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주요 세대-갈등론 | |||
88만원 세대 | 20대 개새끼론 | 386세대 | 4050대 책임론 |
목차
1 개요
90년대 (중후반) 당시 30대, 80년대 학번, 1960년대 생이었던 세대.
단군 이래 최고의 세대 이면서 다음 세대에게는 먹튀한 세대
한국의 세대 중 하나. 보통 386세대라고 불린다.
통칭 민주화에 기여한 운동권 세대로 여겨진다. 이는 유럽이나 미국, 일본의 68혁명 세대와 상당히 비슷하다. 그러나, 동시에 6.29 선언과 민주화 이후 다른 여러가지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한 세대이다.[1][2] 사실 진짜 만악의 근원은 언론과 재계지만 그런데 그 쪽 세계도 386세대 아재들이 많이 포진된 것이 함정
시간이 흐르면서 486으로 업그레이드 또는 노화 되었다. 그래서 486세대를 쳐도 이 문서로 오도록 리다이렉트 된다. 2010년대 들어, 이 세대가 50대로 접어들면서 펜티엄 586으로 업그레이드 또는 노화 되는 중이다. 2016년 현재 1967년 생까지 50대에 접어들었다.
다만, 현재의 386세대 비판은 대부분 꼰대의 속성을 비판하는 것이다. 베이비 부머[3]와의 공통점도 매우 크다. '진보적이었던 386세대가 기득권이 되니 사회 모순을 그대로 이어받는걸 비판하는 것이 386 비판론'이지, 꼰대 모두를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비판론에 있어서 꼰대 모두가 저지르는 패악을 386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해야 된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비판론이 매우 많다.[4] 사실 꼰대짓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고 80-90년대 아니, 그 훨신 이전에도 존재했던 문제점이지만 국가적 단위에서 음력설 쇠면 징계먹는다든가, 만화검열하면서도 TV에서 방송되던 외산애니는 어찌하지 못한다거나, 80-90년대 언론에서 저축률이 20%대를 기록했음에도 과소비 타령을 했던것만 봐도 386 세대가 사회의 중축이 되다보니 벌어진 현상이라 할수있다고 볼수있다나.
위에 설명이나 밑에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386세대는 매우 제한적인[5] 용어임에도, 꼰대 비판에 386, 486, 586이라고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다보니 디자이너 이상봉의 열정페이 논란 당시 이상봉을 386세대라고 하며 비판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상봉은 1955년생으로 알려져 있으며 386과는 거리가 어느정도 있다. 비슷한 케이스로 서정희의 강제 결혼 주장에 대해서 386세대의 결혼방식이라며 비꼬는 글들이 올라온적이 있다. 서세원은 1956년생이므로 역시 386이 아니다. 이런 케이스들을 보자면, 꼰대와 젊은 세대간의 갈등을 단순히 386세대로 지칭하는 경우가 매우 빈번하다. 이렇게 된 이유는 언론에서 386세대라는 용어를 무척 남용했기 때문이다. 실상은 주류언론이 개X끼지만
게다가 이 용어가 유명한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1960년대 당시에 평균출산율이 5명대를 기록했고 그래서 이 세대들이 다른 세대들에 비해 그 인구수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6]여타의 세대들보다 머릿수가 많기 때문에 그만큼 유명인사들도 많이 포진되어 있고 그래서 이 세대가 유명한 것이다.
2 정의
펜티엄과 윈도우 95가 보급이 되던 95년 경, PC통신에서 발생한 단어이다. 사회적으로 PC의 도입이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적응은 대충 했는데, 그다지 잘은 안되는 30대를 가리켜 386 CPU에서 윈도우 95에 비유한 것이다. [7] 이렇듯이 원래의 어원은 CPU 386이지만, 꿈보다 해몽이라고 위의 의미로 더욱 확대되었다.
x세대가 자칭 신세대라는 기치를 들며 이전 세대를 구세대 취급하는데의 반작용으로 당시 최신형 컴퓨터인 386컴퓨터를 사용하며 운동권을 했던 자랑스러운 세대라는 의미로 93년 즈음의 90년대 초반부터 나왔다는 말도 있다. 실제로 이들은 이들 직후의 오렌지족이나 야타족들이라 비하하며 그 이후 세대와 차이를 두자고 했던 것은 사실이다.
'386세대'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대중화가 된 것은 조선일보, 동아일보[8]를 비롯한 보수언론에 의해서였으며 80년대 대학생활을 했던 세대에 대해 정치적 의미를 약화하는 개념 규정을 노린 단어사용이었다. 그러나, 이 용어는 결국 보수나 진보 여부에 상관없이, 이른바 386세대에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용어가 되어 널리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2008년을 끝으로 60년대 태생인 사람들 중에서는 30대인 사람이 없어지게 되었다.
386의 정의가 무우 쪽 떨어지듯 정확한 것은 아니나, 그 기준은 정확히는 학번이다. 이는 '386'이 대학의 학생운동 문화에 기원을 두고 있어 80년대 학번이라는 의미가 더욱 강하기 때문이다. 즉, 상당수가 79학번[9]인 60년생을 이 범주에 인정하지 않고 그 대신 70년생을 이 범주에 넣는 경우가 많다. 즉, 1961~1970년생이 여기에 해당한다. 89학번의 경우, 당시의 입시제도 때문에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한 소위 메이저 캠[10]의 경우 70년생 89학번과 69년생 89학번(즉 재수생)의 수가 거의 비슷하므로 89학번의 절반 정도는 60년대생이 맞기도 하다. 그렇다고 같은 학번을 나이로 분리할 수도 없으니...
다만, 조금 좁게 본다면, 그 중에서도 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에 대학을 다니지 않았었던 1969~1970년생과 베이비 붐 세대에 속하는 1961~1963년생을 제외하기도 한다. 소수 의견으로는, 91학번(1972년생)까지 넣기도 한다. 1991년은 명지대생 쇠파이프 사망사건을 시작으로 약 2달 정도 거의 매주 분신자살자가 등장했으며, 대중집회 또한 87년 6월을 기억하게 할 정도로 자주 있었기에 91학번까지는 "마지막 운동권 세대"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1992년 이후로는 대중집회가 현저하게 줄어들고 또한 강경진압과 폭력시위는 적어도 대학가에서는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96년 8월 연세대에서 부활한다. 즉, 1991년 이전과 1992년 이후의 학생운동 문화는 진짜 엄청난 차이가 있는데 반해 1991년 봄의 상황은 1988, 89, 90년보다 더 이전 세대 상황에 가깝다. 자세한 것은, 1991년 연쇄 분신 파동 항목을 참고하자.
3 특징
당시의 대졸자 세대의 교육 및 사회환경은 그 사상적 동질감을 형성하는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전 세대가 논 팔고 소 팔아서 "우골탑"으로 어렵사리 대학에 진학했다면, 이들은 경제성장의 혜택을 입어 그보다 쉽게 대학에 들어갔다. 특히 80년대 초반에 이른바 분교설립 열풍과 졸업정원제 실시로 대학정원이 거의 1.5배에서 2배 가까이 팽창했다. 그 당시에는 유화정책 때문에 대학 등록금 인상이 규제되어 있던 시기라서 요즘과 같은 살인적인 등록금 문제도 적었다.
대학생 시대에 5.18 민주화운동, 제5공화국, 6월 항쟁을 목격하면서 민주주의나 민족주의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때문에 고용없는 성장을 겪고 있는 현 88만원 세대보다 이상적인 측면이 강한 편이다.
또한 "실력이 있으면 누구나 성공한다."는 시대를 살았고, 중견 간부가 되면서 IMF를 맞는 등, 세계화의 격변 속에서 경제문제에 신자유주의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경우가 많아, 정치적으로는 이상주의적이나 보수적이며 우익적이라는 평가를 듣기도 한다.
386세대가 급부상하기 시작한 1997년 제 15대 대선에서는 이인제가 386세대의 기수로 불린 적이 있었다. 물론, 이인제는 나이는 물론이고 실제 지지도 역시 전형적인 386의 지지를 받았던 정치인은 아니었다. 오히려, 386세대의 지지를 광범위하게 받은 대통령 후보는 노무현이라고 할 수 있다.
4 경제적, 인구적 특징과 비판
사실, 타 세대가 본다면 386세대는 <<아주 운이 좋은>> 세대이다. 이전 세대나 이후 세대에 비해 매우 크게 누린 세대라고 말할 수 있다.
우선 대표적으로는 대학생이 행복했던 시기에 대학생으로 있었다. 386세대 바로 직후인 90년대 학번 세대는 대입 수험생 수가 사상 최고로 불어난 반면, 졸업정원제는 폐지(약 30% 감소)되어 입시 경쟁이 격화되었다. 게다가, 등록금이 싸다고 수 년간 징징대던 대학 당국의 항의가 먹혀서, 1989년 대학 등록금 자율화 조치가 시행되었고 대학 등록금이 큰 폭으로 올랐다.[11] 그러나, 1990년대 이후에는 거의 모든 대학이 계속 등록금을 올려왔다. 반값 등록금 시위는 없었다.
80년대 학번 대학생에 대한 대표적인 당근으로는 대표적으로 대중교통 요금의 할인제도였다. 대학생 버스요금이 중, 고교생과 같았다. 물론, 같은 나이의 취업자(고졸)들은 일반인 취급해서 이런 혜택이 없었다. 본격 대학생 우대였다.[12] 이는 무엇보다 인수도권 학생들에게 유리했는데, 서울 시내버스와는 달리 할인폭이 컸다. [13]
그리고 80년대 초반 학번 대졸자(남성기준)는 가장 취업이 쉬운 이른바 3저 호황 때 취업을 하게 된다. (대학 4년 + 군대 2~3년[14]) 인서울 공대 출신이라면 대기업 취업은 특별히 학점이 개판이던가, 학생운동 경력이 심한 경우가 아니라면 거의 모두 가능했을 정도였다.[15] 명문대 출신은 학점에 관계없이 대기업 서너군데는 복수합격하는 경우가 보통이었기 때문.
386세대가 내 집 마련을 한 시기는, 대부분 IMF를 갓 지난 2000년대 초반이다. 이후, 엄청난 집값 폭등(수도권 최소 2~3배)으로 집값상승의 단맛도 많이 본 세대이다.[16] 심지어 일부는 은행대출을 통해서 부동산 투기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아파트 두채 세채 사재기를 했다. 2000년 이전에는 부동산투기가 일반인보다는 소수의 전문 투기세력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였고, 베이비붐 세대는 50년대에 태어나 근검절약이 몸에 밴 세대라서 빚을 지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이 있었다.[17] 그러나 소위 "부자되세요." 열풍[18]에 힘 입은 일반 386 화이트컬러가 대거 가세한 2차 부동산 버블은 그야말로 더욱 복마전이 된 물신 리그였다. 그리고, 그런 투기로 인해 올려놓은 집값은 고스란히 386세대의 아랫세대들에게 일종의 사다리를 걷어차는 장벽이 되고 있다. 이것이 4050대 책임론을 이야기하는 가장 큰 이유다.[19] 즉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대의 행운아 세대" 라는 평가다. 이러다보니 신자유주의에 더욱 호의적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386세대들은 인구 숫자도 가장 많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가장 많이 출생한 세대가 1971년생이다. 이들은 제6공화국 출범 직후부터 이미 20대로 투표권을 갖고 있었으며, 보수정당 우위의 정치체제를 흔들어버렸다. 그들은 민주당 정부, 특히 노무현 정부를 지지하고 탄생시킨 주역이었다. (당시 30대 ~ 40대 초반.) 이들이 참여정부 세력에 대한 지지를 버렸을 때, 이명박 정부가 등장했다. 그리고 18대 대선 즈음에는 이들은 캐스팅보더인 40대 후반 ~ 50대 초반 세대를 형성했다. 그래서 386세대는 기존 사회의 모순들을 해결하지 않고, 오히려 악화시키고 고착화를 시켰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사실, 386세대들은 자신들보다 윗세대에 대해서 썩어버린 정치를 강하게 비판하고 저항을 하면서 정치적으로 사회의 모순과 불만을 폭증시키면서 자신들이 처한 사회의 모든 문제들을 개혁하고자 노력했던 세대였다. 하지만, 386세대는 나이가 들어서 자신들이 겪었던 똑같은 모순들을 반복하고 있다.[20] 자세한 것은, 4050대 책임론도 같이 참조하자.
외환위기때 별로 피해를 보지 않고 고스란히 자리를 유지했다는 주장도 있다. 다만 486~586세대가 외환위기를 고스란히 피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아직가지도 논쟁거리이다. 486세대가 외환위기때 어땠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통계 자료 입증이 되지 않았으며, 주장이 상호간에 상반되기 때문. 입사 2~3년뒤 외환위기가 터져 회사에 입사동기10명중 2명밖에 안남은 이야기가 있는 반면, 당시 신입에 가까웠던 486은 해고 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주장이 크게 엇갈리고 있다. 영세 자영업이나 일용직 근로자로 생계를 이어가는 4050세대도 많은 반면, 중견 관리직 혹은 상층직을 차지하고 있는 4050세대도 많기 때문. 정확하게 말하면 4050세대도 양극화가 심하다.
386세대 출신 정치인들의 이후 행보도 강한 비판의 대상이 된다. 대표적으로, 소위 16대 국회의 2001년 '새천년 NHK 사건'이 있다. 당시 새천년민주당 계열 정치인들이 5.18 참배를 마치고 나서 바로 그날 밤 광주 시내 룸싸롱에서 아가씨를 불러서 술을 마셨다는 것으로 상당한 논란이 되었다.[21] 이 세대의 평균적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은 16, 17대 총선, 특히 17대 총선으로 열린우리당 압승과 함께 본격 정계에 진입했고, 18대 총선에서 낙선했다가 19대 총선에서 화려하게 복귀를 했다. 공교롭게도 정치인이 아니지만 관료들 중에 개돼지라는 망말을 한 나향욱 교육부 정책기획관이나, 천황폐하 만세를 외친 이정호 국가기후변화적응센터장 또한 386세대이다. 사실 따지고보면 386세대라고 해도 충분히 보수적인 인물도 있기는 하지만 예를 들면 하태경이라든지...
우석훈과 박권일의 88만원 세대은 이런 세대론적 고찰을 토대로 386 개새끼론을 펴기도 했다. #
5 용어 비판
386세대라는 표현에는 문제가 있다는 견해가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대학을 나와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고졸 이하의 학력을 가진 사람들도 빠지게 된다. 넓게 잡아도, 대학문화를 조금이라도 경험을 해 본 대학 자퇴자 정도이다.
이 때문에, 혹자는 이 386이라는 용어를 소수 엘리트주의라고 비평하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이전 세대보다 대학 진학이 쉬웠다고는 하지만, 당시에도 여전히 중학교 졸업자의 65% 정도만이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으며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자의 35% 정도가 대학진학을 했다. 특히 여학생의 경우, 공부를 어느 정도 잘 했어도 부모님들이 상업계 고등학교로 반쯤 강요된 진학을 하는 경우가 80년대 후반까지도 비일비재했다.
즉, 60년대 출생자의 80%가 넘는 절대다수가 학력이 고졸 혹은 그 이하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사실이다. 결국, 낭만적인 대학 문화를 향유했다는 60년대 태생 젊은이들은 정작 세대 전체로 보면 일부 소수에 불과하다. 당시의 대다수 젊은이들은 당연하듯이 고졸 이하의 학력인 경우가 많았으며, 386세대들의 동생세대~조카세대인 이른바 서태지 세대, 국초딩 세대, 88만원 세대, 삼포세대와 비교를 해 보면, 비교적 일찍 사회에 진출하면서 사회인 생활을 시작했다. 결국, 386세대 젊은이들의 절대다수가 대학생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표현이 남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60년대의 대학생들 중 일부가 정치권으로 들어와 한 시대의 엘리트로서 정치, 경제, 문화, 언론 등 사회의 중심층을 형성하고 한 시대의 언어를 독점하는 데 성공하여 사회의 주류로 군림하게 되면서 여론을 주도하게 된 것이 큰 원인이다. 즉, 소위 '386세대'는 자연스럽게 '대학 캠퍼스 생활'을 전제로 하면서 과거를 묘사하였고, 다른 형태의 삶을 사는 절대다수의 인물들은 사실상 타자화-공백화 하였다.
결국, 상대적으로 절대다수였던 "대학에 가지 못한 60년대 세대"들은 독자적인 정체성을 형성하지 못한 상태로 학벌이라는 절대적인 가치에 따라서 대학생들을 동경하면서 이들의 가치에 함몰되었다. 자기 개인의 삶을 정체성의 근간으로 삼기보다는, 당대 최고의 엘리트들이었던 대학생들의 문화를 내면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제5공화국 당시 3S정책과 맞물려서 당시 언론에서 의도적으로 주입한 것일수도 있다. 상대적으로 일부 소수 인원만이 대학에 진학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학 캠퍼스 문화가 뉴스, 드라마, 연예프로 등으로 많이 미화되어 노출되었으며, 특히 실제로 대학의 실상과는 억만광년 정도의 차이가 있는 낭만적인 풍토. 등을 의도적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공공매체에서 많이 보여줬다. 단적인 예로 국풍81 같은 관제행사라든가, 대학가요제라든가, 대학 캠퍼스를 소재로 한 수많은 청춘연애 드라마라든가 등등... 특히 대학입시, 특히 명문대 입시에 관한 언론의 보도들은 지나칠 정도였다.
현재 같으면, 기껏해야 스포츠 채널 정도에서나 볼 수 있는 소위 엘리트 체육이라고 불리는 SKY 대학교의 연고전 같은 체육행사는[22] 공중파 TV에서 중계방송을 꼬박꼬박 해 줬으며, 대학 원서마감일에는 대학 경쟁률을 뉴스 단신으로 처리하는 요즘과는 달리, 마치 총선 개표방송을 하듯이 무슨 대학 무슨 과 몇대 일 어쩌고 하면서 적지않은 시간을 할애해서 방영을 했다.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로 선거 개표방송과 똑같았다(...). 사실 그때 개표방송은 총선에서는 여당 과반 확보, 대통령 선거는 간접선거로 대통령 당선 따위의 방송이 나왔고 출구조사 발표같은건 없었던 시절이라 차라리 대학경쟁률보는게 정신건강면에서 나았기는 했다 물론, 상위 10~20위권의 대학교 뿐이었다. 훌리건들 좋아할 방송이네..?
실제로 386세대의 다음 세대가 극심한 교육열[23]과 입시위주 교육에 시달리는 가장 큰 이유도 1940-60년대생의 70%~80%로 절대다수에 육박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집안의 가난으로 인해서 맏아들만 또는 아들들만 공부를 시키거나, 일부 집안에서는 여자들은 대학에 안 보내는 경우도 심심치않게 있었던 성차별로 인해서 대학에 가지 못하고 일찍 취업전선에 뛰어든 경우가 많았고 필연적으로 대학생들에 대해 강한 열등감을 갖고 있다는 점을 무시 할 수가 없다.[24] 결정적으로, 자기 또래의 대학생들이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대학에 가지 못한 자신들보다 더 우월한 경우를 너무 많이 접했기 때문이다. 또한 고졸자들이 많이 종사하는 3D업종의 경우는 감전, 절단 등 각종 산업재해로 사망하거나 불구가 된 경우를 많이 봐왔던 문제도 있다.[25] 결국, 그들도 경제적으로 나아지기 위해서 미래의 자식세대들에게 강한 기대감과 동시에 부담감을 주는 것이 현실이고, 자식들을 피터지는 과열경쟁속으로 던져놓으면서 명문대로 보내기 위해서 노력했고,[26] 심지어, 자식들에게 외국으로 유학을 보내면서 기러기 아빠가 되는 것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 이데아"를 듣고 자란 세대가 기성세대가 되어서도, 똑같이 아랫세대들에게 비정한 입시위주 교육을 반복하고 있다.
반면, 80년대 영화나 만화, 방송에서는 달동네나 빈곤층을 다루는 묘사는 소위 국격을 해친다면서 '검열'되었고, 땡전뉴스와 보도지침 항목에서 볼수잇듯이 당시의 사회적 저항은 주요 미디어에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축소하거나 왜곡시켜 보내버렸으며. 결과적으로 당시의 빈곤한 삶은 아예 기록말살형을 당했던 것이다. 텔레비전과 미디어는 소수에 불과한 대학생들의 삶만을 정상인으로 대우를 하였고 그나마 그 대학생들의 삶도 부분적으로 "왜곡"시켜 내보냈다. 즉, 당시의 대학생들 중에서도 상당히 소수에 속하는 대학생들만 정상인 취급했던 것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고졸 취업자의 삶은 정부의 정책에 따라서 철저하게 무시를 하였고 그 중에서 상당수는 열악한 노동조건과 산업재해 등에 시달려야했고 노조를 결성할려고 한다면 정부에서 득닥같이 나서서 분쇄했었다. 미디어가 기록한 당시의 '시대상'은 '진정한 대한민국의 1980년대'가 아니라, 철저하게 거품이 낀 허구적인 시대상이었다. 상당수 대학에 다녔던 386 세대들은 대학생 시절, 군부독재정권과 맞서기 위해서 목숨을 걸었다. 과거 학생운동의 중심이었으나, 전대협에서 "오월대, 녹두대"처럼 준군사조직 비스무리한 단체를 만들어서 자기 또래의 전경들과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경우도 많았었고, 실제로 박종철 열사같이 죽은 사람도 많았다. 당연히 TV에서 나오는 낭만적인 대학생활은 억만광년이나 떨어져있었고 대학생활을 즐길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80년대 후반부터 검열이 풀리면서 뉴스비전 동서남북이나 르포 60, 다큐멘터리 5공화국, PD수첩 같이 본격적으로 사회의 치부를 취재하는 프로그램이 등장하고[27]이들의 삶을 다룬 작품이 나오기도 했지만 드라마의 경우에는 매우 단기간만 다뤄지거나 방송사 내부검열(주로 3당 합당 이후-1990년대)로 틀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이후에는 시청률에 밀리다보니 잘 다루지지 않았으며 시사 프로그램은 아무래도 초상권 문제나 높으신분들이 찔리는 문제같은것도 있기 때문에 잘 안 나오고, 만화의 경우에는 그나마 민중만화나 시사 만화, 일부 명랑만화에서 다뤘고, 그 이외에도 일부 순정만화에서도 다루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80년대 만화 중에서 인기작품 위주로나 출간되는 수준인데다가 영화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을 생략한다.(...)
2010년대가 된 지금도 재벌가를 배경으로 한 막장스러운 드라마가 많이 나오고 예전부터 청소년 드라마 등등, 여러 방송에 나오는 고등학교는 항상 인문계인 점도 이러한 맥락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연예인들이 학창시절 연예인 활동을 하느라 제대로 공부도 못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고, 분명히 대학에 진학을 할 수 있는 실력이 아닌 경우가 심심치 않게 보이는데도 왜 그렇게 인서울권 대학의 연극영화과, 실용음악과로 진학을 많이 하고 학력위조에다 목을 맸는지 자세히 생각을 해보자.
대표적으로, 1980년대부터 심형래의 학력위조 사건을 예시로 들 수 있다. 자서전에다 고려대학교 출신이라고 거짓말을 써놓은 사례가 아주 유명하며, 2000년 방송된 개그 콘서트를 비롯하여 그 밖의 예능 프로에서 연고대 출신 연예인들이 나와서 동문대결을 했을 때 심형래도 자주 참가했다. 사실, 고려대 측도 할 말이 없는 게 학력위조를 확인을 해 줘야 할 학교 측이 나서서 오히려 심형래를 자랑스러운 동문으로 선전하기도 했다. 개그콘서트를 고려대에서 촬영한 적이 있는데, 특별 초대손님으로 자랑스런 선배라며 심형래가 나오기도 했다. 교내에서 벌어지는 공식행사에서 대놓고 말하는데 고려대 측이 오히려 심형래를 감싸면서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했었다는 것이다.
학력위조가 밝혀진 다음에 고려대는 "학부는 아니지만 고대에서 개설한 과정을 수료했으므로 넓은 의미의 동문으로 본다."는 드립을 시연했는데, 당시 명문대학들이 돈을 벌고 유명인사들을 이용해 학교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최고경영자과정, 평생교육원 등을 운영했다. 교육도 하지만 수강자들을 자기 학교 인맥으로 묶어 동문의식을 심어주고, 다양한 분야에서 이미 일가를 이룬 중장년들이 서로 소통해 동업할 계기를 만들어주고, 그러면서 가방끈 비슷한 것 하나 걸쳐주고, 학교는 수업료도 받고 기부도 받고 유명인 홍보도 하고 했다. 이는 현재진행형으로 아직도 유명 연예인들을 수능도 제대로 보지 않고 실력과 상관없이 입학을 시키는 관행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문화 풍토와 90년대의 대학진학률이 고도로 높아지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1960년대 세대들에게 20대에 대학진학을 하지 않고 대학생들보다 사회인 생활을 먼저 시작한 것은 "대학을 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대학을 가지 못한 것"이 되었다. 즉, 이 세대에 대학생이 아니었던 사람들은 정확한 나이에 대학을 진학하지 못한 것을 자신의 인생에서 "강한 열등감을 느끼는 결핍된 요소"로 받아들였으며, 자기 또래의 대학생들보다 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한 것은 단지 후회해야 할 인생의 과오일 뿐, "다음 세대에게 떳떳하게 드러낼 수 있는 자기 자신다운 인생의 형태"로 여기지 않는다. 이처럼 이 세대의 감정에는 어린 시절의 한(恨)이 서려있는 불편한 진실이 존재한다.
오늘날, 2010년대에서 대학 진학률이 비정상적으로 높아지고 취업이 더욱 어려워진 시기라면, 소위 지잡대를 가는 것보다 고졸 후 바로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던가 취업하는 것이 더 효용성이 높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소위 대학에 못 간 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강한 386세대의 고졸 출신들이 "나는 입학하지 못했지만, 자식들만이라도 대학에 보내야만 한다."라는 강한 의식 때문에 지금의 대학 정원비율이 비정상적으로 높아졌다는 시각도 있으며, 정설로 통한다. 그러므로, 386 세대가 받았던 혜택의 근본적인 원인은, 대학 진학률이 낮았기 때문에 대학생들의 수가 적었기 때문이다.
애시당초 386세대의 절대다수가 고졸 혹은 그 이하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취업시장에서 단지 대학생이라는 것만으로도 우수한 인재로 여겨졌고 그만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386세대의 젊은이들에게 이런 혜택은 당연히 주어지지 않았다. 당시의 약 20% 미만인 대학 진학률을 현재에 비교하면, 386세대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의 대학생은 "대학생"이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최소한 인서울 이상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28]
그렇지만, 여러가지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 용어의 효용성을 완전히 포기하기도 난감한 것이... 1980년대는 대학을 다니던 청년문화의 전성기로 인해, 앞에서 얘기된 대로 '대학가요제', '강변가요제' 등에서 대히트한 노래가 한 세대 전체에 폭넓게 불리거나, 대학 캠퍼스를 주제로 한 청춘연애 드라마가 대단한 인기를 얻는 등, 대학생이 주도하는 청년문화가 한 세대의 문화를 리드하게 되면서 대다수의 청년들에게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 자체가 작위적으로 분칠된 문화였지만 말이다.
물론, 정치적, 사회적으로도 힘든 점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대학 졸업자들에게도 하늘의 별따기 수준의 고난이도로 분류되는 은행 취업, 공무원 임용, 대기업의 여러 파트에 취업하는 것은 당시의 고졸자들에게도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수월했다. 다만 그렇다고해서 문제점이 없던것이 아니었던게 당대에는 까라면 까(...) 정신이 더욱 강했던 시절인데다가 정부차원에서 휴일을 늘려주려는 정책도 펴지않아서 주6일제[29]+연간 노동시간 3000시간(...)은 기본이었고,[30] 정부나 언론에서 수시로 꼰대짓 과소비 타령을 하기 일쑤였었던 때였다는 심각한 문제점이 있기는 했다.[31]
여담으로, 디씨위키나 구스위키에서는 386 세대를 신랄하게 까대는 내용이 실려있다.
6 기타
2013년 박근혜 정부 이후에는 "신386세대"라는 단어도 등장했다. 이는 30년대에 태어나 80세를 넘은 60년대 인사(사회활동을 시작한)을 뜻하는 말로 대표적인 인물인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을 비롯한 6~70년대 정치인,관료들이 대거 복귀하면서 보수색채가 강화되자 비판적으로 내놓은 말이다.
7 나무위키에 기재되어 있는 386세대의 인물들 (이제는 486 또는 586세대가 된 인물들)
※ 80년대 학번이고 60년대 출생이라고 무조건 적지는 말자.
- 故 신해철->40대-87학번 재학-68년생[32]
- 김민석[33]->50대-83학번 재학-64년생
- 김어준->40대-90학번 재학[34]-68년생
- 남경필->50대-84학번 재학-65년생
- 진중권->50대-82학번 재학-63년생
- 손범수->50대-83학번 재학-64년생
- 정진영->50대-83학번 재학-64년생
- 박찬욱->50대-82학번 재학-63년생
- 봉준호->40대-88학번 재학-69년생
- 안치환->50대-84학번 재학-65년생
- 원희룡->50대-82학번 재학-64년생
- 이찬진->50대-85학번 재학-65년생
- 김택진->40대-85학번 재학-67년생#
- 김정주[35]-40대-86학번 재학-68년생
- 강신주-40대-86학번 재학-67년생
- 조국-50대-82학번 재학-65년생
- 정청래->50대-85학번 재학-65년생
- 안희정->50대-83학번 재학[36]-65년생
- 이광재->50대-83학번 재학-65년생
- 우병우->50대-84학번 재학-67년생
- ↑ 실제로 이들의 대부분은 현재 청년들을 채용하는 관리직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기본적인 영어 지식도 없는 이들이 토익 900점을 요구한다던가, 사회 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나약함으로 돌린다던가, 열정페이를 공론화시키거나 그 외 이해할 수 없는
꼰대 노릇행위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경우도 있다 - ↑ 특히 에코 세대(1970년대 후반 ~ 1980년대 중후반 생)의 386세대에 대한 반감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 어차피 이들의 부모 세대는 베이비부머이기 때문에 386은 에코 세대의 앞길을 가로막는 방해물 그 자체, 밥버러지에 비등하는 수준이다.
- ↑ 한국 기준 1955~63년생. 386세대와 중첩되는 1961~63년생을 제외하면 1955~60년생.
- ↑ 대표적인 케이스가 디씨위키. 실제로 디씨위키에서 언급된 386세대의 패악은 베이비 부머 세대에서도 상당히 많이 보이는 케이스이다.
- ↑ 1960년대 중반 ~ 1970년대 초반 출생자의 대학 진학률은 30% 안팎이였으며, 80년대에 대학을 다녔다고 다 386세대가 아니다. 예를 들면 유시민, 이해찬, 김근태, 손학규, 조영래, 노회찬 같은 인물은 386세대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강용석도 60년대생에 80년대 학번이지만, 운동권과는 거리가 있으므로 386세대라고 지칭하지 않는다. 매우 제한적인 용어를 일반화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 ↑ 사실 출산율로 친다면 50년대 후반이 더 높으며 1960년대 생이 태어났을 무렵의 출산율은 평균적으로 5명대였지만 그렇다고 해도 연간 90-100만씩은 태어났기에 그 만큼 수가 많은것이다. 사실 현 80-90년대 생의 쪽수가 이전에 비해 비교적 적고 남초인건 전두환-노태우 정권 시기의 인구정책의 영향이 크다.
그러니까 전두환을 깝시다?하지만 그러면 대학입시가 헬게이트화 - ↑ 80/386이상이면 윈도우 95가 구동되기는 하는데, 386의 성능으로는 사실상 쓸 수가 없었다.
- ↑ 황중환의 386c가 대표적이다.
- ↑ 재수생이라면 80학번, 빠른 60년생이라면 78학번
- ↑ 1980년대 초반 데모를 많이 하는 명문대학을 지칭하는 용어로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서강대, 성균관대를 의미한다. 한양대의 경우 80년대 초반에는 학생운동을 많이 하지 않았다.
물론 80년대 후반에는 학생운동의 중심에 섰지만. - ↑ 그나마 첫 해인 1989년도에는 대학들이 눈치를 보느라 등록금 인상을 하지 않은 대학이 더 많았으며 모 대학처럼 인상했다가 학생회의 반발로 인상분을 도로 환불받은 사례도 있었다.
- ↑ 이러한 사례 중에서 좀 더 심한 사례는 번화가에서의 미성년자 음주단속이였다. 1980년대 당시는 만 20세 미만은 미성년자였는데 대부분의 대학 1년생과 생일을 지나지 않은 대학 2학년생은 대부분 미성년자였으나 단속 시 봐 주는 분위기였다.
안 봐주면 신입생환영회는 원칙적으로 불법행사물론 재수생은 얄짤 없이 단속. 이게 일견 법적 일관성에 모순점이 있었지만 대 학원 유화정책인지는 몰라도 유지되었다. (참고로 결국 이런 모순된 상황은 미성년자 기준을 만 19세 미만으로 낮췄어도 안 없어지는 관계로 음주 가능 시기를만 19세가 되는 해의 1월 1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 ↑ 이 정책은 1990년부터 없어져서 인수도권 대학 학생들은 교통비가 2배로 올랐다.
- ↑ 당시 현역 복무기간은 30개월이였으나 대학생들은 대부분 1,2학년때 1주일씩 군사교육을 받고 복무기간을 3개월 단축해줘서 27개월이였다. 방학기간과 잘 맞춰서 2년 휴학이 대세.
저 제도로 인해 고졸 후 취업자와 대학생들의 복무기간이 달랐다. - ↑ 학생운동 경력도 경력 나름이라 또 학생회장 쯤 되면 문제가 없었고, 소위 개판 학점의 용인 범위도 지금과는 천지차이였다(...). 졸업예정자로 대기업에 취업했는데 여러 이유로 졸업을 못한 경우에도 입사규정과는 별개로 취업을 받아줬다. 지금 같으면 100% 규정위반 입사취소다.
- ↑ 자세한 것은 부동산, 버블세븐 항목을 참고하자.
- ↑ 다만 이건 2000년대 이전에 은행 이자율이 높았기에 빚을 빌려쓰기도 힘들었던데다가 복지제도 같은것이 제대로 마련되어있지 않던때였던지라(사실 지금도 별로 좋지 않지만) 빚을 거하게 졌다가 바로 한강이나 낙동강으로 입수할 판이라서 그랬던 영향이 강하다(...) 이자율이 기본 10%는 되었던 시절이었던지라 빚을 3000만원 졌다 하면 1년에 300-400만원씩을 추가로 갚아야했다. 역으로 이자율이 높았기에 은행에 돈을 저축해놓으면 부동산은 모르지만 적어도 주식이나 펀드에 돈을 집어넣은것보다는 안정적으로 돈을 벌수있었기에 저축상품이나 전세가 흥했던 것이다.(은행에 가서 1억원 저축을 하면 1년에 이자로 1000만원을 얻어먹을수 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90년대 말-200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해서 IMF의 후유증 극복과 경기부양을 이유로 이자율이 4%까지 낮아지고 대출문턱도 낮아지면서 빚을 지는데 부담이 덜해졌고 그래서 대출이 급증하게 된 것
- ↑ 2000년대 초반 히트친 모 카드사 광고이다.
- ↑ IMF 사태 이후 일어난 벤처 지원의 특혜는 386세대에 집중되었고, 이후 사교육 열풍을 주도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하기도 하는 등 # ## 가장 큰 문제는 이렇게 그들에게 주어진 자금이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들어가 부동산 거품을 일으키는 바람에 다음 세대에 엄청난 고통을 안겨줬다는 것이다. # ## #
- ↑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중략) 너희들이 정녕 민주화를 아느냐 이 손으로 일군 민주주의 대한민국 / 요즘 어린 것들은 몰라도 한참 몰라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 투쟁도 혁명도 이제는 모두 봄날의 꿈 / 그리웠던 혁명동지 돈을 꾸러 찾아왔네 / 골프채로 쫓아내니 마음속이 허전해 / 내일은 미스김의 보지냄새 맡아야지 - 밤섬해적단 - 386 Sucks 중에서.
- ↑ 이 사실은 임수경이 인터넷에 게시하면서 알려진 것이다. 임수경은 민주당 의원들이 새천년 NHK에 있다고 해서 처음엔 일본 NHK에서 새천년민주당 의원들한테 취재라도 나온 줄 알았나 했는데 알고 봤더니 새천년 NHK라는 단란주점에서 여자 끼고 술판을 벌이고 있었던 것... 게다가 그 자리에서 술에 거나하게 취한 우상호 의원한테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듣고 분개해서 인터넷에 글을 올린 것이다.
- ↑ 당대의 우수한 엘리트 운동선수들은 공부를 못했어도, 모두 연고대에서 스카우트를 한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파벌과 인맥으로 무장했다. 이에 대한 폐해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 다만 교육열 자체는 그 이전부터 분명히 존재했던 상태이기는 하다 다만 지독한 학력인플레이션때문에 그 목표가 지속해서 높아져갔을뿐이지(...)
그리고 지금은 토익 700이니 800이니 해도 취직하기가 쉽지않은 상태가 되었다 - ↑ 앞에서 석사장교의 예를 들었지만 일반 사병의 경우에도 당시에는 대학 1,2학년때 일주일간 군사교육을 받는다는 이유로 대학생의 경우 고졸 이하에 비해 군 복무기간이 45~90일 짧았다. 까놓고 말해서 한달 먼저 입대한 고졸 선임병보다 대학 재학 후임병이 두 달 일찍 전역한다는 이야기다. 지금 군 복무중이거나 제대한 지 얼마 안된 이들이라면 선임병보다 먼저 제대하는 후임병이라는 의미가 어떻게 다가오는지 한번 생각해 보자.
- ↑ 이 문제는 산업현장에서 안전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거나 보호장구 착용에 있어서도 미숙한 부분이 많다. 우리나라가 OECD 국가들 중 산업재해 사망률 1위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보호장구를 착용했다 해도 사고 위험성은 높지만. 또한 2012년 11월 9일에 방송되었고 아주대병원 이국종교수가 출연하였던 "MBC스페셜" '골든타임은 있다. - 외상외과' 편에서 하루에 전국적으로 100여명이 사망하는 중증외상 환자 거의 대부분은 생업현장에서 다치는 경우라고 언급되었던 점과, 설령 다치지 않는다해도 이러한 직종에서 종사할 경우 보험회사의 상해위험등급에서 높은 등급을 받아 보험가입시 어느정도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문제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 ↑ 2014년 기준으로, 20, 30대의 부모님들이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를 잘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있을지 잘 생각을 해 보자. 그렇게 입시위주 교육은 계속 되었다.
- ↑ 물론 그 이전에도 추적60분이나 MBC 리포트같은 프로그램이 존재했지만 방송시기가 5공때였기 때문에 검열의 문제가 있었다.
- ↑ 문제는 당시 한국 사회가 발전 가능성이 높은 과도기에 있었다는 것이다. 2000년대 이후 인서울 대학교를 나온 이들과 그들이 비슷한 수준이었다면 지금 인서울 명문 대학을 졸업한 많은 대학생들은 왜 청년실업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386세대가 누린 특권은 그들이 당시 대학을 졸업했다는 것에서 나온 것만이 아닌, 시기가 잘 맞아떨어졌다는 단순한 운빨과도 큰 연관성이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즉 요약하자면, 역시 그들의 삶은 시기적으로 운이 좋은 것을 타고났기에 특권을 누릴 수 있었던 것.
- ↑ 노무현 정부때 와서야 주 5일제가 시행되기 시작했다.
- ↑ 이 시절에는 음력설 쇠는것조차도 이중과세라고 하며 정부차원에서 징계를 내렸던 시절이기도 하며, 1980년대 중반에 신민당 돌풍을 이유로 풀어버리기는 했지만 그때의 유산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 ↑ 오렌지족에 대한 언론보도나 과소비 타령하면서 샴페인을 일찍 터트리니까 문제다라는식의 보도가 난무했다.
- ↑ 중퇴했다.
- ↑ 정계에서 '386하면 김민석'이라 할 정도로 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386 운동권 출신의 독보적인 대표주자였다.
그 뒤에 김민새가 되었다 - ↑ 위에 신해철과 동갑이지만 4수했다. 90년대 학번이지만 거의 같은 세대에 정치성향도 386쪽이다.
- ↑ 기업인이다.
- ↑ 검정고시를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