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생육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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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위해 늦게 결혼하고 계획생육을 합시다!"[1]


"국가계획생육정책을 안정시켜 조화롭고 아름다운 가정을 함께 만듭시다."[2]

計劃生育政策

1 개요

1978년부터 시행된 중국의 국가규모 산아제한책. '2자녀 정책'이라고 하기도 한다. 사상 최대의 인구조절정책. 한국에서 1970년대부터 펼친 "가족계획정책"의 대륙판인데, 대륙의 스케일과 공산당의 강제력이 겹쳐서 한국의 비슷한 정책에 비해 국내외적으로 훨씬 거대한 영향을 끼쳤다. 과거엔 1자녀 정책으로도 불렸지만 현재 1자녀 정책은 폐지 되었고, 2자녀 정책이 시행중이다.

2 역사

원래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이 인구라는 것은 고전경제학의 기본이다. 그렇기 때문에 19세기 각국은 인구증가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특히 독일은 적극적으로 이를 장려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근친상간에 의한 출산도 예전에는 교회법 때문에 호적에서 자녀로 인정이 안되었으나, 독일은 최초로 이를 인정했을 정도. 일본도 이를 본받아 메이지 시대에 다산정책을 장려했고, 이 두 후발국가는 늘어난 인구로 세계적 열강이 되었다.

이는 독일보다 늦게 산업화를 시작한 스탈린 시기의 소련에서도 그러했다. 더구나 스탈린 시절 말기에는 독소전쟁 때문에 소련 인구는 거의 3천만이 사망했고, 노동력이 부족하여, 수백만 추축국 포로를을 10여년간 억류하면서 전후 복구사업에 투입했을 지경이었다. 그러니 소련에서는 다산정책이 국가적인 정책이 되었다. 그런데 중공정권은 수립 직후부터 사회주의 선배국이었던 소련을 모방했는데, 당시 노동력이 부족했던 소련에서 벌어지던 여러 다산정책도 똑같이 시행하였다. 대표적으로 소련에서 다산을 한 산모에게 수여하던 모성영웅훈장을 중국에서도 수여하기 시작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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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적 인구. 명나라 시절까지 1억근처에서 머무르다가 청나라 시절 평화가 계속되고 농업생산력이 증가하자[3]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이미 청나라 말기에는 4억에 이르렀다.

바로 위에 서술했듯이 중국에서는 명나라 말기까지 1억정도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평화가 정착되고 농업기술이 발달한 청나라 시절 인구가 폭증하여 약 4억에 이르렀다. 20세기 전반에 중국의 혼란 때문에 인구증가 속도는 어느정도 둔화되었어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엇다. 1950년대 중공정권 수립 이후 실시한 최초의 인구 센서스에서는 총인구가 5.8억(약6억)을 기록하고 있었다.

마오쩌둥 역시 '人多力量大' 즉 사람이 많으면 국력도 크다고 말하며 다산을 장려하였다. 물론 이 와중에도 대약진 운동에서 마오쩌둥이 주도한 병크(토법고로제사해 운동)로 식량 생산이 급감해 1949년 5억에서 1959년 6억으로 늘어난 중국 인구 중 상당수가 아사하는 재앙도 발생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량 생산이 어느정도 받쳐주었기[4] 때문에 중국의 인구는 약 10년마다 1억씩 불어나 1970년대 말에는 9억에 이르렀다.

그러자 노동인구 급증과 함께 식량 생산이 한계에 다다르는 등(다만 이 시기의 식량 문제는 생산성 문제가 컸다.) 부작용이 생기기 시작했고, 뒤늦게 심각성을 깨달은 중국 정부에서 산아제한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70년대 당시엔 2자녀이긴 했지만, 이 정책의 영향으로 1970년 5.8명이던 출산율이 79년에 2.8명으로 급속히 줄어들기는 했다. 하지만 산 넘어 산 60년대 베이비붐 세대들이 막 아기를 낳으려는 시기가 다가오자 출생아 수의 감소가 어려워질 것을 염려한 중국 정부에선 1980년부터 아예 한족들에게 1자녀만 낳을 것을 강제하며 강압적으로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5][6]

사실 작은 땅에 많은 인구를 가진 한국의 입장에선, 중국은 땅도 엄청나게 넓으니 아이가 많이 태어나도 별 문제가 없지 않나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중국은 우리나라 못지 않게 인구 분포가 불균형해서 (또 서부 지역이나 네이멍구 같은 데는 사람이 살기가 어려운 환경이므로) 평야나 해안 지역에 인구가 주로 몰리는 문제가 있다. 또 한국도 1962년부터 1996년까지 산아제한 정책을 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개발도상국에 지나치게 높은 인구증가는 경제 발전을 늦추게 된다.[7][8] 그래서 뒤늦게 이러한 극단적인 정책을 강행하게 된 것.

3 1자녀?

영미권에서는 one-child policy라고 번역하므로 일반적으로 반드시 아이를 하나만 낳아야 한다고 생각하곤 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출산율이 1.0보다 많을 수가 있을까? 사실 1자녀라 해도 반드시 1명만 낳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즉, 예외사항이 있었는데 우선 도시에 사는 부부 양쪽이 외동이면 아이를 2명 가질 수 있다. 또한 농촌에서는, 일손이 부족하고 또 아무래도 남아선호사상이 높아서 그런지, 첫째가 여아였을 경우 둘째까지 낳을 수 있다. 한번 더 찬스?

그리고 소수민족에 대한 일종의 보호책으로 보통 2자녀 이상을 가질 수 있다. 중국정부 공인 55개 소수민족 중에는 인구수가 수천 명에 불과한 민족도 여럿 있기 때문에, 이들에게 1자녀만을 갖게 한다는 것은 사실상의 절멸책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소수민족 보호를 위해 도시에 살고 있을 경우는 2명, 농촌지역은 4명까지도 허용되었다. 이렇기 때문에 위구르족은 이슬람교 특유의 다산선호와 겹쳐 인구수가 엄청나게 불어났다. [9]

벌금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한 사람도 까짓거 못 낳을건 없다.[10] 유명한 중국 감독인 장이머우는 2013년 아이를 몰래 7명을 낳은 게 밝혀져서 748만 위안(약 12억원)에 가까운 벌금을 냈다.(…) 저출산 국가에선 도리어 유공자라지만 여기는 중국이니까 어쩔 수 없지 우리나라가 봐도 많이도 낳았다. 거기다가 아예 제한을 풀어버린 지역(예를 들면 상하이[11])도 있기 때문에 대략 1자녀 정책을 적용받는 가구의 수는 총가구의 40%에 못미친다. 게다가 쌍둥이의 경우는 의도적으로 둘째를 만든 게 아니므로 불이익 대상에서 제외된다. 1타2피 그래서 중국 여성들이 부작용을 감수하고 '쌍둥이 낳는 약'을 구해서 먹는 사례도 있었다(…).

또한, 예전에는 몰라도 요즘같으면 둘째 만든다고 해서 낙태시키거나 감옥에 넣는 것도 아니고[12] 벌금을 내거나 이런저런 불이익이 주어지는데, 문제는 서민층에는 이러한 불이익이 치명적이지만 상류층은 그깟 벌금 내고말지 뭐 하고 둘째를 낳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무전무자 유전유자 또한 고위급 관리들이 둘째를 가진다고 하면 슬쩍 눈감아주는 경우도 있는지라. 다만 공무원, 교원들의 경우는 둘째를 낳으면 벌금은 물론이고 직장을 잃을 각오도 해야 한다. 그래서 위장이혼(…)을 하는 경우도 많다고...

정부 몰래 낳으면 되지 않느냐는 이야기가 있는데, 전체주의 국가의 사회통제 정책은 그렇게 허술하지 않다. 이렇게 호적에 올리지 않고 몰래 임신하여 아이를 낳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일단 1자녀를 가진 여성은 무조건 정기적으로 보건소에 출두하여 신체검사를 받아야 한다. 운 좋게 신체검사를 통과하여 아이를 낳았다고 한들, 호적에 올리지 않은 아이는 절대로 학교에 입학할 수 없기 때문에 제대로 성장하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1자녀정책을 위반하고 출생하여 호적에 오르지 못한 인구는 문명화가 거의 안 된 농촌에서나 존재하는 형편이다. 하지만 이렇게 호적에 오르지 않은 수는 많아야 수백수천만에 불과할 것이다. 이것도 따지고 보면 많은 거지만 중국 인구가 워낙 많다보니...

엠팍과 같은 혐중성향이 짙은 커뮤니티에서 중국의 실제 인구가 15억이네 20억이나 하는 이야기가 돌고 있지만, 이는 중국의 중앙집권제의 전통을 간과한 주장이다. 중국의 중앙집권 전통은 진나라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역사적으로 명나라때는 보갑제이갑제로 말단의 가구까지 행정력을 투사했고, 이런 보갑제-이갑제는 장제스의 중화민국 시기까지 해체되지 않고 계속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에 들어와서는 이는 폐지되었지만, 더욱 정교해진 당조직과 행정조직을 이용해 중앙의 명령을 말단의 각 가정까지 전달하고 있다. 중국식 중앙집권이나 관료제의 전통은 수천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중앙은 지방을 철저히 장악하고 있다. 왜 중앙에서 책상머리로 입안된 대약진운동이 겨우 1년만에 중국 전역에서 철저히 실시되었다가 커다란 문제를 야기 했는지 상기해보자.

4 문제점

일단 국가가 개인의 사생활에 이렇게 깊숙이 개입하는 것 자체가, 물론 이유와 명분이 있었고 여러 배려를 했다지만,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극단적인 국가주의를 추구했던 나치즘과 유사해질 위험도 있다. 산아제한 정책을 쓴 다른 대다수 국가들이 너무나 당연하게도 강압책이 아닌 유도책[13]을 썼다는 점에서, 중국의 이 정책은 인권 침해의 소지가 높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요새는 기를 여유가 없어서 스스로 안 낳지만 자식 기를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정부가 출산을 제한한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또 경제적으로도 고령층이 비대해지고 노동인구가 감소하면서 아직 한창 개발도상국인 중국을 급격한 고령화사회로 인도하게 되었다.[14] 그리고 중국의 인구가 너무 많다보니 이민으로 노동력을 때우기에 여의치 않은점도 문제이다. 물론 중국이 노동력 유치에 나선다면 한국, 일본, 대만, 러시아와의 경쟁을 피터지게 해야되기 때문에[15]동북아 전반의 노동환경이 급속히 좋아질수는 있기는 하다

인권 측면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는 게, 벌금낼 형편이 안되는 하류층에선 자식을 더 가지기 위해서 신고 안하고 몰래 임신했다가 산이나 숲에서 출산해버리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이 경우 자식은 당연히 등록이 안되는 유령인구가 되는데 이들은 인신매매를 비롯한 각종 인권유린 범죄의 표적이 되었다. 그리고 중국 실제 인구 15억 이상설에 힘을 보탰다.

거기에 동아시아 특유의 남아선호사상 문제로 여아낙태와 영아살해 또한 심각한 문제로 남아있다. '무작정 1명만'이었을 때는 특히 영아살해가 심각했다. 1980년대 이후 출생자의 경우 성비가 최대 121:100까지 벌어지기도 했으며 2010년대 들어서 서서히 완화되어가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보면 성비 불균형 문제가 심각하다보니 신부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결혼을 못 하는 남자가 대거 생겨났으며 특히 농어촌 지역에서 노총각 문제가 심각하다.

또한 1자녀 정책은 한족에게만 한정된 정책이라(정확하게는 인구 1,000만 이상인 민족인데, 조건을 충족시키는게 한족과 좡족, 만주족, 후이족, 위구르족[16]등등 몇 없다. 더군다나 만주족은 거의 한족에 동화된 상태이다.), 한족들의 정부에 대한 불만/소수민족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위구르족이 중국 내지에서 치안적으로 상당히 문제를 일으킨다는 점이 체험담으로 자주 거론되기 때문에, 인구가 줄어든 한족은 "주류 민족"의 지위를 빼앗기고, 소수민족의 밥이 될 것이라는 불안감까지 가지고 있다. 굳이 이런 피해망상적인 생각이 아니더라도, 민족 불평등으로 생각하고 "왜 주류 민족인 한족이 오히려 차별받냐" 반발하는 여론이 만만치 않다. 물론 인구가 지나치게 비대해진 문제는 소수민족 책임이 아니므로, 약간 억지스러울 수도 있지만.

5 성과

만약에 계획생육을 실시하지 않았다면 중국의 인구는 2010년 이전 15억을 넘었을 것이라는데 인구학자들의 의견은 일치한다. 인구가 저렇게 많으면 상술했듯 경제발전에 도리어 짐이 될 수도 있고 재화의 분배를 둘러싸고 정부에 부담을 줄 수 있기 때문에 긍정적인 부분이 있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다. 무리수는 따랐지만 어쨌든 중국 인구증가에 제동을 거는데는 성공했기 때문. 이렇게 인구증가 압력이 덜해지자 중국의 가계 저축율은 끊임없이 늘어나 세계 최고수준이며, 이런 저축율을 바탕으로 한 자본형성으로 중국은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1970년대말 가까스로 식량자급(100%)을 달성한 이후 현재도 110%의 식량자급률을 유지하고 있으며(한국은 25%에 불과하다.) 만약에 계획생육으로 인구증가를 늦추지 않았다면 중국은 아무리 식량증산을 실시했던들 북한처럼 기근이 일반적인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인도의 경우와 비교해봐도 중국의 성과는 눈에 띄는데, 1960-70년대 국민회의 집권 시절 인도도 인구증가의 압력에 경제 위기를 느끼고 가족계획정책을 실시했다. 이것은 중국처럼 강압적인 것이 아니라 한국처럼 캠페인, 인센티브, 피임교육 등의 매우 온건한 것이었다. 그러나 강제력을 동원하지 못한 인도의 가족계획정책은 실패로 끝났고, 뿐만아니라 이에 대한 반발때문에 국민회의는 정권을 잃었고 그 다음부터는 이런 정책을 꺼내는 것은 인도에서는 정치적 자살행위로 간주되었다. 현재도 산아제한 정책을 시행했지만 출산율 하락 속도는 더뎌서 중국의 출산율이 이미 70년대 말에 2명대로 진입했고 93년에 1명대로 떨어진데 반해, 인도의 출산율은 2000년대가 들어서야 2명대로 떨어졌다. 인도는 인구도 가파르게 증가하여 2020년대에 인구로는 중국을 넘어설 것이라고 예상되고 있다.

6 1자녀 정책 폐지

2010년대부터 국책연구기관에서도 1자녀 정책을 폐지하고 2자녀 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2015년부터 중국의 생산가능 인구(만 15~64세)가 급속히 줄기 때문에 오래 지나지 않아 폐지될 거란 전망이 우세했다. 그러다가 시진핑 정부 들어 2013년 11월, 한 자녀 정책을 다시 완화해 앞으로 부부 중 한 명이 독자이면 두 자녀까지 허용하는 쪽으로 바꾸기로 했다. 중국정부는 이 제도를 실시한 뒤 수년 뒤 '두자녀 정책'을 도입할 것으로 전망되어 사실상 계획생육정책은 폐지 수순에 들어갔으며 2015년 10월 29일에 시진핑이 1자녀 정책의 완전폐지를 시사했고 2016년에 완전히 폐지되었다.기사 참조. 일단 2자녀까지는 얼마든지 허용되는 셈이 된 것. 2010년대 들어 당원이나 공무원같은 경우를 제외한 일반인의 경우에 이 제도는 유명무실해지고 있으며, 인권유린 시비를 불렀던 강제낙태제도는 완전히 없어졌고, 벌금으로 대체되고는 있지만, 일부 성에서는 그 벌금도 안내고 버탱겨도 되는 수준까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녀를 3명 이상 낳으면 여전히 낳은 아이의 호적등록이 거부되는 등의 산아제한 정책은 남아있다. 또 일반인들은 덜해도 당원이나 공무원의 경우엔 여전히 둘째를 가질 경우는 출당되거나 불이익을 당할 각오는 해야한다. 그리고 호적에 없는 아이들은 독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혜택을 못 받는 건 당연하고. 그런데 이번에는 2자녀 정책을 시행하면서 한자녀 정책 모범지역으로 선정된 지역에서 공무원들에게 자녀 두명을 낳을것을 강요하는 경우도 빈번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산아제한정책을 폐기한다해도 이미 시기가 너무 늦어서[17] 얼마나 출산율이 오를지는 미지수이며 이러다가 한국, 일본, 대만, 싱가포르의 길을 따라가는거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많다.[18] 산아제한을 완화했는데 생각보다 성과가 영 신통치 않다보니[19] 그 동안 관료들의 대책이 너무 안이하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고, 산아제한 완화이전에 둘째 자녀를 낳은 부부들이 지방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거는 일도 급증하였다.

2016년 들어서 헤이룽장 성에서는 부분적 3자녀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헤이룽장 성 일대의 고령화가 한국수준으로 심각해서 나온 고육지책으로 보인다. [1]
  1. 1970년대 후반 계획생육정책 초기의 포스터. 문화대혁명 직후이기 때문에 문혁이 끝났지만 문혁스타일이 포스터에 짙게 배어 있다. 아빠가 총은 왜 들었지?
  2. 훨씬 온건해진 2000년대 계획생육 포스터.
  3. 생산력 뿐만 아니라 아메리카에서 감자, 고구마, 옥수수 등 고산량 농작물 재배도 보급되었다.
  4. 대약진 같은 병크만 알려져 있지만 중국의 식량 생산은 그 시기를 제외하면 끊임없이 늘어나고 있었다.
  5. 사실 한국도 비슷한 시기에 1950년대 중반-60년대 초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들이 아기를 낳을 시점이 되고, 인구 4,000만이 넘는다는 얘기가 나오고 결국 인구가 4,000만명을 넘어서자 빨리 출산율을 줄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에(일설에 의하면 전두환 대통령이 인구당담 관료들을 심심하면 두들겨 팬다는 흉흉한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고.) "둘도 많다",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 "셋부터는 부끄럽습니다" 식의 자극적인 캠페인 표어를 쏟아냈다. 여하튼 그렇게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1986년에 출산율을 1.5명대까지 떨어뜨리는 데에는 성공하기는 했다 .
  6. 다만 중국은 당시 한국과 비슷하게 하나씩만 낳자는 정책을 추진했음에도 당시까지만 해도 농촌인구가 절대다수여서 실제 한자녀 정책을 적용받는 가정의 수가 생각보다 적고, 편법을 쓰거나 벌금을 물어서라도 아들을 낳으려고 하는 경우가 위낙에 많았기 때문에 출산율 저하속도는 한국보다 느려서 90년대 들어서야 출산율이 2명아래로 떨어졌다 그래서 80년대 중후반생들의 인구 비중이 의외로 높아서 1970년대 후반 생들보다도 수가 많다.
  7. 일단 자녀 양육비용이 늘어나고, 그로 인해 가계당 잉여자금이 줄어들어 저축이 늘어나지 않는다. 개발도상국에서 국내투자자금을 조성하는 데 필수적인 저축이 정체 상태라는 것은 치명적인 문제다. 게다가 그 자녀 양육비용이 효율적으로 쓰이는 것도 아닌 것이, 그 많은 자녀들 중에서 제대로 중고등교육을 시킬 수 있는 게 얼마나 될까. 자녀 둘이면 둘 모두 대학 보낼 수 있는 것이, 자녀 다섯이면 하나 대학 보내기도 벅차게 된다.
  8. 당시 한국에선 아파트 분양자들 대상으로 불임수술(…)을 하면 분양권을 우선으로 주기도 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았지만, 문제는 잠재적 인구 감소까지는 인지하지 못하여 이러한 산아제한 정책을 너무 오래 끌었다는 것. 만약 80년대에 풀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96년까지 유지되고 폐지되었다. 덕분에 한국은 이제 도리어 노동인구 감소를 걱정해야 되는 저출산 국가가 되었다. 당시의 인구증가 문제가 그만큼 심각한 과제였다는 반증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이로 인해 새로운 과제가 생길 것이라는 데까지는 예상이 못 미친 듯하다.
  9. 다만 위구르족 지역이 워낙 경제가 발전되지 못한 지역이다 보니, 이렇게 인구압력이 팽장하자 그 불만이 이슬람 원리주의나 독립열기로 확산되고 있다.
  10. 다만 돈은 있는데 벌금이 좀 부담스럽거나 공산당 하는 짓이 더러워서(…) 못 참은 사람들은 미국이나 홍콩, 마카오원정출산 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중국 출신 이민자가 많은 덴 이유가 있다
  11. 이 지역은 한국보다 출산율이 낮아서 어쩔수 없이 풀었다. 하지만 풀었는데도 효과는 별로 없어서(…) 여전히 합계 출산율이 1.0명을 밑돌고, 아이를 갖지 않은 가정이 100만 가구 이상이나 된다는 후문이 있다.
  12. 정책 시행 초기에는 임산부를 가축 축사(!)로 끌고 가서 강제로 낙태시켰는데, 시행 이후에도 사람들이 정책을 따라주지 않아서 공포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되었던 것이다. 현재 강제 낙태는 표면적으로는 시행되지 않고 있다. 다만 2012년 산둥성에서 강제 낙태를 실시하다가 엄청난 항의를 받은 바 있다.
  13. 상술한 불임시술자에게 아파트 분양권을 먼저 준다던가 등.. 즉, 몇 명을 낳든 자유이지만 적게 낳는 사람한테 혜택을 주는 식이다.
  14. 2014년 중국에서 65세 이상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은 9.6%인데, 아직 중국의 국민소득이 8000달러 수준이고 빈곤한 인구도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심각하다.
  15. 농담같지만 러시아는 1990-2000년대 생의 출생이 크게 저조하고, 일본은 저출산으로 인구가 줄어들고 있는판이며 한국과 대만은 2000년대 이래로 초저출산 국가이다.
  16. 이 둘은 건드리기가 상당히 껄끄러운 관계로 지역에 따라 제대로 지켜지지 않기도 한다.
  17. 중국은 1993년부터 출산율이 인구 대체수준을 밑돌았다. 이는 일본보다 19년, 한국보다 10년이 늦은것.
  18. 이 세나라는 산아제한을 폐지하고 출산장려정책을 도입했는데도 출산율이 별로 오르지 않았고 오히려 출산율이 산아제한 시행때보다 떨어졌다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싱가포르에 경우에는 산아제한 폐지 초기에는 효과를 보는듯 했지만 교육정책으로 인한 사교육비의 상승이라는 벽을 넘지 못하고 2000년대 이후에 출산율이 크게 떨어졌다.
  19. 2014년 기준으로 출생아수가 47만명 정도가 증가했다. 얼핏보면 괄목할 만한 성과로 보일 수 있지만 애초에 한국과 중국 간의 인구 격차를 생각해 보고(13억 7000만 VS 5000만) 한국 기준으로 대입한다면 증가 수치는 2만명도 채 안 되는 수준이다. 그리고 2015년의 출생아 수는 오히려 2014년보다 줄어들었다.