.
  5. 다만 훗카이도에서 상당히 강세였기는 했어도 자민당과 비슷한 득표를 보인 수준이지, 자민당을 득표율에서 앞질렀다는 애기는 아니다.
  6. 이 과정에서 CIA의 개입이 있었다는 후문이 있다.
  7. 이 때 사회당 우파를 대표한 정치인이었던 에다 사부로가 무당파층에서 많은 지지를 얻었고 거기에다가 사토 에이사쿠가 그리 지지율이 높지 않았던지라 에다 사부로가 당권을 잡았다면 공명, 공산당으로의 표 이탈을 막아 정권교체를 이룩했을것이라는 얘기가 나오지만... 생각은 알아서
  8. 단, 의석 회복이 후보자 줄이기(당시엔 일본 중의원 선거제도가 중선거구제라 후보를 많이 내면 오히려 "나가리" 되는 경우가 그리 드믈지 않았다.)로 인한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의석수로 보면 분명 선전했지만 득표율은 정체되거나 되려 줄어드는 양상을 보인다.
  9. 이 과정에서 에다 사부로와 일부 의원이 사회당을 탈당하고 사회시민연합(후에 사회민주연합으로 개칭)이라는 별개의 정당을 만들었다.
  10. 그 덕분에 자민당이 계파싸움으로 갖기 총리후보를 2명을 내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음에도 총리 선출 선거에서 3위로 밀려났다. 안습.
  11. 이 때 그동안 지방선거에서 연대를 공산당과 전면적으로 결별하게 된다. 정권교체를 이루어낼려고 할 생각은 있었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후보자를 그리 많이 낼 생각은 없었고 공산당과 민사, 공명당의 사이가 원수급인지라 공산당이 거대야당이 되지 않는 이상(물론 보수적인 일본의 여론지형상 사실상 불가능) 공산당과의 연정을 이룩 하기에 무리가 따랐다. 물론 공산당과의 연대에 부정적이었던 사회당 우파의 세가 강해진것에도 원인이 있지만
  12. 이 시기 승리했던 유일한 중앙 선거가 1983년 중의원 선거 정도였으니 말 다한셈. 그나마 이 선거에서도 1980년 선거보다 5석 늘어나는데 그쳤다.
  13. 이 때 일본 최초의 여성 당수 도이 다가코는 "산이 움직였다"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이 때를 마돈나 열풍이라고 부른다. 물론 몇년 뒤에 산이 움직였긴 했지, 사회당도 동시에 움직였다는게 문제였긴 했지만...
  14. 하필 리쿠르트 사건에 민사당 의원과 공명당 일부 간부도 연류되었다. 이 때문에 사회당이 136석으로 의석을 늘린데 반해, 공명당은 부진하고 민사당은 참패했다.
  15. 본래 180명을 공천할 예정이었으나 타 야당(공명, 민사, 사민련)의 반발과 후보자를 너무 많이 내면 오히려 선거에서 부진할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후보자를 줄였다는 안타까운 후문이 있다. 그 덕택에 타 야당이나 야당계 무소속의원의 의석까지 합해도 257명에 그쳤다. 그에 반해 자민당은 보수계 무소속 후보까지합해서 328명을 후보자로 내걸었다. 물론 정권교체 되었어도 버블 붕괴때문에 되려 책임을 뒤집어 쓰어 영 좋지 않은꼴로 끝낱을것이라는 전망이 있기는 하지만...
  16. 이는 사회당이 중의원 의원수 감축 방안(512->511석)을 반대했던 영향이 컸다.
  17. 하지만 의석이 많지 않았기에 각료배분에서 단 3자리만을 얻는 불이익을 당한다.
  18. 참고로 프락치라고 욕을 먹기도 했지만 엄연히 안보투쟁에 참여했던 정당이었다.
  19. 이 때문에 2005년 칠레 대선에서 반 피노체트 투사였던 미첼 바첼레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옛 민사당 출신 인사들이 칠레 대사관에 사과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병주고 약주기?
  20. 특히 도요타나고야가 있는 아이치 현에서.
  21. 실질적으로 민사당 지지 노총이었던 전일본노동총동맹은 사회당 지지성향의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와 통합을 하여 렌고(연합)이라는 명칭으로 통합되었고, 참의원 선거에서 사회당-민사당-공명당과 별개로 공천을 내기도 했다. 1989년 참의원 선거에서 11석의 당선자를 내면서 선전을 거두기도 했지만 1992년 참의원 선거에서 PKO법을 둘러싼 민사당-공명당과 사회당과의 갈등과 사회당 내의 혼란으로 의석을 얻지못하면서 참패.
  22. 물론 노다 요시히코는 민사당 출신은 아니다.(...)
  23. 개헌선(156석) 단독 저지
  24. 비 개선 의원이 없었기 때문에 함꺼번에 다 뽑았다.
  25. 개선 제1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