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역대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11대 윤공희 빅토리노 주교 (서리)12대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13대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
역대 천주교 마산교구장
초임초대 김수환 스테파노 주교2대 장병화 요셉 주교
사목표어는 PRO VOBIS ET PRO MULTIS(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1]

부당한 독재정권, 세상의 불의에 굴종하지 않고 스스로 이 된, 영원히 꺼지지 않을 한국 현대사의 빛나는 양심(良心).


1 개요

김수환(金壽煥)대한민국 최초의 가톨릭 추기경이다. 세례명스테파노(Stephen Kim Sou-Hwan)다. 선종 당시의 추기경들 가운데서 가장 오랫동안 재임한 추기경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언제나 양심적이고 용기있는 행동으로 권력에 맞섰으며, 국내 비정치인 중에서 정치를 비롯한 사회 전반에 영향력이 가장 컸던 인물 중 하나였다. 근대 한국사에 영향을 끼친 인물 중 극히 드문 영구까임방지권을 받은 인물이며, 진정한 신앙인이다.라는 평이 대체적 이지만, 사학법 1차 개정에 보인 망언과 대구 희망원 사건꽃동네 비리 묵인 동조자에 가깝거나 방임자라는 평을 듣기도하는 , 한국 현대사가 가진 한계를 보인 반면교사적인 면도 있는 인물이다.


2 생애

2.1 유년 및 학창시절

1922년 대구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경상북도 군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5남 3녀 중 막내로, 8살 때 아버지 김영석 요셉을 여의고 홀어머니 서중하 마르티나[2] 슬하에서 자랐다. 조부 김보현 요한은 가톨릭 신자로 1866년 병인박해 때 관군에게 잡혀 순교한 인물이다. 어머니의 강요(?)로 자신의 형 김동환 가롤로 신부[3]와 함께 1933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4]

동성상업학교[5] 재학 시절, "천황 폐하의 생신을 맞이하여 황국신민으로서 소감을 쓰라."는 윤리 시험 문제에 "나는 황국신민이 아님. 그러므로 소감이 없음"이라고 썼다. 이에 당시 교장이던 장면[6]은 노발대발하며 따귀를 때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아직 나이도 어린 김수환 학생이 일본인들과 일본 경찰에게 해코지와 탄압을 받을까 봐 우려하여 보여주기 식으로 일부러 그런 것이었고, 결론만 따지자면 장면이 적절하게 쇼맨십을 발휘하여 김수환의 목숨을 구해준 셈이다. 나중에 김수환이 일본 조치 대학으로 유학을 갈 때, 장면이 추천서를 써주는 등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도 했다. 김수환 추기경도 훗날 장면 선생님이 해주시는 영어 강의 때 미국의 문물에 대한 이야기를 매우 흥미롭게 들었고, 여러가지로 자신을 도와준 분이라 존경한다고 언급했다. 역시 한국어는 끝까지 읽고 들어야 한다. 전형적인 한국형 츤데레

사제서품을 받은 뒤에 어머니 서중하 마르티나와 찍은 사진

조치 대학 문학부 철학과에서 수학하던 시절,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와중에도 자신을 차별하지 않은 독일인 신부에게 감명받아 사제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7] 당시 김 추기경의 은사였던 독일인 테오도르 게페르트 신부는 해방 후 한국에 건너가 서강대학교의 창립을 주도하여 초대 이사장이 되었다. 김 추기경은 2002년 게페르트 신부가 선종했을 때, 직접 장례미사를 주례했다.

2.2 학도병 징집과 광복, 사제서품


1944년, 왼쪽에 있는 분은 훗날 효성여대 총장을 역임한 고 전석재 이냐시오 신부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생사의 갈림길에 설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다행히도 해방을 맞이해 무사히 귀국, 그때부터 사제의 길로 들어섰다. 1951년 사제서품을 받은 후, 안동 목성동성당[8] 주임신부를 시작으로 대구대교구 교구장 비서, 김천 황금동성당 주임신부, 성의중학교, 성의고등학교 교장 등 대구대교구에서 사목했다. 1956년 독일 뮌스터 대학 유학을 거쳐 서품 15년만인 1966년 주교로 서품되어 그 해 신설된 마산교구 초대 교구장에 임명되었다.

2.3 대주교와 추기경 서임

마산교구장에 임명된 지 2년만인 1968년 대주교로 승품되어 서울대교구장이 되었다. 이 일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어서 김수환 추기경 본인은 서울대교구 소속 사제들이 자기에 대한 순명을 거부하면 어떡할까 고민하였지만, 착좌식 미사에 원로 신부를 필두로 한 서울대교구 사제단 전원이 아무런 이의없이 순명서약을 하는 것을 보자 그런 우려를 걷어내었다.

이러한 항의가 사치스러운 것으로 느껴질 정도로 서울대교구의 재정형편은 매우 안 좋아서[9], 교구청으로 고리대금업자들이 나타나 돈을 갚으라고 을러대는 일이 다반사였다.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와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의 재임 사이에 잠시 임시관리자로 봉직한 윤공희 빅토리노 주교[10]가 필사의 노력을 기울여 서울대교구의 재정형편을 개선시켰고[11] 김수환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으로 착좌하면서 재정문제가 말끔히 해결될 수 있었다.

마침내 1969년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됨으로써 한국 최초의, 그리고 당시로서는 전세계 최연소로 추기경이 되었다(47세). 그리고 경기도 부천시에 위치한 소명여자고등학교의 이사장으로도 활동하였다.

2.4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지주

군사정권 시절 당시 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 인천교구장 윌리엄 존 맥나흐톤 굴리엘모 주교, 안동교구장 두봉 주교, 전주교구장 김재덕 주교와 함께 사회참여파 주교로 활동하였다. 또한 다른 성직자보다 높은 권위가 있는 추기경으로서 많은 방면의 민주화 운동에 기여하였다. 1971년 밤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성탄절 미사에서 "만일 현재의 사회 부조리를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나라는 독재 아니면 폭력 혁명이라는 양자택일의 기막힌 운명에 직면"할지도 모른다며 박정희 대통령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1970년대 수많은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의 중심에는 명동성당이 있었다. 명동성당은 종교시설이라는 특성상 경찰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고, 따라서 이곳은 강압적인 정권에 맞서 싸우는 운동가들이나 사회적 약자들의 소도와 같은 역할을 하는 피신처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항상 명동성당의 중심을 지키고 있었다.

10.26 이후 들어선 군부독재와 5공화국 체제에서도 김수환 추기경은 독재를 비판하는 날선 태도를 굽히지 않는다.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당시 아래 어록에도 나오는 '카인의 대답'이 대표적. 결국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된 6월 항쟁은 전두환 정권이 몰락하는 가장 큰 계기가 된다. 6월 항쟁 당시 명동 대성당에 들어온 시위대를 연행하기 위해 경찰이 투입되려 하자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그 뒤에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그리고 그 뒤에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라 일갈한 것도 유명한 일화.

한편, 여러 민주화 사건에 많은 신경을 쓰고 서울대교구를 총괄하는 업무가 너무 중하다 보니 이즈음엔 심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또한 젊은 후배 사제에게 교구장을 넘기는게 교구 발전에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도 있던터라 1992년 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서울대교구장 사직서를 제출했는데, "나는 김 추기경보다 2살이나 많은데, 교황으로 일하고 있습니다."라는 편지를 받곤 1998년 사임할 때까지 서울대교구장직을 더 역임했다.


2.5 민주화 이후

2.5.1 문민정부

우여곡절을 거쳐 문민정부가 탄생하고, 인권과 민주화에 관한 김수환의 역할은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95년 한국통신노조 파업사건에서 김수환은 다시 인권의 현장에 선다. 그는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많은 사람의 시련과 희생을 바탕으로 탄생한 현 정부가 그 모태라고 할 도덕적 힘을 물리적 힘으로 유린하고 대화보다 힘의 논리를 선택한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고 일갈하였다. 한편 95년 12월 관훈토론에서는 국민들을 향해 '우리 모두의 추악한 얼굴'을 지적하며 엄하게 꾸짖는다. 요지는 한국인의 가치관 부재와 망국병이 사회의 부정부패로 병들게 한다는 것이다.

천주교 신자인 이회창 당시 총리와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95년 11월 이 총리의 회갑연에서 참석해 이회창 전 총리를 '청렴과 결백으로 모든 이의 사표가 되는 사람이며, 우리 민족 모두에게 보물과 같은 사람'이라고 한 바 있으며,[12] 96년 1월에는 총리 사임 후 변호사 활동을 하고 있던 중 김영삼 대통령의 권유를 받고 정치계 입문을 고민하던 이 전 총리에게 "나라가 어렵고 역사 바로세우기가 중요한 만큼 힘을 합치는 것이 좋겠다"며 "하나의 밀알이 되는 심정으로 일하는 것이 어떻냐"는 말로 이회창의 정치입문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1997년 1월에는 노동법, 안기부법 통과로 노동계 총파업이 일어나자 김영삼 대통령을 단독으로 만나 정부의 반성을 촉구하기도 한다. 그는 이후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발언을 많이 했다.


2.5.2 국민의 정부

김대중 대통령 취임 후 김 추기경의 활동이 그나마 가장 평화로운 시기였다. 97년 12월에는 성북구 길상사 개원법회에 참석하여 축사를 하기도 하였으며, 98년에는 '경제난국 극복을 위한 특별강연회'를 열면서 법정스님을 명동성당에 초청하는 등 종교 간 화해의 움직임을 보인다.

한편으로는 대북화해 움직임에 발맞춰 남북화해를 위한 한반도 평화라는 주제로 많은 강연을 하였다.


2.5.3 참여정부

2.6 선종과 그 이후


주여, 추기경 스테파노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

2009년 2월 16일 오후 6시 12분 경, 서울성모병원에서 노환으로 선종했다. 선종 당시 최장기간 재임 추기경이었다. 향년 88세. "그동안 많이 사랑 받아서 감사합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용서하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김수환의 무덤

장례는 당초 서울대교구장으로 치를 예정이었다. 그러나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비록 자신이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을 특사로 임명하여 교황장[13]으로 격상해서 치렀다. 장례는 5일장으로 치뤄졌으며, 선종 당일과 장례 미사 당일을 제외한 3일의 조문 기간 동안 약 40만명의 시민들이 명동성당에 줄서서 조문하였다. 이 때 단 한 번도 교통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생전에 악연이 있었던 전두환 대통령도 조문을 위하여 명동성당을 방문하였으나[14] 뒷짐 조문으로 욕을 먹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다른 전직 대통령은 전부 직접 조문하러 왔는데 혼자서 직접 조문하지 않고 조전만 보냈다며 일부 언론에서 질타를 받기도 했다. [15]

시신은 경기도 용인시의 사제 묘역에 안치되었다. 위치는 한국 최초의 주교 서품자인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의 옆. 묘비에는 김 추기경의 사목표어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와 시편 23편 1절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가 묘비명으로 새겨졌다. 이는 김수환 추기경이 생전에 직접 묘비명으로 부탁한 구절이다.

선종할 때 각막을 기증해서 2명의 환자에게 각막을 이식했고, 그 영향으로 김 추기경을 따라 각막과 장기를 기증하겠다고 서약하는 사람이 폭증했다. 특히 선종 이후 1주일 간은 각막 기증자가 너무 많아 장기기증운동본부의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

서점가에는 김 추기경과 관련한 서적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김 추기경의 자서전을 포함해 이미 절판된 책들도 수많은 사람들의 요청에 의해 재판되었다. 이러한 열기는 선종 1주기가 지나도록 계속되었는데, 이 와중에 한 출판업자가 무단으로 서울대교구의 이름을 빌려 김 추기경 관련 서적을 출판하였다가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

김 추기경이 안장된 용인 천주교 성직자 묘역에는 일 평균 800여 명이 다녀간다.


3 어록

제4공화국~제5공화국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 인사와 시민들을 보호하며 날린 명언폭풍간지 그 자체다. 가톨릭 내에서도 상당히 정의 의식이 강하고 이를 실천하는데 두려움이 없는 인물이여서 당시 민주주의 세력이 독재정권에 대항하면서 민주화를 이룩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노무현 대통령 집권 기에는 당시 사회의 반미 분위기와 사학법에 대한 강한 반대 목소리를 표하기도 하였다.


3.1 유신독재 체제

박정희 당신은 아는가?
정의와 사랑이 없는 곳에 평화와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평화가 없는 곳에 사회 안정과 질서는 없습니다.
비상 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 유익한 일입니까?
- 1971년 성탄절 메시지. 유신의 징조가 보이던 시절이다. 강론을 보고 격분한 박정희는 미사 송출 차단을 지시한다.
인간 박정희가 하느님 앞에 섰습니다
- 암살당한 박정희장례 미사에서.'

다만 김수환 추기경과 박정희의 사이가 험악할 정도로 나쁘진 않았다고 한다. 훗날 "종이에 4대강을 그려가면서 몇 십 년은 족히 걸릴 법한 개발 계획을 설명해주는 그분 모습에서, 이 나라가 1인 장기 독재 체제로 갈 것임을 예견했다. 다음날 혼자 서울로 올라오는 동안 무척 우울했다.(중략) 박 대통령을 생각하면 아쉬운 마음을 떨칠 수 없다. 장기 집권 야욕을 버리고 나머지 과제를 후임자에게 넘겼더라면 지금쯤 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진정한 애국자가 됐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김 추기경은 당시를 회고했다.[16] 결국 김 추기경은 '나 아니면 안 된다'는 독선이 장기집권으로 이어지면서 국가와 국민은 물론 박정희 개인에게도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다며, 그의 독선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비판했다.

그의 죽음은 별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더 새로운 빛이 되어 앞길을 밝혀주기 위해 잠시 숨은 것뿐입니다.
- 장준하의 영결미사에서.

3.2 제5공화국

"너희 아들, 너희 제자,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탕' 하고 책상을 치자 '억' 하고 쓰러졌으니 나는 모릅니다.", "수사관들의 의욕이 좀 지나쳐서 그렇게 되었는데 그까짓 것 가지고 뭘 그러십니까? 국가를 위해 일을 하다 보면, 실수로 희생될 수도 있는 것 아니오? 그것은 고문 경찰관 두 사람이 한 일이니 우리는 모르는 일입니다."라고 하면서 잡아떼고 있습니다. 바로 카인[17]의 대답[18]입니다.
- 제5공화국 때에도 고문 끝에 숨진 박종철 군 추모미사를 봉헌하면서. 이 사건은 5공 정권에 대한 범국민적 저항을 불러 일으켰으며, 그 종말을 고하는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실제 육성].
경찰이 성당에 들어온다면 제일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 농성 중인 신부님들을 보게 될 것이고, 그 뒤에는 수녀님들이 있습니다. 학생들은 수녀님들 뒤에 있습니다. 그들을 체포하려면 나와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을 짓밟고 가십시오.
- 6.10 항쟁 당시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던 학생들을 체포하기 위해 경찰들을 성당에 들여보내겠다는 정부 관계자에게. [19][20]

3.3 참여정부

노무현 정권은 대한민국을 어디로 끌고 가려 하나?[21]
- 노무현과 참여정부의 대북유화정책기조를 비판하며[22][23][24]


4 트리비아

  • 참신앙인답게 다른 종교도 천주교와 동등하게 존중해주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감명 깊게 읽고 "이 책이 아무리 무소유를 말해도, 이 책만큼은 소유하고 싶다."라는 말을 하였다. 2000년 성균관에서 수여하는 심산상을 수상했다. 심산상은 20세기의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며 성균관대학교의 창립자인 심산 김창숙을 기념하는 상. 관례에 따라 심산 김창숙 선생의 묘소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이 자리에서 주저없이 절을 하고 음복을 하기도 했다. 추기경은 "이분은 우리 민족의 스승이라면 스승 되시는 분이에요. 이분이 지금 살아서 나온다면 절을 안 하겠어요?"라고 말했다.[#] 천주교가 조선 시절의 혹독한 박해[25]를 받아 성균관으로 대표되는 유교와는 역사상으로 악연임을 고려할 때, 당시 김수환 추기경의 김창숙 묘소 참배는 일종의 종교간 화해로 해석되기도 했다.
  • 권위의식도 없었다고 한다. 한 대학교 동아리에서 운동회를 하려고 강당을 빌릴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동아리 내의 가톨릭에 대해 무지한 한 학생이 성당에 강당이 있다는 말을 듣고 성당에 가서 무작정 추기경실로 들어가서 강당을 빌려달라고 했다.(...) 그러자 김수환 추기경은 당당한게 좋다며 즉각 승낙했고 후에 그 학생은 추기경이 얼마나 높은 직책인지 깨닫고 놀랐다고 한다. 이외에 성매매 업소 여인들을 돕고자 만들어진 시설에 찾아가 그녀들을 위로하고 같이 막걸리도 마시고 윷놀이도 하며 많은 도움을 준 사실도 있다.[26]
  • 박정희 대통령 재임 시절 김수환 추기경에게 불만을 품은 친정부 성향을 가진 가톨릭 신자 몇 사람이 바티칸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에 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어떤 사람을 만나 김수환 추기경을 서울대교구장 자리에서 내쫓게 도와달라는 부탁을 한적이 있었다.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은 바티칸의 관리에게 김수환 추기경에 관해 안좋은 얘기를 하였지만, 바티칸의 관리는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하지 않고, 당시 대한민국 주재 교황 대사였던 도세나 대주교를 통해 김수환 추기경을 음해하려는 움직임이 있음을 알려주었다.[27]
  • 어떤 여대생이 한국의 유명인사에 관련된 인터뷰 과제의 상대로 김 추기경을 만나뵙기 위해 찾아갔다가 한 사제에 의해 문전박대당하자 화가 나서 한소리 해 주었는데, 당황한 그 사제는 김 추기경한테 돌아와서 얘기했다가 되려 혼만 나 버렸고 김 추기경이 직접 그 여학생을 만나서 아까의 무례에 대해 사과한 다음 인터뷰 요청을 수락해주었다고 한다. 후에 그 여학생의 과제는 높은 점수를 받았으며 '문전박대당하면서도 당당하게 의견을 피력하는 여학생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느냐'라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고.
  • 독일 유학 시절 공부하랴 강의 듣느랴 논문 쓰랴 이렇게 바쁜 와중에 독일로 파견된 광부간호사들의 어려움에 대해 알게 되면서(주로 언어문제, 송금문제, 기타 잡다 등등) 그들을 위해 어런저런 어려운 일들을 같이 처리해 주었는데, 한국에 돌아갈 때가 되자 광부와 간호사들이 슬퍼하면서도 그를 잘 전송해 주었다고 한다. 이 때의 경험으로 인해 김 추기경은 사회 바깥의 어려운 이웃의 존재를 결코 잊지 않는다고 한다.
  • 참고로 학문적인 측면에서도 상당한 먼치킨이시다. 독일어, 라틴어, 이탈리아어에 능통하고 영어, 일본어 역시 수준급이라고 하며 신학자로서의 학문적 업적과 성취도 상당한 수준.[28] 애시당초 이 분 교황청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아 추기경 서임 당시에는 최연소 추기경 서임 기록을 세우신 분이다. 당시에는 유색인 출신 사제에 대한 은근한 차별이 꽤나 있았단 시대임을 김안하면 정말 놀라운 기록이 아닐 수 없다.
  • 한국 103위 순교성인의 시성과 관련해 김수환 추기경의 역할이 상당히 컸다는 게 관계자들의 평가이다. 다른 사람들은 한참을 기다려야 만날 수 있는 시성성 고위 관료와 교황청 관계자들이 김수환 추기경이 로마에 왔다는 소식에[29] '멀리서 오셨으니 김 추기경께서 편한 시간에 저희가 일정을 맞춰드려야 한다'며 편의를 제공했고 김수환 추기경은 요한 바오로 2세를 알현해 한국 천주교가 원하는 바를 교황에게 직접 말하기도 했다.
2005년 4월 24일, 베네딕토 16세 즉위미사 (제대의 가장 왼쪽에 있는 사람이 김수환 추기경이다)
  • 2016년 발매된 공식전기에 따르면 2차대전이 끝나고 고국으로 돌아온 이후, 어느 여신도의 청혼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난생 처음 받아보는 이성으로부터의 고백이라 큰 충격을 받았는데, 선배 신부에게 고백 및 조언을 받곤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참고로 그 여신도는 김 추기경에서 차인 이후 군에 들어갔다고.


5 뜬금없는 친일파 의혹

일제강점기 당시의 사진. 왼쪽에 있는 분은 훗날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故 전석재 이냐시오 신부.[31]

제2차 세계대전학도 특별지원병 제도강제적으로 징집된 일본군 장교였던 경력이 있다는 것을 트집잡은 것이다. 사실 김수환 추기경은 사관후보생으로 강제징집되었는데 장교 교육과정에서 탈락되어 병사로 일본군에 복무하였다.

사실 예전에 자서전에도 기술했던 사항이 21세기에 다시 불거진 것인데, 그 당시 친일인명사전을 제작 중이던 민족문제연구소는 그가 애초에 수록 대상자에 미달되었음에도 이례적으로 해명 자료를 내서 친일파가 아님을 공식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이 틈을 타 심지어 김수환 추기경이 기회주의자 및 매국노라는 망언주장까지 했다. 거기다 김수환 추기경 선종시 어떤 커뮤니티에서는 악플이 숱하게 달리는 한심한 짓거리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에 진중권 교수는 진보신당 게시판에서 위의 예를 들며 이들을 통렬히 [비판]하기도 했다.[32] 예상과 달리 진보진영에서[33] 김수환 추기경의 친일의혹을 내세운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보수 진영에서 나름대로 박정희, 전두환을 극심하게 찬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평(특히 그의 대북 관계에 대한 성향)이 상당히 호평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극단적이고 사실보다 감성에 치우친 반미, 친북 시위를 경계했고, 김대중-노무현 정부 중 북한의 도발에 대한 정부의 태도, 참여정부에게 비판을 많이 했었다. 굳이 진영논리적으로 따지면 김수환 추기경의 대북 성향은 김대중-노무현 정부보다는 타 정권들과 가깝다고는 하지만, 결국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깨시민 네티즌들에게 온갖 비난이나 고인드립을 당했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그런데 김수환 추기경은 군사독재정권에 가장 용감하게 맞서 싸우고, 그런 행위가 목숨을 걸어야했을 때 아낌없이 목숨을 내건 사람이다. 물론 당시 시대상황과 조건에서 김 추기경이 다른 사람들보다 유리한 입장이기는 했다. 전두환 본인도 당시에는 천주교 신자였기에 추기경의 자리에 있는 사람을 건드리는 건 좀 부담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김수환 추기경이 위험을 무릅쓰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애초에 추기경에겐 바티칸 시민권을 준다. 독재정권에 저항하다가 정권의 음모에 의해 순교한 성직자가 한둘이 아니기 때문에, 교황청에서도 이런 사태를 조금이라도 막고자 시민권 부여조항을 만든 것이다. 비록, 타인에 비해 상대적인 위험은 낮았지만 절대수치에서 보자면 김수환 추기경 역시 상당한 위험을 감수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런 사람이 일제시대 때 같은 엄혹한 시절에 강제로 징집되고 일본군에 복무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기회주의자나 친일파로 몰아붙이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니다. 무슨 전쟁 때 일본군에 끌려가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은 모두 다 친일파가 된다는 것인가? 그럼 위안부 할머니들도 친일파인가?

김수환 추기경은 어디까지나 강제적으로 징집되었다. 당시 김수환 추기경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전쟁 말 분위기가 극히 흉흉했고, 미사가 진행되는 도중에 성당에서 일본군이 총을 들고 들어와 강제로 징집을 해갔다고 한다. 이 때 김수환 추기경은 "이 쯤 되면 내가 군대를 가는 것이 하느님의 뜻인가 보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과 출처 추가바람.

김수환 추기경은 자발적으로 조국을 배신해서 나라를 팔아먹고, 일본 제국에 빌붙어서 권세를 누렸던 여타 친일파들과는 천지차이로 다르다. 비록 사관후보생으로 강제징집되기는 했지만, 결국은 훈련과정에서 낙오하여 장교로 임관을 하지도 못했으며,[34] 다시 밑바닥 계급인 병사로 재징집되면서 일본 남단의 섬에서 미국의 군함이나 폭격기가 오는지 감시하는 보초임무만 맡았다. 당시의 일본군은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을 고급인력으로 분류하고 조선인/일본인의 구분없이 모두 다 사관후보생으로 강제로 밀어넣었다고 한다. 이는 대학을 다니는 엘리트들을 공들여 키워서 일본 본토에서 장교로 활동하게 하려는 못된 의도가 있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김수환 추기경처럼 일본군으로 강제징집되었던 조선인 청년들도 매우 많았으며, 사실상 총알받이 신세였던 카미카제 특공대로 징집된 사실이 매우 많았다. 게다가 당시의 일본군은 구타가혹행위가 일상다반사였고, 만날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면서 미친 놈들처럼 반자이 어택을 하던 막장 군대였다. 게다가, 졸병도 아니고 장교를 사실상 강제징집으로 뽑는다는 것부터가 제대로 된 군대와는 백만광년도 넘게 떨어진 막장 군대나 다름없었다.

결국, 김수환 추기경도 여느 강제징집된 조선인 청년들처럼 살벌한 전쟁터로 내몰려서 언제 개죽음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총알받이 신세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동료 신학생들과도 일본의 강제징집에 관해 많이 토론하면서 만약에 강제로 끌려가더라도 훈련시 받은 군사지식을 독립운동가들에게 알리는 등 일본에 대항하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했다는 이야기가 2016년 2월에 출간된 공식전기에 이 내용이 나온다. 이는 김수환 추기경의 친일파 의혹을 부정하는 증거다.

이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으로는 퇴임하신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있다. 베네딕토 16세도 강제로 히틀러 유겐트에 징집이 되었지만,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에게 나치 운운하는 것은 엄청난 결례다. 실제로, 베네딕토 16세의 가까운 친척들은 나치를 반대하는 운동을 하다가 게슈타포에 붙잡혀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실제로 홀로코스트 때문에 독일 강제수용소에서는 유대인만 수용되어서 희생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유대인 말고도 대다수의 집시가 몰살당했으며, 폴란드인, 소련인 같은 다른 민족들도 희생당했다. 또한 독일인들 중에서도 유대인을 도운 경력이 적발되었거나 반정부 활동으로 체포된 사람들, 여호와의 증인과 같이 병역이나 징집을 거부(서양사개론에도 명시된 사항)한다는 사유로 수많은 시민들이 아우슈비츠, 베르겐 벨젠, 플로센뷔르크 등의 강제수용소에서 희생되었다. 이들 중 유명한 인물로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 독일국방군 해군 대장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 등이 있다.


6 흑역사

개정 사학법이 단순히 사학비리를 없애는데 있다기보다, 숨은 뜻이 있는 것 같다.
- 사학법 개정에 반대하며

이후에도 “문제되는 사학도 있지만 수적으로 얼마 되지 않는다”, “그냥 둬도 되는 것을 왜 문제를 만드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라는 등 사학법에 강력하게 반발하는 발언을 여러 번 하셨다.


어떤 이는 대구의 희망원 참사 책임을 김수환 추기경에게 돌리고 있지만, 김수환 추기경이 대구 지방의 가톨릭 교회의 직권자도 아니고 희망원 사업을 따내는데 역할을 맡은 적이 없기 때문에 부당한 비난이 아닐 수 없다. 당시 대구대교구의 직권자인 서정길, 이문희 대주교에게 뭐라고 해야겠지만...
  1. 미사 경본의 감사기도(prex eucharistica)에 나오는 경문으로 1996년 이전에는 '많은 이를 위하여'로 번역했다.
  2. 사제의 길을 선택한 두 아들 동환과 수환을 위해 정말 어려운 가정 형편에서도 물심양면 뒷바라지를 하였다고 한다. 심지어 신학교 방학 중에 아들들이 찾아오면 이웃집에 간곡히 부탁해 흰 쌀밥과 고기반찬을 준비해 주던 터라, 두 형제가 너무 죄송스러워 식사를 제대로 못했다고.
  3. 대한민국 해군에 군종신부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원입대를 하였으며, 군종 신부로 대위 임관하여 한국전쟁베트남 전쟁에 군종사관 사제로 참전하였다. 이후엔 군종 신부들을 위해 노력하다가 1970년 해군 중령으로 예편했으며, 결핵환자를 돕는 일을 하다가 1983년 선종하였다. 참고로 동생이 추기경에 임명되자 누를 끼칠까 봐 사적으로 만나는걸 꺼렸다고 한다.
  4. 참고로 김수환 추기경의 본래 이름은 '순환'이였는데, 신학교에 입학할 즈음에 관청에서 관련서류를 떼던 중 이름이 '수환'으로 올라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고 한다. 출생신고 당시 담당직원의 기재 실수인 듯한데, 수환이란 이름도 괜찮다는 어머니의 말씀과 당시 천주교인들은 서로를 세례명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아 굳이 고치지 않았다고.
  5. 現 동성중학교&동성고등학교. 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 및 혜화동 성당과 바로 이웃해 있다.
  6. 후일 대한민국 2공화국의원내각제 국무총리.
  7. 2016년 2월에 발매된 공식전기에 따르면, 신학교 시철 초기까진 진지하게 신부가 될 마음이 없었다고 한다. 자신은 개인상회를 열어 여태껏 형제들 키우느라 고생하신 어머니를 호강시켜 드리겠다는 꿈이 있어서 그랬다고. 그러나 어머니의 소망을 이루어 드리고 싶은 마음과 신학교 선생님들과 여러 친구들에게 여러 조언을 들으면서 꾹 참았다고 한다.
  8. 안동교구 주교좌성당.
  9. 성모병원과 가톨릭대학교/성의교정을 다른 학교에 매각하니 마니 하는 말까지 떠돌았다.
  10. 당시 수원교구장. 나중에 광주대교구 대주교가 됨.
  11. 서울대교구청의 교구장 집무실에서 잡일을 도맡아 했던 수녀의 말에 따르면, 휴지통을 비울 때마다 코피를 틀어막은 휴지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김수환 추기경은 윤공희 주교의 노고에 대해 두고두고 고맙게 생각하였다.
  12. 그 당시 이미 전 총리였다. 93년 12월~94년 4월 총리 재임,
  13. 엄밀히 말해서 '교황장'이란 용어는 없다.
  14. 단, 전두환 대통령이 군인으로 복무하던 시절엔 천주교 신자였던 터라 군종성당 등을 세우는데 김 추기경이 도움을 준 적이 있어 사이가 괜찮았었다고 한다.
  15. 노무현 전 대통령 측근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이 직접 조문하지 않은 것은 당시 문제가 되었던 박연차 게이트 사건 문제가 클리어될 때까지 국민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6. 출처 - 회고록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평화신문 엮음.
  17. 자신의 동생 아벨을 죽인 성경 최초의 살인자.
  18. '주님께서 카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Am I my brother's keeper)?"' - 창세기 4장 9절.
  19. 독재정권의 민주화운동 탄압을 종교 탄압으로 엮어버린 신의 한 수였다. 가톨릭의 추기경은 바티칸 시국의 시민이기도 하기 때문에, 어지간한 막장국가가 아니고서야 추기경급 고위사제를 체포했다가는 전 세계적인 비난을 당해낼 수가 없다. 당시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던 전두환 정권은 더더욱.
  20. 글로 적어놓으면 상당히 비장한 분위기일 듯 싶지만, 당시를 회고하는 인터뷰에서는 마치 "주일에 성당에 나오시면 늘 제가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그냥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고 한다. 최후통첩 분위기를 내며 김 추기경을 협박하려 했던 정부 측으로서는 대꾸할 말이 생각 안날 대략 난감한 상황이었으리라. 그분: 아니 저 영감탱이가 또 저래!
  21. 2005년 10월 21일자 동아일보 인터뷰
  22. "현재 정말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안에 살고 있는지, 간판만 대한민국이고 지배하는 사람들은 영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는지 분간하기 어렵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아니 추기경님, 그건 이 시대에 하셔야할 말씀인데...
  23. 이 말에 격분한 당시 이해찬 총리는 "김수환 추기경께서 상당히 정치적인 발언을 하신 것 같은데, 우리 정부와 노무현 대통령이 마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것처럼 지적하는 의도를 모르겠다"라고 반발하기도 했다. 화 안나면 그게 더 이상하다.
  24. 아마도 남북 화해모드를 비판하시려는 의도의 발언인것 같다. 물론 통일을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지만 추기경님의 눈에는 북한의 독재정권이 못마땅했을듯
  25. 상기했둣, 김수환 추기경의 조부도 병인박해순교했다.
  26. 지금도 그렇지만 이 당시엔 성매매 업소 여인들에 대한 인식이 매우 안 좋아 근처에만 와도 대놓고 불쾌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27. 출처 : 평화신문 김수환 추기경님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32/70년대 민주화운동
  28. 독일어는 신학교 우수 성적자로 선발되어 일본에서 유학하는 동안 어느 정도 배웠고, 나중에 독일로 박사과정을 위해 유학을 갔을 때 논문을 쓰기 위하여 마스터 했다고 한다. 영어의 경우엔 일본군에 징집됐다가 풀려났을 때 만난 외국인 사제를 통하여 기초를 배우고, 나중에 괌에서 전범재판 증언하러 들렀을 때 틈틈히 공부하셨단다.
  29. 당시 김수환 추기경은 시성 문제가 아니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행사 준비 때문에 교황청을 찾은 상황이었다.
  30. 김수환 추기경과는 인연이 있는 사이로, 김 추기경이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려고 뮌스터 대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하던 시절, 라칭어 추기경의 강의를 수강하며 신학적인 주제를 가지고 열띤 토론을 벌인 적이 많았다고 한다.
  31. 김 추기경의 동성고등학교 5년 선배. 참고로 김 추기경만 군복을 입은 건, 신학생과 신부까지도 강제징집하는 일제의 만행을 천주교 소식통을 통해 알리려고, 귀국하기 전 배급받은 사관후보생 복장을 입고 찍었기 때문이다.
  32. 진중권은 사실 PD들의 입장을 좀더 옹호하며, 친노/NL들과는 가끔 진영논리에 지나치게 입각하는 발언들만 제외하면 선을 확실히 긋는 모습을 보였다.
  33. 친노 네티즌들은 김수환 추기경이 노무현을 몇 번 비판했다는 이유로, NL 운동권 계열에서는 북한에 대해 비판적이었다는 이유로, PD에서는 낙태 윤리적으로 보수적인 관점을 가졌다는 이유로 물어뜯었다.)
  34. 강제징집 당시, 훈련소의 고위간부와 면담형식으로 사상검증을 하였는데, 일본의 행태를 강하게 비판하여 통과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