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4세

(이반 뇌제에서 넘어옴)
역대 모스크바의 군주
바실리 3세이반 4세표도르 1세


1530년 11월 3일 ~ 1584년 3월 28일
Иван Грозный (이반 그로즈니)

"러시아의 모든 군주들은 전제군주이기 때문에 누구도 비판할 수 없다. 군주는 신으로부터 선사받은 노예들을 자기 뜻대로 부릴 수 있다. 군주가 불의한 일을 저지를 경우가 있을 지라도 그대가 군주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중죄를 범하는 것이 될 뿐이 아니라 그대의 영혼을 지옥에 떨어뜨리는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그대에게 그대의 군주를 맹목적으로 따르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앤드류 쿠릅스키 대공에게 보낸 편지[1]

러시아 역사상 가장 잔혹했던 군주.
무수한 저주와 존경을 동시에 받은 황제

1 개요

러시아류리크 왕조황제. 흔히 이반 뇌제(雷帝)라고도 하며, 영어로는 Ivan the terrible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백성들이 그를 부른 칭호이자 별명인 그로즈니(Гро́зный)[2]의역한 것으로 "두렵다", "끔찍하다"라는 뜻으로서 현대 영어에서 변질되어 사용되는 "형편 없는"이란 뜻이 아니다. [3] 오히려 "적을 두렵게 만든다"라는 뜻이 있으며, 이반 4세 통치 초기 카잔 칸국과 아스트라한 칸국을 때려부수는 동시에 자국내 보야르들을 찍어누르던 시절에 주어진 별명이라 "강한" 리더라는 뜻이 강하다.

'뇌제'라는 표현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조어를 그대로 번역한 것으로 그로즈니라는 호칭 자체는 우레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단, 雷 자에는 우레라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나운 모양새를 나타내는 뜻도 있다. 즉, 사나운 황제라고 해석하면 틀린 번역은 아니다. 잘 안 쓰는 용례라서 그렇지 가끔 '이반 뇌제' 대신 '폭군 이반'이라고 의역한 경우도 있다. 의역이긴 해도 이반 뇌제보다는 이쪽이 더 맞는 번역이지만 왠지 '뇌제'가 더 간지나기 때문인지 멋있어 보이기 때문인지 이반 뇌제가 더 많이 쓰이는 편.

이반 4세는 이전까지 공국의 수준에 불과했던 러시아를 처음으로 국가의 지위에 올려놓았고 스스로를 공작이 아닌 '모든 러시아인들의 차르' 라는 이름으로 대관한 최초의 러시아 군주이기도 하다. 차르라는 명칭 자체는 선군인 이반 3세 때부터 쓰였지만 그것은 서유럽 국가들과 주고받는 외교문서에 국한되어 있었을 뿐 군주의 정식 명칭은 '모든 러시아인들의 대공(大公)' 이었다. 또한 그의 시대에는 주변지역들을 차례로 정복하여 러시아동유럽의 강국으로 만드는 등 최대의 전성기를 구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극단적인 공포정치를 휘둘러 러시아를 공포에 빠뜨린 인물이기도 해서 이반 뇌제로 더 잘 알려져 있다.

2 성장과 즉위

이반 4세의 아버지인 바실리 3세는 첫 아내 살로메이를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수도원에 보낸 뒤 옐레나 글린스키와 재혼했다. 그러나 정교회 대주교는 바실리의 재혼을 죄악이라고 말하면서 "그대는 악한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대의 나라가 공포와 눈물로 얼룩지리라, 피가 강처럼 흐르고 그대의 도시는 불길에 휩싸이리라."라고 저주했다. 이 저주는 그대로 실현되었는데 전설에 의하면 하늘이 갈라지고 번개가 크렘린을 덮치는 가운데 1530년,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3세의 장남으로 이반 4세가 태어났다고 하며. 나라에는 흉흉한 소문들이 퍼졌다고 한다. 그러나 1533년, 불과 3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 바실리 3세가 세상을 떠나자 차르로 즉위했다. 몇 년 동안은 어머니 엘레나가 일부 보야르(귀족을 일컫는 러시아어)들의 협력을 받아 섭정을 하였다.

옐레나는 1510년생으로 왕의 어머니로서 섭정이 되었을 때 고작 23살 정도에 불과했다. 정치적 경험이 전무한 것은 물론이고 성품이 거만하고 독단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좋지 못한 여자였다고 한다. 그녀는 집권하자마자 바실리 3세의 동생인 드미트로프의 유리(Yury of Dmitrov) 및 스타리트샤의 안드레이(Andrey of Staritsa)의 도전을 받았는데, 친족인 글린스키 가문의 도움을 받아 이들을 1534년과 1537년에 투옥 시킴으로써 권력 투쟁에서 우위에 서는 듯 했다. 상식적이라면 태후로써의 지위를 과시하면서 그녀의 권력의 기반인 이반 4세의 앞날을 탄탄히 다지는 것이 그녀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였고, 이를 위해서는 그녀의 친족 글린스키 가문의 사람을 요직에 앉히고 믿을 수 있는 보야르들을 포섭하여서 러시아에 강력한 통치자가 사라진 틈을 타 자신들의 권력을 되찾으려는 유력 보야르들을 견제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도와준 숙부 글린스키 공의 사후 권력의 요직을 차지한 것은 뜻밖에도 젊고 잘생긴 보야르인 텔렙네프 오볼렌스키였다. 별 정치적인 기반이나 수완이 없는 그가 갑자기 중요한 자리에 오른 것은 그가 옐레나의 정부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행동은 그렇지 않아도 반대파가 많은 옐레나에게 더 많은 정적을 만들 수 있는 구실을 제공했으며 결국 1538년 옐레나는 젊은 나이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옐레나가 사망한 이유는 옐레나 대공이 권력을 지키기 위해 이반 4세의 삼촌들을 처형했는데 그에 대한 원한으로 일어난 일이라고 여겨진다. 현재는 슈이스키(Shuisky) 가문이 독살을 사주했을 가능성이 가장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옐레나는 살아있을 때에도 만약을 대비하여 아들인 이반 4세의 권력을 뒷받침할 만한 시스템을 갖춰 놓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5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 있었으므로 이 시기에 국가 요직에 자신과 친족인 글린스키 가문과 이반 4세의 미래를 위해서 자신의 사람들을 심어놓을 시간은 충분했다. 또한 슈이스키와 벨스키 같은 유력 보야르 가문들이 권력을 넘보지 못하게 제압할 시간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그녀의 정치력이 전무해서 일어난 일이었고 그녀가 정치에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이러한 조치들을 취하지 못했다는 점이 가장 문제였다. 결국 옐레나는 권력 기반을 다지는 대신에 젊고 잘생긴 애인을 만들어 시간을 보냈고 그 대가는 아들들이 뒤집어쓰게 되어 그들은 매우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7살의 나이에 고아가 되어버린 이반 4세는 슈이스키와 벨스키 가문 보야르들의 권력투쟁에 휘말려 청각장애인인 남동생 유리[4]와 함께 험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사실 이반 4세는 10살 정도의 시기에는 매우 총명했던 것 같다. 그는 글을 읽는 방법을 일찍 배웠으며 교회의 문헌들을 많이 읽었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자신을 둘러싸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를 알 수 있었다. 유력 보야르들은 이반 4세의 권력을 제한할 의도로 그에게서 친족들과 친구들을 떨어뜨려 놓으려고 했는데, 이 과정을 포함하여 이반 4세의 내면에는 이런 보야르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심이 자라게 되었던 것 같다.

보야르들은 자신들에게 전제정권을 휘두른 조부 이반 3세 대제에 대한 반감으로 어린 이반 4세를 우습게보며 학대했다. 해가 뜨기도 전에 몇명의 귀족들이 이반의 침실로 달려들어와서 격렬한 논쟁을 벌여 이반을 괴롭혔다는 일화가 전해지며[5] 그들은 이반에게 아무렇게 옷을 입혔으며 심지어 먹을 것도 주지 않았다.[6] 일설에 따르면 왕을 때리거나 밀실로 끌고가서 고문까지 하거나 자기들끼리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암투를 벌이거나 놀랍게도 어린 왕자 앞에서 살인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처럼 귀족들한테 심한 치욕을 당했으며 이런 고통스러운 시간에 대한 기억은 자신이 신뢰했던 앤드류 크릅스키 대령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잘 드러난다. 편지에서는 "안드레이 슈이스키가 더러운 신발을 자신의 침대 위에 올려놓은 일을 매우 고통스럽다"고 적어서 보냈던 것이다. 결국 이때의 경험이 불안정한 이반의 정신상태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반의 광기는 이미 젊을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해, 어린 나이에는 크렘린궁의 탑에서 작은 동물들을 잡아 눈알을 뽑은 뒤에 집어던져 죽이고 동물들이 죽어가는 장면을 지켜보는 일을 즐겼으며, 말 타는 법을 익힌 후에는 말을 타고 온 모스크바 성내를 휘젓고 다니며 친구들과 함께 채찍으로 보이는 사람을 마구 후려치고 다니거나 마음에 드는 여자가 보이면 강간을 하는 등의 막장적인 인생을 보냈다. 사실상 부모 없이 자란 이 어린 권력자가 나중에 왜 그렇게 잔인한 숙청을 벌였지에 대해서 여러가지 학설이 존재하지만 이반 4세의 어린 시절을 고려하면 이 모든 일이 의외의 상황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밑의 항목에서 더 설명을 하겠지만 후일 자신의 아들마저 때려죽일 정도로 광기로 치닫는 이반 4세의 정신적 배경에는 이런 어두운 유청년기도 작용하지만, 젊은 시절에 권력에서 배제된 채 한량질을 하며 얻은 매독이라는 치명적인 병도 작용했다. [7] 또는 일부 학자들은 그의 비정상적인 인격이 수은 섭취 때문에 나타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는 수은 섭취에 병적인 집착을 보여 그의 방에 있는 가마솥에 수은을 끓이기도 했다. 실제로 훗날 시체 발굴 과정에서도 수은 중독이 사실로 드러났다. 진시황이냐?[8][9]

13살 때, 이반은 자신을 학대하던 보야르의 1인자를 체포해 크렘린의 개 사육사에게 넘겨줘 개밥으로 만들어 복수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친정체제에 들어갔다. 이후 자신의 측근들을 중심으로 권력을 강화해 나갔으며 17세에는 재색을 겸비한 귀족의 딸인 아나스타샤 로마노프를 대공비로 맞아들였다. 이반은 진정으로 아나스타샤 왕비를 사랑했던 듯하다. 그녀 앞에서는 그 악독한 이반 4세가 순한 양처럼 보였다고 한다. 갭모에 이런 아내의 영향 때문인지 이반은 영웅에 필적할만한 놀라운 업적을 후세에 남기게 된다 아나스타샤는 안나, 마리아, 드미트리, 이반, 유도시아, 표트르라는 6명의 아이들을 낳았는데 이반과 표트르만이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았다. 참고로 이 때의 결혼으로 후일 로마노프 가문은 차르의 보위를 차지할 명분을 얻게 되어 혼란 시대 이후 로마노프 왕조를 열게 된다.

그의 지적 능력에 대해 알아보자면 그는 상술했듯이 보야린들에게 학대를 받아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매우 총명하고 재능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대주교 마카리와 그 일파에게 좋은 영향을 받아서 위에 적힌 '오락'보다는 독서에 열중하게 되었다. 이들의 영향력 덕분에 이반 4세는 성년이 되었을 무렵에는 박학다식함으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할 정도로 매우 지적인 사람으로 변했다.
그는 글 쓰기에 관심이 많았고 실제로 많은 글을 쓴 작가였다. 또 훌륭한 연설가이기도 했으며 말을 할 때, 고대작가들의 작품 속에 나오는 말들을 인용하거나 로마 역사들을 인용하는 것을 좋아했다. [10] 그리고 왕권신수설이나 왕권 강화와 관련된 논문을 좋아했기에 청소년기부터 그는 강력한 군주를 꿈꾸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도덕성은 지성보다 높지 않았고 대주교 마카리를 비롯한 신실한 성직자들은 그의 비틀린 심성을 교화하는데에는 실패했다. 최종적으로 성직자들이 만들어준 이반 뇌제의 지적 능력은 무자비함과 의심병, 복수심과 결합해버렸다.

3 폭정과 선정 사이

이반 4세는 어떤 때는 말짱한 정신으로 온전히 국정을 펼쳤지만, 어떤 때는 그의 광기가 발동하기도 했다. 하루는 프스코프라는 도시에서 행정관의 탐학을 탄원하러 온 청원자들에게 펄펄 끓인 포도주를 퍼붓는가 하면, 수염을 촛불로 태우고 옷을 다 벗겨 눕히게 했다. 이들에게는 달궈진 쇠꼬챙이로 찔려죽을 위기가 닥쳤다. 그러나 그 순간 크렘린궁 예배당의 종이 굴러 떨어져 일어난 소동 때문에 이반 4세는 놀라서 자신이 뭘 하려 했는지를 잊어버렸고 그 덕에 프스코프의 청원자들은 사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11]

이 소동 이후, 이반 4세는 전혀 딴 사람이 된 것처럼 열정적으로 국정을 돌보기 시작했다. 백성들은 그의 선정에 환호를 보냈을 정도였다. 이반 4세는 사제와 측근, 몇명의 귀족들로 구성된 "선발회의"를 구성해 그들에게 국정 운영의 자문을 구했다.

이후 1550년에는 러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전국회의"(러시아어로는 젬스키 소보르)를 소집하였다. 귀족과 성직자, 신흥 사족, 상인 등 각계각층의 대표들이 모인 이 회의는 오늘날의 국회와 같지는 않았지만, 이반 4세는 이 회의에서 비판적인 의견들을 귀담아 듣고 몇가지 잘못을 시정하기도 했다. 또한 이 회의에서 그는 "내가 이전에 저지른 사악한 행동들은 내가 고아였던 탓에 측근의 귀족들에게 나쁜 짓을 배운 탓이니 전부 잊어 주시오. 앞으로 부강한 러시아를 건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소"라고 말하며 "앞으로 더 존경받는 통치자가 되겠노라"고 약속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젬스키 소보르는 소집된 해에 법전인 수데브니크를 편찬했고 농민들의 권리나 뇌물 처벌에 대한 규정들을 정했으며 이후에 젬스키 소보르는 황제 선출이나 전쟁 승인 등, 중요한 일들도 맡았다. [12]

중앙집권체제도 강화되어 중앙정부의 관청인 프리카스들을 만들어 외교, 군사, 인사, 토지, 차르에 대한 탄원을 비롯한 각종 업무들을 맡도록 했고 중앙정부의 힘이 강해짐에 따라 점점 부서들이 늘어났다. 외무성에는 유능한 외교관인 비스코바티가 활약했고 차르에 대한 탄원을 맡은 탄원소에는 차르의 최측근 관료인 아다셰프가 책임자였다.

1551년에는 대주교 마카리가 주도하는 스토글라프 종교회의가 열려 교회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고 통일된 교회의식을 정했으며 성직자들의 윤리를 강화하는 조치들을 취했다. [13] 그리고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짐에 따라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들의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에 종교회의에서는 각 도시에 교회와 수도원 부설 학교들을 세울 것을 결의했고 세속의 교사들도 활동하여 문맹률을 낮추고 교육받은 사람들의 수를 늘리는 데 일조했다.
또한 1553년에 이반 4세는 인쇄소를 건설하였고 그 책임자인 이반 표도로프가 1564년에 사도행전을 찍어냈다. 1565년에는 문자학습용 책인 '기도서'가 나왔다. [14]

1556년에는 지방행정제도를 개혁해서 지방 행정 단위를 개편하고 지방관인 지사를 파견하는 제도를 폐지해 지방민들이 지사들과 각종 기관의 장들을 선출할 수 있도록 하여 지방자치를 실시하는 한편, 지사들이 더 이상 지역민들로부터 보수를 받지 않고 중앙 정부로부터 받게 하고 재판권과 징세권을 새로 만든 재판소의 소장에게 주어 지사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그리고 러시아의 영토가 넓어짐에 따라 많은 도시들과 요새들이 세워졌으며 지방 도시에서는 모스크바의 도시 양식을 따라하기도 했다. [15]

군제 개혁도 이루어져서 신분에 상관없이 군사 부분에 두각을 드러낸 인물들을 고위직에 임명했고 최초의 상비군인 스트렐치를 창설했다. 스트렐치는 국가로부터 현금을 보수로 받았고 무기와 제복을 비롯한 물자도 받았다. 1556년에는 "복무규정"을 제정하여 군역에 대한 의무를 정하고 대를 이어 작위를 세습하는 세습 지주과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는 대가로 토지를 받는 봉토 지주의 권리를 동등하게 정하여 황제권을 강화했다. 또 이 규정으로 전국에서 농민군을 양성할 수 있게 되었고 군복무를 하지 않는 이들에겐 체형을 가하고 봉토를 박탈할 수 있도록 했다.

내정이 안정되자 그가 유일하게 믿는 마카리 대주교에게 내정을 맡기고 자신은 정벌에 나서는 데 집중했다. 제일 먼저 정벌에 나선 대상은 당시 러시아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16] 였던 카잔 칸국이었다. 카잔 정벌은 서유럽의 십자군 원정과 유사했는데, 성직자들은 카잔과의 전쟁을 이슬람에 대항하는 성전으로 만들고 싶어했기 때문에 황제를 지지했고 귀족들은 카잔을 정벌하고 난 뒤에 그 지역 토지들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서 전쟁에 동의했다. 상인들은 카잔이라는 장애물이 사라지면 동방 여러 나라와의 무역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평민들은 카잔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 황제의 정벌을 지지했다. 이렇게 각 계층의 이해가 맞아떨어져서 카잔 정벌전이 일어났지만 십자군 원정과 달리 47 ~ 50년 사이에 있었던 두 번의 원정은 준비가 미흡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1552년에는 준비를 철저하게 하여 도시를 포위해 150대의 대포로 포격을 가했고 중간에 조그만 구멍을 낸 나무 방벽에 바퀴를 달아 안전하게 움직이면서 총을 쏠 수 있도록 한 '굴라이 고로드'를 만들어 총알을 퍼부었다. 하지만 카잔은 요새화가 잘 되어 있었고 무너뜨리기가 쉽지 않았다. 이반 비로드코바의 지휘 아래에 공병대가 동원되어 카잔의 성벽을 뚫기 위해 성벽 밑에 폭약을 설치해 터뜨리는 작업을 실시했고 폭약이 터져 성벽의 일부가 무너지자 러시아 군대가 이쪽으로 돌격하여 카잔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카잔 정벌 이후에 황제는 아스트라한을 강하게 압박하여 1554년에는 아스트라한 칸들의 통치권을 크게 제한했고 1556년에는 아스트라한 한국을 완전히 점령했다. 아스트라한이 러시아에 넘어가자 카스피해 북부 지역의 노가이 칸국도 모스크바에 자발적으로 복종했다.
두 칸국을 제압함으로서 러시아는 볼가강 전역은 물론 카스피해까지 영토를 넓혔고 동부와 남부에서의 안전을[17] 확보했다. 또 많은 민족들을 러시아의 국민으로 편입해 세금을 거두고 그 인력을 활용했다.[18][19] 러시아에 편입된 민족들은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하며 볼가강을 따라 활발하게 무역하는 사람들이었고 주로 이슬람교도들이었다.[20] 이후로 카잔과 아스트라한은 러시아의 중요 도시가 되었으며 러시아로부터 오는 이주민들과 포로 출신 러시아인들이 현지인들과 함께 공존하며 살았다. [21]

또한 이반 4세는 당시로선 꽤나 낙후된 러시아를 발전시키기 위해 서유럽 국가들에 사신을 파견해 학자와 기술자를 초빙하려 했다. 백성들은 이반 4세가 타타르족들에 연승을 거두는 것에 크게 고무되었고, 그를 "그로즈니"라고 부르게 된다.

특히 이반 4세는 타타르 한국을 점령한 기념으로 세계적으로도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인 성 바실리 성당을 건축하였는데 이 성당은 이반 4세가 1552년에 카잔 한국에게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1560년에 완성된 성당은 성모 마리아를 수호성인으로 모셨으며, 정식 이름은 포크로프스키 성당인데, 1588년에 증축한 부제실에 당시 열렬한 숭배를 받고 있던 성 바실리를 모셨기 때문에 나중에는 바실리라는 명칭이 사람들에게 더 친숙해지게 되었다. 루머에 의하면 이반 4세는 완공된 성당이 너무나 아름다운 나머지 이 성당을 지은 장인이 다시는 이보다 더 아름다운 성당을 짓지 못하도록 두 눈을 뽑아버렸다 카더라. 다른 좀 더 디테일한 루머에 의하면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가 이 성당을 보고 영국에도 흠좀무하게 아름다운 성당 좀 짓게 기술자좀 보내주시죠?하고 요청했는데 영국에도 이런 간지나는 건축물이 올라갈 것을 아니꼽게 본 이반 4세가 눈을 뽑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왜곡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타지마할 등 다른 건축물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으며, 무엇보다 이 건축가들이 후에도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반 4세는 자신의 청혼을 거부한 엘리자베스 1세를 무척 싫어했는데 이런 요청을 했다면 거절하면 그만이지, 굳이 건축가 및 장인들을 저렇게 장애인으로 만들 필요가 있을까? 타지마할 같은 경우처럼 선왕을 폭군, 암군이라고 깎던지 역사적으로 목적을 가지고 비하하고자 조작했을 가능성도 있다. 전세계 모든 거대 건축물에 비슷한 이야기가 붙은 걸 보면 그냥 건물 짓느라 그만큼 백성들이 힘들었다는 걸 비유하는 가십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하자.

볼가강 지역을 장악한 이후로 이반 4세는 시베리아 지역도 정복하려했고, 유명한 카자크인 탐험가 예르마크와 그를 후원한 스트로가노프 가문이 시베리아 정복에 앞장섰다. 1581년부터 시작한 예르마크의 원정은 시비르 칸국의 수도인 카실리크를 함락하고 칸인 쿠춤을 몰아내는 등, 성공적이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병력은 줄어들었고 1585년 여름, 카실리크에 주둔했던 예르마크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온 쿠춤에게 포위당했다. 다행히 공격을 물리치고 곧 도시에서 빠져나왔지만 시비르 칸국의 군대가 기습을 가해 예르마크는 이르티시 강을 도하하던 도중 익사했고[22] 그의 군대는 항복했다. [23]
그러나 예르마크의 원정으로 시비르 칸국은 약체화되었고 시베리아의 영토를 빼앗기는 것을 원치 않았던 보리스 고두노프는 다시 한 번 대규모 군대를 보내 1598년에 쿠춤을 공격했고, 이 공세를 막지 못했던 쿠춤은 패퇴당해 얼마 않가 죽었다.

서부 시베리아 지역을 차지한 러시아는 먼저 개척자들과 장인들을 보내 도시들을 건설했는데, 튜멘이나 토볼스크같은 도시들이 이 시기에 세워진 곳들이다. 도시들이 세워지자, 시베리아 지역으로 카자키들과 상인, 군인, 탈주자들이 이주해갔고 이 넓고 비옥한 지역은 점점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경제적으로 러시아는 시베리아인들에게 밀과 소금, 철을 주고 모피와 어육으로 교환하는 모피 무역으로 막대한 돈을 벌여들였고[24] 시베리아의 광대한 토지를 개발하는 등 많은 이득을 보았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지배로 시베리아인들은 러시아의 보호 아래에 더 이상 이웃들로부터 약탈당하지 않을 수 있었고[25] 러시아에서 온 이주민들에게 농사 기술과 건축술을 비롯한 각종 지식들을 전수받고 철기와[26] 농기구들도 얻는 등, 시베리아 민족들의 경제와 문화가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동부 시베리아에는 통일된 국가가 없고 씨족 단위로 사람들이 살고 있었기에 동부 시베리아 정복은 비교적 평화적으로 이루어졌고 러시아인들과 시베리아인들은 서로 통혼하고 공존했다. 러시아 정부는 시베리아에 지방 통치 조직을 이식하고 지배력을 강화하면서 지역 주민들의 생활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

하지만 부정적인 면도 있었는데, 러시아 정부가 시베리아인들로부터 걷는 모피세 '야사크'는 주민들에게 큰 부담이었다. 시베리아인들이 '불같은 물'이라고 부른 보드카가 러시아로부터 유입되면서 음주 문제도 생겨났다. 또한 러시아인들과의 통혼과 정부에서 강요하는 기독교 개종은 러시아화를 의미했다. '백인 황제'의 일부 부하들은 비싼 모피를 헐값에 사들이려 했고 시베리아의 러시아 관리들, 성직자들은 중앙아시아나 유럽러시아의 관리, 성직자들보다 질적으로 좋지 못했다. 이주민들이 시베리아인들의 토지를 차지하는 일이 일어나면서 분쟁도 생겼다.

러시아 정부는 식민지화를 강화하는 한편, 이동생활을 하는 민족들을 자신들이 원하는 곳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정착시켜 농업에 종사하게 하려 했고 부역도 강요했다. 정부의 이런 조치는 많은 시베리아인들의 정체성에 큰 위협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정부에 저항했으나 진압당하고 말았다. 많은 민족들이 점점 숫자가 늘어나는 이주민들과 시베리아에서 힘이 강해지는 러시아 정부를 피해 그들이 없는 곳으로 이주해야 했고 정체성을 상실할 위기에 처했다.
그나마 알렉산드르 1세의 치세에 스페란스키의 제안으로 제정된 법에 따라 원주민들을 세 부류(정착민, 유랑민, 유목민)으로 분류하고 국가 농민과 동등한 세금을 납부하는 대신 민족 문화와 전통은 보존하는 식으로 하여 이 문제들은 일정 부분 해소되었다. 이 법은 그 당시 원주민들에 대해서는 유럽과 미국을 통틀어서 가장 진보적인 법이었으나 러시아로의 동화와 정착민화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한계성도 있었고 일부 민족들이 러시아 정부와 화해한 것은 이 법이 제정되고도 수십년이 지나서였다.

4 대외 정책

1554년, 영국인 탐험가 리처드 챈슬러가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챈슬러를 통해서 영국과 접촉하게 된 이반 4세는 영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적극적인 교역 활동을 벌여나갔다. 이 때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가 통치하고 있던 시대였는데, 이반 4세는 엘리자베스 1세와 오랫동안 서신을 주고받게 된다. 이반 4세는 엘리자베스 1세가 독신임을 알고 은근히 구혼의 의사를 피력하기도 했지만, 엘리자베스 1세가 잘 알지 못하는 이반 4세와 결혼할 리가 만무해 영국의 명문귀족 처자와의 혼인을 청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통상부분에선 큰 성과를 거두어, 영국 해군은 모두 러시아제 로프를 사용할 정도였다.

이반 4세는 서유럽과 더 교류를 활성화하여 나라를 발전시키고자 했지만 문제는 러시아에 얼지 않는 항구가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이반 4세는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오랫동안 앙숙의 관계에 있던 폴란드, 스웨덴,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 리투아니아와 후에 북방전쟁의 하나로 불리우는 "리보니아 전쟁"이라 불리는 25년의 전쟁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결국 이 전쟁에서 러시아는 패배하고 만다. [27] 리보니아 전쟁이 장기화되고 영국이 러시아와의 교류를 중단하면서 점점 위기를 맞게된 이반 4세는 그간 잠들어 있던 광기가 슬슬 살아날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5 아내 아나스타샤의 죽음, 왕의 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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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죽음을 바라보는 이반 4세.

결국 1560년, 아내 아나스타샤가 사망하면서 이 광기는 폭발하고 만다. 덧붙여 이반은 생애에 총 7번 결혼했는데, 이 첫번째 결혼 생활이 그의 생애에서 가장 멀쩡했던 결혼 생활이었다고 한다. 이후 2번째, 7번째 아내에게서 각각 바실리, 드미트리[28]라는 아들들을 낳기도 했지만 둘다 어린 나이에 죽었다. 몇몇 결혼 중엔 헨리 8세처럼 금방 이혼한 적도 있다고 한다. [29] 이반 4세는 자신의 아내를 귀족들이 독살했다고 믿고 귀족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나스타샤를 데려간 신은 잔인하고 무분별했다. 이제부터 나도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스스로를 신으로 여겨 모든 도덕률에서 면제되었다고 생각하였고, 신이 그에게 해를 끼쳤기 때문에 자신도 신에게 해를 끼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후 그는 예전보다 더 난폭한 모습을 보인다. 참고로 후세의 역사가들은 이를 이반 4세의 편집증적 광기가 스스로를 아내가 독살당했다고 믿게끔 만들은 것이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소련 시대에 아나스타샤의 묘가 발굴되었는데, 그 묘에 평균치보다 훨씬 높은 수은 함량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가지 골때리는 주장이 있는데, 아나스타샤의 죽음이 이반 4세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이반 4세는 수은에 중독되어서 수은을 마시고 수은을 아궁이에서 끓이는 등의 행동을 했는데, 이러한 이반 4세의 행동 때문에 아니스타샤도 점점 수은에 중독되면서 사망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1564년, 이반 4세가 느닷없이 모스크바에서 실종되었다. 그는 밤중에 몰래 자신의 친위부대만을 이끌고 모스크바를 빠져나와 모스크바에서 95km 떨어진 알렉산드로프라는 작은 마을에 틀어박혔다. 한달 후, 이반 4세는 모스크바 부주교 앞에 두통의 편지를 보내 귀족과 성직자들을 맹렬히 비난했다. 이반이 귀족과 성직자들을 맹비난한 데에는 자신의 측근들인 신흥 사족들에게 줄 봉토를 마련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당황한 모스크바 시민들과 귀족들이 이반 4세에게 귀환을 간청하자 그는 못 이기는 척 두가지 조건을 내걸며 귀환했다. 하나는 반역자 처분은 자신이 알아서 할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오프리츠니나라 불리는 황제직할영지를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오프리츠니나는 이반 4세가 자신에게만 충성하는 엘리트 집단인 오프리치니크들에게 하사하기 위해 몰수한 토지들로서 모스크바의 몇 개 구에서 시작해 종래에는 러시아 전 국토의 절반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반 4세는 공언한대로 반역자 처분을 시작했는데, 자신에게만 충성하는 오프리츠니크들을 동원해 전 러시아를 휩쓸며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그들의 재산을 약탈했다. 대상은 귀족들이 많았지만, 때때로 도시마저도 숙청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 예로 노브고로드시가 리투아니아와 내통했다고 의심한 이반 4세는 오프리치니크들을 보내 6주 동안 노브고로드의 모든 사람들을 학살했다.

이 시기 이반 4세의 어이없는 행동으로 유명한 양위소동이 있다. 어느날 이반 4세는 타타르인 세묜 부크불라토비치라는 사람을 불러 그에게 "전 러시아의 차르"라는 칭호를 바치고선, 자신은 모스크바 공으로 강등한 후 세묜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는 황당한 소동이 있었다. 많은 역사가들은 이를 장난으로 치부한다. 하지만 일부 역사가들은 이반 4세가 이 양위 소동을 통해 러시아 내의 타타르인 세력의 복종을 얻을 명분을 쌓았다고 보기도 한다.

오프리치니크들의 피바람은 결국 귀족세력 뿐만 아니라 일반 농민과 시민들에게까지 미쳐 결국 그들은 이반 4세의 학살에서 피해 동쪽으로 도망쳤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러시아 영토의 확장과 시베리아 개척을 불렀다. 이반 4세는 8년 후에 전제 권력이 완벽하게 확보되자 모스크바로 돌아와 오프리츠니크를 폐지했지만, 이미 나라는 망가질대로 망가진 뒤였다. 1571년에는 크림 한국이 모스크바로 쳐들어왔을 때 러시아군은 크게 패배하였고 크림 한국군은 러시아의 도시와 마을들을 함락하며 시민들을 약탈하거나 학살하고 많은 처녀들을 노예로 잡아갔다. 이 패배에 이반 4세는 큰 충격을 받아 실의에 빠지고 만다.

6 광기 속의 최후

그렇게 잔인한 폭정을 일삼던 이반이였지만 이반 4세는 첫 아내 아나스타샤와의 사이에서 낳은 황태자 이반은 좋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반 4세는 일찌감찌 이반을 황태자로 세우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자신이 출정하는 전쟁에도 데리고 다니거나 교육을 시키는 것에도 열심이었다. 그러나 황태자는 이반의 공포 정치를 반대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부자간에 불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1581년 어느날, 이반은 임신한 황태자비 옐레나가 얇은 옷을 입은 걸 보고 복장이 경박하다며 마구 때렸고 그 결과로 그녀는 유산을 하고 말았다. 그러자 당시 황태자였던 이반은 아버지가 자신의 두 명의 아내를 수도원에 보내버리더니 이번엔 임신한 아내를 때려 유산시켰다며 아버지를 저주하기까지 했다. 이에 화가 난 이반 4세는 평소에 짚고 다니던 지팡이로 아들을 사정없이 때렸다. 그러다가 문득 제정신으로 돌아와 중상으로 인해 생명이 위독한 상태가 된 아들을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울었는데, 황태자는 치료받았으나 결국 3일 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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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러시아의 대 화가 일리야 레핀이 이 장면을 상상해서 그린 그림이 있다. 일리야 레핀은 이 작품에서 미친 폭군이라고 불리던 이반과 죽어가는 황태자를 통해서, 러시아 민중의 저항과 그걸 억압하는 기득권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너무나 그림이 역동적이고 생생해서 보는 이들의 심금을 울린 나머지 사람들이 이반 뇌제를 동정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표정으로 "신이시여, 제가 무슨 미친 짓을 저지른 것입니까?!"라고 외치는 듯 한 이반 4세의 얼굴을 본다면 충분히 이해할 만한 반응이다.수틀리면 사람부터 죽이고 보는 러시아 차르의 전통이 이 사람에게서 시작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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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죽음을 지켜보는 이반 4세.

그러나 몇몇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기막힌 스토리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역사학자들은 황태자 이반이 이반 4세의 국정에 불만을 품고있어 불화가 있었다는 것과 이반 4세가 어느 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도 국가의 이익을 위해 아들을 죽였다"고 썼던 것 때문에 이반 4세가 아들을 우연히 죽인 것이 아니라 독살하였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실제로 이를 뒷받침하는 발굴이 이루어졌는데 황태자의 무덤에서 발굴한 시신을 분석한 결과 다량의 중금속이 검출되었던 것이다. 이 집안은 왜 다 하나같이 다 중독되서 죽었냐?

1584년, 이반 4세는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는지 무당과 마술사들을 불러 점을 치게 하였는데 그들은 그가 1584년 3월 18일에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이반은 예언이 맞지 않으면 점성술사들에게 화형당하거나 생매장 당하게 될 것이라고 협박했다고 한다. 죽기 직전 그는 큰 소리를 지르며 궁 안을 헤메고 다녔으며 황제의 보물창고로 가서는 보석들을 만지며 자신이 만진 보석이 색이 변하나 안 변하나를 살폈다고 한다.[30] 그러다 체스를 두겠다고 체스판을 가져오게 해 체스를 두려는 순간 뒤로 거꾸러지며 점술사들이 예언했던 1584년 3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다. [31]

그의 사후 아들 표도르가 뒤를 이었지만, 그가 1598년 후계자를 지명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바람에 1613년까지를 러시아사에선 "혼란 시대"라 부르며, 권좌를 놓고 치열한 대립과 전쟁이 벌어졌다.

7 평가

러시아의 역사는 이반 뇌제의 등장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 만큼 엄청나게 변했다. 특히 지배자의 권력의 힘과 그를 보는 시각이 매우 달라졌다. 이전까지 모스크바 대공들은 차르(Tsar) 라는 명칭을 사용했더라도 전제 군주라고 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권력을 행사했다. 당시의 러시아는 분령 시대의 공국과 보야르들이 큰 힘을 발휘하고 있었으며 모스크바 대공은 그들의 가장 중심이 되는 지배자이긴 했지만 이반 뇌제 이후의 차르처럼 절대적인 권력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반 뇌제 이후에는 러시아의 지배자 차르란 절대적인 힘을 지닌 권력자를 의미하게 되었다.

이반 4세는 사실 빈약했던 권력 기반에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차르의 신성한 권력에 대한 확신이 매우 강했다. 그리고 실제로 평생에 걸쳐 이를 확인하고 자신의 뜻으로 옮겼다.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자는 신성한 차르의 권력에 도전하는 행위로 생각하여 잔인하게 숙청했는데 앞서 언급했듯이 1560년대 이후의 숙청은 잔인할 뿐만 아니라 예측을 불허하는 방향과 범위로 인해 그는 이반 그로즈니라는 별명을 얻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임종 직전에 참회하기 전까지 이반 4세는 자신의 잔인한 행동을 후회한 적이 없었다. 이반 4세의 생각에 의하면 신하들은 무조건 차르를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이반 4세는 어린시절 자신의 권력이 매우 위태롭던 궁정에서 살아남으면서 생존을 위해서는 자신의 절대적인 권력을 확립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에 따르면 차르의 권위는 절대적이어서 설령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신하들은 무조건 차르를 따라야했다. 이와 같은 차르의 신성한 권력은 백성이나 신하들의 동의나 선출에 의한 것이 절대로 아니었고 오로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권력이었다. 따라서 한낱 인간인 백성과 신하들은 무조건 차르를 따라야 했다.

이와 같은 러시아의 강력한 전제 권력은 사실상 이반 4세가 후세에 남긴 중요한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절대로 좋은 쪽으로만 작용한 것은 아니였지만 러시아라는 나라를 만드는데 큰 영향을 미쳤으며 아직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후 러시아의 지배자는 대부분 강력한 권력을 잡거나 몰락하거나 둘 중 하나인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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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1700년 사이의 러시아 영토의 확대.

특히 이반 4세가 러시아에 남긴 또다른 큰 유산은 바로 광대한 러시아의 영토다. 러시아는 1550년에서 1700년까지 매년 무려 3.5만㎢씩 영토가 확장되었다. 이것이 카잔 한국과 아스트라한 한국 정복 이후 시베리아 진출 때문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만약 이반 4세가 없었어라도 러시아의 팽창이 가능했을까는 알 수 없는 부분이다 진시황이 없었다면 중국이 통일되었을까?와 마찬가지로. 분명한 것은 이반 4세의 시기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점이며, 이런 거대한 영토와 인구를 바탕으로 러시아는 이후에 초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물론 이 과정에는 표트르 대제처럼 러시아를 근대화 시켰던 인물이나 비록 엄청난 희생을 치루긴 했지만 이오시프 스탈린처럼 러시아를 산업화 시킨 인물의 힘이 없었다면 불가능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이들 모두는 이반 4세에 의해서 마련된 러시아의 광대한 영토와 인구가 아니었더라면 그 과업을 달성하기는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반 4세는 현재의 러시아를 만든 군주라고 할 수 있다. 진시황이 중국을 만든 군주라고 불리는 것처럼 말이다. [32] 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이반 4세에 대한 이해 없이는 러시아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해석하기 애매한 여러가지 기행이나 잔인성에도 불구하고 이반 4세의 행동과 정책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현대의 러시아의 역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계속 연구되고 있다. 그의 숙청과 학살이 전제 권력을 확립하기 위한 의도된 잔인한 숙청이었는지 아니면 정말로 미쳐서 그랬는지, 그리고 리보니아 전쟁은 서방으로의 나가는 길을 확보하기 위한 계획적인 전쟁이였는지 아니면 여기서 질 수 없다는 오기의 결과였는지는 등 쉽게 해석되기는 어려운 부분이 아직도 많이 있다. 그리고 이반 4세를 선뜻 러시아의 위대한 차르라고 부르기에는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는 행동을 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지금도 그 업적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상당히 평가가 갈리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튼 이와 같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반 4세는 16세기의 역사를 통틀어 세계사적으로도 가장 중요한 인물 중에 하나다. 왜냐하면 그는 강한 러시아를 만든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러시아의 위대한 차르와 잔인한 폭군이라는 극단적인 양면성이 공존하는 설명하기 애매한 복잡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이룬 업적으로 이반 4세를 긍정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가 보여준 잔인성을 들어서 비판해야 하는가 하는 부분은 사람마다 평가가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어쩌면 영원히 결론이 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반 4세의 잔인성 때문에 무조건 그 업적을 폄하할 수도 없으며 또한 업적 때문에 그의 잔인성을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8 현대 매체 속의 이반 4세

수백년 후, 소비에트 치하에서 러시아 영화의 대표적 감독으로 유명한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에 의해 이반 4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폭군 이반》이 만들어진다. 당초 3부작으로 기획된 이 영화는 이오시프 스탈린을 이반 4세에 빗댔다는 혐의로 검열을 통과하지 못해 결국 2부는 예이젠시테인 사후인 1958년에야 해금되어 상영될 수 있었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에서는 러시아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성우는 김기현. 여기서도 Ivan the terrible을 의역해서 폭군 이반이라고 표기한다.
모토미야 히로시황당 대체역사물 만화 일기당천 노부나가에서는 이미 사망했다가 다시 살아나서 몽골까지 쳐들어오는 말도 안 되는 인물로 나온다. 잔혹하고 비정하다 못해 감정 자체가 거의 없다시피 한 성격이며 코끼리를 타고 다니며 적들은 물론 쓸모없는 아군을 죽이거나 코끼리 위에서 여자와 섹스를 하기도 한다. 작품 자체가 워낙 막나가는 작품이지만 설정 자체가 거의 안드로메다로 날아간 캐릭터.
마찬가지로 제위 초창기에는 왕국을 번영시키고 백성들에게 사랑받는 훌륭한 왕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광기와 편집증에 시달리게 되고 의심되는 인물들을 닥치는대로 죽이는 미치광이 폭군으로 변해버렸다. 결국 타르가르옌 왕조는 반란으로 몰락.
이름은 분명 인도의 왕에서 따왔지만, 행동 양식이나 과거사, 그리고 이목구비를 보면 영락없이 이반 4세.
  1. 세상을 움직인 악
  2. 체첸의 수도인 그로즈니도 이 뜻이다.
  3.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 2》에 등장한 이반 4세는 자신의 별칭이 'Terrible'이 아니라 'Awesome'이라고 주장한다. DVD에 수록된 제작진 인터뷰에서 해당 장면은 개그를 의도한 것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그 말이 맞다고 확인했다. Awesome도 원래는 "두렵다" 같은 뜻이었으나 최근에는 "완전 짱짱"같은 뜻으로 변질되었다. 반대로 Awesome과 같은 어원인 Awful은 Terrible과 비슷하게 "끔찍하다"나 "형편없다"로 변질하였다. 재밌게도 Terrible과 같은 어원인 Terrific은 Awesome과 같은 뜻이다. 그러니까 Awesome = Terrific, Awful = Terrible인데, 어원이 같은 단어들끼리 반댓말이 되어버렸다(...)
  4. 1532년 출생. 형의 대관식 이후 재산과 하인을 받아 결혼도 하고 살다가 1563년에 사망했다. 아내는 팔레흐 공녀 울리아나로 부부에게는 아들 바실리가 있었지만 1살에 사망하고 그녀는 남편 사후 수도원에 들어가 1569년에 사망.
  5. 이때 이반은 이 귀족들을 모두 기억해서 후에 즉위한 후에 하나도 빠짐없이 죽을 때까지 족쳤다는 말이 있다. 야사에 의하면 궁중에서 사냥개들을 풀어서 귀족들을 물어뜯게 했다는 말도 있다(...).
  6. 훗날 이반 뇌제는 이 시기 옷과 먹을 것 문제로 크게 고생했었다고 회고했다.
  7. 소련시절 크램린에 매장된 그의 유해를 발굴해 연구한 결과 뼈에서 중증 매독 환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매독균이 침투한 흔적들이 나왔다. 매독의 증상은 매우 다양해 다른 병들과 햇갈리기가 쉬워 '흉내내기병'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지만 감염자의 뇌가 병으로 손상될 경우 진행부전마비 증상이 오기도 한다. 이런 상태의 환자는 통제하기 힘든 미치광이로 변하며 때때로 어떻게 보면 합리적인 것 같은 괴이하고 엄청난 발상을 하기도 한다. 진행부전마비 증상을 보이는 환자는 대부분 5년 내에 사망하지만 어떤 경우는 그 이상 살아남을 수도 있으며 완전히 미치거나 무력한 상태에 빠지지 않고 때때로 그럭저럭 정상적 생활을 영위할 때도 있다. 이런 환자들은 엉뚱한 생각으로 스스로를 망치거나 주변 사람들을 공포스럽게 만들곤 한다.
  8. 물론 전근대에는 수은을 약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독인줄 몰랐다.
  9. 페니실린의 발명 전까지만 하더라도 매독의 몇 안되는 치료법 가운데 하나는 수은 증기를 매독 환부에 쐬는 것이었다. 물론 이는 매독의 경과를 늦추는 데에 그쳤고, 종국에는 매독이 신경까지 침투해 수은 자체의 신경독성과 시너지(...)를 일으키는 경우도 흔했다.
  10. 이반 뇌제의 도서관은 당시 유럽에서도 큰 규모였고 진귀한 고대 그리스, 로마의 서적들과 비잔틴의 서적들도 보관되어 있을 정도였다. 이런 배경이 있었기에 그런 말을 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11. 수도에서 화재가 났다는 급보가 와서 이 보고를 받는다고 잊어버렸다는 얘기도 있다.
  12. 젬스키 소보르의 권한이 커진 탓에 대귀족들의 힘이 약화되었다.
  13. 고리대금업을 금지하거나 지나친 토지 소유를 막았다.
  14. 러시아 인쇄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던 이반 표도로프는 책 인쇄는 마법이고 이단이라고 선언한 성직자들과 값싼 인쇄물이 나옴으로서 손실을 입게 된 필경사들 때문에 곤욕을 치루어야 했다.
  15. 중앙의 힘이 강해지자 뛰어난 장인들과 상공업자들이 모스크바로 이주했고 모스크바가 러시아 건축술의 중심이 되고 도시청, 석공청과 같은 도시 건설과 관련한 부서들이 생겨났는데, 지방에서도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6. 카잔은 아스트라한과 함께 늘 러시아의 동부와 남부 지역을 약탈해 러시아인들을 노예로 팔던 국가였고 카잔에만 10만에 달하는 러시아인들이 있을 정도였다.
  17. 남부에서는 조금 예외적이었는데, 카잔과 아스트라한의 정복에 격분한 오스만 제국 황제가 크림 칸국을 사주하여 남부 지역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크림칸국이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이 공격해오자 러시아는 브랸스크에서부터 시작해 라잔까지 이어지는 방어선을 짜서 크림 칸국의 공격을 방어했야 했다.
  18. 제국 정부는 '타타르 병사들'이란 특수계층을 만들어 카잔의 귀족층을 비롯한 타타르인, 바시키르, 마리츠, 추바시, 모르도브와 여타 다른 민족들에게 봉토를 지급하는 대가로 군인으로 복무하게 했다. 이 '타타르 병사들' 제도는 제국 정부가 소수민족들의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한 정책으로 실시한 것이었고 제국 입장에선 다행스럽게 예상이 적중하여 '타타르 병사들'은 제국에 충성했다.
  19. 봉토는 고려의 군인전이나 비잔틴의 테마제처럼 상속되지 않지만 아들이 아버지의 군역을 부담하는 대가로 아들에게 다시 지급하는 체제였다. 이렇게 봉토를 받고 군인으로 복무하는 이들외에도 타타르인 관료들이 여러 방면에서 활동했다.
  20. 황제가 신앙에 대한 자유를 주겠다는 당초의 약속을 어기고 정교회로의 개종 작업을 실시하고 개종자에 대한 혜택과 이슬람교도들에게 상속받을 권리에 대한 차별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이유로 개종한 일부를 제외하고는 많은 이들이 계속 이슬람을 믿었다. 그리고 지역 주민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문화와 전통을 지켜나갔다.
  21. 현지인들과 러시아인들 사이의 혼혈들도 드물지 않게 태어났다.
  22. 고령에다 무거운 갑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도 예르마크와 비슷하게 죽었다.
  23. 예르마크의 일대기를 후일 톨스토이가 단편소설 '예르마크'로 다루었다.
  24. 1640년 러시아 정부의 수입 중 1/3이 모피로 걷어들이는 것이었다.
  25. 16세기 전반기부터 시비르 칸국의 남쪽에 살았었던 노가이, 우즈베크, 카자흐인들로부터 자주 공격을 받았다.
  26. 동북부 시베리아인들에게 해당한다. 그들은 중남미인들처럼 철기에 대해서 몰랐고 아즈텍인들과 비슷하게 수정으로 만든 칼을 썼었다.
  27. 처음엔 러시아가 우세했는데 폴란드, 스웨덴, 오스만 투르크, 리투아니아 연합군의 반격에 털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리보니아에 전 군사력을 투입하다시피하다 보니 남부의 크림 한국과 동부의 타타르를 비롯한 외적이 침입해와 모스크바를 유린하는데도 제대로 맞설 수가 없었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역병과 기근이 꼬리를 물면서 귀족들의 반란까지 일어나니 더는 감당할 수 없어 강화하여 사실상 패배하고 말았다.
  28. 이 아들을 사칭한 가짜 드미트리가 3명이나 나온다.
  29. 하지만 헨리 8세처럼 아내들을 죽이지는 않았다. 맘에 안듣다고 패거나 수도원에 보냈을 뿐.
  30. 그로즈니가 미쳐서 그런 짓을 한 것은 아니고, 그 당시에는 보석도 은처럼 독이나 병을 판별하는 능력이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병에 걸렸으면 보석의 색이 변할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31. 위의 예언은 가짜일 가능성이 높다.
  32. 진시황도 황제 제도와 통일 중국을 만들어 이후 중국 역사를 지배했으며, 이반 4세를 능가할 만큼 잔인성을 보여준 인물이기도 한 점은 많이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