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 합작 운동

(좌우합작운동에서 넘어옴)

1 개요

左右合作運動

좌우합작운동1946년 7월부터 1년 여간 좌파·우파세력이 합작을 통해 연대를 추진하여 통일임시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였던 운동을 말한다. 이 운동에는 중도파 세력(여운형, 안재홍, 김규식등) 인사들이 주축으로 구성되어 전개되었다. 좌우합작운동은 합작원칙 7원칙을 세우는데 성공했으나, 좌파와 우파 모두의 반발과 여운형의 암살·미군정의 지원 중단 등으로 무산되었다.

2 배경

1945년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 문제를 놓고 좌·우익 세력간의 대립이 상당히 격화되었다. (신탁통치 오보사건 참조) 좌익세력의 박헌영이 반탁에서 선회해 신탁통치 찬성 입장을 발표한 반면, 우익진영은 김구·이승만 주도로 1945년 12월부터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진행했다.

12월 27일 중도파의 김규식은 최초에는 신탁통치 반대입장을 펼쳤지만, 신탁통치 전문을 입수해 읽어본 후 반탁운동의 비현실성을 주장하였다.[1] 안재홍 역시 신탁통치 반대에서 수용으로 돌아섰다.

한국민주당에서는 동아일보 사장이기도 한 송진우가 신탁통치에 대해 '좀더 지켜보자.'라는 애매한 입장을 보이다가, 1945년 12월 29일 10시 경교장에 참석한 뒤 다음날 새벽에 서울 원서동 자택에서 배후를 알수없는 한현우에 암살되었다.[2]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일시적으로 이루어진 한민당(김성수)·국민당(안재홍)·조선인민당(여운형)·조선공산당(박헌영)의 4당 코뮈니케는 무너졌고, 이러한 신탁통치 찬반 논란은 커져만 갔다.

그리고 곧이어 1946년 4월에 제 1차 미국-소련 공동위원회(미소공위)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소련은 '모스크바 3상회의 협정지지세력만 통일 임시정부에 참여할 자격을 주어지자'는 주장을 펼친 반면, 미국은 '모든 정치세력을 통일 임시정부에 참여할 자격을 주어지자'는 주장을 펼쳐 결국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무기한 휴회되었다.

그리고 곧이어 1946년 6월에 이승만의 정읍발언과 함께 단독 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이 나타났다. 반면 민주주의민족전선등에서 '단독정부 수립운동'에 대한 규탄시위가 일어나는 등, 38선 이남에서는 좌·우익세력간의 갈등이 더욱더 심화되어갔다.

3 좌우합작 운동

해방 이후 남한내 정치성향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 이승만 계열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우파세력으로 신탁통치 반대 입장,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지향.
  • 김성수, 송진우 계열의 한민당 - 친일우파세력으로 신탁통치 반대 입장,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지향[3]
  • 김구 계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독립당 - 우파세력으로 신탁통치반대 입장, 남북 통일 정부 수립 지향.
  • 여운형(인민공화국)·김규식·안재홍등 중도 좌·우파 세력 - 신탁통치문제에 대해서는 신중한 입장. 좌우합작운동과 미소공위 재개를 통해 남북 통일임시정부 수립 지향.
  • 김원봉 계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선의용대 - 좌파 세력으로 김구와 여운형의 중간적인 입장
  • 박헌영, 허헌 계열의 조선공산당등 - 좌파세력으로 신탁통치찬성 입장. 남북 통일 (공산) 정부 수립 지향.

척봐도 임시정부는 이승만, 김구, 김원봉 계열로 뿔뿔히 찢어져 있다.

최초에 일제가 물러나며 조선을 여운형에게 넘겼는데 여운형은 박헌영, 허헌등 좌파들과 함께 인민공화국을 만들었다. 여기에 이승만, 김구를 끌여들이려 했는데 이승만, 김구는 완전히 무시한다. 이후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군이 들어오는데 하지는 열열한 우익 기독교 신자로 여운형이 만나자는 것 조차도 무시하고, 이승만이 미국에서 귀국하자 언론을 통해 그에게 복종하는 듯한 퍼포먼스를 보여 준다. 한편 친일/자본가 세력들은 동아일보의 사장 김성수, 부사장 송진우를 중심으로 한민당을 만들어서 인민공화국과 대립한다. 그러나 조선 민중은 이들이 친일세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인기가 최악이었다. 이후 각종 선거에서 한민당 이름으로 못 나오고 무소속으로 나온다. 그러다가 이승만이 귀국하자 열렬히 환영하며 사실상 이승만의 물주 노릇을 한다.
이후 김구, 김원봉이 임시정부를 이끌고 귀국하려고 하는데 하지중장이 이승만을 내세우기 위해 이들의 귀국을 막아버린다. 어쩔 수 없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 하는데 서로 자신이 먼저 귀국하려고 대판 싸우다가 결국 1차로 김구의 한국독립당 계열이, 2차로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계열이 귀국한다. 이들이 귀국하자 하지 중장의 군정은 쌩 무시하며 홀대 하는데, 이에 열받은 김구가 미군정에서 일하는 조선 사람들은 전부 출근하지 말라고 지시한다. 과연 김구의 네임벨류는 절대적이였다. 그의 지시를 듯고 미군정에서 일하는 조선인 전원은 출근을 안한다. 심지어 서울내 친일경찰서장 6명이 김구 앞에 나와 엎드려 충성을 맹세한다. 조선인 요리사와 하인들을 두고 귀족 생활하던 미군정은 굶어죽게 생겼는데 이에 깜놀하여 김구에게 파업지시를 철회해 달라고 징징거려서 이후 김구는 파업을 철회하고 이승만, 송진우등과 함께 미군정에 참여하게 된다.

이후 김구는 이승만에게 계속해서 지지의사를 표명하고 김구와 이승만은 한몸이 된다. 대표적으로 신탁통치 문제로 인해 좌우가 갈리게 되는데 이 사건으로 김구와 이승만은 열렬히 반탁 운동을 하며 극우의 중심이 된다.

좌·우익 대립이 격화되면서, 미군정의 하지 중장은 좌우를 포함하는 정치세력을 만드려고 하는데 이승만은 눈까뒤집고 반대하며 심지어 극우/기독교파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하지 중장을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한다. 이에 하지 중장은 이승만이 있으면 좌우를 포함하는 정치 세력이 안만들어 질 것이라고 여겨 그를 배제하고 중립 인사들에게 좌우 합작을 해달라고 주문한다. 중도 좌파에서는 여운형, 중도 우파에서는 김규식을 대표로 지목하는데 이들은 하지 중장과 이승만의 흑심을 깨닫고 허수아비가 되기를 거부 하였으나 끝없는 압박과 설득에 결국 좌우합작 운동을 수락한다.

중도파 세력들은 '좌·우대립이 이렇게 계속 되고 미소공동위원회가 제자리를 잡지 못하면, 남북은 결국 분단되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여운형·김규식·안재홍 등 중도파 인사들은 1946년 7월 좌우합작위원회를 수립하고 위원장에 김규식을 선출하였다.

좌우합작위원회의 인물구성을 보면 중도우파 계열은 김규식·안재홍·원세훈·최동오·김붕준, 김약수 등의 인사들이 참여했으며, 중도좌파 계열로는 여운형, 여운홍·성주식·장건상·이영·정노식·정백·이강국 등이 참여했다.

결국 중도파만 참여했지 극좌파인 박헌영, 허헌이나 극우파인 이승만, 김구, 김성수는 좌우 합작운동을 철저히 무시 했다.

좌우합작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좌·우 사상을 넘어서 '조선 반도'가 하나로 통합되어 중도적 사상의 임시 통일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를 위해서 먼저 좌파와 우파 세력들간의 연대를 시작해서 합작 운동을 실현하고, 그런 다음에 서울과 평양 간의 남북연합을 추구하며, 마지막 최종적으로 미소공동위원회를 재기시키고, 미국과 소련 등 열강을 설득하여 '통일 임시정부'를 하루 속히 추진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4 미군정의 지원과 좌우합작 7원칙

미군정은 이 과정에서 좌우합작에 간접적인 지원을 시작했다. 미군정이 주선한 우익계열만의 정치개편은 이미 한계를 드러낸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미군정은 그동안 지원했던 이승만과 김구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고, 새로운 방도를 모색하기 위해 중도파 정치인 인사 여운형과 김규식을 지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1946년 중순이 되면 여운형과 김규식을 중심으로 합리적이고 중도적인 좌우세력을 결집시키는 좌우합작이 전면에 부상하게 된다.

1946년 7월에 수립된 좌우합작위원회는 좌파세력들이 가져온 8원칙과 우파세력들이 가져온 5원칙에 입각하여 서로 절충하는 논의에 들어갔다. 그리고 설립 3개월 후, 1946년 10월 7일에 좌우합작 7원칙을 합의·제정하고 좌우대표에 의해 발표했다. (그러나 여운형은 좌익의 테러로 발표 당일 행사에 참석하지 못했다.)

좌우합작 7원칙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조선의 민주독립을 보장한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에 의하여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할것.
  • 미국·소련 공동위원회(미소공위)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할 것.
  • 토지개혁에 있어 몰수 유조건·몰수 체감 매상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여하여(유상몰수·무상분배) 시가지의 기지와 대건물을 적정처리하며 주요산업을 국유화 하여 사회 노동법령과 정치적 자유를 기본으로 지방자치제의 확립을 속히 실시하며, 통화 및 민생문제 등을 급속히 처리하여 민주주의 건국 과업완수에 매진할 것.
  •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를 처리할 조례를 본 합작위원회의 입법기구에 제안하여 입법기구로 하여금 심리 결정하여 실시케 할 것.
  • 남북을 통하여 현 정권하에서 검거된 정치 운동자의 석방에 노력하고, 아울러 남북 좌·우익 테러적 행동을 일체 즉시로 제지토록 노력할 것.
  • 입법기구에 있어서는 일체 그 권능과 구성 방법·운영 등에 관한 대안을 본 합작위원회에서 작성하여 적극적으로 실행을 기도할 것.
  • 전국적으로 언론·집회·출판·교통·투표 등의 자유가 보장되도록 노력할 것.

좌우합작 7원칙은 극도로 분열되가던 해방이후의 혼란한 정치상황속에서 좌·우익세력이 한걸음 양보해서 얻은 소중한 결실이었기에 사상과 이념을 넘어선 것에 큰 의의를 두고 있다.

4.1 반응

좌우합작과 7원칙에 대해서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과 신한민족당은 공식적으로 지지를 나타냈다. 심지어 이승만조차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김구는 좌우합작운동에 나서기보다는 관망하는 입장으로 애매하였고, 한국독립당 내부에서 조소앙은 '신탁통치안이 폐기되고 반탁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조건 하에서의 좌우합작에 다소 비판적이었으며, 신익희는 반대를 나타냈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한민당과 공산당의 반대는 무엇보다도 격렬했다.

5 좌우의 반발과 실패

f0020275_4b9a4c3dc5034.jpg
(1946년 10월 28일 <제 3특보>에 실린 좌우합작 시사만평. 극좌 세력과 극우 세력이 좌우합작을 방해하는 모습을 풍자하고 있다. 왼쪽은 여운형, 오른쪽은 김규식)

김성수를 중심으로한 한민당은 자신들이 기반으로 하는 지주들의 이익에 어긋나는 제3조(토지개혁)과 제4조 (친일파 청산)에 반대했다. 이들은 좌우합작운동이 결국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적화논리라고 강격하게 비판했다. [4]

더 강경한 자세로 비판한 쪽은 좌익 계통이었다.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은 초기에는 여운형과 좌우합작에 호의적이었으며, 1946년 초에는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1주기 추모식에도 참가하기도 했으나, 1946년 5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터지면서 미군정이 돌변하여 공산주의계열 탄압이 본격화 되어가자 돌연 급진화 되었다.

박헌영은 월북 후 좌우합작노선을 완벽하게 부정했으며, 8월에는 여운형의 조선인민당에 심어둔 프락치를 활용해 조선공산당·남조선신민당과 합당을 결의시킨다.[5] 이에 분노한 여운형은 8월 조선인민당의 당수와 남조선로동당창당중앙위 위원장(부위원장 박헌영)을 사임하고 10월 사회노동당을 창당했으며, 8월 미군정에게 박헌영의 제거를 부탁하기 까지했다.

이 시점에 이르면 박헌영은 중도파 세력들을 '미군정과 연탁한 기회주의자'라고 몰아붙이면서 비판했다. 좌우합작운동은 미제에 의해 떠밀리다시피 추진된 것이고, 좌익세력을 분열시키려는 미제의 술책이라는 논리였다. 박헌영은 좌우합작 7원칙 역시 무상몰수가 아니기에 지주의 권리를 옹호하고 미소공위 역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어긋난다며 극렬히 반대했다. [6] 박헌영이 기획한 합당정당은 그해 12월 남조선로동당(남로당)으로 결성되었다. [7]

물론 이런 와중에도 미군정의 중도 지원 행보는 한동안 지속되었다. 1946년 12월 12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8]이 구성되어 제정되었다(의장은 김규식). 이어서 미군정은 1947년 1월에는 반탁 세력에게 운동을 중지하고 미소공위 참여를 권고했다.

그러나 결국 공산당과 한민당등 좌·우파 세력들의 반대·불참으로 1947년 3월 미 군정청의 간접적인 지원방침이 잠정 철회되었고, 좌우합작운동은 이후 중도 세력들만의 운동으로 축소되기 시작했다.

다행히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위가 시작되었고, 여운형은 근로인민당을 다시 창당하며 재기를 꾀했다. 그러나 중도파의 몰락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해 7월 19일 좌우합작 운동의 구심점이자, 중도파 세력들의 중심인물인 바로 여운형이 암살되었던 것이다[9] 이로서 다시 한번 기회를 엿보던 좌우합작운동은 구심점을 잃으며 결정타를 받는다.

당일 여운형은 미국의 민정관 E.A.J. 존슨과 만나면서 그의 북한과의 관계를 해명하고 신뢰를 얻고자 했으며, 존슨은 그를 안재홍의 후임 민정장관(국무총리격)으로 임명하여 다시한번 중도파와 온건좌파를 끌어안고 이승만 등 미소공위에 반대하는 우익들을 제어하고자 했다.[10] 하지만 여운형의 암살로 이것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자세한 건 여운형 항목 참조.

곧이어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마저 결렬되어버리면서 미국이 결국 한반도 문제를 UN으로 이관하게 된다. 이로써 좌우합작운동은 좌절되어 실패로 끝나게 되고 38선 이남에 단독정부 수립안이 확정되기에 이르렀다.

1947년 12월 10일, 좌우합작위원회는 공식해체되어 실패로 끝나게 된다.

f0020275_4b83a427550a9.jpg
좌우합작 위원회 해체일에 촬영한 사진. 여운형이 그 해 7월에 암살당하자, 김규식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여운형 얼굴을 오려 맨 우측에 붙여놓았다. 귀신인줄 알고 놀란 사람 있을거다 결국 좌우합작운동은 실패하였지만 그 취지는 김규식를 통해 48년 남북연석회의로 이어진다. 하지만 김일성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것을 우려, 막판에 참석하지 않았다.

6 여담

H2O ~FOOTPRINTS IN THE SAND~의 TVA 오프닝인 <片翼のイカロス(한쪽 날개의 이카로스)>가 좌우합작운동을 상징하는 노래라는 개드립이 있다. 가사의 내용이 날개가 하나씩밖에 없는 두 사람이 손을 맞잡으면 날 수 있게 된다는 내용인데 두 날개를 좌翼,우翼으로 본다면 딱 맞아떨어지기 때문. 물론 다른 부분은 아무 관련도 없다.

디씨, 오유, 일베 등의 상반된 정치성향을 가진 커뮤니티가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서로 일치단결하여 의견을 같이할 때에도 "좌우합작"이라는 표현이 쓰인다. 자세한 내용은 위 아 더 월드국공합작 항목 참조.

좌우합작 운동으로부터 약 70년 뒤인 시간이 흘러 현대판 좌우합작조선일보가 JTBC와 한겨레를 인용하고, 한겨레가 조선일보와 TV조선을 인용하는 한국언론사(史)에서 매우 낯설고 상징적인 순간이 오게 된다. 대표적인 우익의 언론과 좌익의 언론이 협력하여 최순실 게이트를 보도하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이 낯설고 상징적인 이유는 보수 언론이었던 조선일보[11]가 등 돌리고 대부분의 보수 언론들이 박근혜를 비판하는 보도를 하게 된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1. 김규식의 비서로 지낸 독립운동가 송남헌의 증언에 의하면 '신탁·반탁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하면 새로운 임시정부를 구상하느냐? 이것이 모스크바 3상회의의 주요 원문이었는데, 동아일보에서 이를 왜곡 보도하여 신탁통치안을 크게 부풀려놓았다.'고 한다.기레기
  2.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는 고하의 암살배후는 임시정부계열이라고 주장한다.
  3. 사실 한민당은 스스로 오보를 수정하거나 4당 코뮤니케에 협력하는 등 약간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당시에도 탁치에 찬성한다고 비난 받았을 정도. 이승만과 한민당은 한몸으로 인식되었지만 이승만이 정권을 잡은 후 장관자리를 하나만 주자 동아일보를 통해 이승만을 맹렬히 비난하며 결별한다.
  4. 좌우합작운동은 결국 적화될거라는등의 논리는 뉴데일리(...)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참조바람.
  5. 여운형의 최측근인 이여성 등도 공작에 따라 이때 함께 넘어가버렸다.
  6. 이런 입장은 북조선의 김일성 역시 두말할 필요 없었다. 여운형은 김일성·김두봉의 지지를 기대했으나 좌우합작운동은 북조선에서는 시도조차 되지 않았다.
  7. 남로당은 합법정당으로 인정되었으니 박헌영은 이를 바탕으로 다시 상황을 반전시키고 미군정의 탄압을 피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8. 미군정의 과도 입법기구를 말한다. 민선 45명·관선(미군정 선발) 45명으로 선발되었으며, 어려움 속에서도 <남조선과도입법의원법>·<하곡수집법>·<미성년자노동보호법>·<부일협력자·민족반역자·전범·간상배에 대한 특별조례법률>을 제정했다.1948년 5월 10일 실시된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 이후 9일째 되는 날인 1948년 5월 19일 과도정부법률 제12호에 의하여 해산하였다.
  9. 좌우합작운동을 계기로 김규식·여운형·안재홍 등 중도파 인사들은 수차례 극우세력과 극좌세력으로부터 테러와 위협을 당하고 있었다. 여운형 역시 수차례의 암살기도를 피한 상황이었다. 여운형의 암살에는 여러 배후가 추정되나, 확실한 건 극우와 극좌(남로당) 모두 그의 장례에 의례적인 조의조차 보이지 않았다.
  10. 당시 미군정은 이승만의 언론플레이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이에 미군정은 차라리 우호적인 여운형을 민정장관으로 삼고 임시정부 수립을 앞당기며 차관을 제공하고자 하였다.
  11. 보수언론이지만 사실상 조선일보 계열과 청와대와의 관계는 좋지 않은편. 조선일보도 어느 시점부터 청와대와 맞서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